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그 후 반년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여행 중이었지만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곁에는 어느덧 나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사람이 한 명 생겼다.그사이 한번 귀국해서 차선우와 이혼 절차를 마무리 지었다.이 인간이 어떻게 마음을 바꾸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날 통화 이후 놀랍게도 이혼에 동의했다.더욱이 그는 이혼 합의서를 다시 작성하며 대부분 재산을 내게 넘겨주었다.돈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서명이 담긴 서류에 내 이름 석 자를 적었다.차선우를 만난 날, 그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앙상하게 뼈만 남을 지경이었다.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게 뻔하지만 이제 더는 나랑 무관한 일이었다.내 곁에 선 서도겸을 본 순간, 차선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이제 내게도 새로운 사람이 생겼고 본인은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걸 알아챘을 것이다.그럼에도 마지막으로 나를 붙잡으려 했다. 그때 서도겸이 내 앞에 나서며 그를 막았다.한편 나는 귀국한 참에 동생을 보러 갔다.그가 민채원을 밀쳐 산모와 아이 모두 죽게 만들었고 결국 고의 살인죄로 징역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남동생은 유리창 너머로 나를 보자마자 흥분해서 달려들었다.전화를 받으니 동생의 흐느낌이 들려왔다.“누나... 내가 정말 잘못했어. 이제 여기서 달게 벌 받고 살아. 용서해달라는 말은 안 할게. 다만 앞으로도 나를 동생으로 기억해주고... 가끔이라도 면회 와주면 안 될까?”어쨌거나 내가 손수 키운 동생이었기에 차선우에게 했던 것처럼 냉정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앞으로 오랫동안 여행을 다닐 거야.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보러 올게.”이혼을 마치자 서도겸은 나보다 더 기뻐했다.“우리 은지 드디어 이혼했네! 나도 이제 정식으로 대시할 수 있는 건가?”그는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었고 나 역시 그 모습에 전염된 듯 활짝 미소를 지었다.다시 반년이 흘렀다. 나는 천천히 서도겸에게 마음을 열고 그를 받아들였다.
그 후 몇 달 동안 나는 도시마다 일주일씩 머물고 다음 도시로 떠나는 일정을 반복했다.차선우의 정보는 늘 한발 늦어 번번이 나와 엇갈렸다.하지만 신기하게도 서도겸은 언제나 나의 다음 행선지를 정확히 알아내고 나타났다.어느덧 나도 서서히 그의 존재에 익숙해져 갔다.심지어 내가 가고 싶은 도시를 먼저 말하고 함께 여행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그동안 차선우는 끊임없이 번호를 바꿔가며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진절머리가 나려던 참에 나는 마침내 그의 전화를 받아줬다.전화기 너머 차선우의 목소리는 경악으로 가득했다.“여보세요? 여보, 드디어 내 전화 받았네! 내가 다 설명할게...”나는 그의 말을 무정하게 끊었다.“또 그딴 얘기나 할 거면 끊어 그냥. 법원 소장 받았지? 최대한 빨리 이혼하자.”차선우의 목소리가 떨려왔다.“이혼 안 하면 안 돼?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그래서 뭐? 이제 와서 사과하면 죽은 두 아이가 살아 돌아와? 네가 민채원이랑 잔 게 없던 일이 돼? 이혼 말고는 더 이상 연락하지 마. 목소리만 들어도 토 나오니까!”말을 마친 나는 전화를 끊었다.고개를 돌리니 서도겸이 바로 옆에 서 있었다.그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수제 초콜릿 한 조각을 내게 건넸다.“이 동네 초콜릿이 유명해. 한번 먹어봐.”나는 한숨을 쉬며 더 이상 화제를 피하고 싶지 않았다.“도겸 씨, 나랑 선우 일이 SNS에 쫙 깔렸으니 도겸 씨도 다 알고 있겠죠? 난 이제 나이도 적지 않고 한번 다녀온 여자예요. 도겸 씨는 결혼도 안 했으니 나보다 훨씬 젊고 예쁜 여자들 충분히 만날 수 있다고요.”서도겸은 초콜릿을 내 입안에 쑥 밀어 넣었다. 진하면서도 살짝 쌉싸름한 맛이 혀끝에 퍼졌다.“하지만 그 여자들은 네가 아니잖아. 지난 일은 이미 다 지나갔어. 여태껏 결혼 안 한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미 결혼했기 때문이었어. 놀랍게도 그 사람은 이제 이혼했고 난 또다시 다가갈 기회가 생긴 거지.”순간 나는 마음이 설레고 코끝이 찡해졌다.“은지야, 내
