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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릴 수 없는 업보의 끝에서
되돌릴 수 없는 업보의 끝에서
مؤلف: 새봄

제1화

مؤلف: 새봄
다섯 살짜리 진하준은 팔짱을 낀 채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증거가 이렇게 확실한데, 아직도 발뺌하는 거예요?”

네 살배기 진하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천진하면서도 잔인한 어조로 거들었다.

“엄마, 외삼촌이 죽는 게 그렇게 무서웠으면 서연 이모를 차로 치지 말았어야죠. 이모는 우리한테 소중한 보물이라고요.”

강유나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신서연이 아이들의 보물이라면, 자신은?

자신은 대체 뭐란 말인가?

강유나는 진서준을 바라보았다. 수년간 부부로 지내온 정을 생각해서라도 강태양을 살려주길 바랐다.

그러나 남자는 그저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마치 낯선 타인을 보듯 말이다.

강유나는 문득 실소를 터뜨렸지만, 눈물은 여지없이 뺨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결국 이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신서연뿐이었다.

추억은 칼날이 되어 심장을 사정없이 헤집었다.

강유나와 진서준, 그리고 신서연 세 사람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소꿉친구였다.

그녀는 진서준을 남몰래 좋아했지만, 진서준의 시선은 늘 신서연만을 향해 있었다.

강유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묵묵히 그들의 행복을 빌어주고, 심지어 진서준의 고백 이벤트를 남몰래 도와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진서준이 고백을 앞두고 있던 바로 그 전날 밤, 신서연이 탄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시신조차 찾지 못한 대참사였다.

그날 이후 진서준은 매일같이 술로 나날을 보내며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졌다.

강유나는 그런 진서준의 곁을 지켰다. 인사불성이 된 그에게 해장국을 끓여주고, 위출혈로 쓰러진 그의 곁에서 밤을 꼴딱 새우며 간호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만취한 진서준이 강유나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애타게 신서연의 이름을 애원하듯 부르며 그녀를 자신의 아래에 눕혔다.

충분히 밀쳐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강유나는 그를 너무나도 사랑했고, 그 사랑에 눈이 멀어 기꺼이 대용품이 되기를 자처했다.

다음 날 아침, 침대에 얼룩진 핏자국을 바라보던 진서준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침내 조용히 한마디를 뱉었다.

“내가 책임질게. 결혼하자.”

그렇게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결혼 후, 강유나는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위가 안 좋은 남편을 위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죽을 끓였고, 업무로 바쁠 때는 옆에서 문서 처리를 도왔다.

그가 밤마다 악몽에 시달릴 때면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곁을 지켰다.

진서준이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차츰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역시 강유나를 사랑하게 된 것만 같았다.

아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해 주었고, 생리 기간에는 직접 따뜻한 대추차를 끓여다 주기도 했다. 그녀가 잠들면 이마에 살포시 입을 맞추곤 했다.

얼마 후, 두 사람 사이에 진하준과 진하윤이 태어났다.

아이들은 엄마를 무척이나 따랐고, 진서준 역시 늘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품에 안고 속삭였다.

“여보, 고생 많았어.”

그 5년이란 시간은 강유나의 인생에서 가장 눈부시게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 여자가 거짓말처럼 다시 살아서 돌아오기 전까지는.

신서연이 다시 진서준의 눈앞에 나타난 그 순간, 강유나는 똑똑히 보았다. 진서준의 눈동자에 순식간에 뜨거운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을.

그리고 그녀를 더욱 절망으로 밀어 넣은 것은, 자신이 낳은 두 아들 진하준과 진하윤마저 순식간에 신서연에게 마음을 돌려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서연 이모가 엄마보다 훨씬 다정하고 좋아요!”

“이모는 우리랑 같이 게임도 해주는데, 엄마는 맨날 잔소리만 하잖아요!”

“아빠, 우리 그냥 서연 이모를 새엄마로 삼으면 안 돼요?”

