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이 유리에 붙으면서 전해온 차가운 촉감은 순간 소희의 모든 세포를 자극하고 있었다.30층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도시는 마치 심연과 같았다.하지만 모든 것이 또 그렇게 익숙할 수가 없었다.소희는 갑자기 아주 긴 꿈을 꾸다 깨어난 것 같은 황홀감이 들었다.한낮의 햇살은 남자의 옆모습을 더욱 눈부시게 비추었다..상체에만 헐렁헐렁하게 흰색 셔츠를 걸쳐 입은 그의 넓은 어깨에는 손톱에 긁힌 붉은색 자국이 나 있었고, 그 자국은 팽팽한 근육을 따라 아래로 쭉 이어졌다. 왠지 모르게 섹시하면서도 매혹적이었다.소희는 고개를 들어 유리에 기대었다. 그러자 눈부신 빛이 눈에 비치면서 현기증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소희가 참지 못하고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소희는 다시 잠들었다. 다만 잠들기 전 임구택이 그녀를 달래며 약 두 알을 먹였다.어렴풋이 그중 한 가지 약의 냄새가 익숙한 것 같아 눈을 반쯤 뜨고 물었다."무슨 약이야?"임구택이 알약을 소희의 입술 옆으로 가져다 대고 그녀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피임약."이에 소희가 입술을 벌리고 알약을 삼켰다."착하네."임구택이 소희의 입꼬리에 입술을 한 번 맞추고는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잘 자."*소희는 지금 극도로 잠이 필요할 때라 오후부터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잠에서 깨지 못했다.그러다 누군가가 계속 건드려서 겨우 잠에서 깨게 되었다. 소희는 귀찮다는 듯 몸을 비틀고 애교가 섞인 어투로 소리쳤다."임구택, 하지 마!"그리고 그녀의 말투는 두 사람 다 멍하게 만들었다. 순간 두 사람이 함께 어정에서 살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소희는 어쩔 수 없이 깨어나 눈살을 찌푸린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흐리멍덩했던 눈동자는 점점 맑아지고 있었다.한참 후, 임구택이 일어나 소희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러자 소희가 곧 또 눈을 감았다.임구택이 불을 켜고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소희를 품에 안고 물었다."자기야, 뭐 좀 먹을래?""아니, 나 잘래."소희가 피곤함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자의 품에서 나온 소희는 일어나서 욕실로 갔다.익숙한 곳, 심지어 바디워시까지 기억 속의 그 냄새였다. 소희는 물을 틀어 몸 곳곳을 깨끗이 씻었다. 마음속은 어수선하고 초조했다.‘이미 헤어진 두 사람이 왜 또 같이 얽히게 된 거지?’소희의 눈빛은 얼음장마냥 차가웠다.샤워를 마친 후 드레스룸으로 가서 옷장을 열었다. 안에는 역시 그녀의 옷들이 걸려 있었다.예전에 입었던 것도 있고 새로 구입한 것도 있었다.새로 장만한 옷들을 보면서 소희는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느껴졌다.심플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골라 입은 소희는 안방을 지나 침대 위의 남자를 보지도 않고 밖으로 나갔다.그러자 뒤에서 남자의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인사도 없이 가?"그 소리에 소희는 발길 멈추고 몸을 돌리지도 않은 채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쉬는 데 방해할까 봐."부드러운 가죽 침대 머리에 기대어 이불로 몸을 반쯤 가린 임구택의 얼굴은 눈부셨고 표정은 느긋하게 풀어져 있었다. 이 순간만큼 섹시하고 매혹적일 수가 없었다.소희의 말에 임구택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체에만 헐렁한 긴 바지를 입고 있었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체의 가슴과 어깨 쪽에는 온통 옅은 흔적투성이었다.그는 뒤에서 소희를 껴안고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내가 1박 2일 동안 네 시중들었는데 보수도 안 줘? 적어도 2만 원은 줘야지."그는 처음으로 그녀와 사랑을 나눈 후 2만 원만 남기고 줄행랑을 쳤었다.그의 말에 소희도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녀의 웃음음 차가웠다."임구택, 이현이 네 연극에 이토록 잘 맞춰준 걸로 봐서는 네가 엄청 많은 이익을 줬겠네?"임구택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다."무슨 뜻이야?""이현과 무슨 사이인 거야? 만약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면 왜 나를 속였어? 어젯밤의 일도 너희 둘이 함께 꾸민 거야?"임구택이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아니야.""뭐가 아니야? 사귀는 사이가 아니야? 아니면 어제 일이 너희 둘이 같이 꾸민 게 아니야?"
