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원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잘 놀아. 저녁에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알았어요!” 요요가 환하게 웃으며 반짝이는 하얀 이를 드러냈다.그리고 요요는 또 무슨 재미있는 벌레를 발견했는지 금세 달려갔고, 시원은 멀리 있는 요요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임구택에게 말했다.“할아버지한테 안부 좀 전해줘!”“응!” 구택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요요 보고 싶으면 언제든 연락해. 사진 찍어서 보내줄 테니까.”구택의 말에 시원은 입꼬리를 띄우며 무심한 미소를 지었다.“괜찮아.”이에 구택은 눈빛이 깊어지며 말했다.“그럼 이만 끊는다!”“그래!”휴대폰을 놓은 구택은 눈썹을 찌푸렸다. 시원이 이번에는 정말 마음을 쓴 것 같은데, 청아가 또다시 고집을 부리고 있다.소희가 시원에게 요요의 출생 비밀을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구택은 어떻게 해야 간접적으로 시원이 알 수 있게 해야 할지 궁리를 해야 했다....밤이 깊어지자 청아는 요요를 안고 방으로 자러 갔고, 소희도 강재석을 방으로 모셨다.“오빠는 언제 돌아온다고 했어요?” 소희가 물었다.“몰라, 명절에도 연락이 안 돼. 네가 알아보려고 했는데, 혹시 전화 왔어?” 강재석이 질문에 소희는 고개를 저었다.“저도 거의 한 달 동안 오빠 소식을 못 들었어요.”이에 강재석은 못마땅한지 투덜댔다.“걔 얘기는 하지 마, 이름만 나와도 화가 나니까!”하지만 소희는 강시언을 변호하며 말했다.“오빠는 분명 임무를 수행하느라 집에 연락이 어려운 거예요.”“걔가 목숨을 걸고 일하는 한, 집에 돌아오지 않을 거야. 언젠가 누군가가 그의 유골함을 가져다주면, 마음이라도 놓게 되겠지.”강재석이 비웃듯 말하자 소희는 미간을 좁혔다.“그럴 리가 없어요. 오빠는 언젠가 무사히 돌아와 할아버지 곁을 지킬 거예요!”“그날이 올지말지 내가 어떻게 알겠니?“그런 재수 없는 얘기는 하지 마세요.”소희가 입술을 깨물며 말하자 강재석이 소희를 진지하게 보더니 급히 손을 툭툭 치며 웃었다.“농담
임구택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넌 당시 진언이 일부러 죽음을 가장해 조직에서 탈출하도록 계획했다고 의심하는 거야?”“아니!” 소희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는 그럴 리 없어. 임무 정보가 유출되었고, 백양들이 위험에 처할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위험으로 몰아넣을 리 없어!소희는 오빠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믿었으나 구택이 소희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이미 몇 년이 지났어, 더 이상 생각하지 마.”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계속했다. 구택의 말이 맞았다. 오래전 일을 추궁하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었다. 소희가 지금 고민해야 할 것은 오빠가 어떻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였다.다음 날, 소희 일행은 운성에서 하루를 더 보냈다.강재석은 요요와 함께 산에 올라 야생 과일을 따고 밤을 캐고 호두나무에 올라가 호두를 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돌아온 후, 오석이 요요에게 밤을 까는 법을 가르쳤다.저녁에는 그들이 가져온 밤으로 밤 케이크 등을 만들어 즐겁고 알찬 하루를 보냈다.다음 날 아침, 일행은 운성을 떠났는데 강재석과 요요가 가장 아쉬워했다. 강재석은 청아에게 시간이 나면 소희와 함께 다시 집에 오라고 당부했고 청아는 강재석의 따뜻한 환대에 감사하며, 꼭 다시 요요와 함께 찾아뵙겠다고 약속했다.모두 차에 올라 멀어지자 소희는 강재석이 아직도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역시 우리 요요가 인기가 있어. 평소에 나 출근할 때 할아버지가 절대 이렇게 배웅해 주신 적 없었거든.”이에 청아가 웃으며 말했다.“할아버지 정말 좋으신 분이야. 기회가 되면 또 올게.”그러자 소희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다음에 혼자 돌아왔는데 요요를 데리고 오지 않으면, 할아버지가 날 쫓아내실 거야.”소희의 말에 차 안의 모두가 함께 웃었다.…강성으로 돌아온 다음 날, 소희는 드라마 세트장으로 출근했고, 청아도 새로운 일자리 면접을 보러 갔다.저녁에 돌아온 후, 청아는 맛있는 저녁을 차려 소희에게 자신이 면접에
