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92화. 잘못된 복원서연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황금빛이 피어올랐다.절대안. 순간 그녀가 보는 세상의 색이 사라졌다.샹들리에도, 사람들도, 무대 위 최민준도 모두 검고 하얗게 변했다.백자의 색만은 분명히 보였다. 수많은 검붉은 기운이 깨진 틈 사이로 파고들어 백자를 억지로 휘감고 있었다.그리고 검붉은 기운 아래, 백자의 가장 깊은 곳에는 희미한 백색의 기운이 웅크리고 있었다.“지금 말하는 거…… 저 아이 아니에요.”단이 서연을 똑바로 바라봤다.“무슨 말이지?”“백자에 다른 게 붙어 있어요.”서연이 검붉은 기운을 노려봤다.“누군가 원혼을 억지로 붙여서 백자가 단 씨를 원망하는 것처럼 만들었어요.”순간 단의 눈빛이 변했다. 그와 동시에 백자를 감싸고 있던 검붉은 기운이 크게 출렁였다.“닥쳐!”목소리가 서연을 향했다.쾅!장식장이 요동쳤다.서연은 움찔하면서도 단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진짜 백자는 단 씨를 원망하지 않아요.”“닥쳐!”검붉은 기운이 백자를 집어삼키듯 휘몰아쳤지만, 그보다 백색의 기운이 먼저 그녀를 감쌌다.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뜨거운 가마, 푸르게 타오르는 불꽃.물레 앞에서 자신을 빚던 단의 얼굴.흙투성이가 된 손으로 백자의 표면을 몇 번이고 다듬으며 만족스럽게 웃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하늘에서 쏟아지는 눈부신 빛과 무너지는 가마 속에서, 단이 도자기들을 위해 몸을 던지고 있었다.백자가 품고 있던 마지막 기억이었다.‘……주인님.’서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끝까지 버티고 싶었는데…….’‘예쁘게 구워져서 주인님께 보여드리고 싶었어요.’서연의 가슴이 순간 먹먹해졌다.백자는 단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깨져버린 것을 미안해하고 있었다.서연은 단의 손을 꽉 쥐었다.“단 씨가 그랬잖아요. 마음을 다해 빚었다고. 이 아이도 알아요. 단 씨가 얼마나 아끼고 정성을 쏟았는지.”미세하게 떨리는 단의 손을 한 번 더 꼭 쥐어준 서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이번엔 제가
91화. 깨진 것들의 목소리자신이 빚은 그릇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의 선택이 그의 삶을 영원히 바꾸었다.쨍그랑, 쨍그랑, 쨍그랑!그가 수없이 밤을 새워 빚어낸 백자들이 눈앞에서 산산이 부서졌다.그리고 그날 산산이 부서진 것은 백자들만이 아니었다.단 역시 그날 함께 부서졌다.다만 백자와 달리 죽지도 못한 채, 부서지고 다시 이어지기를 천 년 동안 반복했을 뿐이었다.천 년 전 흙바닥을 뒤덮었던 하얀 파편과 눈앞의 백자가 겹쳐졌다.‘다시 만났구나.’단의 눈빛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그날…… 내가 지키지 못했던 아이 중 하나.’최민준의 목소리가 조용해진 경매장에 울려 퍼졌다.“여러분은 지금, 천 년 전 한 도공이 평생을 걸고 만들고자 했던 꿈의 흔적을 보고 계십니다.”단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백자에서 최민준에게로…… 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식었다.최민준은 그런 단을 똑바로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천 년 동안 차가운 흙 속에 묻혀 있었을 자신의 그릇이 흉측하게 꿰매진 채 사람들의 눈요깃거리로 전시되어 있었다.“모두가 비취색 청자에 취해 있던 시대, 홀로 순백의 미래를 내다본 천재가 있었습니다. 역사의 흐름을 거스른 도공, 그리고 그가 남긴 하얀 기적.”사람들의 눈에 욕망이 번졌다.희귀한 것, 남들이 가질 수 없는 것. 그들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최민준이 천천히 단을 바라봤다.“그런데 말입니다. 아무리 귀한 물건이라도 그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면 의미가 없겠지요.”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대한민국 최고의 감정사이신 이단 대표님께서 직접 감정해 주시겠습니까?”스포트라이트가 단에게 쏟아지고, 수많은 눈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오만하고 무심한 이단 대표지만, 서연은 굳어버린 그의 손끝을 보고 있었다.‘단 씨가…… 흔들리고 있어.’그때였다.끼이이익!유리를 날카롭게 긁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백자의 갈라진 틈 사이에서 검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검은 연기처럼 백자의 표면을
