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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두 사람 사이, 아무도 모르는 거리

last update Zuletzt aktualisiert: 10.03.2026 08:57:29

그날 밤, 이현은 평소보다 늦게 퇴근했다.

책상 위에 올려둔 커피잔은 이미 식어 있었지만,

잔향만은 여전히 그의 손끝을 붙잡고 있었다.

유진의 말투, 눈빛, 그리고 마지막에 남긴 한 마디.

“내일은 대표님 차례예요.”

그 말은 장난처럼 가볍게 흘러나왔지만,

묘하게도, 이현의 가슴 한구석을 오래도록 눌렀다.

그녀는 확실히 직진하는 사람이었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단정한 옷차림에 숨겨진 강단,

눈을 피하지 않는 솔직한 태도,

말보다 진심이 먼저 도착하는 사람.

하지만 이현은,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그 감정의 방향이 어디로 흘러야 옳은지.

창밖으로 조용히 스미는 밤공기를 바라보며,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참, 복잡하네..."

다음 날 오후. 루체빌 오피스텔 복도.

유리는 손에 장비 가방을 든 채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삑~' 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

그 문 너머로 마주한 이현은, 어제와 다름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유리는 문득, 마음 어딘가가 살짝 움찔하는 걸 느꼈다.

“오늘도 오셨어요.”

“오늘은 유난히 날씨가 좋네요. 이 집엔 햇살이 참 잘 들어오죠.”

밝게 웃는 유리.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자꾸만 이현의 표정을 쫓고 있었다.

장비를 꺼내 정리하던 유리는, 청소기를 작동시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즘 대표님, 기분이 자주 바뀌시는 것 같아요.

전에 뵐 땐 늘 똑같았는데, 요즘은 조금 다르달까.”

이현은 당황한 기색 없이 웃었다.

“일이 많아졌어요. 신입도 들어오고, 일정도 앞당겨지고...”

“아, 새 직원이요?”

“개발팀에 유진 씨라고 있어요. 실력도 성격도 괜찮은 분이에요.”

유리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그러다 아무렇지 않게 다시 청소기를 움직이며 대답했다.

이현도 무심결에 나온 유진의 이름에 유리의 눈치를 살필 수 밖에 없었다.

“오~ 듣기만 해도 멋진 분이네요. 대표님이 그렇게 말하시는 분이라면 더더욱.”

그녀는 웃었지만, 그 웃음은 이현이 아는 유리의 웃음과는 조금 달랐다.

조금은 조심스럽고, 아주 약간 슬퍼 보였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갑작스럽게 변한 그녀의 표정을 보니 유리와 유진은 쌍둥이 자매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에서 말 못 할 깊고 오래된 사연이 느껴졌기 때문에..

청소를 마친 유리는 현관 앞에서 장비를 정리하며 말했다.

“오늘은 왠지 좀 빨리 끝났네요.”

“늘 꼼꼼하게 해주시잖아요. 덕분에 늘 새 집 같아요.”

그 말에 유리는 살짝 웃었다.

“이 집은, 정말 신기하게도... 올 때마다 기분이 달라요.

가끔은 공기가 가벼운데, 또 어떤 날은… 조금 낯선 온도가 느껴져요.”

이현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 시선이 그녀의 말 너머를 듣고 있다는 걸 유리는 느꼈다.

신발을 신은 유리는 현관문을 열기 전, 잠시 이현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대표님. 가끔은요... 말 한 마디보다도, 사람 곁에서 나는 온기가 더 선명하게 전해질 때가 있어요.”

그 말은 길지 않았지만,

문이 닫힌 뒤에도 이현의 가슴 안을 오래 맴돌았다.

오늘 유리의 손끝은 여느 때보다 부드러웠고,

그녀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느렸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지금 이현에게는 가장 큰 고민이 되어가고 있었다.

*    *    *    *    *    *    *    *    *  

야근이 잦아지는 시즌.

개발실 안엔 늦은 시간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유진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코드창 속 커서가 깜빡이는 리듬에 맞춰,

가슴 어딘가도 묘하게 쿵쾅거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이현이 더 조용했다.

회의 중에도 필요한 말만 간결히 했고,

눈빛은 어디론가 멀어져 있는 듯 보였다.

유진은 그가 바쁘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 바쁨이 그녀에 대한 거리감이 되지 않았으면 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밤 아홉 시.

유진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

“대표님, 잠깐 괜찮으세요?”

이현은 노트북을 닫으며 고개를 들었다.

