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전, 김문혁의 아내가 그가 애인을 숨겨둔 사실을 들켜, 여자를 찾아가 얼굴을 긁어버린 일이 한동안 시끄럽게 퍼졌었다.방연하는 이 일을 이용해 김문혁을 견제하려 했지만, 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우리 마누라가 감히 연하 씨 얼굴을 긁기라도 하면, 바로 쫓아낼게. 오빠가 든든히 지켜줄 건데, 뭐가 무서워?”‘이게 사람이 할 말인가?’짐승보다도 못한 놈이었고, 짐승도 이 사람보단 염치가 있을 거다.연하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웃음을 띠며 말했다.“사장님은 든든하시겠지만, 저는 감히 사모님을 도발할 용기가 없어요. 이렇게 하죠. 진심을 담아 석 잔 마실게요. 그 정도면 괜찮으시죠?”김문혁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입가엔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내 소원은 러브샷 한잔하는 거예요. 연하 씨가 내 소원 들어주면, 나도 연하 씨 소원 들어줄게요.”장연구는 초조하게 상황을 정리하려다 연하에게 말했다.“연하 씨, 그렇게 까탈 부리지 마요. 김문혁 사장님이 연하 씨를 여동생처럼 아끼시는 거 몰라요?”“술 한잔한다고 뭐가 어때서요? 마시기만 하면, 바로 서명하신다잖아요.”연하는 속으로 장연구를 향해 이를 갈았다. 이익에 눈이 멀어 사람 인격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상황임을 직감한 방연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들고 말했다.“그러면 사장님, 말한 대로 해주셔야 해요.”김문혁은 흥분한 얼굴로 몸을 기울였고, 한 팔을 연하의 뒤통수 너머로 뻗으며 억지로 그녀를 끌어안으려 했다.진구는 옆 사람과 대화 중이었다가, 그 장면을 보고 고개를 돌려 연하와 김문혁이 러브샷을 하려는 걸 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명확한 혐오가 스쳤다.‘다른 사람들을 훈계할 땐 그토록 당당하더니, 자기 일이 되니 결국 돈 때문에 뭐든 하는구나.’연하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살짝 돌리며 김문혁에게서 멀어지려 했지만, 아무리 피해도 상대가 악의를 품으면 피해 갈 수 없었다.술을 마시는 순간, 김문혁은 고개를 기울이며 연하
호텔 직원이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이 도착했을 때 김문혁의 상처를 확인하고 증거를 채집한 뒤 병원으로 이송시켰다.“누가 때린 거죠?”경찰이 묻자, 연하는 한 발 앞으로 나섰다.“제가 때렸어요. 그 사람이 저한테 성추행하려고 해서, 저항하다가 술병으로 머리를 쳤어요.”연하는 말을 마치고, 목에 난 멍 자국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여진구가 연하의 팔을 끌어당겨 자신의 등 뒤에 감싸 안으며, 또렷한 얼굴에 냉철한 기색을 띠고 말했다.“제가 때렸어요.”연하는 진구를 말리려 했지만, 진구는 그녀의 팔을 단단히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다.경찰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들것에 실려 나가는 김문혁도 흘끗 본 뒤, 상황을 대략 파악하고는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일단 경찰서로 같이 가시죠. 진술이 필요해서요.”거의 자정 무렵, 진구와 연하는 함께 경찰서를 나섰다. 김문혁이 연하를 성추행하려다 폭력을 가한 사실과, 진구의 행동이 정당방위였다는 점, 룸 안의 CCTV와 다른 사람들의 진술까지 확인된 덕분에 두 사람 모두 별다른 처벌은 받지 않았다.서늘한 밤바람이 부는 거리에서 연하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진구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정말 고마워요.”진구는 재킷을 어깨에 걸친 채 가볍게 웃었다.“다음에 만나면 모르는 척 말고 오빠라고 한 번 불러. 그걸로 충분해.”연하는 코웃음 쳤다.“분명히 선배가 먼저 삐진 거잖아요.”진구는 비웃었다.“너, 정말 남자 앞에서 의리도 잊는 스타일 아니야?”연하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내가 만약 남자에 눈이 멀었으면, 선배랑 임유진을 맺어주고 나는 구은정을 쫓아다녔겠죠. 내가 이런 짓까지 한 건 다 유진이를 위한 거예요.”“선배도 유진이를 위한다면, 유진의 기억을 되찾게 도와주고, 구은정이랑 다시 이어주는 게 맞지 않아?”진구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넌 구은정이 예전에 유진이한테 뭘 했는지 몰라서 그래! 자기 손으로 밀어내 놓고, 지금 와서 되돌리라고? 말도 안 돼
