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희유의 긴 속눈썹이 가볍게 떨리더니 고개를 숙인 채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굳이 와서 말할 필요 없어요. 나랑 그 사람은 이제 아무 관계도 아니니까요.”본희가 미소 지었다.“비웃으러 온 게 아니에요. 유변학은 당신을 좋아한다는건 나도 알아요.”희유의 입꼬리가 비틀리듯 올라갔다.“그럼 더 기쁘겠네요. 나를 좋아해도 결국 당신이랑 함께할 테니까요.”본희의 선명한 붉은 입술이 올라갔다.“희유 씨, 우리랑 같이 가요.”희유가 눈을 들자 본희가 말을 이었다.“유변학은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우리랑 같이 갈 수 있어요.”“유변학을 잃지 않아도 돼요. 여전히 함께할 수 있으니까요. 단지 다른 곳에서 사는 것뿐이에요.”“예전에도 말했죠, 난 신경 쓰지 않는다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지금보다 더 좋은 생활을 보장할 수도 있어요.”“정말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다른 건 상관없지 않아요?”본희는 애써 희유를 설득하려 했고 눈빛은 진심인 듯 보였다.희유의 눈동자는 밤처럼 검었고 조용히 본희를 바라보았다.이해하지 못하는 듯,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그러고는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아마 난 당신만큼 깊이 좋아하지 않았나 봐요. 그래서 그렇게까지 관대해질 수는 없어요. 다른 사람과 함께 그 남자를 나눌 수는 없고요.”본희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유변학도 똑같은 말을 했어요. 역시 당신을 잘 아네요.”그 말은 바늘처럼 찔렀고 희유가 물었다.“할 말은 다 했나요?”본희가 말했다.“정말 생각 안 해볼 거예요? 난 당신에게 적의가 없어요. 진심으로 초대하는 거예요. 우린 공존할 수 있어요. 유변학이 당신을 더 사랑해도 난 상관없어요.”그러나 희유의 태도는 차가웠다.“당신의 진심은 나를 더 역겹게 만들 뿐이에요.”이에 본희가 한숨을 쉬었다.“고집 센 사람이 꼭 옳은 건 아니에요.”“우린 길이 달라요. 더 말할 필요 없고요.”희유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본희가 돌아서서 그녀
석유는 얼굴이 창백하게 굳은 채 돌아서서 곧장 명우를 찾아가 따지려 했다.“가지 마요.”우한이 석유를 붙잡았다.“희유도 분명 원하지 않을 거예요.”우한은 병실 안에서 잠든 희유를 한 번 바라보았다.“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곁에 있어 주는 거예요. 몸부터 회복하게 해야 하잖아요. 그리고 아까...”말을 잠시 멈추었다가 이어갔다.“명우 씨가 큰돈을 보냈어요. 희유 잘 돌봐 달라고요.”이에 석유는 냉소했다.“희유가 그 사람 돈이 필요하대요?”우한의 얼굴이 무거워졌다.“나는 명우 씨가 희유를 배신했다고 믿지 않아요. 이 일에는 분명 오해가 있는 거예요.”조금 전, 우한은 명우의 표정을 직접 보았다.그토록 처절하게 아파하는 사람이 사랑하지 않을 리 없었다.3일 후현공사.이른 아침, 청소를 마친 어린 승려가 운해스님의 방으로 갔다.“어젯밤 한 젊은이가 절 밖에 와서 무릎을 꿇고 있어요. 지금까지 계속 그러고 있죠. 스님을 뵙겠다고 하네요.”운해스님의 얼굴에 연민이 스쳤다.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절 밖에 이르렀을 때, 무릎 꿇고 있는 남자를 보자 저절로 불호가 흘러나왔다.이전의 냉정하고 침착하던 모습은 사라졌었다.남자는 고베사막의 메마른 후양나무처럼 앉아 있었다.생기는 모두 빠져나가고, 바람에 시달린 줄기만 남은 듯 외롭고 황량했다.운해스님이 다가오자 남자는 곧게 세운 등허리를 조금 숙였다.한 자 한 자 직접 필사한 경전을 두 손으로 받쳐 스님 앞에 내려놓았고, 목소리는 쉬어있었다.“경을 돌려드리러 왔어요. 스님, 부탁드려요.”이곳에 오기 전, 명우는 묻고 싶었다.정성껏 경을 필사했는데도 왜 자신과 희유는 이런 결말에 이르렀는지.그러나 이 자리에 무릎을 꿇고, 바람에 흩날리는 경전을 보던 순간 깨달았다.이것은 천도를 위한 경전이었다.자신이 주사로 써 내려간 한 글자 한 글자는, 두 사람의 아이를 위한 천도였다.인연이 닿지 못한 아이를 이렇게라도 마지막으로 보내 주는 것이었다.처음
