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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에서 온 브리엘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1 13:23:03

“같은 브리엘로서.”

문 너머의 남자가 아주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꼭 만나 뵙고 싶다고.”

세레나는 손에 들린 명함을 내려다봤다.

「엘리엇 브리엘」

몇 번을 봐도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브리엘.

자신과 같은 성.

그런데 황실 마력연구원의 수석 연구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머릿속에 수십 개의 가설이 떠올랐다.

먼 친척.

분가.

호적에서 지워진 방계.

혹은.

브리엘이라는 이름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사람.

세레나는 마지막 가능성에서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어제 습격자는 자신을 정확히 ‘브리엘의 후손’이라고 불렀다.

황실은 브리엘 혈통이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황실에서 또 다른 브리엘을 보냈다.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정교했다.

“들여보낼까요?”

카른이 낮게 물었다.

라시엘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문이 아니라 세레나에게 향해 있었다.

“싫으면 안 만나도 된다.”

세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제가요?”

“그래.”

“하지만 저를 만나러 왔다잖아요.”

“그래서 더.”

라시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황실이 네 반응을 확인하려는 걸 수도 있어.”

세레나는 잠시 생각했다.

틀리지 않았다.

엘리엇 브리엘이라는 존재 자체가 미끼일 수도 있었다.

동요하는지.

아는 것이 있는지.

로웬 브리엘에게서 무엇을 들었는지.

자신이 어디까지 파고들었는지.

“그렇다면 더 만나야 합니다.”

라시엘의 미간이 좁아졌다.

“세레나.”

“저 사람이 저를 확인하려는 거라면 저도 저 사람을 확인할 수 있잖아요.”

“위험하다.”

“여기는 전하의 성입니다.”

“그래도.”

“그리고.”

세레나는 문을 바라봤다.

“계속 피하면 황실은 제가 뭔가 알고 있다고 확신할 겁니다.”

카른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맞습니다.”

라시엘이 카른을 차갑게 봤다.

“누구 편이지.”

“전하 편입니다.”

카른은 아주 태연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라시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결국 말했다.

“들여보내.”

카른이 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라시엘이 다시 불렀다.

“잠깐.”

카른이 돌아봤다.

“무기는 전부 밖에 두게 해.”

“알겠습니다.”

“마력석도.”

“예.”

“개인 기록구까지.”

카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옷만 입고 들어오라고 할까요?”

라시엘의 얼굴이 서늘해졌다.

“카른.”

“농담입니다.”

세레나는 둘의 대화를 듣다가 작게 한숨을 삼켰다.

긴장해야 하는데.

이 둘이 붙어 있으면 이상하게 공기가 한번씩 흐트러진다.

그게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숨을 조금 돌릴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세레나.”

라시엘이 그녀를 불렀다.

“네.”

“내 옆에 있어.”

세레나는 눈을 깜빡였다.

“왜요?”

“내가 물으면 대답해.”

“제가 만나는 사람인데요.”

“알아.”

“그럼 제가 질문해야죠.”

라시엘의 눈빛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황실 사람이다.”

“그렇다고 제가 입을 다물고 있을 수는—”

“입 다물라는 게 아니야.”

라시엘이 끊었다.

“혼자 떠들지 말라는 거지.”

세레나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유를 알아차렸다.

자신은 연구 이야기가 나오면 경계가 느슨해진다.

흥미로운 자료를 보여주거나, 답을 조금만 던져주면.

더 알고 싶어서 깊이 들어간다.

라시엘이 그걸 걱정하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순순히 대답했다.

“대신 전하도 저 대신 대답하지 마세요.”

“상황 봐서.”

“안 됩니다.”

“세레나.”

“제 가족 이야기입니다.”

라시엘이 입을 다물었다.

그 말에는 반박하지 못했다.

“좋아.”

마침내.

“대신.”

세레나는 이미 예상했다.

“제가 위험한 질문에 대답하려고 하면 막으시겠죠.”

“그래.”

“그 정도면 괜찮습니다.”

라시엘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카른은 둘을 보다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협상은 잘하시네요.”

둘이 동시에 그를 봤다.

“나가.”

“예.”

카른은 이번엔 정말 문을 열었다.

들어온 남자는 세레나가 상상한 모습과 달랐다.

마흔 전후.

