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장시원은 일관적인 다정함을 드러내고 있으면서 또 약간의 소외감도 있는 것 같아 그가 여인에 대한 감정을 알 수 없었다.하지만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장시원의 바람둥이 기질로 보면 저 여인이 전 여자친구가 아니면 지금 꼬시고 있는 여인인 게 분명했다.요요의 말랑말랑한 작은 손을 잡고 있는 소희는 갑자기 흥이 깨졌다.그래서 장시원이 옆의 여인과 이야기를 끝내면 가서 그와 인사를 하고 떠나려 했지만, 잠시 후 장시원이 다가와 바로 요요를 안아갔다. 그러고는 웃으며 말했다."화원에 음악이 나오는 분수와 불꽃쇼가 있거든요. 내가 요요를 데리고 가서 좀 놀다 올 거니까 소희 씨 먼저 뭐 좀 먹고 있어요."그러자 소희가 바로 말했다."저와 요요는 이만 가볼게요. 게다가 이렇게 파트너를 두고 자리를 뜨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요."장시원이 소희의 눈빛을 따라 쳐다보았다. 순간 그의 눈에 귀찮음이 스쳐지났다."내 파트너 아닙니다."우민율이 거의 2년 동안 그를 쫓아다녔지만 하필이면 그는 그녀에게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소희는 의외인 듯 눈썹을 올렸다."아무튼 그렇게 서둘러 가지마요. 백림이 특별히 나에게 소희 씨를 잘 돌보라고 당부했거든요.""그럴 필요 없는데."장시원이 웃으며 말했다."난 그럼 먼저 요요를 데리고 놀러 갔다 올게요.""네."소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장시원이 요요를 안고 떠난 후, 소희는 의자를 찾아 앉았다. 주위의 사람들도 점차 조용해졌다. 조백림과 그의 약혼녀는 모두의 주목하에서 반지를 교환하고 있었다.여인의 뒤에 있는 탁자 위에는 각종 금기, 비취, 옥 조각품들이 놓여 있었다......여인도 명문가 출신으로 신분이 고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사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조백림과 약혼할 수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조건이 서로 맞는 가문의 아가씨여야만 했다.그들 같은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결국 가문간의 통혼을 피할 수 없었으니까.물론 결혼하게 될 사람이 마침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하느님
그런데 이때, 소희의 핸드폰이 울렸다. 소희가 수신번호를 한 번 보더니 일어나 옆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진작에 화면에 뜬 이름을 본 임구택의 눈빛은 순간 어두워졌고 입술도 덩달아 일직선으로 오므려졌다.소희가 걸으면서 말했다."우리 지금 천위 호텔에 있어."핸드폰 맞은편의 심명이 듣더니 바로 물었다.[거기서 뭐하는데?]"오늘 조 도련님이 약혼하는 날이야. 시원 씨가 나와 요요를 데리고 왔거든."심명이 불쾌해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왜 미리 나에게 말하지 않았어? 걱정했잖아.]이에 소희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웃으며 말했다."뭐가 걱정된다고 그래? 조금만 더 있다가 돌아갈 거야."[그래도 안 돼. 집에 오자마자 널 못 보면 걱정되고 불안하단 말이야.]심명이 콧방귀를 뀌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아니다, 그냥 지금 데리러 갈게.]"응."전화를 끊고 뒤를 돌아보니 나란히 있는 두 좌석이 모두 비어 있었다. 임구택은 언제 떠났는지 보이지 않았다.소희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앞에 있는 두 사람이 인사를 끝내기를 기다렸다. 그러고는 손님들과 함께 박수를 치고나서 일어나 요요 찾으러 화원으로 갔다.화원에는 젊은이들이 모여서 불꽃놀이를 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분수 옆, 장시원은 어디서 거품을 뿜는 장난감을 구했는지 현란한 불빛에 거품을 뿜고 있었고 요요는 깔깔거리며 거품들을 쫓아다니고 있었다.함께 놀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소희는 차마 앞으로 나가 방해하지 못했다."소희 씨!"그런데 이때, 뒤에서 누군가의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장명원과 간미연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지난 2년 동안 세 사람은 줄곧 연락을 하고 있었기에 소희가 강성으로 돌아온 것에 대해 두 사람은 딱히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장명원이 흥분하고 격동된 표정을 얼굴에 드러내고 있었지만 원망하는 말투로 말했다."돌아오자마자 우리를 가장 먼저 찾지는 않고, 조 도련님이 약혼한다니까 바로 달려오고. 보아하니 소희 씨의 마음속에서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제일 적
