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11화

Author: 천이설
“무사히 호텔방으로 모셨고 검사도 마쳤습니다. 대표님께서 얘기해 주신 약으로 상처도 무사히 치료했고요. 다행히 결과 큰 문제는 없다고 합니다. 다만...”

호텔 매니저, 즉 안강훈의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들려왔다.

“제가 또 쓸데없는 얘기를 하고야 말았습니다.”

사실 안강훈은 호텔 매니저가 아니었다.

원래는 강재혁의 비서였지만 비서치고는 입이 너무 가벼워 반성하라는 의미로 강재혁이 호텔로 좌천을 보내버렸다.

그리고 문채아는 안강훈이 수년째 강재혁의 곁을 보좌하며 보게 된 유일하게 강재혁이 신경을 쓰는 여자였다.

그래서 안강훈은 당연히 그가 문채아를 좋아하는 줄 알고 기왕 좌천된 거 온 힘을 다해 그녀에게 자신의 상사를 어필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강훈은 풀이 잔뜩 죽은 채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채아 씨의 안내 임무를 저한테 맡긴 건 저를 믿고 있어서였을 텐데 제가 주책이게도 또 입을 잘못 놀리고야 말았습니다. 채아 씨께서 제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가 잘못한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벌 내려주세요!”

말을 전해 들은 강재혁은 1분 가까이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

지나치게 긴 침묵에 안강훈은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제가 어떻게 반응할지 다 예상하시고 채아 씨를 이쪽으로 보내신 겁니까?”

만약 정말 그런 거라면 그의 첫 느낌이 맞았다는 소리였다. 즉, 강재혁은 그의 입이 가벼워지길 기대했던 것이다.

안강훈의 눈이 한순간에 커다랗게 변했다.

‘우리 대표님이 이렇게도 계략적인 남자였을 줄이야...’

“내 머릿속이 궁금한가 보지?”

강재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안강훈은 빠르게 부인한 후 화제를 돌렸다.

“참, 아까 의사 선생님과 함께 밖으로 나왔을 때 전해 듣길 그분의 상태도 많이 좋아졌다고 하던데 계속 호텔에서 몸조리하게 둘까요?”

“그래.”

강재혁은 별다른 감정이 섞이지 않은 말투로 짧게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

한편 문채아와 주연우는 30분째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울고 있었다.

문채아는 박도윤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연약함과 나약함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강재혁 앞에서도 울지 않았다. 좋은 마음으로 달려와 도와준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까지 해결해달라는 염치없는 부탁은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주연우 앞에서는 참을 필요가 없었다. 이 사람이 내 약점을 파고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할 필요도 없었다.

마음속 깊이 곪아있던 상처가 봇물 터지듯 튀어나왔다.

문채아는 눈이 퉁퉁 부을 때까지 목놓아 울며 속상하고 아팠던 것을 전부 다 토해냈다.

생각해 보면 아프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했다.

박도윤이 강지유를 택했을 때 아무리 이성적인 척했어도, 박도윤과 함께 찍었던 사진을 지웠을 때 아무리 가차 없었어도 제 마음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문채아는 박도윤이 그녀를 배신하고, 상처 주고 또 기만했을 때 이미 가슴이 수차례 찢기고 뚫려 있었다.

주연우는 문채아가 털어놓는 얘기를 말없이 경청하며 그녀의 눈물을 계속해서 닦아주었다. 소매에 닿는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 꼭 문채아가 받은 상처 같아 마음이 배로 아파 왔다.

“쓰레기 같은 놈! 감히 널 3년이나 곁에 묶어두고 희멀건 얼굴로 약혼을 하겠다고 해? 약혼할 거면 너와 완전히 정리나 하던가! 그리고 강지유 그 여자가 널 뻔히 괴롭히는 걸 알면서 말리지는 못할망정 한패가 되어 널 궁지로 몰아가? 그놈은 인간도 아니야!”

박도윤이 강지유의 편을 들어준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강지유는 부잣집 딸이라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그 대가가 어마어마했으니까.

그럴 바에는 문채아가 속상해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박도윤이 하는 말은 다 핑계에 불과해. 그놈은 그냥 너를 달래는 게 더 쉬워서 강지유 편을 든 것뿐이야. 그런데 그놈은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네가 자기를 기다리려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자기가 뭔데 네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주연우는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박도윤 그놈이 널 살살 꼬셔서 비밀 연애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을 때부터 좋은 놈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지금이라도 헤어지길 잘했어. 만약 네가 안 헤어졌으면 내가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널 뜯어말렸을 거야!”

