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구택은 줄곧 소희의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다가 차가 멀리 떠나고서야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이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가자."그러는 그의 모습에 이현의 눈동자에 순간 빛이 번쩍였다. 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임구택을 따라갔다.......이튿날, 소희가 일하고 있는데 구은서가 손에 커피 한잔을 들고 들어와서는 창가에 기대 말했다."내가 오지 않은 사이에 또 재밌는 구경을 놓친 것 같던데?"소희가 종이 위에 설계도를 그리며 담담하게 말했다."그렇게 보고 싶으면 스스로 찍던가."구은서가 소희를 보며 냉소했다."설마 너도 정말 여민 씨가 너를 해치려 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소희의 펜끝이 순간 멈추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은서가 콧방귀를 한번 뀌고는 말을 이어갔다."내가 장담하는데, 이 일은 무조건 이현이 한 짓이야. 먼저 여민 곁에 붙어있는 왕연을 매수한 후 류 조감독의 손을 빌려 너를 제작팀에서 쫓아내고 싶었던 거겠지. 그런데 네가 그렇게 똑똑할 줄은 몰랐던 거야. 게다가 구택 씨의 도움으로 일이 들통나자 아예 또 왕연더러 모든 일을 여민 씨에게 뒤집어씌우게 하고 자신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처럼 구경만 하고, 겸사 겸사 구택 씨 앞에서 좋은 사람 역할을 한 거지."구은서가 "쯧쯧"거리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어린애가 속은 참 깊네."소희가 듣더니 비웃듯이 물었다."은서 씨의 진수를 전수받은 게 아닐까?""그런 말은 넣어둬. 난 그렇게 오랫동안 계획했는데도 구택 씨를 얻지 못했으니 감히 그 여인과 비교할 수 없는 거야.""겁 먹지말고 다시 한 번 겨뤄봐.""뭐야, 지금 이간질하는 거야?""아니, 둘 중에 누가 이기든 나와 상관없거든."구은서가 듣더니 갑자기 다가와 짙은 메이크업을 한 눈으로 소희를 쳐다보았다."구택 씨가 사실 너를 해치려고 한 게 이현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소희는 조용히 구은서를 바라보았다.그러자 구은서가 눈썹을 올린 채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나도 눈치챌 수 있는 일을
조백림이 전화를 끊고 바로 임구택에게 전화를 걸었다."구택 형, 회사에 있어요?"임구택은 방금 회의를 마치고 책상에 앉아 공문을 보고 있었다."왜?""전에 구택 형을 다치게 한 일 때문에 내내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요. 저녁에 우리 같이 밥 먹어요, 내가 조용하게 구택 형에게 밥 살게요."조백림이 아주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관둬."하지만 임구택이 담담하게 거절했다."우리 사이에 그런 인사치레는 필요 없어.""인사치레가 아니에요!"조백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희 씨도 부를 거거든요. 유정이 줄곧 소희 씨에게 직접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싶다던데, 저녁에 같이 만나요."임구택이 손에 쥐고 있던 펜이 순간 멈추었다."그럼 저녁에 다시 결정하지.""그래요, 내가 저녁에 전화할게요!""응."전화를 끊은 후 임구택이 잠시 생각하고는 사무실 안의 전화를 눌러 분부했다."저녁에 나 다른 볼일이 있으니까 호명의 파티엔 네가 가."진우행이 대답했다."네, 대표님!"전화를 내려놓고 임구택은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창밖의 햇빛은 따듯했지만 그의 깊고 차가운 눈동자를 녹여주지는 못했다.그의 눈빛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 깊은 곳에는 유감스러운 정서가 비쳐져 있었지만 그 유감스러움은 점점 초조함으로 바뀌었다.......오후에 유정이 소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날 구해준 일에 대해 감사를 표하기 위해 저녁을 대접하겠다고.소희가 웃으며 완곡하게 거절했다."정말 그럴 필요 없어요. 그날 룸안의 모든 사람이 위협을 받게 되었고, 나도 나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나선 거였으니까."유정이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그러나 당시 가장 위험했던 사람이 나였잖아요. 그러니까 밥은 무조건 대접할 겁니다. 백림 씨의 뜻이기도 하고요. 밥만 먹는 건데, 친구 한 명 사귀는 셈 치고 나오면 안 될까요?"소희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결국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위치가 어디죠?""내가 주소를 보내드릴게요.""네."전화를 끊자
