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권은 여전히 불안한 듯 말했다.“하지만 저는 김원도가 예전보다 더 미쳐버린 것 같아요. 이번에 심상치 않은 의도로 왔을 겁니다. 셋째 도련님, 다연 씨를 당분간 학교에 보내지 않고 강씨 집안으로 피신시키는 것이 어떨까요?”유강후는 그 말을 가로막았다.“이권, 너도 이제 겁이 많아졌나? 나이가 들어서?”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내 아내와 자식이 숨을 이유는 없어.”이어 명령을 내렸다.“중산 가문과 마츠시타 가문에 연락해. 김원도와 이다가 무너지기만 하면, 강씨 가문이 동양국과 동아시아 시장은 모두 넘기겠다고 약속해. 해도 근처의 유전 개발 역시 협력하겠다고.”이권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이미 김씨 가문과 유전 개발에 수천억 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는데요!”“뭐가 문제야.”유강후의 눈빛은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내 아내와 자식을 건드리겠다고? 그게 천황이라 해도 죽여버릴 거야. 어둠 속에서 장난질을 치다니, 죽고 싶은 모양이지.”“동양국의 몇몇 가문들, 이제 순위를 다시 정할 때가 왔어.”그때 전화가 울렸다. 확인하니, 발신자는 다름 아닌 김원도였다.그의 눈빛은 차갑게 변했다.“감히 나를 직접 찾아오다니, 정말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군.”전화를 받자, 반대편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유 대표, 오랜만이야!”상당히 유창하게 말했는데, 그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챌 수 없을 정도였다.유강후는 차갑게 대꾸했다.“무슨 바람이 불어서 H국까지 왔어?” 김원도가 비웃듯이 웃으며 말했다.“오랜만에 봐도 유 대표는 여전히 유머러스하군. 왜, 내가 H국에 오면 안 되지? 같은 동창이었으니, 오늘 밤 술이나 한잔하면서 옛 이야기를 나누자.”유강후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얼마나 좋은 술이냐에 달렸지. 난 술에 까다로워서 아무 술이나 마시지 않거든.”김원도는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유 대표, 설마 내가 술 한 병 살 돈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유강후는 경멸스럽게 말했다.“돈은 많을지
말을 마친 그는 다시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봐봐, 너는 그놈을 그렇게 사랑했는데, 유강후는 너를 쳐다보지도 않았어. 유강후 눈에 너는 개만도 못했지. 하지만 나는 널 그렇게 사랑했는데, 너는 죽으려고 했어!”“이 세상에서 널 사랑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나뿐이라고!”그는 책상으로 다가가 회색 항아리를 열고, 그 안의 재를 손가락에 조금 묻혀 차에 넣었다. 그리고 그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잔을 꽉 움켜쥔 그의 눈은 핏빛으로 가득했다.“유강후, 넌 항상 날 짓눌렀어. 학교에서도, 지금도. 언제나 잘난 척하며 날 깔보고, 꼭 한 번은 날 짓밟아야 직성이 풀리더군. 하지만 이번엔 다를 거야. 널 사랑하는 여자를 죽여서라도 하루코를 위해 복수하고, 네 강씨 집안을 철저히 짓밟아버리겠어!”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남자는 순식간에 평소의 표정을 되찾았다.“들어와.”문이 열리자, 이다 이치로와 임도현이 들어왔다.임도현은 경원시의 유명 연예 기획사 소속 매니저로, 최근 동양국 진출을 노리고 있었다.동양국 최대 재벌의 후계자 김원도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인맥을 동원해 찾아온 것이다.임도현은 억지로 웃으며 몇 장의 사진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김원도 님, 안녕하십니까. 이 사진들은 유강후가 가장 신경 쓰는 여자들입니다. 이쪽은 유강후의 약혼녀 나은별입니다. 요즘 유강후가 어떤 여자를 집에 들인 후로 두 사람이 다툼이 잦아진 것 같긴 합니다만, 아직 얼마나 감정이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그리고 이쪽이 갇혀 있는 여자입니다. 굉장히 아끼고 있어서 그 한옥 밖으로 잘 내보내지 않는다더군요. 하지만 이런 가문 출신들이 얼마나 진심일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잠깐의 흥미일 수도 있죠.”“마지막으로 이쪽은 유하령이라는 아이로, 유강후의 조카입니다. 유강후가 많이 아끼는 사람인데, 최근에 다리 부상을 당해 병원에 입원 중입니다.”김원도는 사진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다가 나은별의 사진을 집어 들었다. 그의 표정은 서늘하고 냉혹했다.“이 여