“푸흡.”

문채아는 주연우의 말에 울다 말고 웃음을 터트렸다. 주연우 덕에 줄줄 새던 눈물이 드디어 멈췄다.

“이번 일로 완전히 정신 차렸어. 박도윤이 그간 날 얼마나 우습게 봤는지도 확실하게 알았어. 박도윤은 내가 시간과 마음을 전부 써가면서 사랑할 만한 사람이 아니야.”

박도윤이 그녀를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사람 취급했다고 해서 그녀마저 자신을 그렇게 대하면 안 된다.

만약 상황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계속해서 박도윤에게 매달리면 그때는 정말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여자가 되니까.

그래서 문채아는 과거를 모두 털어버리기로 했다. 오늘 이 시간 이후부터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기로 했다.

주연우는 친구의 당찬 말에 그나마 안심이 되는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박도윤만 생각하면 아직도 열불이 났다.

“괘씸해 죽겠어! 너는 눈물을 한 바가지 쏟고 있는데 자기들은 하하 호호 웃으면서 사람들의 축복이나 받고 있잖아. 채아야, 우리 복수하는 거 어때? 박도윤과 네 얘기를 인터넷에 올려서 박도윤의 체면을 완전히 깔아뭉개버리는 거지. 그렇게 되면 강지유한테도 축복이 아닌 남의 남자를 빼앗은 여자라는 꼬리표가 붙게 될 거야.”

문채아가 고개를 저었다.

“네 말대로 하면 두 사람의 실체를 까발릴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 대가로 나도 도마 위에 오르게 돼. 네가 날 위해서 해준 말인 건 알지만 결과적으로 상처를 입게 되는 건 나일 거야.”

박도윤과 강지유를 상대로 싸웠다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지도 못하고 도리어 그들의 역공을 받고 파렴치한 여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

또한 이런 얘기가 폭로되면 사람들은 대체로 여자 쪽을 탓하는 경향이 많아 그것 또한 도박이었다.

주연우는 문채아의 말에 얼른 머리를 식혔다. 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다만 그래서 더 속상했다.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자꾸 화가 나잖아. 박도윤은 그놈이 네 3년이라는 시간을 갉아먹었어. 네 청춘을 허비하게 만든 건 물론이고 네 앞길까지 막아버렸다고! 너, 네가 대학교 때 얼마나 대단했는지 기억 안 나? 박도윤 그놈이 너한테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던 그 빌어먹을 한마디 때문에 넌 교수님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찬란할 게 분명했던 네 미래까지 포기해 버렸어. 장장 3년을 집에 틀어박힌 채 그딴 놈이 원하는 여자가 됐다고!”

만약 그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문채아가 감정이라는 족쇄 아래 박도윤에게 묶여있지 않았었더라면 지금쯤 갖은 상을 휩쓸고 다니는 천재 조각가가 됐을지도 모른다.

문채아는 쓸쓸한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가 금방 다시 고개를 들며 미소를 지었다.

“3년을 허비하기는 했지만 괜찮아. 앞으로는 모든 에너지를 전부 조각하는 데만 쓸 테니까. 그리고 보이는 데서만 안 했을 뿐이지 혼자서 몰래 공부했어.”

“그럼 내가 네 매니저 해줄게. 우리 같이 해보자!”

주연우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좋아. 하지만 조금 걱정돼. 강지유와 박도윤이 방해하려고 들까 봐.”

문채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박도윤은 강지유와 약혼하는 걸 선택하기는 했지만 그날 그가 했던 말을 돌이켜보면 문채아를 놓아줄 생각도 없어 보였다.

만약 박도윤이 정말 그런 생각이라면 강지유는 백 퍼센트 눈치챌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강지유는 어떻게든 문채아를 괴롭히려고 들 것이다.

새로 시작하는 걸 방해하는 건 물론이고 일상적인 생활도 못 하게 할 게 분명했다.

주연우는 친구의 말에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문채아의 손을 잡았다.