"늦지 않았어요. 우리도 방금 도착했는걸요!"조백림이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이때 유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백림의 곁으로 가서 앉았다.임구택은 아무 말도 없이 소희의 옆쪽 의자에 앉았다.붙어 앉은 순간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갑자기 미묘해졌다.유정이 메뉴판을 들고 주문하기 시작했다."소희 씨, 뭐 드시고 싶으세요?"조백림이 웃으며 대신 말했다."소희 씨는 단 음식을 좋아하니까 디저트 같은 것들을 많이 주문해 줘.""단 음식을 좋아하는 건 아마 우리 여자들의 공통성일 거예요. 이곳의 아이스크림이 괜찮은데, 우리 한 사람당 2인분씩 주문하는 게 어때요?"먹는 얘기가 나오니 유정의 눈이 순간 빛나고 있었다.하지만 소희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옆에 있던 임구택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1인분이면 됩니다. 소희가 요 며칠 차가운 걸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되거든요."다들 어린애도 아니라 순간 임구택의 뜻을 알아차렸다.유정은 멍하니 소희와 임구택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소희는 줄곧 소외감이 묻은 얼굴을 하고 있어 임구택과의 관계가 자신과 조백림과의 관계보다는 친밀하지 않은것 같았지만 임구택의 말을 들으면 또 왠지 이유 모를 정이 묻어있는 것 같았다.그러다 유정은 갑자기 그날 넘버 나인에서 소희가 폭탄을 들고 베란다로 달려갈 때 필사적으로 같이 달려들어 위험을 무릅쓰고 소희를 품으로 감싼 임구택의 모습이 생각났다.그런 본능적인 보호는 절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설마 임구택 씨가 소희 씨를 좋아하는 건가?’이때 소희가 유정만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2인분으로 주문해 줘요."임구택이 눈을 길게 뜨고 소희를 흘겨보았다."1인분.""2인분."임구택이 실눈을 뜨고 차갑게 물었다."꼭 그렇게 나와 맞서야 해?"이에 소희가 평온하게 대답했다."임 대표님께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저의 일을 제가 알아서 결정하는 건데, 맞선다고는 할 수 없죠."임구택이 조용하게 어두운 눈빛으로 소
조백림이 듣더니 고개를 돌려 매혹적인 눈으로 유정을 쳐다보았다. 눈빛에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자기야, 우리 이미 약혼까지 했어. 그런데 자기는 날 뽀뽀도 못하게 하고, 잠자리도 같이 들려 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이제 손도 못 잡게 하는 거야?"조백림의 잘생긴 외모에 전혀 넘어가지 않은 유정은 두 손을 뒤로 한 채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저기요, 조수정의 일이 해결되긴 했나요? 그리고 우리의 혼사가 계속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니까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마요. 난 그쪽과 그렇게 친하지 않거든요."조백림은 소녀의 눈에 비친 야유를 보며 담담하게 웃었다."누구나 다 과거가 있는 법이잖아. 듣자니, 너에게도 죽도록 사랑했던 전 남자친구가 있었다며? 다 같은 사랑에 얽매여 있는 사람으로서 누구도 누구를 비웃지는 말지?"‘전 남자친구’라는 단어가 소녀의 마음을 건드렸는지 소녀의 얼굴색이 조금씩 어두워졌다."입맛이 없네요. 먼저 돌아가겠습니다."조백림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왜, 전 남자친구 얘기에 바로 화를 내고, 아직도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야?"유정의 뒤에 선 조백림은 앞으로 다가가 유정을 자신의 품과 벽 사이에 가두고 천천히 몸을 숙였다. 매혹적인 두 눈은 여전히 우아하고 다정했다."성질을 그만 부려. 나에게도 과거가 있으니까 네가 마음속에 다른 남자를 품고 있는 걸 허락해 줄게. 우리는 누구도 누구를 멸시할 자격이 없어."유정의 눈빛 깊은 곳에는 침통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바로 시선을 떨구었다. 남자에게 자신의 연약함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저 배고파요."그러는 유정의 모습에 조백림은 왠지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고 유정을 놓아주며 웃었다."가자, 밥 먹으러."유정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조백림의 뒤를 따랐다.조백림이 앞에서 두 걸음 걷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그런데 왜 헤어진 거야?"유정의 눈동자는 그윽해 있었다. 그녀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조소하듯 웃으며 말했다.