“네, 들어와요.”

유진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

그의 책상 너머로 커피 한 잔을 건넸다.

“오늘은 제가 만들었어요. 대표님이 좋아하시는 진한 블렌딩으로.”

이현은 잔을 받으며 작게 웃었다.

“고마워요. 이런 배려까지 받으니까 좀 어색하네요.”

“전, 이런 거... 좋아해요.”

유진은 책상 앞 소파에 앉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누군가를 챙기는 거요. 특별한 이유 없이. 그 사람이 더 편했으면 좋겠다는 마음만으로.”

이현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대표님도... 가끔은, 그렇게 누군가한테 편해져도 되는 거예요.”

그 말과 함께 유진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이현의 커피잔을 받치고 있던 손등에 손끝을 살짝 포개었다.

따뜻한 체온이 잔잔히 전해졌다.

무리하지 않았지만, 분명한 접촉이었다.

이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조용한 정적 속에서, 유진이 덧붙였다.

“대표님. 저... 혼자 착각하는 거 아니죠?”

그 물음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흘러나왔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현은 잠시 숨을 고르듯 눈을 감았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뺐다.

“유진 씨...”

짧은 이름의 호명. 그 너머로는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유진은 그 짧은 침묵 속에서 무언가를 읽었다.

“알겠어요.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천천히 웃었다.

“하지만 대표님. 저는 쉽게 포기 안 해요. 그건 아마, 대표님도 잘 아실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의 향기와 체온이 고스란히 남은 대표실 안에서,

이현은 오래도록 움직이지 못했다.

*    *    *    *    *    *    *    *    *  

루체빌 오피스텔, 목요일 오후.

햇살이 유리창 너머로 기울고 있을 무렵, 유리는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끝이 오늘따라 괜히 조심스러웠다.

삑~ 문이 열리고, 늘 그랬듯 익숙한 풍경이 그녀를 맞았다.

하지만 오늘 유리의 마음은 익숙함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오셨어요.”

이현은 부엌 근처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흰 셔츠에 말끔한 얼굴,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무언가 달랐다. 아니, 유리가 느끼기에 그랬다.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 참 좋네요.”

말을 건네며 유리는 안으로 들어왔고, 천천히 장비를 펼쳤다.

스팀기를 조립하며 그녀는 이현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대표님, 요즘 많이 바쁘세요?”

“네. 일정도 빠듯하고, 야근도 많아서요.”

“아... 개발팀에 새로 들어온 분이 꽤 능력 있다고 들었어요.”

그 말에 이현은 살짝 웃었다.

“유진 씨요. 네, 집중력도 좋고, 빠르게 적응하는 편이에요.”

유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은 친절했지만, 어쩐지 '특별함'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스팀기를 작동시켰다.

기계에서 퍼지는 증기 너머로, 이현의 뒷모습이 흐릿하게 비쳤다.

익숙한 그림자였는데, 낯설었다.

“대표님.”

유리는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요즘... 제 청소가 예전 같지 않다고 느껴지세요?”

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여전히 완벽하시죠.”

“그럼 다행이에요. 요즘... 제 마음이 조금 복잡해서,  혹시 손끝에도 티가 났을까 봐요.”

그 말에 이현은 잠시 유리를 바라보다가,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복잡할 땐, 손끝이 더 정직하잖아요.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유리는 스팀기의 전원을 끄고, 천천히 장비를 정리했다.

평소보다 느린 동작. 청소가 끝나고, 현관 앞. 이현은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유리는 신발을 신다 말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이현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대표님. 저... 요즘 이상한 꿈을 꿔요.

항상 이 집이고, 항상 대표님이 계세요.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이현의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유리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냥 꿈 얘기예요. 아무 의미 없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는 그 순간, 이현의 손끝이 그녀의 팔을 스쳤다.

“유리 씨.”

그는 무언가 말하려다 멈췄고,

유리는 그 말이 끝내 나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기다렸다.

하지만 결국, 이현은 입을 다물었다.

“다음 주에도... 같은 시간에 뵐게요.”

유리는 조용히 말한 뒤, 발걸음을 돌렸다.

그녀의 그림자가 천천히 복도를 따라 멀어져 갔다.