희유는 길고 깊은 잠에 빠졌다.어젯밤보다 오히려 더 고요하고 단단한 잠이었다.마음이 완전히 타버리고 나자 더는 기대도, 망설임도, 갈등도 남지 않았다.그저 다시 혼자가 되었다.아무것에도 매이지 않은 채,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만 남았다.해 질 무렵, 문득 눈을 떴을 때는 창밖에 붉게 물든 노을빛이 스며들고 있었다.희유의 눈동자는 흐릿했고 그 속에는 생기 대신 적막이 가득했다.아무리 따뜻한 빛이라도 이제는 닿지 않는 듯했다.“희유야.”문가에서 낮고 잔잔한 목소리가 들렸다.희유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하석유가 서 있었다.석유는 조용히 희유를 바라보았는데 눈빛에는 안타까움과 깊은 슬픔이 어렸다.“어쩌다 이렇게 됐어?”희유는 멍하니 석유를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석유 언니.”이와 동시에 눈물이 터져 나왔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다.“언니, 내 아이가 없어졌어요.”“내가 죽였어요.”“내 손으로 죽였어요.”석유가 다가와 희유를 끌어안았다.희유의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고 금세라도 바람에 흩어질 낙엽 같았다.석유는 더 세게 안자 희유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그 떨림 속에서 깊은 슬픔과 절망이 전해졌다.이에 석유의 눈시울도 붉어지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사라졌다는 건 애초에 인연이 아니었다는 뜻이야.”“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희유야, 조금만 더 버텨.”...희유는 한참을 울었고 정신도 흐릿해졌다.수술 직후라 몸이 버티지 못할까 걱정한 우한은 의사와 상의한 뒤, 수액에 진정제를 조금 넣었다.그제야 희유는 다시 천천히 잠에 들었다.석유는 병실을 나와 주강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안녕하세요, 저 하석유라고 하는데 오늘 강성에 왔거든요. 오늘 밤 희유는 집에 안 들어갈 것 같아서 연락드렸어요.”주강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고 어딘가 불안한 기색이 묻어났다.[희유는요?]석유는 잠시 말을 골랐다.“우한이랑 같이 있어요. 밖에서 자는 거 걱정하실까 봐, 대신 전화했어요
명우는 차를 몰아 미친 듯이 달렸다.가는 내내 희유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처음에는 받지 않았고 나중에는 아예 전원을 꺼버렸다.이토록 단호할 줄은 몰랐다.희유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명우는 전혀 몰랐다.그런데 하필 이런 때에, 자신을 두고 떠나 다른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하니 희유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거대한 공포와 혼란이 명우의 생각을 집어삼켰고, 누군가 심장을 세게 움켜쥔 듯 숨이 막혔다.피가 온몸으로 돌지 않는 것처럼, 신경 하나하나가 굳어버렸다.‘기다려 줘. 제발 기다려 줘. 희유야, 제발 이렇게까지 잔인해지지 말아 줘.’명우는 속도를 더 올렸다.그러나 병원에 도착했을 때, 수술실 복도에는 우한만 서 있었다.우한은 명우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고 얼굴에는 자책과 괴로움이 가득했다.“명우 씨, 늦었어요.”“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예요? 왜 이렇게 며칠씩이나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내가 못 막았어요. 미안해요. 설득을 못 했어요.”우한은 희유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긴 했지만, 아이를 포기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희유는 그만큼 명우를 사랑했으니까.“희유는 어디 있죠?”명우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이미...수술방으로 들어갔어.”명우는 그대로 굳어섰고 심장은 총에 맞은 것처럼 쿵 내려앉았다.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고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명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굳게 닫힌 수술실 문을 바라보았다.명우가 문 쪽으로 달려가려는 순간, 수술실 불이 꺼졌는데 이는 마치 자신의 삶에서 유일한 등불이 꺼진 것만 같았다.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침대를 밀고 나왔다.“진희유 씨 보호자분 누구시죠? 수술 끝났습니다.”우한은 눈물을 훔치며 달려갔고 희유의 손을 붙잡고 울먹였다.“희유야...명우 씨 왔어. 왔는데...왜 조금만 더 기다리지...”희유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창백했고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희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명우가 다가가 희유의 얼굴에 손을 올리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두 사람이 막 나가려는 순간, 희유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주강연이었다.