나는 차선우를 떠난 첫 달, 그토록 바라왔던 바닷가 도시에서 힐링하기로 했다.또한 그곳에서 대학 시절 마냥 다정했던 서도겸 선배를 우연히 만났다.이 낯선 도시에서, 유산 후 몸이 허약해진 나에게 선배는 매우 큰 힘이 되어주었다.나는 감정에 아주 민감한 편이다. 서도겸의 눈빛이 단순한 우정을 넘어섰다는 것을 느낀 순간, 나는 조용히 작별을 고하고 다음 도시로 향했다.SNS에 올라오는 차선우의 사과 메시지는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이따금 들려왔다.깊은 고뇌에 찬 그의 모습에 일부 사람들은 차선우의 외도를 이해할 수 있다고, 게다가 그가 평소 나에게는 정말 잘해주지 않았냐며 동정하는 여론도 생겨났다.다만 나는 차선우의 외도를 알게 된 순간, 이미 용서해줄 마음이 없었다.두 번째 도시에서 보름 정도 머물다가 이곳 기후가 맞지 않아 다른 도시로 옮기기로 했다.떠나기 전날, 나는 필요한 물건을 미리 사두려고 문밖을 나섰다.“은지야.”무심코 뒤돌아보니 놀랍게도 서도겸이 바로 뒤에 서 있었다.“은지야, 난 항상 진심이었어. 대학교 때 했던 말,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서도겸은 대학 시절에 이미 나에게 고백했었다.하지만 그때 나는 학업, 생계, 그리고 남동생까지 돌보느라 연애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잠시 망설이는 내게 서도겸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섣불리 거절하진 말아줘. 네가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려줄게. 그전엔 절대 네 삶에 끼어들지 않아.”나는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저는 곧 이 도시를 떠나요. 앞으로 어디에 머물지, 또 언제 떠날지도 확신할 수 없다고요.”서도겸은 웃었다.“내 말 믿어. 다음 도시에서도 우리는 꼭 만날 수 있을 거야.”그때 나는 선배가 허풍을 떠는 거라고만 여겼다.“좋아요. 그럼 다음 도시에서 봬요.”나는 서도겸을 지나쳐 걸어갔다.그날 밤, 내가 이 도시에 있다는 사진이 SNS에 올라왔고 차선우도 분명 봤을 것이다.본인 계정에 이런 글을 올렸으니까.[기다려.]나는 그 메시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평소처
차선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분노를 삼켰다.만약 지금 이 전화를 받는 사람이 안은지였다면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과연 어떤 심정일까?“야, 민채원, 뒈지고 싶냐?”전화기 너머의 침묵은 잠시, 이내 민채원의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선우야... 오해야. 일단 내 말 좀 들어봐.”차선우는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다는 듯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는 절대 민채원을 가만둘 리가 없다.이때 문 앞에 차 한 대가 멈춰 서더니 안은지의 남동생이 안에서 뛰쳐나왔다.그는 차선우의 옷깃을 거칠게 잡았다.“우리 누나 어디 있어? 왜 연락이 안 되는 건데!”차선우는 갑자기 헛웃음을 터뜨렸다.“갔어. 이제 우리 모두 필요 없다고 떠나가 버렸어.”“X발 뭐라는 거야! 누나가 어떻게 날 버려?”차선우는 그간의 모든 일을 안은지의 동생에게 털어놓았다.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당황과 혼란으로 물들었다.“하지만... 나도 다 누나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 몇 년 동안 누나가 시험관 시술하느라 몸도 점점 약해지고 거기에 매형 엄마가 계속 압박을 주셨잖아. 누나가 도저히 견디지 못할까 봐 그런 건데... 그래서 민채원 일을 알게 되었을 때도 누나한테 일부러 비밀로 했던 거야. 나중에 민채원 아이를 입양하면 좀 더 행복해질 거로 생각했어.”차선우는 코웃음을 쳤다.“우리 모두 은지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정작 은지는 원했을까 이런걸? 은지 이제 떠나고 없어. 우린 지금 인과응보를 겪는 거야.”동생은 별안간 안은지가 떠나던 날, 차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마지막 그 눈빛이 떠올랐다.그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자신을 키워준 누나가 이대로 떠나가 버렸다니?분명 민채원 때문에 화가 나서 자신을 안 보는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 납득해보려 했다.하지만 그의 생각은 점차 광적인 집착으로 변해갔다.마침 그때 민채원도 서둘러 이곳으로 달려왔다.안은지의 남동생이 자신의 배를 바라보는 시선에 그녀는 문득 불안해졌다.하지만 남동생은 평소처럼 다정하게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부
