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시간쯤 지나 진승윤이 병실로 뛰어 들어왔다.급히 달려온 탓인지 이마엔 땀이 가득 맺혀 있었고 평소 깔끔하기로 유명한 그였지만 흰 셔츠엔 커피 자국까지 묻어 있었다.“슬기야, 괜찮아? 도대체 무슨 일이야? 병원 아래에 너희 어머님 시신이 있다는 게 무슨 말이야?”“응... 난 괜찮아.”그가 다급해하는 걸 보자 임슬기의 콧등이 절로 시큰해졌다. 그녀와 친구로 지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흘이 멀다고 걱정을 안겨주니까.임슬기가 무사한 걸 확인한 진승윤은 그제야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안도했다.“괜찮아서 다행이야
“종현아?”임슬기가 성큼 앞으로 다가가 임종현을 와락 껴안고 기쁨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누나는 네가 정말 보고 싶었어.”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임종현은 임슬기를 거칠게 밀쳐냈고 그녀는 중심을 잃고 김현정 품에 쓰러졌다.“종현아...”임슬기의 눈동자에는 실망감이 스쳤고 목소리까지 떨리기 시작했다.“아직도 누나 미워하는 거야?”얼마 전 마지막으로 동생을 만났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르며 그날의 상처가 다시 가슴을 쥐어짰다.한때는 누구보다 가까웠던 남매였지만 지금은 연다인의 농간에 휘말려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어버렸다.임
배정우가 팔을 뻗어 진승윤의 목을 움켜쥐며 차갑게 말했다.“내가 뭘 하든 네가 참견할 일은 아니야.”진승윤은 목이 짓눌리는 고통에 얼굴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뿌리치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너 슬기랑 종현이 사이 억지로 갈라놓고, 애한테 그런 증오를 심어준 게 진심으로 문제없다고 생각해? 너랑 연다인 일에는 솔직히 나도 관심 없어. 하지만 종현이는 이제 슬기한테 돌려보내야 하잖아.”배정우는 코웃음을 치며 조수석을 가리켰다.“좋아. 데려가고 싶으면 데려가 봐. 직접 물어보지 그래, 본인이 가겠다고 하는지?”잠시 멈칫하던
“재혼이라니?”김현정이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걸 알기에 임슬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그 전에 일단 이혼부터 해야지.”“그래서 이혼하면 재혼할 생각은 있어요?”김현정이 진지하게 다시 묻자 임슬기의 눈빛에 순간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임슬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현정아, 자꾸 장난치지 마. 내가 이혼한다 해도, 지금 이런 나를 마음에 들어 할 남자가 있을 것 같아?”결혼한 적도 있고, 두 번이나 유산하고, 한 사람을 17년 동안 사랑하고, 가슴에 피보다 짙은 원한을 안고 살아가는 데다 말기 폐암 환자인 여자.
“모른다고? 그럼 독 먹인 건 어떻게 아는데?”배정우가 시선을 들어 차갑게 노려보자 육문주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건 나랑 슬기 씨 사이의 일인데요. 형이랑은 상관없어요.”임슬기를 옥상에서 밀어 떨어뜨린 진범이 배정우였다는 걸 알게 된 뒤로, 육문주의 마음속엔 쌓인 게 많았다.자기가 그렇게 도와줬는데, 돌아온 건 뭐였나?그 순간 배정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누가 너한테 슬기 이름 함부로 부르라고 했어.”“그럼 뭐 이제 와서 형수님이라고 불러요?”육문주는 배정우가 무섭긴 했지
다음 날 점심, 임슬기는 김현정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병실 문이 쾅 하고 열리며 차가운 바람이 몰아쳤다.그녀가 반응할 틈도 없이 누군가가 침대 위에 앉아 있던 그녀를 확 끌어당겼다.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린 순간 날카롭게 각진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고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배정우... 놔! 당장 놔!”그러나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질질 끌고 병실 밖으로 향했다.임슬기는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채 발버둥 쳤고 그러다 침대 모서리에 세게 부딪혀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아팠다.“미쳤어? 놓으라고! 놔
배정우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차를 도로 한쪽에 세웠다.“뭐라고 했어?”너무 갑작스레 급정거하는 바람에 임슬기의 머리가 유리창에 부딪혔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쳤다.“미친 거 아냐?”그러자 배정우는 그녀의 턱을 거칠게 붙잡고 얼굴을 자기 쪽으로 틀게 만들었다.“그래, 나 미쳤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마음속에 다른 사람 품고 있는 여자랑 결혼했겠어.”그동안 임슬기는 여러 번 자신은 바람을 피운 적 없다고 말해왔고 그럴 때마다 그는 믿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홧김에 내뱉은 거짓말은 그 자리에서 믿었다...“
임슬기는 배정우의 진심이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살벌하더니 지금은 또 다정하고 배려심 깊은 척 신사처럼 굴고 있었다.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임슬기는 더 이상 의미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고 조용히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가끔은 배정우가 이중인격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너무나도 다른 두 얼굴을 번갈아 보여주니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예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혹시 과거에 무슨 충격적인 일을 겪은 게 아닐까? 그래서 성격이 이렇게 된 건 아닐까?하지만 그녀는 배정
