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이현의 회사, '엔프로소프트'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신작 게임의 개발이 본격화되며 프로젝트 규모가 두 배로 커졌고,
자연스럽게 사람을 더 충원해야 하는 시점이 된 것이다.
"대표님, 오늘 개발팀 면접 일정 있으신 거 아시죠?"
비서의 말에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에 괜찮은 사람 있으면 좋겠네요."
오후가 되자 면접이 하나둘 이어졌고,
그렇게 개발팀 마지막 순서가 호출되었다.
문이 열리고, 지원자가 들어섰다.
이현은 서류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고개를 드는 순간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놓칠 뻔했다.
그녀는 유리였다.
…아니, 유리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었다.
긴 생머리, 뚜렷한 이목구비, 살짝 올라간 입꼬리. 하지만 눈빛이 달랐다.
그녀는 유리처럼 맑고 따뜻한 인상이 아니라, 도도하고 자신감 넘치는 분위기였다.
시선 하나하나가 강했고, 입꼬리 끝은 늘 여유로웠다.
"안녕하세요. 유진입니다."
이현은 그녀의 이력서 사진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이건 단순한 닮음이 아니다. 그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유리와 이 사람은 쌍둥이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면접 내내 유진은 당당했고, 대답도 정확했다.
그녀의 말투에는 확신이 있었고,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데 그중간중간 이현을 향한 눈빛은, 묘하게 길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면접을 마무리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결국, 그는 그녀를 채용했다.
실력 때문이라기보다는…그 얼굴 때문이었다.
아니, 얼굴보다는 궁금증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왜 유리는 쌍둥이 언니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을까.
무슨 사연이 있는 건 아닐까.
며칠 뒤, 정기 청소일.
유리는 평소처럼 밝은 목소리로 현관을 들어섰고,
이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자꾸 유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똑같은 얼굴인데, 이토록 다르다니.
유리는 순하고 부드럽고 말투도 조심스러운데,
유진은 단정하면서도 당당하고, 어딘가 위험한 끌림이 있었다.
“대표님? 오늘은 기분이 좀 묘하세요?”
“아, 그냥 일 때문에요. 요즘 정신이 없네요.”
유리는 별다른 말 없이 웃으며 장비를 펼쳤다.
이현은 유진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말까,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직은 쌍둥이 자매라는 것이 확실하지 않았고,
언니일지 모를 유진이 자신의 회사에 다닌다는 말을 아직은 할 수가 없었다.
그 주 내내, 유진은 조용히 이현의 시선을 끌었다.
업무적인 질문은 다른 팀원보다 자주 했고,
보고서를 제출할 때는 언제나 직접 들고 가서 설명했다.
이현 역시 어느 순간부터 유진에게 더 자주 말을 걸고 있었다.
“점심은 드셨어요?”
“이번 코드 리뷰는 제 방에서 같이 볼까요?”
“이건 직접 설명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자연스러웠지만 분명 남들과는 다른 배려였다.
심지어 어느 날은 회의 후 유진의 책상에 커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수고 많았어요. 오늘 PT 아주 좋았어요."
메모가 적힌 컵. 유진은 그걸 들고 천천히 미소 지었다.
지금은 오해가 아니었다. 다만, 확신은 아직 이르다.
그녀는 단정히 컵을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나한테 잘해주는 거… 이유가 있을 거야.
그 이유가 뭔지, 이제 알아봐야지.’
그녀의 눈빛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 * * * * * * * *
엔프로소프트의 아침은 유난히 분주했다.
이현은 커피잔을 들고 사무실을 천천히 돌았다.
그의 눈길은 무심한 듯 책상들을 훑었지만,
정작 신경이 쓰이는 건 단 하나 유진의 자리였다.
그녀는 조용히 앉아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카락, 얇은 프레임의 안경, 그리고 살짝 말린 입꼬리.
