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의현은 훌쩍이며 말했다.“새로 산 집 대출도 아직 다 못 갚았단 말이야.”[집이 더 중요해, 내가 더 중요해?] 유정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들렸다.“당연히 네가 더 중요하지.”[그럼 이쪽으로 오지 마. 내가 시간 내서 갈게.]“알았어. 대신 밤에 와. 다른 사람 놀라면 안 되잖아.”[약속했어.]통화가 끝나자 의현은 다시 침대에 누워 눈물을 훔쳤고, 마음은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의현은 서선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방금 유정한테 전화 왔어. 나보고 내려오라는데 거절했어. 너무 미안해. 나 꿈꾸는 거 아니지?] [왜 거절했어?] 선혁이 바로 답장을 보냈다.[대출이 아직 남아 있어. 내가 죽으면 부모님이 대신 갚아야 하잖아.]의현은 마지막에 적었다 지운 문장을 떠올리며 얼굴이 뜨거워졌다.[그 걱정 이해돼. 그럼 유정에게 직접 전화해서 설명해.][통화가 될까?][해 봐.]이번엔 의현이 다시 유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유정아, 나 사실 설명할 게 있어.”[설명은 됐어. 네 일 다 정리하고 오면 돼. 여기서 기다릴게.]“꼭 기다려줘.”[응.]전화를 끊은 뒤에도 의현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방문이 열리며 의현의 어머니가 들어왔다.“누구랑 통화하길래 그렇게 울어. 실연이라도 당했어?”“유정이요. 유정이랑 전화했어요.”“유정이 죽었다고 하지 않았니?”“다시 살아났어요.”어머니의 얼굴에 걱정이 떠올랐다.“울다 보니 정신이 온전치 않은거야?”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의현은 휴대폰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꼬마 요정?”[여기 있지.] 유정의 웃음 섞인 대답이 들리자, 의현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안 죽은 거야?”[장난 아니야. 누군가의 계략이었어. 모두 속았지.]“정말 다행이야. 도대체 무슨 일인지 자세히 말해 줘.”[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워.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하자.]“나 지금 바로 강성으로 갈게. 기다려.”
유정은 웃음기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이거, 한 그릇 다 마셔야 해!”불과 며칠 사이, 주백림은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정선숙 아주머니는 주윤숙에게 조용히 속삭였다.“이 둘, 사이가 더 깊어진 것 같아요. 설 지나고 진짜 결혼식 올리게 될 것 같아요.”주윤숙도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미리 준비해 둬야겠어요.”잠시 뒤, 양가 어르신들도 모두 병실로 모였다. 서은혜는 문을 열고 들어오며 통화 중이었다.“유정이 정말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수화기 너머로 서정후의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괜찮다면서 왜 계속 네가 전화를 받아? 도대체 무슨 일이야? 솔직히 말해!]며칠 전 유정이 강성에서 안부 전화를 한 이후, 서정후는 두 번이나 전화했지만 그때마다 서은혜가 대신 받았다.유정이 바쁘다거나 휴대폰을 집에 두고 나갔다는 변명뿐이었다. 서정후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고, 결국 참지 못하고 따져 물은 것이다.이에 서은혜는 당황하며 말했다.“알았어요, 알았어. 지금 바꿔줄게요!”그러고는 황급히 유정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눈짓으로 잘 말해라는 신호도 잊지 않았다.유정은 마음속에 복받친 감정을 꾹 눌러 담고, 최대한 침착하게 전화를 받았다.“할아버지.”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가, 서정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휴대폰 좀 잘 챙겨 다녀라. 맨날 잃어버리고, 깜빡하고, 사람 걱정시키지 말고!]유정은 입술을 꽉 깨물고는 얌전히 대답했다.“앞으로는 절대 안 그럴게요.”서정후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너, 조백림이랑 데이트 중이었지?]이에 유정은 소리 없이 웃으며 말했다.“역시 할아버지는 다 아시네요.]서정후는 호탕하게 웃었다.[괜찮으면 됐어. 요 며칠 괜히 불안해서 잠도 안 오더라. 조백림한테 말 좀 해줘. 바둑 연습 잘하라고. 나중에 또 한 판 두자고.]“네, 꼭 전할게요.”전화를 끊은 유정은 손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살짝 훔쳤다.자신의 휴대폰에는 이미 쏟아지는 메시지 알림이 가득했다.
