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후는 그녀를 목 졸라 죽이고 싶었다. 감히 그에게 싫다는 말을 한 것은 그녀가 처음이다. 하지만 그녀는 목이 너무 가늘어서 조르면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그는 눈을 감고 몇 번 심호흡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화가 많이 가라앉았다.“내가 요리를 자주 하지 않지만 솜씨가 그리 나쁘지는 않아. 장 집사가 오지 않았으니 아쉬운 대로 먹어.”나지막이 이 말을 내뱉은 후, 그는 재빨리 주방으로 갔다.이 셋집은 하도 작아 주방이 1평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오래된 집이라 구조도 좋지 않았다. 키가 큰 유강후는 좁은 주방에서 마음대로 움직이기도 힘들었다.다행히 며칠 전에 사람을 불러서 주방을 리모델링했기에 주방 기구들은 그런대로 쓰기 편했고, 냉장고에도 식자재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잠시 후, 간단한 떡국과 만두가 완성됐다. 하지만 온다연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유강후는 그녀를 침대에서 안아 일으킨 후 식탁 의자에 앉혔다.“먹어봐.”온다연은 정말 배가 고팠고 유강후가 만든 음식이 꽤 맛있어 보여 참지 못하고 조금 먹었다.음식이 들어가니 몸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면서 위도 따뜻해져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절반쯤 먹었을 때, 온다연은 갑자기 고개를 들고 유강후를 쳐다보았다.“아저씨, 저를 좋아해요?”묻고 나서 그녀 자신도 깜짝 놀랐다.유강후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이내 스스로 부정했다.유강후 같은 사람은 감정이 없다. 있다고 해도 별로 요긴하지 않은 장난감에게 나눠주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아저씨, 아이를 갖고 싶으세요?”유강후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오늘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장화연한테서 그녀가 오늘 구월이를 찾으러 내려갔을 뿐,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난 적은 없다고 들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그녀가 또 유하령을 만난 줄 알 뻔했다.하지만 이러는 것을 보면 또 무슨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듣고 심리적 부담이 커진 게 분명하다.그는 꼼짝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다연아
하지만 저녁에 돌아오니 그녀는 완전히 딴사람으로 바뀌었고, 공격적인 길고양이가 되어버렸다.그뿐이 아니라 그녀는 말로 그를 자극하기도 했다. 정말 간이 배 밖에 나왔다.온다연은 그의 표정이 점점 차가워지는 것을 보면서 머리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입구 방향을 보면서 도망치려고 했다.하지만 그녀가 겨우 두 걸음 옮겼을 때 유강후가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은 후,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고정해 자기를 똑바로 쳐다보게 했다.이를 악문 그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온다연, 너는 내 곁에서 도망치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해?”그는 원래도 힘이 센데 지금 거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상태라, 온다연의 허리와 턱이 곧 부러질 것 같았다.그녀는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올 정도로 아팠지만 입술만 달싹일 뿐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유강후는 이 어린 계집애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말랑말랑한 입술을 깨물었다.깜짝 놀란 온다연은 악을 쓰며 그를 물었다.유강후는 아파서 움찔하더니 그녀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평소에는 이러면 온다연이 보통 말을 들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물었고 심지어 그를 발로 걷어찼다.그녀는 거의 혼신의 힘을 다해 그를 물었고, 걷어차는 힘도 매우 셌다.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그녀를 안고 침실로 갔다.온다연은 급해서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었다.“또 나한테 그 짓을 하려고요?”“유강후, 또 그러면 당신을 죽여 버릴 거예요.”그녀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세게 유강후의 어깨를 물었다.유강후도 잔뜩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그는 머릿속에 말을 듣지 않는 이 계집애를 반드시 길들여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안고 성큼성큼 침실로 들어갔다.온다연은 곧바로 침대에 내던져졌고, 그의 우람한 몸뚱이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그녀