그럴 때마다 진서준은 그저 덤덤하게 강유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마디 툭 던질 뿐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마라.”

결코 강하게 부정하는 법이 없었다.

강유나는 철저히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자신이 몰래 훔쳐 왔던 5년간의 행복이, 신서연의 등장과 동시에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부서져 내리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이토록 잔인한 방식으로 그녀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씌우며 몰아세우고 있었다.

“내가 차로 친 게 아니야!”

강유나는 과거의 기억에서 간신히 빠져나오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진서준, 제발 내 동생 좀 놔줘!”

진서준의 눈빛은 그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끝까지 고집을 부리겠다면,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똑똑히 뼈에 새겨주지.”

그가 손을 까딱이자, 경호원이 주저 없이 밧줄을 끊어버렸다.

“안 돼!”

강유나는 밧줄이 끊어지며 남동생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기름 가마솥으로 곧장 추락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앞으로 달려들었지만, 경호원들에게 사지가 짓눌린 채 절망적인 비명만을 내지를 뿐이었다.

“진서준! 네가 태양이를 죽였어! 네가 죽인 거라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강유나는 왈칵 선혈을 토해냈다. 그 모습을 본 진하준은 귀찮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에이, 저 위에 있던 건 외삼촌이 아니라 그냥 마네킹이에요. 엄마, 뭘 그렇게 유난을 떨고 그래요?”

진하윤 역시 콧방귀를 뀌며 거들었다.

“그러니까요. 그냥 좀 겁만 주려고 한 건데. 누가 감히 서연 이모를 다치게 하래요?”

강유나는 온몸의 힘이 탁 풀린 채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심장이 그대로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진서준은 그런 그녀를 높은 곳에서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방금 그 기분을 똑똑히 기억해 둬. 서연이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어. 난 두 번 다시 서연이를 잃지 않을 거야.”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조금 부드러워진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당신이 뭘 걱정하는지 알아. 난 이미 당신과 결혼했고, 남편이자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할 생각이야.”

“이혼할 일은 없어. 그러니까 다시는 서연이를 쫓아낼 궁리 따윈 하지 마.”

강유나는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자신은 이미 이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서연에게 빠져버린 남편과 아들 따위는, 이제는 이쪽에서 먼저 사양이었다.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진서준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서연아.”

전화를 받는 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다정하게 변했다.

“또 아파?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통화를 끝낸 진서준은 강유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진하준과 진하윤을 데리고 서둘러 공장을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텅 비어 버린 휑한 공장 안, 흙바닥에 무릎을 꿇은 강유나의 눈물이 먼지 위로 툭툭 떨어졌다.

그녀가 눈물을 닦아내며 간신히 일어서려 할 때,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신서연이 보낸 문자 메시지였다.

[유나야, 실은 내가 사람을 시켜서 그 마네킹을 진짜로 바꿔치기했거든? 지금 저 가마솥 안에서 튀겨지고 있는 거, 네 친동생이야.]

강유나는 온몸의 피가 그대로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가마솥으로 달려갔다.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가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로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었다.

가마솥 안에서 강태양의 신체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타 들어가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피부와 기괴하게 뒤틀린 사지 사이로, 오직 두 눈만 부릅뜬 채 그녀를 원망스럽게 응시하고 있었다.

“태양아, 태양아!”

강유나는 미친 듯이 손을 뻗었지만, 펄펄 끓는 기름이 손등에 튀면서 순식간에 시뻘건 물집이 잡혔다.

지독한 통증에 몸이 떨려왔음에도 그녀는 기어이 동생의 손을 붙잡으려고 바둥거렸다.

그러나 동생은 이미 목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그저 입술만 가늘게 떨고 있었다. 마치 마지막으로 ‘누나’를 부르려는 것처럼.

구해야 했다. 단 한 줄기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어떻게든 살려야 했다.

강유나는 떨리는 손으로 구급차를 불렀고, 결국 미친 사람처럼 강태양을 품에 안은 채 공장을 뛰쳐나왔다.

