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청아는 말을 마치고 자신의 디자인 초안을 들고 자리로 돌아가자 장시원이 옆에 앉으며 차분히 말했다.“모두 잘하셨네요, 이제 저와 배강 부사장이 돌아가서 두 분의 디자인을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장시원의 말에 황대헌은 웃으며 말했다.“이것은 두 디자이너의 초안입니다. 혹여나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필요하다면 두 디자이너더러 다시 만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말을 마친 후, 황대헌 부사장의 얼굴에 미소가 더 환해졌다.“요즘 사장님께서 항상 바쁘셔서 대접을 못 했는데, 오늘 저녁 시간이 되신다면, 저희가 대접해도 될까요?”“오늘은 제가 대접을 할 테니 두 분이 오셔서 디자인에 대한 피드백을 같이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요.”황대헌의 말에 배강이 맞장구를 쳤다.“그러죠, 오늘 장시원 사장에게 다른 일정이 없으니까!”시원은 배강 슬쩍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암묵적인 동의에 황대헌 부사장이 흥분하여 말했다.“정말 잘됐네요. 바로 호텔 예약하겠습니다.”배강은 청아를 바라보며 웃으며 말했다.“청아 씨도 같이 가야 가죠. 식사하는 동안 청아 씨 디자인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할 수 있을 거예요.”청아가 말하기도 전에 황대헌이 바로 대답했다.“물론, 청아 씨도 갈 겁니다.”회의가 잠시 끝나고, 황대헌은 비서에게 호텔을 예약하도록 하고, 시원과 배강을 옆에 있는 휴게실로 데리고 가 커피를 마셨다. 모두가 밖으로 나가면서 복도에서 헤어졌고, 청아는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 물건을 정리하며 이경숙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진도준은 자기 개인 사무실로 돌아가 의자에 앉았고, 얼굴이 좋지 않았다. 그러자 비서가 도준에게 물 한 잔을 따르고 칭찬했다.“장씨 그룹이 아직 누구의 디자인을 쓸지 결정하지 않았으니, 도준 씨, 서두르지 마세요!”“저랑 청아 씨 디자인 중 어느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까?”도준의 질문에 비서가 바로 대답했다.“물론 도준 씨의 디자인이 더 낫죠. 청아 씨의 것은 너무 화려하고 관광 명소처럼
“엘리베이터 도착했네요, 잘 가요, 안녕!” 지우림이 친숙한 어투로 우청아와 작별 인사를 했다.“내일 봐요!” 청아가 손을 흔들며 다른 사람들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사무실 건물을 나오자 배강이 잠시 기다렸다가 돌아보며 청아를 불렀다. “청아 씨, 내 차 타고 가요!”하지만 청아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저는 우리 부사장님 차 타고 갈게요!”청아의 말에 장시원이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차 문을 열어 탔다. 곧이어 배강도 차에 올라타 시원의 긴장된 옆모습을 보며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청아 씨가 일부러 우리와 거리를 두려는 걸 수도 있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이에 시원이 배강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거리를 두는 게 맞아. 앞으로 청아를 만났을 때 너무 친근하게 굴지 마.”“나중에 우리가 청아의 디자인을 선택하게 되더라도, 청아가 잘한 걸 뒤에서 사람들이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배강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고객인데, 누구를 선택하든 우리 마음인데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어?”“천하의 장시원이 이렇게 조심스럽다니. 네 평소 스타일이 아닌데?”배강의 말에 찔렸는지 시원은 움찔했고, 확실히 평소보다 약간 화가 난 듯한 모습을 보였다.“요즘 너 말이 너무 많아, 운강에서 진행하는 새 프로젝트에 널 확 보내버릴까?”그러자 배강은 곧장 입을 다물고 운전에 집중했고, 더 이상 화난 시원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황대헌이 황조호텔에 예약한 룸으로 들어가자, 시원이 당연히 센터에 앉았고, 황대헌은 의도적으로 청아를 자신 옆에 앉도록 했다. 하지만 청아는 자기 경력과 지위를 고려할 때 그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사하고 고명기 옆에 앉았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도준과 도준의 비서가 앉았다.시원은 청아가 일부러 자신과 거리를 두려는 것을 알아차리자, 눈동자가 약간 차가워졌고, 입가에는 약간의 냉소가 걸렸다.황대헌은 갑자기 시원이 직접 청아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온 것을 보고 두 사
