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점심, 임슬기는 김현정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병실 문이 쾅 하고 열리며 차가운 바람이 몰아쳤다.그녀가 반응할 틈도 없이 누군가가 침대 위에 앉아 있던 그녀를 확 끌어당겼다.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린 순간 날카롭게 각진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고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배정우... 놔! 당장 놔!”그러나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질질 끌고 병실 밖으로 향했다.임슬기는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채 발버둥 쳤고 그러다 침대 모서리에 세게 부딪혀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아팠다.“미쳤어? 놓으라고! 놔
배정우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차를 도로 한쪽에 세웠다.“뭐라고 했어?”너무 갑작스레 급정거하는 바람에 임슬기의 머리가 유리창에 부딪혔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쳤다.“미친 거 아냐?”그러자 배정우는 그녀의 턱을 거칠게 붙잡고 얼굴을 자기 쪽으로 틀게 만들었다.“그래, 나 미쳤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마음속에 다른 사람 품고 있는 여자랑 결혼했겠어.”그동안 임슬기는 여러 번 자신은 바람을 피운 적 없다고 말해왔고 그럴 때마다 그는 믿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홧김에 내뱉은 거짓말은 그 자리에서 믿었다...“
임슬기는 배정우의 진심이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살벌하더니 지금은 또 다정하고 배려심 깊은 척 신사처럼 굴고 있었다.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임슬기는 더 이상 의미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고 조용히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가끔은 배정우가 이중인격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너무나도 다른 두 얼굴을 번갈아 보여주니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예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혹시 과거에 무슨 충격적인 일을 겪은 게 아닐까? 그래서 성격이 이렇게 된 건 아닐까?하지만 그녀는 배정
임종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거실 소파로 내려와 앉았다.“좋아요. 딱 10분 줄게요.”10분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임슬기의 얼굴엔 기쁨이 번졌다. 그녀는 웃으며 조심스레 임종현 옆에 앉았다. 그러나 그녀가 자리를 잡자마자 임종현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고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할 말 있으면 해요.”임슬기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이 동생은 어쩜 이렇게 자랐을까. 말투며 행동까지 하나같이 배정우를 닮아 있어서 괜히 움츠러들 정도였다.“종현아, 누나는 정우 형한테 정말 잘못한 게 없어. 임씨 가문이 무너진
감정이 너무 격해졌던 탓일까. 임슬기의 폐가 갑자기 조이듯 당기더니 목구멍으로 피비린내가 치밀어 올랐다.놀란 그녀는 얼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돌려 간신히 기침을 참았다. 터져 나오려던 피는 꾹 삼켜냈다.그 모습을 본 임종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왜 그래요?”임종현은 어제 묘지에서도 그녀가 피를 토하는 걸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혹시 어디가 아픈 걸까?임슬기는 대충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는 입을 가린 채 말했다.“괜찮아. 그냥 기침이 좀 나서.”“어제 피 토하는 거 다 봤어요.”그 말에 그녀의 어깨
“그래.”배정우는 자연스럽게 임슬기 맞은편에 앉으며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나도 한 그릇 끓여줘.”임슬기는 순간 멍해졌다. 예상 밖의 부드러운 반응에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가 이렇게 순순히 나올 줄은 몰랐다. 다만...그녀는 라면을 내려다보더니 조심스레 그릇을 앞으로 밀었다.“괜찮다면 이거 먹어. 나 아직 안 건드렸어.”“응, 괜찮아.”배정우는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들고 라면을 집어 입에 넣었다. 그는 천천히 씹어 삼킨 뒤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여전한 맛이네. 진짜 맛있어.”그 말
“그럼 아니야?”임슬기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이 남자는 도대체 어떻게 이토록 뻔뻔하게 말할 수 있는 걸까?“내가 혼수상태일 때 연다인을 몰래 도시 밖으로 빼돌려서 숨겼잖아. 내가 복수할까 봐, 그 여자 죽일까 봐 무서웠던 거 아냐?”배정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난 그런 짓 안 했어.”“안 했다고? 하, 누가 그 말을 믿겠어.”임슬기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직접 말했잖아. 연다인 죽게 내버려두지 않겠다고.”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건 분명 배정우가 한 짓이었다. 연다인을 저
두 사람 모두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대로 얼어붙었다.정신을 먼저 차린 건 임슬기였다. 그녀는 김현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다급히 물었다.“현정아, 너 아직 다 나은 것도 아닌데 이런 힘쓰는 짓 하면 어떡해?”“슬기 언니, 나 진짜 괜찮아요.”김현정의 말투는 금세 부드러워졌다.“근데 언니는 괜찮아요? 그 자식이 또 무슨 짓 한 거 아니에요?”임슬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자세한 건 안에서 이야기하자. 우선 네 손 좀 보자.”“진짜 괜찮다니까요. 그냥 좀 탈골됐던 거 의사 선생님이 맞춰줬어요. 봐봐요, 지금은 아무렇지도
