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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닮은 얼굴, 다른 의도

last update Zuletzt aktualisiert: 10.03.2026 08:55:07

이현의 회사, '엔프로소프트'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신작 게임의 개발이 본격화되며 프로젝트 규모가 두 배로 커졌고,

자연스럽게 사람을 더 충원해야 하는 시점이 된 것이다.

"대표님, 오늘 개발팀 면접 일정 있으신 거 아시죠?"

비서의 말에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에 괜찮은 사람 있으면 좋겠네요."

오후가 되자 면접이 하나둘 이어졌고,

그렇게 개발팀 마지막 순서가 호출되었다.

문이 열리고, 지원자가 들어섰다.

이현은 서류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고개를 드는 순간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놓칠 뻔했다.

그녀는 유리였다.

…아니, 유리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었다.

긴 생머리, 뚜렷한 이목구비, 살짝 올라간 입꼬리. 하지만 눈빛이 달랐다.

그녀는 유리처럼 맑고 따뜻한 인상이 아니라, 도도하고 자신감 넘치는 분위기였다.

시선 하나하나가 강했고, 입꼬리 끝은 늘 여유로웠다.

"안녕하세요. 유진입니다."

이현은 그녀의 이력서 사진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이건 단순한 닮음이 아니다. 그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유리와 이 사람은 쌍둥이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면접 내내 유진은 당당했고, 대답도 정확했다.

그녀의 말투에는 확신이 있었고,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데 그중간중간 이현을 향한 눈빛은, 묘하게 길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면접을 마무리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결국, 그는 그녀를 채용했다.

실력 때문이라기보다는…그 얼굴 때문이었다.

아니, 얼굴보다는 궁금증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왜 유리는 쌍둥이 언니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을까.

무슨 사연이 있는 건 아닐까.

며칠 뒤, 정기 청소일.

유리는 평소처럼 밝은 목소리로 현관을 들어섰고,

이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자꾸 유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똑같은 얼굴인데, 이토록 다르다니.

유리는 순하고 부드럽고 말투도 조심스러운데,

유진은 단정하면서도 당당하고, 어딘가 위험한 끌림이 있었다.

“대표님? 오늘은 기분이 좀 묘하세요?”

“아, 그냥 일 때문에요. 요즘 정신이 없네요.”

유리는 별다른 말 없이 웃으며 장비를 펼쳤다.

이현은 유진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말까,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직은 쌍둥이 자매라는 것이 확실하지 않았고,

언니일지 모를 유진이 자신의 회사에 다닌다는 말을 아직은 할 수가 없었다.

그 주 내내, 유진은 조용히 이현의 시선을 끌었다.

업무적인 질문은 다른 팀원보다 자주 했고,

보고서를 제출할 때는 언제나 직접 들고 가서 설명했다.

이현 역시 어느 순간부터 유진에게 더 자주 말을 걸고 있었다.

“점심은 드셨어요?”

“이번 코드 리뷰는 제 방에서 같이 볼까요?”

“이건 직접 설명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자연스러웠지만 분명 남들과는 다른 배려였다.

심지어 어느 날은 회의 후 유진의 책상에 커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수고 많았어요. 오늘 PT 아주 좋았어요."

메모가 적힌 컵. 유진은 그걸 들고 천천히 미소 지었다.

지금은 오해가 아니었다. 다만, 확신은 아직 이르다.

그녀는 단정히 컵을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나한테 잘해주는 거… 이유가 있을 거야.

그 이유가 뭔지, 이제 알아봐야지.’

그녀의 눈빛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    *    *    *    *    *    *    *    *   

엔프로소프트의 아침은 유난히 분주했다.

이현은 커피잔을 들고 사무실을 천천히 돌았다.

그의 눈길은 무심한 듯 책상들을 훑었지만,

정작 신경이 쓰이는 건 단 하나 유진의 자리였다.

그녀는 조용히 앉아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카락, 얇은 프레임의 안경, 그리고 살짝 말린 입꼬리.