그는 손을 뻗어 소희의 가는 허리를 안았다. 그러고는 입술을 맞추려는데 소희가 갑자기 뒤로 물러났다. 눈빛에는 이미 소외감과 냉정함이 다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속엔 어느 정도의 경각심도 섞여 있었다."아니, 난 필요 없어!"말을 마친 후 소희는 개보다 더 무서운 것에 쫓기고 있는 사람마냥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임구택은 다소 좌절한 표정으로 문을 내팽개치고 떠나는 소희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뒤로 문틀에 기대어 이마를 짚으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소희에 대해 어쩔 수가 없으면서도 마음이 아팠다.어젯밤 소희가 흐리멍덩한 상황에서 한 그 말들은 그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졌다. 아마도 남은 생은 속죄하면서 살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때 그가 탁자 위에 놓은 핸드폰 화면이 갑자기 밝아졌다.두 날 동안 그의 핸드폰은 줄곧 무음 상태였다. 그렇게 아무 전화도 받지 않으면서 전심전력으로 소희를 시중들었는데.‘양심도 없는 녀석!’임구택이 핸드폰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무슨 일이야?"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명우였다.[대표님, 어제 점심 류개와 이현 등 세 사람이 선후로 블루드를 떠났습니다. 이현이 마지막으로 떠났는데 정신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임구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계속 주시하고 있어."[예!]명우가 대답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참, 소희 아가씨의 물건이 제 손에 있는데, 대표님에게 드릴까요, 아니면 소희 아가씨에게 드릴까요?]"무슨 물건인데?"[총입니다.]총이 맞긴 했지만 진짜 총은 아니었다.임구택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나한테로 가지고 와."[네!]……소희는 단숨에 아래층으로 내려왔다.방금 큰비가 내린 것 때문에 공기가 맑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습하고 무더웠다.그리고 그 습하고 더운 공기는 아침부터 사람을 짜증 나게 했다.금요일 밤의 일은 그녀도 임구택이 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도와주러 간 것이었다.
류 조감독은 신인 배우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고, 술도 한 잔 따라줬다.하지만 그는 차를 몰고 간 거라 술을 마시지 않고 옆에 놓인 물을 마셨다. 그러고 나서 온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고, 소파에 쓰러진 채 이현이 그의 손을 잡고 그의 휴대폰 잠금을 해제해서 소희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장면을 보기만 했다, 초조해 미칠 것 같았지만 몸은 나른해진 채 힘을 쓸 수가 없어서.그가 너무 어리석어서 소희를 해친 것이었다.소희가 듣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쉬었다."그런 말 하지 마요. 제대로 따지고 보면 정남 씨가 나 때문에 연루되었는걸요. 일단 푹 쉬어요, 그리고 내일 만나서 다시 이야기해요."[응.]이정남이 대답하고는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다시 물었다.[소희야,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아?]"그럼요."전화를 끊은 후의 소희의 얼굴색은 엄청 어두웠다.‘임구택! 분명 날 병원에 보내 위 세척하게 할 수 있었으면서 하필!’‘그러고도 나보고 감사를 표하라고? 꿈도 야무져!’소희가 어정에서 나오자 벤틀리 한 대가 이미 주택단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운전기사가 차에서 내려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소희 아가씨, 임 대표님께서 아가씨를 집까지 모셔다드리라는 명입니다.""괜찮습니다."소희가 냉정하게 거절하고는 택시 한 대를 잡아 올라 떠났다.이에 운전기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임구택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대표님, 아가씨께서 제 차를 타지 않으시고 따로 택시를 잡았습니다."임구택이 짧게 탄식 한 번 하고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래, 내버려 둬.]‘이번엔 정말 화가 났나 보네.’*택시에 올라탄 후 소희가 또 청아에게 연락을 했다. 청아도 깜짝 놀랐다.[소희야, 너 어디야? 집에도 없고, 전화도 꺼져 있고. 나 방금 경찰에 신고했어!]소희가 웃으며 말했다."나 괜찮으니 빨리 경찰에게 해석해. 경찰 아저씨한테 폐를 끼치지 말고."[그래서 너 지금 어디야?]"경원으로 돌아가는 길, 곧 집에 도착할 거야."[나 진짜
