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사장은 임구택이 그에게 묻는 것을 보고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고는 계속 협력상의 일을 이야기했다.다른 사람들은 눈빛은 미묘했다. 임구택을 쳐다보지도 못했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이전과 마찬가지로 한담을 나누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분위기는 다시 회복됐다.소희는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하게 밥을 먹었다.임구택은 진사장과 한담을 나누다가 가끔 소희가 좋아하는 요리를 집어 그녀의 접시에 놓아주었다.또 소희가 국을 다 마신 것을 보고 그녀를 위해 국 한 그릇을 추가했다.30분 후, 배부른 소희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임구택은 여전히 온화한 표정이었다. 긴 눈동자는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배불러?”“어.” 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돌아가, 아래에 명우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걔가 널 데려다줄 거야!”소희는 자신이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임구택은 아래를 보며 미적지근하게 대답했다.“응.”소희는 밖으로 나가면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않았다.임구택과 소희가 이야기한 후부터 방은 조용해졌다. 모든 사람이 소희가 떠나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소희가 떠나자 임구택은 담배 한 대를 꺼냈다. 4~5명이 라이터를 가져다주었다. 임구택은 모두 마다하고 스스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대명을 바라보았다.구택의 표정은 냉담하고 의미심장했다. 흉험하지는 않았지만 대명은 구택의 시선에 몸을 벌벌 떨었다.대명은 술을 들고 임구택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앞에 서서 허리를 살짝 구부렸다. 대명의 뚱뚱한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임 사장님, 소희가 사장님 사람인 걸 몰랐네요. 제가 이렇게 보는 눈이 없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임구택의 청백색의 담배 연기가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흐렸다. 이 때문에 대명은 구택의 표정을 똑똑히 볼 수 없었다.방 전체가 쥐 죽은 듯이 고요하다.그는 몸을 살짝 기울여 대명에게 다가갔다.“좀 가까이 오세요.”대명은 멍해져서 한 걸음
손 감독은 당황했다.“그 소희라는 애, 도대체 누구야? 누군데,임 사장도 알아?!”“그녀가 임 사장을 알든 모르든, 네가 오늘 한 일은 너무했어. 소희는 내 제작진 팀의 디자이너야. 그런데 손 감독이 내 사람을 대명에게 팔려고 했지. 이런 짓을 하면서 내 생각은 해봤어?”이 감독이 진지하게 물었다.손 감독은 부끄러워하며 소리쳤다.“나도 어쩔 수 없었어.”이 감독은 냉소를 터뜨리며 말했다.“대 사장이 네 새 영화에 투자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우리가 비록 영화를 만들지만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지. 우리 앞으로 연락하지 말자!”말을 마치자 이 감독은 굳은 표정으로 가 버렸다.손 감독의 괴로운 얼굴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지금 소희는 명우의 차에 앉아 있다. 그녀는 사실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아 머리가 맑았다.경원 주택단지에 거의 도착했을 때 명우가 입을 열었다.“사모님, 임 사장님이 최근에 약속이 많아서 자주 술을 마시고 새벽에 돌아오곤 합니다. 혹시 시간이 되시면 그를 설득해 주세요.” 소희의 맑은 눈동자에 어두운 빛이 비쳤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와 임 사장의 혼인이 어떻게 된 일인지 가장 잘 알고 있는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네요. 다시는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명우가 말했다. “사모님, 커피숍에서 저희가 맺은 계약을 기억하시나요? 저는 사모님의 정체를 비밀로 유지하고, 사모님은 임 사장을 해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소희는 이마를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그를 해치지 않았어요!” 명우는 그녀를 한 번 바라보고 계속 말했다. “저는 사모님의 당당함이 좋습니다. 임 사장님에게도 당당하게 대하셨죠. 그러니 계속 그렇게 해주세요.”소희는 창문 밖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명우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아파트 아래층에 차를 세우고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사모님, 안녕히 계세요!”“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소희는 고맙다며 차에서 내렸다.그녀는 몇 걸음 걷다가 무의식적으로 고
