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바꿀 기회가 눈앞에 주어졌다. 어쩌면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피라미드 꼭대기로 가는 길이 바로 앞에 있는데 이 소중한 기회를 어찌 놓칠 수가 있겠는가.원하는 걸 이루지 못한다 한들 이런 남자와 한번 자보는 것도 손해는 아니다.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장지현은 강해숙이 건네준 주사기를 꺼내 살펴보았다.잠시 고민한 끝에 그녀는 정한 양의 세배로 늘렸다.그런 다음 곧바로 바늘을 유강후의 피부 속으로 밀어 넣었다.약 30분 후, 유강후의 몸 변화를 느낀 장지현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의 얼굴에 입을 맞추려고 했다.바로 이때 유강후가 몸을 움직이며 천천히 눈을 떴다.시야는 더없이 흐릿했고 몸은 너무 뜨거워져 터질 것만 같았다.그의 눈에 들어온 건 ‘온다연’의 얼굴이었다.유강후는 낮고 쉰 목소리로 버겁게 입을 열었다.“다연아...”그 반응에 흠칫한 장지현은 곧바로 유강후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는 걸 깨달았다.어쩌면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일지도 모른다.그러나 미래에 대한 열망은 그녀의 마지막 모욕감마저 떨쳐버렸다.장지현은 천천히 옷을 벗으며 유강후에게 다가갔다.다량의 약물 투여로 유강후는 이미 사고력을 잃은지 오래였고 그저 온다연에 대한 욕구와 몸이 불타는 느낌만 남아있었다.유강후는 손으로 눈앞에 보이는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다연아, 지금은 안돼. 나 좀 불편해...”‘온다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어쩔 수 없는 상황에 유강후는 나지막하게 말했다.“다연아, 나 감기 걸린 것 같아. 물 좀 따라줘.”머뭇거리던 ‘온다연’은 몸을 돌려 물 한 잔을 따랐고 잠시 망설이다가 바로 옆에 놓인 하얀 가루약까지 털어 넣었다.그 후 아주 자연스럽게 물 한 잔을 유강후에게 건넸다.갈증이 심했던 유강후는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온다연’은 컵을 받아서 옆에 내려놓은 후 다시 유강후에게 입을 맞췄다.그녀의 머리를 감싸고 키스하려던 유강후는 순간 코끝에 스치는 은은한 향수 냄새를 맡게 되었다..
유강후는 주저 없이 장지현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그의 눈은 한 마리의 사나운 늑대처럼 핏빛으로 붉게 물들어졌다.벽에 부딪힌 후 바닥에 쓰러진 장지현은 초라한 모습으로 유강후를 바라보며 감히 앞으로 다가가지 못했다.잘생긴 외모는 흠잡을 데 없지만 눈이 빨갛게 충혈된 채로 화내는 모습은 금방이라도 사람을 찢어버릴 듯 공포스러웠다.잠시 망설이던 장지현은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우려고 손을 뻗었고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유강후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바로 죽여버린다.”장지현은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눈앞의 남자가 너무 탐났지만 목숨이 걸린 일이니 차마 다가가지 못했다.이때 유강후가 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당장 꺼져.”장지현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대표님, 문은 잠겨있습니다. 저희가 이틀 동안 이 방에서 지내야만 밖으로 내보내 준다고 했습니다.”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바라보며 말했다.“충분한 물과 음식까지 준비해 줬습니다.”동공이 움츠러든 유강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몇 걸음 만에 문 앞에 도착했다.한바탕 난폭하게 문을 당겼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여긴 예전에 유강후가 직접 고른 방이다. 당시에 가장 좋고 튼튼한 나무를 사용했기에 그의 힘만으로는 절대 이 문을 열 수 없다.게다가 외부는 인위적으로 보강되어 있어 맨손으로 여는 건 아예 불가능하다.장지현은 그의 등에 서서 벌벌 떨며 말했다.“절대 안 열려요...”그 말에 몸을 돌린 유강후는 손을 뻗어 장지현의 목을 졸랐다.다량의 약물 투여로 이때부터 약간의 환청과 환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힘은 주제할 수 없을 정도로 세졌다.장지현은 그에 의해 곧바로 허공에 떠올랐고 이내 얼굴색이 변했다.유강후는 그녀를 죽이려는 게 분명하다.겁에 질린 장지현은 손발을 마구 흔들며 울부짖었다.“대표님, 저는 단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제발 살려주세요.”그 시각 유강후의 몸은 점점 더 뜨거워졌고 심장은 수천 마리의 작은 벌레들이 갉아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다.점점 이성을 잃어가는 유강후의 모습에 장지현은 기회가 왔다는 걸 직감했다.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유강후에게 다가갔다.