병상은 넉넉했다. 두 사람이 누워도 전혀 좁지 않았다.유정은 조백림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당부한 뒤, 조심스럽게 몸을 올려 백림의 옆에 살포시 안겼다.방 안은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로 가득했지만, 가까이서 느껴지는 백림의 은은한 백단향은 유정을 안정시켰다.유정은 죽다 살아난 안도감 속에 백림의 허리를 조심스레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조백림, 지하실에 있을 때, 정말 다시는 널 못 볼까 봐 무서웠어.”작별 인사 한마디 없이, 그렇게 영영 이별이라니, 그건 너무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었다.유정은 살아남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봤다. 일부러 식사를 거부하고, 간호사를 매수하려 하고, 장명춘 사이를 이간질하려 했다. 하지만 유신희와 장명춘은 더 철저했다.유정의 손발을 묶고 24시간 CCTV로 감시했으며, 정기적으로 진정제를 투약했다.마지막 날, 수술대에 실려 갈 떄, 유정은 모든 희망을 놓아버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 백림이 왔다.“부모님들은 뵀어?” 백림이 묻자, 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부모님도 봤어. 너 수술받을 때, 할아버지랑 할머니까지 모두 오셨었어.”유정은 아버지의 하얗게 변한 머리가 아직도 눈에 아른거렸다.신희의 그 한 가지 음모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끌어들였던가?“구택 씨랑 소희, 그리고 연희도 네 수술 끝날 때까지 함께 기다렸어.”그 말을 하면서 다시 눈가에 물기가 돌았다.진짜 위기에 처해보니, 자신을 얼마나 많은 이들이 걱정하고 있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유정은 백림을 바라보며 말했다.“하나만 약속하자. 다음에 우리 또 위험한 상황에 처하면, 제발 네 목숨부터 지켜. 무작정 날 구하려고 하지 말고, 너부터 살아야 해, 알겠지?”백림의 깊은 눈동자가 유정을 꿰뚫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안 돼.”유정은 그 말에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그저 눈을 감으며 말했다.“자자. 내일 아침엔 부모님도 다시 오실 거고, 아마 더 많은 사람이 찾아올지도 몰라. 지금은 푹 자둬야 해.”백림은 피를 많이 흘려 아직도 몹
모두가 그 소식에 기뻐했다.조백림이 깨어난 건 깊은 밤이 지나 새벽 무렵이었다.백림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이자, 곁에서 졸고 있던 유정이 곧바로 눈을 떴다. 여자는 그의 손을 꽉 잡고 조심스럽게 불렀다.“조백림.”백림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까만 눈동자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유정을 바라보았다.그 시선에 놀란 유정은 다급히 말했다.“조백림, 나야. 깨어난 거 맞지? 제발, 나 놀라게 하지 마.”백림은 메마른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나, 꿈을 꾼 거야?”유정은 백림의 손을 자기 뺨에 가져다 댔고,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유정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아니야. 꿈 아니야.”백림은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유정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 피부의 온기와 탄력을 느낀 순간, 눈가에서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목소리는 떨리고, 억울함이 가득했다.“정말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유정의 눈물도 조용히 흘러내려 백림의 손등을 타고 흘렀다.“그날, 난 그냥 가벼운 뇌진탕이었고, 외상으로 피가 좀 난 정도였어.”“그런데 수술실에 들어갔을 때 장명춘이 날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특수 약물을 썼어.”“그리고 내 피도 일부러 뽑았대. 내 얼굴이 창백하게 보여야 진짜 죽은 사람처럼 보이니까.”백림은 눈썹을 찌푸렸는데, 아마 병원 장비까지 손을 써뒀던 게 분명했다.그날의 응급조치는 사실 시간 벌기였고, 이후 상황을 조작해 모두를 속였던 것이다.유정은 계속해서 조용히 이야기했다.“그다음엔 사립병원 지하로 옮겨졌고, 거기서 그 사람들한테 감금당했어. 그러다 유신희가 날 찾아왔고, 모든 걸 알게 됐지.”“신희가 말했어. 전에 내가 사고 났을 때부터 이미 계획을 짜고 있었고, 기회만 보다가, 최근 수배범이 사람을 죽였다는 뉴스가 나오자 바로 실행에 옮긴 거래.”“그 수배자는 충동적으로 사람을 죽였고, 이후에 후회도 했대.”“그런데 신희는 사설탐정을 써서 그 수배자의 애인을 통해 남자를 찾았고, 거래를 제안했대. 죽기 전에
