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은서는 목이 메 말했다. “나 아직 이지민 감독님 영화 촬영 중이야. 지금 그만두면, 감독님이 내 분량을 다시 촬영해야 하고, 소희 씨도 더 많은 일을 해야 해. 촬영 끝나면 그때 강성에서 떠날게. 떠나기 전까지 소희 씨 안 괴롭히겠다고 약속도 할게. 그리고 이 시점에 떠나면 소희 씨가 당신이 찔리는 점이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어.”구택은 눈을 감고, 강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말했다.“소희 건드리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구택의 말에 은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강성 시내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질 무렵이었다.소희는 자신의 서재에 콕 박혀서 디자인했는데 한번 했다 하면 몇 시간은 걸렸다.소희가 서재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밤이 되었고 거실 불은 꺼져 사방이 깜깜했다. 구택은 소파에 앉아 있었고, 그의 긴 기럭지도 어둠 속에 가려져 있었는데 그의 모습은 굉장히 서글프고 외로워 보였다.소희가 나오자 구택은 스탠드 등을 켰고, 따뜻하고 그윽한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며 말했다.“저녁 준비했는데 식었을 거라서 데워줄게.”“괜찮아, 잠깐 나갔다 올 때 먹고. 밖에서 먹고 올게요.” 소희의 목소리는 가볍지만 차가웠고 밖으로 나가려 하자 구택이 곧바로 일어나 따라나섰다.“소희야!”구택의 부름에 소희는 멈춰 서서 뒤돌아보았다.비록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이었지만 소희의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따라오지 말고 내 집에 마음대로 들어오지도 마. 안 그러면 내일 바로 이사 갈 거니까.”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소희에 구택의 눈빛은 어두웠고 낮고 느린 목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졌다.“소희야 난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 나한테 이러지 마.”구택의 말에 소희는 목이 메어 대답했다.“나한테 생각 할 시간을 줘.”구택은 상처받은 눈빛이었고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래, 결론 나면 알려줘. 여기서 기다릴게.”“지금의 나는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소희는 차갑게 말을 뱉고는 돌아서서 문을 ‘쾅’ 하고 닫았다.구
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미나 씨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요?”미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전 남자친구가 날 가장 사랑한다고 말할 때, 솔직히 마음이 흔들렸어요. 난 정말로 그 사람을 사랑했으니까, 하지만 결국엔 거절했죠.” 미나는 한숨을 쉬며 이어 말했다. “전 그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거든요. 화해해도 내 마음속에는 항상 걸림돌이 있을 거고 전 제 전 남자친구를 다시 믿을 수도 없게 될 거예요. 그래서 이왕 아프게 된다면 길게 아파하는 것보다는 짧게 아픈 게 낫죠. 그리고 이미 헤어진 마당에 지나간 인연 다시 붙잡고 싶지도 않아요.”소희는 미나의 말을 들으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지 눈을 내리깔았다.그러자 미나가 소희에게 물었다“제가 한 선택이 맞는 거일까요? 아니면 다시 한번 기회를 더 줘봐야 할까요?” “그건 미나 씨가 그 사람한테 기회를 줄 여부를 결정하셔야 하죠.”소희의 말에 미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저는요, 그 사람이 문자로 다른 여자한테 잘 보이려고 나를 폄하하고 그들 사이에서 오고 가는 미묘한 기류가 가득 맴도는 대화를 잊을 수가 없어요. 너무 역겨워서!”이에 소희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나 씨는 뭐가 올바른 선택인지 사실 알고 있잖아요. 전 남자친구의 달콤한 말에 속지 말고 본인 생각 굽히지 말아요.”미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삶을 소중히 여기고 쓰레기 같은 남자는 멀리해야죠!”소희는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 “맞아요!”오후 퇴근하는 길에 우청아가 소희에게 전화해서 집에서 저녁을 먹자고 했다.소희는 길을 가다가 디저트 가게에 들러 요요가 좋아하는 디저트를 샀다.문을 열고 들어가자, 요요가 소희를 부르며 달려왔다.“소희 이모!” 소희는 한 팔로 그녀를 안아 들고 한 손에는 디저트를 들고 거실로 향했다. “엄마는 어디 있어?”청아가 주방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주방을 지나다가 체격이 제법 큰 두 남자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임구택은