사지가 떨리고 눈물로 시야가 흐려졌지만, 그녀는 동생을 품에 꼭 안은 채 비틀거리며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탔다.

“병원으로 가주세요! 제발 빨리요!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온통 피범벅이 된 그녀의 모습에 겁을 먹은 택시기사는 다급히 액셀을 밟으면서 앞으로 돌진했다.

병원 복도, 강유나는 숨이 끊어져 가는 강태양을 안고 응급실로 들이닥쳤다. 그러나 간호사는 난처한 표정으로 그녀를 가로막았다.

“강유나 씨, 진 대표님이 조금 전에 긴급 명령을 내리셔서 모든 의료진이 신서연 씨를 돌보러 간 상황입니다.”

“지금 당장 남동생분의 수술을 집도할 수 있는 의사가 없습니다.”

강유나는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곧장 진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서준! 제발, 제발 의사 좀 보내줘서 우리 태양이 좀 살려줘! 애가 기름 가마솥에 빠졌단 말이야! 지금 죽어가고 있다고!”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진서준의 목소리는 지독하리만큼 냉랭했다.

[강유나, 거긴 마네킹밖에 없었다고 했을 텐데. 대체 언제까지 이 따위 무리한 짓으로 날 괴롭힐 셈이야?]

수화기 너머 배경음으로는 진하준과 진하윤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엄마는 왜 맨날 저렇게 억지만 부리는 거예요?]

[아빠, 그냥 끊어버려요. 서연 이모가 아빠를 기다리고 있잖아요.]

진서준은 미련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강유나는 차가운 병원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절망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애원했지만, 모두가 그녀를 귀찮은 파리 보듯 피하기 바빴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도와주겠다는 의사를 찾아냈을 때, 강태양의 몸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뒤였다.

“태양아, 태양아!”

강유나는 까맣게 타버린 동생의 시신을 품에 안고 세상이 무너져라 오열했지만, 품 안의 소년은 두 번 다시 그녀에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강태양은 죽었다.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남자의 손에 무참히 살해당했다.

...

사흘 후, 공동묘지.

강유나는 동생의 묘비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얼굴에는 핏기라곤 한 점도 남아있지 않았다.

지난 사흘 동안 그녀는 그저 넋이 나간 시체처럼 움직였다. 사망진단서를 끊고, 동생을 화장터로 보내고, 자기 손으로 차가운 땅속에 묻기까지 모든 과정을 홀로 감당했다.

그 지옥 같은 시간 동안 진서준과 두 아들은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신서연의 SNS를 켜보았다. 가장 최근에 올라온 게시물은 진서준이 신서연에게 다정하게 죽을 먹여주고 있는 사진이었다.

[굳이 직접 간호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니, 정말 말릴 수가 없다니까!]

그 아래에는 진하준과 진하윤이 남긴 댓글이 줄을 잇고 있었다.

[서연 이모, 얼른 나으세요! 우리 같이 놀이공원 가기로 했잖아요!]

[서연 이모가 우리 엄마보다 백배는 더 다정해요. 우린 이모가 제일 좋아!]

강유나는 휴대폰 화면을 껐다. 그녀의 눈빛은 밑바닥부터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공동묘지를 걸어 나오며 그녀가 한 일은 오직 두 가지뿐이었다.

첫 번째로, 로펌을 찾아가 이혼합의서를 작성했다.

두 번째로, 곧장 경찰서로 향해 당직 경찰관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신서연을 고의 살인 혐의로 고소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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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되돌릴 수 없는 업보의 끝에서   제23화

