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는 휴대폰을 꺼내 다시 게임을 시작했다. 며칠간 임구택이 유난히 달라붙는 것 같았다. 평소보다 더 애틋하게 굴어, 소희는 그가 결혼 전 불안증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무엇이든 구택의 말에 맞춰 주기로 했다....저녁, 모두가 넘버 나인에 모였다.누구 편에 붙어온 가족인지 모르겠지만 결국엔 남녀 할 것 없이 전부 한데 모이게 되었다. 소희와 구택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조백림과 장시원 등 친구들이 모두 와 있었다.이번엔 보통 방이 아니라 작은 연회장이 잡혀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노래방 스크린이 눈에 들어왔다. 스크린 앞에는 드럼 세트와 기타 등 악기들이 놓여 있었고, 방 한가운데엔 각양각색의 풍선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풍선 안에는 다양한 색의 작은 조명이 들어 있어 방 안을 은은한 빛으로 물들이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가운데에는 삼십 명이 앉을 수 있는 긴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테이블 위엔 각종 술이 가득했다. 왼편은 식음료 코너로 각종 음식이 차려져 있었는데, 특히 눈에 띄는 건 커다란 초콜릿 박스였다. 오른편에는 게임이나 벌칙용 도구들이 마련돼 있었다. 그 외에도 게임 구역과 오락 구역이 따로 있어 말 그대로 모든 게 완벽하게 준비된 파티였다.소희와 구택이 들어서자, 백림이 드럼 스틱으로 한 번 드럼을 쳤고, 그와 동시에 소희와 임구택 머리 위로 꽃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꽃잎은 두 사람의 어깨 위에 하늘거리며 내려앉았다.구택은 소희 위로 살짝 몸을 기울여 꽃잎을 막아주며 그녀의 손을 잡고 안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백림을 향해 짧게 쏘아붙였다.“그만 좀 유치하게 굴지?”백림은 일어나 웃으며 말했다.“이건 나랑 상관없어. 넘버 나인에서 알아서 분위기를 위해 꾸며 둔 거야.”장시원이 요요를 안고 다가와 테이블 위의 술을 가리키며 말했다.“여기 절반은 내가 집에서 가져온 특별한 술이야. 알아서 잘 마셔.”구택은 태연히 대답했다.“그 절반은 네가 결혼할 때 쓸 수 있도록 남겨둘까? 아무래도 몇
청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우리가 처음 만난 건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어. 그때마다 네가 출근할 때면 스쿠터를 디저트 가게 앞에 세워 두고, 돌아올 때 가게에 와서 디저트를 먹었잖아.”“다른 직원들끼리 네 얘기를 하기도 했어. 다들 네가 임구택의 대학생 애인일 거라고 수군댔는데, 난 절대 그럴 리 없다고 했어.”“네 눈빛이 너무 맑고 투명했거든. 그런 사람이 남의 애인이 될 리 없다고 믿었어. 내 직감이 맞다고 생각했지.”청아는 커다란 눈동자를 반짝이며 회상에 잠겼다.“그때 난 네가 나처럼 청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줄로만 알았어. 한가한 시간에 잠깐씩 일하는 거라고 생각했지. 설마 네가 청원의 주인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소희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땐 나랑 임구택 사이가 좀 복잡했어. 그래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알아.” 청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가가 살짝 촉촉해졌다.“시간이 이렇게 흘렀는데, 우리가 이렇게 함께 할 수 있다니, 난 정말 행운아야.”소희는 그때 디저트 가게에서 혼자 구석에 앉아 있는 일이 많았다. 성격이 조용하고 차분해서 누구도 쉽게 다가가지 못했지만, 청아는 소희의 진면목을 알고 있었다. 소희는 겉으론 차가워 보여도 실제론 주변을 환히 밝혀주는 작은 행성 같아서, 함께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그 빛을 받곤 했다.소희는 청아의 말에 감동하며 그녀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얼마나 세월이 지나도 우린 계속 함께할 거야. 나 이제 곧 결혼해. 다음은 너랑 시원 오빠 차례야!”청아는 따뜻한 미소로 답했다.“응, 알았어.”오늘 청아는 단정한 번 헤어스타일에 밝고 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예전 그대로였고, 두 사람의 우정 역시 변함이 없었다....앞줄에 앉아 있던 장시원이 살짝 고개를 돌려 소희와 청아를 쳐다본 뒤, 임구택에게 눈짓을 보냈다.“네 아내랑 내 여자가 무슨 얘기 중인 거야? 서로 끌어안고 있네?”구택은 고개를 돌려 보며 약간 찡그렸다.“아마 청아가 소희한테 속상한 일 털어놓는 중일 거
