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이 멀리 떠나가서야 유정의 표정이 다시 덤덤해졌다. 그러고는 화장실 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조백림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점잖고 잘 생긴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너 정말 저 여인한테 돈 빌려줄 생각이었어?""그럴 리가요?"유정이 냉소 한 번 하고는 말을 이어갔다."뺨을 몇 대 날려줘도 모자랄 판에 돈은 왜 빌려줘요?"유정의 대답에 조백림의 얼굴에 걸린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분명 이렇게 대단한데 어떻게 저 여인한테 진 거야?"유정이 듣더니 눈빛이 순간 어두워져서는 자조하 듯 대답했다."예전에 난 사랑은 진심을 다 해서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태생으로 바보처럼 성질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단지 비겁한 수단을 쓰고 싶지 않았을 뿐이지. 저 여인만이 남보다 더 똑똑해서 세상 사람을 손아귀에 넣고 놀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일리가 있네. 그럼 우리 둘이 결혼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나랑 있으면 넌 영원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고, 가끔 너의 그 지력을 발휘할 수도 있고."유정은 당연히 조백림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으니 진심을 다 해 대할 필요도 없고, 더욱 자아와 이성을 잃지 않아도 될 게 분명했다.사실 전에 유정은 이미 조씨 가문과 파혼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조백림을 이용하여 이선을 화나게 할 수 있다면 그것도 의외의 수확일 것 같아서.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조백림이 엄청 똑똑하다는 거다."나 이미 이선한테 제대로 찍혔어요. 그리고 한 여인을 망쳐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걸 빼앗는 것이죠. 이선은 반드시 다시 백림 씨를 찾아올 거예요. 정말 이선의 미인계에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솔직히 그 여인의 외모와 수단으로 나를 꼬시기엔 한참 멀었어."조백림의 대답에 유정이 기뻐하며 손바닥을 쳐들었다."좋아요! 거래가 성사!"이에 조백림이 웃으며 덩달아 손을 들어 유정과 하이파이브를 했다."이번엔 백림 씨가 나를
워낙 주위에 친구가 별로 없던 소희가 모처럼 잘 맞는 친구를 만난 것 같아 임구택도 속으로 많이 기뻐했다. 그래서 조백림에게 앞으로 모임에 꼭 유정도 같이 데리고 참석하라고 했다.이에 조백림이 웃으며 대답했다."당연하죠. 앞으로 자주 만나요!"그렇게 다들 서로 작별 인사하고 각자 차에 올라타 생태원을 떠났다.그러다 넓은 도로에 들어서니 오후의 햇빛이 차창을 뚫고 따스하게 스며들어왔다.따스한 햇볕을 쬐며 은은한 노래를 한참 듣고 있던 소희는 온몸이 나른해지기 시작하더니 점점 졸음이 몰려와 곧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이에 임구택은 일부러 속도를 늦추고 뒤에서 자신의 외투를 가져와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그 순간, 임구택은 고요함 속에서 무한한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그렇게 한 시간 정도 자다 다시 깨어났을 땐 차는 이미 낯선 곳에 멈추어 있었다. 임구택은 차 안에 없었고 주위의 경치를 봐서는 아직 강성 시내에 들어서지도 않은 것 같았다.소희는 즉시 미끄러져 내려간 양복 외투를 잡고 일어나 앉았다. 그러다 차에서 내려 임구택 찾으러 가려는데 마침 길가의 디저트 가게 밖에서 줄을 서고 있는 임구택을 발견하게 되었다.디저트 가게 밖에는 4~5명이 줄 서 있었고 그중 고급진 셔츠와 양복바지를 차려입고 같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임구택이 유독 눈에 띄었다.그리고 남다른 기질을 풍기고 있는 임구택을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구경하고 있던 소희는 갑자기 수줍어하는 표정을 지으며 임구택의 앞으로 다가가 휴대폰 번호를 묻는 소녀를 발견하게 되었다.하지만 임구택의 표정은 여전히 덤덤하고 차가웠다. 소녀를 거절했는지 소녀는 결국 난감한 얼굴로 사과하고는 떠났다.얼마 지나지 않아 임구택의 순서가 되었고, 임구택은 음식을 주문하고 돈까지 지불한 후 한쪽으로 가서 음식을 기다렸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 차 쪽을 쳐다보았다.이에 소희는 곧바로 뒤로 등받이에 기댄 채 계속 자고 있는 척했다.오분 정도 지난 후, 임구택이 종이봉투를 들고 돌아왔다. 그러