그 남자는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차림을 하고 있었다. 나이는 오십을 넘은 듯했지만, 세련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딱 봐도 엘리트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온다연의 손목을 너무 강하게 잡고 있어, 무례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온다연은 살짝 찌푸리며 기본적인 예의를 유지한 채 말했다.“아마 사람을 착각하신 것 같네요. 저는 안씨가 아닙니다.”이상했다. 정 교장도 그녀에게 안 씨 성이냐고 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혹시 자신과 그 사람이 닮은 걸까?남자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급히 손을 놓으며 사과했다.“미안합니다. 고인의 후손을 만난 줄 알고 착각했네요.”그는 방금 모비크와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둘의 관계가 꽤 가까워 보였다.온다연은 더 문제 삼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괜찮습니다.”그때 모비크가 서툰 중국어로 그녀에게 말했다.“다연아, 이분은 내 친구 문명원이라고 해. 신국 국립대학의 교장이기도 해. 한 작품을 가져왔는데, 네가 흥미를 가질 것 같아.”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림 위에 덮여 있던 흰 천을 걷어냈다. 그 아래에는 시간이 느껴지는 오래된 유화 한 점이 드러났다. 사실적인 화풍의 그림이었다.그림 속 소녀는 검은 머리에 눈처럼 하얀 피부, 섬세한 이목구비를 지녔다.복고풍의 화려한 공주 드레스를 입고 끝없이 펼쳐진 붉은 장미밭에 서 있었으며, 두 팔에는 커다란 장미 꽃다발을 안고 있었다.그녀의 붉은 입술과 눈부신 피부는 더욱 선명하게 대비되었다.온다연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첫 번째 이유는 그 화가의 실력 때문이었다. 그림은 고상하고 정교하며, 소녀의 피부 아래 보이는 미세한 모세혈관까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이 정도의 작품이라면 분명 대가의 손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었다.두 번째 이유는 그림 속 소녀가 자신과 너무나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온다연은 무심코 중얼거렸다.“이거... 저인가요?”그러고 나서 스스로도 당황하며 말을 고쳤다.“아, 아니에요. 그럴
“다만, 그 사람도 자신을 그 안에 가둬버렸어요. 두 사람 모두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 셈이죠. 들리는 말로는, 그 사람도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새었다고 해요.”이 이야기를 들은 온다연은 왜인지 마음이 답답해졌다. 분명 소설 같은 비현실적인 이야기인데도, 왠지 모르게 울고 싶어졌다.그녀는 무심코 물었다.“이름이 뭐예요?”문명원이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안심이에요.”온다연은 다시 물었다.“그 사람은요? 안심 씨 남편인가요? 이름이 뭐예요?”문명원은 살짝 찡그리며 대답을 피했다.“더는 말하기 곤란해요. 다연 씨가 모비크의 제자이기도 하고, 안심 씨와 조금 닮았기에 이만큼 말한 거니 더는 묻지 마요.”온다연은 자신이 무례했다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호기심이 가라앉지 않아, 그녀는 안심이라는 이름을 휴대폰에 검색해 보았다.그러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그래서 다시 안심, 신국, 사원이라는 키워드를 입력해 검색해 보았다. 뜻밖에도 몇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비록 정보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 속에서 중요한 몇 가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안심은 신국의 명문가인 안씨 가문의 막내딸이었다.안씨 가문이 몰락한 후, 신국의 최고 재벌인 진씨 가문에 의해 입양되었고, 이후 진씨 가문의 상속자와 결혼했다는 것이었다.안심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았지만, 진씨 가문에 대한 정보는 풍부했다.진씨 가문은 동남아시아에서 유명한 초대형 재벌로, 겉으로는 매우 조용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상당히 넓은 것으로 나타났다.온다연은 한참 동안 정보를 읽다가 흥미를 잃고 휴대폰을 닫으려던 찰나, 갑자기 메시지 한 통이 툭 튀어나왔다.[내 사랑하는 딸아, 내가 누군지 알겠니?]온다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순간적으로 온몸의 혈액이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급히 메시지의 발신 번호를 확인했지만, 그저 알 수 없는 IP 주소일 뿐이었다.진짜 발신 정보는 감춰져 있