“대표님, 욕실로 갈까요? 찬물로 샤워하면 조금 나아질 거예요.”장지현은 자신이 벗으면 끄떡없던 유강후도 견디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유강후는 단번에 그녀를 밀쳤다.“꺼져.”그러더니 혼자 비틀거리며 욕실로 걸어갔다.찬물을 몸에 잔뜩 끼얹었지만 여전히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심지어 그 욕구가 점점 더 강해져 온몸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런데 이때 문득 뭔가가 머릿속에 스쳤다.유강후는 세면대 위에 칫솔을 집더니 단숨에 두 동강 냈다.그 후 옷을 찢어 왼쪽 팔의 어느 특정한 위치를 찾아 주저 없이 세게 그었다.한 번.두 번.세 번.곧 피가 팔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극심한 통증에 유강후는 정신을 조금 차렸지만 뒤따라오던 장지현은 바닥을 가득 채운 피에 겁을 먹었다.유강후가 그녀가 살면서 본 사람 중에 제일 단호하고 잔인했다.다량의 약물 투여로 인해 이성을 잃고 덮쳐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에 정신을 차리려고 자해까지 하니 정말 말이 안 나왔다.장지현은 눈앞의 남자가 무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욱 탐이 났다.그녀는 재빨리 다가가 유강후의 손목을 잡았다.“소용없으니까 제발 그만해요. 약효는 이틀 동안 지속될 거예요. 이런다고 달라질 게 없다고요.”쿵.벽에 부딪힌 장지현은 코피를 쏟기 일보 직전이었다.유강후는 피투성이 된 자리에 대고 다시 여러 번 그었다.너무도 끔찍하고 잔인한 모습에 장지현은 더 이상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아 겁에 잔뜩 질린 채로 가만히 지켜봤다.유강후가 칫솔을 던진 후 상처 난 곳을 손가락으로 파헤치는 건 정말 충격이 아닐 수가 없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상처로부터 아주 작고 얇은 칩 하나를 꺼냈다.종이에 버금가는 얇은 두께에 손톱의 3분의 1 정도의 크기였다.유강후는 희망을 발견한 듯 눈빛이 반짝이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 후 얇
장지현은 고개를 숙여 유강후에게 입을 맞추려고 했다.그러나 다음 순간 귀를 찌르는 비명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아파요...”유강후는 칫솔로 장지현의 손등을 세게 찔렀다.어찌나 힘을 썼는지 칫솔이 그녀의 손등을 꿰뚫을 지경이었다.장지현은 극심한 고통으로 거의 실신할뻔했다.유강후는 그녀의 손등에 찍힌 칫솔을 빼내더니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싸늘하게 말했다.“한 번만 더 다가오면 네 목을 그을거야.”장지현은 겁이 나서 감히 한 발짝도 다가가지 못하고 그저 주섬주섬 옷을 챙겨 몸을 가렸다.같은 시각 한옥. 장화연은 유재성에게 전화를 걸었다.당연히 그의 비서가 전화를 받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유재성이 직접 받았다.순간 불길한 예감이 장화연을 덮쳤다.“회장님, 장화연입니다. 몸이 편찮으시다고 들었는데 괜찮은가요?”유재성은 장화연을 매우 중시했다. 강현미가 직접 데려온 사람이기에 장화연은 다른 집사나 도우미에 비해 지위가 월등히 높았고 안주인과 별반 다르지 않은 대접을 받았다. “고질병이 도졌을 뿐이야. 큰 문제는 아니고 2, 3일이면 퇴원해.”장화연은 곧바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큰 도련님이 오전에 연락 왔을 때는 회장님께서 뇌출혈이 심하다고 했습니다. 셋째 도련님은 회장님을 만나러 나갔다가 아직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고요.”장화연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그리고 셋째 도련님 몸에 이식된 위치 확인 장치가 활성화됐습니다. 신호를 보낸 주소는 유씨 가문의 본가고요. 어떻게 된 일이죠?”“강후는 오늘 병원에 안 왔는데? 집으로 갔나? 그 칩은 지문인식이 되어야 작동되는 건데...”“당장 경호원이랑 헬기 준비해서 본가로 이동해.”장화연은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그 후 곧바로 이권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권은 경호원 수십 명과 헬기를 동원해 유씨 가문의 본가로 달려갔다.유재성과 이권의 헬기는 거의 동시에 유씨 가문의 활주로에 착륙했다.유재성은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유자성의 따귀를 내리쳤다.“빌어먹을 놈.”이때 강해숙이