짙은 금발.

연회색 눈.

얇은 금테 안경.

연구복 대신 황실 연구관의 정복을 입고 있었지만, 허리춤에는 아무 무기도 없었다.

무기를 맡기고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첫인상만 보면 위협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러웠다.

그게 세레나는 더 불편했다.

남자는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라시엘에게 먼저 예를 갖췄다.

“에른하르트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엘리엇 브리엘.”

“제 이름을 알고 계셨군요.”

“네가 먼저 명함을 보냈지.”

엘리엇이 옅게 웃었다.

“실례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세레나에게 향했다.

그 순간.

웃음이 아주 조금 멈췄다.

세레나는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놀람.

확인.

혹은.

반가움?

정확하지 않았다.

엘리엇은 한 걸음 다가오려다가.

라시엘의 시선이 차갑게 내려앉자 멈췄다.

“세레나 브리엘 연구원.”

그가 말했다.

“드디어 뵙는군요.”

세레나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드디어?”

엘리엇이 미소 지었다.

“논문을 많이 읽었습니다.”

너무 자연스러운 대답.

하지만 세레나는 바로 믿지 않았다.

“제 논문을요?”

“아르젠 설표 관련 논문은 거의 전부.”

세레나의 시선이 달라졌다.

“거의 전부라고 하셨습니까?”

“예.”

“출간하지 않은 연구 초록까지 포함해서요?”

엘리엇의 미소가 아주 조금 굳었다.

짧았다.

정말 짧아서 보통 사람이라면 놓쳤을 정도.

하지만 세레나는 보고 있었다.

“출간하지 않은 초록이 있었습니까?”

엘리엇이 되물었다.

세레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시험이었다.

왕립연구소 내부 초록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다.

황실이 별도 권한으로 열람했다면 가능하지만.

그렇다면 ‘논문을 많이 읽었다’는 말과는 다르다.

세레나가 천천히 말했다.

“몇 개는요.”

엘리엇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제가 본 건 공식적으로 열람 가능한 자료였던 것 같습니다.”

세레나는 속으로 한 줄 적었다.

‘회피.’

라시엘도 그걸 느꼈는지 눈빛이 조금 더 차가워졌다.

엘리엇이 다시 말했다.

“브리엘이라는 성을 가진 연구자를 이렇게 만나니 기분이 묘하군요.”

세레나는 곧바로 물었다.

“저희가 친척입니까?”

너무 직선적이었다.

엘리엇이 잠깐 웃었다.

“역시 소문대로시네요.”

“무슨 소문이요?”

“궁금한 건 바로 묻는다고.”

“그 소문은 누가 냈습니까?”

엘리엇의 웃음이 조금 흐려졌다.

라시엘은 소파에 기대 앉은 채 말이 없었지만.

세레나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모든 말을 듣고 있다는 걸.

엘리엇이 의자를 권하는 듯 손짓했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네.”

세레나가 먼저 대답하려 했지만.

라시엘이 말했다.

“앉아.”

엘리엇은 맞은편에 앉았다.

세레나는 라시엘 옆.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으려 했다.

그 순간.

라시엘이 아주 자연스럽게 옆 의자를 당겼다.

자신과 가까운 자리.

세레나가 그를 봤다.

라시엘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얼굴이었다.

세레나는 결국 그 자리에 앉았다.

엘리엇의 시선이 잠깐 둘 사이를 훑었다.

그것도 기록해야 할 표정이었다.

“먼저 질문에 답하죠.”

엘리엇이 말했다.

“저희가 친척이냐고 물으셨습니까?”

“네.”

“같은 뿌리는 맞습니다.”

세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느 쪽으로요?”

“브리엘 본가.”

“몇 촌입니까?”

엘리엇이 잠깐 멈췄다.

“그건 조금 복잡합니다.”

“가계도 보여주세요.”

이번에는 확실히 당황했다.

세레나는 손을 내밀었다.

“같은 뿌리라는 근거가 있잖아요.”

“세레나.”

엘리엇이 웃었다.

“처음 만난 친척에게 가계도부터 요구하시는군요.”

“처음 만난 사람이 친척이라고 하면 확인부터 하는 게 맞죠.”

라시엘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엘리엇은 그걸 봤다.

“대공 전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세레나가 맞다.”

즉답.