장명원의 말에 간미연은 순간 고개를 돌려 눈을 가렸고, 소희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렇게 몇 사람이서 요요를 에워싸고 한창 놀고 있는데 심명이 이미 천위 호텔에 도착했다고 전화가 걸려왔다.장시원이 시간을 한 번 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나도 마침 가야 하는데. 내가 가서 백림에게 인사만 하고 올테니, 같이 가요.""네."소희가 요요를 안고 장시원을 기다렸다.조백림은 소희가 떠난다는 걸 듣고 약혼녀와 함께 그녀를 배웅하러 나왔다.호텔 문밖으로 나오니 심명이 자신의 차에 기대어 전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소희를 보더니 바로 전화를 끊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심 아빠!"요요가 심명을 보자마자 작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안기려 했다.심명은 즉시 요요를 품에 안고 아이의 작은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 그리고 소희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집에 가자.""응."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서 뒤에 있는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요요가 ‘심 아빠’라고 부르는 소리에 장시원은 마음속에 순간 이상한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은 그 느낌보다 임구택의 반응이 더욱 궁금했다.전에 심명이 소희를 한 번만 힐끗해도 임구택이 참을 수 없었는데, 지금은 소희가 심명의 여인으로 되었으니.심명이 한 손으로 요요를 안고 한 손으로 소희를 잡고 떠나는 모습을 보며 다들 마음이 복잡해 나는 느낌이 들어 임구택의 반응을 몰래 살폈다.임구택은 멀지 않은 천위 호텔 문앞 큰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서 있었다.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져 얼굴의 표정은 똑똑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 주위의 분위기는 초여름인데도 겨울에 처해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심명은 고의로 임구택 쪽을 한 번 쳐다보고는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차문앞에 서서 직접 차문을 열어 소희가 차에 타기를 기다렸다. 동작은 너무나도 다정하고 자상했다.소희가 차에 오른 후 심명은 요요를 그녀에게 맡기고 운전석에 올랐다.세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훈훈하여 마치 한 가족 같
"전혀."소희가 고개를 저었다."요요가 청아의 아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어. 설령 안다 하더라도 자신의 아이일 줄은 생각지도 못할 거야."그래서 그녀는 안심하고 장시원에게 요요를 맡겼던 것이다. 설령 옆에서 무심코 요요와 그가 닮았다고 농담하더라도 장시원은 절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니까.심명이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재밋네."소희가 듣더니 농담하듯 말했다."내가 너라면 나도 밖에 사생아가 있지 않을까하고 먼저 생각할 것 같은데."심명의 웃음이 갑자기 굳어지더니 바로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절대 그럴 리가 없어!""그렇게 자신이 없어?"소희가 계속 놀리듯 물었다.심명이 눈부시도록 이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무튼 절대 그럴 리는 없으니까, 걱정마."심명의 대답에 소희는 눈썹만 한 번 올리고는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오늘 청아가 병원에서 지내야 하는 날이라 소희가 요요와 함께 자야 했다. 처음엔 요요가 적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집으로 가는 도중에 깊이 잠들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차에서 내릴 때 심명이 담요로 요요를 감싸고 위층으로 올라가 침대에 눕혔다. 다행히도 요요가 한 번도 깨지 않았다.보아하니 오늘 밖에서 노느라 많이 지친 듯 했다.소희는 요요의 신발을 벗기고 잠옷으로 갈아입힌 후 수건으로 요요의 얼굴과 손발도 닦아줬지만 요요는 여전히 달콤하게 잠들어 있었다.그 모습에 소희는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방에서 나오니 심명이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가 나온 걸 보고 즉시 고개를 들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내가 남아줄까?"이에 소희가 그를 진지하게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자꾸 그런 농담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내가 잘못했어!"심명이 즉시 그녀의 말허리를 끊고 일어섰다."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하지만 넌 나와 선을 그을 수도 없고,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걸 막을 수도 없어."소희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심명, 진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어. 너에게
