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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이번에는 네가 책임져

Auteur: YuIm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10-04 13:16:57

서율은 사진 속 동생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렸다. 옆에 선 남자의 팔만 남았다. 낮의 결혼식에서는 다른 남자의 팔을 잡았을 텐데, 서우는 벌써 옷까지 갈아입고 웃고 있었다.

[아빠한테 연락해.]

답장을 보내자 기다렸다는 듯 전화가 왔다. 서율은 거실을 둘러보고 창가로 옮겨 앉았다.

“언니, 지금 통화 돼?”

“돈 없다고 말하려고 받았어.”

“없긴 왜 없어. 그 사람 집에 있잖아.”

전화기 너머로 음악이 흘렀다. 서우는 소리가 덜 나는 곳으로 움직였는지 잠깐 숨을 골랐다.

“언니가 달라면 주겠지. 아빠는 지금 돈 얘기만 하면 소리 질러.”

“그래서 나한테 하는 거야?”

“그럼 내가 누구한테 해. 거기 내 전화 두고 갔지? 은행 앱 열어봐. 아빠가 보내둔 돈이 있을지도 몰라.”

서율은 손바닥 아래의 전화기를 내려다봤다. 동생의 지갑과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도 그 안의 돈을 쓰지는 않았다. 돌아올 때 돌려주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안 열어.”

“왜 이렇게 빡빡하게 굴어? 나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야.”

“나도 장난 아니야. 차태혁 씨한테 돈 달라고 못 해.”

“잘해주나 보네. 벌써 그 사람 편 들어?”

그 말에 서율은 붙잡고 있던 커튼을 놓았다. 낯선 집에서 보낸 하루를 동생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입술이 왜 터졌는지 묻지도 않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네가 돌아와서 해결해.”

“나 돌아가면 언니는?”

서우가 웃었다. 아까 사진에서 보았던 표정이 저절로 떠올랐다.

“아빠가 그냥 나가게 해줄 것 같아? 차태혁이 언니한테 속았다는 걸 알면 어떻게 할 건데.”

서율은 대꾸를 못 했다. 서우는 그 침묵을 거절이 끝난 신호로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서로 좋게 하자. 내가 계좌 보내줄게. 오늘 다 못 보내면 우선?”

“안 보낸다고.”

이번에는 동생 쪽에서 말이 끊겼다.

“나 그 사람하고 어제 결혼식도 안 올렸어. 회사 일도 몰라. 그런데 네가 달라고 했다는 이유로 무슨 돈을 받아내?”

“언니.”

“이 전화도 네 거잖아. 네 돈이 있는지 없는지는 네가 알아봐. 나는 남의 계좌 못 만져.”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율은 돌아보지 않고 통화를 끝냈다. 곧바로 다시 전화가 왔지만 이번에는 받지 않았다.

차태혁이 소파 가까이 와 있었다.

“누구야?”

서율은 화면을 껐다.

“돈 달라는 사람이요.”

“어떤 돈.”

“제가 줄 이유 없는 돈.”

태혁이 손을 내밀었다.

“줘봐.”

서율은 전화기를 무릎 쪽으로 당겼다. 조금 전 동생에게 단호하게 말할 때와 달리 목소리가 작아졌다.

“싫어요.”

“협박하는 것 같은데.”

“그럼 더 보여드리기 싫죠.”

그의 손이 그대로였다. 서율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밀려난다면 동생이 요구한 돈보다 더 큰 것을 잃을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짜준 거짓말을 계속할 자신도 없었지만, 들키는 순서를 동생에게 정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가 먼저 이야기할게요. 지금은 말고요.”

차태혁은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대답을 재촉하는 대신 손을 거뒀다.

“오늘 다시 돈 보내라고 하면 답하지 마. 먼저 송금부터 하지 말고.”

“안 한다고 했잖아요.”

“얼굴은 금방이라도 하겠다고 할 것 같아서.”

서율은 꺼진 화면에 비친 얼굴을 보았다. 속상한 것인지 겁이 난 것인지 자신도 알아보기 어려웠다.

“한 번 거절하는 것도 힘들었어요. 두 번 하게 만들지 마세요.”

태혁은 소파 건너편에 앉았다. 서율이 움켜쥔 전화기에는 더 손을 뻗지 않았다.

“그럼 안 보낸 걸로.”

그 한마디에 서율은 전화기를 가방에 넣을 수 있었다. 다 끝난 일은 아닌데, 잠깐 끝난 것처럼 앉아 있을 수는 있었다.

탁자 위의 목록이 눈에 들어왔다. 접힌 종이 끝에 나무 붓통이라고 적혀 있었다. 태혁이 그쪽을 턱짓했다.

“그건 다 적었어?”

서율은 종이를 집어 들었다.

“책 한 권만 먼저 받아야 할 것 같아요. 나머지는 나중에 가져오고요.”

“아까 적던 것들?”

“네. 맡아둔 물건이 있어서요. 내일까지 돌려드리기로 했는데 여기 오느라 못 끝냈어요.”

“당신 책이 아니고?”

서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거짓말을 보태지 않았다. 태혁이 왜 남의 책을 맡아두었느냐고 물으면 다도실에서처럼 어머니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남았는데.”

“확인해봐야 해요. 젖은 데가 있어서 말려두고 왔거든요.”

“여기로 가져오면 되고?”

서율은 목록을 접었다 폈다. 그 앞에서 작업을 한다면 손을 숨길 수도, 서우인 척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시간을 더 미루면 책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도 거짓말을 하게 된다.

“받을 수 있게만 해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할게요.”

태혁은 강 비서를 불렀다. 서율이 요청할 물건을 먼저 듣게 하고, 본인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가 사라지자 강 비서는 펜 대신 전화기를 꺼냈다.