배강은 이 술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밤에는 운강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예약해야 할 수도 있었다.우청아는 한 모금만 마시려고 했지만,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장시원이 술잔을 비우는 걸 보며 뜻밖의 충동을 느꼈고, 결국 잔을 다 비워버렸다.이에 배강은 바로 웃으며 말했다. “청아 씨, 이렇게 사장님을 존중할 줄은 몰랐네요!”이에 황대헌이 서둘러 말했다. “배강 부사장님, 장시원 사장님께서 청아 씨를 존중해 주신 거죠.”배강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지만, 말없이 웃기만 했다. 청아의 얼굴에는 붉은빛이 돌았고, 시원을 쳐다보지 못하고 자신의 술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황대헌 은 시원의 빈 술잔을 보며 조심스럽게 술병을 들고 시원에게 술을 따랐다. “신입 사원인 청아 씨가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릅니다. 장시원 사장님, 마음에 두지 마세요.”배강은 속으로 생각했다. 청아가 장씨 그룹에서도 일정 시간 동안 일했고, 가장 사람을 단련시키는 사장 비서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시원이 청아를 너무 잘 보호했기 때문에 이런 손님과 술을 마시는 접대는 오직 최결한테만 맡겼던 것이다.물론 황대헌의 말은 시원에게 들리도록 일부러 한 말이었다. 자신이 청아를 잘 보호하고 있다는 인상을 시원에게 심어주려는 것이다.이어서 진도준 등이 다가와 술을 권하며 자신들의 디자인 우세를 언급했다. 하지만 시원은 단지 표정을 평온하게 유지하며 듣기만 했고, 어떠한 태도도 보이지 않았다.술자리가 끝났을 때, 시원은 분명 술을 많이 마셨다. 겉으로는 별다른 기색이 없었지만, 청아는 분명히 시원이 취했다는 것을 알았다.나가는 길에 시원이 머리를 한 번 짚자, 황대헌이 바로 말했다. “장시원 사장님과 배강 부사장님 오늘 술을 많이 드셨으니 오늘 밤은 돌아가지 마시고 여기서 묵으세요. 이미 위층에 방을 예약해 놓았습니다.”그러고는 청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청아 씨, 장시원 사장님이 술을 많이 드셨으니 방까지 모셔다드리세요.”“네?” 청아
이때 우청아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왔는데 보니 배강이 보낸 메시지였다. [청아, 나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가니까 시원이 좀 잘 챙겨줘.]청아는 할 말을 잃었다.[일부러 그러는 거예요?][아니, 정말 아니야. 잠시 후에 돌아올 테니까 일단 좀 도와줘!]배강의 설명에 청아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 핸드폰을 내려놓고 물을 들고 침실로 돌아갔다. 들어가 보니 시원은 잠들어 있었다. 청아는 물을 옆에 두고, 이불을 덮어주고는 떠날 생각이었다.“으 더워!” 시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작게 말했고, 손을 들어 이불을 걷어냈다. 그러자 청아는 시원이 깨어난 것 같아 다시 물었다. “물 더 드실래요?”청아의 목소리에 시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청아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청아야?”“네!” 청아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시원은 갑자기 손을 들어 청아의 손목을 잡고 침대 위로 세게 끌어당긴 후, 몸을 숙여 청아를 짓눌렀다. 시원의 검은 눈동자가 청아를 깊게 바라보았다.갑작스러운 상황에 청아는 깜짝 놀라 바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원은 청아의 손목을 놓지 않고, 눈빛이 다소 혼란스러워 보였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왜 있어?”“술에 취하셨어요!” 청아가 말했고, 시원의 손을 빼려고 애썼다. “시원 씨, 그만해요!”“난 장난치는 게 아니야!” 시원의 목소리는 낮고 어두웠다. 시원은 청아를 가만히 응시하며 서운한 눈빛을 보냈다. “네가 나를 떠나라고 했고, 나도 손을 놨어. 그런데 넌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시원의 말에 청아의 몸부림이 멈추고, 청아의 큰 눈이 놀라서 시원을 바라보았다. 시원의 목소리에는 답답함으로 가득했다. “난 널 잊을 수가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청아야, 나 어떡하면 좋지?”“네가 떠난 2년 동안, 난 정말로 네가 그리웠어.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지. 널 사랑하는 내 자신이 바보 같아 보였어.”“난 스스로를 속여 네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다고 믿고, 널 강제로 내 곁에