이튿날, 소희가 외출할 때 보니 지니는 달리기를 하고 있다. 지니는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좋은 아침!”“좋은 아침!” 소희는 정신이 없었다.“어젯밤에 잠을 못 잤어요?” 지니는 멈추고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너 때문이야, 좋은 꿈을 꾸라고 했는데 악몽을 꾸었어!”소희가 천천히 말하며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을 꿈꿨어요?” 지니가 웃으며 물었다. 소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꿈에 나왔으면 그건 좋은 꿈이지!” 지니가 웃으며 말했다. “커피 한잔 어때요? 그러면 기운이 날 거예요!”소희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너 만능이라며? 그러면 지금 커피 한잔으로 변해 줘!”“그럼 뒤돌아서 보세요!”지니가 말했다. 소희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지니를 쳐다보고는 정말로 돌아섰다. 로봇은 인간보다 머리가 좋을 뿐, 물건을 만들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정말로 만들어 낸다면, 그건 로봇이 아니라 초능력자일 것이다! “됐어?” 소희가 잠시 기다린 후 물었다. “아름다운 소희씨, 맛있는 커피를 맛보세요!” 지니가 외쳤다. 소희가 돌아서자, 나무 문에 달린 스크린이 갑자기 아래로 내려가고, 커피 한잔이 나왔다. 자동 커피 머신처럼. 소희는 놀랐다. 다가가 커피를 꺼내자 스크린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녀는 뜨겁고 향기로운 커피를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어떻게 한 거야?” “로봇 패밀리는 만능이에요!” 지니가 큰 머리를 흔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소희는 정말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손에 든 커피를 한번 보고는 말했다.“이거 정말 마실 수 있을까?”“네가 이 맛을 좋아하지 않는 한 마실 수 있죠!” 지니는 마치 아이를 유혹하여 사탕을 먹게 하는 것처럼 말했다.“한번 해보세요!”소희는 입을 오므리고 지니를 쳐다보며 천천히 말했다.“맛이 좋네요!”“이 커피를 마시고 나면 하루 종일 유쾌하고 좋은 기분이 들기를 바랄게요!” 지니가 헤벌쭉 웃으며 그의 큰 앞니를
“천만에요, 믿음은 상호적인 거잖아요.”소희가 진심이 담긴 눈빛으로 이 감독을 향해 가볍게 한번 웃고는 몸을 돌려 떠났다.그리고 떠나는 소희의 뒷모습을 보며 이 감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소희 씨가 이 업계를 떠나는 그날까지, 난 반드시 최선을 다해 소희 씨를 보호할 거야.’장씨 그룹.아침 일찍, 최결이 대표 사무실로 들어가 장시원에게 오늘의 일정을 보고했다.“오전 9시, 정대 인수 건에 관한 임원 회의가 있을 예정입니다.”“태위 대표님이 오늘 돌핀호텔에서 생일잔치를 주최할 거라고 반달 전에 대표님에게 청첩장을 보내왔는데, 제가 이미 선물을 보내 드렸습니다.”“그리고 점심, 셰엘호텔에서 연회가 열리는데, 혜성과 함력의 대표님도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 후엔…….”한참 후, 하루의 일정 보고가 드디어 끝났고, 최결이 잠깐 뜸을 들이다 다시 공손하게 말을 이어갔다.“대표님, 혜성과의 협력에 관해서는 줄곧 제가 책임졌으니, 점심에도 제가 대표님과 동행할까요?”고개를 숙인 채 서류를 보고 있던 장시원이 듣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럼 점심 연회는 최 조수님이 책임지고 가주세요, 난 따로 볼 일이 있어서.”“네, 그렇게 하겠습니다.”여전히 웃으며 대답하고 있는 최결이었지만, 눈빛에는 약간의 실망이 담겨 있었다.오전은 생각보다 빨리 흘러갔고, 최결은 점심에 연회에 참석해야 해서 일찍 옷을 갈아입고 회사를 떠났다.그러다 곧 정오가 되니 장시원이 사무실에서 나와 일하고 있는 청아를 향해 말했다.“옷 입어, 장 보러 슈퍼 가게. 나 점심에 갈비 먹을 거야.”“점심에 다른 일정이 없으세요?”“없어.”장시원이 담담하게 한마디 내뱉고는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전혀 청아를 기다리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이에 청아는 어쩔 수 없이 급히 컴퓨터를 끄고 부랴부랴 쫓아갔다.