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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남겨진 동선

Author: YuIm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04 13:17:01

강도윤이 집무실 문을 닫았다. 태혁은 화면에 떠 있는 예식장 사진을 보고 있었다. 낮의 신부는 왼손으로 꽃다발을 받쳐 들었고, 드러난 오른손에는 보석 반지가 두 개나 끼워져 있었다.

“한양 쪽 설명하고 맞지 않습니다.”

강 비서가 태블릿을 탁자에 놓았다.

“식이 끝난 뒤 신부가 친정에서 쉬었다고 했는데, 예식장에 남은 차량 배차에는 인천행으로 적혀 있습니다. 한 회장님 수행기사는 본인이 데려다주지 않았다고 하고요.”

“차는 누가 불렀습니까?”

“신부 측에서 직접 예약했습니다. 정확히 누가 타고 어디까지 갔는지는 운전기사 확인이 필요합니다.”

태혁은 사진을 넘겼다. 신부가 고개를 돌린 옆모습이 나왔다. 목걸이 장식 뒤로 맨살이 조금 보였지만, 점이 있고 없고를 가려낼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화면을 확대하다 멈췄다. 어젯밤에는 코앞에 있는 신부의 얼굴보다 입술의 상처를 먼저 봤다. 그 상처를 확인하려 하자 여자는 손부터 피했다.

“인천항 쪽 제보는?”

“한서우 씨와 닮은 여자를 봤다는 연락입니다. 동행한 남자가 카지노 손님을 데려가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아직 같은 사람이라고 단정할 자료는 없습니다.”

“그럼 확인된 것하고 나눠서 적어요. 닮았다는 이유로 끝내지 말고.”

강 비서는 다른 화면을 열었다. 이번에는 펜트하우스 출입 시각이었다. 한진규와 서율이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모습이 보였다.

“밤에 이쪽으로 들어온 차는 별채에서 출발했습니다. 운전기사는 한 회장님 지시로 모셨다고 합니다.”

“별채.”

태혁이 낮게 되뇌었다. 여자에게 필요한 물건은 옷이나 보석이 아니었다. 오래 쓴 붓통과 남의 책, 어머니가 남긴 서책이었다. 무엇을 어디에 두었는지도 망설이지 않고 설명했다.

한서우가 잠깐 쉰 방에서 챙겨 올 짐치고는 생활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한진규 집에 같이 사는 딸이 더 있는지부터 확인해요.”

강 비서가 고개를 들었다.

“가족관계 서류를 다시 요청할까요?”

“한 회장이 골라준 종이 말고. 행사에 온 가족 명단이나 오래 일한 사람들 이야기도 들어보고.”

“모친 성함은 진혜경으로 확인됩니다. 본채 직원들은 별채 쪽 이야기를 꺼리는 편입니다.”

태혁은 손을 펴다가 미간을 접었다. 다친 자리가 당겼다. 강 비서가 약 봉투를 가까이 옮겨주었다.

그는 봉투를 보지 않은 채 물었다.

“어제 입술 다친 건 아는 사람 있습니까?”

“메이크업 담당자가 도착했을 때 이미 상처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다쳤는지는 듣지 못했답니다.”

“시간은.”

“저녁 9시가 조금 넘어서요.”

태혁은 낮의 예식 사진을 다시 봤다. 신부는 활짝 웃고 있었다. 밤에 온 여자는 같은 색 립스틱 아래로 피를 숨기고 있었다.

강 비서는 한동안 말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확인되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뭘요.”

“지금 계신 분 말입니다. 한서우 씨가 아니라면요.”

태혁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거래 상대가 이름을 바꿔 사람을 보내놓은 거라면 당장 책임부터 물으면 됐다. 한진규가 빌리려는 돈에는 충분한 조건을 걸어두었다.

그런데 집 안에서 기다리는 사람까지 같은 방식으로 정리하는 장면은 떠오르지 않았다. 여자는 조금 전 책을 받을 자리가 생기자 고맙다는 말 대신 수건부터 가지러 갔다.

“짐작으로 사람 하나 정리하는 취미는 없어.”

그는 파일을 닫았다.

“확인부터 해요. 서류에 더 서명받는 일은 없게 하고.”

“알겠습니다.”

강 비서가 나간 뒤에도 태혁은 일어나지 않았다. 신부가 낮과 밤에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젯밤 자신이 불렀던 이름도 틀렸다. 이름을 부르지 말라던 여자의 말이 뒤늦게 돌아왔다.

그때 이유를 물었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

태혁은 더는 화면을 보지 않고 집무실을 나왔다.

거실은 비어 있었다. 식탁 위에는 상자를 받을 자리가 반듯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침실 문은 조금 열려 있었고, 서율은 침대가 아니라 창가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휴대전화와 종이 한 장을 무릎에 올려둔 채였다.

그가 문턱에서 멈추자 서율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그 말은 내가 해야 할 것 같은데.”

서율은 무릎의 물건을 급히 챙겼다. 태혁은 전화 화면을 보지 않으려고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앉아 있는 것도, 다 안다는 듯 굴며 떠보는 것도 지금은 내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그러다 목 아파.”

“기다린 건 아니에요.”

“안 물었어.”