앞으로 어떤 더 큰 프로젝트가 나타나든, 더 큰 유혹이 있든, 과연 계약을 따내기 위해 몸까지 내줄 수 있겠는가?그래서, 애초부터 한 발짝도 물러서선 안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기준선은 반드시 지켜야 했다.진구는 연하의 맥주 캔과 자신의 것을 부딪치며 말했다.“그래야지, 그게 맞는 거야.”연하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며 물었다.“담배 피워도 돼요?”이에 진구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담배 피우는구나?”연하는 고개를 끄덕였다.“피곤할 때 한 대 피우는 게 습관이에요.”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인 연하는, 연기를 내뿜으며 당당하고도 시원한 기운을 풍겼다.“하루 종일 일 마치고, 이렇게 늦은 밤에 바람 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이 시간이 제일 편안해요.”진구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담배 너무 자주 피우지 마. 특히 여자한텐 더 안 좋아.”“그래요.”연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런 말은 수도 없이 들어온 터라, 더는 마음에 닿지도 않았고, 굳이 반박할 필요도 없었다.맥주를 다 마신 연하는 다시 일어나 술을 가져왔다. 두 사람은 이야기꽃이 피었고, 바닥엔 텅 빈 캔들이 하나둘 늘어갔다.시간은 어느덧 새벽을 넘었고, 방연하는 머리를 짚으며 일어났다.“이제 정말 못 버티겠어요. 선배가 날 구해준 건 고맙지만, 내 목숨까지 줄 수는 없어요. 난 이만 자러 갈 테니까. 나갈 땐 문 좀 잘 닫고 가요. 고마워요.”연하는 휘청이며 안방으로 향했고, 진구는 맥주 캔의 마지막 한 모금을 넘기며 말했다.“잘 자.”“잘 자요.”연하는 흐릿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안방 문을 닫아버렸다.다음 날 아침.연하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숙취로 머리가 아파 지끈지끈했고, 눈도 제대로 안 뜨인 채 아무 옷이나 걸쳐 입고 거실로 나왔다.“누구야?”‘아침부터 문을 두드리다니.’거실에 들어서는 순간, 연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거의 주저앉을 뻔한 그녀는 거실 소파 위에 누워 있는 진구를 보고 소리쳤다.“선배
연하는 재빨리 따라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효성의 팔을 붙잡았다.“효성아, 너 오해한 거야!”하지만 효성은 연하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다 보여. 너 전에 나한테 선배 가까이하지 말라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거지? 난 그게 임유진을 위한 줄 알았는데, 결국 너 자신이 가로채려고 그런 거였네!”“연하야, 난 예전부터 네가 마음에 안들었어. 자존심도 없고, 자기 몸도 함부로 굴리고, 남자만 보면 달려드는 꼴, 진짜 더러워!”“근데 설마 유진이 좋아하던 남자까지 너랑 자게 만들 줄은 몰랐네. 정말 역겹다!”효성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차가운 눈빛으로 연하를 마지막으로 쏘아보며 말했다.“앞으로 난 너 같은 친구 없어.”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마지막 틈새에서, 효성의 혐오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연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손끝까지 시린 듯, 온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여진구가 다가와 인상을 깊이 찌푸렸다.“내가 효성이한테 전화해서 설명할게.”연하는 핏기 없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필요 없으니까 이제 가요. 나도 출근해야 해요.”“이 상태로 무슨 출근이야?”진구는 걱정스럽게 말하자, 연하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나를 너무 얕보지 마요. 하늘이 무너져도 난 일하러 가야 해요. 누가 뭐래도, 돈 버는 건 멈출 수 없으니까요.”진구는 연하 집 안으로 들어가 자기 재킷을 집었다.“혹시라도 얘기하고 싶으면 언제든 전화해. 그리고 정말 미안해.”“말했잖아요, 선배 잘못 아니에요. 아마 우리 사이엔 이미 오래전부터 금이 가 있었을 거예요.”연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효성이 성격 알잖아요. 입은 독하지만 마음은 여려요. 며칠만 지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올 거예요. 우리 예전에도 자주 싸웠거든요.”진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그럼 난 간다.”“잘 가요.”연하는 문 앞까지 배웅한 뒤, 힘없이 거실로