유리와는 닮았지만 완전히 다른 존재감. 그는 잠시 멈춰 섰다.
"어제 피드백 메일 봤어요?"
유진은 고개를 들었다.
"네. 대표님 메일은 제일 먼저 확인하죠."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눈빛에는 익숙하지 않은 힘이 있었다.
뭔가를 정확히 보고, 생각하고, 머물게 하는 힘.
이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따가 시간 괜찮으면 이 내용 간단히 얘기하죠."
"저는 언제든 괜찮아요. 대표님만 괜찮으시다면."
그 대답에 이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그러는 동안 유진은 천천히 마우스를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봤다.
그의 말투, 시선, 움직임.
그 어느 것도 과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느껴졌다.
이현은 나에게 특별하다.
그녀는 그 사실에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움직였다.
그날 오후.
이현은 직접 유진을 대표실로 불렀다.
둘 사이엔 단 두 장의 서류와 하나의 디스플레이가 있었고,
그 외에는 조용함이 머물렀다.
"이 부분은 이렇게 바꾸는 게 낫겠죠."
이현이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기울였다.
그의 어깨 옆으로 얼굴이 가까워졌다.
이현은 순간, 살짝 굳어지는 자신을 느꼈다.
하지만 유진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대표님은 원래… 이렇게 직접 챙기시는 스타일이세요?"
“음…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는 애매하게 대답했지만, 유진은 살짝 웃었다.
"전 좋아요. 누군가가 저한테 특별히 신경 써주는 거."
그 말에 이현은 모니터를 바라보던 시선을 잠시 멈췄다.
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단정했고, 행동은 예의 바르지만,
그 안에 담긴 무언가는 분명 이전과 달라지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유진이 자리를 나서려던 순간, 그는 문 앞까지 배웅을 나갔다.
그녀가 문을 나서며 짧게 돌아보았다.
"아, 그리고 대표님."
“네?”
"내일 점심시간, 혹시 비어 있으세요? 저…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요."
“점심?”
이현은 의아한 듯 되묻자, 유진은 가볍게 웃었다.
"네. 업무 관련이라기보다… 사람 관련. 대화 한 끼쯤은 괜찮잖아요?"
그리고 유진은 말을 마치지 않은 채 사라졌다.
이현은 한동안 그 문을 바라보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확신은, 그렇게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평일 저녁. 루체빌의 불은 늘 그랬듯 따뜻하게 켜져 있었지만,그 안을 채우는 공기는 어느 날보다 조금 더 무거웠다.이현은 귀가하자마자 양복 상의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어두고, 말없이 노트북을 열었다.유리는 부엌에서 조용히 국을 데우고 있었고,그의 숨소리 하나에도 조심스레 마음을 기울였다.식탁에 앉았지만, 그날의 밥상엔 말이 적었다.“오늘 회의 많았어요?”유리가 먼저 조심스레 물었다.“네. 보고도 길고… 신제품 일정이 좀 당겨졌어요.”이현은 젓가락을 들었지만 숟가락에 밥을 올리기까지 조금 오래 걸렸다.그의 손끝은 피곤했고, 눈빛엔 뭔가 정리되지 않은 무게가 내려앉아 있었다.유리는 그를 바라보다 더 묻지 않기로 했다.