유리와는 닮았지만 완전히 다른 존재감. 그는 잠시 멈춰 섰다.

"어제 피드백 메일 봤어요?"

유진은 고개를 들었다.

"네. 대표님 메일은 제일 먼저 확인하죠."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눈빛에는 익숙하지 않은 힘이 있었다.

뭔가를 정확히 보고, 생각하고, 머물게 하는 힘.

이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따가 시간 괜찮으면 이 내용 간단히 얘기하죠."

"저는 언제든 괜찮아요. 대표님만 괜찮으시다면."

그 대답에 이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그러는 동안 유진은 천천히 마우스를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봤다.

그의 말투, 시선, 움직임.

그 어느 것도 과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느껴졌다.

이현은 나에게 특별하다.

그녀는 그 사실에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움직였다.

그날 오후.

이현은 직접 유진을 대표실로 불렀다.

둘 사이엔 단 두 장의 서류와 하나의 디스플레이가 있었고,

그 외에는 조용함이 머물렀다.

"이 부분은 이렇게 바꾸는 게 낫겠죠."

이현이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기울였다.

그의 어깨 옆으로 얼굴이 가까워졌다.

이현은 순간, 살짝 굳어지는 자신을 느꼈다.

하지만 유진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대표님은 원래… 이렇게 직접 챙기시는 스타일이세요?"

“음…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는 애매하게 대답했지만, 유진은 살짝 웃었다.

"전 좋아요. 누군가가 저한테 특별히 신경 써주는 거."

그 말에 이현은 모니터를 바라보던 시선을 잠시 멈췄다.

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단정했고, 행동은 예의 바르지만,

그 안에 담긴 무언가는 분명 이전과 달라지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유진이 자리를 나서려던 순간, 그는 문 앞까지 배웅을 나갔다.

그녀가 문을 나서며 짧게 돌아보았다.

"아, 그리고 대표님."

“네?”

"내일 점심시간, 혹시 비어 있으세요? 저…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요."

“점심?”

이현은 의아한 듯 되묻자, 유진은 가볍게 웃었다.

"네. 업무 관련이라기보다… 사람 관련. 대화 한 끼쯤은 괜찮잖아요?"

그리고 유진은 말을 마치지 않은 채 사라졌다.

이현은 한동안 그 문을 바라보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확신은, 그렇게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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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표님, 청소하러 왔는데요?   24화. 사랑은… 착각이었어요

    문 앞에 앉아 있던 이현은 어느 순간, 누군가의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낯익은 실루엣.길게 풀어 내린 머리카락. 얇은 트렌치코트. 그리고 작은 숨소리. 유진이었다.그녀는 천천히 이현에게 다가왔다.그 눈빛은 이상하게 차분했다.울지도, 웃지도 않는 얼굴."찾을 줄 알았어요."유진이 말했다.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왜 이렇게까지 하세요.""왜 유리 언니만 봐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봤다."저도… 대표님을 좋아했어요."말끝이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말을 이었다."처음부터요. 처음 출근하러 왔던 날, 처음 인사했을 때부터…""나는, 언니처럼 조심스럽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라도"이현은 그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유진 씨."짧게, 단단하게."그날 밤, 전부 기억나요."유진의 손끝이 떨렸다."알아요. 저였다는 거…""근데, 그래도 괜찮았잖아요.""그래도,나를 안아줬잖아요.""그래서 나는…"이현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착각이었어요.""나는 유리 씨를 사랑합니다.."그 말은 잔인했다.하지만, 더 이상의 오해를 남기지 않으려면 지금 말해야 했다."유리 씨를, 그 사람만을 사랑했어요.""그 얼굴이 아니라, 그 사람이었어요.""그래서, 지금 여기 없는 거겠죠.""나를 알아보지 못한 사람을, 그 사람은… 용서할 수 없을 테니까."유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잠시 후, 그녀는 한 발 물러섰다."알겠어요."짧은 대답. 담담한 눈빛."그래도 후회는 안 할 거예요.""그 순간만큼은, 대표님을 안고 있었으니까."그리고 유진은 돌아섰다.트렌치코트 자락이 흔들렸다.밤바람이 조용히 그녀를 감쌌다.아무 말도 없이. 아무 눈물도 없이. 그렇게 유진은 사라졌다.이현은 벽에 기댄 채 천천히 주저앉았다.손끝이 떨렸다.심장도, 생각도, 모든 게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남은 건 오직 하나였다."유리 씨…"그녀를 찾아야 했다.