“너 아까 나한테 그랬지. 강재혁은 지금 여자를 간절하게 필요로 하고 있다고.”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드디어 내 손에 들어온 너   제100화

    “근데 말이지, 양지나도 돌아왔다고 한들 별수 없을 거야.”주연우는 운전대를 잡은 채 옆을 흘끗 보며 웃었다.“강재혁 씨는 이미 너랑 결혼했잖아. 두 사람은 법적으로 부부란 소리지. 양지나가 알아서 물러나면 다행이지만, 혹시라도 아직도 눈먼 짓을 한다면... 가만두지 말자!”문채아는 그 말에 피식 웃고는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강재혁과 진짜 부부는 아니기에 협력 관계인 만큼 강재혁 곁에 끼어드는 여자들을 전부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양지나만큼은 그녀에게 거리낌 없이 한 번 붙어볼 수 있는 상대라고 생각했다.“양지나가 정말로 영리하다면 이번 기회에 완전히 손을 떼길 바라.”문채아는 진심으로 그렇게 되길 바라며 말했다.주연우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그 기대가 쉽게 이뤄지지 않을 걸 짐작하고 있었다.마침내 차는 글로리 호텔 앞에 섰다.문채아는 아직 강재혁과 정식 신혼집으로 들어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당분간 호텔에서 지내기로 했다.두 사람은 함께 짐을 들어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탔다.객실에 들어서자, 주연우의 도움을 받아 문채아는 마침내 무겁고 화려한 이브닝드레스를 벗어 던졌다.반쯤 묶었던 머리도 풀자, 검은 생머리가 비단결처럼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반짝이는 장신구와 화장까지 벗어내니 오히려 얼굴이 더 또렷했다. 화려함을 지운 뒤 청순한 미모가 더욱 도드라졌다.단정한 민소매 잠옷 위로 드러난 가느다란 어깨와 잘록한 허리선은 별다른 수식 없이도 눈길을 사로잡았다.주연우는 그 모습에 코끝이 간질거리는 듯 웃음을 지었다.“채아야, 네가 백 번 아니라고 해도 알아. 네가 강재혁한테 욕심 없는 건 알지. 근데 너 같은 예쁜 여자를 옆에 두고도 도 닦는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한다니, 그게 말이 돼? 강재혁 씨한테 너무 가혹한 거지.”주연우는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일부러 침 삼키는 시늉까지 했다.문채아는 커다란 강아지가 프린트된 헐렁한 티셔츠를 휙 걸쳐 입고 곧장 주연우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연우야, 재혁 씨

  • 드디어 내 손에 들어온 너   제99화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재혁 씨 흠잡는 얘기는 그만해. 재혁 씨는 결백해.”문채아는 불안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훑으며 부채질하듯 열을 식히려 했다. 그러고는 애써 화제를 돌렸다.“그보다 오늘 있었던 뒷이야기를 해준다며? 박도윤 얘기는 끝났으니까 강지유 얘기도 좀 해 줘.”문채아는 행사장에서 강지유의 뺨을 때리고 곧장 자리를 떠났기 때문에 강지유가 양현주와 손을 잡고 다시 계략을 꾸미고 있지는 않을까 내심 궁금했다.주연우는 그 말을 듣자 오히려 더 밝게 웃었다.“채아야, 내가 강지유 얘기를 마지막에 꺼낸 건 다 이유가 있어. 지금 꼴이 장난 아니거든. 강씨 가문이 밖으로는 철저히 함구하고 있는데, 우리 쪽 모임 안에는 벌써 소문이 다 퍼졌어. 내가 들은 바로는 강지유가 강 회장한테 붙잡혀서 검은 양복 입은 경호원들한테 끌려 나갔다더라. 지금까지 강씨 가문 별장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안에서는 울음소리가 그치질 않는다잖아. 심지어 양현주의 친정 식구들까지 해성시에서 죄다 올라와 무릎 꿇고 빌고 있다고 하더라니까. 이번에는 진짜 실수한 거지. 강지유 모녀, 아마 쉽사리 못 빠져나올 거다.”앞으로 며칠간은 그들이 문채아를 상대로 손을 쓸 겨를조차 없을 터였다.문채아는 강의준이 이토록 크게 분노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곧장 다른 생각이 스쳤다.“연우야, 양현주의 친정 식구들이 왔다면... 그 조카도 같이 온 거야?”“응.”주연우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채아야, 양현주 조카에 대해 궁금한 거지? 경쟁자에 대해 미리 파악하고 싶다는 거잖아?”문채아는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강재혁과의 결혼 자체가 계약이었고, 그 자리를 양현주의 조카에게 내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적을 알아야 제대로 맞설 수 있기에 주연우의 말에 침묵했다.그러자 주연우도 더 이상 빙빙 돌리지 않았다. 곧장 기억을 더듬으며 양현주의 조카에 대한 정보를 풀어놓기 시작했다.“양현주 씨의 조카 이름은 양지나야. 너보다 두 살 많으니까 강지