소희가 얼굴색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탄식했다."확실히 나의 잘못이긴 하지. 나만 아니었으면 너와 노명성은 진작에 아이를 낳았겠는데.”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성연희가 노명성과 헤어졌다고 한 건 거짓말이었다. 소희와 함께 떠나고 싶어서.소희 때문에 그들은 결혼식을 취소했고, 지금까지도 거행하지 않았다."왜 또 그 얘길 꺼내?"성연희가 시큰둥하게 소희를 흘겨보았다.그러면서 요요를 안고 다가가 소희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표정이 왠지 복잡해 보였다."소희야, 그냥 솔직히 말할게. 나와 노명성 사이에 정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소희가 바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무슨 뜻이야? 설마 또 회사 연예인이 그를 꼬시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어?""아니! 아마 너무 오래 함께 있어서 이젠 상대방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소희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상대방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말이야?""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안전감이 없이."성연희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아무래도 사람 마음이라는게 항상 변하잖아!"성연희의 말에 소희의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다.사람 마음이 변한다라......그녀보다 이 말에 더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소희가 성연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세상 사람들이 다 헤어지더라도 너희 둘은 헤어져서는 안 돼.""감정에 있어서 누가 그렇게 확신할 수 있겠어."성연희가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너희가 헤어지면 난 죄인이 될 거야.""그렇게 무슨 잘못이든 전부 다 네 자신한테 돌리려 하지마."성연희가 소희의 어깨를 감싸며 말을 이어갔다."어차피 변할 사랑이라면 결혼해도 소용이 없어. 더 번거로울 수도 있고. 그러니까 이 얘기는 그만하고, 날씨도 좋은데 우리 요요를 데리고 놀러 가자!""나 사부님 뵈러 가고 싶어."소희는 돌아온 지 며칠이 되었지만 한 번도 사부님을 보러 가지 못했다. 갔다가 욕만 먹을까 봐 두려워서. 그런데 마침 오늘 성연희도 있으니, 함께 사부님의 화에 마주하면 딱 좋을 것
옆에 있던 성연희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도 할아버지, 진장하시고요. 이 아이는 소희의 아이가 아니라 저희 친구의 아이입니다. 지금은 친구가 일이 있어 저와 소희가 며칠 동안 데리고 있는 거고요.""정말이야? 날 속이는 거 아니지?"도 어르신이 유심히 요요를 쳐다보았다.확실히 임구택을 닮지 않은 것 같았다.요요는 눈 앞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 두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속으로는 왠 할아버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냐고 의아해 하고 있을 법 했다."정말이에요."소희가 웃으며 대답했다."앞으로 다시는 거짓말 안 할게요."도 어르신이 듣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고는 요요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아가 참 이쁘구나. 이름이 뭐니?""요요라고 해요."소희가 재빨리 요요를 대신해 대답했다."너한테 물었어?"도 어르신은 순간 웃음을 굳히고 소희를 힐끗 쳐다보았다."예전의 일이 쉽게 끝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성연희가 미소를 지으며 어르신의 팔을 잡고 어르신을 의자에 앉혔다."일단 화를 가라앉히시고요. 할아버지께서 계속 소희를 혼냈다간 소희가 앞으로 다시는 오지 못할 수도 있어요. 오늘에도 저를 데리고 왔잖아요."도 어르신이 냉소하며 말했다."쟤가 감히 못할 일도 있어? 내가 보기엔 하늘도 날아올라갈 것 같은데?""하마터면 날아갈 뻔했는데, 할아버지가 걱정된다고 해서 다시 돌아온 겁니다."성연희가 소희를 위해 좋은 말을 하면서 도 어르신의 어깨를 두드렸다.도 어르신이 듣더니 마음이 시큰시큰해 나면서 분노도 덩달아 많이 사라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소희를 바라보며 걱정되어 물었다."몸의 상처는 다 나았어?”"네!"소희가 얌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눈은?”"눈도 괜찮아졌습니다!"성연희가 히죽거리며 물었다."이제 화 풀리셨죠?""이번만 봐준다."도 어르신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강성으로 돌아가도 되지만 앞으로 임씨 가문과 멀리 떨어져 있어. 너 만약 임구택과 다시 만나게 되면 난 더는 너의