“두 분이신가요?”한 남자가 술잔을 들고 임슬기 옆에 앉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우리랑 같이 한잔할래요?”그 말이 끝나자 다른 남자도 옆에 자리를 잡았다.임슬기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던 찰나, 김현정이 먼저 나섰다.“좋죠. 근데 저 술 좀 센데 괜찮으시겠어요?”“괜찮습니다. 두 분 술은 제가 쏘겠습니다. 마시고 싶은 거 마음껏 시키세요.”김현정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좋아요, 위스키로 열 잔 주세요.”얼마 지나지 않아 종업원이 열 잔의 위스키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게임 하나 하죠. 진
임슬기는 근처 공원에서 김현정을 찾았다.차가운 밤바람 속 한 가냘픈 그림자가 그네에 앉아 천천히 몸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예전에 날씨가 좋을 때면 자주 함께 산책하던 곳이었다.가끔은 밤이 되면 이곳에서 별을 보며 수다도 떨곤 했었다. 어느새 이곳은 두 사람만의 비밀 아지트가 되어 있었다.임슬기는 두 개의 목발에 몸을 의지한 채 김현정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오랜만에 오래 걸어서인지 금세 기운이 빠진 임슬기는 인근 난간에 몸을 기대어 잠시 숨을 고른 뒤 김현정을 불렀다.“현정아.”김현정은 임슬기를 보자마자 일어나 그녀의
육문주는 문을 열어젖히며 다시 한번 말했다.“현정 씨, 그 아이 우리 아이에요.”김현정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녀는 뒤로 물러서며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말도 안 돼요! 거짓말하지 마요,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그날 밤 육문주는 분명 다른 여자와 있었는데, 어떻게 이 아이가 그의 아이일 수 있단 말인가?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임슬기 역시 얼어붙었다. 그녀는 육문주가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진실이 이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했지만, 이건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임슬기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근데
‘다시 대학교를 다닌다고?’강재호는 그 말에 온몸이 떨렸다. 눈가엔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그의 삶은 이미 너무 엉망진창이어서 미래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공부 같은 건 진작에 잊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임슬기에게는 늘 고마웠다. 그에게 새로운 삶을 준 것도 그녀였는데, 이제는 대학교까지 보내주겠다고 하다니, 이건 그에게 너무 큰 행운이었다.하지만...그는 목이 메어 침을 삼키고는 어렵게 말했다.“아니에요, 누나. 나한테 돈 낭비할 필요 없어요. 내 인생은 어차피...”“재호야, 네
금원 아파트.임슬기는 침대 위에서 잠든 김현정을 한 번 바라본 뒤 조용히 문을 닫고 옆에 서 있던 강재호에게 말했다.“오늘 고마웠어요. 또 번거롭게 했네요.”강재호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아니에요, 임슬기 씨. 나한테 너무 그렇게까지 예의 차리지 않아도 돼요.”그는 잠시 임슬기의 다리를 보고는 다시 말했다.“오늘 그냥 내가 여기 있을까요? 임슬기 씨도 다리 불편하고, 현정 씨도 상태가 좀 안 좋아서 혼자 두긴 불안한데요.”임슬기는 순간 민망해졌다.“그건 너무 폐 끼치는 거 같아서요. 재호 씨도 아르바이트도 있고,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점심때가 지났는데도 김현정은 밥 한술 먹지 않았다. 두 손을 꽉 움켜쥐고 입술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깨물고 있었다.임슬기는 그런 김현정이 걱정되었지만, 이럴 땐 무슨 말을 하더라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그저 말없이 그녀의 곁에 있어 줄 수밖에 없었다. 김현정이 어떤 결과를 받아들이든 그녀와 함께할 작정이었다.임슬기는 가끔 생각했다.김현정은 그동안 얼마나 견디기 힘든 삶을 살았기에 겉으로는 밝고 강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이토록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건지. 밝은 얼굴로 주
다음 날 오전.김현정이 임슬기의 퇴원 절차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와 짐 정리를 시작했다.“슬기 언니, 오늘 뭐 먹고 싶은 거 정했어요?”임슬기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등갈비찜이랑 생선찜, 그리고 현정이 네가 제일 잘하는 캐러멜 푸딩 어때?”말을 마치자마자 김현정의 얼굴이 갑자기 안 좋아졌다.“왜 그래? 어디 아파?”김현정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막고 손을 저은 뒤 급하게 화장실로 뛰어가 토하기 시작했다.임슬기는 김현정이 뭘 잘못 먹은 줄 알고 당황해했다.“현정아, 배가 아파? 얼른 의사 부를게.”그녀가 나가
“나 연다인이랑 아무 일도 없었어. 제발 믿어줘.”배정우의 목소리는 어쩐지 간절하기까지 했다. 마치 사랑에 지쳐 무너진 사람처럼.그가 오히려 더 처절해 보였다.임슬기는 배정우를 밀쳐내며 차갑게 말했다.“언제까지 연기할 건데? 술 마시고는 화해하자고 찾아오고, 정신 차리면 연다인 침대에 누워서 날 죽이고 싶다 그러고... 배정우, 난 네가 이해가 안 가. 그리고 더는 알고 싶지도 않아. 제발 날 놔줘.”“왜 날 안 믿는 건데?”배정우는 상반신을 겨우 일으킨 채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깊고 어두운 눈빛은 끝을 알
반달이 지난 뒤 임슬기는 여전히 제대로 걷지는 못했지만, 의사에게서 이틀 뒤면 퇴원이 가능하다는 허락을 받았다.“너무 잘 됐어요! 드디어 퇴원할 수 있다니! 뭐 드시고 싶어요? 내가 다 준비할게요! 이건 꼭 축하해야죠.”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현정아, 너 먹방 유튜버나 해볼래? 그럼 돈 좀 벌 수도 있겠다.”“진짜요? 근데 난 언니한테 해주는 게 제일 좋아요.”김현정은 그렇게 말하며 임슬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말았다.“언니, 우리 그냥 앞으로 같이 살래요? 내가 언니 먹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