    강유나는 진서준을 따라 돌아왔다. 집 안은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이는 가정부들로 북적였고, 인기척을 들은 진하준과 진하윤이 위층에서 단숨에 뛰어내려왔다.“엄마!”“엄마! 이제 다신 안 가는 거죠? 예전엔 저희가 다 잘못했어요. 저희는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아요!”진하윤은 말을 이어가기 힘겨운 상태였음에도, 강유나를 마주하자마자 가슴속에 쌓인 그리움을 어떻게든 쏟아내려고 애썼다.강유나의 눈에도 당연히 아이들의 몸에 남은 상처가 들어왔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강유나가 버린 것은 진서준뿐만이 아니라, 진하준과 진하윤 역시 마찬가지였다.자신들을 반겨주는 아이들의 뜨거운 고백에도 그녀는 줄곧 덤덤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건만, 아이들은 뭔가를 직감한 듯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엄마, 정말로 저희를 버리시는 거예요?”강유나가 아이들을 쓱 한 번 바라보며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진서준이 다급하게 그 앞을 가로막았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아빠가 지금 엄마한테 보여줄 게 있어서 그러니까, 너희는 얌전히 여기 남아있어.”진서준이 다정한 어조로 말했지만, 강유나는 한 번 흘겨보기만 할 뿐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그녀는 진서준의 뒤를 따라 지하실로 향했다. 그 오랜 세월 이 별장에 살면서도, 자신은 전혀 알지 못했던 비밀 통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처음 알게 되었다.통로는 빛 한 점조차 모조리 집어삼킬 듯 깊고 어두운 지하 세계로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그러나 진서준은 기대감에 부푼 걸음으로 앞장서 내려갔고, 마침내 밀폐된 어느 방 앞에 당도했다.별장의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와는 대조적으로, 그곳은 음산하고 캄캄할 뿐 온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진서준이 벽면에 달린 조명 스위치를 켜고 나서야 방 안의 풍경이 강유나의 눈앞에 온전히 드러났다.강유나는 방 안을 한 번 훑어봤지만, 딱히 눈에 띄는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이윽고 진서준이 빔 프로젝터를 켜자, 텅 빈 벽면

  • 되돌릴 수 없는 업보의 끝에서   제22화

    안타깝게도 진서준의 깨달음은 너무 때가 늦었다. 결국 강유나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후회만 남을 뿐이었다.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이미 생각을 확고히 정리했으니, 강유나가 자신을 용서해 주기만 한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강유나가 다시 자기의 곁으로 돌아와 함께하는 삶을 상상하자, 진서준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행복감과 설렘이 가슴 벅차게 차오르며 그녀와 마주할 순간이 미치도록 기다려졌다.8시간의 비행 끝에 마침내 비행기가 착륙했다. 진서준은 한시가 급하다는 듯 약속된 장소로 번개같이 달려갔다. 오직 사무치게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두 사람이 만나기로 한 장소는 한 한적한 카페였다. 진서준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딸랑이는 풍경 소리가 맑게 울렸다.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강유나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고작 한 달 동안 보지 못했을 뿐인데, 마치 일 년의 세월을 앓은 듯 고통스러웠던 터였다. 마침내 그녀를 마주하자, 진서준은 현실이 아닌 듯 아득한 기분에 휩싸였다.강유나는 참 많이 변해 있었다.자신의 곁에 있을 때는 가정을 돌보느라 늘 수수하고 단출한 옷차림이었던 그녀였다.그런데 지금은 편안한 캐주얼 차림에 머리를 자연스럽게 묶어 올리고 하얗고 가녀린 목선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아주 먼 옛날, 풋풋한 모습으로 자신을 남몰래 짝사랑하던 그 시절의 강유나로 돌아간 것만 같아 가슴이 아려왔다.진서준은 잠시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서 있다가, 이내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유나야, 오랜만이야.”당장이라도 강유나를 품에 와락 안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진서준은 목마른 사람처럼 그녀의 얼굴을 애틋하게 눈에 담았다.“그래, 긴말하지 말고 본론만 얘기해. 내가 널 만나겠다고 한 건 우리 사이의 일을 확실하게 매듭짓기 위해서니까.”강유나에게는 옛정을 나눌 마음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축인 뒤 가차 없이 말을 이어가려 했으나, 진서준이 다급하게

