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이 며칠 동안, 그녀는 계속 아이의 첫 태동을 기다렸던 것이다.아이 상태가 안 좋다는 걸 알고 있었던 그녀는 태동이 없을까 봐, 아니면 자연스럽게 유산될까 봐 너무 불안했다.걱정으로 밤새 잠을 못 이룰 때도 많았다.하지만 오늘 이 작은 생명은 다른 건강한 4~5개월 아이들처럼 움직였고 그 생명력도 꽤 강해 보였다.그녀는 그의 옷을 꽉 잡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는 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어요!”유강후는 그녀를 꼭 안으며 대답했다.“아니야, 난 절대 그런 말 한 적 없어.”눈물이 북받친 온다연은 그의 과거 잘못을 지적했다.“아저씨는 이 아이를 인정할 수 없다고 했잖아요. 그것도 여러 번이나!”“만지지 말아요! 만지는 게 싫어요!”온다연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졌고, 빨개진 눈으로 흥분된 감정에 휘말린 채 도저히 그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그녀는 그의 몸을 힘껏 몇 번 때리고는 다시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목이 메어 흐느끼는 소리가 더 커졌다.유강후의 마음도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의 우는 모습에 그의 마음은 너무 아팠다.그는 그녀에게 키스해주며 눈물을 닦아주었다.“울지 마, 착하지.”“내가 잘못했어, 다 내 탓이야. 이제 울지 마...”온다연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계속 울었다. 그의 옷은 이미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유강후는 그녀를 안으며 처음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녀가 너무 작고 연약해서 그는 차마 힘껏 안아주지도 못했다. 혹시라도 너무 세게 안으면 다칠까 봐 걱정됐던 것이다.하지만 그녀의 배 속에는 그녀보다 더 약하고 작은 생명이 있었다.그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들 모자를 제대로 보호할 수 있을지 몰랐다.순간 주성원의 말이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며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고 동시에 희망을 품게 했다.그는 다시 조심스럽게 그녀의 아랫배에 손을 얹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이 아이가 만약...”“만약은 없어요!”온다연은 고개를 번쩍 들며
염지훈은 유강후를 흘끗 쳐다보았다. 유강후는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도발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고개를 돌려 온다연에게 말했다.“너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데 네 아저씨더러 자리 좀 피해 주라고 하면 안 될까?”온다연은 유강후 앞에 다가갔다.“나 지훈 씨와 따로 얘기하고 싶어요.”유강후가 반대할까 봐,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난 저 사람을 이용했어요.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러니 제대로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딱 이번 한 번뿐, 더는 저 사람을 만나지 않을 거예요.”유강후는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다시 말했다.“아저씨가 반대해도 난 갈 거예요.”유강후의 시선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머물렀고 눈빛은 차갑고 어두워졌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었다.오랜 침묵 끝에,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 차분하게 말했다.“가. 근데 너무 멀리 가지 말고 너무 오래 걸리지 마. 넌 쉬어야 하니까.”온다연은 대답하지 않고 염지훈과 함께 차에 올랐다.검은 험머가 멀어져갈수록 유강후의 눈빛은 더욱 어두워졌다.차가 거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 그는 손짓했다.마당 안에서 곧바로 경호원이 달려 나와 물었다.“도련님.”유강후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 차를 바라보며 말했다.“앞에 있는 애들한테 계속 감시하라고 해. 염지훈 그 녀석이 다연에게 손이라도 대면 바로 목을 비틀어 버려!”그는 잠시 멈추더니 말을 이었다.“절대 놓치지 마. 놓치면 너희도 돌아오지 마!”경호원은 그의 차가운 말에 몸을 떨며 간신히 대답했다.“알겠습니다. 도련님!”염지훈과 온다연은 근처의 한 카페에 차를 세웠다.룸에 앉자마자 염지훈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유강후가 때린 거야?”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스스로 부정하며 말했다.“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 사람은 너한테 잘해주던데. 널 때리진 않았을 거야. 근데 얼굴은 왜 이렇게 부었어?”그러면서 몸을 앞으로 내밀며 그녀의