길을 가는 내내 온다연은 여러 번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매번 뒤를 돌아보아도, 가끔 지나치는 행인들 외에는 수상한 곳이 없었다.장화연 역시 그녀가 종종 뒤를 보는 것을 눈치챘다.“사모님,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온다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알 수 없는 그 메시지를 말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너무 과민한 것은 아닌지 싶었다. 그래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아니에요, 그냥 누군가 우리를 따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장화연이 말했다. “사실 우리를 따라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온다연은 몸을 딱 굳혔다. “누구요?”장화연은 뒤쪽 가까이에 있는 평복 차림의 경호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셋째 도련님께서 안심하지 못해 이 길에만 여러 명의 경호원을 배치했습니다. 지금 그들을 알아차렸다면, 그들의 업무가 잘 수행된 것입니다.”경호원들일까?온다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가슴 속에 쌓인 의혹과 불안감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이 좁은 골목은 고작 십 분이면 걸어서 지나갈 수 있는 길이었지만, 온다연은 오늘 저녁 이 길이 조금은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녀와 유강후는 이미 혼인신고를 마쳤고, 이제 그녀는 그의 정식 아내였다. 그녀는 유강후의 가문을 진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당연히 장화연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 백과사전을 뒤지는 것보다 훨씬 더 믿을 만했다.그녀는 장화연의 팔을 친근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집사님, 강씨 집안에 대해, 강후 씨의 외할아버지에 대해 좀 말씀해 주세요.”장화연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이제야 알고 싶으십니까?”온다연은 그녀의 팔을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말했다. “전에는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특별히 묻고 싶지 않았죠.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우리는 이제 부부니까요.”장화연이 말했다. “강씨 집안은 아주 큰 가문입니다. 전체 가족의 역사가 백 년이 넘고, 북미에서 매우 유명하면서도 극도로 조용한 집안입니다. 며칠 후 셋째 도련님이 사모님을 데리고
장화연이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말을 했지만, 온다연은 들을수록 더욱 침묵에 빠졌다.그녀는 그저 고아였다. 솔직히 말해서, 유강후와 결혼하고 아이까지 있지만, 신분과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에서 그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유강후는 그녀를 귀여워했고 이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았지만, 모든 강씨 집안 식구들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그녀는 자신의 출신과 가문 때문에 그들의 아들 우림이가 강씨 집안 사람들에게 무시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더욱이 영원히 유강후의 뒤에 숨어 보호를 받기를 원치도 않았다.그녀와 유강후 사이의 길은 정말 길고도 험난했다. 하지만 그들은 굳건히 걸어갈 것이다!한옥에 돌아와서야 장화연은 자신이 너무 많은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온다연은 계속해서 침묵하고 있었다.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온다연은 이미 아기방으로 갔다. 몇 달 된 아기는 사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잠을 자며 보낸다. 지금도 역시 자고 있었다.온다연은 아이를 안고 잠시 누워있다가 일어나 조금 먹었다. 그리고 가져온 모든 책들을 서재로 옮겼다.그녀는 유강후 몰래 두 개의 외국어 과목을 새로 선택했는데, 지금은 막 입문 단계라 꽤 어려웠다.다행히 요즘은 온라인에 원어민 1:1 지도가 있어서 네이티브 화자를 통해 발음도 교정받을 수 있었다.외국어를 배우고 나서는 복습과 미리 선택한 다른 과목들을 공부했다.새벽 두 시가 되어서야 온다연은 결국 책상 위에 엎드려 잠들었다.유강후가 들어서자마자 서재의 불이 아직 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그는 양복 재킷을 벗으며 물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장화연은 그의 옷을 받으며 조용히 대답했다. “오늘 제가 실수했습니다. 해서는 안 될 말을 했고, 사모님이 다소 기분이 좋지 않아 지금까지 공부하고 있습니다.”유강후가 손을 멈추며 물었다. “무슨 말을?”장화연이 대답했다. “사모님이 강씨 집안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했고, 저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사모님께서 아무 말씀이 없는 걸로 보아,