저녁을 마치고 이현은 노트북 앞에 다시 앉았고,유리는 설거지를 마친 뒤 거실 소파에 조용히 앉아 책을 폈다.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로가 다른 리듬으로 앉아 있는 시간.그건 이제 익숙한 함께의 형태였지만, 오늘만큼은 그 틈이 살짝 벌어진 것 같았다.이현은 화면을 내려다보다 문득 말을 꺼냈다.“유리 씨.”“응.”“요즘…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유리는 책을 덮고 고개를 돌렸다.“어떤 부분에서요?”“회사에서는 이제 ‘대표답게’ 더 많은 걸 끌어야 하고,집에 오면 당신한테 너무 무심해지는 것 같고…나 뭔가… 두 쪽 다 어중간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그 말은 조용하지만, 단단히 눌러 참았던 마음의 기울기였다.유리는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나 이현 옆에 조용히 앉았다.그리고 그의 노트북 화면을 살짝 닫으며 말했다.“이현 씨. 당신이 회사에서 어떤 모습인지는 내가 다 알 수 없지만 집에서의 당신은 지금도 충분히 내 남편이에요.”“하지만…”“내가 바라는 건 일을 덜 하라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나 때문에 스스로를 갈라놓지 않았으면 해요.”이현은 고개를 떨궜다.유리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사람은 하루에 하나만 완벽할 수 있어요. 그게 회사일 수도 있고, 우리의 하루일 수도 있죠.나는 그 하루가
비행기는 저녁 무렵 김포에 도착했다.신혼여행 내내 따뜻한 날씨와 낯선 풍경을 걸어온 두 사람은짐이 가볍지 않음에도 발걸음만큼은 한결 느슨하고 여유로웠다.택시가 루체빌 앞에 멈췄을 때, 유리는 창밖으로 펼쳐진 익숙한 거리의 불빛을 한참 바라보다 말했다.“집이네요.”이현은 짧게 웃었다.“그러게요. 다녀온 것 같기도 이제야 진짜 시작하는 것 같기도 해요.”현관 앞에 서자, 유리가 먼저 문을 열었다.익숙한 소리. 익숙한 냄새. 그 안에서 두 사람은 동시에 ‘돌아왔다’는 감각을 조용히 맞았다.루체빌 거실. 가방은 그대로 바닥에 놓였고, 두 사람은 말없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오랜만에 맞이한 그 공간은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그 속에서의 마음은 분명 달라져 있었다.“여기 조명, 이제 좀 어둡게 느껴지지 않아요?”유리가 물었다.“그래요. 여행지에서 햇살이 워낙 강했으니까.”“그럼 우리, 이 조명도 조금 바꿔볼까요?”“좋아요. 결혼 후 첫 집 손보기.”둘은 그렇게, 평범한 변화의 시작을 다정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밤이 깊어갈수록 짐은 서서히 풀어졌고, 수건은 세탁기에 들어갔고,기념품은 식탁 한편에 줄지어 놓였다.유리는 여행지에서 사 온 작은 유리 종을 창가 선반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이거, 햇빛 들어오면 맑은 소리 날 것 같아요.”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소리 들을 때마다, 그날 골목 걷던 우리가 떠오를 거예요.”“그리고 그날 우리 마음도.”새벽 무렵, 유리는 부엌에서 조용히 머그잔을 꺼냈다.속이 허전하다는 말을 꺼내지 않아도 이현은 물을 데우고 있었다.“역시 우리, 말 안 해도 잘 통해요.”유리가 웃으며 말했다.“함께 산다는 게 그런 거잖아요. 같이 안 말해도, 같은 쪽으로 느껴지는 것.”이현은 머그잔을 건네며 말했다.“내일부터는 출근이에요.”“그러네요. 다시 일상.”유리는 머그잔을 양손으로 감싸쥐고 창밖을 바라보았다.“근데 이현 씨. 이제부터는 일상도 좀 다른 것 같지 않아요?”“어떤 점에서요?”