“아, 맞다!”사장이 말을 이었다.“장연구 사장은 본사에서 분사로 인사 이동됐어요. 앞으로 이 프로젝트는 전적으로 연하 씨가 맡게 될 거예요.”방연하는 놀란 눈을 들었다. 직감적으로, 장연구의 인사이동이 어젯밤 일과 관련 있다는 걸 느꼈다. 뜻밖에도, 큰 사건을 겪고 나서 두 가지 골칫거리가 한 번에 해결된 셈이었다.물론 연하는 잘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건 다 여진구 덕분이라는 것. 연하는 진심을 담아 사장의 신뢰와 배려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진구는 일정이 있어 몇 마디만 나누고 사무실을 나섰다. 오피스로 돌아온 연하는 바로 진구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렇게까지 도와줘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그러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뭘 고마워해. 오늘 아침에 내가 그렇게 큰 오해를 남긴 걸 생각하면, 그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해.]연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정작 어젯밤 그녀를 도운 건 여진구였고, 아침의 오해도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건 굳이 말로 다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마음만 통하면 충분했다.“이 은혜는 꼭 기억할게요. 단, 임유진 문제 빼고 말이예요. 그거 말고는 선배가 부탁하는 거라면 뭐든 다 해줄게요!”[너, 그때는 돈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냐? 이젠 돈으로도 널 못 사는 거야?]연하는 피식 웃었다.“아마 이게 내가 가진 마지막 양심인 듯!”진구는 연하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이제 일하러 가봐.]“잘 가요, 선배!”전화를 끊고 난 연하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침에 얼어붙었던 마음이, 이제야 조금 녹아내리는 듯했다. 어떤 사람은, 존재만으로도 사람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오후.티타임 시간, 진구는 임유진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오늘 저녁에 행사 있어. 근데 여자 파트너가 없어. 같이 가줄래?”유진은 손에 들린 일정을 살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진구는 기분 좋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금방 드레스 보낼게. 우리 호텔에서 바로 만나자.”유진은 커피잔을
호텔 파티장에 도착하자, 이미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격식을 갖춘 남녀가 황금빛으로 장식된 파티장을 배경 삼아 더욱 고귀하고 우아해 보였고, 모두 신사적이거나 단정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야기꽃이 활짝 피고, 분위기는 그야말로 화기애애했다.진구는 유진과 함께 안으로 들어서며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이번 파티는 미국에서 돌아온 화교가 주최한 자리야.”“국내 경제 상황이 괜찮다 보니까,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투자하고 사업을 하려고 명사들과 인맥을 쌓으려는 자리지.”유진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물었다.“우리 삼촌도 오셨을까?”“당연히 초청은 했을 거야. 근데 오실진 모르겠네.” 진구가 말하자, 유진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난 확신하는데, 절대 안 오셔요. 요즘은 24시간 내내 소희한테 붙어 있거든요. 근데 이런 지루한 파티에 오실 틈이 있을까요?”유진은 임구택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낯익은 인물을 발견했다. 한 남자가 몇몇 정장 차림의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깊게 파인 V넥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여자는 우아하고 요염한 미소를 띠며, 말을 꺼내기 전마다 남자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갈고리 같아, 한 번 걸리면 뼈까지 녹을 것 같았다.그때, 구은정이 고개를 돌려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검고 오만한 눈동자는 거리낌 없이 유진을 응시했다.“삼촌 저기 계시네. 가서 인사드리고 올게.” 진구는 유진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 유진은 갑작스럽게 돌아보려다, 억지로 시선을 누르며 따라갔다.진구가 말한 외삼촌은 시원이었다. 시원은 유진을 보자, 부드럽고 단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유진아.”“삼촌, 안녕하세요.”유진은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시원은 흰 셔츠에 진회색 베스트를 입고 있었고, 미소 띤 입꼬리는 늘 잔잔한 여운을 남겨 사람을 편안하게 했다.“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진구도 반가운 얼굴로 말하자, 시원은 부드럽게 웃었다.“오랜 친구가 온다길래 잠깐 들른 거야. 금방