이현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마치, 말하지 못한 한 마디가 가슴 안에 박혀버린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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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표님, 청소하러 왔는데요?   24화. 사랑은… 착각이었어요

    문 앞에 앉아 있던 이현은 어느 순간, 누군가의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낯익은 실루엣.길게 풀어 내린 머리카락. 얇은 트렌치코트. 그리고 작은 숨소리. 유진이었다.그녀는 천천히 이현에게 다가왔다.그 눈빛은 이상하게 차분했다.울지도, 웃지도 않는 얼굴."찾을 줄 알았어요."유진이 말했다.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왜 이렇게까지 하세요.""왜 유리 언니만 봐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봤다."저도… 대표님을 좋아했어요."말끝이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말을 이었다."처음부터요. 처음 출근하러 왔던 날, 처음 인사했을 때부터…""나는, 언니처럼 조심스럽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라도"이현은 그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유진 씨."짧게, 단단하게."그날 밤, 전부 기억나요."유진의 손끝이 떨렸다."알아요. 저였다는 거…""근데, 그래도 괜찮았잖아요.""그래도,나를 안아줬잖아요.""그래서 나는…"이현은 고개를 저었다."그건 착각이었어요.""나는 유리 씨를 사랑합니다.."그 말은 잔인했다.하지만, 더 이상의 오해를 남기지 않으려면 지금 말해야 했다."유리 씨를, 그 사람만을 사랑했어요.""그 얼굴이 아니라, 그 사람이었어요.""그래서, 지금 여기 없는 거겠죠.""나를 알아보지 못한 사람을, 그 사람은… 용서할 수 없을 테니까."유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잠시 후, 그녀는 한 발 물러섰다."알겠어요."짧은 대답. 담담한 눈빛."그래도 후회는 안 할 거예요.""그 순간만큼은, 대표님을 안고 있었으니까."그리고 유진은 돌아섰다.트렌치코트 자락이 흔들렸다.밤바람이 조용히 그녀를 감쌌다.아무 말도 없이. 아무 눈물도 없이. 그렇게 유진은 사라졌다.이현은 벽에 기댄 채 천천히 주저앉았다.손끝이 떨렸다.심장도, 생각도, 모든 게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남은 건 오직 하나였다."유리 씨…"그녀를 찾아야 했다.

  • 대표님, 청소하러 왔는데요?   23화. 사랑이 가장 멀어지는 순간

    방 안엔 시계 소리만 가득했다.짹짹거리는 새소리도, 핸드폰 진동도, 누군가의 말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그녀는 작은 원룸에 머물고 있었다.평소엔 일하러 잠깐 머무는 공간이었지만,지금은 유일하게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이었다.커튼을 반쯤 닫고, 창을 열었다.기대 앉은 유리는 창밖 골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머릿속은 생각으로 가득했지만, 이상하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조용하네.”그녀가 속삭였다. 그 말조차도 허공으로 흘러 사라졌다.테이블 위엔 하루 전까지 쓰던 청소 장비가 그대로 있었다.구겨진 장갑, 정리하지 않은 천들, 방전된 무선 청소기.유리는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장갑 하나를 들었다.그 장갑은, 이현의 사무실을 청소했던 날 처음 껴봤던 것이다.그의 책상 옆에 쌓여 있던 먼지, 정리되지 않은 서랍,그리고… 조용히 지켜보던 눈빛.그 모든 게 지금은 먼 기억 같았다.휴대폰은 하루 종일 진동조차 울리지 않았다.그녀가 알림을 꺼놨기 때문이었다.문자를 보지 않아도 전화가 와도 받지 않아도그 사람이 자신을 얼마나 애타게 찾고 있을지 사실은 다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그냥, 버티고 싶었다.“지금은…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아.”낮이 지나고 해가 기울어가면서,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커피포트를 켜고, 작은 머그에 물을 붓고, 어깨에 걸쳤던 담요를 툭 떨어뜨렸다.거울 앞에 섰다.거울 속 그녀의 얼굴은 분명 유진과 같았다.그토록 많은 사람이 헷갈려 하던 그 얼굴.심지어, 그 사람조차도. 그게 분했다.아팠고, 무서웠다.‘내가, 그 사람이 안아준 얼굴이었을까.아니면 그냥, 그 얼굴이라서였을까.’그녀는 그날 밤 이후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눈물보다 깊은 상처는, 오히려 더 조용히 사람을 잠식했다.그저 먹지 않았고, 자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밤이 깊어지자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문자함엔 이현의 메시지가 여럿 도착해 있었다.“유리 씨, 괜찮으세요?”

