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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작게 빛나는 불빛들.”
오랜 시간을 들여 나온 대답은 이것이었다. 거의 속삭이는 것에 가까운 옆집 여자의 작은 목소리는 어째선지 그에게 분명하고 명확하게 와닿았다. 지난날 그녀의 집에서 본 어두운 거실 테이블 위에 작게 새어 나오던 조명이 떠올랐다.
“그리고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가 재차 물었다.
“......솜사탕”
“단 걸 좋아할 것 같진 않았는데.”
“그냥. 물에 닿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게… 좋아요.”
대답을 끝으로 여잔 우유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걸 따라 해이 또한 잔에 든 우유를 잠시 바라보다가 한 모금 마셨다. 따듯한 우유는 생각 외로 맛이 좋았다.
“전 더위를 많이 타서 차가운 음식을 좋아해요.”
그런 것 같긴 했다. 마주칠 때마다 더워 보였던 데다 옅게 땀 냄새가 났으니까. 언젠가 학생이 본인의 윗옷을 앞뒤로 흔들며 작은 바람을 만들던 모습까지 연달아 떠오르자, 재이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흘끗 에어컨 온도를 살폈다. 뜨거운 남자의 체온에 맞게 온도를 좀 더 낮춰줘야 할까를 잠시 고민하다가 제법 정상적인 걸 생각하고 있는 저를 깨닫곤 잠시 놀란 얼굴을 했다.
이런 평범한 생각을 한 건 오랜만의 일이었다.
“체육 교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 중이고. 훈련 외에도 운동 자체를 좋아해서 웬만한 스포츠는 곧잘 해요.”
어쩐지 신이 나서 이야기하는 청년을 여자가 빤히 응시했다.
“술도 잘 마셔요. 주량은 딱히 세보진 않았지만, 소주 다섯 병 정도로는 취하지도 않아요.”
“근데 이건 비밀이 아니지 않나요?”
“그냥 내가 얘기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요?”
그제야 해이는 저가 주절주절 떠들고 있었다는 사실과 이렇게 떠들어댄 것만큼 옆집 사람의 정보도 자신이 알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았다. 줄곧 이 여자를 궁금해했다는 걸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전 남편을 찌르고 도망쳤어요.”
마치 ‘점심으론 라면을 끓여 먹었어요.’라고 말하는 듯이 별 대수롭지 않은 음색이었다. 그래서 듣는 사람조차 그것이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별다른 대꾸가 없으니, 여잔 자신의 이야기를 덤덤히 이어 나갔다.
“어떻게 됐는지 확인하진 않았지만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르죠.”
남자의 정신이 돌아온 건 그때였다. 그렇다곤 해도 대답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이 돌아온 건 아니어서 옆집 여자의 말을 더 기다려야 했다.
“...나는 DR 제약회사가 후원하는 보육원에서 자랐어요. 그곳에선 나름의 서열이 있었고, 그런대로 잘 버티며 지내왔어요.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보육원을 나가야 했기 때문에 바로 일자리를 구해야 했어요. 그러던 중에….”
무언가 목에 얹힌 것처럼 잠시 말을 멈춘 그녀가 마른침을 한 번 삼켜냈다.
“DR 제약 사장님이 절 찾아왔어요.”
그날의 일은 아직도 재이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자리 잡혀 있었다. 그는 재이의 후원을 약속했고, 의식주는 물론이고 재이가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모든 걸 지원해 주었다. 덕분에 그녀는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복지학을 선택한 건 자신과 같은 입장의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여잔 졸업한 이후 사회복지사로 근무했다. 기회가 된다면 직접 보육원을 설립하고 싶다는 원대한 꿈도 있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던 때, 후원자에게서 결혼 제의를 받았다. 딱히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두 사람은 자연스러운 이치처럼 결혼했다.
그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결혼한 지 채 일 년이 되지 않아서였다.
“...여기가 어디예요?”
“기도드리는 곳이야. 영험한 곳이니까 깨끗한 마음가짐으로 임해”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면 그곳은 처음부터 께름칙한 곳이었다. 기도원 안엔 신자들이 단체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단상에 선 교주를 우러러보며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교주를 향한 경외에 찬 눈빛이 매우 기괴했다. 그 모습을 다소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응시하던 여자가 제 남편을 바라봤다.
그는 시종일관 진지한 얼굴로 기도에 응했다. 그들은 죄다 하얀색의 천을 어깨 위에 두르고 있었다. 곧 기도를 끝낸 신자들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발목 아래까지 오는 긴 망토 자락이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휘날렸다.
“기도실에 들어가면 처신 잘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고개 숙이고 있어. 알았어?”