사진에는 차선우의 아버지가 담겨 있었는데 품에 앳되어 보이는 젊은 여자를 안고 있었다.그 여자가 웃을 때 모습이 차선우 어머니의 젊은 시절을 쏙 빼닮았다.그 순간, 차선우의 어머니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눈물을 쏟아냈다.“이 여자 누구예요? 당신 나한테 어떻게 이래요?”차선우의 아버지는 들통나버리자 더 이상 변명도 하지 않았다.“이게 다 당신한테 배운 거잖아. 채원이도 당신이 선우한테 붙여준 거 아니야? 난 그저 모든 남자가 저지를 법한 실수를 한 것뿐이야. 어차피 이 여자를 집에 들일 생각도 없었고 최소한 집안에 애가 더 늘어날 것도 아니잖아.”말을 마친 차선우의 아버지는 자리를 떠났다.이에 어머니가 울부짖으며 차선우에게 푸념했다.“이제 결혼한 지도 30년이 됐어. 그동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니? 무슨 죄를 지었길래 너희 아빠가 나한테 이러는 거야?”차선우는 차가운 눈길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그럼 은지는요? 은지는 또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칼날이 제 몸에 닿아야 비로소 아픔을 느끼는 법이었다.차선우의 어머니도 그랬고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아무도 편안하게 살 자격 같은 건 없었다.차선우의 어머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곁에서 옴짝달싹 못 하는 민채원을 노려보았다.“꺼져! 싹 다 꺼지라고! 너도 그 년이랑 똑같아. 싸구려 같은 것들!”차선우는 이 난장판을 뒤로하고 집 밖으로 나섰다.막 문을 나서자 민채원이 울먹이며 그를 쫓아왔다.“선우야, 나랑 아기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그는 대뜸 걸음을 멈췄다.민채원은 잘못이 있어도 아이는 죄가 없다.“돈 보내줄게. 아이랑 평생을 살아가는 데 부족함이 없을 만큼.”“아니, 싫어! 나 너 사랑해. 진심이야. 결혼까진 바라지 않아. 가끔이라도 나랑 아기 보러 와주면 안 될까?”차선우는 난처한 표정으로 거절하려 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도련님, 사모님께서 물건 하나 보내오셨습니다.”순간 차선우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그는 곧장 민채원을 뿌리치고 차를 몰아
하지만 집에는 가정부만 보일 뿐 안은지의 그림자도 찾기 힘들었다.“은지는요?”당황한 차선우의 외침에 가정부가 놀라 되물었다.“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사모님 외출하셨는데 여태껏 안 돌아오셨어요. 아 참, 도련님을 위해서 선물을 준비해뒀다고 하셨어요.”안은지가 마련한 서프라이즈는 아기방에 있었다.그곳은 차선우가 안은지와 함께 첫 아이를 기다리며 손수 꾸몄던 공간이었다.하지만 아기가 떠난 후, 안은지는 차마 그 방에 들어서지 못했고 결국 여태껏 방치되었다.차선우는 단번에 탁자 위에 놓인 봉투를 발견했다.무심코 지나치려다 정리함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쏟아져 나온 수십 개의 주사기가 바닥을 굴렀다.몇 년간 그가 모아온 주사기들, 안은지가 겪었던 고통이 모두 자신 때문임을 잊지 않으려고, 평생토록 그녀에게 잘해주리라 다짐하며 수집했던 것들이었다.차선우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었다.안에는 일주일 전 날짜가 찍힌 초음파 사진이 들어있었다.그는 숨이 점점 가빠지고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안은지가 임신을 하다니!그녀가 이토록 화를 내고 자신을 피하려 한 것까지 전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이 아이는 차선우와 안은지가 무려 5년이나 간절히 기다려온 선물이었다.차선우는 또다시 그녀에게 전화했지만, 여전히 수신음만 들릴 뿐이었다.그는 메시지를 보내고 또 보냈다.사과하는 내용, 변명하는 내용, 애원하는 내용까지...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일관된 침묵이었다.차선우의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 갈 때쯤, 어머니의 전화가 걸려왔다.“방금 왜 전화 끊었어? 이미 언론에 다 얘기해놨으니 은지한테 촬영 협조하라고 해. 채원이는 당분간 집에만 있고 더는 얼굴 내비치지 않을게. 조용히 이 고비만 넘기면 돼.”“어림없는 소리 하지도 말아요! 저 이제 은지 속상하게 할 생각 없어요!”차선우의 어머니는 잠시 굳어졌다.“걔가 애를 못 낳으니까 이렇게 된 거잖아!”“우리가 계속 아이가 안 생기는 게 결국 다 엄마 때문인 건 잊었어요?”차선우는 처음으로 어머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