명우의 물음에 임구택이 잠시 멍해 있더니 곧 세 글자를 뱉었다."매부리!""네, 이건 매부리 특유의 무기입니다."임구택의 눈빛에 순간 경악이 스쳐 지났다."그럼 소희가......""틀림없을 겁니다."임구택은 놀라움에 빠졌다. 전에 밀수의 일에 대해 조사했을 때소희가 매곡리라는 암흑 조직과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건 알아내긴 했지만 그녀가 바로 매부리일 줄은 몰랐다.줄곧 자신이 소희를 충분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일이 더 있을 줄이야.그는 다시 그 ‘총’을 들고 관찰했다. 차갑기만 했던 무기가 갑자기 온도가 생긴 것 같았다.*소희는 하루 종일 잠만 잤다. 심지어 꿈도 꾸지 않은 채.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 바깥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몸을 뒤척여 침대에 엎드린 소희의 눈동자는 맑고 고요했다.창밖에는 고층 건물이 즐비하고 거리에는 차들이 줄지어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저녁 무렵의 강성은 항상 낮보다 더 떠들썩한 것 같았다. 누군가는 바쁜 하루를 마감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밤 생활이 금방 시작되었다.유리창에 비춘 노을의 빛은 황금색에서 점점 주황색으로 변했고, 마지막엔 조금씩 사라졌다.방안은 더욱 어두워지고 조용해졌다.그러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서야 소희가 기지개를 켜고 청아에게 전화를 걸었다."돌아왔어? 저녁에 밥하지 말고 요요랑 같이 외식하자."너무 배고팠던 모양이다.그래서 전화를 끊자마자 소희는 재빨리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가 요요를 찾았다.......다음날드디어 출근하는 날이 오자 이정남이 기세등등하게 제작팀에 도착했다. 이현과 류 조감독을 찾아 결판을 내려고 했지만 화를 낼 곳이 없었다.이현, 류 조감독 그리고 여민까지 세 사람 전부 출근하지 않았으니까.그러다 화요일 오후가 되니 제작진의 재촉 전화에 여민이 드디어 나타났고, 이정남이 여민을 구석으로 데리고 가 그녀의 옷깃을 잡고 물었다."이현이 지금 어디에 살아? 그리고 류개 그 나쁜 놈은 어디에 있고?"여민이 어두워진 얼굴색으로 대답했다.
‘류 조감독은 이득을 보았지만 이현에게 보복당할까 봐 두려워서 안 온 거고, 이현은 아마도 아직 멘붕상태에 처해 있겠지?’이정남은 갑자기 예전에 촬영세트장에 있었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땐 그와 소희가 방금 이현을 알게 되었고, 당시의 이현은 순진하고 귀여우면서도 식탐이 많고 자주 토라지곤 했다. 세 사람은 늘 작은 정원에 앉아 장난치며 담소를 나눴었는데.사실 소희는 그들의 시시한 화제에 별로 참여하지 않았다. 대부분은 그와 이현이 장난을 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그래서 주 감독은 그가 이현을 좋아하는 줄 알고 신중해야 한다며 충고까지 해주었고.사실 그는 이현에 대해 확실히 약간의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두 사람의 차이가 점점 커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 호감을 자제했던 것이다.그러나 그는 그들 사이의 차이를 벌여놓은 게 두 사람의 신분 변화가 아니라 이현의 탐욕과 위선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는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본 거에 화가 났고, 그토록 소희를 다치게 한 이현이 죽도록 미웠다. 그래서 이현의 처지를 알게 된 후 다시 이전을 생각해 보니, 통쾌하면서도 또 약간의 섭섭함과 아픔이 섞여 있었다.‘임구택이 좋아하는 사람이 소희라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왜 주제넘게 달려들었을까?’‘왜 소희를 배신했을까?’‘이 모든 건 이현의 자업자득이야.’"날 때릴 거야?"그 일을 겪고난 후 여민은 세상에 미련을 버렸다. 심지어 이번 작품만 끝나면 연예계를 탈퇴할 작정이었다."널 때리면 내 손이 더러워질 거야."이정남이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소희를 데리고 떠났다.*이현이 받은 타격은 여민보다 더 컸다.여민은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은 시간이 길어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이현은 다르다.그는 데뷔하자마자 유명 감독의 인정을 받았고 그 후 승엔과 계약하여 순풍에 돛 단 듯이 순조로운 연예 생활을 시작했다. 게다가 배후에 임구택이 있어 종래로 그녀를 괴롭히는 사람이 없었다.그날 밤, 무너진 건 그녀의 몸뿐만 아니라 멘