정말, 딱 한 끗발이었다. 단 한 걸음, 조금만 더 있었으면 되는 일이었다.그녀가 그토록 공들여 세운 계획이었다.살인 전과자가 된 수배자를 매수하고, 장명춘까지 매수했다. 모든 사람을 철저히 속였고, 이제 곧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참이었다.그런데 왜, 갑자기 이 모든 것이 무너진 걸까? 이렇게 완벽했던 계획이, 어째서 실패했단 말인가?신희는 광기에 휩싸인 채, 핏발 선 눈으로 그 모든 상황을 바라보다가, 심장이 찢어질 듯한 고통에 정신이 아찔해졌고, 결국 눈앞이 캄캄해지며 쓰러지고 말았다.한편, 조백림은 유정 곁에 쓰러져 있었다. 백림은 손을 들어 유정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만족스러운 듯 웃고는, 유정의 당황한 눈빛을 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곧바로 백림은 대학병원으로 이송되어 수술을 받게 되었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병원으로 달려왔다.유정을 본 서은혜는 그야말로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이미 눈이 퉁퉁 부어 있었지만, 유정을 끌어안고 또다시 오열했다.유정은 이제야 몸을 조금 움직일 수 있을 만큼 회복된 상태였기에, 침대에 누운 채로 손을 뻗어 서은혜를 꼭 안았다.서은혜가 온몸을 떨고 있다는 걸 느끼며, 유정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몇 날 며칠 사이에 머리가 백발로 변해버린 아버지를 보는 순간, 놀라움과 함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유탁준은 눈을 가린 손을 떼지도 못한 채 울고 있었다. 그건 슬픔의 눈물이자, 딸을 다시 만난 기쁨의 눈물이었다.“너 따라 우리도 같이 가버릴 뻔했잖니.”서은혜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유정을 끌어안았다. 마치 다시는 딸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온 힘을 다해 안고 있었다.유정은 연신 서은혜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별일 아니었어요. 다 끝났어요. 이제 안 울어도 돼요.”서은혜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울며 말했다.“다시는, 다시는 안 혼낼게!”그 말을 듣고 있던 유정은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피식 웃음이 나왔고, 콧등이 시큰거렸다.“지금
유신희가 조시안에게 한 약속은 이제 곧 실현될 참이었다. 일석이조였고,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었다.하지만 유명현은 아직 젊었다. 막상 진짜로 사람이 죽을 상황이 되자, 조금 전까지의 충동은 차츰 식고, 오히려 두려움이 밀려왔다. 명현은 그 자리에 굳은 채로 장명춘을 바라보며, 그가 조백림과 유정을 정리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백림을 죽이는 건 장명춘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병원에서 그의 위치와 권한이라면 시체 하나쯤 조용히 처리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그때, 수술실 문틈이 살짝 열렸고, 시안이 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역시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었다.장명춘이 백림을 죽이기만 하면 바로 들이닥칠 작정이었다. 그는 유정은 죽게 둘 생각은 없었고, 그저 백림만 사라지면 됐다.백림이 죽고 나면, 유신희도 오래 못 갈 것이고 결국에는 자신과 유정이 다시 함께하게 될 것이다.시안은 이 생각을 하자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그는 예전에 신희와 데이트하던 중 우연히 신희의 병력을 보게 되었다. 심장이 이미 기능 저하 상태라는 걸 알게 되었고, 의사는 가능한 한 빨리 이식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었다.그런데 신희는 대형 종합병원에서 치료받지 않고, 자꾸 이 사립 병원만 들락날락했고, 주치의는 장명춘으로 바뀌어 있었다.유정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시안도 충격에 빠졌었다.그날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사람이 떠나 있었고, 유정의 시신은 안치실로 옮겨진 상태였다.하지만 시안은 그 순간,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유정을 응급처치했던 의사 역시 장명춘이었던 것이다.장명춘이 두 병원에서 동시에 일하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장명춘은 신희의 주치의였고, 또 유정을 직접 살리려 했으며, 유정이 사고를 당한 장소 또한 장명춘이 일하는 병원 근처였다.이 모든 우연이 겹치자, 시안은 더 이상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고 확신하게 되었다.그렇게 시안은 유신희를 몰래 미행하기 시작했고,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