"당신과 이현의 사이에 대해 난 전혀 알고 싶지 않아. 내가 말했듯이 우리는 이미 헤어졌고, 헤어진 그 순간부터 난 당신한테 마음 접었어."임구택의 말허리를 차갑게 끊어버린 소희의 눈빛은 단호했다.그리고 그런 소희의 대답과 눈빛에 임구택이 순간 멍해졌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통증이 조금씩 만연되기 시작하더니 곧 모든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그렇게 한참 소희를 쳐다보다가 임구택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사랑이 멈추고 싶을 때 바로 멈출 수 있는 거라면 네가 나를 전혀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설명하겠지.""아마도."소희가 덤덤하게 대답했다.그러자 임구택의 미간에 순간 서늘한 기운이 묻어났다. 그의 두 눈은 여전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소희를 주시하고 있었다."맞아. 넌 단 한 번도 내가 널 사랑한 만큼 날 사랑한 적이 없었어. 심지어 우리가 함께 있을 때에도 넌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고. 매번 헤어질 때마다 나만 아쉬워하고 그리워했고, 넌 항상 평온하고 덤덤했지. 설령 내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더라도 놀라울 정도로 냉정했고. 왜서인지 알아? 당신은 날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난 당신이 표현에 서툴러 그런 것일 수도 있다고, 그렇게 나 자신을 설득했었어. 넌 단지 밀실에서 나와 생사를 겪었기 때문에 소씨 가문이 제기한 통혼을 받아들였고, 또 호기심으로 나에게 접근했을 뿐인데. 그리고 당신은 어릴 적에 겪었던 일 때문에 극도로 안정감이 결핍해 매사에 목적을 달았고 누구에게나 경각심을 높였지. 그래서 한 번도 나에게 당신의 신분을 고백한 적이 없었고, 또 한 번도 우리의 사랑에 진심을 다 한적이 없었어. 넌 그렇게 항상 퇴로를 남겼으니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 한마디만 내뱉고 바로 빠질 수 있었던 거겠지."임구택의 말을 듣고 있던 소희의 긴 속눈썹이 심하게 한 번 떨렸다. 그러다 천천히 아래로 늘어뜨린 채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더니 유유히 입을 열었다."당신 말이 맞아. 지금까지 난 내가 이미 건강을
식당에서 나와 길을 따라 한참 걸은 후에야 소희는 비로소 차를 아직 식당 주차장에 세워두었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 하지만 종일 너무 바쁜 탓에 점심에 밥을 대충 몇 입밖에 먹지 못했더니 위가 슬슬 아파 나기 시작했다.그러다 사방을 둘러보고 식당이 강성대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걸 발견한 소희는 다시 식당으로 돌아가지 않고 면 먹으러 방고거리까지 걸어갔다.예전에 그녀가 자주 왔던 국숫집, 벽에 걸려 있는 메뉴판마저도 예전 그대로였다. 깨끗하고 소박한 가게에는 삼삼오오 식객들이 앉아 있었고, 모양을 봐서는 대부분 강성대 학생들인 것 같았다.소희가 빈자리를 찾아 앉자 사모님이 곧 다가와 웃으며 물었다."아가씨, 뭐 좀 드실래요?"그러다 소희를 알아보더니 얼굴에 단골손님을 만난 후의 놀라움과 기쁨이 드러났다."아가씨였네. 오랜만이야. 이미 졸업했지?"소희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지난 2년 동안은 외국에 있었어요.""어쩐지!"사모님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열정적이고 담소 나누기를 좋아했다."오랫동안 보이지 않는다 했어. 자네 그 남자친구는 자주 왔었는데."사모님의 말에 소희가 잠깐 멍해졌다."남자친구요?""그래! 예전에 자네랑 같이 국수 먹으러 왔던 그 양반 말이야."사모님이 웃으며 대답했다.그렇게 기품이 뛰어난 남자는 한 번만 보면 영원히 잊히지 않았다.‘임구택이 면 먹으러 이곳을 왔다고?’소희가 놀라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했다.아무래도 임구택이 성장해 온 환경이 있었으니 이런 붐비고 좁은 곳에서 음식을 먹는 걸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예전에 그녀와 몇 번 왔던 것도 단지 그녀가 이곳의 면을 좋아했기 때문이다.심지어 그는 국수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매번 올 때마다 그냥 그녀의 비위에 맞춰주기 위해 보여주기식으로 몇 입만 먹곤 했을 뿐."오늘도 게황면, 맞지?"소희가 멍때리고 있는 모습에 사모님이 웃으며 물었다."네? 아, 네, 게황면이요."소희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임유민은 집사와 인사를 나누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자기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3층으로 올라갔다.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니 방안에는 플로어 스탠드만 조용하게 켜져 있었고 그의 둘째 삼촌은 소파에 앉아 멍을 때리고 있었다.