유정은 허겁지겁 도망치다가 발밑의 술병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그녀는 놀라서 비명을 질렀지만, 예상했던 아픔은 없었다. 누군가가 강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받쳐 주고 있었다.유정이 고개를 돌리자, 그녀를 잡아준 사람은 다름 아닌 조백림이었다. 술기운이 도는 백림의 눈동자는 평소보다도 더 깊고 부드러웠고, 그는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유정을 품에 끌어당겼다. 백림의 목소리는 마치 최고급 와인처럼 진하고 부드러웠다.“안겨 오고 싶으면 말만 해. 기꺼이 안아 줄게.”유정은 백림을 밀치고 일어나려 했지만, 손에 잔뜩 묻은 케이크 크림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결국 차분하게 되받아쳤다.“취한 척하면서 자만하는 거, 좀 재미없네.”백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그래? 난 꽤 재미있는데.”백림은 눈길을 유정의 크림 묻은 손가락에 두었다. 손목을 가볍게 잡고는 그녀의 손가락 끝으로 다가와, 조용히 입술을 대고 크림을 핥아먹었다.. 이에 유정은 온몸이 굳어졌다.백림은 혀끝으로 크림을 가볍게 훑으며, 술기운에 살짝 물든 눈을 더욱 깊이 있게 반짝였다.“정말 달콤하네.”유정의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윙 소리를 내며 멈췄다. 진짜, 이 남자는 여우가 따로 없었다.“달콤하다고? 더 달콤하게 만들어 줄까?” 유정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손에 묻은 크림을 백림의 얼굴에 대고 쓱 문질렀다.백림의 얼굴은 순식간에 크림으로 덮였고, 아까 그 단정하고 품위 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고, 어딘가 우스꽝스럽고 귀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유정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백림이 반응하기 전에 유정은 얼른 몸을 일으켜 도망쳤다....소희는 다른 사람들이 신나게 케이크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도 가장 열심히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나중에는 청아까지 케이크 전쟁에 가세했지만, 소희는 요요를 안고 소파에 앉아 조용히 케이크를 맛보고 있었다.“케이크 위에 있는 초콜릿이 제일 맛있어.” 소희가 말하자, 요요는
소희는 의아한 표정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응?”유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쑥스럽게 웃었다.“그게 며칠 전에, 내가 그 사람 일하는 가게에 갔었거든. 그런데 그가 뒷마당에서 자고 있길래,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봐.”“살짝 입 맞추고 말았어. 그러다 들켰지 뭐야.”유진은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지도 않고, 순진한 얼굴로 사연을 털어놓았다.“내가 잘못했어. 친구로 지내자고 해놓고는 그 순간 살짝 미쳐서 참질 못했네.”그때 하필이면 햇살이 너무 따뜻해서였을까. 그가 해당화 나무 아래 앉아 있는데, 무심한 듯 매력적인 그 얼굴이 빛을 받아 더 깊고 신비롭게 보였다. 유진은 잠시 정신을 잃었고, 이성과 함께 그 순간의 미풍에 휩쓸려 버렸다.소희가 물었다.“그럼, 그 뒤엔 어떻게 됐어?”“바로 그 자리에서 쫓겨났지 뭐.”유진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사실 그때 욕심이 생겼다. 살짝만 하고 멈추기에는 아쉬워서, 이미 키스해 버린 거 한 번 더 해본다고 큰일 나랴 싶어 조금 더 대담하게 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긴장한 나머지 언제 그가 눈을 뜬 건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소희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혹시 그 사람 부끄러워서 그런 거 아닐까?”유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절대 그런 눈치는 아니었어!”그가 계속 피하는 게 너무 얄미워서 유진은 오히려 더 화가 났다.“두고 봐. 내 생각엔 네 결혼식에는 어쩔 수 없이 나타날걸?”소희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그럼 내 생각엔 그 사람을 너희 삼촌의 들러리로 세우는 건 어때?”유진은 놀란 눈으로 소희를 바라보다가, 이내 깔깔 웃으며 물었다.“그 사람이 과연 받아들일까?”소희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맡을게. 그 사람을 다룰 방법은 내가 알아!”유진도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둘은 그렇게 서인에게 들러리 자리를 맡기는 데 기꺼이 합의했다.그때, 한 직원이 다가와 공손히 말했다.“소희 씨, 밖에서 찾는 분이 계십니다.”