온다연은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염지훈은 그녀를 잠자코 보다가 다시 말했다.“근데 네 말이 맞아. 난 결혼할 마음이 없어. 그런 오만방자한 아가씨는 정말 별로이거든. 하지만 염씨 가문은 확실히 집안이 좋은 여자가 필요하지.”그는 혀를 차면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보기엔 네가 적합한 결혼 상대인 것 같아. 유씨 가문에서 지위가 없지만 그래도 유강후 밑에서 자랐으니까. 밖에서 말하기도 나쁘진 않지.”염지훈은 온다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마지막에 시선은 그녀의 여전히 부은 얼굴에 두었다.“생김새도 마음에 들어. 오늘 얼굴이 부었지만 아름다움에 영향이 없어.”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염지훈은 농담조로 말한 것 같지만 농담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저한테 수작 부리지 마세요. 저희는 어울리지 않아요.”이에 염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나는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난 마침 아내가 필요하고 너도 그 변태 유강후에서 벗어나고 싶잖아.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걸. 그렇지 않으면 너도 유강후랑 살다가 변태 될 수 있어.”온다연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염지훈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지루한 듯이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하지만 아무도 보지 못한 테이블 아래에 있는 그의 다른 손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한참 지나서 온다연은 입을 열었다.“저 때문에 파혼하게 돼서 죄송해요. 하지만 유하령과 결혼하지 않는 것이 염씨 가문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제가 지훈 씨를 도와줬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지훈 씨를 이용한 일과 퉁치는 걸로 하시죠. 다시는 저를 찾지 마요.” 온다연은 말을 마치고 벌떡 일어나서 떠나려고 하였다.염지훈은 그녀를 불러 세웠다.“난 진심이야. 유씨 가문에 너와 결혼하겠다는 혼담을 꺼내고 싶어.”온다연은 멈춰 섰지만 뒤돌아보지도 않았다.“저도 진심이에요. 저희는 어울리지 않아요. 지훈 씨, 사실대로 말씀드릴게요. 늦어도 내년 봄에 저는 경원시를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
차가 멀리 나갔으나 그 사람은 여전히 끈질기게 쫓아왔다.경호원은 참다못해 말하였다.“다연 씨, 정말 멈추지 않을 겁니까?”온다연은 손에 땀이 찼으나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그 사람을 만나면 유강후에게 혼날 거예요. 보너스를 받고 싶지 않아요?”경호원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집에 도착한 후 유강후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는 바로 그녀를 도와서 외투를 벗고 안아서 욕실로 들어갔다.그는 그녀를 욕조에 내려놓고 말없이 능숙하게 그녀를 씻어주었다.온다연의 일에 대해 유강후는 어떤 집념이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절대로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오늘은 예전과 달랐다.온다연을 씻어줄 때 그의 손은 그녀의 배를 오랫동안 어루만졌다.태동을 다시 느끼고 싶은 것 같았다.그러나 그는 온다연이 반항할 때까지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했다.온다연은 유강후가 자기의 배를 만지지 못하게 그의 손을 내쳤다.목욕을 마치고 나서 유강후는 온다연을 안고 테이블에 올려놓고 헤어드라이로 머리를 말려주기 시작했다.“이 냄새는 마음에 들어?”온다연은 이미 욕실의 청결 제품은 모두 상쾌하고 숲의 향과 비슷한 은은한 향으로 바꾼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전에 온라인에서 구매한 그 기초화장품의 냄새와 비슷했다.당연히 마음에 들었다.그러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유강후가 하는 데로 하였다.그녀의 반응은 그가 예상한 것과 같았다.유강후는 온다연에게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단지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온다연은 머리카락이 다 마를 때까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강후는 바디로션과 크림을 꺼내서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게 하였다.“이 냄새를 좋아해?”크리미한 텍스처에 은은한 자몽향이 나서 맡으면 힐링되는 기분이 들었다.“임산부전용 제품이야. 네가 좋아하는 브랜드는 나중에 다시 쓰자.”그러나 온다연은 여전히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벙어리 인형과 같았다.유강후는 기초화장품을 조금조금씩 발라주었고 새 옷을 가져다 입혔다.아주 부