“다른 사람은 없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만 있었지!”우청아는 쓰라린 아픔을 참으며 일어나 방을 떠났다. 호텔 로비에 도착했을 때, 청아의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정신이 몽롱한 채 밖으로 걸어가던 중 누군가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청아 씨!”청아가 고개를 돌려보니 고명기 부사장이었다. 뜻밖의 인물에 청아는 조금 놀랐다.“어떻게 여기 계세요?”이에 고명기가 청아를 훑어보며 말했다. “괜찮아요?”고명기의 말에 청아는 그제야 깨달았다. 고명기는 청아가 또다시 괴롭힘을 당할까 봐 걱정돼 술자리가 끝난 후에도 떠나지 않고 여기서 청아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이에 청아는 감동했다.“괜찮아요, 감사합니다!”“청아 씨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아직 순수해요. 하지만 거절해야 할 것은 거절해야 하죠. 성수현 사장님 문제는 대처를 잘했고요.”그러자 청아는 감사의 말을 전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하지만 저와 장시원 사장님은 친구니까, 저를 해치지 않을 거예요!”“그렇다면 다행이에요!” 고명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제 집에 갈 테니까 청아 씨도 일찍 들어가요.”“네!” 청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일터에서 이런 상사를 만난 것은 청아에게 큰 행운이었다.“아닙니다.” 고명기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청아가 호텔을 떠나 택시에 앉아 있을 때, 시원의 말들이 떠오르자 가슴이 아파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웠다.집에 돌아와 보니 이경숙 아주머니는 아직 잠들지 않았고, 우청아 몸에서 나는 술냄새를 맡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청아 씨,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무 힘들게 하지 마요. 잠깐 앉아서 쉬어요. 물 좀 갖다줄게요.”“괜찮아요, 이렇게 늦었는데 빨리 들어가세요! 내일은 토요일이니까 오지 마세요.”이경숙 아주머니가 물을 가져다주며 청아의 얼굴색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슨 일 있어?”청아가 물을 받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냥 좀
우청아는 장시원이 자신을 좋아할 거라고는 절대 기대하지 않았으며, 그런 꿈조차 꾸지 않았다.하지만 오늘 시원의 말은 청아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예전에 했던 고백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그때 청아는 시원이 단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해, 자신이 그를 처음으로 거절한 사람이기 때문에 시원을 포기할 수 없었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청아는 시원의 고통을 알았다. 시원은 청아를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 복잡한 생각이 들자 청아는 눈을 감았다. 자신의 고집이 옳은 것인지, 자신이 시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둘에게 진정한 미래가 있을지 혼란스러웠다....다음 날시원이 호텔에서 깨어났을 때, 이미 아침 9시였고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더니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오랫동안 이렇게 많은 술을 마신 적이 없었다. 주름진 셔츠를 보며, 시원은 주성에게 전화를 걸어 옷을 가져오라고 했다.시원이 옷을 벗고 샤워하러 갔고, 몇 분 후 목욕가운을 입고 나왔을 때, 배강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배강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더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여기서.”이에 시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음?”배강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며 은근슬쩍 물었다. “방에 다른 사람 없어?”시원은 소파에 앉아 담배를 꺼내며 배강을 힐끔 바라보았다. “귀신이라도 있을까봐? 들어가서 찾아볼래?”그러자 배강은 놀라며 말했다. “청아 씨 갔어?”청아의 이름에 시원이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손이 멈췄다. “우청아?”“응, 어젯밤 일부러 청아 씨 남겨서 널 챙겨달라고 했어. 너희 둘이 술기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랐는데, 정말로 갔다니!” 배강이 아쉬워했지만 시원의 얼굴색이 점점 어두워지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 한 번만 또 이러면, 너 운강으로 유배 보낼 거야!”“아, 알았어. 앞으로는 안 그럴게!” 배강이 농담처럼 말했다. “이게 내가 다 너를 위해서 이러는 거야!”시원은 불붙지 않은 담배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차가운 표정으로 앉았