임구택은 많은 요리를 준비했고, 장시원은 가져온 와인을 열었다. 네명은 평소처럼 모여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지만 구택과 소희의 불화로 인해 분위기는 다소 침체되었다.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청아는, 구택이 발코니로 전화 받으러 간 사이, 걱정스레 물었다. “소희야, 둘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 싸웠어?”소희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시원이 소희에게 와인을 따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구택이를 지켜본 내가 제일 잘 알아. 구택이는 너를 진짜 사랑해. 너희 둘 겪은 일이 그렇게 많이 있었음에도 이겨냈잖아. 사소한 일로 감정 상하지는 마.”소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감정이라는 건 당사자들만 이해할 수 있는 거야.”소희의 대답에 청아가 물었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소희는 차분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생각이 정리되면 그때 알려줄게.”“소희야 너랑 구택오빠의 사랑은 내가 유일하게 믿는 진실한 사랑이야. 둘이 꼭 잘 될 거야!”청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시원이 청아를 흘겨보며 말했다. “청아야, 내가 여기 있는데 그런 말을 하는 건 날 너무 신경 쓰지 않는 거 아니야?”청아는 그런 시원을 비웃으며 대답했다. “사랑이 뭔지는 알아?”청아의 말에 자신이 제대로 무시를 당한 것 같아 언짢은 시원이었다.잠시 후, 구택이 곧 돌아왔고, 그들은 다시는 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식사하는 동안 시원과 청아만 가끔 장난스럽게 농담을 주고받았을 뿐 소희랑 구택은 조용히 밥만 먹고 있었다.식사를 마친 소희는 위층으로 돌아갔고, 구택도 함께 인사를 하며 떠났다.두 사람은 계단을 오르며 침묵했고, 위층에 도착한 후 소희는 집으로 바로 걸어가려 했지만, 구택이 소희의 팔을 잡고 그윽한 눈빛으로 물었다.“생각은 정리됐어?”소희가 눈을 내리깔고, 차가운 눈빛으로 거부감을 드러내자 구택은 입술을 앙다물고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해줄 수 있어? 만약 피임
두 사람은 드라마 촬영장 근처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고, 30분 뒤 소희는 서둘러 오는 우정숙을 보았다.“어머, 소희 씨!”“오랜만이에요.”둘은 만나서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커피가 나와서야 정숙이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갑자기 불러내서 일에 지장간 건 아니죠?”“아니에요.”소희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어차피 점심시간이라서 괜찮아요.”정숙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소희를 바라보았다.“예전에 소희 씨랑 임구택이 같이 있는 모습이 찍혀서 인터넷에 올라왔을 때 구택이한테 전화해서 물어봤거든요. 그때 둘이 사귄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어쩜 그렇게 잘 숨겼어요?” 소희는 약간 당황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있어서 그런 거지 일부러 숨긴 건 아니니까 이해해 주시길 바라요.”정숙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뭐라고 할 게 있겠어. 우리 곧 한 가족이 될텐데!”소희는 자신과 구택의 현재 상황을 생각하며, 씁쓸한 마음이 들어 말을 잇지 못했다.정숙은 미소를 거두고 말했다. “어젯밤에 집에 도착했는데, 유민이 소희 씨와 구택이 사이에 오해가 생겼다고 하던데 둘이 화해했어요?”소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오해가 아니라 우리 사이에 문제가 생긴 거에요.”정숙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소희 씨한테 보여줄 게 있어요.” 정숙은 가방에서 약병을 꺼내 소희에게 건넸다. “이 약 뭔지 알아요?”소희는 약병을 들여다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이건 제가 먹는 약이에요. 독소를 제거하고 신경을 회복하는 건데, 사모님이 왜 이걸 가지고 계세요?”정숙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건 구택이도 계속 복용하고 있는 약이에요.”정숙의 말에 소희는 놀라서 말했다. “네? 뭐라고요?”정숙은 천천히 말했다. “소희 씨가 강성을 떠난 지 2년이 지났고, 돌아온 후에도 구택이가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소희 씨가 떠난 후, 구택이는 거의 반년 동안 실명 상태였다는 걸.”“실명을 했었다고요?”소희는 더욱 놀랐다.