소씨 집안이 파산하면서, 진연은 예전의 사모님 아우라가 사라졌고, 몇 달 사이에 많이 초췌해져, 예전의 오기가 많이 사라졌다.소희가 아무런 감정 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저를 찾으신 이유가 있나요?”소정인은 잠시 진연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네 엄마가 널 보고 싶다고 해서. 그리고 오늘 너와 임구택 사장님이 여기 친구분들과 함께 계신다고 해서 이렇게 찾아왔어.”소희는 냉랭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보셨으니 이제 돌아가셔도 되겠네요.”진연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지며 조용히 소정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소정인은 한층 더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소희야, 네가 이제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 나와 네 엄마도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을까? 아무리 뭐라 해도 우린 네 친부모잖니.”“그때 네 엄마가 소동이 때문에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사장님께서 지원해 주셔서야 겨우 퇴원할 수 있었어.”“그 뒤로 네 엄마와 나는 많은 걸 깊이 반성했다. 이제야 진짜 깨달았어. 친자식은 정말 다르다는 걸. 아무리 잘해줘도 남은 결국 남이더라.”“소동에게 그토록 마음을 줬건만, 결국 우리를 배신하고 떠난 그 애는 참으로 염치도 없는 아이였어.”진연도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맞아, 그때 내가 소동의 가식에 속아 넘어갔던 건 내 잘못이었어. 소희야, 엄마를 용서해 줄래?”소희는 예전의 거만함과 여유가 사라진 진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기억 속에는 수없이 많은 장면들이 스쳐 갔다.첫 만남에서 보였던 차가운 시선과 가식적으로 감춰진 경멸, 그리고 그 속에서도 분명히 느껴졌던 거부감. 그 태도는 감출 수 없는 것이었다. 이후로도 소씨 집안에서 함께 지내며 겪은 냉담함과 차가움은 그들의 사이에 더 큰 벽을 쌓았다.소희가 소씨 집안을 떠난 뒤 두 사람은 더욱 멀어졌다. 소동과 마찰이 있을 때마다 진연은 언제나 소동의 편에 서며 소희와 마치 적이라도 되는 듯 대립하곤 했다. 진연이
소희가 잠시 웃어 보였다.“괜찮아요, 신경 쓰지 않아요.”소정인은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공손하게 말했다.“사장님, 괜한 오해를 하신 것 같아요. 우리가 어찌 우리 친딸을 괴롭히겠어요?”임구택의 시선은 싸늘했다. 그는 소정인 부부를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친딸? 그 친딸은 지금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소정인의 얼굴빛이 일그러지며 말을 잇지 못했다. 구택은 소희의 손을 잡고 소파 쪽으로 안내하며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소정인 씨, 이전에 제가 분명히 말씀드린 적이 있죠? 무슨 일이 있으면 저를 찾아오라고요. 괜히 소희를 귀찮게 하지 마세요.”소정인은 당황한 듯 웃으며 말했다.“아, 그게 소희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진심으로 축하하고 싶어서...”그러나 구택은 무심하게 응대했다.“제 귀엔 축하보다도 일종의 압박처럼 들리는데요.”소정인은 얼굴이 화끈거리며 더듬더듬 말했다.“아니, 사장님, 저희는 단지 소희의 결혼식을 더 완벽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온 거예요.”그 말에 구택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제 결혼식 준비가 불완전하다는 말씀인가요?”소정인은 입을 다물고 대꾸하지 못하자, 구택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두 분께서는 소희에게 든든한 배경이 없어 걱정하시는 것 같지만, 제 아내의 든든한 지원군은 그 어떤 부모보다도 믿음직스러운 분들이에요.”진연은 그의 말에 얼굴빛이 어두워지며 화를 참지 못하고 비아냥거렸다.“그러게요, 사장님 말씀대로죠. 소희 뒤엔 강씨 집안이 있으니, 우리가 아무리 전성기를 누렸더라도 강씨 집안에 비할 바가 아니죠.”구택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지고는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이제껏 제 아내를 키워주신 강씨 집안에게 감사를 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비꼬고 계시다니 놀랍군요.”진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구택은 그녀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말했다.“결혼식에 부모로서 참석한다고 해도, 두 분이 감히 그 자리에서 소희의 부모라고 당당히 소개할 수 있겠습