온다연은 대답하지 않고 그냥 약간 헐떡거리면서 숨을 가쁘게 쉬었다.유강후는 그녀의 입술을 문질렀다. 부드러운 촉감에 그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온다연은 유강후가 또 키스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녀를 안고 욕실에서 나왔다.식탁 위에는 이미 온다연이 좋아한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그녀의 위가 안 좋아서 요리는 흔히 물렁물렁할 정도로 끓여야 했고 조미료도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음식은 맛이 있지만 항상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그러나 오늘의 요리는 예전과 달라 보였다. 때깔이 선명하고 조미료도 많이 넣어서 매우 맛있어 보였다.유강후는 그녀를 편안한 쿠션이 있는 의자에 앉혔다.“음식이 맛있는지 먹어 봐. 오늘 새 셰프가 왔거든.”그는 잠깐 멈추었다가 이어서 말했다.“네가 예전에 묵었던 곳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구한 셰프야.”온다연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식탁 밑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유강후는 그녀가 평소에 즐겨 먹는 음식을 집어서 작은 도자기 그릇에 놓고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먹어 봐.”온다연은 젓가락을 움직였다.아무리 유강후에게 반항을 하더라도 뱃속의 아이로 장난을 칠 수 없었다.정성껏 만든 요리가 아니라 차가운 반찬이라도 그녀는 먹을 것이다.사실 그녀는 며칠 전부터 미각을 잃었다. 무엇을 먹어도 다 똑같은 맛이었다.그래서 그녀는 오늘 차린 음식이 맛있는지 없는지를 전혀 알 수 없었다.온다연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유강후의 눈빛이 많이 부드러워졌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장화연에게 말했다.“셰프의 월급을 올려줘.”그는 말하고 나서 앉았다.그러나 한 요리를 먹을 때 자기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맛이 이상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셰프가 식초를 넣어서 신맛이 강했다.온다연은 신맛이 나는 음식을 먹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식초를 조금 넣어도 그녀는 먹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신맛이 필요한 요리일 때는 모두 레몬즙으로 대체했다.지금 온다연은 신맛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그가 집어준
온다연의 말에 유강후는 가슴에 비수가 꽂은 것처럼 엄청 아팠다.그녀는 냉소를 지으면서 말했다.“저의 건강 문제를 핑계로 대지 마세요. 저는 믿지 않을 거예요. 설령 사실대로 말해도 저는 믿지 않을 거예요. 아이를 꼭 낳을 테니까 아저씨가 유산시키면...”그녀의 눈에서 섬뜩거리는 빛을 내뿜었다.“아저씨를 죽여버릴 거예요.”온다연은 말을 마치고 나서 돌아섰고 유강후의 눈빛은 어두워졌다. 장화연은 두 사람의 이런 모습을 보고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도련님, 주 교수는 다연 씨의 컨디션이 갈수록 나빠질 것이기에 입원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나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이 아이가 다연이의 생명을 위협해서 유산시켜야 한다면 다연이는 어떻게 될 것 같아?”장화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저도 모르겠어요. 다연 씨는 온화해 보이지만 실제로 고집이 세서...”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화제를 바꿨다.“회장님께서 저녁에 본가에 다녀오라고 전화를 여러 번 하셨습니다.”이에 유강후는 표정이 차가워지면서 냉랭하게 말했다.“시간이 없다고 답장을 보내.”이에 장화연은 이렇게 말했다.“유하령 아가씨의 일로 세간이 떠들썩했어요. 비록 소식을 차단했으나 그래도 적지 않는 사람들은 영상 속의 사람이 아가씨라는 것을 알아채서 아가씨의 평판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어요. 염씨 가문이 기어코 파혼하겠다면 평판이 더욱 안 좋겠죠. 이 일은 다연 씨와 상관이 없지만 본가에서 꼭 가만 두지 않을 겁니다. 도련님,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유강후의 눈빛이 지극히 차가워졌고 눈에 살기로 가득 찼다. “그동안 우리가 많이 참았지. 유자성의 아들과 딸이 정말 한심하군. 난 이미 그들에게 많은 기회를 줬어. 그들이 소중히 여기지 않으니 더 이상 봐줄 필요가 없지!”그러고 나서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입을 열었다.“이번에도 아버지가 계속 유자성을 감싸 돌면 본가도 버릴 거야!”그는 말을 마치고 일어나서 떠났다.두 발짝 가더니 그는 계속