그러다 인기척에 임구택이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는 불빛 때문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고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나 때문에 깬 거야?"임유민이 듣더니 다가가 재떨이에 가득 찬 담배꽁초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담배를 얼마나 피운 거예요?"임구택이 일어나 창문 앞으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습한 공기가 순간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와 방안의 담배냄새를 어느 정도 씻어냈다.임구택이 일어나자마자 임유민은 소파 위에 놓인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사진 정면이 아래로 향해 있어 임유민이 호기심에 뒤집어 보려는데 임구택이 마침 몸을 돌려 돌아왔다.그러자 임유민이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입을 열었다."둘째 삼촌, 상처가 금방 다 나았는데 아직 그렇게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고요."임구택이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알아.""둘째 삼촌, 삼촌 아직도 소희 쌤을 좋아해요?"그러다 임유민이 갑자기 임구택에게 물었다.이에 임구택이 웃으며 되물었다."너 좋아한다는 게 뭔지 알아?""당연하죠!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매일 그 사람이 보고 싶고, 매일 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 그런 심정이잖아요."임유민의 진지한 대답에 임구택 입가의 웃음기가 더 짙어졌다."너도 좋아하는 애가 있어?"임유민이 듣더니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전 아직 어리단 말이에요. 저의 주요 임무는 공부에요, 공부!"임구택이 나지막하게 웃었다."잘 알고 있네."임유민이 앞으로 몸을 기울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둘째 삼촌, 만약 아직도 소희 쌤을 좋아한다면 다시 잡아요."임구택이 듣더니 눈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그 여인은 이미 나를 좋아하지 않아.""삼촌이 어떻게 알아요?""그 여인이 직접 말했으니까.""여자들은
이튿날 아침, 임유민은 학교로 가는 길에 우정숙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휴대폰 맞은편의 우정숙이 다정하게 물었다."학교로 가고 있어?""네, 곧 도착해요."우정숙이 듣더니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당부했다."엄마와 아빠는 며칠 더 있어야 집에 갈 수 있을 거 같아.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안 계시니 집에서 둘째 삼촌의 말을 잘 듣고.""알았어요. 제가 뭐 어린애도 아니고, 걱정마요."임유민이 어른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그러자 우정숙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다시 말했다."내일 테스트가 있는 날이지? 긴장하지 말고, 평시대로만 하면 돼.""제가 고작 그런 테스트에 긴장할 사람으로 보여요?"임유민이 신심으로 가득 차서 대답했다."그럼 됐어. 밥 제때에 먹고, 누나와 집 잘 지키고 있어.""네, 엄마와 아빠도 몸 잘 챙기시고요."전화를 끊은 후 임유민은 다시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음 날의 테스트 생각에 갑자기 눈에 교활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오후, 소희가 밖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새로 전근된 조수가 그녀의 휴대폰을 들고 달려왔다."소희 씨, 휴대폰이 두 번이나 울렸어요."이에 소희가 수신 번호를 한 번 확인하더니 바로 받았다."아주머니, 무슨 일이에요?"이씨 아주머니의 조급해하는 소리가 휴대폰 맞은편에서 들려왔다."소희 씨, 요요가 낮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열이 나기 시작해요. 청아 씨가 전화를 받지 않는데, 내가 먼저 요요를 데리고 병원이라도 갈까요?"소희의 얼굴색이 순간 어두워졌다."네, 일단 먼저 택시 타고 병원으로 가세요. 저도 곧 갈게요!""알았어요!"이씨 아주머니가 대답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소희는 급히 이 감독과 휴가를 내고 병원으로 향했다.소희와 청아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은 가장 가까운 병원에서 5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이씨 아주머니는 요요에게 옷을 갈아입힌 후 바로 택시 타러 나갔고, 동시에 소희도 병원으로 향하고 있었다.중도에 소희가 또 청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