싫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재이는 저가 부정의 말을 꺼낼 때 남편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알고 있었다. 마지못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아내를 어디론가로 끌고 갔다. 기도원의 끝 방에 당도한 그는 짧게 문을 두드리곤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엔 조금 전 단상에 있던 교주와 두 명의 신자가 서 있었다.
“자매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자, 제 앞에 서시지요.”
인자한 웃음으로 두 사람을 맞이한 교주는 재이를 향해 제 앞쪽을 가리켰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교주 앞에 섰다. 그러자 그가 성수라고 칭한 무언가를 그녀 머리 위로 부었다. 잔에 든 물이 재이의 머리를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몸을 깨끗이 하는 의식을 치렀습니다. 이젠 옷을 다 벗어주십시오.”
“...네?”
당황함에 숙였던 고개를 들자마자 남편의 손이 날아들었다.
“천박하게 뭐 하는 짓이지?”
“......여보.”
맞은 뺨이 얼얼했다. 한쪽 손으로 부어오른 뺨을 움켜잡고 있으니 이내 반대쪽 뺨까지 사내의 손이 날아들었다. 힘에 못 이겨 중심을 잃은 재이의 몸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런 여자를 일으켜 세워주는 손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못 본 새 많이 자란 재영을 보며 그가 아이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나름 애정 표현이었지만, 아이는 한껏 짜증을 부렸다.“하지 마!”“키가 많이 컸네?”그는 아이의 신경질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네 사람은 식탁에 앉아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식사를 이어갔다. 정희는 행복해 보이는 부부를 다정하게 응시하며 입을 뗐다.“너무 축하해요. 결혼식에도 가고 싶었는데.”그들이 먼 지방으로 오게 되면서 재영과는 전처럼 자주 볼 수 없게 되었다. 결혼식을 동네 마을회관에서 조촐하게 했기 때문에 재영의 가족이 오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재이는 고개를 저으며 되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아니에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저희가 더 죄송했어요. 오늘 이렇게 먼 길 와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저희가 감사드리죠. 재영이가 빨리 가고 싶다고 얼마나 노래를 불렀는데요.”“나도 재영이 너무 보고 싶었어. 오늘 와줘서 정말 고마워.”재이의 상냥한 목소리에 재영은 얼굴을 붉혔다. 기차 타고, 배 타고 버스 타고 도착한 동네는 바다도 있고 공기도 맑은 아주 좋은 곳이었다. 그런 데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인 재이가 살고 있기도 했다.“누나는 이제 서울에 안 와?”하지만 그렇긴 해도 한 번 오갈 때마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재영은 제 맞은
쿵, 쿵, 쿵그녀에겐 익숙한 소리였다. 점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사나워지자, 재이는 깊어지는 한숨을 속으로 삼켜내며 입을 삐죽였다.아마 그는 포기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뭐 하는 거예요?”“......”“재이, 뭐 하는 거냐고 묻고 있잖아요. 빨리 문 열어요. 나 정말 화나려고 해.”“오늘은 날 가만히 놔둔다고 약속했잖아요.”굳게 잠긴 방문 앞에 서서 달래듯 속삭이니 남자의 짜증을 억누르는 소리가 들렸다.“하, 그래서 알겠다고 했잖아. 손이 멋대로 움직이는 걸 나더러 어떡하라고….”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던 남자가 별안간 조용해졌다. 여잔 문에 바짝 귀를 갖다 붙였다. 포기하고 자리를 옮기는 모양인지 인기척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그것에 안도해, 손가락 하나 정도 빠져나갈 만한 틈을 두고 문을 열어 바깥을 확인했다.그때, 익숙한 모양새로 문이 벌컥 열어젖혀졌다. 문손잡이를 잡고 있었던 재이의 몸도 힘없이 딸려 나왔다. 이것 역시 익숙한 모양새였다.“잡았다!”남자의 얕은수에 보기 좋게 당한 재이는 그에게 허리를 붙들린 채 보기 드물게 인상을 찌푸렸다.“그러게, 누가 문을 잠그랬나.”그
*이번 회차는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이용 시 유의 바랍니다.남자는 보육원을 둘러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여긴 고민 있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상담 신청을 하고 선생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는 공간이에요. 아이들이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후련해진다며 자주들 찾아요.”지나치는 교실마다 족족 이러쿵저러쿵 설명을 덧붙이는 원장의 말을 무시하고 상담실 창 너머로 보이는 한 여자를 바라봤다.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소녀는 책상 위에 있는 화분을 허리 굽혀 응시하며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무엇을 보고 저리 작게 미소 지을까.남자의 시선이 상담실 어딘가를 오래도록 응시하자, 원장도 그 눈길을 따라갔다.‘저 앤 왜, 하지 말라는 짓을 저리 성실히 하고 난리래?’곧 상대를 알아본 원장은, 난을 돌보는 소녀의 모습에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돌도 안 돼서 들어 온 친구인데, 얌전하고 착해요. 이번 신약 실험 조에 넣으려고요.”원장의 말에 순간 남자의 미간이 좁아졌다.돌연 자신도 알 수 없는 묘한 조급증이 밀려들었다.“아뇨. 저 친구는 빼세요.”“네? 왜….”실험 조의 아이들을 그가 관리하는 일이 그동안 없었기 때문에 순간, 원장의 얼굴에