90화. 백자고려 시대의 불화, 왕실에서 사용했다는 비녀, 이름난 화가의 그림까지.수십억이라는 숫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오갔고, 물건이 바뀔 때마다 누군가는 환호하고 누군가는 이를 악물었다.그렇게 한동안 경매가 이어지던 순간.탁.무대의 모든 조명이 꺼졌다.갑작스러운 어둠에 사람들의 웃음과 대화가 오가던 홀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잠시 후 서늘하고 푸르스름한 빛 하나가 무대 중앙에 떨어지자 분위기가 달라졌다.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팔을 쓸어내렸다. 실제로 온도가 내려간 것도 아닌데 피부 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어둠 속에서 최민준이 천천히 마이크를 들었다.“여러분, 오늘의 경매 물품들은 마음에 드셨습니까?”여유로운 목소리였지만 조금 전과는 달랐다.미묘한 흥분.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기대감이 그 목소리에 섞여 있었다.“이번에는 제가 아주 어렵게 구한 물건을 하나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드드드득.무거운 기계음과 함께 무대 바닥이 갈라지고, 아래에서 거대한 유리 장식장이 천천히 올라왔다.푸르스름한 조명이 장식장 위로 떨어졌다.그리고 그 안에 든 물건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단이 입술로 가져가던 샴페인 잔이 허공에 그대로 멎었다.“뭐야, 저게?”“백자?”“깨진 거 아니야?”곳곳에서 실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조금 전까지 수십억을 호가하는 화려한 문화재들을 보았던 사람들에게는 초라해 보일 만도 했다.본래는 눈부시게 하얀 백자였을 것이다.고운 흙으로 빚어진 매끈한 표면과 유려하게 이어지는 곡선은 한 번 깨어졌다가 다시 억지로 하나가 되어 있었다.깨진 틈마다 황금빛 선이 이어져 있어 사람들의 눈에는 고급스러운 복원 기법으로 되살려낸 아름다운 골동품처럼 보였지만, 서연에게는 달랐다.‘……뭐야, 저거.’하얀 백자의 틈 사이로 검붉은 기운이 질척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마치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오는 것처럼…….서연의 표정이 굳었다.질투와 분노, 원망과 증오, 여러 감정이 썩어 문드러진 것처럼 뒤엉켜 있었다.
89화. 경매“귀한 발걸음을 해주신 VIP 여러분, 환영합니다. 오늘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특별한 물건들을 준비했습니다.”최민준의 시선이 천천히 홀을 훑다가 정확히 단과 서연이 앉은 곳에서 멈췄다.찰나였지만 서연은 분명히 보았다. 웃고 있던 최민준의 눈빛이 아주 잠깐 차갑게 식는 것을.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완벽한 미소가 돌아왔다.“특히 오늘은 대한민국 최고의 감정사, 단 앤티크의 이단 대표님께서 자리를 빛내주셨습니다.”순간 수십 쌍의 눈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쏠렸다. 호기심과 질투, 경계와 탐욕이 뒤섞인 끈적한 시선들이 따라붙었으나 단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다리를 느긋하게 꼰 채 최민준을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최민준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비틀렸다.“그럼 시작하겠습니다.”웅장한 음악과 함께 무대 중앙의 리프트가 천천히 올라왔다.[Lot No. 01. 통일신라 금동불상]붉은 벨벳 위에 화려한 금빛 불상이 모습을 드러내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며 제작된 것으로, 소유한 자에게 무한한 부와 명예를 가져다준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시작가는 15억입니다.”“20억!”“25억!”번호판이 올라갈 때마다 가격은 무서운 속도로 치솟았다.“32억!”“40억!”경매사가 좌중을 천천히 훑었다.“40억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잠시 침묵이 흘렀다.탕! “40억, 낙찰입니다.”서연은 금동불상을 바라보다 단에게 살짝 몸을 기울였다.“단 씨, 저거 진짜예요? 기운이 좀 이상한데.”단이 불상을 한 번 훑어보고는 코웃음을 쳤다.“진품은 맞아. 본래 절에서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던 물건이라 기운도 맑고 영험했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주 지독하게 탔군.”“때요?”“탐욕과 공포. 도굴꾼과 저 물건을 사고팔았던 사람들에게서 묻어 나온 것들 말이다.”단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저 안에 담겨 있던 진짜 염원은 오래전에 떠났다. 집에 들였다가는 도둑이나 불러들이겠지.”
