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 언니, 믿지 않을 수도 있지만...”김현정은 임슬기의 발에 난 상처를 붕대로 감으면서 입술을 깨물었다.“정말 배 대표님이 한 게 아닐 수도 있어요.”임슬기는 그녀를 바라보며 비웃음 섞인 눈빛을 보냈다.“하지만 전 정우를 믿지 못하겠어요. 지난번엔 저를 작고 캄캄한 방에 가두기까지 했는데 사람을 시켜서 납치하는 것도 못 할 건 없잖아요.”배정우는 그녀의 모든 꿈을 부수었고 두 사람의 추억들을 짓밟아버렸다.임슬기의 눈에 그는 이미 악마 같은 존재였기에 무엇을 하든 안 좋게 보일 뿐이었다.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건 어리
“네가 아직 안 죽었는데 내가 먼저 죽으면 안 되지.”“임슬기, 네가 살아 있다고 해도 아무 소용 없어. 정우가 널 믿겠어? 너도 알잖아. 정우는 배신당하는 걸 가장 싫어해.”연다인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임슬기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연다인, 너 3년 전부터 임신할 수 없는 몸이었잖아. 임신한 척하고는 유산했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걸 정우가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연다인은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것도 배신에 속하는 거 아닌가?”“너... 너 무슨 소리 하는 거야?”“증거도
임슬기는 연다인이 배정우 앞에서는 늘 연기하지만 그가 없을 때는 어김없이 본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오늘 그 녹음 파일만으로도 그녀가 점점 미쳐가고 있음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었다.금원 아파트 아래에 도착하자 익숙한 마이바흐가 눈에 들어왔다.임슬기는 차를 힐끗 보기만 했을 뿐 외면했지만 두 걸음도 채 가지 못해 누군가 갑자기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어디 가려고 했어?”그의 어조는 질책이 섞여 있었다.“네가 숨겨둔 여자를 보러 갔다가 우연히 녹음 파일 하나를 얻었어. 너라면 아주 흥미로워할 거야.”배정우
임슬기는 화를 내지도 않고 인형처럼 얌전하게 배정우의 품에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마음대로 다뤄도 된다는 듯 보였다.“임슬기, 네가 숨겨둔 일을 내가 조만간 알아낼 거야.”이 말을 들은 임슬기의 가슴은 아프게 찔렸지만 얼굴에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그래? 그러면 배정우 씨가 빨리 알게 되길 바랄게.”‘내가 죽기 전에.’“너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비꼬는 말투로 말할 거야?”“배정우 씨, 내가 비꼬는 것 같아?”“임슬기.”배정우는 길고 날렵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꽉 움켜쥐었는데 붉어진 눈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제
“네가 미친 거지. 날 납치한 건 연다인이야. 넌 명인시에서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잖아. 그런데 겨우 여자 하나 제대로 해결 못 해? 연다인을 그렇게 믿는 거야? 연다인의 처음 경험을 누구에게 줬는지나 알고 있어?"“임슬기, 네가 정말 미쳤구나. 또 연다인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거야? 네가 납치당했을 때 연다인은 병원에 있었어.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을 꾸몄겠어?”배정우는 임슬기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고 흔들며 다그쳤다.“연다인은 너무 착해서 매일 네가 위험에 처할까 걱정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런 연다인을 의심하다니? 임슬기
배정우가 문 앞에 서 있을 때 임슬기는 바닥에 앉아 침대 옆 서랍을 뒤적이고 있었다.그녀는 물건을 하나씩 꺼낼 때마다 잠시 멈칫하며 아쉬움과 미련이 남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다 손끝이 붉은 비단 상자에 닿자 그녀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자 그 안에 반짝이는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차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눈가가 붉어졌다.이 반지는 3년 전 배정우가 세계적인 장인에게 맞춤 제작을 의뢰해 프러포즈하려 했던 다이아몬드 반지였고 그녀는 그동안 이 반지를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며 혹여나 흠이라도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권민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배정우였다.권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사모님, 걱정 마세요. 우선 전화부터 받겠습니다.”“네. 볼일 보세요. 조심하세요.”임슬기는 김현정을 방으로 데려갔고 권민은 급히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로 배정우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서재로 와.”서재에 들어선 권민은 배정우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내가 없던 사이에 또 사모님과 대표님이 다투셨던 건가?’“임슬기가 나를 만나기 전에 어떤 남자들을 만났는지 전부 조사
“아가씨?”임슬기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주섬주섬 꺼냈던 주얼리를 다시 집어넣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팔지 않겠습니다.”전당포 주인은 그녀가 가격이 너무 낮다고 생각해 팔지 않으려는 줄 알고 당황하며 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아가씨, 가격이 너무 낮다고 생각하시면 다시 협상할 수 있습니다. 60억까지 드리겠습니다. 어떠십니까?”이 정도면 충분히 높은 가격이었기에 전당포 주인은 자신 있게 임슬기의 반응을 기다렸다.그러나 임슬기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은 채 주얼리 상자를 단단히 끌어안았다.“얼마를 준다 해도 팔 수 없어