우정숙은 곧 소희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임구택이 우리에게 소희 씨 앞에서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어요. 소희 씨가 돌아온 후, 두 해 동안 이 약을 복용해야 하는데, 구택이는 더 이상 집에 약을 두지 않고 회사에 가져갔어요. 아마 소희 씨가 볼까 봐 그랬던 거 같아요.”소희는 멍하니 듣고 있었는데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고 마치 다시 한번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끼는 것 같이 힘들었다.정숙은 소희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급히 말했다. “소희 씨, 오늘 내가 이 모든 걸 말한 건 구택을 불쌍히 여기라는 게 아니에요. 그저 구택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소희 씨를 위해 목숨까지도 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구택이가 소희 씨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데 둘 사이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더 있을까요?”소희의 숨이 막힐 듯 가슴이 아파왔고, 잠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모님.”정숙은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난 소희 씨가 나를 큰 형님이라고 부르는 날이 오기를 바래요.”정숙과 헤어진 후, 소희는 촬영장으로 돌아왔지만, 정숙의 말에 받은 충격이 여전히 가셔지지 않았다. 소희가 떠난 그 두 해 동안, 구택과 전혀 연락이 없었고, 구택은 한 번도 그녀를 찾지 않았다. 그랬기에 소희는 둘 사이의 사랑이 이미 끝났고, 구택도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소희의 눈 치료 과정은 한 달이 걸렸고, 10일마다 한 번씩 총 세 번 약을 사용했다. 매번 치료할 때마다 석화바이오회사 사람들이 직접 와서 주사를 놔줬고, 치료 과정을 녹화했다.그러니까, 그 녹화는 기록이 아니라 구택이 다른 곳에서 그녀를 지켜보기 위함이었고 그 두 해 동안, 구택은 항상 소희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소희의 눈이 치료된 후에도 계속 해외에 머물자 구택은 이현과 거래를 해 소희를 강성으로 돌아오게 했다.소희는 국내 연예 뉴스에서 구택과 이현이 교제하고 있다는
“할아버지는 어떠세요?” 소희의 얼굴이 창백해져 물었다.“할아버지 상태는 아직 안정적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석이 안심시키며 소희를 뒷마당으로 데려갔다.강재석의 방에 들어가고 소희는 재석이 누워있는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재석은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조용히 누워 있었는데 반쯤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할아버지!” 소희는 침대 옆에 앉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재석을 불렀고 장의건 의사가 들어와 소희를 보고 공손하게 말했다. “아가씨, 돌아오셨군요!”소희는 고개를 들어 불안한 눈빛으로 의건을 쳐다보았다. “할아버지 상태가 어떤가요? 지금 병원으로 모셔야 할까요?”“어르신께서는 오랫동안 질병을 앓고 계셨습니다. 병원에 가시는 걸 매우 싫어하시고, 지금 이 상태로는 병원으로 옮기기는 무리입니다. 장시간 이동이 오히려 좋지 않을 수 있어서요.” “할아버지가 어떻게 된 거죠?” 소희가 걱정스럽게 묻자 설명하기 시작했다.“심장 문제와 뇌 혈류 부족 때문에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저는 이미 약과 주사를 했고, 오늘 밤에 깨어나시면 별 문제가 없을 거예요.”“만약 깨어나지 못하면요?”의건은 잠시 멈추었다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어르신이 깨시게 최선을 다할 니다.”소희는 재석의 손을 꽉 잡고, 마음속의 두려움을 억누르며 말했다.“할아버지, 저 돌아왔어요. 제발 빨리 깨어나 세요.”……강성, 임씨 그룹 빌딩이미 저녁 7시였지만, 회의실의 불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구택은 오늘 여러 회의를 연이어 진행했고, 마치 다음 한 달간의 프로젝트 계획을 하루 만에 모두 끝내려는 듯했다.두 부서의 책임자들이 그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혼이 났고, 다른 사람들도 불똥이 자신한테 튈까 조심스러워했다.회의가 2시간 동안 진행되었는데, 진행 중에 진우행 팀장은 무표정한 구택을 보며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구택은 손에 들고 있는 계획안을 바라보고 있었고 옆의 화면에서는 PPT가 재생되고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어젯밤 소희의 냉담한 눈