  • 되돌릴 수 없는 업보의 끝에서   제21화

    과다출혈로 인해 진서준의 호흡이 점차 희미해져 갔다. 누군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황급히 부축해 옮겼지만, 그의 머릿속은 오직 강유나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빛바랜 지난날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신서연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당시, 그는 매일같이 술에 절어 사람 구실을 못 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집안사람들조차 대책 없는 자신을 방치하고 외면했을 때였다.자신의 곁을 지키며 수렁에서 건져내 준 사람이 바로 강유나였다. 진서준이 인사불성이 될 때마다 해장국을 끓였고, 위출혈로 쓰러졌을 때는 밤을 꼬박 새우며 간호했다. 심지어 진서준을 대신해 회사 업무까지 척척 도맡아 처리할 만큼, 강유나는 자신의 온 마음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진서준도 그 사실을 몰랐던 게 아니었다. 다만 신서연의 죽음이 안겨준 충격이 너무나 컸을 뿐이었다.그러던 어느 날, 술김에 강유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해 품에 안아버렸고, 그제야 억지로라도 이 관계를 마주해야만 했다.‘그때 나는 과연 유나를 사랑했을까?’이후 책임감이라는 명목하에 결혼했고, 다행히 신서연의 그늘에서 서서히 벗어나 아이까지 갖게 되었다.당시 진서준은 이대로 평생을 함께 지내는 것도 참 괜찮은 삶이라 여겼다.그러나 인생이란 늘 예기치 못한 미련을 동반하는 법이다. 신서연이 다시 눈앞에 나타난 순간 그의 이성은 과거의 추억에 송두리째 사로잡히고 말았다.진서준은 애써 자신을 세뇌했다. 강유나에게는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면 될 일이라고, 결국 자신이 처음부터 사랑했던 사람은 신서연이었다고 말이다.하지만 막상 강유나가 일말의 미련도 없이 그의 세계에서 영영 사라져 버린 뒤에야, 진서준은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진서준은 이미 오래전부터 강유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수많은 낮과 밤을 함께 보내며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 사람은 신서연이 아니라, 늘 묵묵히 자신의 곁을 지켜준 강유나였다.그저 놓지 못한 미련

  • 되돌릴 수 없는 업보의 끝에서   제20화

    진서준이 확신에 찬 어조로 몰아붙이자, 신서연은 머리를 감싸 쥔 채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오열했다.그녀는 마치 진서준이라는 사람을 태어나서 처음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위압감에 숨이 턱 막혀올 지경이었다.“진서준,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내가 한 짓들은 전부 우리 둘이 함께하기 위해서였단 말이야.”“내가 언제 너랑 함께하겠다고 한 적이 있었어? 유나는 평생 내 아내야. 네까짓 게 감히 그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어.”남자의 목소리는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기 직전의 전조처럼 서늘했다. 신서연은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그를 경악스럽게 바라보았다.“애초에 너도 강유나한테 마음이 없었잖아! 정말 그 여자를 신경 썼다면 나랑 한 침대에 누웠겠어?” “정말 아꼈다면 그 여자 손을 그렇게 망가뜨릴 수 있었겠냐고! 유나를 사랑했다면 나한테 그렇게 잘해줬을 리가 없잖아!”“네 마음속에도 분명 내가 있었어! 당신은 강유나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던 거라고!”신서연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지만, 돌아오는 것은 진서준의 더욱 음산해진 눈빛뿐이었다.“네까짓 게 어디 감히 유나와 비교해? 네가 도대체 뭔데!”“대가를 치른다는 게 어떤 건지 똑똑히 가르쳐주지.”곧 밧줄이 아래로 툭 떨어지며 신서연의 온몸이 펄펄 끓는 기름 가마솥 안으로 처박혔다.지하실을 찢을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진서준은 다시 그녀를 위로 끌어올렸다.고작 몇 번의 숨을 들이쉬는 짧은 찰나였음에도 신서연의 살점은 이미 처참하게 짓무르고 녹아내려 있었다. 온몸을 파고드는 극심한 통증에, 그 아름답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떡이 되어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아악! 아아악!”그녀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비명을 질렀다.“내가 잘못했어, 서준아! 내가 잘못했어!”그러나 그 처절한 애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서준이 다시 밧줄을 놓아버리자, 신서연은 또다시 기름 솥 안으로 떨어졌다