유강후는 부드럽게 온다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나 보고 싶었어?”온다연은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아니거든요? 우림이가 보고 싶어 해서 물어본 거예요.”유강후는 애교부리는 온다연이 너무 사랑스러웠다.섬세하고 부드러운 모습은 그의 본능을 불러일으켰다.유강후는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누르고 다른 한 손으로 허리를 감싼 채 키스를 퍼부었다.몸에 밴 술 냄새가 싫었던 온다연은 있는 힘껏 유강후를 밀어냈다.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날 유강후가 아니다.그는 온다연이 입술을 깨물고서야 손을 놓았고 온다연은 숨을 헐떡이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술 마셨어요? 냄새나요.”유강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의 턱을 치켜들었다.“그래서 싫다는 거야?”사실 술은 몇 모금 마시지도 않았지만 상황이 그런지라 몸에서는 여전히 술 냄새가 났다.온다연은 그의 몸을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곧바로 표정을 잔뜩 일그러졌다.왜냐하면 술 냄새 외에 은은한 향수 냄새도 느껴졌다.“향수 냄새가 나는데... 아저씨, 나 지금 기분 나빠졌어요.”그 말을 끝으로 온다연은 등을 돌렸다.여자가 있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는걸 알면서도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가 없었다.유강후는 팔을 뻗더니 곧바로 그녀를 무릎 위에 앉혔다.“질투해?”온다연은 얼굴을 돌리며 그를 무시했다.그러자 유강후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한편으로는 질투하고 있는 온다연의 모습이 귀여운지 애정 어린 눈길로 한참이나 그녀를 관찰했다.“예전에는 왜 네가 이렇게 질투가 많은지 몰랐지?”저녁 파티는 한이준과 함께 참석했고 두 사람 모두 여자 파트너가 있었다.유강후는 이권이 준비한 새 비서를 동행했고 한이준은 갓 계약한 신인 아티스트를 데려왔다.물론 김원도도 파트너가 있었다.새 비서는 온다연과 닮은 외모로 단번에 김원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저녁 내내 예의주시하던 김원도는 그들이 호텔을 떠나자 곧바로 다른 차로 조용히 뒤를 밟았다.유강후는 차라리 잘됐다 싶어 일부러 그들은
온다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아저씨는 몰라요. 나 같은 사람이 아저씨의 곁에서 어떤 시선과 압박감을 견뎌야 하는지.”온다연은 멈칫하더니 조용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하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아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열심히 노력할 거예요.”유강후는 그녀를 품에 안고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다연아, 부담감 느낄 필요 없어. 다른 사람의 시선과 의견에 흔들릴 필요도 없고. 넌 이제 강씨 가문의 사모님이야. 누가 너한테 사사건건 시비를 걸면 충분히 꺼지라고 말할 능력이 있다니까?”유강후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온다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샤워하러 가자.”온다연은 그의 품에서 발버둥 쳤다.“전 이미 씻었어요. 너무 졸려서 자고 싶어요.”하루 종일 공부한 것도 피곤한데 유강후를 기다리느라 밤을 새서 그런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기세였다.어쩔 수 없이 침실로 향한 유강후는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은은한 조명을 켰다.그러고선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먼저자. 금방 올게.”유강후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온다연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정말 지치고 피곤했는지 침대맡에 놓인 핸드폰이 계속 깜박이는 것조차 발견하지 못했다.유강후는 핸드폰을 집어들고 자연스럽게 비밀번호를 입력했다.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건 99+ 빨간 아이콘이 떠오른 카톡이었다.유강후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카톡을 확인했고 곧바로 표정이 굳어졌다.친구 요청이 40개가 넘었고, 그중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낯선 사람이 보낸 메시지도 많이 있었다.그는 대충 아무거나 하나 클릭했다.[안녕? 난 3학년이고 유화 동아리 회장 이승기야. 우리 동아리에 가입해 줘서 너무 고마워. 내일 오후 동아리에서 유화 전시회 활동이 있으니까 꼭 참석해 줘.]‘뭐야? 이 유치한 자식은.’유강후는 기분 나쁜 티를 넘기며 다음 메시지를 확인했다.[다연아, 안녕? 난 옆 반 구지성. 이번 주말에 반끼리 소개팅 있는 거 알아? 내 파트너가 되어줄래?]유강후는 카톡