비행기는 제시간에 도착했다.창밖으로 펼쳐진 바다는 서울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넓고 깊어 보였고,하늘은 말 그대로 ‘휴가를 위한 색’이었다.유리와 이현은 공항에서부터 손을 잡은 채 이동했다.오래 걸리지 않는 거리였고,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은 서로에게 익숙하지 않은 나라, 익숙하지 않은 시간대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숙소는 바다와 가까운 언덕 위에 있었다.테라스가 넓었고, 하얀 커튼이 바람을 따라 천천히 흩날렸다.짐을 내려놓자마자, 유리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이 바람… 이현 씨, 여기 소리 들어봐요.”이현은 뒤에서 조용히 다가와 그녀 옆에 섰다.둘은 말없이 테라스 밖 바람소리와 파도소리를 들었다.조용하다는 말보다, 평화롭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순간이었다.점심을 먹기 위해 작은 로컬 식당을 찾았고, 유리는 메뉴판을 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음… 고수 들어간 음식 괜찮아요?”이현은 웃었다.“내가 고수 잘 못 먹는 거 그새 잊었어요?”“아, 맞다. 그때 쌀국수집에서도 몰래 빼줬었죠.”“결혼했다고 입맛까지 같아지는 건 아니니까.”유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맞아요. 다르다고 느끼는 게, 같아지려 애쓰는 것보다 훨씬 사랑스럽네요.”그 말은 오랜 연애보다 더 깊은 이해였다.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햇살은 점점 부드러워지고 있었고, 이현은 마트에 들러 유리에게 아이스크림 하나를 건넸다.“결혼 첫 여행 기념. 아이처럼 하나씩.”유리는 아이스크림을 받아들며 말했다.“그럼 오늘 하루, 우리 둘 다 아이처럼 굴어요.”“이미 당신 눈빛이 초등학교 방학 첫날이에요.”저녁 무렵. 숙소 테라스.두 사람은 나란히 발을 내밀고 바람을 맞으며 앉아 있었다.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이현 씨, 나 오늘 하루종일… 계속 당신이 낯설게 느껴졌어요.”“왜요?”“평소보다 말이 적고, 주변 잘 챙기고, 작은 거에 더 웃고 그런 당신을 보면서,'아, 이 사람은 내가 아직 다 모르는
결혼식 당일. 맑고 단정한 하늘 아래,서울의 작은 정원 예식장은 이른 아침부터 조용한 기척들로 분주했다.꽃은 유리의 취향대로 심플한 들꽃 위주로 꾸며졌고,웨딩홀 입구엔 두 사람이 직접 손으로 적은 간판이 세워져 있었다.“누구도 대신하지 않은 마음, 우리가 끝까지 함께 쓴 하루.”이현은 신랑 대기실에서 화이트 셔츠 위에 재킷을 입고 있었다.공찬이 사회자 대본을 손에 들고 농담 섞인 톤으로 말했다.“이 형… 긴장했네. 딱 봐도 손에 땀 났어.”이현은 웃지 않았다.다만 정면의 거울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지금 내 마음은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없어.”“뭔데?”“내가 저 사람 앞에 서는 순간, 절대 흔들리면 안 된다는 거.”공찬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가 말장난을 멈췄다는 건,그 순간의 감정이 장난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는 걸 의미했다.유리는 신부대기실에서 드레스를 입고 앉아 있었다.거울 속의 그녀는 조용했고, 부드러웠으며,지금껏 살아온 모든 시간이 고스란히 어깨에 걸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어머니와는 이른 아침 짧은 전화로 인사를 마쳤고,이현의 어머니는 직접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한 번 정리해주고 나서 손을 꼭 잡아주었다.“내가 이현이 키우면서 한 번도 내 손으로 어깨를 만져준 적이 없는데…오늘 이렇게 네 드레스 잡아주니까 괜히 눈물 날 뻔했어.”유리는 잠시 눈을 감고 말했다.“이젠… 저 사람 어깨는 제가 감쌀게요.”결혼식은 정오 정각에 시작되었다.