유강후의 흰 셔츠도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온다연은 피가 솟구치는 느낌에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유강후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아저씨...”그러나 유강후는 주저 없이 옆으로 밀어내며 버럭 소리쳤다.“꺼져.”그의 목소리는 잔뜩 갈라졌고 빨갛게 충혈된 눈을 보니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온다연은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질 듯 너무 괴롭고 아팠지만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아저씨, 저 다연이에요.”“나 좀 봐봐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다연이라고요.”다연이라는 두 글자를 듣자 유강후는 정신을 차린 듯 중얼거렸다.“다연... 정말 너야? 다연아...”너무 괴로워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온다연은 재빨리 유강후의 손을 자신의 얼굴에 가져갔다.“만져봐요. 나잖아요. 아저씨의 다연이.” 유강후는 눈을 감고 나지막하게 말했다.“하... 또 환각이네. 너 그 여자잖아. 당장 꺼져.”곧이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꺼지라고!”환각이 보였다고 착각한 유강후는 칫솔을 집어 들더니 다시 허벅지를 세게 찔렀다.극심한 고통에 경련까지 일어나자 그나마 시야가 또렷해졌다.“다연이네...”그런 그를 보며 온다연은 수만 가지의 감정이 오갔지만 지금 이런 얘기를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이권을 보며 말했다.“병원으로 이송해요. 지금 당장.”경호원 몇 명이 황급히 달려와 유강후을 일으켰다.유강후는 온몸이 피로 물들었고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잠깐만요.”온다연은 재빨리 유강후의 옷장에서 옷 한 벌을 꺼내 경호원에게 갈아입는 걸 도와달라고 부탁했다.그러다가 벽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꺼져.”장지현은 그제야 꿈에서 깬 듯 벌벌 떨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한편으로는 유강후가 왜 자해를 할지언정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지 몸소 깨달았다.온다연은 너무 아름다웠다. 화려한 이목구비와 우아한 분위기는 동화 속에서 뛰어나온 인물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장지현은
강해숙은 온몸이 떨릴 정도로 화를 내며 버럭 호통쳤다.“천박한 X. 네가 없었다면 강후가 이렇게 됐을까? 다 너 때문이잖아. 네가 강후를 꼬시지 않았다면 지금도 내 말을 잘 들었을 거야. 유씨 가문의 일에 신경도 안 쓰고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게 다 너 때문이잖아.”오늘 이 일을 겪으면서 온다연은 강해숙에 대한 마지막 인내심까지 잃었다.온다연은 수년 전 집안 도우미에게 들었던 소문들을 언급하며 반박했다.“내연녀를 가장 싫어한다고 늘 말씀하셨죠? 왜요? 바람피운 남편한테 버림받는 신세 되어서 그런가요? 혐오하고 원망하는 그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나 봐요?”이 말은 의심할 바 없이 강해숙의 상처를 드러내는 의도가 다분했다. 사람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수십 년 동안 감히 아무도 언급하지 못했다.그 말을 들은 강해숙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고 온다연은 가리키며 몸을 떨었다.유자성도 추악한 얼굴로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야, 말을 함부로 하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온다연이 반박하려고 하자 옆에 있던 이권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다연 씨, 상대하지 말고 얼른 가요. 도련님 건강이 가장 중요하잖아요.”온다연이 답했다.“곧 따라갈 테니까 아저씨랑 먼저 가요.”말을 마친 온다연은 극도로 차가운 표정으로 뒤돌아 유자성을 바라봤다.“유씨 가문의 가장 아픈 곳을 찔러서 화를 내는 거예요? 아니면 강후 씨가 치료받지 못하게 시간을 끄는 건가? 강후 씨가 잘못돼서 혼자 유씨 가문의 모든 걸 상속받기를 기대하는 건 아니죠?”유자성은 안색이 어두워졌다.지나가던 개한테도 괴롭힘당하던 어린 고아 소녀가 지금은 두 눈 똑바로 뜨고 말대꾸를 하고 있으니 더욱 분노를 참지 못했다.“우리 형제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작정했나 봐?”온다연은 피식 웃었다.“갈라놓을 공간이 있었어요? 동생한테 하는 짓을 봐서는 그렇게 각별한 사이는 아닌 것 같아서요.”온다연은 고개를 돌려 유재성을 바라봤다.“저분도 회장님 아들이지만 강후 씨도 회장님 아들이잖아요. 이 일은 강후