임구택이 마카롱의 맛을 음미하며 웃음을 드러냈다."처음엔 너무 달고 느끼했는데 먹을수록 감칠맛이 도네? 어쩐지 당신이 디저트를 엄청 좋아한다했어.""처음에 단 걸 좋아하게 된 건 단 음식을 먹으면 빨리 체력을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어."소희의 덤덤한 대답에 임구택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당연히 소희가 어릴 때 양부모에게 가혹한 학대를 받으며 먹고 싶은 것도 먹지 못해서 성인이 된 후 한을 풀려고 단 음식에 그토록 집착하는 줄 알았다.‘그런데 다른 이유가 있었다니.’그러다 임구택은 갑자기 소희가 6살 때 시언 따라 훈련소로 가서 훈련을 받았던 일이 생각났다. 나이가 가장 어리고 체력도 다른 사람보다 못했으니 무엇을 하나 체력 소모가 빨랐을 거고, 체력을 빠르게 보충하기 위해서 초콜릿 같은 단 음식을 선택한 게 분명했다.그렇게 천천히 단 음식에 의존하게 되었을 거고.임구택은 순간 가슴이 답답한 느낌이 들어 웃으며 말했다."이후부터 네가 단 음식 먹는 걸 더는 공제하지 않을게."마카롱을 다 먹고 초콜릿 케익을 먹기 시작한 소희가 임구택의 말에 승복하지 못하겠다는 것 마냥 눈썹을 올렸다. 왜 음식 방면에서 임구택의 공제를 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이때 임구택이 다시 입꼬리를 올리더니 낮은 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매번 당신에게 규칙을 정하고 결국엔 내가 못 지키고 있네. 오늘도 당신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줘서는 안 된다는 걸 분명 알면서도 당신이 기뻐하는 걸 보고 싶어 사고."창밖을 보고 있던 소희가 임구택의 말에 갑자기 심장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어 시선을 들어 차창 유리에 비친 임구택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턱선이 날렵한 잘 생긴 얼굴은 무심코 스쳐지난 눈빛마저도 사람을 매혹시킬 수 있었다.소희는 입안의 케이크를 삼킨 후 덤덤하게 대답했다."어차피 지키지 못할 거, 그냥 없는 걸로 하지 그래?""그건 절대 안 되지."임구택의 단호한 대답에 소희가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고는 계속 케이크를 먹었다
말을 마치고는 차에서 내리려는데 임구택이 갑자기 소희의 팔을 잡았다."나를 속이고, 이렇게 도망치면 끝이야?""그래서 뭐 어쩔 건데?""지금 나랑 밥 먹으러 가든지, 뽀뽀하든지. 뽀뽀해 주면 보내줄게."임구택의 잘생긴 얼굴이 어두운 빛에 흐려져 잘 보이진 않았지만 눈빛은 더욱 어두워졌다.소희가 임구택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순간 어두컴컴한 빛 아래에서 부딪혔다.한참 후 소희가 입술을 오므린 채 대답했다."나에게 시간을 주겠다고 했잖아.""네가 생각하는 동안 난 절대 너를 건드리지 않을 거야. 하지만 어느 정도의 위로는 줘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러면 난 네가 납득할 때까지 견지할 수 없을 거야."옅은 웃음을 머금고 있는 임구택의 말투에는 약간의 집착이 섞여 있었다.소희는 오후에 케이크를 사기 위해 햇빛 아래에서 한참 줄을 섰던 임구텍의 뒷모습이 생각나 고개를 들어 임구택을 쳐다보았다."한 번만이야.""응."임구택이 살짝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며 몸을 기울이자 소희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그 모습에 임구택이 동작을 한 번 멈추더니 곧 다시 여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소희는 본능적으로 몸이 경직되었고 임구택은 그녀의 어깨를 잡은 팔에 갑자기 힘을 주고 열정적으로 키스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소희가 분명 피하지 않았는데 임구택은 소희의 열정과 자신한테 기대려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금방 사귀게 되었을 땐 아무리 가벼운 뽀뽀라고 해도 엄청 유쾌했지만 지금은 그런 기분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임구택은 소희가 다시는 그렇게 쉽게 자신을 믿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그러나 그럴수록 그는 소희가 반응해 주기를 원했고, 그걸로 마음속의 불안감을 메우고 싶었다.