반달이 지난 뒤 임슬기는 여전히 제대로 걷지는 못했지만, 의사에게서 이틀 뒤면 퇴원이 가능하다는 허락을 받았다.“너무 잘 됐어요! 드디어 퇴원할 수 있다니! 뭐 드시고 싶어요? 내가 다 준비할게요! 이건 꼭 축하해야죠.”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현정아, 너 먹방 유튜버나 해볼래? 그럼 돈 좀 벌 수도 있겠다.”“진짜요? 근데 난 언니한테 해주는 게 제일 좋아요.”김현정은 그렇게 말하며 임슬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말았다.“언니, 우리 그냥 앞으로 같이 살래요? 내가 언니 먹여
“꺅!”연다인은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김현정을 노려봤다.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임종현이 있는 앞이라 억지로 연기해야 했다.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김현정 씨, 왜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곧바로 임종현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억울한 척 말을 이었다.“종현아, 누나는 그런 뜻 아니야. 나는 그냥... 다들 알고 있는 줄 알고...”울먹이는 얼굴에 눈가가 금세 빨갛게 물들었다.그 모습에 임종현은 약간 망설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됐어요. 형이랑
임종현이 부탁하면 임슬기는 늘 거절을 잘 못했다.하지만 배정우와 다시 잘 지내라는 이 부탁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녀가 원한다 한들 배정우가 원하지 않으니까.배정우는 그녀를 죽이려 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 어떻게 다시 처음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종현아.”임슬기는 고개를 숙이며 쓴웃음을 지었다.“그 부탁은... 누나가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아.”그녀는 억지로 울음을 삼킨 채 고개를 들었다.“이미 그 사람은 연다인이랑 함께잖아.”임종현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
이제 이 동생도 부끄럼을 탈 줄 안다니.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종현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종현아, 누나 좀 도와줘. 침대 좀 올려줄래?”임종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 발치로 가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이 정도 높이면 돼요? 더 올려요?”“응, 지금 딱 좋아. 고마워.”임슬기는 그의 손에 감겨 있는 붕대를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종현아, 그 손... 필기하는 데는 지장 없겠어?”그 말을 들은 종현은 고개를 숙여 손을 내려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요. 그렇게 심하진 않아요. 그리고 이번에
“현정아.”임슬기는 김현정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어도 속으론 여전히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사랑 문제는 본래 타인이 쉽게 끼어들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이번 일은 그녀로 인해 시작된 일이기에 그냥 모른 척할 순 없었다.김현정은 조용히 다가와 침대 옆에 앉더니, 임슬기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며 마음 아픈 눈빛을 보냈다.“언니, 내가 전화 안 했으면 나한텐 아무 말 없이 계속 숨길 생각이었죠?”“...나는 그냥 네가 걱정할까 봐.”“나도
차로 돌아온 배정우는 주머니에서 단추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손에 쥔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권민, 연다인 행적 좀 추적해 봐.”권민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가 들고 있는 단추를 보고 물었다.“단추도 조사해 볼까요?”배정우는 단추를 권민 손에 툭 던지며 말했다.“조사해. 그리고 지난달 파티 밤의 CCTV 영상도, 빠짐없이 확인해.”그 말을 들은 권민은 잠깐 눈썹을 찌푸렸다.“대표님, 그날 CCTV는 이미 없어진 상태입니다. 호텔 쪽 말로는 장비 고장이 있었다고 합니다.”‘고장? 참 타이밍 좋게도.
하지만 임슬기는 결국 찌르지 못했다. 칼끝은 배정우에게 닿지 않았다.배정우는 놀라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슬기야...”“배정우, 여긴 왜 온 거야?”그 순간 진승윤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그는 배정우를 거칠게 끌어내고는 병실 문을 쾅 닫아버렸다.그리고 곧장 임슬기 곁으로 달려가 그녀 손에 들린 칼을 빼앗아 침대 옆에 내려놓은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진정시켰다.“괜찮아, 슬기야. 이제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아무 일도 안 생겨.”임슬기는 마치 이제야 정신이 든 듯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눈물
“내 입이 독하긴 해도, 배정우 씨는 손에 칼을 숨기고 있잖아요.”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배정우를 바라보며 입가에 비웃음 섞인 미소를 띠었다.“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이기겠어요.”그 말은 마치 날이 서 있는 칼처럼 배정우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배정우는 잠시 멍해있더니,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려고 했다.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임슬기가 눈을 감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잔뜩 겁먹은 표정까지 떠오르자 배정우는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두었다.“넌 내가 그렇게 무서워? 응?”임슬기는 눈을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