ANMELDEN유리는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청소 예약 앱에 올라온 일정표엔 루체빌 1603호가
오늘도 정각 3시로 표시되어 있었지만,
이현의 메시지가 그보다 조금 더 일찍 도착했기 때문이다.
[이현]
유리님, 오늘 청소 전 30분만 시간 괜찮으실까요?
근처 카페에서 잠깐만요. 아주 중요한... 음, 업무 관련 회의입니다
유리는 그 메시지를 읽고 세 번이나 다시 읽었다.
‘업무 관련 회의’라는 말 뒤에 붙은 이현의 이모티콘 없는 문장은
왠지 모르게 조심스럽고, 또 그만큼 다정하게 느껴졌다.
“업무 회의가 카페라니...근데 왜 웃음이 나지.”
고개를 숙여 조심스럽게 미소 지으며, 그녀는 평소보다 조금 다른 옷을 꺼냈다.
청소하기엔 살짝 아까운 옅은 회색 셔츠,
그리고 한 번도 안 써본 립밤.
특별하지 않지만, 그녀 나름의 조용한 준비.
카페는 이현의 회사 근처 골목 안쪽,
햇살이 길게 들어오는 창가 자리가 조용히 비워져 있었다.
“여기, 맞으세요?”
유리가 조심스럽게 들어서자,
이현은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오셨어요. 생각보다... 더 일찍 오셨네요?”
“...아, 저도 사실 좀 일찍 도착했는데, 근처에서 망설이다가요.”
그 말에 이현은 작게 웃었다.
그녀가 망설였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사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에요.”
그가 컵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을 꺼냈다.
“기념일이라든가... 그런 건 아닌데요,
저희 회사가 첫 출시한 게임이 오늘 딱 2년 됐어요.
그날 혼자 야근하다가... 정리도 못한 사무실에서 컵라면 먹고 있었거든요.
근데 지금은 이렇게, 누군가랑 커피 마시고 있으니까... 이게 좀 특별해졌네요.”
유리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말을 들었다.
그가 말하는 '누군가'에 자신이 포함된다는 게,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머물렀다.
“그래서... 그냥요. 그 자리에 유리님이 계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용한 목소리. 달지 않은 커피향 사이로 흘러나온 진심은,
그 어떤 고백보다도 따뜻하게 스며들었다.
“유리님은... 평소에 청소 말고 어떤 시간 좋아하세요?”
그가 물었고, 유리는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창문 열고 음악 틀어놓고, 햇빛 들어오는 바닥에 앉아 커피 마시는 시간.
그게 제일 좋아요. ...지금, 약간 그런 느낌이네요.”
그 말에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지금 그 순간이었다.
햇빛이 바닥에 깔리고,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고 앉은 지금 이 순간.
말은 많지 않았지만, 공기엔 감정이 고요하게 떠 있었다.
카페를 나서려는 순간, 이현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유리님.”
“네?”
“다음에도요, 청소 말고… 이렇게, 아무 이유 없이
뵙고 싶을 때가 생기면… 그때도 괜찮을까요?”
그 말은 더듬거나 머뭇거리지 않았다.
조용하지만 분명한, 그리고 너무 성급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설레는 제안이었다.
유리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럼, 다음엔 제가 커피 살게요.”
청소가 아닌 장소, 업무가 아닌 이유,
그리고 처음으로 마주한 둘만의 시간.
유리는 느꼈다.
오늘이, 그의 공간이 아닌 그의 삶 안으로 살짝 발을 들인 날이라는 걸.
그곳엔 아직 먼지가 많지도, 정리가 필요하지도 않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가장 마음이 갔던 장소였다.
* * * * * * * * *
유리는 오늘도 정해진 시간보다 5분 일찍 루체빌 1603호에 도착했다.
마치 시계처럼 정확하게 열리는 현관문.
하지만 오늘,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그녀는 잠시 멈춰 섰다.
“...음, 냄새가 바뀌었네요?”