한참 후, 주위의 광선이 더욱 어두워졌고, 임구택은 그제야 열적정인 키스를 끝냈다. 그러고는 마음속의 답답함을 짓누른 채 옅게 웃었다."그렇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싫은 건 아니지?"그는 엄지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만지며 한껏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소희를
"이건 백마야, 왕자님이 타고 다니는 백마."소희가 웃으며 설명했다.그러자 요요가 눈살을 찌푸린 채 큰 고민이라도 있는 사람마냥 다시 물었다."요요는 타고 장 보러 갈 수 있는 당나귀를 원하는데. 백마 타고도 장 보러 갈 수 있어요?"어린아이의 진지한 고민에 소희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물론이지. 백마더러 요요 공주를 태우고 장 보러 가라고 하는 게 어때?"요요는 그제야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싱글벙글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갑자기 창밖을 한 번 내다보고는 귀엽게 말했다."오늘은 날이 너무 어두워 사장님들도 다 코낸하러 집에 갔을 거예요. 그러니 내일 아침에 일찍 나갈래요!""그래. 요요 가고 싶을 때 같이 가자.""참, 소희 이모. 아저씨는 왜 요요 보러 오지 않아요?"한창 재밌게 장난감을 놀고 있던 요요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소희에게 물었다.그러자 소희 입가에 걸린 웃음이 순간 굳어졌다. 그러다 한참 후 요요를 품에 안고 다정하게 말했다."아저씨 요즘 너무 바쁘셔서 며칠 있어야 요요 보러 올 수 있다는데?""알겠어요. 요요는 기다릴 수 있어요."요요가 또래의 아이들보다 더 철이 든 모습에 소희는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이 밀려왔다.결국 제일 불쌍한 건 요요였다. 분명 아무런 죄도 없는 아이인데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없었으니."둘이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어서 와서 밥 먹어."이때 청아가 반찬을 들고 나오며 소리쳤다.이에 소희가 요요를 안고 식당 쪽으로 걸어갔다.*밥 다 먹고 난 후 소희는 요요랑 한참 더 놀아주다가 요요가 취침할 시간이 되어서야 위층으로 돌아갔다.하지만 소희는 오후에 너무 많이 자서 그런지 전혀 졸리지 않아 샤워하고 서재에 앉아 디자인 원고를 그렸다.그러다 갑자기 옆에 놓인 휴대폰이 울렸다. 소희가 수신번호를 한 번 확인하고는 받았다."이 감독님?"[소희 씨!]이 감독의 목소리는 여전히 친근하고 다정했다.[여주 캐스팅이 이미 다 끝나서 내일 오전에 정식으로 일을 시작할 건데,
그러다 점심시간이 되어 도시락 가지러 가니 직원이 바로 보온 상자에서 도시락 하나를 꺼내 소희에게 건네주었다."소희 씨, 이게 소희 씨 거예요."비록 도시락 통이 전부 일회용이라지만 소희 건 3층으로 쌓인 도시락 통으로 딱 봐도 일반 도시락보다 훨씬 고급졌다.옆에 있던 이정남이 보더니 웃으며 물었다."이건 이 감독님이 주는 특별대우인 거야, 아니면 누군가가 특별히 너를 챙겨주는 거야?"이에 소희도 어리둥절하여 직원에게 왜 그녀의 도시락만 다른 사람과 다르냐고 묻자 직원이 웃으며 위에서 시킨 대로 나눠준 것일 뿐,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답했다.소희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도시락을 들고 밥 먹으러 갔다.그리고 도시락 뚜껑을 열자마자 이정남이 또 경탄했다.도시락의 제일 위층에는 연어, 쇠고기, 그리고 두 가지 야채가 담겨 있었고, 그다음 층에는 밥과 디저트, 맨 아래층에는 닭볶음탕이 담겨 있었다.이정남이 놀라서 말했다."우와! 케이스가 너무 남다른 거 아니야?"소희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설마 정말 이 감독님이 준 특별대우인 건가?’