금요일 밤, 우청아가 새로운 일자리를 찾은 것을 축하하기 위해 성연희가 넘버 나인에서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소희는 먼저 집에 돌아가 요요를 데리고 왔고, 청아는 퇴근 후 바로 거기로 가기로 했다.추석이 지나 날은 일찍 어두워졌다. 그리고 소희가 요요를 안고 넘버 나인에 도착했을 때, 이미 화려한 조명이 켜져 있었고, 호텔 전체가 반짝거렸다. 로비를 지나갈 때, 많은 젊은이들이 서 있었는데, 모두 패셔너블하거나 독특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 학생들처럼 보였다. 이들이 지나갈 때, 갑자기 누군가가 소리치자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다들 조용히 해, 선유 누나가 전화 중이야!”이에 소희가 뒤돌아보니 정말로 이선유였다. 선유는 프론트 데스크에서 전화를 하고 있었고, 목소리는 사랑스러웠다.“노명성 오빠, 저희들이 넘버 나인에 놀러 왔는데, 사람이 많아서 오빠 프라이빗 룸을 빌리고 싶어요.”“근데 프론트 데스크 직원이 안 된다고 해서 저 대신 얘기 잘 해주실 수 있어요?” 이들은 모두 선유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고, 선유가 말할 때 모두가 조용히 기다렸다.이윽고 선유가 프론트 데스크에 전화를 건네주자, 명성이 뭐라고 했는지, 직원은 곧바로 태도가 돌변하여 대답했다.“알겠습니다, 노명성 사장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전화를 끊은 후, 프론트 데스크 직원은 웃으며 말했다.“이선유님, 노명성 사장님이 프라이빗 룸을 사용하시도록 허락하셨습니다.”그러자 이선유는 프론트 데스크를 차갑게 쳐다보며 말했다.“말했지? 나 노명성 사장이랑 친하다고. 다음부터 나를 막으면 바로 컴플레인 들어 갈 줄 알아.”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 선유에 프론트 데스크 직원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지며 말을 잇지 못했다.그리고 선유는 일행을 이끌고 엘리베이터로 향했고, 일행이 몰리자 소희를 옆으로 밀쳐냈다. 또한 선유 옆에 있는 여학생이 선유에게 아부를 하듯 입을 열었다.“선유야, 너 진짜 대단하다. 전화 한 통으로 문제를 직방으로 해결하다니!”“오빠의 프라이빗 룸을 잠시 사용하는 것뿐이야
소희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묻자 성연희는 도리머리를 치며 말했다.“널 몰래 찍던 사람이 다시 나타났어?”“아니, 최근에 특히 조심했는데, 의심스러운 사람은 없었어!”“발각됐으니까 더 조심할 거야. 하지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면 다시 나타날 거고.”“난 조심할 거야!” 연희가 밝은 웃음을 지으며, 이 일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소희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노명성이 너와의 약속을 취소하고 이선유와 함께 시험 촬영을 간 건 어떻게 된 거야?”그러자 연희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그걸 어떻게 알았어?”“들었어.”“그렇게 과장된 건 아니야. 그날 내가 명성과 새로 오픈한 프렌치 식당에서 식사하기로 했었어.”“근데 선유의 아버지가 명성에게 전화해서, 딸이 여주인공 역할을 맡게 됐는데 시험 촬영을 가야 한다고 한거지.”“그리고 자신은 못 미덥지만 경성에 올 수 없으니, 선유랑 함께 가서 딸이 속임수에 빠지지 않도록 봐달라고 부탁한 거야.”이에 소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알고 있으면 돼.”“걱정하지 마, 내가 명성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건 선유 때문이 아닐 거야.” 연희의 눈빛에는 결연함이 어려있었지만 소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문제가 이미 생겼다면, 선유의 개입은 너희 문제를 확대시킬 거야. 결국 어떤 결과가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으니, 싹을 잘라버려.”“알아, 우리 사이에 걔가 들어올 틈? 여지? 절대 없을 거야.”“연희 누나!” 김영이 연희를 불렀다.“청아 씨가 왔어!”소희가 고개를 돌리자 청아가 방금 들어온 것을 보았고 연희는 소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청아가 장시원과 이제 막 헤어져서 입으로는 말 안 해도 마음속으로는 분명히 힘들 거야. 오늘은 좀 즐겁게 해주자.”“응!” 소희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연희는 환하게 웃으며 옆에 놓인 꽃다발을 집어 들고 청아에게 다가갔다.…그다음 주말, 소희와 임구택은 청원에서 이틀을 보냈다. 청원에 올 때마다, 두 사람은