이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난번에 유리님이 쓰셨던 라벤더 시트러스 향이 생각나서요.
찾아봤는데, 똑같은 건 없더라고요. 비슷한 계열로 골랐어요.”
유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말이 어딘가 마음 깊숙이 살짝 박혀들었다.
그가 향을 기억하고, 찾아보고, 공간을 바꾸기까지 했다는 사실이.
그건 단순한 고객의 관심이라고 보기엔, 어딘가 따뜻했고 조금 설렜다.
청소를 시작하려다,
유리는 또 다른 걸 눈치챘다.
주방 테이블 위, 작은 컵받침 두 개.
바다색 줄무늬가 들어간 코스터였다.
그건 그녀가 예전에 청소 영상에서 사용하던 것과 너무도 비슷했다.
“이거... 혹시 새로 사신 거예요?”
“네. 지난번에 커피 마시다 컵 자국 남았던 게 생각나서요.
그 영상에 쓰셨던 거랑 비슷한 디자인이더라고요.”
유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자신의 SNS를 보는 것도,
그걸 기억하고 따라오는 것도 전혀 몰랐다.
그런데 그 사실이, 이상하리만큼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청소를 이어가려던 유리는 마지막으로 리빙룸 한가운데서 멈췄다.
조용히 흘러나오는 음악.
들어본 적 없는 노래였지만,
피아노 선율이 잔잔하게 공간을 채웠다.
“이 곡, 예쁘네요.”
“그쵸? 유리님이 예전에 말씀하셨던 그 말 있잖아요.
햇빛 들어오는 방, 바닥에 앉아서 커피 마시고 음악 듣는 시간.”
“...기억하셨어요?”
“기억에 남아서요. 그래서 오늘은 유리님 시간에, 제 공간을 조금 맞춰봤어요.”
그 말에 유리는 손에 든 분무기를 놓칠 뻔했다.
이현은 당연하단 듯 덧붙였다.
“오늘도 청소해주셔서 감사하지만… 청소하지 않는 순간도 예쁘시니까요.”
*유리는 아무 말 없이 스팀기로 창가 먼지를 밀어내며 조용히 생각했다.
'이건, 분명히 그냥 고객과 청소 전문가 사이의 예의를 넘은 거야.'
그는 말없이 티를 내고 있었고,
그 티는 어쩌면 작은 배려를 가장한, 분명한 마음이었다.
문득, 그가 그녀를 위해 골랐을 향기,
커피 받침, 음악을 떠올리자 마음이 조용히 떨렸다.
‘나도… 그 마음, 조금은 정리해야 할 때인가.’
청소를 마친 유리는 말없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이현에게 다가가 말했다.
“오늘은 커피 마시고 가도 돼요?”
“...물론이죠.”
그 대답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어요’라는 말 같았다.
둘은 아무 말 없이 그 바다색 코스터 위에 놓인 머그잔을 마주하고 앉았다.
공간은 깨끗했고, 마음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지만 그저 지금 이 시간이, 아주 좋았다.