그들이 말하는 사이에 장화연은 십여 명의 경호원을 데리고 달려왔다. 그들은 유강후의 옆에 서서 본가 사람들과 필사적으로 싸울 태세를 취했다.최금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서 기절할 뻔했다. 그녀는 유강후를 가리키면서 말했다.“이, 이런 불효자손을 봤나? 감히 날 이렇게 대해? 네 아버지는 지금 해외방문으로 돌아오지 못하니까 이런 짓을 하는 거야?”유강후는 차가운 말투로 대꾸하였다.“아버지가 오신다면 저는 더 많은 경호원을 불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의 경호원과 싸울 수 있겠어요?”최금영은 화가 나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었다.“네...네 아버지도 감히 나와 이런 태도로 말하지 못하는데 이 버르장머리가 없는 놈이...”“그만하세요! 저는 할머니의 이런 화법에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아버지에게나 하세요.”유강후는 할머니의 말을 끊고 차가운 눈빛으로 유자성을 쳐다보았다.“형도 오셨네요. 어인 일로 오셨는지 말씀하세요.”유자성은 적어도 20년 이상 권력장에 있어서 아주 차분해 보였다.그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였다.“강후야,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어도 우린 친형제야. 물보다 진한 피를 가졌어. 남을 위해 형제끼리 다투고 가문에 내란이 일어나면 안 되잖아.”그는 유강후의 뒤쪽을 바라본 후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네가 입양한 아이라 누구도 괴롭히지 못하게 하는 심정을 이해해. 내가 할머니와 아버지를 설득시켜서 온다연을 족보에 올릴 수 있어.”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하령은 큰 소리를 질렀다.“안 돼요! 그런 미천한 년은 자격이 없어요!”최금영도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안 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년이 유씨 가문에 들어오는 것을 용납 못 해!”유자성은 심호흡을 하면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할머니, 지금 충분히 혼란스러워요. 우리 유씨 가문은 대가족이에요. 남을 위해 형제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면 안 돼요. 족보에 한 사람이 많아지든 적어지든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유씨 가문의 단합이고 사분오열하는 것을 막아야
유강후는 그가 찾아온 이유를 짐작한 듯 서슬 퍼런 눈빛으로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여기 너를 반기는 사람이 없으니 꺼져.”염지훈은 넥타이를 바로잡더니 어쩌다 정색하며 말했다.“오늘은 당신이 반기지 않아도 어쩔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그는 방 안의 사람들을 빙 둘러보더니 나지막이 말했다.“저는 오늘 결혼 얘기를 나누러 왔어요.”모두가 놀라 멍해졌고, 방 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온다연만 극히 복잡한 눈으로 염지훈을 바라보고 있었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최금영이 노기등등하여 입을 열었다.“우리 하령을 너한테 못 줘.”“며칠 전 언론에 우리 하령과는 그저 장난이고 노이즈 마케팅일 뿐이라고 말했잖아. 이제 와서 결혼 얘기를 하겠다고? 유씨 가문이 우스워? 네가 결혼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물릴 수 있다고 생각해?”옆에 있던 유하령은 놀랐다가 기뻐하며 급히 말했다.“할머니, 저는 좋아요...”최금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가로챘다.“바보 같은 계집애, 왜 이렇게 진중하지 못해? 정말 좋아도 안 그런 척해야지. 애를 먹이지 않으면 너의 소중함을 몰라. 너는 어쨌든 유씨 가문의 귀한 딸이야. 저 녀석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작은 가문이 아니라고.”“내 말 듣고 얌전히 있어.”유하령은 미칠 듯이 기뻐서 즉시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지만 할머니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꾹 참았다.이때 유자성이 입을 열었다.“염지훈, 우리 유씨 가문도 명문가야.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며칠 전에 파혼하겠다고 했다가 이제 와서 결혼하겠다고? 너무 애들 장난으로 생각하는 거 아니니?”염지훈은 미간을 찌푸렸다.유씨 집안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오늘 결혼 얘기를 꺼낼 상대는 유하령이 아니다.솔직히 그는 설명하기 싫었다. 하지만 심미진이 온다연의 이모이자 유자성의 아내라는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말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그는 옷매무시를 정리한 후 진중하게 말했다.“이전에 어른들 사이에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