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진승윤이 임슬기의 병실을 찾았을 때,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부은 눈은 밤새 울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진승윤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슬기야, 무슨 일 있었어?”임슬기는 고개를 저으며 기침했다.“아무것도 아냐. 어젯밤에 추웠나 봐. 감기 기운이 좀 있어.”“주민규가 왔어. 오늘에는 일단 예비 검사를 진행할 텐데, 너 몸 괜찮아? 부담스러우면 다른 날로 미룰 수도 있어.”“괜찮아. 오늘 하자.”임슬기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네가 아니면 주 선생님 같은 분을 모실 수
“그거 참 정말 난처하게 됐네.”임슬기는 옷깃을 여미며 연다인 앞으로 다가와 차갑게 웃었다.“연다인, 내가 죽어도 넌 만족하지 못할 거 같은데? 설마 내 유골까지 팔아서 명혼을 치르려는 건 아니지?”연다인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태연하게 대답했다.“그거 좋은 아이디어네. 한 번 고려해 볼게.”그 태도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임슬기는 어이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그런데 정작 우스운 사람은 자기 자신일지도 몰랐다. 임슬기는 선의를 한 번 베풀었다가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자신의 인생까지 망쳐버렸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초
배정우의 손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는 연다인을 밀어내고 임슬기를 구하려 했지만 연다인이 필사적으로 그를 붙잡고 늘어져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그 사이 임슬기의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자 배정우는 재빨리 연다인을 확 밀쳐내고 황급히 난간으로 달려가 손을 뻗었다.하지만 늦어버렸다. 두 사람의 손끝은 닿을 듯 스치며 멀어져 갔다. 마치 그들의 사랑이 결국 엇갈리고 만 것처럼.“슬기야!”무표정하기만 하던 배정우의 눈동자가 드디어 공포와 무력감으로 물들었다. 그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만
“배정우, 너 진짜 비겁한 놈이야!”진승윤은 배정우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 올리더니 바로 또 주먹을 날렸다.퍽.“사랑하지 않으면 그냥 놔줘야지. 도대체 왜 한 여자를 이렇게까지 괴롭히는 거야? 만약 아직도 사랑한다면 슬기를 믿었어야지!”퍽.또다시 강렬한 주먹이 배정우의 얼굴을 강타했다.진승윤은 힘을 아끼지 않았다. 배정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부어올랐고 입가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하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그런 배정우의 무기력한 모습이 오히려 더 분노를 자극해 진승윤은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주먹을 날렸다.“거짓말만
진승윤은 쓴웃음을 지었다.“이제 와서 그게 중요한가요?”그는 임슬기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든 말든 아무 의미도 없다.진승윤은 그저 임슬기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그런데 김현정이 그의 앞으로 다가와 단호하게 말했다.“중요해요.”진승윤은 순간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김현정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다시 말했다.“만약 진 변호사님이 슬기 언니를 사랑한다면 적어도 배정우 그 개자식보단 나은 선택지니까요. 변호사님은 슬기 언니를 다치
상처를 다 싸맨 후 배정우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소파에 앉았고 한동안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방 안에 가득한 정적이 답답하고 숨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그렇게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불도 켜지 않은 방 안에서 달빛만이 희미하게 그의 몸을 비추고 있었다. 그 모습은 한층 더 싸늘해 보였다.그러다 갑자기 배정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긴 다리를 뻗으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그런데 문 앞에서 누군가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배정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문
“언니, 제가 이야기 하나 해줄게요.”김현정은 코를 훌쩍이며 침대에 기대어 앉았고 눈물 맺힌 눈으로 창백한 얼굴의 임슬기를 바라보았다.“17년 전에 저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당했었어요. 작고 어두운 방에 갇혀 있던 그때 언니를 만났는데 그때 언니도 겨우 열 살쯤이었을 거예요. 그런데도 언니는 무서워하기는커녕 저를 보호하려고 했어요.”“기억나요? 한번은 제가 울며 소리를 질렀더니 놈들이 화를 내며 밥을 안 주겠다고 했잖아요. 그러자 언니는 놈들이 떠난 뒤 몰래 언니 빵을 반으로 갈라서 제 손에 쥐여줬어요. 또 다른 날은 그놈들이 절
임슬기도 한때는 이 아이를 지울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결국 이 아이는 그녀의 아이였고 차마 포기할 수 없었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 오직 이 아이만이 그녀를 다시 살고 싶게 만들었으니까.가끔은 꿈꿨다. 아이가 태어나면 혹시 배정우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비록 그녀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더라도 마지막 순간만큼은 셋이 함께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그러나 그 아이를 죽인 건 배정우였다. 그는 스스로 그들과의 모든 인연을 끊어버렸다. 이제 더 이상 그를 사랑해야 할 이유도, 그를 용서해야 할 이유도