  • 대표님, 청소하러 왔는데요?   23화. 사랑이 가장 멀어지는 순간

    방 안엔 시계 소리만 가득했다.짹짹거리는 새소리도, 핸드폰 진동도, 누군가의 말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그녀는 작은 원룸에 머물고 있었다.평소엔 일하러 잠깐 머무는 공간이었지만,지금은 유일하게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이었다.커튼을 반쯤 닫고, 창을 열었다.기대 앉은 유리는 창밖 골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머릿속은 생각으로 가득했지만, 이상하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조용하네.”그녀가 속삭였다. 그 말조차도 허공으로 흘러 사라졌다.테이블 위엔 하루 전까지 쓰던 청소 장비가 그대로 있었다.구겨진 장갑, 정리하지 않은 천들, 방전된 무선 청소기.유리는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장갑 하나를 들었다.그 장갑은, 이현의 사무실을 청소했던 날 처음 껴봤던 것이다.그의 책상 옆에 쌓여 있던 먼지, 정리되지 않은 서랍,그리고… 조용히 지켜보던 눈빛.그 모든 게 지금은 먼 기억 같았다.휴대폰은 하루 종일 진동조차 울리지 않았다.그녀가 알림을 꺼놨기 때문이었다.문자를 보지 않아도 전화가 와도 받지 않아도그 사람이 자신을 얼마나 애타게 찾고 있을지 사실은 다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그냥, 버티고 싶었다.“지금은…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아.”낮이 지나고 해가 기울어가면서,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커피포트를 켜고, 작은 머그에 물을 붓고, 어깨에 걸쳤던 담요를 툭 떨어뜨렸다.거울 앞에 섰다.거울 속 그녀의 얼굴은 분명 유진과 같았다.그토록 많은 사람이 헷갈려 하던 그 얼굴.심지어, 그 사람조차도. 그게 분했다.아팠고, 무서웠다.‘내가, 그 사람이 안아준 얼굴이었을까.아니면 그냥, 그 얼굴이라서였을까.’그녀는 그날 밤 이후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눈물보다 깊은 상처는, 오히려 더 조용히 사람을 잠식했다.그저 먹지 않았고, 자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밤이 깊어지자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문자함엔 이현의 메시지가 여럿 도착해 있었다.“유리 씨, 괜찮으세요?”

  • 대표님, 청소하러 왔는데요?   22화. 당신은 끝까지 나를 몰랐어요

    “사랑은 가까워질수록, 더 뚜렷해지는 진짜를 요구한다.”햇빛이 창문을 타고 들어왔다.커튼 사이로 퍼지는 아침빛은 유난히 따뜻했지만, 방 안은 적막했다.이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머리가 무거웠다. 몸도, 마음도 이상하게 둔했다.옆에 누운 사람의 실루엣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긴 머리카락, 하얀 목덜미, 그리고 이불 위로 드러난 맨 어깨.그는 순간 미소 지으려다, 멈췄다.무언가 조금 달랐다. 기억은 흐릿하지 않았다.어젯밤, 분명 서로를 껴안았고, 사랑한다고 말했고, 숨결을 나눴다.그런데 그녀가 유리였다던 확신이 이상하게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그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옆에 누운 여자는 눈을 감고 잠든 채였다.그 얼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달랐다.입술의 곡선, 눈꼬리의 각도, 미간의 미세한 주름까지.유리는 이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이현의 손끝이 천천히 그의 핸드폰을 향했다.잠금화면을 켰다.가장 최근 보낸 메시지‘할 말 있어요. 지금, 집으로 와주실 수 있나요?’그는 잠시 멈췄다.“…내가, 이 문자를 보냈던가…?”기억이 없었다. 메시지를 쓴 적이 없었다.그제야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이불을 걷고 일어난 여자.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일어나셨어요?”그 말투는 유리의 말투였다.하지만, 유리의 눈빛이 아니었다.이현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유진 씨죠.”그녀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그리고, 다시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네. 맞아요.”이현은 손에 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그의 손등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왜 그런 짓을 했어요?”“그 밤은, 저한테도 필요했어요.”유진은 담담하게 말했다.“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느낀 적 없으세요?그 사람이 절대 몰라줄 걸 알면서도 그래도, 가지고 싶었던 감정.”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그의 가슴 안엔 뒤늦게 찾아온 진실보다유리의 얼굴이 무섭게 떠오르고 있었다.그녀는 이걸 봤을까.이현은