지예솔이 다른 것을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계속 말했다.“걱정하지 마. 봉현수는 아직 내가 귀국 한 걸 몰라. 내가 새로운 이름과 신분을 바꿨고 또 경원시에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지예솔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여기는 어떻게 찾은 거예요?”정연석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을 보고 마음속에 깊은 미련이 남아있었다.“솔아, 넌 나한테 그렇게 신뢰가 가지 않았어? 그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지예솔이 말했다.“저는 원래 모든 일이 잠잠해지면 예전의 친구들에게 연락하려고 했어요. 연석 오빠가 찾아올 줄을 몰랐어요. 예전에 이미 많은 폐를 끼쳤기 때문에...”정연석은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폐를 끼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도 전에 나를 도와줬던 것이 기억이 안 나?”지예솔이 말했다.“제가 도와준 것은 모두 작은 일이에요. 게다가 매번 제가 도와준 후 현수 씨가 찾아와서 괴롭혔잖아요.”정연석이 웃으면서 말했다.“맞다. 아직 너랑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이번에 귀국하고 다시 외국에 가지 않으려고 해. 최근 나는 운산시에 머물면서 이쪽 시장 상황을 둘러보고 적절하다면 본사를 이쪽으로 옮길 생각이야.”지현우는 갑자기 몸을 돌리며 말했다.“연석이 형, 운산시에서 회사를 차릴 생각인가요?”정연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나는 수출입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 2년 사이에 과일도 수출해 볼 생각이야. 내가 전에 2년 동안 조사해 봤는데 이곳은 과일 시장이 좋고 발전 전망도 커. 그런데 시장 조사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우연히 너희들의 사진을 보게 될 줄을 몰랐어.”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이건 내 친구가 저번 주 이곳에 과일나무 보러 왔다가 우연히 찍은 거야.”사진 속에는 지예솔과 지현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어두웠지만 지예솔의 그 얼굴은 유난히 눈에 띄어 사람들의 주의를 끌 수밖에 없었다.지예솔은 안도의 숨
지예솔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닐 거야, 단지 개발부만 왔을 거야·현수 씨는 이런 산업을 많이 하고 있으니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야.”지현우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저녁이 될 무렵 마당 입구에 갑자기 검은색 벤츠 두 대가 와서 멈추어 섰다.이 마을에는 이런 고급 차가 거의 오지 않았다. 차가 갑자기 문 앞에 멈추는 것을 본 지현우는 깜짝 놀라서 문을 닫으려고 하자 차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검은색 외투를 입은 그 사람은 키가 크고 잘 생겼으며 은색 테두리 안경을 쓰고 있어 매우 점잖게 보였다.지현우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놀라 소리를 질렀다.“연석이 형?”알고 보니 몇 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정연석이었다.정연석은 웃으면서 말했다.“현우 키 컸네.”지현우는 달려가 정연석을 끌어안고 기뻐서 울었다.“연석이 형, 몇 년 동안 어디에 계셨어요?”정연석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웃었다.“곧 스무 살이 다 되어가는 애가 왜 아직도 이리 어린아이 같은 거야? 너의 누나가 또 뭐라고 하겠어.”이때 인기척 소리를 듣고 나온 지 예술은 정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달빛이 흐릿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패딩을 입었지만 그 얼굴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정연석은 그녀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겨우 찾았어.”지예솔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현우는 기뻐하며 말했다.“밖이 추워요. 곧 비도 올 거 같으니 얼른 들어와요, 연석이 형.”정연석은 트렁크를 열고 말했다.“현우야, 와서 도와줘.”또 다른 차의 문도 열리자 두 명의 비서가 내려오더니 물건을 함께 집안으로 옮겼다.잠시 후 두 차의 물건을 모두 옮겨 거실에 가지런히 쌓았다.정연석은 다른 차를 돌려보내고 혼자 남았다.지현우는 흐뭇해서 그 물건들을 지켜보았고 그들이 필요한 좋은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가볍고 부드러운
