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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Author: 천이설
“무사히 호텔방으로 모셨고 검사도 마쳤습니다. 대표님께서 얘기해 주신 약으로 상처도 무사히 치료했고요. 다행히 결과 큰 문제는 없다고 합니다. 다만...”

호텔 매니저, 즉 안강훈의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들려왔다.

“제가 또 쓸데없는 얘기를 하고야 말았습니다.”

사실 안강훈은 호텔 매니저가 아니었다.

원래는 강재혁의 비서였지만 비서치고는 입이 너무 가벼워 반성하라는 의미로 강재혁이 호텔로 좌천을 보내버렸다.

그리고 문채아는 안강훈이 수년째 강재혁의 곁을 보좌하며 보게 된 유일하게 강재혁이 신경을 쓰는 여자였다.

그래서 안강훈은 당연히 그가 문채아를 좋아하는 줄 알고 기왕 좌천된 거 온 힘을 다해 그녀에게 자신의 상사를 어필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강훈은 풀이 잔뜩 죽은 채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채아 씨의 안내 임무를 저한테 맡긴 건 저를 믿고 있어서였을 텐데 제가 주책이게도 또 입을 잘못 놀리고야 말았습니다. 채아 씨께서 제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가 잘못한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벌 내려주세요!”

말을 전해 들은 강재혁은 1분 가까이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

지나치게 긴 침묵에 안강훈은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제가 어떻게 반응할지 다 예상하시고 채아 씨를 이쪽으로 보내신 겁니까?”

만약 정말 그런 거라면 그의 첫 느낌이 맞았다는 소리였다. 즉, 강재혁은 그의 입이 가벼워지길 기대했던 것이다.

안강훈의 눈이 한순간에 커다랗게 변했다.

‘우리 대표님이 이렇게도 계략적인 남자였을 줄이야...’

“내 머릿속이 궁금한가 보지?”

강재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안강훈은 빠르게 부인한 후 화제를 돌렸다.

“참, 아까 의사 선생님과 함께 밖으로 나왔을 때 전해 듣길 그분의 상태도 많이 좋아졌다고 하던데 계속 호텔에서 몸조리하게 둘까요?”

“그래.”

강재혁은 별다른 감정이 섞이지 않은 말투로 짧게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

한편 문채아와 주연우는 30분째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울고 있었다.

문채아는 박도윤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연약함과 나약함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강재혁 앞에서도 울지 않았다. 좋은 마음으로 달려와 도와준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까지 해결해달라는 염치없는 부탁은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주연우 앞에서는 참을 필요가 없었다. 이 사람이 내 약점을 파고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할 필요도 없었다.

마음속 깊이 곪아있던 상처가 봇물 터지듯 튀어나왔다.

문채아는 눈이 퉁퉁 부을 때까지 목놓아 울며 속상하고 아팠던 것을 전부 다 토해냈다.

생각해 보면 아프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했다.

박도윤이 강지유를 택했을 때 아무리 이성적인 척했어도, 박도윤과 함께 찍었던 사진을 지웠을 때 아무리 가차 없었어도 제 마음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문채아는 박도윤이 그녀를 배신하고, 상처 주고 또 기만했을 때 이미 가슴이 수차례 찢기고 뚫려 있었다.

주연우는 문채아가 털어놓는 얘기를 말없이 경청하며 그녀의 눈물을 계속해서 닦아주었다. 소매에 닿는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 꼭 문채아가 받은 상처 같아 마음이 배로 아파 왔다.

“쓰레기 같은 놈! 감히 널 3년이나 곁에 묶어두고 희멀건 얼굴로 약혼을 하겠다고 해? 약혼할 거면 너와 완전히 정리나 하던가! 그리고 강지유 그 여자가 널 뻔히 괴롭히는 걸 알면서 말리지는 못할망정 한패가 되어 널 궁지로 몰아가? 그놈은 인간도 아니야!”

박도윤이 강지유의 편을 들어준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강지유는 부잣집 딸이라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그 대가가 어마어마했으니까.

그럴 바에는 문채아가 속상해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박도윤이 하는 말은 다 핑계에 불과해. 그놈은 그냥 너를 달래는 게 더 쉬워서 강지유 편을 든 것뿐이야. 그런데 그놈은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네가 자기를 기다리려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자기가 뭔데 네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주연우는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박도윤 그놈이 널 살살 꼬셔서 비밀 연애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을 때부터 좋은 놈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지금이라도 헤어지길 잘했어. 만약 네가 안 헤어졌으면 내가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널 뜯어말렸을 거야!”