문 앞에 앉아 있던 이현은 어느 순간, 누군가의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낯익은 실루엣.길게 풀어 내린 머리카락. 얇은 트렌치코트. 그리고 작은 숨소리. 유진이었다.그녀는 천천히 이현에게 다가왔다.그 눈빛은 이상하게 차분했다.울지도, 웃지도 않는 얼굴."찾을 줄 알았어요."유진이 말했다.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왜 이렇게까지 하세요.""왜 유리 언니만 봐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봤다."저도… 대표님을 좋아했어요."말끝이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말을 이었다."처음부터요. 처음 출근하러 왔던 날, 처음 인사했을 때부터…""나는, 언니처럼 조심스럽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라도"이현은 그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유진 씨."짧게, 단단하게."그날 밤, 전부 기억나요."유진의 손끝이 떨렸다."알아요. 저였다는 거…""근데, 그래도 괜찮았잖아요.""그래도,나를 안아줬잖아요.""그래서 나는…"이현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착각이었어요.""나는 유리 씨를 사랑합니다.."그 말은 잔인했다.하지만, 더 이상의 오해를 남기지 않으려면 지금 말해야 했다."유리 씨를, 그 사람만을 사랑했어요.""그 얼굴이 아니라, 그 사람이었어요.""그래서, 지금 여기 없는 거겠죠.""나를 알아보지 못한 사람을, 그 사람은… 용서할 수 없을 테니까."유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잠시 후, 그녀는 한 발 물러섰다."알겠어요."짧은 대답. 담담한 눈빛."그래도 후회는 안 할 거예요.""그 순간만큼은, 대표님을 안고 있었으니까."그리고 유진은 돌아섰다.트렌치코트 자락이 흔들렸다.밤바람이 조용히 그녀를 감쌌다.아무 말도 없이. 아무 눈물도 없이. 그렇게 유진은 사라졌다.이현은 벽에 기댄 채 천천히 주저앉았다.손끝이 떨렸다.심장도, 생각도, 모든 게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남은 건 오직 하나였다."유리 씨…"그녀를 찾아야 했다.
방 안엔 시계 소리만 가득했다.짹짹거리는 새소리도, 핸드폰 진동도, 누군가의 말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그녀는 작은 원룸에 머물고 있었다.평소엔 일하러 잠깐 머무는 공간이었지만,지금은 유일하게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이었다.커튼을 반쯤 닫고, 창을 열었다.기대 앉은 유리는 창밖 골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머릿속은 생각으로 가득했지만, 이상하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조용하네.”그녀가 속삭였다. 그 말조차도 허공으로 흘러 사라졌다.테이블 위엔 하루 전까지 쓰던 청소 장비가 그대로 있었다.구겨진 장갑, 정리하지 않은 천들, 방전된 무선 청소기.유리는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장갑 하나를 들었다.그 장갑은, 이현의 사무실을 청소했던 날 처음 껴봤던 것이다.그의 책상 옆에 쌓여 있던 먼지, 정리되지 않은 서랍,그리고… 조용히 지켜보던 눈빛.그 모든 게 지금은 먼 기억 같았다.휴대폰은 하루 종일 진동조차 울리지 않았다.그녀가 알림을 꺼놨기 때문이었다.문자를 보지 않아도 전화가 와도 받지 않아도그 사람이 자신을 얼마나 애타게 찾고 있을지 사실은 다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그냥, 버티고 싶었다.“지금은…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아.”낮이 지나고 해가 기울어가면서,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커피포트를 켜고, 작은 머그에 물을 붓고, 어깨에 걸쳤던 담요를 툭 떨어뜨렸다.거울 앞에 섰다.거울 속 그녀의 얼굴은 분명 유진과 같았다.그토록 많은 사람이 헷갈려 하던 그 얼굴.심지어, 그 사람조차도. 그게 분했다.아팠고, 무서웠다.‘내가, 그 사람이 안아준 얼굴이었을까.아니면 그냥, 그 얼굴이라서였을까.’그녀는 그날 밤 이후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눈물보다 깊은 상처는, 오히려 더 조용히 사람을 잠식했다.그저 먹지 않았고, 자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밤이 깊어지자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문자함엔 이현의 메시지가 여럿 도착해 있었다.“유리 씨, 괜찮으세요?”