엘리엇의 웃음이 조금 사라졌다.

“가계도는 황실 연구원 기록실에 있습니다.”

“사본 부탁드립니다.”

“가능 여부를 확인해 보죠.”

“언제요?”

“세레나.”

이번에는 라시엘이 불렀다.

“왜요?”

“숨은 쉬면서 해.”

세레나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정말 연달아 질문하고 있었다.

엘리엇은 작게 웃었다.

“로웬 교수님 말씀이 맞았군요.”

공기가 멎었다.

세레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라시엘이 바로 몸을 일으켰다.

“방금 뭐라고 했지.”

엘리엇도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듯 눈빛이 달라졌다.

세레나는 더 빨랐다.

“교수님을 아십니까?”

“…….”

“엘리엇 브리엘 연구관.”

목소리가 낮아졌다.

“제 스승을.”

엘리엇은 잠시 침묵했다.

그동안 세레나는 그의 얼굴을 샅샅이 봤다.

당황.

계산.

체념.

마침내.

“알고 있습니다.”

세레나의 손끝이 굳었다.

“어떻게요?”

“같은 연구 분야에 있었습니다.”

“거짓말.”

즉시 나왔다.

엘리엇의 눈이 그녀에게 향했다.

세레나는 차갑게 말했다.

“교수님은 왕립 아카데미 고대마물학 교수였고, 연구원이 아니었습니다. 황실 마력연구원과 공동 논문도 없었어요.”

“비공식적으로는—”

“교수님 연구 이력은 제가 거의 전부 정리했습니다.”

세레나가 말을 끊었다.

“돌아가시고 나서 제가 자료 정리했으니까요.”

라시엘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세레나가 로웬의 죽음 뒤 연구 자료를 직접 정리했다는 건 처음 들었다.

“공식 기록에 없는 관계였습니다.”

엘리엇이 천천히 말했다.

“그럼 어떤 관계였습니까?”

이번에는 대답이 늦었다.

세레나의 심장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엘리엇.”

라시엘이 낮게 말했다.

“여기서 거짓말하면 바로 내보낸다.”

엘리엇은 라시엘을 바라봤다.

“대공 전하.”

“그리고 다시는 세레나 근처에 못 오게 할 거다.”

세레나는 옆을 돌아봤다.

너무 단호했다.

엘리엇의 눈도 잠깐 변했다.

그는 결국 안경을 벗었다.

손수건으로 렌즈를 닦는 짧은 동작.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로웬 브리엘은.”

다시 안경을 썼다.

“제 사촌형이었습니다.”

세레나는 그대로 굳었다.

“……뭐라고요?”

“정확히는 사촌형보다 조금 더 복잡한 관계입니다만.”

“잠깐.”

세레나가 손을 들었다.

“교수님이 브리엘 본가 사람이라고요?”

“예.”

“그럼 왜.”

말이 한꺼번에 몰렸다.

왜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지.

왜 친척이라는 사람들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지.

왜 가문에서 혼자 떨어진 사람처럼 살았지.

무엇보다.

“저와 교수님은.”

세레나의 목소리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친척이었던 겁니까?”

엘리엇이 그녀를 한참 바라봤다.

그리고.

“예.”

세레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로웬 교수.

자신에게는 스승이었다.

아카데미에서 가장 처음 자신의 연구를 믿어준 사람.

“없는 마물에 왜 집착하느냐”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럼 네가 살아 있었다는 걸 증명해 봐.”

그렇게 말해준 사람.

그런데.

가족?

세레나는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려 했다.

“몇 촌입니까?”

목소리가 전보다 작았다.

엘리엇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게 더 불길했다.

“왜 대답을 못 하십니까?”

“세레나.”

엘리엇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오늘은 그 얘기까지 하러 온 게 아닙니다.”

“저는 그 얘기를 들으러 온 겁니다.”

“저는 찾아온 쪽입니다.”

“그럼 더 잘됐네요.”

세레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말씀하세요.”

엘리엇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로웬 교수는.”

한 박자.

“당신 아버지 쪽 친족이 아닙니다.”

세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어머니 쪽입니까?”

엘리엇의 침묵.

그게 답이었다.

세레나의 숨이 천천히 멎었다.

어머니.

그 이름 하나가 나오자 머릿속이 멈췄다.

