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천시의 야시장은 번화했고 길거리 음식점은 끝이 없을 정도로 늘어서 있었다.온다연은 거리를 끝에서 끝까지 다니며 배가 더 크지 않은 자신을 원망했다.며칠 전부터 먹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참아왔던 음식들을 모두 맛보았더니 마지막에는 배가 불러 거의 걸을 힘조차 없었다.그러다 밀크티 가게를 지나치자 그녀는 참지 못하고 또 들어갔다.그런데 길가에 서 있던 남자 대학생이 얼굴을 붉히며 카카오톡을 물어보자 온다연은 순간 얼어붙었다.그녀의 시선은 본능처럼 유강후를 향했다.그는 곁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온다연은 입술을 꽉 깨물며 자신이 점점 그에게 휘둘리는 병에 걸린 건 아닐까 하고 걱정스러워했다.그러나 남자 대학생도 나름 잘생겼다는 생각이 스치자 오히려 마음을 다잡고 카카오톡을 받아주었다.남자 대학생은 날아갈 듯 기뻐했지만 유강후는 얼굴을 굳힌 채 돌아서 걸어가 버렸다.온다연은 허둥지둥 포장된 밀크티 두 잔을 들고 뒤따라 달렸다.하지만 유강후는 키가 크고 걸음이 빨라 아무리 뛰어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고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에 초조해진 온다연은 더 속도를 냈다.그러나 헐렁한 슬리퍼는 미끄럽고 발에 잘 맞지 않아 달리던 중 돌을 밟고 발목을 삐끗하며 땅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다.밀크티는 바닥에 나뒹굴며 전부 쏟아졌고 무릎에서는 피가 흘렀다.그녀는 바닥에 번진 음료와 쓰라린 상처를 보자 억울함이 북받쳐 눈가가 금세 빨개졌다.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 일어나기조차 싫었다.뒤늦게 발걸음 소리를 느낀 유강후가 돌아보자 그곳에는 마치 버려진 강아지처럼 불쌍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온다연이 있었다.화가 가득 차 있던 마음이 순간 움찔했고 그는 급히 앞으로 달려왔다.“무슨 일이야?”온다연은 무릎을 가리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넘어져서 피 났어요. 아저씨가 너무 빨리 가잖아요. 게다가 그 신발은 미끄럽고...”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피가 나고... 너무 아파요...”유강후는 그녀의 무릎에서 피가 배어
“이런 질문을 하게 됐으니 잘 됐어. 이번에 이 문제도 해결하자.”“유씨 가문의 재산은 너는 조금도 받을 자격 없어. 앞으로는 제발 진짜 부모에게 돌아가. 네 아버지가 너를 지켜주겠다면 같이 돌아가라고 해. 먼저 유하령을 경원시 유씨 가문으로 보내고 유자성과 내 아버지의 머리카락으로 DNA 검사를 한 번 하겠어. 그래야 모두가 인정하지.”유하령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무슨 뜻이에요?”유강후는 그녀와 한 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고 온다연의 손을 잡고 그대로 걸어 나갔다.온다연은 사실 유하령을 단지 혼내주려던 것뿐인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호기심에 물었다.“아저씨, 아까 말씀하신 게 언니가 유씨 가문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뜻이에요?”유강후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얼굴 안 아파? 이런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쓸 필요 없어.”온다연이 팔을 흔들며 말했다.“궁금해서요.”유강후가 “응.” 하고 간단하게 대답했다.“유자성은 내 아버지가 입양한 아이야. 자기 자식도 제대로 키우지 못한 사람이 유씨 가문 재산을 이어받을 능력이 없지. 그러니까 그 가족은 제자리를 찾아가야 해.”온다연은 입을 크게 벌리고 놀랐다.한참 뒤에야 말했다.“그런데 아저씨 아버지께서 당신 편에 서실까요?”유강후가 살짝 코웃음을 쳤다.“나는 아버지의 친아들이야. 예전에는 일부러 아버지를 압박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해. 이 또한 유씨 가문을 위한 거야.”그가 온다연의 손을 잡았다.“이런 불길한 이야기는 그만하자. 분위기가 완전히 망쳤네. 밖에 나가서 좀 걸을까?”문을 나서자 맞은편에 길게 늘어진 보행자 거리가 있었다.이때 모든 길거리 음식과 노점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온다연은 연기 나는 길거리 음식을 보자 아까는 전혀 배가 안 찼던 것처럼 느껴졌다.길거리 입구로 들어서자 한 신발 가게가 보였고 가게 안에는 온갖 예쁜 슬리퍼가 가득했다.온다연은 분홍색 깃털이 박힌 슬리퍼를 보자마자 발걸음을 멈췄다.유강후가 허락했는지 안 했