온다연은 고개를 돌려 눈을 감고 있는 유강후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과 겉으로 드러난 피부는 비정상적인 홍조를 띠고 있었다.게다가 필사적으로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있었는데 핏줄이 선명하게 튀어 오른 걸 보니 여전히 고통을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그런 그를 보며 온다연은 불안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너무 힘들어 보이네요. 고통을 덜어줄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의사는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대표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 거죠?”곧이어 의사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대표님에게 투여된 약은 성 호르몬제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부부관계를 갖는 거죠. 이렇게 말하면 무슨 뜻인지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온다연은 어리둥절하더니 금세 얼굴이 새빨개져 말을 더듬었다.“최선의 방법인가요?”의사가 답했다.“네.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습니다.”귀까지 빨개진 온다연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일단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나자 온다연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문을 나서 장화연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인 후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장화연이 돌아왔고 온다연은 그녀에게서 알파벳이 적힌 박스를 건네받고선 나지막하게 말했다.“집사님,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주세요.”장화연이 떠난 후 온다연은 유강후에게 물을 건네며 그의 손을 잡았다.“괜찮아졌어요?”유강후는 의식을 어느 정도 회복했지만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웠고 몸이 뜨거웠다.온다연을 만지기는커녕 그녀의 향기만 느껴져도 주체할 수 없는 욕구가 밀려왔다.유강후는 침착하게 그녀의 손을 피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여기 있지 말고 얼른 나가.”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분명히 자제력을 잃기 십상이니 안 그래도 몸이 약한 온다연이 그런 고통에 시달리기를 원하지 않았다.온다연은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안 갈 거예요.”가뜩이나 활활 타오르는 몸에 온다연의 손길이 닿자 마치 경유 한 통을 부은듯 급속도로 불길이 거세졌고 금방이라도 재가될 듯한 느낌이었다.이미 빨갛게 충
유강후는 인생 최대의 자제력을 발휘했다.“내려가.”온다연은 주저 없이 팔을 뻗어 그의 벨트를 풀었고 두 손을 그의 허리에 얹었다.“싫어요. 안 내려갈 거예요. 난 아저씨의 여자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밀어내요?”온다연의 손길에 유강후의 몸은 더욱 활활 불타올랐지만 그럼에도 이를 악물고 참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나 지금 이상해. 시작하면 절대 자제하지 못할 거야. 네가 다치게 될 수도...”온다연은 고개를 숙여 그에게 입을 맞췄다.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손에는 하얀 박스가 들려있었고 유강후를 바라보며 말했다.“안에 여덟 개 들어있어요. 능력 있으면 오늘 다 써보든가.”박력 있게 말했지만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더불어 어느새 그녀의 목도 핑크빛으로 물들었다.어쩌면 이번 생에 한 일 중에서 가장 상식을 벗어난 터무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비로소 유강후가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이제는 온다연을 내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유강후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목을 잡았다.“다연아, 너 다칠 수도 있어.”온다연은 차마 그의 시선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괜찮아요. 두렵지 않거든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강후는 온다연은 번쩍 안았고 순식간에 두 사람의 위치가 뒤바뀌었다.유강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재빨리 박스를 뜯더니 난폭하게 안에서 하나를 꺼내고선 온다연의 입가로 가져갔다.“뜯어. 나한테 끼워줘.”온다연은 조금의 반항도 없이 그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움직였다.완전히 자제력을 잃기 전 유강후는 이를 악물고 참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다연아, 예전처럼 부드럽게 못 할 수도 있어. 정말 아프거나 견디기 힘들면 나 때리고 밀쳐내.”사실 온다연도 조금 겁이 났지만 물러서지 않고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참지 마요. 왜 시작하기도 전에 겁부터 먹어요? 자신 없어서 그러는 건가?”그 말은 유강후의 이성을 완전히 잃게 했다.공기 중에는 므흣한 분위기가 흘렀고 곧이어 침대가 부딪치는 소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