‘내가 분명 감독님의 부탁을 거절했는데 이렇게 잘해준다고?’"일단 먹죠."계속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올 것 같아 소희는 아예 음식을 꺼내 중간에 놓았다.이정남도 사양하지 않고 쇠고기를 집어 입에 넣었다. 그러더니 순간 눈빛이 밝아져 말했다."이건 맹성의 쇠고기잖아! 틀림없어.""음식 방면에 있어 정남 씨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죠."소희가 웃으며 말했다.그러자 이정남이 바로 도도한 태도를 드러냈다."그럼!"그렇게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을 먹기 시작했고, 소희는 속으로 여전히 생각하고 있었다.‘대체 누가 날 이 정도로 챙겨준 거지?’물론 소희는 그 모든 게 허진의 전화 한 통 때문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오전에 이 감독과 통화하면서 다시 촬영을 재개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허진은 임구택이 줄곧 이 감독의 작품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걸 알고 바로 임구택에게 전화 걸어 보고
마민영은 매니저, 메이크업 아티스트, 그리고 세 명의 조수를 데리고 왔다.매니저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웃으며 오래전에 이미 출연하기로 정해놓은 스케줄이 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출연 거부 하기가 뭐해서 부득이하게 이제야 오게 되었다고 설명했고, 이 감독은 속으로 많이 화가 났지만 결국 괜찮다고 말했다.소희는 마민영이 있는 분장실로 찾아가 오후 첫 신을 찍을 때 입을 옷을 골라주었다. 마민영은 잠에서 덜 깬 모습으로 하품을 하면서 소희가 말해주고 있는 스토리의 줄거리를 들었다.그러다 갑자기 짜증이 섞인 말투로 소희의 말허리를 잘랐다."졸려 죽겠네 진짜. 어제 게임하느라 밤을 새웠는데 왜 점심도 안 되어 깨웠어요! 이렇게 졸린데 뭔 촬영을 하라고!"매니저가 듣더니 얼른 마민영에게 입을 다물라고 눈짓을 했다.이에 소희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보지 못한 척 고른 옷을 조수 미나에게 건네주며 마민영에게 갈아입혀라고 했다.하지만 마민영이 옷을 한 번 쳐다보더니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뭐야, 옷이 왜 이렇게 구려? 난 안 입어. 당신 패션 디자이너 맞아? 보는 눈이 왜 이래?"미나가 듣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소희를 바라보다.이에 소희는 얼굴색 한 번 변하지 않고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민영 씨 쪽에서 직접 준비해 온 복장이 있나요? 민영 씨가 선호하는 스타일이 따로 있으시다면 그 스타일에 맞춰 다시 상의해도 돼요."마민영의 조수가 마민영의 눈짓에 바로 이동 옷걸이를 밀어와 그들이 준비한 옷을 소희에게 보여주었다.옷걸이에 걸린 옷들은 전부 이름 있는 브랜드의 것들로 예복도 있었고, 심지어 거의 다 단번에 브랜드를 알아차릴 수 있는 클래식한 디자인들이었다.그래서 소희는 부득불 다시 마민영에게 설명했다."민영 씨, 이번 작품에서 민영 씨가 맡게 될 역할은 별장 가정부의 딸입니다. 어머니와 함께 주인집에서 생활하면서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다 나중에 노력과 견지로 모든 사람의 존중을 받아내고 창업하여 성공하게 되죠. 이야기의 뒷부분에 이르러서야
나가면서 소희는 마침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마른 몸매에 큰 키를 가진 남자는 잘생겼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동시에 남자도 맞은편에서 걸어오며 소희의 얼굴을 아래우로 훑어보고는 하찮다는 눈빛으로 차갑게 한 번 웃고는 고개를 돌려 휴게실로 들어갔다.그러다 마민영을 보자마자 지훈은 미소를 지었다."우리 동생, 축하해. 제일 잘 나가는 감독과 합작하게 되었으니 이번에 반드시 대박 날 거야.""하지만 오자마자 나에게 이런 낡아빠진 옷을 입으라고 주는 거 있지? 너무 짜증나!"마민영의 투정에 지훈이 의자에 앉아 옷들을 한 번 훑어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그렇네. 하지만 우리 동생의 기질이 뛰어났으니 아무리 평범한 옷이라도 몸에 걸치기만 하면 바로 고급스러워 보일 거야."