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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or: 맑은 물결 한 자락
갑자기 전각 문이 열렸다.

타나오윤이 밖으로 나오더니, 나를 내려다보았다.

“황후를 시중들라 했더니, 이런 식으로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느냐?”

조금 전 사람이 와서 전갈을 전했다.

타나오윤은 아마 정사를 보러 가려는 모양이었다.

그는 내게 당장 들어가 신은수의 목욕과 환복을 시중들라 명했다.

물을 받아 안으로 들어갔을 때, 신은수의 얼굴에는 혈색이 곱게 돌고 있었다.

뜨거운 물이 가득 담긴 나무 대야는 몹시 무거웠다.

손목에는 늑대 송곳니 팔찌에 짓눌린 자국이 아직 선명했고, 대야가 너무 무거운 나머지 몇 번이나 미끄러질 뻔했다.

한편 신은수는 내 앞에 발을 내밀어 길을 막으며 방긋 웃었다.

“이봐, 조심하시게. 본궁은 지금 폐하의 아이를 품고 있네. 행여 넘어지거나 데기라도 하는 날에는 자네 목숨 하나로도 모자랄 것이야.”

나는 가까스로 대야를 바로잡았다.

그 순간 뜨거운 물이 손등에 튀어 피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참 가엾기도 하지. 예전에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힐 일 없이 귀하게 살더니, 이제는 물 한 대야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다니.”

주위에 아무도 없자 신은수는 더는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대놓고 시비를 거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나는 소리 없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반역자.”

신은수는 노여워하기는커녕 입꼬리를 올린 채, 처참해진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진하선, 넌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구나. 복사꽃가루만 닿으면 어김없이 몸이 붉게 돋고 괴로워했지.”

신은수는 본래 나와 허물없이 지내던 벗이었다.

무장 가문에서 태어났고, 아바마마께서도 신 장군을 늘 믿고 중히 여기셨다.

그런데 나라가 무너지던 날 가장 먼저 등을 돌린 이들이 바로 신씨 가문이었다.

내가 처음 냉궁에 갇혔을 무렵, 신은수가 남몰래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신은수는 내게 말했다.

“점쟁이가 그러더구나. 우리 신씨 가문의 딸은 타고난 귀한 운명을 지녔으니, 마땅히 황후가 될 팔자라고.”

“누가 네 아버지와와 태자 오라버니더러 그리도 분수를 모르라 했겠느냐.”

그제야 알았다.

그것이 신씨 집안이 나라를 팔아넘긴 이유였다.

신은수는 다시 늑대 송곳니 팔찌를 꺼내 내 눈앞에서 자랑하듯 흔들었다.

“고충이 심장을 갉아먹는 고통이 제법 견디기 힘들지?”

“참 하선아, 너는 아직 모르고 있나 보구나. 십 년 전 현유림(玄幽林)에서 타나오윤을 구한 이는 분명 너였는데... 헌데 그가 돌아오신 뒤에는 어째서 그토록 너를 차갑게 대하는지 아느냐?”

“그분은 자신을 구한 사람이 나인 줄 알고 있거든.”

신은수는 말을 마친 뒤, 내가 놀라 괴로워하는 모습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내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와 타나오윤 사이에는 망국의 원한과 가족의 피맺힌 한이 가로놓여 있었다.

고작 목숨 한 번 구해 준 은혜로 그 모든 것을 어찌 덮을 수 있겠는가.

나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이리될 줄 알았더라면, 그때 현유림에서 그냥 죽게 내버려 두었을 것인데.”

이때 등 뒤에서 싸늘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흠칫하며 돌아보았다.

그러자 타나오윤은 곧장 손을 뻗어 내 목을 틀어쥐었다.

서늘한 눈빛에는 한 점 온기도 없었다.

“진하선, 짐이 그토록 원망스럽더냐?”

“설마 짐이 차마 너를 죽이지 못할 것이라 여기는 것이냐?”

한때는 내 몸을 다정히 어루만지던 손이, 이제는 숨을 끊어 놓을 기세로 목을 죄어 왔다.

말은커녕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러나 타나오윤은 깊이 가라앉은 내 눈빛만으로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챘다.

죽일 수 있으면, 정말 죽여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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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성에 복사꽃이 지던 날   제21화