"하지만 지난 2년 동안 장시원이 그래도 많이 조용해졌어. 더 이상 공개적으로 여자친구를 사귀지도 않았고. 우민율이 계속 그를 쫓아다녔지만 아직도 성공하지 못했잖아."성연희가 눈동자를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소희는 순간 조백림의 약혼식에 참석했던 그 여인이 떠올랐다. 성연희가 말한 우민율이 그 여인인 게 분명한 것 같았다.그래서 저도 모르게 비웃음부터 나왔다.장시원은 이름 난 바람둥이라 공개된 여자친구는 없다 하더라도 섹파는 절대 적지 않을 거니까.정원에서 한창 놀고 있는데 점심 밥상을 다 차렸다는 하인의 말에 그들은 다시 거실로 돌아갔다.그런데 이때, 진석이 갑자기 나타났다.소희를 본 그의 눈에는 의아한 빛이 번쩍였지만 곧 다정한 웃음으로 바뀌었다."돌아왔으면서 왜 연락도 하지 않았어요? 만약 내가 오늘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언제까지 피하려고 했는데요?"소희가 억울하다는듯 대답했다."저 돌아온 요 며칠 엄청 바빴거든요.""바빴다고요?"진석이 냉소하며 물었다."뭐하느라 바빴는데요?""아이를 보느라고요."소희가 요요를 가리켰다.진석은 소희의 대답에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바라보았다. 한 어린아이가 입을 삐죽 내밀고 큰 눈으로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진석이 순간 놀랐다."몰래 아이까지 낳은 겁니까?"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방안은 온통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점심을 먹고 있는 동안 도 어르신은 계속 진석더러 빨리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라고 재촉했다. 아이를 돌보는 게 이토록 재미있는 일이라는 걸 오늘에야 깨닫게 되었으니까.이에 진석은 오늘 괜히 왔다며 속으로 후회하고 있었다.그러다 밥을 반쯤 먹은 진석이 소희를 향해 입을 열었다."마침 아가씨가 돌아와서 하는 얘긴데요, 한 영화 제작팀에서 아가씨에게 영화 복장 디자인을 맡기고 싶다고 이미 나한테 세 번이나 전화를 걸어왔어요.”주 감독의 영화는 개봉하자마자 높은 시청률을 획득하였고 평판도 엄청 좋았다. 특히 영화 속의 치파오는 사람들의 놀라움을 자아낼 정도로 이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희가 GK 여름 신상을 입고 건물에서 나왔다. 청색과 흰색 세로 줄무늬가 진 셔츠 원피스는 심플하고도 대범한 스타일이었지만 소희의 앳된 얼굴 때문이었는지 다소 깜찍 발랄해 보였다.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그녀에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젓살이 남아 있었던 볼이 줄어들고 두 눈이 더욱 밝고 커진 것과 이목구비도 더욱 뚜렷해진 거 빼고는.소희가 차에 올라 엷게 웃으며 말했다."가요!"그런데 진석이 대답하기도 전에 소희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진석은 단번에 화면에 뜬 이름을 보았다.심명이었다.소희가 전화를 받아 참을성 있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영화 미팅에 참가하러.""돌아올 필요 없어. 선배랑 같이 갈 거니까.""그래. 볼 일 계속 봐. 급히 돌아오지 않아도 되니까."진석이 천천히 차에 시동을 걸다 소희가 전화를 끊은 걸 보고 바로 물었다."심명이랑 만나고 있는 거예요?"심명이 전에 소희의 생명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또 소희의 제일 암흑했던 시기를 함께 보내 주었다. 심지어 지난 2년 동안은 가문의 업무도 뒷전으로 하고 소희를 데리고 온 세상을 돌아다녔으니 두 사람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이 생겼고, 소희가 심명을 좋아하게 됐다고 하더라도 딱히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아니요."소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그냥 친구예요."진석이 앞을 보며 덤덤하게 웃었다."진짜 친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느 남자가 친구 곁에 그렇게 주구창창 붙어 있겠어요?"소희의 눈동자가 약간 어두워지더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기색이 드러났다.처음 심명을 알게 되었을 떄 그녀는 심명이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 같은 바람둥이가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었으니까.하지만 2년 전 밀수에서 돌아온 이후로도 여전히 심명이 자신과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그건 정말 자신을 속이는 것과 같았다.그들 두 사람은 이미 솔직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소희는 심명에게 자신이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