반달이 지난 뒤 임슬기는 여전히 제대로 걷지는 못했지만, 의사에게서 이틀 뒤면 퇴원이 가능하다는 허락을 받았다.“너무 잘 됐어요! 드디어 퇴원할 수 있다니! 뭐 드시고 싶어요? 내가 다 준비할게요! 이건 꼭 축하해야죠.”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현정아, 너 먹방 유튜버나 해볼래? 그럼 돈 좀 벌 수도 있겠다.”“진짜요? 근데 난 언니한테 해주는 게 제일 좋아요.”김현정은 그렇게 말하며 임슬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말았다.“언니, 우리 그냥 앞으로 같이 살래요? 내가 언니 먹여
“꺅!”연다인은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김현정을 노려봤다.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임종현이 있는 앞이라 억지로 연기해야 했다.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김현정 씨, 왜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곧바로 임종현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억울한 척 말을 이었다.“종현아, 누나는 그런 뜻 아니야. 나는 그냥... 다들 알고 있는 줄 알고...”울먹이는 얼굴에 눈가가 금세 빨갛게 물들었다.그 모습에 임종현은 약간 망설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됐어요. 형이랑
임종현이 부탁하면 임슬기는 늘 거절을 잘 못했다.하지만 배정우와 다시 잘 지내라는 이 부탁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녀가 원한다 한들 배정우가 원하지 않으니까.배정우는 그녀를 죽이려 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 어떻게 다시 처음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종현아.”임슬기는 고개를 숙이며 쓴웃음을 지었다.“그 부탁은... 누나가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아.”그녀는 억지로 울음을 삼킨 채 고개를 들었다.“이미 그 사람은 연다인이랑 함께잖아.”임종현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
이제 이 동생도 부끄럼을 탈 줄 안다니.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종현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종현아, 누나 좀 도와줘. 침대 좀 올려줄래?”임종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 발치로 가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이 정도 높이면 돼요? 더 올려요?”“응, 지금 딱 좋아. 고마워.”임슬기는 그의 손에 감겨 있는 붕대를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종현아, 그 손... 필기하는 데는 지장 없겠어?”그 말을 들은 종현은 고개를 숙여 손을 내려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요. 그렇게 심하진 않아요. 그리고 이번에
“현정아.”임슬기는 김현정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어도 속으론 여전히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사랑 문제는 본래 타인이 쉽게 끼어들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이번 일은 그녀로 인해 시작된 일이기에 그냥 모른 척할 순 없었다.김현정은 조용히 다가와 침대 옆에 앉더니, 임슬기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며 마음 아픈 눈빛을 보냈다.“언니, 내가 전화 안 했으면 나한텐 아무 말 없이 계속 숨길 생각이었죠?”“...나는 그냥 네가 걱정할까 봐.”“나도
차로 돌아온 배정우는 주머니에서 단추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손에 쥔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권민, 연다인 행적 좀 추적해 봐.”권민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가 들고 있는 단추를 보고 물었다.“단추도 조사해 볼까요?”배정우는 단추를 권민 손에 툭 던지며 말했다.“조사해. 그리고 지난달 파티 밤의 CCTV 영상도, 빠짐없이 확인해.”그 말을 들은 권민은 잠깐 눈썹을 찌푸렸다.“대표님, 그날 CCTV는 이미 없어진 상태입니다. 호텔 쪽 말로는 장비 고장이 있었다고 합니다.”‘고장? 참 타이밍 좋게도.
하지만 임슬기는 결국 찌르지 못했다. 칼끝은 배정우에게 닿지 않았다.배정우는 놀라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슬기야...”“배정우, 여긴 왜 온 거야?”그 순간 진승윤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그는 배정우를 거칠게 끌어내고는 병실 문을 쾅 닫아버렸다.그리고 곧장 임슬기 곁으로 달려가 그녀 손에 들린 칼을 빼앗아 침대 옆에 내려놓은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진정시켰다.“괜찮아, 슬기야. 이제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아무 일도 안 생겨.”임슬기는 마치 이제야 정신이 든 듯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눈물
“내 입이 독하긴 해도, 배정우 씨는 손에 칼을 숨기고 있잖아요.”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배정우를 바라보며 입가에 비웃음 섞인 미소를 띠었다.“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이기겠어요.”그 말은 마치 날이 서 있는 칼처럼 배정우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배정우는 잠시 멍해있더니,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려고 했다.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임슬기가 눈을 감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잔뜩 겁먹은 표정까지 떠오르자 배정우는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두었다.“넌 내가 그렇게 무서워? 응?”임슬기는 눈을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