유강후는 동공이 움츠러들더니 가슴이 심하게 떨려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내려놔.”온다연은 더 깊이 찔렀고,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유강후는 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왔고, 가위를 빼앗으려고 손을 뻗었다.그러자 온다연이 뒤로 물러서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오지 말아요.”그녀는 말하면서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유강후는 칼날의 일부분이 이미 피부에 파고 들어간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가까이 오면 죽어버릴 거예요.”사실 유강후가 그녀의 생사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직접 손을 쓰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하지만 유강후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다루기 쉬웠다. 그는 손을 허공에 멈춘 채 가위를 노려보고 있었다.“내려놔.”온다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저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내려놓을게요.”칼끝에 고인 피가 하얀 목덜미를 타고 아래로 흘러 옷깃을 적셨다.유강후는 놀란 나머지 숨까지 가빠졌다.“알았어. 건드리지 않을게. 내려놔.”온다연은 그를 믿지 않았다.“맹세해요. 앞으로 한동안 저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맹세해요.”유강후는 그녀의 상처 위치를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그는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협박을 당한 적이 없었다. 그 첫 협박을 그녀에게 당할 줄은 몰랐다.유강후는 그녀가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칼날이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꿰뚫을까 봐 겁나서 칼끝을 주시했다.“알았어. 맹세할게. 그러니까 내려놔.”온다연은 여전히 가위를 꽉 잡고 있었다.“따라 해요. 나 유강후는 앞으로 3개월 동안 온다연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맹세한다.”유강후는 주먹을 불끈 쥐었고 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왔다.하지만 단 1초의 망설임에 온다연은 또다시 흥분했다.“말해요!”칼날이 조금 더 깊이 들어간 듯 피가 더 빨리 흘렀다.유강후는 가슴이 벌렁거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나 유강후는 3개월 안에...”그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갑자기 온다연의 손에서 가위를 낚아채서 바닥에 던졌다.“너 미쳤어?”무기를 잃은 온다연은 조급하고 화가 나서
그녀가 이렇게까지 성질을 부리는 이유를 모르는 유강후는 화가 나서 손을 떨며 이를 악물었다.“온다연, 너 왜 이러는지 설명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 내가 널 용서 못 해.”온다연은 여전히 눈앞이 캄캄하고 머릿속이 윙윙거렸다.“병원에 안 가요. 저를 병원에 데리고 가면 병원 창문에서 뛰어내릴 거예요.”“저는 한다면 해요.”유강후는 멈칫하더니 더욱 화가 치밀어올랐다.“다연아, 너 아침까지도 멀쩡했잖아.”온다연은 감정이 격해져 언성을 높였다.“몰라요. 어쨌든 저는 병원에 안 가요. 저를 병원에 데려가면 창문에서 뛰어내릴 거예요. 안 간다고요.”이때 앞에서 잠자코 있던 이권이 입을 열었다.“온다연 씨, 아프면 병원에 가야죠. 셋째 도련님이 다연 씨를 찾으려고 영원시를 발칵 뒤집은 걸 모르죠? 날씨가 추우니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하셨어요.”“혼자 뛰쳐나가지 말아야 했어요.”온다연은 감정이 격해져서 소리쳤다.“닥쳐요. 누가 찾으래요? 이 사람은 항상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모든 걸 마음대로 결정해요. 병원 가는 것도 그렇고 약을 먹는 것도 그래요. 심지어 저를 가둬 놓고 외출하지 못하게 하죠. 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그리고 이권 씨도 공범이에요.”“당신들은 모두 한통속이에요.”이권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셋째 도련님은 다연 씨를 위해서...”“닥치고 운전이나 해.”유강후가 차갑게 이권의 말을 잘랐다.그는 온다연의 등을 다독이며 분노를 억누르려고 애썼다.“병원에 안 가도 돼. 그런데 주 선생님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보시라고 해.”온다연은 이 정도면 유강후가 양보한 것임을 알고 있다.유강후의 성격으로 볼 때, 그녀가 계속 고집을 부리면 억지로 병원에 데려갈 수도 있다.주성원이 단독으로 진료하면 일말의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약간 차분해진 그녀는 또 침묵을 지켰다.차 안의 분위기는 숨 막혔다. 전통 한옥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온다연의 손이 묶여 있