마민영은 그제야 얼굴에 웃음을 띠고 지훈에게 물었다."또 이모의 부탁으로 왔어?""네가 강성에서 적응하지 못할까 봐 엄마가 직접 해성에만 있는 떡을 만들었어."지훈이 말하면서 자신의 비서에게 떡을 담은 통을 마민영에게 건네주라고 했다."역시 이모밖에 없다니까."마민영이 웃으며 떡통을 건네받자 지훈이 바로 휴대폰을 꺼냈다."움직이지 마, 사진 찍어 엄마에게 보내주게. 안 그러면 또 나를 의심할 거야."이에 마민영이 포즈까지 취하고는 당부했다."예쁘게 찍어줘.""우리 동생이 이렇게 타고난 미모를 가지고 있는데 안 예쁠 리가 있겠어?"지훈이 무심코 아첨하는 말을 한마디 내던진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럼 떡도 전달해 주고, 네 얼굴도 봤으니 난 이만 가볼게."마민영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잘 가. 나 대신 이모한테도 안부를 전해주고.""알았어."촬영 현장에서 나와 차에 올라탄 지훈은 바로 마민영의 사진을 한마디의 글과 함께 개인 계정에 올렸다.[사촌 여동생이 새 제작팀에 합류하게 되었어요! 새 드라마 대박나셈!]지훈도 강성에서 꽤나 이름 있는 재벌 2세라 매번 개인 계정에 사진을 올리면 엄청 많은 사람들이 댓글을 달았다.그리고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
“여진구 제대로야. 임씨 집안 딸이랑 결혼하면 우리 집안의 공신 되는 거지. 할아버지도 계속 웃고만 계시잖아. 아이, 우린 왜 그런 복이 없을까.”“네가 저 아가씨랑 결혼했으면, 진구 대신 네가 후계자 됐겠지.”누군가 농담을 건네자. 여인후는 코웃음을 치며 비꼬듯 말했다.“너희는 저 여자가 뭐 대단한 줄 아는 모양인데, 내 눈엔 그냥 싸구려야. 한쪽으론 우리 집안 며느리 노릇하려 들고, 한쪽으론 구씨그룹 사장한테 붙어먹고 있다니까?”순간 주변이 조용해졌고, 다른 한 명이 조심스레 물었다.“그거 어떻게 알아?”“내가 봤다니까, 거짓말일 것 같아? 할아버지 생신 잔치 때, 임유진이 구은정이랑 서로 잡고 끌고 하는 장면 내가 직접 목격했어.”인후는 비웃듯 말했다.“진구는 그걸 모르고 좋아 죽고 있겠지. 이미 유진한테 다른 남자가 생긴 줄도 모르고.”이에 사람들 사이에선 탄식이 터져 나왔다.“저 아가씨는 겉으론 참 청순해 보였는데, 의외네.”인후는 유진이 자신을 무시했던 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고, 진구에 대한 질투도 더해져 그의 말은 점점 도를 넘었다.“겉으로 고상하고 순해 보이는 애들이, 뒤로는 더 음란한 거 몰라? 저런 여자가 제일 문란하게 노는 법이지.”“쾅!”갑작스레 문이 거칠게 열렸고, 인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강한 주먹이 얼굴을 가격했다.그 한 방에 코뼈가 부러지고, 머릿속은 울려댔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아찔했다.문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살기 서린 기운을 뿜어내며, 냉혹한 기세로 여인후를 주먹질하고 발길질했다.순식간에 그 자리에 있던 몇몇 여씨 집안 사촌 형제들도 함께 맞았다. 차례차례 쓰러져 바닥을 뒹굴었다.유진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옆방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비명과 고통스러운 신음을 듣고 깜짝 놀라 즉시 방향을 틀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멍하니 굳어버렸다.바닥엔 네댓 명이 쓰러져 있었고, 은정은 여인후의 머리채를 붙잡고
그날 밤, 여씨 집안의 한 어르신이 귀국해, 강성의 모 유명 5성급 호텔에서 가족 만찬이 열렸다.임유진은 여진구와 함께 도착했다. 메인 테이블은 여씨 직계 가족들로만 채워져 있었고, 무려 30명 가까이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원탁이었다.진구의 할아버지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백발의 노인은 그의 큰할아버지였다. 회장님의 친형으로, Y국에서 거주하다 이번에 가족을 데리고 일시 귀국한 것이다. 그만큼 이번 가족 모임은 여씨 집안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리였다.유진은 처음에는 단순히 가족들끼리 조용히 저녁식사를 하는 줄 알고 있었다. 자신을 초대한 것도 분위기만 맞춰주면 될 줄 알았다.하지만 파티장에 들어서자, 진구는 유진을 이끌고 바로 메인 테이블로 향해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렸다.