  • 대표님, 청소하러 왔는데요?   21화. 내가 없는 나의 고백

    ‘할 말 있어요. 지금, 집으로 와줄 수 있어요?’메시지는 짧았다. 그 어떤 장식도, 이모티콘도 없이 문장 끝조차 마침표 하나 없이 툭, 던져진 말.그럼에도 불구하고그 말은 유리의 마음을 오래도록 붙잡았다.이현의 번호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숫자 배열,익숙한 진동음, 몇 번이고 주고받던 메시지창.하지만 오늘따라 그 한 문장이 다르게 느껴졌다.'지금.'그 단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유리를 향하고 있었다.밤공기가 차가웠다.초봄의 냄새는 따뜻하지도, 완전히 춥지도 않았지만, 유리는 괜히 겉옷을 한 번 더 여몄다.가로등 아래, 루체빌의 16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숫자는 조용히 오르고 있었고, 그 짧은 시간에도 마음은 수십 번을 오갔다.설렘. 기대. 그리고 아주 미세한 불안.‘혹시 무슨 일 생긴 건 아닐까.’‘아니면… 나한테 무슨 이야기 하고 싶은 걸까.’문 앞에 섰을 땐, 손끝이 먼저 멈칫했다.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기도 전,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평소 이현이 철두철미하게 잠그던 그 문이 오늘만은 조용히 열려 있었다.‘혹시 까먹은 걸까?’고개를 갸웃하며 살짝 문을 밀었고, 문은 작은 소리도 없이 열렸다.거실은 어두웠다. 불은 켜져 있지 않았고, 익숙한 라벤더 향이 코끝을 스쳤다.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유리는 신발을 벗으며 괜히 숨소리를 죽였다.살금살금, 소리 나지 않게 방 안으로 향했다.그러다 멈췄다.방 안에서 낮은 웃음소리와 숨소리가 들렸다.익숙한 목소리. 낮고, 부드럽고 사랑을 속삭이던 그 어조.“…유리야, 사랑해.”그 말이 들리는 순간, 유리의 걸음이 멈췄다.문틈은 아주 조금 열려 있었다.마치 일부러 누군가 손을 대고 멈춘 듯.그 틈 사이로, 조명이 어슴푸레 비추는 방 안.그리고 그 안에서 보인 모습.남자의 품에 안긴 여자.흘러내린 머리카락, 맨살이 드러난 어깨.밀착된 두 사람의 숨결.그리고 그 얼굴.그건, 유리의 얼굴이었다.하지만 유리는 지금, 문밖에 서 있었다.그 안에 있는 건