세레나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았다.

어릴 때 돌아가셨으니까.

브리엘 가문 사람이었던 건 아버지라고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귀족이 아니었다.

그렇게 들었다.

“말이 안 됩니다.”

세레나가 아주 천천히 말했다.

“저희 어머니는 브리엘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엇은 그녀를 바라봤다.

“공식적으로는.”

라시엘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세레나는 오히려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너무 말이 안 돼서.

“공식적으로는?”

“세레나.”

엘리엇이 낮게 말했다.

“당신 어머니의 출생 기록은 위조되었습니다.”

방 안의 공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세레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누가요?”

“모릅니다.”

“거짓말.”

“이번에는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믿죠?”

“믿지 않아도 됩니다.”

엘리엇은 담담했다.

“당신이 직접 확인하면 되니까.”

그는 품 안으로 손을 넣었다.

순간.

라시엘이 움직였다.

검은 마력이 손끝에 번졌다.

“천천히.”

엘리엇이 멈췄다.

“종이입니다.”

“꺼내.”

그가 아주 천천히 작은 봉투를 꺼냈다.

카른이 즉시 받아 먼저 확인했다.

마력 반응 없음.

함정 없음.

그제야 세레나에게 건넸다.

세레나는 봉투를 받았다.

겉면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안에는 낡은 종이 한 장.

출생 기록이었다.

세레나는 첫 줄을 읽고.

멈췄다.

아이의 이름.

에블린.

자신이 기억하는 어머니 이름과 같았다.

출생 지역.

서부가 아니라.

황도.

부.

공란.

모.

공란.

그리고 문서 맨 아래.

나중에 추가된 메모.

「브리엘 제7계열 분리 보호 대상.」

세레나의 손끝이 떨렸다.

“제7계열?”

라시엘이 종이를 함께 내려다봤다.

엘리엇이 답했다.

“브리엘의 혈통은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세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설명하세요.”

“삼백 년 전 실험 이후.”

엘리엇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브리엘은 황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혈통을 여러 계열로 나눴습니다.”

세레나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안정화 인자를 숨기려고요?”

엘리엇의 눈빛이 달라졌다.

“거기까지 아시는군요.”

실수.

세레나는 바로 알아차렸다.

라시엘의 마력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엘리엇도 자신이 너무 빨리 반응했음을 깨달았다.

“황실이.”

세레나가 천천히 말했다.

“안정화 인자를 알고 있네요.”

“…….”

“엘리엇 연구관.”

“저는 황실 전체를 대표하지 않습니다.”

“그 말도 답이네요.”

세레나는 문서를 내려놓았다.

“황실 연구원 안에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니까.”

엘리엇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로웬 형이 당신을 좋아했던 이유를 알겠습니다.”

세레나의 표정이 굳었다.

“그 이름 함부로 친한 척 부르지 마세요.”

엘리엇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세레나는 생각보다 훨씬 차갑게 말했다.

“교수님이 살아 계실 때 한 번도 나타난 적 없으면서.”

“…….”

“돌아가신 뒤에도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장례식에도 없었습니다.”

라시엘이 세레나를 봤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이제 와서 사촌형이었다고 하면 제가 반가워해야 합니까?”

엘리엇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여유가 사라졌다.

“갈 수 없었습니다.”

“왜요?”

“감시받고 있었으니까.”

“누구한테.”

대답 없음.

세레나가 웃었다.

씁쓸하게.

“또 황실입니까?”

엘리엇이 낮게 말했다.

“로웬 형은 황실 연구원의 기밀을 훔쳤습니다.”

세레나의 몸이 굳었다.

라시엘도 눈빛이 변했다.

“무슨 기밀.”

“제3실험실과 관련된 자료.”

라시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계속해.”

엘리엇이 말했다.

“십이 년 전, 황실 연구원 지하 문서고에서 오래된 봉인 자료 일부가 사라졌습니다.”

세레나가 숨을 죽였다.

“범인이 교수님이었다고요?”

“확실한 증거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말씀하시죠?”

“그 직후 로웬 형이 연구원과 연락을 끊었고.”

엘리엇의 시선이 세레나에게 향했다.

“아르젠 연구를 시작했으니까.”

세레나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맞물렸다.

십이 년 전.

그때라면.