88화. 진입“…….”긴장감이 한순간에 깨졌다. 루나가 피식 웃었고, 은랑은 어이없다는 듯 서연을 바라보았다.“주인님, 지금 그게 중요해요?”서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중요하죠. 목숨 걸고 하는 출장인데.”“그건 그렇지! 우리 주인님이 얼마나 소중한데! 역시 우리 연은 참 똑 부러진다니까.”은랑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바로 태세를 바꿔 서연을 치켜세웠다.루나가 기가 막힌다는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둘이 아주 잘 만났다.”단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원하는 만큼 주지.”서연이 눈을 반짝이며 엄지까지 치켜세웠다.“정말요? 역시 우리 고용주님. 너무 멋지십니다.”조금 전까지의 긴장은 어디로 갔는지 서연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단의 눈빛도 부드러워졌다.두려워하지 않는 척하는 것인지, 정말 두렵지 않은 것인지. 그건 알 수 없었다.단은 다시 한번 다짐했다. 적어도 그녀를 혼자 두려움에 떨게 두지는 않을 것이라고.며칠 후 경매 당일, MJ 갤러리 지하 5층.엘리베이터가 지하 깊숙한 곳으로 미끄러져 내려갈수록 귀가 먹먹해졌다. 숫자가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세상과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마치 이승에서 저승으로, 인간의 세상에서 탐욕에 굶주린 귀신들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처럼.띵.맑은 벨 소리와 함께 육중한 강철 문이 좌우로 갈라졌다.순간 묵직한 공기가 훅 끼쳐왔다. 고급 호텔 로비를 연상시키는 우디 계열의 디퓨저 향이 은은하게 퍼져 있었지만, 그 향기조차 이곳에 모인 자들이 뿜어내는 비릿한 욕망까지 가리지는 못했다.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얕게 들이마셨다.“어서 오십시오, 이단 대표님. 그리고…… 부인.”입구에 서 있던 지배인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서연의 걸음이 순간 삐끗했다.‘부, 부인?’정정하려 입을 열기도 전에 단의 팔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왔다.“가지.”“아니, 잠깐만요. 왜 정정을 안 하는데요?”단은 서연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허리를 감싼 팔에
87화. 노력은“경매에 나오는 물건들을 최대한 많이 봐둬. 겉모습에 속지 말고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어디서 왔는지, 놈이 무슨 짓을 해놓았는지 확인해.”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기억해 둘게요.”“아니.”단의 눈빛이 깊어졌다.“전부 기억하려고 무리하지 마.”“…….”“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바로 물러나. 그리고 그 자리에서 가능하면 정화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군.”단이 잠시 서연을 바라보다 입꼬리를 비틀었다.“물론 나의 구원자께서 내 말을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서연이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그동안 하지 말라는 일을 몇 번이나 했는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노력은 해볼게요.”“노력?”단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살짝 올라갔다.그다지 믿음직한 대답은 아니었기에 단이 한숨을 내쉬었다.“네 정화 능력을 놈이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보여줄 필요는 없지.”서연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단은 혹시라도 서연이 또 무모하게 나설까 걱정스러운 듯 다시 한번 강조했다.“절대 혼자 움직이지 마.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나한테 말하고.”“알았어요.”“위험하다 싶으면 결계를 쳐. 누구도 너를 상처 입히지 못하게.”“네.”“그리고 정화는 가능하면…….”“알았다니까요.”서연이 결국 눈을 흘겼다.“저도 이제 그렇게 무모하지 않아요.”단과 루나, 은랑, 서단의 시선이 동시에 서연에게 향했다.“……왜요?”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이번에는 서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왜요? 뭐예요, 그 눈빛들은?”루나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아무것도 아니야.”“언니까지 왜 그래요!”“회의나 계속하자.”단은 슬쩍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감추며 다시 지도를 가리켰다.“나와 서연이 경매장 내부를 살피는 동안 서단은 밖에서 우리가 보내는 정보를 받아 기록한다.”“네.”서단이 지도를 확대했다.“경매장 안에서 통신이 막힐 가능성도 있으니까 별도의 통신망을 하나 만들어둘게요. 완전히 차단되더라도 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