"뭘 그렇게 넋을 놓고 봐?"소희는 덤덤하게 웃으며 통계표를 미나에게 건네주었다."이것대로 배우들에게 의상을 준비해 줘.""네!"미나가 대답했다. 하지만 소희를 보는 눈빛이 약간 복잡했다.소희는 방으로 돌아가 계속 작업에 전념했다. 그런데 10분도 안 되어 핸드폰이 진동했다.성연희였다."이 시간에 웬 전화야? 안 바빠?""소희야, 인터넷 뉴스 봤어?"소희에게 되묻는 성연희의 목소리는 차갑고 무거웠다."무슨 뉴스?""너와 임구택에 관한 거야. 빨리 봐!"소희가 잠깐 멍해지더니 곧 컴퓨터를 켜고 계정에 접속했다."대체 네가 미행당한 거야, 아니면 임구택이 미행당한 거야?"성연희가 노발대발하며 말했다."내가 지금 바로 명성 씨 회사의 홍보팀을 찾아 언론을 통제해 달라고 할게. 그리고 지금 제작진 밖에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을 수 있어. 그러니 먼저 제작진을 떠나지 말고 기다려, 내가 사람 데리고 널 데리러 갈게."신속히 실검에 오른 뉴스를 확인한 소희의 눈빛은 유난히 차가웠다. 그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이 일은 아마 이현과 관련이 있을 거야. 임구택이 나설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알았어."전화를 끊고 소희는 다시 실검 뉴스를 한 번 훑어보았다. 이현이 그녀에게 보복하려고 한 짓인 게 분명했다.뉴스 속엔 소희와 임구택이 경원주택단지의 아래층에서 찍힌 사진도 걸려 있었다. 사진이 찍힌 각도로 봐서는 프로의 작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주 소희와 임구택이 알콩달콩하게 찍혔으니까.곧 누군가가 소희의 신분을 파헤쳐 냈다. 제작팀의 패션 디자이너라는 것과 이현과 한 제작팀에 있다는 것도.그래서 지금 댓글이 폭주하고 있었다. 다들 그녀가 이현의 남자친구를 꼬신 뻔뻔스러운 여인이라고 욕하고 있었다.그중에는 제작진의 스태프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나서서 임구택이 이현 보러 왔을 때 소희가 고의로 접근하여 업무적으로 상의할 게 있다며 임구택의 번호를 따갔다고 폭로했다.심지어 그녀가 제작진의 조감독과 제작팀의 직원을 꼬셨다
소희가 듣더니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아주머니보고 요요를 잘 보고 있으라고 해. 최근 이틀 동안은 밖을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알았어. 그럼 너는? 너 어디야?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야?]걱정이 앞 선 청아가 급히 물었다.하지만 그러는 청아와 달리 소희의 태도는 오히려 덤덤했다."나 괜찮아, 요 며칠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 그러니까 아주머니와 함께 요요를 잘 지키고 있어."청아는 여전히 시름이 놓이지 않아 다시 물었다.[소희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뉴스 한 번 찾아봐.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난 괜찮으니까."소희의 대답에 청아가 바로 뉴스를 확인했다. 그러다 한참 후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입을 열어 물었다.[이현이라는 배우가 바로 예전에 너와 같은 제작진에서 일했다는 그 친구지? 사이가 괜찮다고, 우리 함께 영화도 같이 본 적이 있던 그 친구?]“응.”[그런데 왜 나와서 해명하지 않는 거야? 인터넷에서 떠들고 있는 것들이 다 잘못된 거잖아.]분명 사이좋은 친구이면서 전혀 나서 해명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현의 태도에 청아는 답답하면서도 의아해 소희에게 물었다. 그러다 소희의 의외적인 대답에 청아는 순간 할 말을 잃게 된다."이현이 벌인 일이니까."[뭐?! 어떻게...... 안 되겠다. 내가 댓글을 남겨 진실을 밝힐 거야!]"하지 마, 청아야! 네티즌들이 이미 제대로 말렸어. 그러니 네가 무슨 말을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게다가 어느 이성을 잃은 네티즌이 네 주소와 신분을 찾아내 인터넷에 폭로하기라도 한다면 요요는 위험해질 거야."급하고 화 나는 마음에 청아의 눈가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그럼 너 그렇게 누명을 쓴 채 진실을 모르는 네티즌들의 욕만 먹고 있을 거야?]"어차피 사실이 아니니 날 다치게 할 수 없어."소희가 의외로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하지만 청아는 그러는 소희의 모습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소희야, 나 너무 쓸모없는 거 같아. 내가 어려움에 부딪혔을 땐 네가 옆에서 나를 도와
