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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점심은 대화보다 가까워서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Last Updated: 2026-03-10 08:56:21

이현의 사무실 인근, 회사 사람들이 자주 찾는 브런치 카페.

점심시간보다 조금 빠른 11시 40분,

이현은 약속보다 조금 먼저 도착해 있었다.

잠시 후, 유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단정한 셔츠에 차분하게 묶은 머리, 가벼운 립스틱.

하지만 오늘의 유진은 어딘지 조금 더 여성스럽고 부드러워 보였다.

"대표님,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뇨. 저도 방금 왔어요."

둘은 마주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

초반의 대화는 주로 업무적인 이야기로 흘러갔다.

어제 있었던 코드리뷰, 팀 내 협업 프로세스, 작은 UI 수정 건까지.

그러다 문득 유진이 말을 멈추고, 커피잔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이런 자리, 낯설지만 좋네요. 대표님이 이렇게 따로 시간을 내주시니까."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유진 씨가 팀 분위기도 잘 챙기고 있어서 고마워요. 그 얘기, 직접 하고 싶었어요."

유진은 잔을 내려놓고 작게 웃었다.

"칭찬... 이런 자리에서 들으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유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요즘 대표님이 저한테 많이 챙겨주시잖아요.

그래서 저도 좀 더 잘하고 싶단 생각이 들어요."

이현은 유진의 시선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담되진 않아요? 괜히 내가 의식하게 만든 건 아닐까 싶기도 해서."

"전혀요. 오히려... 그게 동기부여가 되는 것 같아요.

대표님처럼 일에 진심인 사람 옆에 있다는 건 저한텐 큰 자극이에요."

그 말에 이현은 피식 웃었다.

그의 눈가에는 한결 부드러운 선이 그려졌다.

유진은 더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전달되는 공기라는 게 있으니까.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마친 이현이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이런 자리, 앞으로도 종종 가져도 좋겠네요."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요. 오늘, 정말 좋았어요."

햇살은 창을 타고 들어왔고,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란히 바닥에 길게 드리워졌다.

그 거리는 여전히 '일'이라는 명목 아래 놓여 있었지만, 마음은 서서히, 그 경계 밖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    *    *    *    *    *    *    *   

점심 이후, 유진은 다시 자리에 앉아도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현과 나눈 대화는 길지 않았고, 특별한 말도 없었지만

그의 눈빛, 말투, 무심한 배려 하나하나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녀는 문득 책상 한 켠의 손거울을 들어 살짝 비춰보았다.

자신의 얼굴이 오늘 따라 조금 더 예뻐 보였다.

“유진씨~.”

그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일 외의 순간에도, 자연스럽게.

그건 단지 팀장과 신입의 관계에서 오는 거리를 조금 더 좁힌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유진은 생각을 접으며 억지로 코드창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문자 하나를 조심스레 보냈다.

[유진]

오늘 점심, 감사했어요.

대표님 덕분에 하루가 좀 더 좋아졌어요 

메시지를 보낸 직후, 그녀는 다시 평소의 유진으로 돌아간 듯 일에 몰두하는 척 키보드를 두드렸다.

반면, 이현은 사무실 복도로 향하던 중 핸드폰 진동을 느꼈다.

잠시 멈춰 문자를 확인한 그는, 무심히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말투는 늘 공손했고, 정제돼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온도는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

‘하루가 좀 더 좋아졌어요.’

그 한 줄의 문장이, 그를 이상하게도 오래 붙잡았다.

그는 곧장 답장을 보내진 않았다.

하지만 어느새 유진의 이름은 그의 생각 속에서 조금 더 오래 머무르기 시작했다.

다음 날.

오후 회의가 끝난 후, 유진은 의도적으로 대표실 앞을 천천히 지나쳤다.

이현의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유진은 노크 없이 얼굴만 살짝 들이밀었다.

"혹시 지금,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이현은 시선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들어와요."

유진은 잠깐 망설이다가,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을 내밀며 말했다.

"어제 수정한 부분인데, 검토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여기 앉아요.”

이현이 옆자리를 가리켰고, 유진은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다.

짧은 설명이 오간 뒤, 잠시 정적. 유진은 파일을 덮고 그를 바라봤다.

“대표님.”

“네?”

“저, 혹시... 지금처럼, 계속 이렇게 대표님과 가까워져도 될까요?”

그 말에 이현은 눈을 살짝 동그랗게 떴다.

유진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 미소엔 감춰지지 않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업무 말고요.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요.”

그 순간, 이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느 쪽이든 쉽게 말할 수 없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유진은 그 침묵을 천천히 받아들이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답은 지금 안 하셔도 돼요. 저는 기다릴 수 있으니까요.”

그녀는 파일을 다시 가방에 넣으며 일어섰다.

그 말투는 여전히 다정했고, 뒷모습까지 당당했다.

이현은 조용히 책상 위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자꾸 떠올랐다.

'대표님과 가까워져도 될까요?'

감정은 그렇게, 어느새 경계선을 넘고 있었다.

*    *    *    *    *    *    *    *    *  

유진은 이제 더는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마음이 깊어질수록, 머뭇거림은 오히려 불안만 키웠다.

그녀는 느리고 은근하게, 그러나 분명한 방식으로 이현에게 다가가기로 했다.

그 시작은 아주 작은 것부터였다.

회의가 끝나고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대표님, 요즘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이전과는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 살짝 낮게 깔린 말투.

이현은 잠시 놀란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잠시 후, 유진은 커피 두 잔을 들고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

“실례할게요.”

그는 노트북을 덮으며 그녀를 맞았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그냥 마시기만 하세요. 설명도 피드백도 없이요.”

그 말에 이현은 웃으며 잔을 받아들었다.

유진은 맞은편 소파에 살짝 앉았다.

“대표님, 혹시... 퇴근 후에 약속 있으세요?”

그 질문에 이현은 잔을 내려놓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글쎄요. 상황 봐야죠.”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었다.

“저녁, 같이 먹으면 안 돼요? 회사 근처 말고, 조금 조용한 데서.”

그 말에는 더 이상의 겉포장이 없었다.

사적인 만남을 전제로 한, 아주 분명한 제안.

이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왜요? 갑자기?”

유진은 웃지 않았다. 대신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더 알고 싶어서요. 이런 거리에서 마주보는 것 말고,

조금 더 사람답게. 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그 이상이니까요.”

그녀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이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마치, 먼저 물러서지 않겠다는 조용한 다짐 같았다.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침묵이 거절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제가 먼저 물러날게요. 내일은... 대표님 차례예요.”

그리고 유진은 잔을 비우지도 않은 채 가볍게 손을 흔들고 나갔다.

대표실 문이 닫히고, 이현은 잠시 잔을 바라보다가 커피 한 모금을 조용히 삼켰다.

그녀의 향기와 말투, 모든 것이 그 안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유리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 지금 그에게 차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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