“사랑은 가까워질수록, 더 뚜렷해지는 진짜를 요구한다.”햇빛이 창문을 타고 들어왔다.커튼 사이로 퍼지는 아침빛은 유난히 따뜻했지만, 방 안은 적막했다.이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머리가 무거웠다. 몸도, 마음도 이상하게 둔했다.옆에 누운 사람의 실루엣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긴 머리카락, 하얀 목덜미, 그리고 이불 위로 드러난 맨 어깨.그는 순간 미소 지으려다, 멈췄다.무언가 조금 달랐다. 기억은 흐릿하지 않았다.어젯밤, 분명 서로를 껴안았고, 사랑한다고 말했고, 숨결을 나눴다.그런데 그녀가 유리였다던 확신이 이상하게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그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옆에 누운 여자는 눈을 감고 잠든 채였다.그 얼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달랐다.입술의 곡선, 눈꼬리의 각도, 미간의 미세한 주름까지.유리는 이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이현의 손끝이 천천히 그의 핸드폰을 향했다.잠금화면을 켰다.가장 최근 보낸 메시지‘할 말 있어요. 지금, 집으로 와주실 수 있나요?’그는 잠시 멈췄다.“…내가, 이 문자를 보냈던가…?”기억이 없었다. 메시지를 쓴 적이 없었다.그제야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이불을 걷고 일어난 여자.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일어나셨어요?”그 말투는 유리의 말투였다.하지만, 유리의 눈빛이 아니었다.이현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유진 씨죠.”그녀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그리고, 다시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네. 맞아요.”이현은 손에 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그의 손등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왜 그런 짓을 했어요?”“그 밤은, 저한테도 필요했어요.”유진은 담담하게 말했다.“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느낀 적 없으세요?그 사람이 절대 몰라줄 걸 알면서도 그래도, 가지고 싶었던 감정.”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그의 가슴 안엔 뒤늦게 찾아온 진실보다유리의 얼굴이 무섭게 떠오르고 있었다.그녀는 이걸 봤을까.이현은
‘할 말 있어요. 지금, 집으로 와줄 수 있어요?’메시지는 짧았다. 그 어떤 장식도, 이모티콘도 없이 문장 끝조차 마침표 하나 없이 툭, 던져진 말.그럼에도 불구하고그 말은 유리의 마음을 오래도록 붙잡았다.이현의 번호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숫자 배열,익숙한 진동음, 몇 번이고 주고받던 메시지창.하지만 오늘따라 그 한 문장이 다르게 느껴졌다.'지금.'그 단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유리를 향하고 있었다.밤공기가 차가웠다.초봄의 냄새는 따뜻하지도, 완전히 춥지도 않았지만, 유리는 괜히 겉옷을 한 번 더 여몄다.가로등 아래, 루체빌의 16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숫자는 조용히 오르고 있었고, 그 짧은 시간에도 마음은 수십 번을 오갔다.설렘. 기대. 그리고 아주 미세한 불안.‘혹시 무슨 일 생긴 건 아닐까.’‘아니면… 나한테 무슨 이야기 하고 싶은 걸까.’문 앞에 섰을 땐, 손끝이 먼저 멈칫했다.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기도 전,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평소 이현이 철두철미하게 잠그던 그 문이 오늘만은 조용히 열려 있었다.‘혹시 까먹은 걸까?’고개를 갸웃하며 살짝 문을 밀었고, 문은 작은 소리도 없이 열렸다.거실은 어두웠다. 불은 켜져 있지 않았고, 익숙한 라벤더 향이 코끝을 스쳤다.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유리는 신발을 벗으며 괜히 숨소리를 죽였다.살금살금, 소리 나지 않게 방 안으로 향했다.그러다 멈췄다.방 안에서 낮은 웃음소리와 숨소리가 들렸다.익숙한 목소리. 낮고, 부드럽고 사랑을 속삭이던 그 어조.“…유리야, 사랑해.”그 말이 들리는 순간, 유리의 걸음이 멈췄다.문틈은 아주 조금 열려 있었다.마치 일부러 누군가 손을 대고 멈춘 듯.그 틈 사이로, 조명이 어슴푸레 비추는 방 안.그리고 그 안에서 보인 모습.남자의 품에 안긴 여자.흘러내린 머리카락, 맨살이 드러난 어깨.밀착된 두 사람의 숨결.그리고 그 얼굴.그건, 유리의 얼굴이었다.하지만 유리는 지금, 문밖에 서 있었다.그 안에 있는 건