입장곡은 두 사람이 처음 비를 함께 맞으며 걷던 골목에서 들리던 낡은 재즈 한 곡이었다.유리의 발끝이 천천히 예식장 중앙으로 다가올 때, 이현은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다시 떴다.그 순간, 그는 단 한 사람만을 보고 있었다.그 눈빛 안엔 “사랑해”보다 더 오래 견디는 말이 담겨 있었다.‘내가 앞으로 지키고 싶은 건, 지금 저 눈동자 속에 담긴 망설임 없는 마음이다.’사회자의 멘트가 조용히 이어지고,이현과 유리는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서약서를 꺼내 들었다.이현
유리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햇살은 조용히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들었고, 식탁 위에는 전날 밤부터 펼쳐둔 메모가 놓여 있었다.‘드레스 리허설 / 7월 12일 오후 2시’그 아래엔, 볼펜으로 작게 그려진 반지 모양 낙서가 있었다.그리고 그 옆에 적힌 짧은 문장.‘이현 씨 손에 반지를 끼우는 날을 상상했다. 이젠, 그 날이 내 손끝 안에 있다.’유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입꼬리를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늘은 사랑을 실감하는 날이었다.드레스샵. 유리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거울 앞에 조용히 서 있었다.어깨 라인을 부드럽게 감싸는 레이스, 허리선을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실루엣,그리고 조명이 스치는 결마다 다르게 반짝이는 드레스의 표면.옷을 입은 자신을 바라보며 유리는 잠시 멈춰 섰다.자신이 여기에 서 있는 것이, 누군가를 위해 아니라‘지금의 나’를 위해서라는 걸 처음으로 온전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이현 씨, 들어오셔도 돼요.”커튼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현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그리고 그를 바라본 순간, 유리는 웃으며 물었다.“어때요?”이현은 한참 말없이 서 있었다.그는 눈으로 천천히 유리를 바라보았다.얼굴에서, 손끝에서, 서 있는 자세에서 그녀가 지금 얼마나 단단해졌는지를 그는 알고 있었다.“예쁘다는 말로는 부족해요. 지금 당신은… 이름보다 먼저 ‘조유리’ 같아요.”그 말에 유리는 작게 숨을 쉬었다.“이상하게, 오늘 따라 더 떨리는 것 같아요. 이제 다가오고 있구나, 싶어서.”이현은 그녀에게 다가가 거울 앞에서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감싸쥐었다.“떨려도 돼요. 우린 오래 준비했고, 그만큼 천천히 다가왔으니까.”“그리고 지금, 당신을 마주한 내 앞엔 확신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요.”드레스샵을 나선 두 사람은 근처 한강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드레스에서 갈아입은 유리는 다시 편안한 옷차림으로 돌아왔지만,이현의 눈엔 여전히 그녀가 ‘드레스를 입은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식장 음악은 뭐로 할까요?”
아침 식탁 위에 놓인 달력.6월의 마지막 줄이 조금씩 흐려져 가고 있었다.이현은 커피를 내리며 달력의 한 칸을 오래 바라보다가 볼펜을 들어 조용히 작은 원을 그렸다.‘7월 28일’그는 조심스럽게 옆 숫자들까지 채워넣기 시작했다.‘장소 미팅’‘스튜디오 방문’‘청첩장 초안’그 하나하나가 마치 수험생이 계획표를 적듯 단정했고, 그 단정함 속엔 묘한 설렘이 묻어 있었다.유리는 부엌 문턱에 기대어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물었다.“드디어 본격적으로 시작해요?”이현은 돌아보지 않고,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이제 정말 미룰 수 없게 됐죠. 우리 약혼 반지 낀 지, 벌써 한 달이에요.”유리는 조용히 그 옆에 다가와 앉았다.