한혜란 여사와 여순호도 유진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고 따뜻하게 인사를 건넸다.여순호는 직접 자신의 큰형에게 유진을 소개하며 자애로운 웃음을 지었다.“우리 진구가 신뢰하는 아가씨야.”그러고는 자기 옆자리에 의자를 추가해 유진이 외부인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옆에 앉게 했다.물론 유진은 임씨 집안의 딸이라는 명확한 신분이 있긴 하지만, 이토록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을 보며, 진구와 유진의 관계는 이미 대부분의 사람 머릿속에서 확정된 분위기가 되었다.순식간에 파티장 안은 칭찬과 축하, 아첨의 말들로 가득 찼고, 진구와 동년배의 친척 중 몇몇은 눈에 띄게 부러움과 질투를 숨기지 못하며 억지로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유진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자리는 단순한 가족 식사가 아니었다. 이에 유진은 재빨리 핸드백을 챙겨 나갈 구실을 찾고 파티장을 빠져나왔다.호텔 복도 쪽으로 나와서야 숨을 돌린 유진은 진구에게 따졌다.“선배 왜 말 안 했어요? 오늘 선배 큰할아버지 귀국한 날이고, 집안 전체가 다 모이는 행사였다는 걸요. 처음부터 알았으면 나 안 왔을 거예요.”“할아버지가 꼭 널 데려오라고 했어. 부탁이라기보단 명령이었지.”진구는 웃으며 말했으나, 유진은 고개
정현준은 업무 능력은 있었지만, 결국 남녀 문제로 스스로 무너졌다.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 정리되자 여진구는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말했다.“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가족 모임 있어. 같이 가자.”그러자 유진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가족 모임에 내가 왜 가요?”이에 진구는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우리 할아버지가 널 보고 싶대. 지난번 생신 때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다면서, 꼭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 그리고 나도 할 말이 있어.”사실 진구는 오늘 저녁, 유진에게 고백할 계획이었다. 유진은 진구의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한다는 말에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몇 시에 가면 돼요?”“저녁 7시쯤. 내가 호텔로 데려다줄게.”“그래요.”진구는 미리 소혜와 시양의 해고를 결정해 두었기에, 두 사람의 자리를 대신할 인력을 미리 배치해 두었고, 업무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유진이 사무실로 돌아오자, 마케팅 부서 직원들이 하나둘 들어와 그녀에게 사과를 전했다.“팀장님, 저희가 소혜 씨한테 휘둘려서 그랬어요. 정말 죄송해요.”“앞으론 함부로 휩쓸리지 않을게요. 이번 일로 크게 깨달았어요.”“눈으로 본 게 다가 아니더라고요. 그깟 사진 몇 장으로 괜한 오해 했네요.”...유진은 담담하게 모두의 사과를 받아주며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지난 일이고, 전 이 일로 누구 미워하지 않아요. 앞으로 일에만 집중하죠.”유진의 대인배적인 반응에 부서 내에서의 평판은 확 올라갔다. 유진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신뢰와 존재감을 동시에 확보했다.더 이상 누구도 진구 라인이라는 말로 그녀의 실력을 깎아내리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현준이 사직과 업무 인수인계를 하러 다시 회사에 오게 된다면, 자신이 예전에 소혜에게 했던 말을 떠올릴지도 모른다.타협이 안 되면, 뿌리째 잘라낸다는 그 말, 소혜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리고 현준도 이와 얽히고설켜 끝내 유진이 베어내야 할 대상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업무를 마치기 전, 진구는 방연하에게 메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