“좋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마음까지 줄 순 없다.”금요일 오후, 이현의 사무실 복도.이현은 오후 미팅을 마치고 복귀하던 중 창가 쪽 작은 회의실 앞에서 유진과 마주쳤다.평소처럼 단정하게 묶은 머리, 살짝 바른 립컬러,그리고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태도.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회의는 잘 끝나셨어요?”유진이 먼저 말을 걸었다.“네. 유진 씨는 점심 잘 드셨어요?”“네. 좋은 이야기 많이 나눴어요. 유익한 시간이었죠.”말은 평온했지만, 그 '좋은 이야기'라는 말 한 마디에무언가 짙게 가라앉은 감정이 묻어 있었다.사무실로 돌아온 이현은 잠시 앉아있던 의자에서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생각했다.‘무언가가 끝났다는 걸…그 사람보다 내가 먼저 느낄 수 있다면, 그건 내 책임이다.’그 책임이 지금 자신에게로 흘러들고 있었다.저녁이 가까워질수록, 유진의 움직임은 더 단정해졌고말투는 더 매끄러워졌지만 이현은 느낄 수 있었다.그녀가 조용히 선을 그었다는 것.그건 단절이 아니라, 정리였다.이현은 책상에 놓인 유진의 기획안 메모를 들여다보았다.간결하고 정확한 필기체. 철저하게 감정은 배제된 문장들.그 안에 어떤 마음도 실려 있지 않았다.퇴근 직전, 이현은 유진에게 다가갔다.“유진 씨.”“네, 대표님.”“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실로 먼저 들어갔다.닫힌 공간 안, 짧은 정적.“유진 씨… 오늘, 유리 씨와 점심 드셨다고 들었어요.”그 말에 유진은 조용히 웃었다.“네. 저희끼리도 얘기 나눌 시간쯤은…있어야 하지 않겠어요?”“그랬겠죠.”이현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왜냐면,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그저 ‘미안하다’는 말 외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네.”“혹시 지금, 마음이 정해지셨나요?”그 질문은 칼처럼 날카롭지 않았다.오히려 많이 참은 사람이 마지막으로 꺼내는 말처럼 들렸
금요일. 회사 전체가 바쁘게 돌아가는 날이었다.출시 전 마지막 QA 일정이 몰린 탓에 디자인팀과 개발팀 모두 예민한 공기 속에 움직이고 있었다.유진도 책상 앞에서 계속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지만,집중은 쉽지 않았다. 그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오전 일정은 외근이라고 했지만,어디로 향했는지, 누구를 만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아니, 말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대답이었다.점심시간. 유진은 일부러 사무실에 남았다.책상 위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무의식적으로 화면을 켰다 껐다.이현에게 메시지를 보낼까,밥은 드셨냐고 물어볼까,그런 말조차 이제는 너무 늦어버린 것 같았다.그리고 그 순간,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대표님, 아까 그 파일 말씀하신 거 다시 확인해드릴게요.”유진은 고개를 돌렸다.이현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유리.서로 거리를 두고 걷고 있었지만, 그 거리 안에는 너무 많은 말들이 묻어 있었다.이현이 웃었다. 평소와 같은 미소였지만,유진은 그가 그 미소를 ‘누구에게’ 건넸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사무실로 돌아와 유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이상했다. 자신이 흔들리는 이 감정이질투인지, 외로움인지조차 이제는 분간하기 어려웠다.‘내가… 놓친 걸까?’아니, 애초에 잡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오후 5시. 디자인팀 회의 중,이현은 유리와 짧게 대화를 나누고 회의실을 나갔다.유진은 남아 있던 자료를 정리하며 이현이 앉았던 자리를 잠시 바라봤다.그가 유리와 말을 나눌 땐 미묘하게 눈을 마주쳤고,서로 말이 끝나기 전부터 웃고 있었다.그건 유진이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시선이었다.그날 저녁, 유진은 루체빌 근처 카페에 혼자 앉아 있었다.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그리고 수십 번쯤 했던 생각을 다시 반복했다.‘유리는… 그 사람 앞에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유리는 ‘청소’를 하러 갔지만, 그 공간은 단지 집 안이 아니라이현이라는 사람의 마음 한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