베란다에 누워 자고 있던 애옹이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거실에 나와 두 사람이 키스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다가, 다시 몸을 말고 잠들었다.하루 종일 요동치던 일들이 지나간 이 고요한 밤, 이 키스는 수많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유진을 향한 갈망, 어린 시절에 겪었던 상처, 은정의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했던 분노와 억울함은 결국 이곳에서, 유진에게서 위로받고 구원받았다.유진은 은정에게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을 내어주었다. 은정이 가졌던 상처를 달래주고, 세상의 모든 부드럽고 따뜻한 것을 그에게 쏟아주며 약속했다. 앞으로는 항상 함께할 거라고, 언제나 그의 곁에 서 있겠다고.수많은 굴곡과 고난을 지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멈춰 선 은정은, 이마를 유진의 이마에 맞댄 채 낮고 거친 숨결로 속삭였다.“우리, 연애하자.”유진은 촉촉한 눈동자에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 조금 물기 어린 입술을 살짝 깨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응?”은정이 긴장과 초조가 섞인 음색으로 다시 물었다. 유진은 살짝 발을 들어 그의 입술을 살짝 깨물며 부드럽게 말했다.“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게 연애 아니에요?” 친구끼리 서로 이렇게 위로하던가? 은정은 깊게 웃으며, 유진을 품에 안고 거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유진은 은정의 어깨에 살포시 엎드려, 귀에 바람을 불듯 속삭였다.“지금 시간 늦었어요.”“응.”은정은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응답했다.“이젠 가야 하지 않을까요?”유진은 한 손으로 은정의 어깨를 토닥이며 조심스레 말했다.“혼자 있고 싶다면 그냥 말해요. 전 억지로 안 남아요. 그냥, 그냥 이야기 나누고 싶을 때면, 그땐 제가 옆에 있어 줄게요.”은정은 잠시 숨을 참았다. 유진을 소파에 내려놓고, 한 손으로 소파 등받이를 짚으며 내려다봤다.둘의 눈빛이 마주쳤고, 유진은 갑자기 숨을 참았다. ‘말릴까? 아니면 붙잡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보내줄까?’은정의 그림자는 본래 어두운 거실의 조도보다도 더 짙었다. 유진의 눈에는 오직 그 사람, 그 눈동자만이 또렷
구은태가 경찰서 복도 밖으로 나왔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한 건 기다리고 있던 임유진이었다. 유진은 평소처럼 단정하게 서서,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할아버지.”구은태는 난처하고 부끄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유진아, 이런 꼴 보여서 정말 미안하구나.”유진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할아버지, 전에 회장님 댁에서 제가 드린 말씀 기억하세요?”구은태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에 유진은 천천히 또렷하게 말했다.“제가 말씀드렸죠.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삼촌을 믿어달라고요. 왜냐하면 할아버지는 삼촌의 아버지이고, 삼촌에게 있어서 가장 가까운 분이니까요.”“그런 분마저 삼촌을 믿지 않으시면, 삼촌은 정말 많이 힘들 거라고요.”은태는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묵직한 통증이 일었다. 그는 고개를 떨구며 입을 열었다.“내가, 내가 은정이를 너무 몰랐어.”유진은 눈동자에 서늘한 빛을 머금고 단호하게 말했다.“할아버지, 삼촌은 술에 취했더라도 절대 은서 이모를 건드릴 사람이 아니에요. 그건 저도 확신했는데, 왜 할아버지는 믿지 않으셨던 거예요?”“그땐...”구은태는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한 채 말끝을 흐렸다. 유진은 똑바로 그의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할아버지께서 믿어주셨다면, 16년 전 집을 떠나는 일도 없었을 거예요. 이번에도 믿어주셨다면, 서선영 모녀가 그렇게까지 날뛰지도 못했겠죠.”“그 모든 결과는 단지 믿음 하나의 유무에서 갈린 거예요.”“제가 감히 이런 말씀을 드려 죄송하지만, 제발 다음에 삼촌이 또 누군가의 의심을 받을 일이 생기면, 그땐 꼭 먼저 삼촌의 편에 서주세요. 그래주실 수 있죠?”“유진아.”낯익은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구은태가 고개를 돌리자, 은정이 성큼성큼 걸어와 유진의 손을 꼭 붙잡았다.구은태는 아들을 바라보며 눈가가 붉어졌지만, 은정은 단 한 번도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유진의 손을 놓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차에 올라타자