우청아는 일찍 일어나 만두를 삶고, 국을 끓이고는 소희에게 문자를 보내 식사에 함께하지 않겠냐고 물었다.식사 준비가 거의 다 됐을 때 요요도 깨어났다. 청아는 요요의 얼굴을 씻겨주고 옷을 갈아입혔으며, 소파에 앉아 요요에게 작은 땋은 머리를 해주었다.“엄마, 오늘 쉬는 날이야?” 요요가 큰 눈을 뜨고 귀엽게 물었다. 아마 이경숙 아주머니가 오지 않았으니 엄마가 쉬는 날인가 싶어 물어본 듯했다.“응, 밖에 나가 놀고 싶어?” 청아가 웃으며 묻자 요요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그럼 착하게 밥 먹고 나면 엄마랑 같이 놀이공원에 가자!”청아의 제안에 요요는 기뻐서 웃었고 눈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소희 이모랑 성연희 이모도 함께 가?”“소희 이모는 수업이 있어서 시간이 없어. 연희 이모도 자기 일이 있으니까, 오늘은 엄마랑 둘이 가야 해. 괜찮지?”“응!” 요요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아가 요요의 머리를 다 빗겨주고 식사하러 갔을 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는데 허홍연이였다.“엄마!”허홍연이 웃으며 말했다. “청아야, 오늘 쉬는 날이지? 오랜만에 집에 와. 오늘 엄마가 네가 좋아하는 반찬 만들어 줄게.”이에 청아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안 돼요, 요요를 놀이공원에 데려가기로 했어요.”“그래?” 허홍연이 조금 머쓱해서 웃었다. “사실은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직접 만나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바쁘면 전화로 할게.”“네 이모 집 사촌이 장씨 그룹에서 일하고 싶은데 면접에 떨어졌어. 네가 사장이랑 사이가 좋으니까, 그쪽 인사부에 좋게 얘기 좀 해줄 수 있어?”“사실 사장 한 마디면 해결되는 일이잖아.”청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도와줄 수 없어요, 저 이미 회사 그만뒀어요.”“그만뒀어?” 허홍연이 놀라서 물었다. “언제?”“한 달 조금 넘었고 새 회사로 이직했어요.” 청아의 말에 허홍연은 조금 당황했다. “장씨 그룹처럼 좋은 직장을 어떻게 그냥 그만두니? 게다가 그만두기 전에 적어도 나랑 상의는 해야 하는
우청아는 휴대폰을 꽉 쥐고 있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뱉지 못하고, 한참 동안 참고 있었다.청아는 자신의 가정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허홍연 혼자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고등학교 때부터 여름 방학마다 일을 해서 학비를 벌었고, 대학에 가서는 가족에게 한 푼도 쓰지 않았다.2년 동안 외국에서 혼자 지내면서 가족이 그리웠다. 귀국 후 가족과의 관계를 조금이라도 개선할 수 있기를 바랐다. 허홍연이 아팠을 때, 청아는 최선을 다해 돌봤다. 외국에 있던 2년 동안 허홍연 곁에 있지 못한 것을 보상하고자 했다.근데 청아는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효도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처음에 허홍연과 허연이 청아를 속였을 때, 그녀는 진실을 알고 난 후 슬프고 상처받았지만 지금처럼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감정의 골은 점점 깊어만 졌고, 마음도 점점 더 차가워졌다.이때 요요가 청아의 손가락을 가볍게 흔들며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엄마, 무슨 일이야?”청아는 몸을 숙여 요요를 안았다. 청아의 눈에는 눈물이 없었고, 오직 슬픔만이 있었다. 이때 휴대폰이 다시 울려 봤더니 청아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가 이내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나야!” 허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청아, 돌아왔어? 네가 돌아왔다고 해서 널 찾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 마. 네가 나한테 빚진 돈 아직 4천만원이나 남았어. 언제 갚을 거야?”청아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고, 목소리는 조금 쉬었다. “지금 2천만원밖에 없으니까 먼저 줄게요.”“그래, 일단 2천만원 보내고 나머지 2천만원은 일주일 안에 줘. 급하게 써야 할데가 있어!”허연의 말에 청아는 미간을 찌푸렸다.“일주일 안에는 못 갚아요.”허연이 화를 내며 말했다. “우청아, 처음에 네가 3년 안에 1억을 다 갚겠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오리발을 내민다고?”“아직 두 달 남았고 오리 발 내미는 것도 아니에요. 전부 다 갚을 건데,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