서율은 입술을 다물었다. 그 사소한 동작에도 상처가 남은 쪽이 조금 당겼다. 태혁은 의자 등받이에 걸린 가운을 집어 그녀에게 건넸다.

“아직 아파?”

그녀가 손등을 입가에 댔다.

“이젠 괜찮아요.”

묻고 싶던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다. 누가 때렸는지. 왜 자기 집에 있는 동안에도 매번 몸을 움츠리는지.

하지만 서율이 일어서다가 비틀거리는 바람에 그는 팔부터 내밀었다. 손끝이 팔꿈치에 닿자 그녀가 곧바로 균형을 잡았다.

“다친 손 쓰지 마세요.”

“다른 손이야.”

서율이 자기 팔을 받친 손을 내려다봤다. 틀린 말을 한 게 민망했는지 시선을 피했다. 태혁은 웃지 않았다. 팔을 놓아주고 비켜섰다.

“내일은 좀 늦게 일어나도 돼.”

“책이 일찍 와요.”

“그 책이 당신보다 늦게 자겠군.”

이번에는 서율의 입가가 조금 풀렸다. 태혁은 그녀가 침대에 눕는 걸 확인하고 조명을 낮췄다. 닫을까 하던 문은 그대로 두었다.

***

아침 8시가 조금 지나 책이 도착했다.

서율은 포장을 풀기 전에 운송 상자부터 살폈다. 어젯밤 사진에서 보았던 완충재가 그대로였다. 기사에게 인사를 하고 책을 식탁에 옮기자 가슴 한쪽이 비로소 내려앉았다.

기다려달라고 쓴 메모가 아직 붙어 있었다.

[건조 중. 손대지 말 것.]

서율은 메모를 떼어 옆에 놓았다. 종이 가장자리의 먹 자국은 남아 있었지만 글씨가 적힌 곳까지 번지지는 않았다. 빛을 옆으로 비추어 들뜬 부분을 보고, 의뢰인에게 보여드릴 사진을 찍었다.

책 뒤쪽에는 작은 장부가 함께 포장돼 있었다. 직원이 부탁한 대로 챙겨준 것이었다. 서율은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내려다, 그 아래 종이봉투 하나가 더 들어 있는 걸 발견했다.

한양유통 로고가 찍힌 봉투였다.

[오전 중에 전화해라. 누구 앞에서도 별채 얘기 하지 말고.]

서율은 메모를 접어 장부 안에 넣었다. 버리지 않았다. 그 위에 어제 적던 목록을 얹고 다시 책을 폈다.

곧 태혁이 거실로 나왔다. 그는 식탁 끝에 놓인 서류 대신 펼쳐진 책부터 보았다.

“무사해?”

“네. 포장 잘해주셨네요.”

“밤새 걱정하더니.”

서율은 말없이 사진을 확인했다. 가까운 곳에서 발걸음이 멈춰도 책을 덮을 이유는 없었다. 태혁은 맞은편 의자에 앉아 의뢰인의 답이 오는 소리를 들었다.

[사진 봤어요. 적어둔 글씨가 잘 보이네요. 이 정도면 괜찮습니다.]

서율은 화면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처음으로 어깨에 힘을 뺐다.

“혼나진 않았네.”

태혁의 말에 서율이 고개를 들었다.

“자꾸 놀리실 거예요?”

“웃으니까 보기 좋아서.”

서율은 화면을 껐다. 말을 돌릴 다른 물건을 찾다가 그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약은 드셨어요?”

“먹을 거야.”

“밥도 안 드셨는데 커피부터요?”

태혁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서율이 다시 책을 보자 그제야 입가에 웃음이 났다. 자신을 속인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과, 약 한 번 먹었느냐고 묻는 목소리가 같은 자리에 겹쳤다.

강 비서가 서류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서율은 반사적으로 책장을 닫으려다 손을 멈췄다. 방해될까 싶어 물러나던 버릇이었다.

“그대로 두세요. 잠깐 보고만 드리겠습니다.”

강 비서가 먼저 말했다. 서율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두 남자가 집무실로 들어간 뒤에도 책장이 한동안 넘어가지 않았다.

문이 닫히자 강 비서가 파일을 꺼냈다.

“예식장 차량 운전기사와 연락됐습니다. 신부와 남자 한 명을 인천의 숙박시설 앞에 내려줬답니다. 친정에는 가지 않았고요. 예식장에서 나간 시각도 내부 영상과 맞습니다.”

태혁은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회장이 밤까지 데리고 있었다는 말은 거짓이군요.”

“네. 밤에 오신 분이 본채가 아니라 별채에서 옷을 갈아입었다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두 사람의 기록이 비로소 같은 시각에 다른 장소를 가리켰다. 더는 신부가 피곤해서 말투가 달라졌다고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태혁은 벽 너머 식탁 쪽을 보았다. 책 한 권을 돌려주려고 하루를 쩔쩔매던 여자가, 얼마나 큰 거짓말을 들고 이 집에 들어온 것인지 자신도 아직 가늠할 수 없었다.

“한 회장에게 오늘 점심에 만나자고 해요.”

강 비서가 일정을 확인했다.

“사모님도 함께 모실까요?”

태혁은 문 쪽으로 걸었다.

“그건 직접 물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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