“여진구 제대로야. 임씨 집안 딸이랑 결혼하면 우리 집안의 공신 되는 거지. 할아버지도 계속 웃고만 계시잖아. 아이, 우린 왜 그런 복이 없을까.”“네가 저 아가씨랑 결혼했으면, 진구 대신 네가 후계자 됐겠지.”누군가 농담을 건네자. 여인후는 코웃음을 치며 비꼬듯 말했다.“너희는 저 여자가 뭐 대단한 줄 아는 모양인데, 내 눈엔 그냥 싸구려야. 한쪽으론 우리 집안 며느리 노릇하려 들고, 한쪽으론 구씨그룹 사장한테 붙어먹고 있다니까?”순간 주변이 조용해졌고, 다른 한 명이 조심스레 물었다.“그거 어떻게 알아?”“내가 봤다니까, 거짓말일 것 같아? 할아버지 생신 잔치 때, 임유진이 구은정이랑 서로 잡고 끌고 하는 장면 내가 직접 목격했어.”인후는 비웃듯 말했다.“진구는 그걸 모르고 좋아 죽고 있겠지. 이미 유진한테 다른 남자가 생긴 줄도 모르고.”이에 사람들 사이에선 탄식이 터져 나왔다.“저 아가씨는 겉으론 참 청순해 보였는데, 의외네.”인후는 유진이 자신을 무시했던 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고, 진구에 대한 질투도 더해져 그의 말은 점점 도를 넘었다.“겉으로 고상하고 순해 보이는 애들이, 뒤로는 더 음란한 거 몰라? 저런 여자가 제일 문란하게 노는 법이지.”“쾅!”갑작스레 문이 거칠게 열렸고, 인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강한 주먹이 얼굴을 가격했다.그 한 방에 코뼈가 부러지고, 머릿속은 울려댔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아찔했다.문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살기 서린 기운을 뿜어내며, 냉혹한 기세로 여인후를 주먹질하고 발길질했다.순식간에 그 자리에 있던 몇몇 여씨 집안 사촌 형제들도 함께 맞았다. 차례차례 쓰러져 바닥을 뒹굴었다.유진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옆방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비명과 고통스러운 신음을 듣고 깜짝 놀라 즉시 방향을 틀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멍하니 굳어버렸다.바닥엔 네댓 명이 쓰러져 있었고, 은정은 여인후의 머리채를 붙잡고
그날 밤, 여씨 집안의 한 어르신이 귀국해, 강성의 모 유명 5성급 호텔에서 가족 만찬이 열렸다.임유진은 여진구와 함께 도착했다. 메인 테이블은 여씨 직계 가족들로만 채워져 있었고, 무려 30명 가까이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원탁이었다.진구의 할아버지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백발의 노인은 그의 큰할아버지였다. 회장님의 친형으로, Y국에서 거주하다 이번에 가족을 데리고 일시 귀국한 것이다. 그만큼 이번 가족 모임은 여씨 집안에서 굉장히 중요한 자리였다.유진은 처음에는 단순히 가족들끼리 조용히 저녁식사를 하는 줄 알고 있었다. 자신을 초대한 것도 분위기만 맞춰주면 될 줄 알았다.하지만 파티장에 들어서자, 진구는 유진을 이끌고 바로 메인 테이블로 향해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렸다.한혜란 여사와 여순호도 유진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고 따뜻하게 인사를 건넸다.여순호는 직접 자신의 큰형에게 유진을 소개하며 자애로운 웃음을 지었다.“우리 진구가 신뢰하는 아가씨야.”그러고는 자기 옆자리에 의자를 추가해 유진이 외부인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옆에 앉게 했다.물론 유진은 임씨 집안의 딸이라는 명확한 신분이 있긴 하지만, 이토록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을 보며, 진구와 유진의 관계는 이미 대부분의 사람 머릿속에서 확정된 분위기가 되었다.순식간에 파티장 안은 칭찬과 축하, 아첨의 말들로 가득 찼고, 진구와 동년배의 친척 중 몇몇은 눈에 띄게 부러움과 질투를 숨기지 못하며 억지로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유진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자리는 단순한 가족 식사가 아니었다. 이에 유진은 재빨리 핸드백을 챙겨 나갈 구실을 찾고 파티장을 빠져나왔다.호텔 복도 쪽으로 나와서야 숨을 돌린 유진은 진구에게 따졌다.“선배 왜 말 안 했어요? 오늘 선배 큰할아버지 귀국한 날이고, 집안 전체가 다 모이는 행사였다는 걸요. 처음부터 알았으면 나 안 왔을 거예요.”“할아버지가 꼭 널 데려오라고 했어. 부탁이라기보단 명령이었지.”진구는 웃으며 말했으나, 유진은 고개