“회장님께 바로 연락드리면 되겠습니까?”

“집을 관리하는 분한테 제가 먼저 할게요. 기사님만 보내주실 수 있어요?”

“네. 포장 상태부터 확인해달라고 전하겠습니다.”

서율은 아까 문자를 보냈던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진규가 안쪽에 있느냐고 묻는 말부터 나왔다. 직원은 본채에 손님이 와 있다며 목소리를 낮췄다.

“책은 손 안 댔어요. 그런데 내일 회장님이 별채를 비우라고 하셔서요.”

서율은 급히 종이를 펼쳤다.

“작업대 위에 펼친 책 있죠. 그건 접지 마세요. 아래 받침하고 같이 보내주시면 돼요.”

“그 큰 판째로요?”

“네. 번거롭겠지만 그게 제일 안전해요. 기사님이 오시면 들어주실 거예요.”

서율은 물건을 하나씩 짚어 설명했다. 흰 끈으로 묶은 책은 의뢰받은 것, 붓통 밑의 작은 장부는 자기 것. 옆방에 쌓인 상자는 건드리지 않아도 됐다.

직원이 확인하며 되묻는 동안, 목록에서 몇 항목이 지워졌다. 도구 전부를 가져올 수는 없어도 남의 물건만은 아버지 마음대로 치우게 둘 수 없었다.

“주인분 연락처도 찍어 보내주세요. 제가 직접 사과드릴게요.”

전화를 끊자 강 비서가 물었다.

“본인 물건도 더 챙기시겠습니까?”

서율은 잠깐 망설였다.

“일단 책부터요. 다른 건 목록 남겨놓을게요.”

강 비서는 재촉하지 않고 기사에게 연락했다. 서율은 그제야 어깨를 등받이에 기댔다. 동생에게 돈을 못 준다고 말하는 것보다 낡은 책 한 권을 받아오는 일이 더 구체적이고 힘에 부쳤다.

잠시 뒤 의뢰인 번호가 도착했다. 서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 쪽으로 걸어갔다. 통화가 연결되자 어머니보다 조금 나이 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회장님 댁이죠? 책 때문에 전화 기다렸어요.”

“네. 맡아 작업하던 사람입니다. 하루 늦어져서 죄송해요.”

서율은 책 가장자리에 먹이 번진 사실까지 숨기지 않았다. 훼손된 부분을 먼저 확인시켜드리고, 원하지 않으면 남은 대금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많이 상했어요?”

“글자에는 안 닿았어요. 그래도 원래 없던 자국이라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우리 아버지 책이거든요. 옆에 적어놓으신 글씨만 남아 있으면 돼요.”

서율은 벽에 등을 기대었다. 아버지가 남긴 책이라서, 내일 돌려받으려 기다렸던 사람이었다.

“그 부분은 그대로 있어요. 사진 보내드릴게요.”

“그럼 너무 서두르지 말아요. 숨도 좀 쉬고.”

그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빠르게 설명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서율은 감사하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에는 이름부터 말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오늘은 아직 그 한마디가 어려웠다.

거실로 돌아오자 태혁이 작은 식탁을 비우고 있었다. 다친 손에는 파일을 들고, 멀쩡한 손으로 컵을 옮기고 있었다.

“그쪽 말고 여기 쓰면 되겠지?”

“제가 치울게요. 손에 든 것부터 내려놓으세요.”

“안 다친 손으로 하고 있는데.”

“파일 든 쪽은 다쳤잖아요.”

그는 파일을 내려놓고 서율이 다가올 자리를 내주었다. 서율은 컵을 들어 주방 쪽으로 옮겼다. 두 번째 컵을 받으려는데 태혁이 멈췄다.

“책 주인이 뭐래?”

“기다려주신대요.”

“혼내지 않았고?”

“제 잘못은 맞아요.”

“그렇다고 무조건 혼나는 건 아니잖아.”

서율은 컵 손잡이를 만졌다. 작업 실수를 말했는데도 연락해줘서 고맙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에게 변명하지 않으려고 익힌 말투로 다른 사람에게까지 사과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녀는 시선을 들어 태혁을 보았다.

“이렇게 펴놓으면 내일 아침 드실 데가 없는데요.”

“밥 먹을 자리는 많아.”

“하루만 쓸게요.”

“내일 돌려주기로 했다며. 오늘만 쓰겠다고는 안 하네.”

서율은 조금 웃었다. 지금 한 약속 하나라도 더 지키고 싶었다.

밤이 깊어 기사에게서 포장 사진이 왔다. 작업판째 고정된 책이 보였다. 사진을 확대해 모서리를 확인한 서율은 알겠다는 답을 보냈다. 아침 일찍 가져오면 책 상태를 보고, 의뢰인에게 보낼 사진을 찍을 참이었다.

태혁은 책을 받을 때 필요하다는 빈 상자까지 확인한 뒤 집무실로 돌아갔다. 서율은 서우가 보내온 사진과 메시지를 따로 저장했다. 삭제하면 잠깐 편해지겠지만, 나중에 동생이 한 적 없는 말이라고 잡아뗄 때 또 혼자 대답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답장을 보냈다.

[돈 안 보내. 네가 벌인 일은 네가 설명해. 이번에는 내가 못 해.]

전송 표시가 뜨자 전화기를 엎어놓았다.

잠시 뒤 식탁 위에서 다시 진동이 울렸다. 서율은 안 보려다 화면을 켰다.

[그래. 나 한국 들어갈 거야.]

[내가 돌아가도 거기 있을 자신 있어?]

서율은 답장창을 열지 않았다. 대신 아침에 가져올 책의 사진을 다시 띄워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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