차 안에서,조용히 운전하고 있는 장시원의 표정은 이상하게 냉담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몇 번이고 곁눈질을 한 청아가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다음에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정소연 아버지의 목소리가 맞은편에서 들려왔다.[실은 소연의 외삼촌이 며칠 전에 병이 나서 화남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내가 듣기로는 화남병원에 가정형편이 어려운 환자를 상대로 무료 병실을 제공해주는 정책이 있다던데, 그걸 신청할 수만 있으면 병실을 무료로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타 비용도 엄청 많이 줄여줄 수 있대요. 그래서 청아 씨의 남편이 어떻게 소연의 외삼촌을 위해 무료 병실을 신청해 줄 수 있을지 묻고 싶어서 연락한 거예요.]‘남편?’낯선 두 글자에 얼굴색이 순간 변한 청아는 급히 스피커를 끄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운전하고 있던 장시원이 갑자기 청아가 뻗은 손을 찰싹 때렸다. 그러고는 차갑게 청아를 한번 흘겨보았다.이에 청아가 따끔해진 손등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만약 정책의 조건에 부합되는 거라면 직접 가서 신청하시면 되는 거 아닌가요?”[하하, 부합되지 않으니까 이렇게 청아 씨에게 도움을 청하는 거잖아요. 청아 씨의 남편이 화남병원의 부주임이니, 한번 잘 말해주면 무조건 될 거예요.]“죄송해요, 아저씨. 이건 제가 어떻게 도울 수가 없을 것 같네요.”[청아 씨, 이게 청아 씨 남편에게 있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제발 좀 도와줘요.]“정말 미안해요, 아저씨. 사실 하 선생님은 제 남편이 아니에요.”정소연 아버지의 태도가 너무 간절해 청아는 더 이상 그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입술을 깨물고 사실대로 말했다.그리고 청아의 말에 정소연 아버지가 깜짝 놀라 목소리마저 높아졌다.[뭐라고요? 하지만 그날 강남의 집에서 분명 하 선생이 청아 씨의 남편이라고 우리한테 소개했었잖아요?]끽-정소연 아버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차가 갑자기 길옆에 멈추었고, 아무런 마음 준비도 없었던 청아는 그렇게 등받이에 부딪치고 말았다.어느새 슈퍼에 도착했던 것이다.하지만 장시원은 차에서 내릴 생각은 하지 않고 노여움과 한기가 용솟음치고 있는 눈빛으로 청아를 노려보았다.이에 청아는 얼굴색이 창백해져 난감한 표정
“저 그렇게 시비도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방금 대표님이 저를 도와주셨는데, 제가 어떻게 대표님을 탓하겠어요.”“그래서, 그 하온이라는 의사가 좋아?”“아니요.”“그럼 남편은 어떻게 된 거지? 너 정말 정씨네 가족 앞에서 하온이 네 남편이라고 소개했어?”장시원의 차가운 목소리에 청아는 어쩔 수 없이 그날의 상황을 간단하게 말해주었다.그리고 그걸 다 듣고 난 장시원은 화가 난 나머지 한심한 눈빛으로 청아를 흘겨보았다.“우청아, 난 네가 아무리 나약해도 최소한의 원칙은 있는 사람인 줄 알았어. 그런데 너…….”대체 뭐라고 욕해야 청아가 정신을 차릴지 몰라 장시원은 결국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쳐다보았다.자신이 화를 참지 못하고 청아를 다치게 할까 봐 두렵기도 해서.하지만 청아는 장시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자조하듯 입꼬리를 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한테 실망하셨죠?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저는 우씨 집안의 사람이라 우씨 집안의 일에 대해 무심하게 방관할 수가 없거든요. 비록 저희 엄마가 지금은 오빠를 더 편애하고 있다지만 지난 20년 동안, 저희 엄마가 저를 낳아주셨고, 저를 대학까지 뒷바라지해서 보냈어요.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은 저희 엄마가 저한테 잘못한 거 없어요. 엄마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거라고요. 대표님은 저와 같은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서 일반 가정의 고민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장시원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고, 차 안은 순간 고요함에 빠졌다.그런데 이상하게 장시원에게 다 털어놓고 나니 청아는 기분이 오히려 많이 좋아졌다.‘정씨네 가족들이 이것 때문에 불만이 있는 거라면, 내가 가서 사과하면 돼.’‘난 우리 집에 신세를 졌지만, 정씨네 집에 신세 지지 않았어.’“이만 갈비 사러 가요.”한참 후, 청아가 먼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리고 장시원이 듣더니 어처구니가 없어 바로 냉소를 드러냈다.“내가 지금 갈비 먹을 기분이 있게 생겼어?”장시원의 말