  • 대표님, 청소하러 왔는데요?   22화. 당신은 끝까지 나를 몰랐어요

    “사랑은 가까워질수록, 더 뚜렷해지는 진짜를 요구한다.”햇빛이 창문을 타고 들어왔다.커튼 사이로 퍼지는 아침빛은 유난히 따뜻했지만, 방 안은 적막했다.이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머리가 무거웠다. 몸도, 마음도 이상하게 둔했다.옆에 누운 사람의 실루엣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긴 머리카락, 하얀 목덜미, 그리고 이불 위로 드러난 맨 어깨.그는 순간 미소 지으려다, 멈췄다.무언가 조금 달랐다. 기억은 흐릿하지 않았다.어젯밤, 분명 서로를 껴안았고, 사랑한다고 말했고, 숨결을 나눴다.그런데 그녀가 유리였다던 확신이 이상하게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그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옆에 누운 여자는 눈을 감고 잠든 채였다.그 얼굴. 낯설지 않았다.하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달랐다.입술의 곡선, 눈꼬리의 각도, 미간의 미세한 주름까지.유리는 이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이현의 손끝이 천천히 그의 핸드폰을 향했다.잠금화면을 켰다.가장 최근 보낸 메시지‘할 말 있어요. 지금, 집으로 와주실 수 있나요?’그는 잠시 멈췄다.“…내가, 이 문자를 보냈던가…?”기억이 없었다. 메시지를 쓴 적이 없었다.그제야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이불을 걷고 일어난 여자.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일어나셨어요?”그 말투는 유리의 말투였다.하지만, 유리의 눈빛이 아니었다.이현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유진 씨죠.”그녀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그리고, 다시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네. 맞아요.”이현은 손에 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그의 손등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왜 그런 짓을 했어요?”“그 밤은, 저한테도 필요했어요.”유진은 담담하게 말했다.“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느낀 적 없으세요?그 사람이 절대 몰라줄 걸 알면서도 그래도, 가지고 싶었던 감정.”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그의 가슴 안엔 뒤늦게 찾아온 진실보다유리의 얼굴이 무섭게 떠오르고 있었다.그녀는 이걸 봤을까.이현은

  • 대표님, 청소하러 왔는데요?   21화. 내가 없는 나의 고백

    ‘할 말 있어요. 지금, 집으로 와줄 수 있어요?’메시지는 짧았다. 그 어떤 장식도, 이모티콘도 없이 문장 끝조차 마침표 하나 없이 툭, 던져진 말.그럼에도 불구하고그 말은 유리의 마음을 오래도록 붙잡았다.이현의 번호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숫자 배열,익숙한 진동음, 몇 번이고 주고받던 메시지창.하지만 오늘따라 그 한 문장이 다르게 느껴졌다.'지금.'그 단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유리를 향하고 있었다.밤공기가 차가웠다.초봄의 냄새는 따뜻하지도, 완전히 춥지도 않았지만, 유리는 괜히 겉옷을 한 번 더 여몄다.가로등 아래, 루체빌의 16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숫자는 조용히 오르고 있었고, 그 짧은 시간에도 마음은 수십 번을 오갔다.설렘. 기대. 그리고 아주 미세한 불안.‘혹시 무슨 일 생긴 건 아닐까.’‘아니면… 나한테 무슨 이야기 하고 싶은 걸까.’문 앞에 섰을 땐, 손끝이 먼저 멈칫했다.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기도 전,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평소 이현이 철두철미하게 잠그던 그 문이 오늘만은 조용히 열려 있었다.‘혹시 까먹은 걸까?’고개를 갸웃하며 살짝 문을 밀었고, 문은 작은 소리도 없이 열렸다.거실은 어두웠다. 불은 켜져 있지 않았고, 익숙한 라벤더 향이 코끝을 스쳤다.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유리는 신발을 벗으며 괜히 숨소리를 죽였다.살금살금, 소리 나지 않게 방 안으로 향했다.그러다 멈췄다.방 안에서 낮은 웃음소리와 숨소리가 들렸다.익숙한 목소리. 낮고, 부드럽고 사랑을 속삭이던 그 어조.“…유리야, 사랑해.”그 말이 들리는 순간, 유리의 걸음이 멈췄다.문틈은 아주 조금 열려 있었다.마치 일부러 누군가 손을 대고 멈춘 듯.그 틈 사이로, 조명이 어슴푸레 비추는 방 안.그리고 그 안에서 보인 모습.남자의 품에 안긴 여자.흘러내린 머리카락, 맨살이 드러난 어깨.밀착된 두 사람의 숨결.그리고 그 얼굴.그건, 유리의 얼굴이었다.하지만 유리는 지금, 문밖에 서 있었다.그 안에 있는 건