한의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온다연이 실토했다.“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알아요. 선생님, 저 임신했어요.”주성원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워했다.“지금 몸 상태로 아이를 낳으면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요.”온다연이 넋이 나간 듯 조용히 말했다.“하지만 저는 낳고 싶어요.”주성원은 깜짝 놀랐다.“안 돼요.”온다연이 나지막이 말했다.“주 선생님, 저도 어렵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이것이 제 인생에서 엄마가 될 유일한 기회일지도 몰라요. 저는 이 세상에 가족이 없어요. 가족을 남기고 싶어요. 3개월만 비밀로 해주세요. 어렵지 않잖아요.”주성원은 아직 피가 흥건한 그녀의 목을 보며 눈에 동정심이 가득 담겼다.‘정말 불쌍한 여자애다. 처음 봤을 때부터 항상 상처를 입은 상태였고, 언제나 유강후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그는 이 여자애가 평생 유강후의 세력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마치 자유가 없는 새장 속의 새처럼 아름답고 화려해 보이지만 하루하루 시들어 가고 있다.그는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석 달도 못 버틸 거예요.”“최선을 다해보고 싶어요. 해보지 않으면 될지 안 될지 어떻게 알아요? 정말 인연이 없다면 포기하겠지만 아직 배 속에 있는 이상 최선을 다해 지킬 거예요.”“유강후 씨가 알게 되면 아이를 없애려 할 거예요.”온다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알아요. 그 사람은 제가 낳은 아이를 원하지 않을 거예요.”그는 나은별 같이 좋은 가문의 아가씨가 낳은 아이만이 고귀한 유씨 가문에 어울린다고 생각할 것이다.주성원이 말했다.“두 사람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는지 모르지만 저는 단지 의사일 뿐이고, 저의 사명은 사람을 구하는 거예요. 온다연 씨 말대로 하면 저는 살인하는 것이 되니 입장이 난처해져요.”그가 거절할 것을 예상했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 좋은 사람이 더 많다고 믿고 싶었다.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주성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주성원은 깜짝 놀라며 그녀를 일으키려 했다.“온다연 씨, 이러지 마세요
주성원은 저도 모르게 몸을 으스스 떨며 소녀가 걱정되어 손에 땀을 쥐었다.이건 남자친구가 아니라 살아있는 염라대왕이 아닌가.그는 몇 마디 당부한 후 처방전을 놓고 얼른 자리를 떴다.주성원이 떠난 후 온다연도 나가려고 하자 유강후가 그녀를 붙잡았다.“아프면 왜 나한테 말하지 않고 이 소란을 피워?”온다연은 뒤로 물러서며 눈을 내리깔았다.“아저씨는 제 말을 듣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잖아요. 제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해도 아저씨는 계속해요.”유강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그녀에게 특별히 강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그녀도 분명 즐겼고, 흥분될 때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하지만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약상자를 가져와 상처를 다시 처치했다.상처는 꽤 깊었는데, 조금만 더 들어갔으면 대동맥을 다쳤을 것이다.그는 가슴이 떨려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온다연,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음에 또 이러면 영원히 외출하지 못하게 할 거야.”상처를 처치한 후, 그는 온다연을 안고 욕실에 가서 목욕하게 했고, 목욕이 끝난 후 침실로 안고 갔다.이튿날 유강후는 온다연을 데리고 영원시로 돌아갔다.영원시의 사업은 투자 규모가 크고 공사가 복잡한 데다 초반 작업이 많았다.게다가 세밑이라 유강후는 매일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며 눈코 뜰 새 없이 보냈다.온다연은 최대한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보통 그가 문을 나설 때 그녀는 자고 있고, 그가 귀가했을 때 그녀는 자기 방에 숨어버렸다.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피해도 가끔 한밤중에 깨어나면 그의 품에 안겨 있을 때가 있었다.그녀의 세끼도 새우는 몇 개 먹었는지, 우유는 얼마나 마셨는지 등 시시콜콜 명백히 보고해야 했다.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온다연은 조금 살이 찐 것 같았다.얼굴에 살이 좀 오른 듯하고 턱도 둥글둥글해져 만지는 촉감이 좋았다.아침 식사가 끝난 후, 장화연이 두꺼운 패딩을 온다연에게 건넸다.“오늘 셋째 도련님네 회사에 테이프 커팅식이 있는