  • 대표님, 청소하러 왔는데요?   20화. 균열의 시작

    “좋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마음까지 줄 순 없다.”금요일 오후, 이현의 사무실 복도.이현은 오후 미팅을 마치고 복귀하던 중 창가 쪽 작은 회의실 앞에서 유진과 마주쳤다.평소처럼 단정하게 묶은 머리, 살짝 바른 립컬러,그리고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태도.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회의는 잘 끝나셨어요?”유진이 먼저 말을 걸었다.“네. 유진 씨는 점심 잘 드셨어요?”“네. 좋은 이야기 많이 나눴어요. 유익한 시간이었죠.”말은 평온했지만, 그 '좋은 이야기'라는 말 한 마디에무언가 짙게 가라앉은 감정이 묻어 있었다.사무실로 돌아온 이현은 잠시 앉아있던 의자에서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생각했다.‘무언가가 끝났다는 걸…그 사람보다 내가 먼저 느낄 수 있다면, 그건 내 책임이다.’그 책임이 지금 자신에게로 흘러들고 있었다.저녁이 가까워질수록, 유진의 움직임은 더 단정해졌고말투는 더 매끄러워졌지만 이현은 느낄 수 있었다.그녀가 조용히 선을 그었다는 것.그건 단절이 아니라, 정리였다.이현은 책상에 놓인 유진의 기획안 메모를 들여다보았다.간결하고 정확한 필기체. 철저하게 감정은 배제된 문장들.그 안에 어떤 마음도 실려 있지 않았다.퇴근 직전, 이현은 유진에게 다가갔다.“유진 씨.”“네, 대표님.”“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실로 먼저 들어갔다.닫힌 공간 안, 짧은 정적.“유진 씨… 오늘, 유리 씨와 점심 드셨다고 들었어요.”그 말에 유진은 조용히 웃었다.“네. 저희끼리도 얘기 나눌 시간쯤은…있어야 하지 않겠어요?”“그랬겠죠.”이현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왜냐면,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그저 ‘미안하다’는 말 외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네.”“혹시 지금, 마음이 정해지셨나요?”그 질문은 칼처럼 날카롭지 않았다.오히려 많이 참은 사람이 마지막으로 꺼내는 말처럼 들렸

  • 대표님, 청소하러 왔는데요?   19화. 닮은 얼굴, 다른 시선

    금요일. 회사 전체가 바쁘게 돌아가는 날이었다.출시 전 마지막 QA 일정이 몰린 탓에 디자인팀과 개발팀 모두 예민한 공기 속에 움직이고 있었다.유진도 책상 앞에서 계속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지만,집중은 쉽지 않았다. 그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오전 일정은 외근이라고 했지만,어디로 향했는지, 누구를 만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아니, 말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대답이었다.점심시간. 유진은 일부러 사무실에 남았다.책상 위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무의식적으로 화면을 켰다 껐다.이현에게 메시지를 보낼까,밥은 드셨냐고 물어볼까,그런 말조차 이제는 너무 늦어버린 것 같았다.그리고 그 순간,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대표님, 아까 그 파일 말씀하신 거 다시 확인해드릴게요.”유진은 고개를 돌렸다.이현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유리.서로 거리를 두고 걷고 있었지만, 그 거리 안에는 너무 많은 말들이 묻어 있었다.이현이 웃었다. 평소와 같은 미소였지만,유진은 그가 그 미소를 ‘누구에게’ 건넸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사무실로 돌아와 유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이상했다. 자신이 흔들리는 이 감정이질투인지, 외로움인지조차 이제는 분간하기 어려웠다.‘내가… 놓친 걸까?’아니, 애초에 잡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오후 5시. 디자인팀 회의 중,이현은 유리와 짧게 대화를 나누고 회의실을 나갔다.유진은 남아 있던 자료를 정리하며 이현이 앉았던 자리를 잠시 바라봤다.그가 유리와 말을 나눌 땐 미묘하게 눈을 마주쳤고,서로 말이 끝나기 전부터 웃고 있었다.그건 유진이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시선이었다.그날 저녁, 유진은 루체빌 근처 카페에 혼자 앉아 있었다.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그리고 수십 번쯤 했던 생각을 다시 반복했다.‘유리는… 그 사람 앞에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유리는 ‘청소’를 하러 갔지만, 그 공간은 단지 집 안이 아니라이현이라는 사람의 마음 한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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