임구택은 소희의 옆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조금만 마셔, 밤에는 내가 돌려받을 테니까.”소희는 볼 끝이 살짝 붉어지며 눈웃음을 지었다.“좋아, 콜!”두 사람은 다시 파티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들이 멀어지자마자, 구은서는 다른 복도 쪽에서 나타나 그들을 향해 눈길을 던졌다. 그녀는 곧바로 한 직원에게 다가가 물었다.“임구택 사장님이 예약하신 방이 어디인가요?”직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구은서 씨,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죠?”은서는 깜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어둑한 조명 아래서 천천히 다가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심명이었다. 은서는 느긋하게 미소를 지었다.“심명 사장님이시군요.”심명은 잿빛 파란 셔츠에 고급스러운 린넨 바지를 입고, 섬세한 얼굴에 묘한 색기를 띄운 채 서 있었다. 귀에 달린 흑요석 귀걸이가 은은한 빛을 발하며 그를 더욱 신비롭고 차가운 인상으로 돋보이게 했다. 그는 은서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며 차가운 눈빛으로 경고했다.“구은서 씨, 그 잔머리 굴리는 걸 멈추세요. 소희의 결혼식에 어떤 사고라도 생긴다면, 당신은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르게 될 거예요.”은서는 어깨를 곧추세우고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심명 사장님도 소희를 좋아하신다면서요? 그럼 우리도 공통의 목표가 있는 셈 아닌가요?”그 말에 심명은 비웃음을 흘렸다.“누가 당신을 친구라고 생각하죠? 제발 착각은 그만하세요.”은서는 표정이 굳어졌고, 조소를 섞어 대꾸했다.“당신과 나는 다르죠. 저는 구택 씨를 좋아하면 제 방식대로 용감하게 다가가요.”“반면에 당신은 겁을 먹고 구택 씨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으면서 감히 대놓고 다가가지도 못하고 있잖아요.”심명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구은서 씨, 당신은 남을 이간질하고 이용하는 데 능한 것 같군요. 혹시 드라마에서 내연녀 역할을 너무 많이 맡아서 그 성격이 몸에 밴 건가요?”은서는 그의 비아냥에 얼굴이 붉어지며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새벽까지 이어진 모임이 끝난 후, 소희와 임구택은 집으로 돌아왔다. 씻고 나서 침대에 누우니 시계는 이미 새벽 두 시를 넘어 있었다.깊은 밤, 임구택의 눈빛은 여전히 맑았다. 소희를 품에 안고 그녀의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소희야, 이제 우리 결혼하는 거야.”소희는 그의 품에 파묻힌 채 작게 대답했다.“응.”구택은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짝 만지며 미소 지었다.“예전에 우리 서로의 정체를 모르고 만났을 때가 있었지. 처음으로 널 본 건 강성대에서였던 거 기억해?”소희는 옆으로 살짝 몸을 돌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눈동자가 반짝이며 대답했다.“기억나. 그때 당신이 내 편 들어줬었잖아.”구택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참 이상하지. 그때 널 잘 몰랐는데도 누군가가 너를 괴롭히는 걸 보니 이상하게 화가 났어. 그래서 돕고 싶었어.”소희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장난스레 말했다.“설마 외모 보고 덤빈 건 아니지?”따스한 조명 아래에서 구택의 눈빛은 깊어졌다. 소희의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대꾸했다.“외모 때문에 행동한 거라면, 네가 우리 집에서 임유민 과외를 봐주러 왔을 때부터였겠지.”소희는 그제야 깨달은 듯 말했다.“아, 그때부터 벌써 나한테 뭔가 꿍꿍이가 있었구나?”구택은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그때부터였어. 넌 일부러 나를 유혹하려고 그런 거 아니었어?”그는 잔디밭에서 유민이에게 활쏘기를 가르치던 소희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얀 다리와 날씬한 허리, 그리고 활을 당기던 곡선미까지 눈길을 사로잡았다.“나중에 확신했어.”소희는 그의 손을 쥐며 물었다.“뭘 확신했는데?”구택은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말했다.“우리가 서로에게 빠져들었다는 거.”소희는 환하게 웃으며 부드럽게 반박했다.“난 아니거든?”“아니라고?” 구택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청아 오빠를 구하러 가던 그날 밤 나한테 일부러 전화 건 거잖아. 계획적이었지?”소희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