온다연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모르는 사람을 보듯 유강후가 천천히 쓰러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상처 부위에서 피가 공짜 수돗물처럼 뿜어져 나왔다.1초가 마치 1세기가 지난 것처럼 길었다.온다연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달려들어 그의 이름을 불렀다.“유강후!”유강후는 손을 들어 그녀를 만지려 했지만 들 수 없었다.그는 입술을 움직거렸다.“다연아, 겁먹지 마!”순간적인 과다 출혈로 그는 얼굴이 창백해졌고, 숨도 곧 넘어갈 것 같았다.그는 거의 모든 정신을 집중해 그녀에게 말했다.“뚝, 울지 마. 나 괜찮아...”온다연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미친 듯이 옷으로 그의 몸에 묻은 피를 닦았다.“피 흘리면 안 돼요. 피 흘리지 말아요.”“유강후, 피를 이렇게 많이 흘리면 안 돼요.”이때 놀란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면서 현장이 혼란에 빠졌다.경호원은 재빨리 유강후를 위해 간단한 지혈 처리를 했다.제때에 처리해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지만 여전히 출혈이 심해서 구급차를 기다리면 너무 늦었다. 경호원은 최대한 빨리 유강후를 차에 실었다.혼란에 빠진 온다연은 냉정해지려고 애쓰며 재빨리 뒤쫓아갔다.문어귀까지 가니 고유정이 옆에서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몇 달 못 본 사이에 부잣집 아가씨였던 그녀는 비쩍 말라 뼈만 남았고, 원래 예쁘던 얼굴도 칼에 긁혀 엉망이 되고 끔찍한 흉터가 가득했다.그녀는 누군가에게 눌린 채 욕설을 퍼부었다.“온다연, 천한 년! 유하령이 다 알려줬어. 네가 유강후를 부추겨서 우리 집안을 이렇게 만든 거라고.”“유강후가 대신 칼을 맞아서 아쉽네. 안 그랬으면 네가 죽었을 텐데.”“온다연, 너를 지키는 사람들은 모두 너 때문에 죽어. 주한이 너를 보호하려다 죽었고, 이제 유강후도 죽게 됐어.”“재수 없는 년! 왜 아직도 살아 있어? 왜 죽지 않아?”“닥쳐!”온다연은 고유정에게 달려들어 혼신의 힘을 다해 뺨을 몇 대 갈겼다.“고유정, 넌 정말 죽어도 뉘우치지 않는구나. 유씨 가문에서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고유
그가 어제 그녀를 안고 달래며 음식을 먹일 때의 부드러움과 집착도 생각났다.온다연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는 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이고 바라볼 수는 있으나 다가갈 수는 없는 태양이다.이런 사람을 그녀가 어찌 감히 좋아하겠는가? 그의 곁에서 걷는 것이 어울리기나 하는가?그녀는 구석에서 자라는 들풀이고 진흙탕 속의 부평초다. 그렇게 고귀한 사람이 왜 목숨을 걸고 그녀를 보호했을까?그녀는 왜 그랬는지 분명히 물어보고 싶다.온다연이 도착했을 때 병원은 어수선했고 유강후는 이미 응급실에 들어갔다.의료진은 큰 혈액 봉지를 끊임없이 들고 들어갔고 피가 묻은 옷과 수술 물품을 가지고 나왔다.얼떨한 가운데 그녀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고,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나서 아직 꿈속에 있는 느낌이었다.그녀는 수술실 밖에 서서 찬바람 속의 낙엽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유강후 같은 사람은 다칠 수 없고 죽을 수 없다. 절대 그럴 수 없다.그녀는 속으로 이 생각을 계속 반복했다.그녀는 둘이 원수가 되거나 영원히 만나지 않는 등 수많은 결말을 생각했었다.하지만 어떤 결말이든, 유강후는 그녀의 상상 속에서 활기차게 잘 살고 있었다.그렇게 강한 사람이 어떻게 죽을 수 있단 말인가?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의사가 안에서 나오더니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혈액이 부족합니다. 빨리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부상자의 혈액이 좀 특수해서 우리 병원에 재고가 많지 않고 곧 소진될 것입니다.”온다연은 그의 손을 잡고 간절하게 물었다.“선생님,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요? 괜찮은 거죠?”“칼에 네 군데 찔렸는데, 그중 세 군데는 내장까지 다쳐서 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습니다.”칼에 네 군데 찔리고 그중 세 군데는 내장까지 다쳤다! 살 수 있을지 모른다!눈앞이 캄캄해진 온다연은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혈액형이 뭐예요?”의사가 입을 열려는데, 한이준이 사람들을 거느리고 급히 뛰어 들어왔다.“혈액형이 맞는 사람을 찾았어요. 빨리 데리고 들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