구은태는 오열하며 무릎을 꿇은 구은서를 바라보다가, 결국 눈가가 붉게 젖었다.“은서야, 어쩌다 이렇게 됐니? 네 엄마가 널 망친 거야!”“너도 왜 그렇게 어리석었니? 어떻게 네 오빠를 해치자는 그 인간하고 손을 잡을 수가 있어!”은서는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꼈다.“아빠, 저는 정말 딱 한 번만, 다시 일어설 기회를 원했어요. 이 몇 년 동안, 제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아세요?”“전 임구택을 진심으로 사랑했어요.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절 원하지 않았어요. 소희 때문이에요.”“그 이후로 제 커리어는 바닥이었고, 장명양이랑 친구들도 다 떠나갔어요. 전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에요.”“그저 비웃음만 받는 존재였어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어요. 그런데 이제야 겨우 다시 올라갈 기회가 왔어요.”“그런데 오빠가 돌아왔고, 회사 재정권까지 쥐고 있으니, 절 도와줄 일은 절대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그래서 어쩔 수 없이 외삼촌에게 부탁드린 거예요. 제 경력이 다시 살아야, 복수도 가능하고, 제가 잃었던 것들을 다시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은서는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떨구고, 바닥에 완전히 쓰러졌다.“아빠 전 정말 괴로웠어요. 정말로 너무 미웠어요.”은서는 자주 자신이 한때 빛나던 시절을 떠올리곤 했다. 은서는 구씨 집안의 장녀였고, 강성에서 가장 유명한 임씨 집안의 구택과 친구였고, 많은 여자들의 부러움을 샀다.젊고 아름다웠고, 대학 재학 중에 영화 주연을 맡아 대히트를 쳤으며, 수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곁엔 늘 장시원, 장명양 같은 친구들이 있었다. 은서의 인생은 완벽했고, 누구보다도 찬란했다.구택이 은서에게 청혼했을 때, 그녀는 그 모든 빛에 취해 있었다. 그녀는 더 유명해지고 싶었고, 더 뜨거운 인기를 원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돌아와, 임씨 집안의 며느리가 되면 인생이 완성된다고 믿었다.해외 활동도 좋았다. 점점 더 이름이 알려졌고, 팬도 늘어났다. 그러나, 소희라는 이름이 강성에 나타
장말숙은 구은정이 들어오자마자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도련님, 죄송해요. 저, 정말로 사모님께 돈을 받고, 사모님 지시에 따라 마실 것에 약을 넣었어요. 정말 죄송해요.”“돈에 눈이 멀었어요. 이렇게 된 것도 제 업보예요.”갑작스러운 장말숙의 행동에 모두가 놀랐고, 구은태도 무언가를 깨달은 듯 분노에 찬 눈으로 서선영을 바라보았다. 서선영은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얼굴은 잿빛이었다.은정은 아무 말 없이 장말숙을 지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장말숙은 가족에게 부축받아 겨우 일어섰다.사실 장말숙의 손자를 납치한 건 서선영이 직접 시킨 게 아니었다. 서선영이 보내 협박을 지시했던 사람이 그런 짓을 한 것이다.은정은 은서가 경찰서에 나타나지 않은 걸 눈치챘고, 미리 준비해 둔 사람들이 그녀의 차량을 추적하고 있었다.잠시 후, 은정이의 사람이 전화를 걸어왔다.[구은서 씨는 경찰서에 가지 않았어요. 하지만 구은서 씨를 따라가는 인물이 하나 있는데, 아직 정체가 불분명해서, 계속 주시 중이에요.”“절대 놓치지 마세요.”은정이 단호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사장님!]그 시각, 은서는 공항에 도착했지만, 차량이 앞뒤에서 두 대의 차량에 가로막혔다. 은서는 급히 차에서 내려 상황을 살피려다 차에서 내리는 명우를 보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명우는 차가운 표정으로 다가왔다.“은서 씨, 우리 사장님께서 분명히 해외에서 조용히 지내라고 말씀하셨죠? 근데 들은 척도 안 하시네요.”은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저 지금 당장 떠날 거예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요!”“아니요.”명우는 차디찬 음성으로 말했다.“우리 사장님이 마음을 바꾸셨어요. 그토록 강성을 좋아하신다니, 이제는 그냥 여기 눌러앉으시죠. 절대 못 나가요.”은서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임구택은 정말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명우의 눈빛은 싸늘했다.“사장님께서 정말 당신을 죽이고 싶으셨다면 방법은 수백 가지였을 거예요. 그분은 당신의 생사엔 관심 없어요. 당신을 살면서 죽을