금원 아파트.임슬기는 침대 위에서 잠든 김현정을 한 번 바라본 뒤 조용히 문을 닫고 옆에 서 있던 강재호에게 말했다.“오늘 고마웠어요. 또 번거롭게 했네요.”강재호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아니에요, 임슬기 씨. 나한테 너무 그렇게까지 예의 차리지 않아도 돼요.”그는 잠시 임슬기의 다리를 보고는 다시 말했다.“오늘 그냥 내가 여기 있을까요? 임슬기 씨도 다리 불편하고, 현정 씨도 상태가 좀 안 좋아서 혼자 두긴 불안한데요.”임슬기는 순간 민망해졌다.“그건 너무 폐 끼치는 거 같아서요. 재호 씨도 아르바이트도 있고,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점심때가 지났는데도 김현정은 밥 한술 먹지 않았다. 두 손을 꽉 움켜쥐고 입술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깨물고 있었다.임슬기는 그런 김현정이 걱정되었지만, 이럴 땐 무슨 말을 하더라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그저 말없이 그녀의 곁에 있어 줄 수밖에 없었다. 김현정이 어떤 결과를 받아들이든 그녀와 함께할 작정이었다.임슬기는 가끔 생각했다.김현정은 그동안 얼마나 견디기 힘든 삶을 살았기에 겉으로는 밝고 강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이토록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건지. 밝은 얼굴로 주
다음 날 오전.김현정이 임슬기의 퇴원 절차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와 짐 정리를 시작했다.“슬기 언니, 오늘 뭐 먹고 싶은 거 정했어요?”임슬기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등갈비찜이랑 생선찜, 그리고 현정이 네가 제일 잘하는 캐러멜 푸딩 어때?”말을 마치자마자 김현정의 얼굴이 갑자기 안 좋아졌다.“왜 그래? 어디 아파?”김현정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막고 손을 저은 뒤 급하게 화장실로 뛰어가 토하기 시작했다.임슬기는 김현정이 뭘 잘못 먹은 줄 알고 당황해했다.“현정아, 배가 아파? 얼른 의사 부를게.”그녀가 나가
“나 연다인이랑 아무 일도 없었어. 제발 믿어줘.”배정우의 목소리는 어쩐지 간절하기까지 했다. 마치 사랑에 지쳐 무너진 사람처럼.그가 오히려 더 처절해 보였다.임슬기는 배정우를 밀쳐내며 차갑게 말했다.“언제까지 연기할 건데? 술 마시고는 화해하자고 찾아오고, 정신 차리면 연다인 침대에 누워서 날 죽이고 싶다 그러고... 배정우, 난 네가 이해가 안 가. 그리고 더는 알고 싶지도 않아. 제발 날 놔줘.”“왜 날 안 믿는 건데?”배정우는 상반신을 겨우 일으킨 채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깊고 어두운 눈빛은 끝을 알
반달이 지난 뒤 임슬기는 여전히 제대로 걷지는 못했지만, 의사에게서 이틀 뒤면 퇴원이 가능하다는 허락을 받았다.“너무 잘 됐어요! 드디어 퇴원할 수 있다니! 뭐 드시고 싶어요? 내가 다 준비할게요! 이건 꼭 축하해야죠.”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현정아, 너 먹방 유튜버나 해볼래? 그럼 돈 좀 벌 수도 있겠다.”“진짜요? 근데 난 언니한테 해주는 게 제일 좋아요.”김현정은 그렇게 말하며 임슬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말았다.“언니, 우리 그냥 앞으로 같이 살래요? 내가 언니 먹여
“꺅!”연다인은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김현정을 노려봤다.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임종현이 있는 앞이라 억지로 연기해야 했다.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김현정 씨, 왜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곧바로 임종현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억울한 척 말을 이었다.“종현아, 누나는 그런 뜻 아니야. 나는 그냥... 다들 알고 있는 줄 알고...”울먹이는 얼굴에 눈가가 금세 빨갛게 물들었다.그 모습에 임종현은 약간 망설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됐어요. 형이랑
임종현이 부탁하면 임슬기는 늘 거절을 잘 못했다.하지만 배정우와 다시 잘 지내라는 이 부탁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녀가 원한다 한들 배정우가 원하지 않으니까.배정우는 그녀를 죽이려 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 어떻게 다시 처음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종현아.”임슬기는 고개를 숙이며 쓴웃음을 지었다.“그 부탁은... 누나가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아.”그녀는 억지로 울음을 삼킨 채 고개를 들었다.“이미 그 사람은 연다인이랑 함께잖아.”임종현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
이제 이 동생도 부끄럼을 탈 줄 안다니.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종현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종현아, 누나 좀 도와줘. 침대 좀 올려줄래?”임종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 발치로 가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이 정도 높이면 돼요? 더 올려요?”“응, 지금 딱 좋아. 고마워.”임슬기는 그의 손에 감겨 있는 붕대를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종현아, 그 손... 필기하는 데는 지장 없겠어?”그 말을 들은 종현은 고개를 숙여 손을 내려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요. 그렇게 심하진 않아요. 그리고 이번에
“현정아.”임슬기는 김현정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어도 속으론 여전히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사랑 문제는 본래 타인이 쉽게 끼어들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이번 일은 그녀로 인해 시작된 일이기에 그냥 모른 척할 순 없었다.김현정은 조용히 다가와 침대 옆에 앉더니, 임슬기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며 마음 아픈 눈빛을 보냈다.“언니, 내가 전화 안 했으면 나한텐 아무 말 없이 계속 숨길 생각이었죠?”“...나는 그냥 네가 걱정할까 봐.”“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