장시원을 바라보고 있는 청아의 눈동자는 의외로 깨끗하고 맑았다.“비록 저 돈이 많은 건 아니지만, 은혜에 보답할 줄은 알아요. 그러니 오늘은 제가 내게 해줘요.”“다음에.”장시원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담담하게 말했고, 청아가 듣더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청아의 웃는 얼굴은 이상하게 단아하면서도 깜찍했다.순간 왠지 모르게 가슴이 간질간질해진 장시원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소리 없이 시선을 거두었다.한참 후, 주문한 음식이 하나 둘씩 올라오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그런데 이때, 청아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허홍연이었다.허홍연이 이 시간에 전화를 한 이유를 눈치챈 청아는 더 이상 장시원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급히 휴대폰을 들고 룸을 나서려 했다.그러나 장시원이 청아의 의도를 단번에 간파한 듯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여기서 받아.”“…….”청아가 장시원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천천히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다 댔다.“엄마.”[청아야! 너 정씨네 가족한테 뭐라고 한 거야? 방금 정씨네 가족이 연락이 와서는 한바탕 화를 냈어! 그러고는 우리 집안의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며 네 오빠와 소연의 혼사를 다시 고민하겠대!]다짜고짜 청아의 죄를 묻는 허홍연의 목소리가 휴대폰 맞은편에서 들려왔다.정소연의 외삼촌이 화남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은 정씨네 가족들은 다 같이 병문안을 갔고, 거기에서 정소연의 미래 시댁의 매제가 화남병원의 부주임이라고 자랑했었다.이에 정소연의 외삼촌이 바로 무료 병실에 관해서 부탁을 했었고, 정소연의 아버지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승낙했던 것이다. 그것도 아무런 수속도 거칠 필요없이 쉽게 무료 병실에 들 수 있을 거라고 장담까지 해가면서.그래서 바로 청아한테 연락을 한 건데 그렇게 거절을 당할 줄은 미처 몰랐다.그 후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오른 정씨네 가족은 허홍연에게 연락을 해서 우씨네 가족이 다 거짓말쟁이라고, 인성에 문제가 있다고 욕설을 퍼부었다.
허홍연이 듣더니 순간 기뻐하며 물었다.[그게 정말이에요?]“그럼 제가 이모님을 속이기라도 하겠습니까?”[어이쿠, 그럴 리가 있겠어요? 시원 군이 나선다면 정씨네 가족이 부탁한 일은 일도 아니죠. 고마워요, 시원 군.]“저한테 고마워하지 마시고 청아한테 고마워하세요. 전 오로지 청아의 체면을 봐서 도와드리겠다고 한 거니까.”[암요! 그럴 게요!]“그럼 저희 밥 먹고 있던 중이라, 이만 끊겠습니다.”기뻐하고 있는 허홍연과는 달이 장시원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그러고는 바로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청아에게 돌려주었다.“제 일에 끼어들지 마세요, 제가 정씨네 가족을 찾아가 사과하면 그만이니까.”“정씨네 가족이 억지 부리는 모습 못 봤어? 그러는 그들이 네 사과를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해?”장시원의 한심한 눈빛에 청아가 죄책감이 든 표정을 드러냈다.“그, 그래도 대표님에게까지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하온한테는 남편 역까지 부탁할 수 있으면서, 나랑은 이렇게 선 긋는 거야?”“저 엄마의 핍박에 이기지 못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대표님도 아시잖아요!”“네가 너무 바보 같아서 이용당한 거 아니고? 누구의 부탁은 들어줘야 하고. 누구의 부탁은 절대 들어줘서는 안 된다는 것도 구분 못해?”장시원의 뼈 때리는 질문에 난처해진 청아는 얼굴까지 빨개져 아무 말을 못했다.그리고 그러는 청아의 모습에 장시원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는 청아의 접시에 음식을 집어주었다.“일단 밥이나 먹어. 정씨네 가족의 부탁은 나에게 있어 어려운 것도 아니니 부담 가지지 말고, 신세 졌다고 생각하지도 말고.”“하지만 신세 진 건 사실이잖아요.”“너 나한테 진 신세가 적어?”“…….”“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갚아. 그리고 앞으로 나한테 신세 갚는다 생각하고 밥 해줄 때 내키지 않는 표정이나 짓지나 말고.”청아가 듣더니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은 적이 없는데요?”“그럼 나한테 밥 해주는 게 좋다는 거야?”“당연하죠!”장시원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