“넌 이쁘고 이런 그림도 그릴 줄도 아는데, 이렇게 좋은 여자아이가 왜 아직도 남친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이모가 남자 친구 한 명 소개 해줄게...”정신을 차린 지예솔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이모,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전 아이를 낳을 수 없어서 결혼을 못 해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죠.”그녀가 집에 돌아온 반년 동안 중매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외숙모들도 그녀를 설득하면서 자신의 조카를 한번 만나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장미연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아이고! 넌 이쁘게 생기고 성격도 좋은데, 만약 이런 문제가 없다면 며느리로 들이고 싶었는데...”장미연은 채소 바구니에 담긴 채소를 꺼냈다.“여기엔 방금 뜯은 채소야, 무와 배추 뭐 이런 것들이 있어. 그리고 달걀도 금방 주운 거야.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나으니 가져다 먹어. 너의 남매는 절약하느라 채소도 별로 사지 않는 것 같더구나.”“가련한 것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 집안의 모든 가구도 중고 시장에서 사 온 거고…”“밖에 고기를 파는 노점상이 너희가 매번 고기를 반 근만 산다고 했어. 게다가 매일 사서 먹는 것도 아니라며, 이렇게 큰 성인들이 그것으로 먹자면 부족하지 않아?”...한동안 수다를 떨던 장미연은 끝내 떠났다.지예솔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지현우에게 말했다.“현우야, 그 차가 정말 봉씨 그룹의 것인지 가서 한번 보고와.”지예솔은 스쿠터를 타고 떠나려는 지현우를 붙잡고 말했다.“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가.”지현우가 말했다.“누나,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 반년도 지났어, 아마 우리를 찾는 걸 포기했을 수도 있어. 며칠 전 연예 뉴스를 봤는데 그 주연아란 연예인이 또 새로운 영화를 찍었어.”“그런 연기력으로 이렇게 큰 투자가 들어간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걸 보면 현수 형이 투자한 것일 거야. 주연아는 자신이 현수 형과 죽마고우이며 약혼할 것이라
봉현수가 말했다.“그러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비슷한 시각 남쪽의 읍내 마을에서 지예솔과 지현우가 정원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작은 정원이 딸린 농가는 반년의 시간을 거쳐 제대로 리모델링되었다.원래 낡았던 벽돌담은 다시 흰 페인트를 칠했고 진흙투성이였던 앞마당은 절반을 낡은 벽돌로 메웠으며 나머지 절반에는 채소를 조금 심어서 깔끔하고 생기가 넘쳐흘러 보였다.벽 쪽에 있는 몇 그루의 과일나무에는 겨울 대추와 감귤 그리고 감이 가득 달려서 열매들이 나뭇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집안도 다시 페인트를 칠했고 집에 쓸 수 있는 나무 가구도 다시 다듬어서 칠했다. 중고 시장에서 구매해 온 오래된 가구는 지현우가 사포로 갈아서 페인트를 새로 칠했더니 꽤 괜찮아 보였다.당연히 지씨 가문의 환상적인 럭셔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남매 둘 다 마음이 편안하고 안심이 되었다.작은 마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일하러 나갔고 외부인들도 적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택배는 도시와 별 차이가 없어서 남매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지현우는 마을의 중고 시장에서 몇백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샀다. 가끔 지예솔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읍내에 생활용품을 사러 나갔다.천천히 남매는 느린 템포의 마을 생활에 적응했다.지현우는 원래 읍내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었지만 대학 졸업장을 아직 받지 못했고 심장병도 있는 데다 봉현수에게 실마리라도 들 키울까 봐 연말까지 집에 머물면서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다.요즘 남매는 온라인 액세서리 가게에서 서서히 주문을 받고 있다. 비록 많이 벌지는 못하고 제일 큰돈도 몇만 원 밖에 안되지만 이는 남매에게 좋은 시그널이었다.지예솔은 오늘 또 다른 주문을 받았는데 재료비를 제외하고도 몇만 원 정도를 더 벌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도면을 수정했다.점심쯤 정원의 문이 열리더니 이웃인 장미연이 채소 한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