임구택은 그곳에 멍하니 서 있었다. 마음이 철렁했고 점차 커지는 공포감에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순간, 구택은 2년 전, 소희가 떠난 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날 구택은 완전히 텅 빈 것 같았고, 끝없는 슬픔이 구택을 집어삼켰고 그 이후로는 숨 쉬는 것조차 아파왔다.‘소희가 또 떠났나?’‘다시 나를 떠난 건가?’구택은 온몸이 얼어붙고, 잠시 후에서야 정신을 차리고 소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 예상대로 전화는 꺼져 있었다.구택은 거실로 돌아와 어둠 속에 조용히 소파에 앉았고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이 그를 완전히 삼켜버렸다.이번에는 몇 년 동안 기다려야 할까? 왜 최선을 다해도 결과는 여전히 이런 것일까?바늘이 쿡쿡 찌르는 듯한 아픔에 점차 원망이 생기고 아쉬움이 많이 남게 되었다.잠시 후, 구택은 다시 휴대폰을 꺼내 명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희의 출국 기록을 조사해. 어디로 갔는지 알아봐.”명우는 잠시 놀랐지만, 곧 알겠다고 대답했다.어둠 속에서 구택은 조용히 기다렸다. 일분일초가 1시간처럼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고 매 순간이 고통의 연속이라 구택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였다.짧은 몇 분이었지만, 구택은 또 2년을 기다리는 것만 같았고 소희와 함께 한 모든 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나갔다.그 시간 동안 소희와의 첫 만남, 데이트,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일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소희를 포기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빼내는 것과 같은 의미인데 소희가 없이 어떻게 살아갈 가 있겠는가?휴대폰이 진동하면서 빛이 나자 구택은 실눈을 뜨고 떨리는 마음으로 잠금 해제를 하고 전화를 받았다.“소희 어디 있어요?”“사장님, 사모님은 출국하지 않고 운성에 가셨습니다.” 명우가 이어서 말했다. “아무래도 급한 일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구택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가, 느리게 물었다. “운성에?”“네.”어둠속에서 한 줄기 비춘 구택은 급하게 일어나며 말했다.“비행기 준비해, 지금 운성에 갈 거니까.”“알겠
오늘 강재석이 그렇게 혼수상태로 침대에 누워 계신 걸 보고, 소희는 재석이 이미 나이를 많이 드셨고, 심지어 병에 걸려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할아버지, 제발 깨어나 주세요, 부탁드려요!” 소희는 재석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저, 구택 씨랑 다시 만나고 있으니까 빨리 깨어나서 저를 꾸짖어 주세요!”소희는 재석 곁에 엎드렸고 처음으로 무력감과 두려움을 느꼈다.문이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고, 오석이 죽 한 그릇을 들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소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가씨, 좀 드세요. 오후부터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잖아요.”“밥 먹고 싶지 않아요. 목구멍에 들어가지도 않을 거 같아요.” 소희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아가씨, 어르신은 괜찮을 거예요. 아가씨와 임유민 씨를 보지 못한 채로 그냥 가시지 않을 거예요.” 오석의 목소리에서 연륜이 묻어났고 잠겨 있었고 마치 자신에게 되뇌이듯 반복해서 말했다. “어르신은 괜찮으실 거야.”소희는 오석의 목소리를 듣자 코가 시큰해졌고 깊은숨을 들이켰다. “장의건 의사 선생님은 어디 계세요?”오석은 뿌옇게 흐린 눈으로 소희를 바라보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부엌에서 약을 달이고 계세요.”소희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 할아버지도 좀 쉬고 계세요. 제가 할아버지 곁을 지킬 테니까 깨어나시면 알려드릴게요.”하지만 오석은 천천히 벽에 기대어 앉았다. “저도 잠들 수가 없네요. 여기 아가씨와 함께 있을게요.”시계는 째깍째깍하며 속절없이 흘러가자 오석은 점점 안절부절하며 말했다.“의사 선생님께서 약을 다 달였는지 확인하러 가볼게요.”소희는 재석의 손을 계속 잡고 있었고, 그의 손이 따뜻하다는 것을 느끼자 안심했다. “가보세요.”오석은 떨리는 몸을 일으켜 천천히 밖으로 걸어갔는데 정문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오석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재석이 아프다는 소식을 퍼뜨리지 않았고, 회사 사람들은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