“백림 씨!”가슴이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다가와 조백림의 팔짱을 끼며 유진을 경계하듯 바라보았다. 그녀는 달콤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아는 사람이라도 만난 거예요?”유진은 한눈에 알아봤다. 이 여자가 오늘 백림이 데려온 파트너라는 걸. 그게 유정이 아니라는 사실에 잠깐 놀랐지만, 유진은 조용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대신했다.여자는 백림에게 더 바짝 붙으며 투정을 부렸다.“예쁜 여자만 보면 정신이 팔려선, 아예 날 잊어버리는 거 아니에요?”백림은 아래로 시선을 내리깔며 그녀를 흘끗 봤고, 엷은 미소만 띤 채 말했다.“소개할게. 여긴 임유진.”“임유진?”여자는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듯, 느슨한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전 유류나라고 해요.”유진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죄송해요. 아까 스시 먹다 손에 간장이 묻었어요.”류나는 뻘쭘하게 손을 거뒀다. 체면이 깎였다고 느낀 듯, 말투에 가시가 섞였다.“이런 파티에서 나오는 스시가 맛있긴 한가요? 그냥 보기 좋으라고 놓은 줄 알았는데, 진짜 먹는 사람도 있네요?”유진은 가볍게 웃었다.“다들 그렇게 생각해 주면 참 좋겠네요. 그럼 맛있는 건 다 제 몫이 될 테니까요.”그러고는 조백림을 바라보며 말했다.“아까 시원 삼촌한테 이번 주말에 요요랑 청아 언니 데리고 집에 놀러 오라고 했어요. 삼촌도 유정 언니랑 같이 오세요.”백림은 미소를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유정이한테도 전해줄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호텔 주방에 따로 주문 넣을게.”“감사해요, 삼촌.”백림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뒤, 류나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유진과 멀어지자, 류나는 고개를 돌려 유진을 바라보며 비꼬듯 말했다.“가끔 어린 여자애들이 순진한 척하면서 남자만 보면 삼촌 하고 부르던데, 참 저질스러운 소설 보는 것 같네요.”백림은 입가에 엷은 웃음을 머금고 그녀를 바라봤다.“방금 그 여자, 누군지 알아?”“누군데요?” 류나는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임유진.
이런 자리에서 유진은 은정과 말싸움을 하거나 몸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그랬기에 그저 얌전히 그의 손에 이끌려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은정은 유진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는데,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택했다. 계단은 넓었지만 유난히 조용했고, 뒤를 돌아보면 화려하게 빛나는 조명 아래, 파티장의 사람들과 완전히 분리된 공간처럼 느껴졌다.유진은 한 계단 아래에서 은정의 뒤를 따라가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당신 여자 파트너는요? 이렇게 두고 와도 돼요?”은정은 걸음을 멈추고 유진이 따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의 손목을 잡은 손을 아래로 미끄러뜨려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유진의 표정을 살폈다.질투라든가, 그런 감정을 찾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요 며칠간 두 사람 사이엔 계속 냉랭한 기류가 흘렀고, 유진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은정은 설명했다.“그 사람, 내 비서야.”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처음엔 회사에서 임시로 준비한 파트너인 줄 알았는데, 비서라면 매일 함께 있는 사이라는 뜻이었다.“그게 뭐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유진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의 무심하고 차가운 표정에, 은정은 가슴에 바늘이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꼈지만,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잡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위층은 휴게 공간과 탈의실로 구성돼 있었다. 두 사람은 조용한 방 하나를 골라 마주 앉았다.은정은 유진에게 차를 따라주며 물었다.“저녁은 먹었어?”“조금 전에 스시 먹었어요.” 유진이 대답했고, 은정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나중에 집에 가서 야식 만들어줄게.”“괜찮아요. 이미 배불러요.”유진은 정중하게 거절했다.“스시 먹고 배불러?”은정은 가볍게 웃었다.“평소엔 밥 한 공기 뚝딱 비우고도 애옹이 간식까지 같이 먹었잖아.”그의 말에 유진은 예전에 은정의 집에서 함께 밥을 먹고, 애옹이를 데리고 장난치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그러자 가슴 한쪽이 시리게 허전해졌다. 은정은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