자신이 아직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

로웬 교수가 고대마물학으로 연구 방향을 급격히 바꾼 시기와 거의 겹친다.

“교수님은 뭘 훔쳤습니까?”

“모릅니다.”

“모른다고요?”

“문서 목록 자체가 삭제되어 있었습니다.”

세레나가 라시엘을 봤다.

라시엘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제3실험실 기록 중 일부가 누락된 것과 연결될 수도 있겠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엘리엇이 말했다.

세레나가 바로 물었다.

“그럼 교수님 죽음도.”

입이 잠깐 마른다.

“그 일과 관련 있습니까?”

엘리엇의 얼굴이 굳었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세레나는 답을 알아버렸다.

“……있군요.”

“확실하지 않습니다.”

“가능성은 있다는 거잖아요.”

“세레나.”

“사고사라고 들었습니다.”

세레나의 목소리가 조금씩 빨라졌다.

“북부 답사 중 절벽에서 추락했다고.”

“공식 기록은 그렇습니다.”

또.

공식 기록.

세레나는 그 말을 듣는 게 싫어지기 시작했다.

“실제는요?”

엘리엇이 대답하지 않았다.

라시엘이 말했다.

“말해.”

짧았다.

그러나 명령이었다.

엘리엇은 라시엘을 바라보다 결국 말했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세레나가 그대로 굳었다.

“……뭐라고요?”

“로웬 브리엘의 죽음은.”

엘리엇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시신이 없는 상태에서 사망 처리된 겁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세레나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카른이 숨을 쉬는 소리도.

난로가 타는 소리도.

바깥 눈보라 소리도.

오직.

한 문장만.

시신이 없었다.

“거짓말.”

이번에는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장례식까지 했습니다.”

“관이 닫혀 있었을 겁니다.”

세레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맞았다.

북부에서 시신 훼손이 심했다는 이유로.

관은 열리지 않았다.

자신은.

그 앞에서.

울었다.

교수가 마지막으로 남긴 펜을 손에 쥐고.

그런데.

비어 있었다고?

“세레나.”

라시엘이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문서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세레나.”

이번에는 더 가까운 목소리.

그리고.

손등 위로 온기가 닿았다.

라시엘의 손.

세레나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회색 눈동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숨 쉬어.”

그제야.

세레나는 자신이 숨을 참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한 번.

짧게 들이마셨다.

또 한 번.

라시엘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거기 있었다.

세레나는 그 손을 밀어내지 않았다.

엘리엇은 둘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그래서.”

세레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전보다 낮고 단단했다.

“교수님이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까?”

“모릅니다.”

엘리엇은 이번에는 바로 대답했다.

“십 년 넘게 흔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망을 확신할 수도 없고.”

“예.”

세레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좋아.

확정할 수 없는 것.

죽었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살았다고 믿지도 않는다.

증거부터.

“마지막으로 확인된 위치는요?”

엘리엇이 잠깐 망설였다.

“북부.”

“어디.”

“에른하르트 산맥.”

세레나와 라시엘의 시선이 동시에 마주쳤다.

바로.

세레나가 까망이를 발견했던 곳.

“정확한 좌표 있습니까?”

“있습니다.”

“주세요.”

“조건이 있습니다.”

그 순간.

라시엘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세레나도 바로 물었다.

“무슨 조건.”

엘리엇이 천천히 말했다.

“황태자 전하를 만나십시오.”

라시엘의 손이 세레나 손등 위에서 멈췄다.

방 안의 온도가 갑자기 내려간 것 같았다.

“거절한다.”

라시엘이 말했다.

엘리엇은 그를 봤다.

“세레나 연구원께 제안드린 겁니다.”

“내 성에서.”

라시엘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내 보호 아래 있는 사람한테.”

“전하께서 언제부터 세레나 연구원의 보호자가 되셨습니까?”

그 질문.

위험했다.

카른도 느꼈는지 몸이 미세하게 긴장했다.

라시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부터.”

너무 자연스럽게 말했다.

세레나가 고개를 돌렸다.

“전하?”

라시엘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

“불만 있나.”

“보호는 고맙지만 그렇게 일방적으로—”

“지금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죠.”

엘리엇이 둘을 바라봤다.

묘한 표정.

놀람과.

약간의 이해.

그리고 뭔가를 계산하는 눈.