미나가 앞으로 나서서 설계도를 뺏어왔다.“이건 소희가 이틀 동안 그린 거예요!”진영기 부감독이 서둘러 물티슈로 의자를 닦으며 말했다.“이선유 씨, King의 설계도는 일반적으로 만질 수 없어요. 이런 거에 굉장히 예민하거든요. 의자를 닦았으니 편히 앉으세요!”이에 선유가 비웃으며 말했다.“King으로 나를 겁주지 마세요. 아무리 유명해도 디자이너일 뿐이잖아. 돈 받은 만큼 옷 만들어주는 그런 일꾼,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데 뭐.”미나가 소희의 설계도를 정리하며 여자아이의 말을 듣고 뒤돌아보며 혼자 생각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거만한 거야?’이에 진영기 부감독이 의자를 닦은 후 물을 건네며 말했다“선유 씨, 일단 물부터 마시세요.”하지만 선유는 건네주는 물을 보고 까다롭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난 이딴 싸구려 물은 안 마셔요!”“아 역시 그렇죠? 이 물이 싸긴 해요.” 진영기 부감독이 서둘러 말하고는 스태프를 불러 선유의 물을 사 오도록 지시했다. “됐어요, 그냥 King을 불러와요. 빨리 내가 원하는 디자인 말해주고 만들어오게.”선유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진영기 부감독이 서둘러 대답하며 미나에게 소희를 데려오라고 재촉했다.“알겠습니다, 알겠어요!” 이에 미나는 마지못해 소희를 찾으러 갔다.마민영이 오늘 기분이 좋지 않아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울렸고, 이지민 감독은 어쩔 수 없이 소희를 찾아왔다. 소희가 도착하자 마민영은 바로 기분이 풀렸는지 메이크업을 받으며 다음 장면 촬영을 기다렸다.그때 소희는 다른 배우들의 의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미나가 급히 달려왔다. 그리고는 부감독이 누군가를 데려왔는데, 그것이 소희에게 디자인을 맡기려고 온 것 같다고 알렸다.이에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이 일 끝나면 갈게.”미나는 소희를 재촉할 수 없어 곁에서 기다렸고, 소희가 배우들의 의상을 모두 준비한 후에야 함께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미나가 입을 열었다.“진영기 부감독이 저 여자한테 계속 저자세로 대
진영기 부감독이 눈을 크게 뜨고 칭찬했다.“이선유 씨, 정말 손이 크시네요!”선유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물론 이건 디자인 비용일 뿐이에요. 드레스 제작 비용도 얼마든지 말씀하세요!”미나가 옆에서 듣고는 혀를 내둘렀다. ‘부감독이 왜 저렇게 아부하는지 알겠군. 의상 하나에 2억이라니! 역시 그 사세구나.’하지만 소희는 눈 깜짝하지 않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차분히 대답했다.“정말로 시간이 없어서요. 다른 디자이너 찾아보세요.”그제야 선유는 진지하게 소희를 바라보며 말했다.“돈이 적다고 생각되나요? 국제적인 탑급 디자이너라 해도 이 정도 디자인 비용은 꽤 되는 거잖아요!”“돈 문제가 아니에요.”두 사람은 서로 만날 일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서로 지나쳤다. 선유는 소희가 자신을 고의로 창피하게 만드려는 것으로 생각했고, 더 높은 디자인 비용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했다. “하 그럼 1억 추가할게요. 당신이 유명하다고 하니 추가하겠다는 뜻이라고요. 이제 만족하나요?”하지만 소희는 개의치 않다는 듯 자신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의상 목록을 체크하고는 미나에게 말했다.“마민영의 다음 씬에서는 예전의 가난한 이미지를 많이 벗어나야 해. 그러니까 옷 좀 정리해 봐, 체크하게.”“알겠어요!” 미나가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한 채로 대답했고, 선유를 힐끔 쳐다보며 소희를 따라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일에만 집중하며 선유를 철저히 무시했다. 졸지에 찬밥 신세가 된 선유는 어이없다는 듯 진영기 부감독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게 지금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거죠? 제가 제시한 금액이 적어서 저러는 건가요?”화가 잔뜩 난 선유에 진영기 부감독이 서둘러 답했다.“선유 씨, 화내지 말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소희한테 다시 얘기해 볼게요.”진영기 부감독의 말에 선유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가서 잘 얘기하세요!”진영기 부감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희를 찾아갔다.“소희 씨, 저랑 얘기 좀 해요!