“...책임질게요.”“정말?”은밀하게 속삭이는 말에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 후회하지 말아요.”후회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아직도 쫓기는 사람처럼 조급하게 구는, 불안한 청년을 다소 안타깝게 응시했다. 그의 불안은 자신에게 기인한다는 걸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여잔 먼저 용기 내어 남자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붙였다. 그 얄팍한 애정에도 버겁도록 행복해하는 사내의 반응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사랑해요. 내게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서로의 입술이 닿았던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여자의 숨과 뒤섞인 말들이 사내의 입술을 간지럽혔다. 그 애간장을 녹이는 언행에 그는 저도 모르게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재이,”바로 곁에 있는데도 제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행동에 여잔 그저 눈을 맞추고 웃어주었다. 그러자 남자의 눈빛이 한층 어두워지고 깊어졌다. 어느새 남자에게 몸이 들려 붕 떠 있는 걸 자각한 재이가 서둘러 사내의 목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뭘 하려고요?”“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뭘 할 것 같아요?”뻔한 답 앞에서 괜한 씨름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는 곧장 침실로 이동해 여자의 몸을 조심히 내려놨다. 침대 위에 눕혀져 남자가 하는 양을 지켜보니, 그가 조급함이 느
서로의 몸이 닿을 정도로 밀착된 두 사람은 잠시 시선을 맞추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배시시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재이는 남자의 귓가에 속삭였다.“내가 사랑하는 건 당신뿐이에요.”“정말?”구태여 되묻는 이유는 그녀의 애정을 계속해서 느끼고 싶어서였다. 그에 재이는 귀찮아하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랑한다, 말했다.“이따가 데리러 올게요.”여자 친구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가 흘끗 그녀의 어깨 너머 아이들을 바라봤다. 도담 반은 제 선생님의 연애를 바로 곁에서 직관할 수 있는 행운이 있었다. 뭐에 그리 즐거운지 키득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졌다.“이만 가요.”“잠깐.”이미 제가 재이를 쫓아다니며 애정을 구걸한다는 걸 모든 꼬맹이가 아는 마당에 여기서 더 티를 낸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급작스럽게 다가온 남자의 입술이 재이의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가 금세 달아났다. 남잔 벙찐 얼굴을 한 여자의 볼을 장난스럽게 손으로 툭 건들곤 빠르게 두세 걸음 자리에 멀어졌다.“사랑해요!”남자의 익숙한 사랑 고백에 새삼스럽게도 여자가 얼굴을 붉혔다. 뒤에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더 짙어졌다.-“해이.”&ldq
“선생님!”“왜.”“그렇게나 좋아요?”운동장 계단에 앉아 어린이집 건물 어딘가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체육 선생님을 이현이 어쩐지 불손한 표정으로 응시했다.그는 제자를 쳐다도 보지 않고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좋아 죽겠다, 아주.”“재이 선생님은 쌤, 그렇게까지 좋아하진 않는 것 같던데.”“뭐?!”아이가 장난으로 하는 말에도 그냥 넘어가지 못하겠는지 그가 버럭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생의 난데없는 고함에 놀란 아이는 하마터면 계단 밑으로 나동그라질 뻔했다.“깜짝 놀랐잖아요!”“이현이 너! 내가 얼마나 재이한테 사랑받고 있는데 그런 소릴 하는 거야?”“그렇잖아요! 재이 선생님은 쌤, 귀찮아하잖아요!”지지 않고 대꾸하는 말에 그가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주춤했다.귀찮아하다니. 그럴 리가 없다.물론 귀찮을 정도로 들러붙긴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자신을 귀찮아할 리가 없었다. 늘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안아주고 뽀뽀해 주고 손잡아주고 그러는데….그렇지만 다시 떠올려보니 그건 다 어리광 부리는 자신을 달래주기 위한 용도로, 습관처럼 행하는 애정 표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에 진심이 깃들어 있던가.문득 조급한 마음이 든 남잔 성큼성큼 운동장을 가로지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