“나는 사실… 그날 이후로 ‘결혼’이란 말을 입에 담기 조금 조심스러웠어요.”“왜요?”“지금까지 너무 많은 말들을 설명해오느라 지쳤나 봐요.근데 이젠… 아무 말 안 해도, 그냥 그날이 와줬으면 좋겠어요.”그 말은 다정한 한숨 같았다. 이현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러면, 오늘부터는 우리가 말하기보다 하나씩 해나가요.”“그래요. 첫 스텝은… 뭐부터 해요?”“우선, 엄마한테 말씀부터 드려야겠죠.”그 말에 유리는 작게 웃었다.“그게 첫 번째 미션이군요.”그날 오후, 두 사람은 이현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도예 공방을 찾았다.조용한 음악, 흙냄새, 그리고 오랜 시간 손끝으로 물건을 빚어온 공간의 기운이 두 사람의 긴장을 잠시 덜어주었다.“이현아. 유리 씨.”어머니는 먼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유리는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잘 지내셨어요, 어머님.”“그동안 오랜만이네. 근데… 오늘은 뭔가 얼굴빛이 다르다?”이현은 조용히 엄마 옆에 앉았다.“엄마. 우리, 정식으로 결혼 준비 시작하려고요.”그 말에 어머니는 한참을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내가 너한테 바랐던 건 성공도 아니고, 회사도 아니었어.그저 옆에 누군가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길 바랐지.”유리는 조용히 숨을 들이
그날도 루체빌 1603호는 햇살 좋고, 커피 향이 좋았다.그리고 유리의 마음 역시… 아주 좋았다."이제 정말, 이 집은 제 일상 중 하나 같아요."유리가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네자,이현은 유리에게 커피를 건네며 조용히 말했다."저도요. 유리님이 오는 시간이, 이제 하루의 중심이에요."심장이 쿵. 유리는 순간 손에 들린 머그잔을 놓칠 뻔했다.그 말이 너무 진심 같아서, 농담처럼 넘기고 싶었지만 넘길 수 없었다.이현도 알았을 것이다.지금 이 분위기, 지금 이 타이밍… 말만 하면 된다.정리도 청소도 끝났고, 이제는 감정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오후.유리는 오늘도 루체빌 1603호를 향해 걷고 있었다.늘 그렇듯 청소 도구가 담긴 가방을 들었고,양손은 바쁘게 움직였지만 마음은 어딘가 조용했다.'이젠 정말 익숙해졌다.'그의 현관, 향기, 커피잔 모양, 그리고 웃을 때 살짝 휘어지는 눈매까지.모두 익숙하고, 익숙해서 더 설레는 마음.띵동~ 벨을 누르자마자 문이 열렸다.“오셨어요.”이현은 웃으며 문을 열었다.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오늘은… 청소하지 않아도 될지도 몰라요.”그 말에 유리는 눈을 깜빡였다.“네?”“제가 아침
유리는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청소 예약 앱에 올라온 일정표엔 루체빌 1603호가 오늘도 정각 3시로 표시되어 있었지만,이현의 메시지가 그보다 조금 더 일찍 도착했기 때문이다.[이현]유리님, 오늘 청소 전 30분만 시간 괜찮으실까요?근처 카페에서 잠깐만요. 아주 중요한... 음, 업무 관련 회의입니다 유리는 그 메시지를 읽고 세 번이나 다시 읽었다.‘업무 관련 회의’라는 말 뒤에 붙은 이현의 이모티콘 없는 문장은왠지 모르게 조심스럽고, 또 그만큼 다정하게 느껴졌다.“업무 회의가 카페라니...근데 왜 웃음이 나
청소 요청지가 오랜만에 낯선 동네였다.햇살이 잘 드는 아파트 12층,주방은 넓었고 거실엔 분홍빛 쿠션이 가득했다.“따님이 있으신가 봐요.”유리는 핑크색 인형이 놓인 소파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자잘한 먼지를 흡입기로 쓸어내면서, 머릿속은 오히려 고요했다.정기 예약 이외의 고객을 맡는 건 오랜만이었다.그동안은 스케줄 대부분이 루체빌 1603호.이현의 공간이 거의 유리의 주간 루틴이 되다시피 했으니까.‘그러고 보면 요즘, 다른 집 느낌이 좀 낯설다.’허리를 숙이다가, 폰이 진동했다.[이현]유리님, 혹시 방향제 병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