진영기 부감독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이선유 씨, 조급해하지 마세요. 예술가들은 대부분 조금 기행이 있는 법이니까요. 저 다시 소희한테 얘기해 볼게요.”선유는 눈썹을 찌푸리며 화를 내며 말했다.“아니 자기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다고 그래? 고작 디자이너 나부랭이 따위가 자기가 대단한 사람으로 착각이나 하고!”“내 드레스 디자인 안 해주면 다시는 강성에서 발붙이고 살 수 없게 만들 거니까 그런 줄 알아라고 하세요!”이에 진영기 부감독이 서둘러 답했다.“선유 씨, 소희가 아직 어리니까, 너무 심하게 다그치지 마세요.”“아니면 제가 이지민 감독님한테 말씀드려 다른 디자이너를 연락해 드릴게요. 분명히 만족하실 겁니다!”“내가 고작 디자이너에게 굽신거려야 한다는 겁니까?” 선유가 이를 악물며 분노했다.“저렇게 나오니까 더더욱 디자인을 맡기고 싶은데요? 고집이 얼마나 센지 한 번 보게!”말을 마친 선유는 콧방귀를 뀌며 돌아섰다. 그리고 미나는 진영기 부감독이 이선유를 따라가며 계속 아부하는 모습을 보며 일이 크게 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선유가 어떤 관계를 동원했는지 모르겠지만, 오후가 되자 이지민 감독이 특별히 소희를 불러서 물 한 잔을 건네며 친절하게 말했다.“소희 씨, 최근 드라마 세트에서 일이 잘되고 있나요?”“네, 잘 되고 있어요.”“그래요, 뭐든지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소희가 입술을 깨물며 대답하자 이지민 감독이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무슨 일이든, 말만 하면 제가 바로 해결하게 해 드릴게요.”“아뇨, 모두가 저를 잘 도와주고 있어요.”이지민 감독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이선유 씨가 졸업식 무대에서 입을 드레스를 디자인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들었어요.”“그거 소희 씨가 디자인해 주시면 안 될까요? 비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제가 보충해 드릴게요.”“그리고 소희 씨 일은 진영기 부감독이 다른 조수를 하나 더 배정해 드릴 테니, 그냥 드레스 디자인에 집중하세요.”“드라마 세트에서는 제가 모든
이지민 감독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소희가 King으로 알려지고 나서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소희가 왜 이선유의 의뢰를 받지 않는지 궁금해요.”“그저 드레스 한 벌 디자인하는 일인데, 소희 씨한테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나?”“King 같은 탑급 디자이너는 의뢰를 선택해서 받을 자유가 있죠.”보조의 말에 이지민 감독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소희가 자기 일을 미나에게 인계하러 갔을 때, 미나는 놀라며 말했다.“소희 씨, 왜 또 안 오는 거예요? 이지민 감독이 뭐라고 했어요? 이선유 때문에?”이에 소희는 차분하게 대답했다.“아니에요, 더 이상 묻지 말아줘요. 이선유가 오면 그냥 되돌아 가게 하고, 내가 없을 때, 그 사람이랑 충돌하지 말고요.”미나는 화를 내며 말했다.“그 이선유도 정말 건방지네요. 소희 씨가 드레스를 디자인해 주지 않는 건 소희 씨 자유인데, 왜 이지민 감독을 시켜 쫓아내는 거죠?”“어떤 사람들은 돈이 있다고 생각하면 모두가 자기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소희가 자신의 물건들을 정리하며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요, 뭐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고요.”“소희 씨, 난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으니까, 빨리 돌아와요!” 미나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하자 소희는 웃으며 가방과 캡모자를 쓰고 주차장으로 향했다.“곧 돌아올 거야.”시간이 이른 편이라 소희는 경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길에서 방향을 틀어 스승 도경수의 집으로 향했다. 도경수는 서재에서 글을 쓰고 있었고, 소희는 손을 씻고 옆에서 먹을 갈아주었다.“갑자기 왜 여기로 왔어?” 도경수가 웃으며 물었다.“무슨 일 있어?”이에 소희는 진지하게 먹을 갈며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제가 무슨 일이 있겠어요?”“너와 임구택의 일 계속 숨길 거야?” 도경수가 은근히 묻자 소희는 웃으며 말했다.“안 알려드렸다고 해서, 스승님이 모르시겠어요? 선배가 말씀드렸나요?”“걔는 아니야!” 도경수가 웃으며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