구은서의 말은 애절했고, 눈물 가득한 얼굴은 누가 보아도 가련했다. 구은태는 자신이 이십 년 넘게 아끼고 사랑해온 딸을 바라보며 격했던 감정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임유진과 구은정은 눈빛을 마주쳤다. 오늘 이 자리에서 반드시 서선영 모녀를 끝장내야 한다는 예감이 동시에 스쳤다. 다시는 숨 쉴 틈을 줘선 안 된다.유진이 입을 열려던 찰나, 휴게실 문이 갑자기 열리고 몇 명의 경찰이 들어왔다. 방 안 상황을 본 경찰들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곧 차분히 물었다.“서선영 씨는 누구시죠?”서선영은 여전히 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참이라 얼굴에 눈물이 범벅된 채로 당황스럽게 대답했다.“저예요. 무슨 일이죠?”경찰은 단호하게 말했다.“현재 한 유괴 사건에 연루되셔서, 저희와 함께 경찰서로 가주셔야겠네요.”“유, 유괴 사건이요?”서선영은 얼이 빠진 듯 말을 더듬었고, 은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경찰이 왜 여길 찾아온 거지?’‘분명히 손기수를 시켜 장말숙 가족에게 절대 신고하지 말라고 위협했고, 따로 사람도 붙여 감시하게 했는데, 분명 신고는 없었어. 그런데 대체 어떻게 경찰이?’유진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때가 왔고,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서선영 모녀에게서 도망칠 구멍조차 허락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이에 구은태도 놀라 물었다.“유괴라니, 무슨 소리죠?”경찰은 구은태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지금 서선영 씨께서 유괴 사건에 관련된 정황이 있어 조사 차 동행을 요청드려요. 협조 부탁드릴게요.”은태는 다시 서선영을 바라보았다.“또 뭘 꾸민 거야, 이 악마 같은 여자가.”은태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듯 차가웠다. 서선영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은정이 나섰다.“같이 가죠. 조금 전까진 은서가 우리 가족이라며 감쌌잖아요? 가족이면 함께 있어야죠.”그 말에 구은서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무언가 아주 불길한 일이 다가오고 있었다.원래 오늘 구씨 파티가 끝
서선영은 곧장 구은태에게 달려가 그를 붙잡았다.“여보!”구은태는 휘청였지만 몸을 간신히 지탱했고,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쉰 목소리로 고함쳤다.“꺼져, 이 악독한 년!”서선영은 힘없이 문 쪽으로 내동댕이쳐졌고, 그 순간 문이 열리며 구은서가 들어왔다. 방 안의 참혹한 광경을 본 은서는 당황한 듯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구은태는 핏발 선 눈으로 서선영을 가리키며 외쳤다.“네 엄마한테 물어봐. 대체 뭘 한 건지!”은서는 아버지의 분노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은정을 모함한 일이 들킨 건 아닌가 싶어 애써 표정을 감추고 서선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엄마, 무슨 일이야?”서선영은 그저 얼굴을 감싸 쥐고 울고 있을 뿐이었다.그때, 구은태는 갑자기 은서를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서선영을 바라보고 물었다.“사실대로 말해. 은서, 이 애가 정말 내 딸이 맞아?”“맞아요!”서선영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은서는 당신 딸이에요. 그건 정말 확실해요!”“좋아. 지금 제대로 말 안 했다가 내가 친자 검사로 진실을 알게 되면, 그땐 죽여버릴 거야!”구은태는 분노로 이를 갈며 말하자, 서선영은 흐느끼며 소리쳤다.“정말이에요! 제 목숨 걸고 맹세해요. 제가 거짓말이면 천벌을 받아도 좋아요!”그제야 은서는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건 은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였다.은서는 구은정에게 맞아 쓰러져 있는 최이석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어떤 장면이 뇌리를 스쳐갔고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서선영은 엉금엉금 기어가며 구은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다.“여보, 제가 배신하고 잘못한 건 맞아요. 하지만 은서는 정말 당신 딸이에요. 그렇게 똑똑하고 예쁜 아이잖아요.”“당신도 얼마나 예뻐했어요. 은서 봐서, 제발 이번만 용서해 주세요!”그제야 은서는 모든 걸 직감했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그러나 임유진은 이를 꽉 물고 단호하게