  • 되돌릴 수 없는 업보의 끝에서   제19화

    진서준이 매정하게 몸을 돌려 막 문가로 걸어갔을 때, 등 뒤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진서준이 고개를 돌린 순간, 수술용 칼을 든 신서연이 달려들어 남자의 몸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마지막 희망마저 잘려 나간 여자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증오만 남아 있었다. 그야말로 눈이 뒤집힌 상황이었다.미치광이나 다름없는 표정을 한 신서연은 깡마른 몸에 아직 유산된 태아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그녀는 핏발 선 눈으로 칼을 뽑아 들고 다시 한번 찔러 넣었다.공기 중으로 피비린내가 더욱 짙게 풍겼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앞에는 그동안 자신을 짓밟고 괴롭혀 온 남자뿐이었다.이것이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복수의 기회였다.“진서준! 같이 죽자고!”끝을 알 수 없는 증오가 신서연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칼이 그의 몸에 박히는 것을 보며, 신서연은 처음으로 통쾌함을 느꼈다.두 번째로 칼을 들어 올리는 순간, 진서준의 손이 날카로운 칼날을 거칠게 움켜쥐었다.손바닥이 찢겨 나가며 핏방울이 배어 나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힘을 주어 미쳐 날뛰는 여자를 거칠게 내팽개쳤다. 그의 눈빛이 음산하게 가라앉았다.“그렇게 죽고 싶어 안달이 났다면 내 기꺼이 들어주지. 네가 지은 죗값을 한 번에 청산해.”이윽고 펄펄 끓는 기름 가마솥이 안으로 들려왔다. 그 광경을 보자, 신서연의 얼굴에서 광기가 씻은 듯이 사라지면서 이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녀는 밖에서 들어오는 한 줄기 빛조차 외면한 채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이러지 마, 제발 이러지 마...”무언가를 직감한 듯, 그녀는 지하실 가장 깊숙한 벽에 닿을 때까지 물러섰다.가마솥 안의 기름은 온도가 오를 대로 올라 무섭게 기포를 터뜨리고 있었다.그러나 진서준에게는 실낱같은 연민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지시를 받은 경호원들이 신서연의 온몸을 꽁꽁 묶은 뒤, 펄펄 끓는 가마솥 바로 위 허공에 매달았다.아래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열기가 신서연의 피부를 자극했다. 눈물이 아래로 떨어지자마자 기름이

  • 되돌릴 수 없는 업보의 끝에서   제18화

    신서연은 지하실로 끌려간 뒤 고스란히 사흘 밤낮을 갇혀 있었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이 빛 한 줄기조차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녀는 낮과 밤은커녕 시간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온몸의 감각이 마비되고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렸다.눈이 부실 정도의 강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신서연은 처음에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멍하니 문 쪽을 바라보았다.한 남자가 문턱에 서서 오랫동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자신을 향한 차가운 시선을 뒤늦게 감지한 신서연은 둔해진 머리를 굴리며 서서히 초점을 맞추었다.진서준이었다.순간 구원의 밧줄이라도 잡은 듯, 미친 듯이 기어간 신서연은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서준아! 내가 잘못했어, 정말 잘못했어.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줘. 다 고칠게, 다신 그런 짓 안 할게!”“전부 내 잘못이야. 당신이 용서만 해준다면 뭐든지 할게. 서준아, 나 좀 살려줘. 여기 너무 무서워, 정말 무서워 죽겠어. 그리고, 그리고...”“나, 네 아이를 가졌어!”신서연은 눈물콧물을 쏟아내며 애원했다. 눈 속의 공포는 거짓이 아니었지만, 가녀린 희망을 품은 채 자신의 배를 황급히 감싸 안았다.진서준이 시선을 내리깔자, 신서연의 아랫배가 아주 살짝 볼록하게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하지만 신서연에게는 아직 용서받을 기회가 남아있어도 강유나는 이미 자신의 곁을 떠나고 없다.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진서준의 마음에는 아무런 동요도 일지 않았다.“내 아이? 이 아이가 내 자식이라는 걸 네가 어떻게 증명할 건데?”얼음장 같은 진서준의 목소리에 신서연의 가슴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낳으면 되잖아. 낳아서 친자 확인을 해보면 알 거 아냐? 이건 틀림없는 네 아이야, 서준아...”진서준이 싸늘하게 헛웃음을 쳤다.“내 아이든 아니든, 이제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아. 그 아이가 태어날 일은 없을 테니까.”“신서연, 네가 온갖 수작을 부리며 이 집에 들어앉으려던 목적이 고작 이거였어?”“분명히 말하는데, 난 네