유하령은 더 이상 감히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속으로는 몹시 원망스러웠지만 유강후 앞에서는 감히 함부로 굴 수 없었다.그동안 유하령은 유강후에게서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에 그녀는 모든 원한을 온다연에게로 돌렸다.유하령은 매우 사악한 눈빛으로 온다연을 노려보았지만 온다연은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눈을 부릅떴다.“언니, 저 때리려는 거예요? 눈빛이 마치 날 죽이려는 것 같아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가 차갑게 말했다.“꺼져.”유하령은 화가 치밀어 올랐고 몸을 돌려 달아났다.온다연은 그녀가 화난 채 달아나는 뒷모습을 보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잠깐 화장실 다녀올게요.”화장실 문 앞에서 잠시 기다리자 유하령이 다시 나타났다.눈빛은 마치 온다연을 잡아먹으려는 듯 사악했다.“온다연, 너 이 나쁜 년아. 네가 아니었으면 작은아빠는 우리 가문과 틀어지지 않았을 거야. 너 언젠간 작은아빠를 망치고 말 거야. 지금 당장 경원시에서 꺼져. 안 그러면 분명 누가 너 죽일 거야.”온다연은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유하령, 난 너를 몇 번 본 적 없지만 너 나쁜 사람인 거 알아. 듣자 하니 중학교 때 다른 학교에서도 친구들을 자주 괴롭혔다고 하더라. 너 같은 사람은 아프리카에 가 있어야만 제대로 살아.”유하령은 격분했다.“그건 네가 작은아빠 앞에서 내 험담을 했기 때문에 작은아빠가 나한테 그렇게 한 거야.”온다연이 살짝 웃으며 그녀 앞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 알았어? 언니 정말 똑똑하네. 하지만 이렇게 똑똑해도 결국 아프리카로 가야 할 거야.”유하령은 이런 도발을 참지 못하고 화가 치밀어 손을 들어 때리려 했지만 온다연이 그녀의 손을 잡고 힘껏 뒤로 밀쳤다.“지난번에 나 때린 벌 아직 충분히 받지 않았어?”그때 밖에서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듣자마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온다연이 살짝 웃었다.“유하령, 네가 날 죽이겠다고 했지만 난 지금 당장 널 죽이고 싶어. 남 괴롭히는 것밖에 모르는 너 같은 사람은 이런
유강후가 자신에게 따지겠다는 말을 하자 온다연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물었다.“어떻게 나한테 책임을 묻겠다는 거예요?”유강후는 시선을 내리깔고 냉랭하게 그녀를 훑었다.“아직 정하진 않았어. 네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온다연은 입술을 꼭 깨물며 더는 말하지 않았다.그가 자신을 내쫓지 않는다면 어떤 벌이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그때 차가 갑자기 크게 흔들리며 덜컥거리자 온다연은 균형을 잃고 그대로 유강후의 품에 쓰러졌다.더구나 손까지 하필이면 그의 민망한 자리를 정확히 짚고 말았다.순간 차 안 공기가 얼어붙었다.온다연은 눈이 휘둥그레져 어찌할 바를 몰랐고 심지어 두어 번 미묘하게 뛰는 듯한 감각까지 전해졌다.‘아! 나 어떡해.’한 박자 늦게 손을 홱 빼내며 얼굴이 활활 달아올랐다.“죄...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유강후의 표정은 살벌하게 굳어 있었다.“운전 똑바로 안 해? 또 이따위로 흔들리면 당장 그만둬.”운전기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연신 사과할 뿐이었다.이후 차 안은 무겁고 어색한 침묵에 잠겼다.온다연은 얼굴을 가리고 싶을 정도로 창피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길이 막혀 한참을 갇힌 듯 답답한 시간이 흐른 뒤 목적지에 도착했다.하필이면 그곳은 그녀가 평소 자주 지나던 동네 원룸 근처의 유명한 음식점이었다.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녀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도망치듯 뛰어내렸다.마침 입구에 있던 경호원이 그녀의 고양이를 품에 안고 다가왔다.“온다연 씨의 고양이도 데려왔어요.”온다연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며칠간 정신이 없어서 사랑하는 고양이를 생각조차 못 했다는 사실이 너무 미안했다.고양이를 품에 안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이제 경원시에 돌아가면 너랑 구월이는 같이 지낼 거야. 구월이는 언니니까 잘 챙겨주고 사이좋게 지내야 해.”유강후는 고양이를 흘깃 보고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둘을 네가 감당할 수 있겠어?”온다연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유강후는 여전히 바빴다.오후가 되자 호텔 옥상에서는 작은 헬리콥터들이 끊임없이 이착륙했고 호텔 전체가 마치 특별히 통제된 공간처럼 보였다.