세레나가 그걸 보고 바로 입을 다물었다.

아차.

지금 이 사람 앞에서 굳이 내부 논쟁을 할 필요는 없다.

엘리엇이 천천히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세레나 연구원을 해칠 생각은 없습니다.”

라시엘이 비웃었다.

“그걸 믿으라고?”

“적어도 지금은.”

“지금은?”

라시엘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엘리엇은 실수했다는 얼굴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에는 일부러 말했다.

“황실도 브리엘이 필요하니까요.”

세레나의 손끝이 굳었다.

“뭐에.”

엘리엇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황태자 전하께 직접 들으시는 편이 좋습니다.”

“그럼 안 듣겠습니다.”

세레나가 말했다.

엘리엇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교수님 좌표는 다른 방법으로 찾죠.”

“가능할까요?”

“해야죠.”

“십 년 넘게 황실도 못 찾았습니다.”

“황실이 못 찾았다고 저도 못 찾는 건 아닙니다.”

엘리엇이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작게 웃었다.

이번 웃음은 아까와 달랐다.

조금 진짜 같았다.

“정말 닮았군요.”

세레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누구를요.”

“로웬 형을.”

짧은 침묵.

“싫어하실 것 같아 더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엘리엇은 일어섰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하죠.”

세레나가 바로 말했다.

“잠깐.”

그가 멈췄다.

“황태자 전하께서 저를 원하는 이유.”

세레나가 말했다.

“안정화 인자 때문입니까?”

엘리엇은 대답하지 않았다.

“라시엘 전하 때문이고요?”

이번에도.

침묵.

세레나는 확신했다.

“그럼 제3실험실 실험은.”

한 단어씩.

“정말 끝난 게 아니군요.”

엘리엇의 표정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라시엘도 시선을 좁혔다.

몇 초.

길게 느껴지는 침묵 뒤.

엘리엇이 말했다.

“끝났습니다.”

세레나는 그를 봤다.

“삼백 년 전에.”

그리고.

아주 천천히.

“다시 시작되기 전까지는.”

라시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 마력이 순식간에 번졌다.

“카른.”

“예.”

“내보내.”

카른이 즉시 움직였다.

엘리엇은 저항하지 않았다.

문 앞까지 가다가.

한 번 멈췄다.

그리고 세레나만 바라봤다.

“세레나.”

라시엘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엘리엇은 개의치 않았다.

“로웬 형이 마지막으로 남긴 개인 기록 하나가 황실에 있습니다.”

세레나의 몸이 굳었다.

“뭡니까?”

“당신에게 남긴 겁니다.”

“내용은.”

“봉인되어 있습니다.”

“제가 아니면 못 엽니까?”

엘리엇이 아주 작게 웃었다.

“이제 이해가 빠르시군요.”

브리엘 혈통.

세레나의 피.

기록실에서 열린 상자처럼.

“황태자가 가지고 있습니까?”

“예.”

라시엘이 바로 말했다.

“미끼다.”

“압니다.”

세레나는 대답했다.

그러나.

시선은 엘리엇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존재는 확인해야 합니다.”

라시엘의 턱이 굳었다.

엘리엇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내일 뵙죠.”

그리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혔다.

카른도 경호 확인을 위해 뒤따라 나갔다.

남은 건 둘.

세레나와 라시엘.

잠시.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세레나는 아까 받은 출생 기록을 다시 내려다봤다.

어머니의 출생.

위조된 기록.

브리엘 제7계열.

로웬 교수와의 혈연.

시신 없는 죽음.

그리고.

황태자가 가지고 있다는 마지막 기록.

너무 많은 것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세레나.”

라시엘이 낮게 불렀다.

세레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저 괜찮습니다.”

“안 물었다.”

“곧 물으실 것 같아서요.”

라시엘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

세레나는 웃으려 했다.

실패했다.

“조금.”

마침내 솔직하게 말했다.

“머리가 복잡합니다.”

“그럴 만하지.”

“교수님이.”

그 이름에서 목소리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살아 있을 수도 있다니.”

라시엘은 함부로 희망을 주지 않았다.

세레나는 그게 좋았다.

“확인하기 전에는 모른다.”

“네.”

“그러니까 살아 있다고도.”

“네.”

“죽었다고도 생각하지 마.”