  • 대표님, 청소하러 왔는데요?   20화. 균열의 시작

    “좋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마음까지 줄 순 없다.”금요일 오후, 이현의 사무실 복도.이현은 오후 미팅을 마치고 복귀하던 중 창가 쪽 작은 회의실 앞에서 유진과 마주쳤다.평소처럼 단정하게 묶은 머리, 살짝 바른 립컬러,그리고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태도.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회의는 잘 끝나셨어요?”유진이 먼저 말을 걸었다.“네. 유진 씨는 점심 잘 드셨어요?”“네. 좋은 이야기 많이 나눴어요. 유익한 시간이었죠.”말은 평온했지만, 그 '좋은 이야기'라는 말 한 마디에무언가 짙게 가라앉은 감정이 묻어 있었다.사무실로 돌아온 이현은 잠시 앉아있던 의자에서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생각했다.‘무언가가 끝났다는 걸…그 사람보다 내가 먼저 느낄 수 있다면, 그건 내 책임이다.’그 책임이 지금 자신에게로 흘러들고 있었다.저녁이 가까워질수록, 유진의 움직임은 더 단정해졌고말투는 더 매끄러워졌지만 이현은 느낄 수 있었다.그녀가 조용히 선을 그었다는 것.그건 단절이 아니라, 정리였다.이현은 책상에 놓인 유진의 기획안 메모를 들여다보았다.간결하고 정확한 필기체. 철저하게 감정은 배제된 문장들.그 안에 어떤 마음도 실려 있지 않았다.퇴근 직전, 이현은 유진에게 다가갔다.“유진 씨.”“네, 대표님.”“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실로 먼저 들어갔다.닫힌 공간 안, 짧은 정적.“유진 씨… 오늘, 유리 씨와 점심 드셨다고 들었어요.”그 말에 유진은 조용히 웃었다.“네. 저희끼리도 얘기 나눌 시간쯤은…있어야 하지 않겠어요?”“그랬겠죠.”이현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왜냐면,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그저 ‘미안하다’는 말 외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네.”“혹시 지금, 마음이 정해지셨나요?”그 질문은 칼처럼 날카롭지 않았다.오히려 많이 참은 사람이 마지막으로 꺼내는 말처럼 들렸

  • 대표님, 청소하러 왔는데요?   19화. 닮은 얼굴, 다른 시선

    금요일. 회사 전체가 바쁘게 돌아가는 날이었다.출시 전 마지막 QA 일정이 몰린 탓에 디자인팀과 개발팀 모두 예민한 공기 속에 움직이고 있었다.유진도 책상 앞에서 계속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지만,집중은 쉽지 않았다. 그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오전 일정은 외근이라고 했지만,어디로 향했는지, 누구를 만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아니, 말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대답이었다.점심시간. 유진은 일부러 사무실에 남았다.책상 위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무의식적으로 화면을 켰다 껐다.이현에게 메시지를 보낼까,밥은 드셨냐고 물어볼까,그런 말조차 이제는 너무 늦어버린 것 같았다.그리고 그 순간,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대표님, 아까 그 파일 말씀하신 거 다시 확인해드릴게요.”유진은 고개를 돌렸다.이현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유리.서로 거리를 두고 걷고 있었지만, 그 거리 안에는 너무 많은 말들이 묻어 있었다.이현이 웃었다. 평소와 같은 미소였지만,유진은 그가 그 미소를 ‘누구에게’ 건넸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사무실로 돌아와 유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이상했다. 자신이 흔들리는 이 감정이질투인지, 외로움인지조차 이제는 분간하기 어려웠다.‘내가… 놓친 걸까?’아니, 애초에 잡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오후 5시. 디자인팀 회의 중,이현은 유리와 짧게 대화를 나누고 회의실을 나갔다.유진은 남아 있던 자료를 정리하며 이현이 앉았던 자리를 잠시 바라봤다.그가 유리와 말을 나눌 땐 미묘하게 눈을 마주쳤고,서로 말이 끝나기 전부터 웃고 있었다.그건 유진이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시선이었다.그날 저녁, 유진은 루체빌 근처 카페에 혼자 앉아 있었다.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그리고 수십 번쯤 했던 생각을 다시 반복했다.‘유리는… 그 사람 앞에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유리는 ‘청소’를 하러 갔지만, 그 공간은 단지 집 안이 아니라이현이라는 사람의 마음 한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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