    순간 온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하지만 타나오윤은 누구에게도 반대할 틈을 주지 않았다.사흘 만에 황위를 넘긴다는 교서를 작성하고 옥새까지 내놓았다.타나오윤이 왕으로서 마지막으로 한 일은 진하선의 장례를 황후의 예에 따라 성대히 치르는 것이었다.봉호는 영안이었다.진하선은 황릉 한가운데에 안장되었고, 바로 곁에는 ‘안청’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작은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모자는 그제야 다시 만났다.진하선을 입관하던 날, 타나오윤은 새로 만든 황후의 예관을 직접 관 안에 넣어 주었다.신은수가 썼던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순금과 동해의 진주로 밤새 새로 만들게 한 것이었다.진하선은 살아 있는 동안 황후의 예복을 입어 보지도, 책봉식을 치르지도 못했고, 후궁으로서의 명분조차 없었다.타나오윤은 살아생전 주지 못했던 모든 것을 죽은 뒤에야 내어 주었다.하지만 관 속의 진하선은 이제 다시 눈을 뜰 수 없었다.타나오윤은 관 옆에 서서 뚜껑에 채 마르지 않은 칠을 손끝으로 가만히 쓸었다.“영안아.”대답은 없었다.꺼지지 않는 촛불만 가볍게 흔들리며 흰 상복을 입은 타나오윤을 비추었다.하룻밤 사이에 타나오윤은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렸다.황위를 넘기는 날, 타나오윤이 소년에게 옥새를 건네자 소년은 두 손으로 옥새를 받아 들고 눈앞의 수척한 사내를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타나오윤은 한마디만 했다.“해마다 청명절이 되면 황릉에 갈 수 있게 해다오.”소년은 오랫동안 침묵했다.문득 죽음을 앞둔 고모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백성들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니 더는 싸우지 말라던 말이었다.소년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타나오윤이 몸을 돌려 높은 단상에서 내려오자, 신하들은 감히 그를 바라보지 못한 채 그저 양쪽으로 갈라설 뿐이었다.걸음은 느렸고, 이따금 비틀거리기까지 했다.소매가 흘러내리자 손목을 가득 메운 칼자국과 고독이 퍼뜨린 검은 무늬가 드러났다.그날을 끝으로 도성에서 타나오윤을 보았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어떤 이는 그가 서주의 옛터로 떠났

  • 도성에 복사꽃이 지던 날   제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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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성에 복사꽃이 지던 날   제19화

    짙고 곧은 눈썹, 굳게 다문 턱선...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년의 모습에서 얼핏 태자 오라버니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손을 뻗어 소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내 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소년의 피부에서는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나는 문득 웃었다.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심 어린 웃음이었다.“아비를 똑 닮았구나.”소년은 눈시울을 붉힌 채 앙상한 내 손을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고모님, 제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늦지 않았다.”나는 고개를 저었다.“이렇게 너를 보았으니 늦지 않았어.”타나오윤은 문밖에 선 채 들어오지 않았다.다만 촛불에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어, 문틈 너머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예전에 타나오윤은 내가 진나라 황실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싫어했다.그런데 이제는 진나라 황실의 마지막 핏줄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나를 고모라 부르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소년도 문밖에 누가 있는지 알아챈 듯했다.내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쥔 채,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칼을 뽑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소년의 손은 언젠가 태자 오라버니가 내 손을 잡고 글씨를 가르쳐 주던 때처럼 힘이 넘쳤다.“고모님,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소년이 말했다.“여기를 떠나 함께 집으로 돌아가시지요.”나는 희망으로 가득한 젊은 얼굴을 바라보다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나는 이제 아무 데도 갈 수 없단다.”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나는 무언가 말하려는 소년의 손을 붙잡았다.“고모 말을 잘 들어라.”나는 힘겹게 숨을 고른 뒤 겨우 입을 열었다.“이제 싸움은 그만두어라. 백성들은 더 버틸 수 없다. 이 나라를 누가 다스리든 백성들이 편안히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냉궁에서 지내는 동안 수없이 많은 울음소리를 들었다.나라를 잃고 우는 이도 있었고, 자식을 잃고 우는 이도 있었다. 굶주린 채 궁궐 밖에서 쫓겨나며 우는 백성도 있었다.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이 아이마저

  • 도성에 복사꽃이 지던 날   제18화

    “진씨라고 했느냐?”나는 눈을 뜨고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침상 곁에 앉아 전장에서 올라온 보고를 살피고 있던 타나오윤은 내 목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손에 든 종이를 내려놓았다.“깨어났구나.”타나오윤은 대답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하던 끝에 사실을 털어놓았다.“네 태자 오라버니의 핏줄이다. 도성이 함락되던 날, 누군가 아이를 몰래 성 밖으로 빼돌렸다고 한다.”“살아 있었구나.”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이토록 감정이 격해진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태자 오라버니에게 아직 후손이 남아 있었다.진나라 왕실의 핏줄은 끊기지 않았다.필사적으로 참았지만, 눈물은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타나오윤은 복잡한 얼굴로 내 눈물을 바라보았다.그동안 타나오윤은 어떻게든 나를 웃게 하고 울게 하며, 아주 작은 반응이라도 끌어내려 애썼다.그러나 내 마음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런데 얼굴조차 본 적 없는 소년이 너무도 쉽게 나를 울리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군사를 보내 진압해야 한다는 말이 빗발쳤다.”타나오윤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허나 짐은 허락하지 않았다.”나는 아무 말 없이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이불을 세게 움켜쥐었다.타나오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내게 등을 돌렸다.“영안아, 그 아이를 만나고 싶으냐?”창밖에서 불어온 바람에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입을 열었지만 목이 꽉 막힌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눈물만 하염없이 흘러내렸다.타나오윤은 뒤돌아 내 눈물 젖은 얼굴을 바라보았다.어려운 결정을 내리려는 듯,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던 타나오윤은 이내 전각 밖으로 나가 차가운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명을 전하라. 성문을 열되 군사는 단 한 명도 세우지 말고, 의병(義兵)의 수장을 궁으로 들이라.”밖이 삽시간에 술렁였다.“폐하, 아니 되옵니다!”“저들은 반군이옵니다! 성안으로 들였다가는...”“물러가라.”타나오윤의 목소리에는 어떤 반박도 허락하지 않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그는 다시 안으로 들