세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자신이 연구할 때 쓰는 방식.

결론을 미룬다.

증거가 나올 때까지.

“내일 황태자를 만나시게 할 겁니까?”

세레나가 물었다.

“아니.”

즉답.

세레나가 그를 봤다.

“전하.”

“안 돼.”

“하지만 교수님 기록이—”

“그자가 그걸 미끼로 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압니다.”

“그러니까 안 된다.”

“전하.”

세레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저도 그냥 끌려가겠다는 게 아닙니다.”

“그럼.”

“여기서 만나요.”

라시엘의 눈썹이 움직였다.

“대공성에서.”

세레나는 조금씩 생각을 정리했다.

“전하가 있는 자리에서.”

라시엘은 말이 없었다.

“카른 부관님도 있고.”

한 걸음.

“황태자가 뭔가 숨겨도 여기서는 함부로 못 하겠죠.”

“네가 너무 쉽게 생각한다.”

“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레나가 그를 똑바로 봤다.

“그래도 피할 수는 없어요.”

라시엘의 턱이 굳었다.

“왜.”

“저 때문에.”

세레나는 말을 고쳤다.

“아니.”

그리고.

“저까지 포함해서 이 일이 움직이고 있으니까.”

브리엘.

에른하르트.

황실.

삼백 년 전 실험.

어쩌면 로웬 교수까지.

이제 자신은 외부인이 아니었다.

“알아야 합니다.”

“또 그 말이군.”

라시엘의 목소리가 낮았다.

세레나는 조금 웃었다.

“제가 제일 잘하는 말이라서요.”

라시엘은 웃지 않았다.

한참.

정말 한참 세레나를 바라보다.

결국.

“내가 옆에 있을 거다.”

세레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네.”

“내가 나가라고 하면 바로 나가.”

“상황을 보고요.”

“세레나.”

“무조건은 안 됩니다.”

라시엘이 눈을 감았다.

정말 머리가 아픈 사람처럼.

“그리고 황태자가 너한테 직접 접촉하면.”

세레나가 눈썹을 올렸다.

“악수도요?”

“가급적.”

“그건 너무 티 나는데.”

“상관없다.”

“전하.”

“싫다.”

세레나가 멈췄다.

말이 이상했다.

“뭐가요?”

라시엘도 잠깐 멈췄다.

“……위험한 게.”

조금 늦은 보충.

세레나는 그를 가만히 봤다.

라시엘이 시선을 피했다.

이상했다.

방금.

정말 위험 때문이었을까.

세레나는 자신도 모르게 묻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 순간.

집무실 문이 다시 열렸다.

카른이었다.

평소의 장난기 없는 얼굴.

“전하.”

라시엘이 돌아봤다.

“무슨 일이지.”

카른은 손에 검은 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

“엘리엇 연구관이 나가면서 제게 맡겼습니다.”

세레나가 봤다.

“저건 뭡니까?”

카른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세레나 연구원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라시엘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줘.”

카른이 건넸다.

라시엘은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낡은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세레나가 옆으로 다가갔다.

사진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젊은 로웬 브리엘.

처음 보는 여성.

그리고.

어린아이 하나.

세레나의 숨이 멎었다.

여성은.

자신의 어머니였다.

틀릴 수 없었다.

어릴 때 집에 남아 있던 초상화와 같은 얼굴.

그런데.

그 옆에 서 있는 로웬은.

스승처럼 보이지 않았다.

가족처럼.

너무 가까웠다.

사진 뒷면.

세레나의 손이 떨렸다.

짧은 글씨.

로웬의 필체였다.

「에블린과 세레나.」

그 아래.

한 줄.

「아이가 나를 삼촌이라고 부를 날이 오지 않기를.」

세레나가 그대로 굳었다.

삼촌.

라시엘의 시선도 글씨에서 멈췄다.

그리고 가장 아래.

조금 더 작게.

다른 문장이 있었다.

「그날이 온다면, 내가 실패했다는 뜻이니까.」

세레나는 오래도록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신이 평생 스승이라 믿었던 사람은.

처음부터.

가족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숨긴 채.

자신을 아르젠에게로 이끌었다.

왜.

세레나의 손끝이 천천히 사진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교수님.”

이번에는.

그 이름이 전혀 다르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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