  • 되돌릴 수 없는 업보의 끝에서   제8화

    셋째 날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진서준은 두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진서준이 웬일로 먼저 입을 열더니 변명을 늘어놓았다.“서연이는 어릴 때부터 워낙 피부가 약하고 통증에 민감해서 말이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걔부터 병원으로 데려갈 수밖에 없었어.”진하준 역시 모기만 한 소리로 툴툴거렸다.“맞아요. 엄마는 서연 이모보다 훨씬 씩씩하니까 우리 도움 같은 거 필요 없잖아요.”진하윤도 고개를 끄덕였다.“서연 이모는 너무 연약해서 우리가 지켜줘야 한단 말이에요.”“그만해.”강유나는 아이들의 말을

  • 되돌릴 수 없는 업보의 끝에서   제7화

    진하준은 훌쩍거리며 변명을 늘어놓았다.“우린 그냥 서연 이모한테 선물할 목걸이를 찾으려고 했던 것뿐이에요. 그런데 엄마가 안 주겠다고 억지를 부리며 뺏으려고 하니까, 제가 실수로 그만...”진서준은 급히 몸을 숙여 강유나를 부축하려 했다.“어디를 다친 거야? 내가 병원으로 데려갈게.”두 아이 역시 허둥지둥 손을 보태며 도우려 했다.바로 그때였다.“아악!”부엌 쪽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고, 이내 가정부가 허겁지겁 뛰어왔다.“회장님! 신서연 씨가 뜨거운 수프에 데셨습니다!”진서준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심각한가

  • 되돌릴 수 없는 업보의 끝에서   제6화

    그 후로 며칠 동안 강유나는 밥을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그저 이혼 숙려기간이 하루라도 빨리 지나가기만 바랄 뿐이었다. 진서준 부자 세 사람이 신서연의 비위를 맞추려 온갖 아양을 떠는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철저히 외면했다.어느덧 신서연의 생일이 다가왔다.진서준은 본래 성대한 연회를 열어주고 싶어 했으나, 신서연이 부드러운 어조로 만류했다.“그냥 집에서 소박하게 보내. 너무 북적거리는 건 싫어서 그래.”진하준이 즉시 맞장구를 쳤다.“잘됐네요! 저도 다른 사람들이 와서 아양 부리는 거 딱 질

  • 되돌릴 수 없는 업보의 끝에서   제5화

    강유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심장이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자신이 목숨을 걸고 낳은 두 아들이, 엄마가 보는 앞에서 다른 여자에게 진서준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진서준은 신서연과 한참 동안 입을 맞춘 뒤에야 입술을 뗐다. 두 사람의 입술 사이로 묘한 여운이 서리듯 타액이 길게 늘어났다.신서연은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미안, 발을 헛디뎠어.”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변명하듯 말한 진서준은, 이내 굳은 얼굴로 진하준과 진하윤을 돌아보았다.“너희 지금 뭐 하는 짓이야?”엄한 질책이었지만, 강유나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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