  • 드디어 내 손에 들어온 너   제98화

    “바로 너를 위한 축하 파티야! 오늘 최고의 승부수는 당연히 문채아의 역전극이지!”주연우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깔깔 웃었다.그녀가 일부러 기자회견장에 나타나지 못했던 건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문채아 편을 드는 모습을 보이면 곤란하니, 박씨 가문 측에서 아예 초대장조차 보내지 않은 것이었다.그러나 몸이 현장에 없었다고 해서 눈과 귀까지 막힌 건 아니었다. 주연우는 이미 온,오프라인으로 기자회견장을 지켜보고 있었다.“채아야, 네가 강재혁 씨의 아내라는 사실이 터지자마자 세상이 뒤집혔어. 실검이 죄다 네 이름으로 도배됐고 그동안 널 불륜녀라 몰아붙이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손바닥 뒤집듯 사과하더라고. 대신 박도윤을 향해서는 집착에 미친 남자, 뻔뻔하기 짝이 없는 놈이라며 욕을 퍼붓고 있어. 덩달아 해정 그룹 주가까지 곤두박질쳤고 말이야.”박도윤이 아무리 이미지 메이킹에 공들여도 강재혁과는 애초에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정상적인 여자라면 강재혁 같은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를 넘볼 리 없다는 게 대중의 상식이었다.“물론 아직도 네 결혼을 못 믿겠다는 사람들이 있더라. ‘강재혁은 원래 차갑고 냉정한 성격인데, 여자를 좋아할 리 없다’면서 떠들어대더라고. 그런데 누군가가 길거리에서 네가 강재혁 품에 꽉 안겨 있는 영상을 찍어서 올려버렸어. 그거 한 방에, 입 아프게 떠들던 애들 전부 잠잠해지더라니까.”“정말... 그런 영상이 있었다고?”문채아는 눈을 크게 뜨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길거리에서 찍힌 영상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등장한 셈이었다.주연우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눈을 반짝였다.“채아야, 뭐야 그거? 길거리에서 둘이 갑자기 불붙은 거야? 강재혁 씨가 왜 거기서 널 안은 거냐고!”문채아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그런 거 아니야. 내가 길에서 곤란한 일을 당했는데, 재혁 씨가 나타나 구해 준 거야. 난 잠깐 재혁 씨한테 기댄 거고...”뜻밖에도 누군가 그 장면을 찍어 올려 여론의 흐름을 단숨에 바꿔 놓을 줄은 상상도 하지

  • 드디어 내 손에 들어온 너   제97화

    “너와 강재혁은 그저 거래 관계일 뿐이다. 강재혁은 네 ‘가짜 남편’이 되어 박씨 가문과 강지유의 공격을 막아주었고, 너는 ‘가짜 아내’가 되어 강씨 가문에서 강재혁을 지켜내고 다른 여자들의 귀찮은 접근까지 차단해 주는 역할을 맡은 거잖아.”그날 밤 그가 더욱 격하게 따지고 묻고 분노에 사로잡힌 건 문채아가 강재혁과 혼인신고를 했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그를 미치게 만든 건 그녀가 자신을 떠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건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모든 걸 내려놓은 듯, 한순간 마음을 비워낸 사람처럼 보였다.“채아야, 잠깐이라도 혼자 숨 돌릴 시간이 필요하다면 존중해 줄게. 내가 널 옥죄는 사람처럼 보이긴 싫으니까. 하지만 착각하지 마. 이걸로 끝난 게 아니야. 강재혁과 네가 맺은 그 위장 결혼은 결국 끝날 거고... 넌 반드시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올 거야.”박도윤은 금테 안경을 천천히 고쳐 쓰며 온화해 보이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은 문채아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애써 감정을 눌러 담으려 했지만, 차오르는 분노를 끝내 억누르지 못했다.“박도윤, 네가 뭔데 그렇게 잘난 척이야! 무슨 가짜 결혼이니 뭐니, 다 네 상상일 뿐이야! 재혁 씨는 나랑 잘 맞아. 우리는 사랑해서 결혼한 거야. 협력 같은 거 아니거든!”“채아야, 네가 나를 속여 복수하고 싶은 건 알겠어. 하지만 너 자신까지 속이면 안 돼.”박도윤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목소리를 낮췄다.“강재혁은 너에게 어울리는 사랑이 아니야. 금 네가 보는 건 그의 일부분일 뿐이야. 진짜 강재혁은 네가 원하는 행복을 줄 수 없어.”“하... 그 말은 너 자신한테나 해!”문채아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린 뒤, 더 얘기했다가는 불필요한 진실이 새어 나올까 봐 두려워 곧장 캐리어를 움켜쥐었다.이번엔 박도윤이 붙잡지 않았다. 그는 창가에 서서 그녀의 가녀린 뒷모습이 멀어져 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봤다.옅던 눈빛은 점차