“푸흡.”

문채아는 주연우의 말에 울다 말고 웃음을 터트렸다. 주연우 덕에 줄줄 새던 눈물이 드디어 멈췄다.

“이번 일로 완전히 정신 차렸어. 박도윤이 그간 날 얼마나 우습게 봤는지도 확실하게 알았어. 박도윤은 내가 시간과 마음을 전부 써가면서 사랑할 만한 사람이 아니야.”

박도윤이 그녀를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사람 취급했다고 해서 그녀마저 자신을 그렇게 대하면 안 된다.

만약 상황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계속해서 박도윤에게 매달리면 그때는 정말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여자가 되니까.

그래서 문채아는 과거를 모두 털어버리기로 했다. 오늘 이 시간 이후부터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기로 했다.

주연우는 친구의 당찬 말에 그나마 안심이 되는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박도윤만 생각하면 아직도 열불이 났다.

“괘씸해 죽겠어! 너는 눈물을 한 바가지 쏟고 있는데 자기들은 하하 호호 웃으면서 사람들의 축복이나 받고 있잖아. 채아야, 우리 복수하는 거 어때? 박도윤과 네 얘기를 인터넷에 올려서 박도윤의 체면을 완전히 깔아뭉개버리는 거지. 그렇게 되면 강지유한테도 축복이 아닌 남의 남자를 빼앗은 여자라는 꼬리표가 붙게 될 거야.”

문채아가 고개를 저었다.

“네 말대로 하면 두 사람의 실체를 까발릴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 대가로 나도 도마 위에 오르게 돼. 네가 날 위해서 해준 말인 건 알지만 결과적으로 상처를 입게 되는 건 나일 거야.”

박도윤과 강지유를 상대로 싸웠다가 원하는 목적을 이루지도 못하고 도리어 그들의 역공을 받고 파렴치한 여자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

또한 이런 얘기가 폭로되면 사람들은 대체로 여자 쪽을 탓하는 경향이 많아 그것 또한 도박이었다.

주연우는 문채아의 말에 얼른 머리를 식혔다. 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다만 그래서 더 속상했다.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자꾸 화가 나잖아. 박도윤은 그놈이 네 3년이라는 시간을 갉아먹었어. 네 청춘을 허비하게 만든 건 물론이고 네 앞길까지 막아버렸다고! 너, 네가 대학교 때 얼마나 대단했는지 기억 안 나? 박도윤 그놈이 너한테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던 그 빌어먹을 한마디 때문에 넌 교수님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찬란할 게 분명했던 네 미래까지 포기해 버렸어. 장장 3년을 집에 틀어박힌 채 그딴 놈이 원하는 여자가 됐다고!”

만약 그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문채아가 감정이라는 족쇄 아래 박도윤에게 묶여있지 않았었더라면 지금쯤 갖은 상을 휩쓸고 다니는 천재 조각가가 됐을지도 모른다.

문채아는 쓸쓸한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가 금방 다시 고개를 들며 미소를 지었다.

“3년을 허비하기는 했지만 괜찮아. 앞으로는 모든 에너지를 전부 조각하는 데만 쓸 테니까. 그리고 보이는 데서만 안 했을 뿐이지 혼자서 몰래 공부했어.”

“그럼 내가 네 매니저 해줄게. 우리 같이 해보자!”

주연우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좋아. 하지만 조금 걱정돼. 강지유와 박도윤이 방해하려고 들까 봐.”

문채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박도윤은 강지유와 약혼하는 걸 선택하기는 했지만 그날 그가 했던 말을 돌이켜보면 문채아를 놓아줄 생각도 없어 보였다.

만약 박도윤이 정말 그런 생각이라면 강지유는 백 퍼센트 눈치챌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강지유는 어떻게든 문채아를 괴롭히려고 들 것이다.

새로 시작하는 걸 방해하는 건 물론이고 일상적인 생활도 못 하게 할 게 분명했다.

주연우는 친구의 말에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문채아의 손을 잡았다.

“너 아까 나한테 그랬지. 강재혁은 지금 여자를 간절하게 필요로 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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