정현준은 업무 능력은 있었지만, 결국 남녀 문제로 스스로 무너졌다.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 정리되자 여진구는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말했다.“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가족 모임 있어. 같이 가자.”그러자 유진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가족 모임에 내가 왜 가요?”이에 진구는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우리 할아버지가 널 보고 싶대. 지난번 생신 때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다면서, 꼭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 그리고 나도 할 말이 있어.”사실 진구는 오늘 저녁, 유진에게 고백할 계획이었다. 유진은 진구의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 한다는 말에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몇 시에 가면 돼요?”“저녁 7시쯤. 내가 호텔로 데려다줄게.”“그래요.”진구는 미리 소혜와 시양의 해고를 결정해 두었기에, 두 사람의 자리를 대신할 인력을 미리 배치해 두었고, 업무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유진이 사무실로 돌아오자, 마케팅 부서 직원들이 하나둘 들어와 그녀에게 사과를 전했다.“팀장님, 저희가 소혜 씨한테 휘둘려서 그랬어요. 정말 죄송해요.”“앞으론 함부로 휩쓸리지 않을게요. 이번 일로 크게 깨달았어요.”“눈으로 본 게 다가 아니더라고요. 그깟 사진 몇 장으로 괜한 오해 했네요.”...유진은 담담하게 모두의 사과를 받아주며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지난 일이고, 전 이 일로 누구 미워하지 않아요. 앞으로 일에만 집중하죠.”유진의 대인배적인 반응에 부서 내에서의 평판은 확 올라갔다. 유진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신뢰와 존재감을 동시에 확보했다.더 이상 누구도 진구 라인이라는 말로 그녀의 실력을 깎아내리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현준이 사직과 업무 인수인계를 하러 다시 회사에 오게 된다면, 자신이 예전에 소혜에게 했던 말을 떠올릴지도 모른다.타협이 안 되면, 뿌리째 잘라낸다는 그 말, 소혜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리고 현준도 이와 얽히고설켜 끝내 유진이 베어내야 할 대상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업무를 마치기 전, 진구는 방연하에게 메
곽시양은 임유진의 사무실에서 30분 넘게 있다가 나왔다. 복도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시양은 다들 자신이 승진한 걸로 수군대는 줄 알고 웃으며 지나치려 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료 한 명이 다급하게 말했다.“시양 씨, 얼른 회사 이메일 확인해 봐요.”시양은 곧장 사내 메일함을 열어봤고, 그 내용을 확인한 뒤 3분 넘게 멍하니 서 있었다.그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에 잡히는 물건을 움켜쥐고 그대로 진소혜를 향해 달려들며 집어던졌다.소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순간에 몸싸움으로 번졌다. 동료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둘을 떼어놓자, 시양은 눈에 광기를 담고 소리쳤다.“진소혜, 이 악랄한 년! 팀장님도 모함하고, 나도 똑같은 수법으로 뒤통수 쳐? 너 같은 건 세상에서 그냥 사라져버려야 해!”소혜도 물러서지 않았다.“미쳤어? 그게 왜 내 탓인데? 그딴 더러운 짓을 해놓고 몰래 찍혔다고 나한테 화를 내?”“너야! 너밖에 없잖아!”시양은 미친 사람처럼 소혜에게 다시 달려들려 했다. 이때, 현준이 달려 나와 그녀를 막으며 말했다.“진정 좀 해!”“꺼져!”시양은 손을 뻗어 정현준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당신이 날 찍었지! 그리고 진소혜한테 넘겼지! 둘 다 정말 비열해!”현준도 결국 폭발했다.“유혹한 건 당신이 먼저였잖아!”시양은 그대로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아악!”유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이 난장판을 조용히 지켜봤다. 몇 마디 오가는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찌 돌아간 건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시양은 입사 이후 내내 소혜에게 눌려 지냈다. 겉으론 아첨하며 따라다녔지만, 소혜가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듯 대하던 걸 속으로는 원망하고 있었다.시양은 현준이 소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도 소혜에게 특혜를 줬던 그를 시양은 일부러 유혹했다. 현준을 차지해 소혜를 공격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현준은 시양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