로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프런트 직원들과 소수의 근무 인원을 제외하면 모두가 유강후를 만나러 온 사람들이었다.경원시에 있을 때 온다연은 그의 회사를 거의 방문한 적이 없었고 전통 한옥에는 감히 누가 찾아올 수도 없었다.그래서 유강후가 권세를 가졌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지는 알지 못했다.하지만 이곳에 온 지 불과 이틀 만에 온다연은 이제야 깨달았다.그는 정말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그를 만나길 원했고 모든 것이 그를 중심으로 움직였다.유강후는 점심조차 함께 먹지 못했고 그저 현지의 특별 요리 몇 가지를 시켜 그녀에게 보내줄 뿐이었다.해가 기울 무렵 드디어 옆 회의실에서 유강후가 나왔다.로비 소파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던 온다연은 그가 들어서는 순간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광택 없는 검은색 슈트를 입은 그의 온몸에서는 기품이 흘러넘쳤다.유강후는 단정하고 차갑고 철저히 공식적인 분위기였다.그 시선을 느낀 그는 짧게 말했다.“조금 뒤에 네가 가고 싶다던 식당에 가자.”그러고는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잠시 후 한결 편안한 분위기의 연한 색 정장을 입고 나왔다.분명 이곳 사람들과 비슷한 차림인데도 그에게서 풍기는 오랜 지위의 기운은 감춰지지 않았다.평범한 옷차림조차 그의 몸에 걸치면 곧 상징적인 권위로 변해버렸다.저녁 공기가 무더운 이곳에서 온다연은 간단히 티셔츠와 반바지로 갈아입었다.집 앞에 나가려고 슬리퍼를 신으려는 순간, 유강후가 그녀를 붙잡았다.“슬리퍼 신고 밖을 나가면 단정하게 보이지 않아.”온다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여기선 다 이렇게 입고 다녀요. 아저씨도 한번 해보실래요?”그러나 유강후는 그녀의 발끝 분홍빛 둥근 발가락이 드러난 걸 보자 곧 인상을 찌푸렸다.“신발 제대로 신어. 밖에서 슬리퍼 끄는 버릇은 들이지 마.”며칠 동안 슬
온다연은 믿을 수가 없었다.자신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유강후 같은 사람이 그런 행동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그는 너무 높고 찬란해서 감히 누구도 쉽게 닿을 수 없는 존재였다.그와 함께한 세월 동안 온다연은 수없이 많은 여인이 그를 향해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모습을 보아왔다.그 여자들은 하나같이 명문가 출신에 뛰어난 미모와 지위를 갖춘 이들이었지만 유강후는 언제나 냉혹하게 굴었다. 마치 사랑 따윈 모르는 차가운 기계처럼 어떤 감정에도 응답하지 않았다.가끔 철없는 이들이 억지를 부리면 끝은 더욱 참혹했다.예전에 한 집안의 아가씨가 전통 한옥까지 찾아와 매일 대문 앞에 서서 그를 보겠다고 버틴 적이 있었다.온다연은 그때 유강후가 어떻게 할지 궁금했다.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 아가씨는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빼앗기고 아프리카로 쫓겨나 다시는 귀국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그 과정에 유강후가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맛보았을 절망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본래부터 그는 특별히 매혹적인 사람이었다. 압도적인 아우라는 차치하더라도 준수한 외모만으로도 사람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그러니 온다연이 유강후를 좋아하게 된 것이 이상할 리 없었다.온다연은 늘 속으로 은근히 자부했다. 사랑을 얻지 못하더라도‘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평생 그의 곁에 머물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그날 밤 제정신이 아니었던 내가 그런 짓을 저질러 버릴 줄이야.’지금은 차라리 자신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고 있었다.온다연은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한 채 대낮에도 유강후가 자신에게 먼저 키스한다는 망상을 꾸었고 생각할수록 가슴이 조여 오며 답답함을 느꼈다.온다연은 소파에 웅크려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잠시 뒤 집사가 문을 두드렸다.“온다연 씨, 아침 식사 준비되었습니다.”그녀는 하는 수 없이 옷을 갈아입고 나와 식탁에 앉았지만 그곳에 유강후는 없었다.그 순간 온다연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지금은 그와 마주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