  • 도성에 복사꽃이 지던 날   제17화

    타나오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나를 다시 눕히고 이불을 여며 준 뒤돌아서 나갔다.전각 밖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꽃병인지, 다른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이내 사방이 다시 고요해졌다.그날 이후로 깨어 있는 시간은 점점 짧아졌다.눈을 떴을 때는 대낮이었는데, 다시 눈을 뜨면 어느새 깊은 밤이 되어 있곤 했다.하지만 깨어날 때마다 타나오윤은 늘 곁에 있었다.어느 때는 침상 옆 의자에 앉아 있었고, 어느 때는 침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는데, 잠든 채로도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무어라 희미하게 중얼거렸다.“영안아... 가지 마라...”타나오윤은 전보다 더 수척해져 있었다. 턱선은 칼로 깎아 놓은 듯 날카로웠고, 눈 밑의 짙은 그늘은 눈두덩과 맞닿을 만큼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그때 전각 밖에서 다급한 신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폐하, 변방에서 급보가 왔사옵니다. 북적(北狄)이 국경을 침범하였사오니 속히 명을 내려 주시옵소서!”“승상을 찾아가거라.”타나오윤은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허나 폐하께서는 벌써 이레째 조회에도 들지 않으셨사옵니다...”“꺼져라.”발소리가 황급히 멀어졌다.언젠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우연히 타나오윤의 손목을 보았다.그곳에는 새로 생긴 상처와 오래된 상처가 빼곡히 뒤엉켜 있었다. 이미 딱지가 앉은 것도 있었고, 아직 피가 배어 나오는 것도 있었다.하루 세 그릇씩 필요한 피.타나오윤은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이제 그만하십시오. 더는 헛되이 피를 흘려서는 아니 되옵니다.”타나오윤은 내게 약을 먹이다가 잠시 손을 멈췄다.그러고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한 듯 다시 숟가락을 내 입가로 가져왔다.나는 고개를 돌리고 입을 다물었다.“폐하, 폐하는 진나라 왕실을 증오하셨잖습니까. 이제 저 하나만 남았습니다.”나는 침상 휘장에 수놓인 봉황을 바라보며 남의 일이라도 말하듯 담담히 말을 이었다.“제가 죽으면 폐하의 복수도 끝나는 건데 잘된 일 아닙니까?”숟가락이 그릇에 떨어지며 작게 부딪치

  • 도성에 복사꽃이 지던 날   제16화

    타나오윤은 내가 머무는 침전을 예전 모습 그대로 꾸미게 했다.책장에는 내가 어릴 적 즐겨 읽던 시집이 꽂혀 있었고, 창가에는 한때 내가 기르던 난초 화분이 놓여 있었다. 피우는 향마저 기억 속 공주부에서 쓰던 것으로 바꾸었다.타나오윤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세상을 되살리려 애쓰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창가에 앉아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아무런 온기를 느끼지 못했다.“영안아, 배고프지 않으냐?”타나오윤이 계화떡을 담은 접시를 들고 들어와 조심스럽게 내 곁에 놓았다.떡은 모양도 빛깔도 기억 속 모습과 똑같이 정갈하게 빚어져 있었다.나는 한 조각을 집어 한입 베어 물었다.혀끝에 단맛이 번졌지만, 한참을 씹다가 끝내 내려놓았다.“이 맛이 아닙니다.”타나오윤의 손이 허공에서 굳었다.“어마마마께서 만드시던 계화떡에는 소금이 아주 조금 들어갔습니다.”나는 창밖의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단맛에 짠맛이 살짝 돌아야 물리지 않는다고 하셨지요.”“이제 다시는 먹을 수 없겠습니다.”창살 사이로 바람이 스치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전각 안이 고요해졌다.타나오윤은 아무 말 없이 접시를 거두어 갔다.요 며칠 내내 그런 식이었다.어떻게든 지난 잘못을 만회하고, 내가 여전히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 애썼다.그러나 무슨 짓을 해도 나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오후 무렵, 고독이 또다시 도졌다.아무런 기미도 없이 검은 피가 목구멍으로 치밀었다.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어디서 나타났는지 타나오윤이 달려와 나를 와락 품에 안았다.“영안아! 영안아...”어쩔 줄 몰라 하며 내 피를 닦아 내는 타나오윤의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가득했다.바로 그 순간, 타나오윤의 몸도 갑자기 뻣뻣하게 굳었다.고독이 되받아친 것이다.무의는 내가 고통을 느낄 때 타나오윤도 똑같이 아플 것이라고 했다.타나오윤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리고 관자놀이에는 핏줄이 불거졌다. 그런데도 이를 악문 채 신음 한 번 흘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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