주강연은 이틀간 출장을 다녀왔고 어젯밤에 막 돌아왔다.전화기 너머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희유야, 오늘 엄마 집에 있어. 언제 들어와?]평소보다 더 다정한 음성이었고 며칠 떨어져 있었더니 딸이 유난히 보고 싶어졌다.희유는 눈을 내리깔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조금 늦게 들어갈 것 같아요. 아빠랑 먼저 저녁 드세요. 기다리지 마세요.”[명우랑 데이트해?]주강연이 부드럽게 물었다.“아니요. 우한이랑 잠깐 나가요.”희유가 답하자 주강연은 당부했다.[오늘 바람 많이 불어. 나갈 거면 따뜻하게 입고 나가.]말을 마친 뒤, 혼잣말처럼 덧붙였다.[이상하게 어젯밤에 네가 태어났을 때 꿈꿨어. 그때 너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 먹고 안 울고 자서 엄마 아빠가 얼마나 놀랐는지.][무슨 일 있는 줄 알고. 할머니가 의사 선생님 모셔 왔었어. 의사가 와서 네 작은 발을 톡 건드리니까 그제야 와 하고 울었고.]희유의 목이 갑자기 막혔고 티 나지 않게 숨을 한 번 들이켰다.“20년도 넘은 일을 아직도 기억해요?”[그러게. 다 잊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꿈에 나오더라.]주강연의 목소리에 새삼스러운 감회가 묻어났다.[꿈이 너무 생생해서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았어.]희유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조용히 말했다.“집에 가서 이야기해요. 저 지금 나가야 해요.”[밖에 추우니까 두꺼운 옷 하나 더 챙겨.]주강연이 다시 한번 걱정스레 말했다.“알았어요.”희유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끊을게요.”[희유야...]주강연이 갑자기 부르더니 잠시의 침묵 끝에 덧붙였다.[아무 일 없지? 일찍 들어와.]“네.”희유는 전화를 끊고는 그 자리에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이에 우한이 돌아보며 말했다.“오늘 검사 결과 나오면, 부모님한테 말하자. 분명히 엄청나게 좋아하실 거야.”희유와 명우의 일은 양가 모두 인정한 사이였기에, 임신은 오히려 더 큰 기쁨이 될 일이었다.
우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명우 씨 돌아왔어?”“아니.”희유는 아주 가볍게 대답했다.우한은 일부러 밝은 척하며 말했다.“이제 곧 아빠 될 사람인데, 이렇게나 안 궁금해한다고? 명우 씨 돌아와도 우리 먼저 말하지 말자. 스스로 눈치채게 해.”희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천천히 면을 먹었다.우한은 점점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고는 말없이 곁에 앉아 있었다.희유는 한 그릇을 다 비웠다.이번에는 바로 토할 것 같지는 않고 오히려 잠이 밀려왔다.“이제 쉬어. 무슨 일 있으면 불러.”부드럽게 말하는 우한에 희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 우한아.”“친구한테 무슨 고맙다는 말을 다 하냐.”우한은 침대 옆 스탠드만 남겨 두고 불을 끄며, 희유의 짧은 머리를 한 번 정리해 주었다.“자, 자.”희유는 눈을 감았다.어둠 속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는데 눈꼬리를 타고 굵은 방울로 떨어졌다.베개는 금세 축축하게 젖어 갔다.눈물이 다 마른 뒤에야, 희유는 잠이 들었다.며칠 사이 가장 길게 잔 잠이었지만 깊지 않았다.계속 꿈꾸었는데 꿈은 흐릿했고 어딘가 뒤엉켜 있었다.고베사막으로 돌아간 듯했다.다만 이번에는 끝없이 펼쳐진 사막 한가운데 혼자였다.주변은 텅 비어 있었고 적막했다.아무 소리도 없었고 그 고요함이 오히려 두려웠다.하늘을 올려다보니 하늘 역시 흐릿한것이 마치 세상이 막 태어난 듯했다.그 속에 홀로 서 있었고 아무것도 없이 생각조차 공허했다.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아 있었고 희유는 멍한 눈으로 창밖의 새벽빛을 바라보았다.희미하던 빛이 점점 밝아졌고 이제는 일어나야 했다.그리고 결정도 내려야 했다.우한이 일어났을 때, 희유는 이미 부엌에서 음식을 하고 있었다.이에 우한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언제 일어났어?”“한참 전에. 네가 사 온 면이 남아 있어서 아침으로 끓였어.”희유가 말했다.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얼굴은 여전히 수척했지만, 어젯밤처럼 무너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