최이석도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멍하니 있다가, 순간 정신을 차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곧장 도망치려는 듯 문을 열었는데, 그 문 너머에는, 구은정의 날렵하고도 위압적인 실루엣이 서 있었다.은정은 말없이 다가오더니 그대로 발을 들어 최이석의 가슴팍을 걷어찼다.“컥!”이석은 뒤로 넘어지며 카펫 위에 엎어졌다.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지만, 그 울음은 진짜인지 연기인지 분간되지 않았다.그때, 숨을 거칠게 내쉬며 구은태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얼굴은 철저히 일그러져 있었고, 그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렸다.그리고, 구은태는 서선영 앞에 멈춰서더니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서선영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뺨을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서선영은 그 충격에 그대로 몸이 비틀어졌고, 얼굴을 감싸 안으며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이 더러운 년!”구은태는 서선영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고 또다시 손을 들어 그녀의 반대쪽 뺨을 갈겼다.“제가 잘못했어요. 한순간, 제가 정신이 나갔었어요.”서선영은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구은태의 손을 붙잡고 오열했다. 그녀의 두 볼은 이미 시퍼렇게 부어오르고 있었다.“대체 너희 둘, 언제부터 이런 짓을 벌인 거야!”구은태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그 순간, 최이석이 조롱 섞인 웃음을 흘리며 비틀비틀 일어섰다.“솔직히 말해줄까요? 서선영이 당신 만나기 전부터 벌써 나랑 자고 있었어요. 회사 들어간 이후로는 매주 만나서 몸 섞었고요.”“입 닥쳐!”서선영은 미쳐 날뛰듯 소리쳤지만, 최이석은 그녀를 보지도 않고 구은태만을 노려봤다.“저 여자는 당신을 사랑한 적 없어요. 사랑한 건 당신 지갑뿐이고요. 30년 전, 당신이 술 마시고 덮쳤다고 생각했죠?”“웃기지 마요. 전부 미리 짜놓은 대본이었으니까. 그때 은서가 생겼고, 도망친 척하면서도 사실 계속 강성에 있었어요.”“당신 바로 곁에서, 우릴 속이고 있었던 거죠. 참, 당신 원래 부인 왜 갑자기 병세가 악화됐는 줄 알아요?”“서선영이 일부러 임신한 배를
구은서는 서선영보다 훨씬 더 잔인했기에, 임유진은 점점 불안해졌다.“혹시 그 애까지 다치게 되는 건 아닐까요?”이번 일은 유진이 먼저 제안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은서가 장말숙을 압박하기 위해 그 손자를 납치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그럴 일 없어.”그러나 구은정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아이는 절대 다치지 않을 거야.”유진은 그제야 조금 안심했고, 은정은 이어서 설명했다.“장말숙은 처음부터 독을 품은 호랑이와 손잡은 셈이지. 이건 스스로 자초한 일이야.”“은서가 장말숙의 손자를 납치했다는 건 이미 그 집안을 완전히 조사해 놓았다는 뜻이야.”“내가 강성을 떠나지 않는 한, 언젠가는 아이를 이용해서 조종하려 했을 거야.”“그런데 네가 먼저 움직여준 덕분에 우린 미리 조치할 수 있었고, 결국 아이도 지켜냈지.”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봤다.“예전과 완전 딴사람이 된 것 같아요. 위로까지 이렇게 부드럽게 하다니?”은정은 애옹이를 옆으로 밀어내고 유진을 품에 끌어당겼다.“질문 하나 해도 돼? 너는 서인을 좋아해, 아니면 구은정을 좋아해?”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둘 다 같은 사람 아닌가요?”은정은 묵직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했잖아.”유진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중얼거렸다.“사실 처음부터 한 사람이었어. 다른 건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의 차이였을 뿐이죠.”그리고 고개를 들며 은정의 눈을 마주 봤다.“내 말 맞죠?”이에 은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럼, 예전의 내가 널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촉촉히 빛나는 눈으로 미소 지었다.“아니요. 오히려 시언 사장님이 날 사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나는 그게 정말 고맙거든요.”은정의 눈빛이 깊고 짙어졌다. 가슴이 저릿할 만큼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차올랐다. 은정은 고개를 숙여, 유진에게 입을 맞췄다.“유진아. 난 늘 널 사랑했어.”은정은 언제나 유진만을 마음에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