  • 드디어 내 손에 들어온 너   제96화

    문채아는 처음부터 변명 따위 기대하지 않았다.하지만 박도윤은 변명은커녕, 그녀를 붙잡고는 마치 제 강아지에게 명령이라도 내리듯 뻔뻔하게 굴었다. 급기야 그녀를 붙잡아 가두려 들었고 그 모든 게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하지만 문채아는 그에게 빚진 적도 없었고 그의 발밑에서 굽신거리며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녀가 누구와 함께할지, 어디로 향할지는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지, 박도윤이 감히 간섭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그녀는 차갑게 말을 내뱉고 곧바로 캐리어의 지퍼를 잠갔다. 손잡이를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눈앞에서 문이 닫혔고 방에서 빠져나갈 길은 완전히 막혀버렸다.박도윤이 등으로 문을 짓누르며 버티고 있었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음침함이 흘렀다.“채아야, 넌 변했어. 예전 같지 않아.”“세상에 변하지 않는 사람이 어딨어? 네가 말하는 ‘변했다’는 건 결국 내가 이제 네 뜻대로 휘둘리지 않는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겠지. 더는 사랑을 핑계로 날 묶어두지 못하게 되었으니까.”문채아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몸부림쳤지만 닫힌 굳게 닫힌 문과 그의 가슴 사이에서 갇혀 빠져나갈 수 없었다.그녀는 몇 번의 헛된 발버둥 끝에 캐리어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도대체 누가 변한 걸까? 나일까, 아니면 너일까.”박도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잠깐 길고 무거운 침묵이 흐른 끝에서야 슬픔에 젖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그러니까... 오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날 떠나겠다는 거야?”문채아의 눈동자에는 차디찬 결심이 서려 있었다.“그래. 난 이미 재혁 씨와 혼인신고를 마쳤어. 너 역시 곧 강지유와 약혼 발표할 거잖아. 서로 각자의 선택을 했으니, 이제는 뒤돌아보지 말고 앞으로만 가자.”그녀는 너무 오랫동안 갇혀 살았다. 숨 막히는 굴레 속에서 한순간도 자유롭지 못했다.하지만 강재혁은 달랐다. 강재혁과의 인연은 길고 깊지 않았지만 적어도 장재혁은 그녀를 가두려 들지 않았다.문채아는 이

  • 드디어 내 손에 들어온 너   제95화

    문채아는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박도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 이 남자가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박도윤, 네가 뭘 착각한 것 같네. 내가 널 마주보기 어려울 이유가 있겠어?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넌 날 배신했어. 평생 날 떠나지 않겠다고 했던 약속을 어겼어.”박도윤은 금테 안경을 벗어 내려놓으며 억눌러 두었던 광기가 서린 눈빛을 드러냈다.그 시각, 문채아는 그녀와 강재혁이 떠난 직후, 강지유가 강의준 휘하의 검은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에게 붙잡혀 강씨 가문으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큰 화를 자초했음을 깨달은 강지유는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고 나중에는 소리치며 애원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끝내 버둥거리다 보디가드의 팔을 물어뜯기까지 했다.기자회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박진성과 문영란은 필사적으로 그녀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다.그럼에도 박도윤은 현장에 남지 않았다. 그는 홀로 몰래 박씨 가문으로 돌아왔다. 문채아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그녀는 정말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모습은 어떻게든 곁에 남아주는 모습이 아니라, 서둘러 짐을 싸 들고 떠나려는 여자의 뒷모습이었다.박도윤의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문채아, 다른 남자가 생기자마자 이렇게 떠나려는 거야? 어떻게 네가 나를 배신할 수 있어?”문채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인간의 뻔뻔함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배신? 박도윤, 우리 사이에서 먼저 배신한 게 누군데? 네가 날 저버렸잖아. 그런데 내가 왜 그 약속을 지켜야 하지? 1년 전, 나랑 사귀던 그때 이미 강지유와 불륜을 저질렀잖아. 그 뒤로 날 속이고 모욕하고 끝내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날 불륜녀로 몰아세웠잖아. 네 옆에서 3년을 버틴 내가 하루아침에 더러운 여자 취급을 받게 만든 게 누구였더라? 그래, 난 강지유처럼 대단한 배경도 없고 화려하지도 않아. 하지만 나도 멀쩡한 집안에서 자란 귀한 딸이고 박씨 가문에 들어온 지 13년 동안 너한테 미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