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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표가 끝까지 기억하는 사람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1 13:18:27

“황태자가 직접 옵니다.”

카른의 말이 떨어진 뒤에도 집무실 안은 한동안 조용했다.

세레나는 손에 들린 황태자궁의 서신을 다시 내려다봤다. 지나치게 정중하고, 지나치게 완벽한 문장이었다. 북부의 이상 마력 반응을 조사하겠다는 명분도 있었고, 왕립 마물생태연구소 소속인 자신에게 협조를 요청한다는 절차도 틀린 데가 없었다.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세레나가 라시엘과 함께 대공성에 들어온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자신이 브리엘의 안정화 인자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도 오늘 아침이었다.

그런데 사흘 뒤.

황태자가 직접 온다.

너무 정확했다.

“혹시 원래 황태자 전하께서 북부를 자주 방문하십니까?”

세레나가 물었다.

카른이 코웃음을 쳤다.

“지난 오 년 동안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럼 굉장히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이라기보다 처음에 가깝습니다.”

세레나는 서신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명분은 충분합니다. 북부에서 정체불명의 습격이 있었고, 마물성 마력 반응까지 발견됐으니까요.”

라시엘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그자의 편을 들 생각인가?”

“아뇨.”

세레나는 바로 부정했다.

“반대로 생각하는 겁니다.”

“뭘.”

“이렇게 명분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으면 오히려 의심해야죠.”

라시엘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세레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황실이 정말 어제 습격과 무관하다면, 마력 이상이 보고된 직후 황태자가 직접 움직일 이유가 얼마나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반대로 관련이 있다면…….”

“실패 여부를 직접 확인하러 오는 거겠지.”

카른이 말을 받았다.

세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도요.”

짧은 침묵.

라시엘의 표정이 다시 차갑게 굳었다.

그게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사흘 동안 성 밖으로 나가지 마.”

“전하.”

“연구소에도 당분간 돌아가지 않는다.”

“그건 곤란합니다.”

“왜.”

“제 연구 자료가 연구소에 남아 있습니다.”

“사람을 보내.”

“제가 직접 분류해야 하는 자료도 있고요.”

“안 된다.”

“폐쇄 절차가 시작되면 다른 연구실로 옮겨질 수도 있습니다.”

“내가 막지.”

세레나가 입을 다물었다.

라시엘은 너무 쉽게 말했다.

연구소 폐쇄를.

황실 지원 예산이 걸린 문제를.

마치 내일 날씨를 바꾸겠다고 하는 것처럼.

“전하.”

“왜.”

“권력으로 연구 행정에 개입하시면 안 됩니다.”

카른이 눈을 감았다.

라시엘의 얼굴도 묘해졌다.

“네 연구실이 없어진다며.”

“그래도 절차는 절차입니다.”

“그 절차 때문에 칠 년 연구가 날아가는데?”

“그러니까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해야죠.”

“세레나.”

“네.”

“나는 북부 대공이다.”

“압니다.”

“그 지위를 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세레나는 아주 진지하게 고민했다.

“북부를 통치하시려고요?”

카른이 고개를 돌렸다.

어깨가 흔들렸다.

라시엘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카른.”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표정.”

“표정까지 관리하라는 건 과도한 명령입니다.”

세레나는 둘을 바라보다 결국 조금 웃었다.

라시엘은 그런 그녀를 잠깐 보다가 낮게 말했다.

“어쨌든 사흘 동안은 성 안에 있어.”

이번에는 세레나도 곧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황태자 방문.

어제 자신을 노린 습격자.

브리엘의 후손이라는 말.

안정화 인자.

아무래도 지금 움직이는 건 위험했다.

“알겠습니다.”

라시엘이 의외라는 듯 그녀를 봤다.

세레나가 덧붙였다.

“대신 이 사흘 동안 연구는 방해하지 마세요.”

역시.

라시엘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뭘 할 생각이지.”

“오늘 밤 기억 검사부터요.”

그 말에 집무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카른이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기억 검사요?”

“네.”

세레나는 오전에 정리한 가설을 설명했다.

“완전 동화 단계의 핵심이 기억 소실이라면, 변이 정도에 따라 어떤 기억부터 흐려지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안정화가 단순히 마력 수치를 낮추는 건지, 기억 유지에도 영향을 미치는지 분리해서 봐야 하고요.”

카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어떻게 검사합니까?”

“설표 상태가 자연스럽게 나타났을 때 인간 상태의 정보를 질문할 겁니다.”

“말을 못 하시는데요.”

“반응 방식은 만들 수 있어요.”

세레나는 손가락을 펴며 설명했다.

“예를 들어 오른발은 맞다, 왼발은 아니다. 혹은 특정 물건을 선택하게 하거나요. 단순한 명령 이해와 실제 기억을 구분할 수 있도록 질문을 단계별로 나눌 겁니다.”

라시엘이 물었다.

“뭘 묻을 생각이지.”

“기본적인 것부터요.”

세레나는 이미 머릿속으로 순서를 짜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 나이, 신분, 장소. 그다음 사람. 카른 부관님, 에드먼 집사님처럼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을 기억하는지.”

라시엘의 시선이 그녀에게 고정됐다.

“그리고.”

세레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저도요.”

카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라시엘은 아무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왜 네가 들어가지.”

세레나가 오히려 의아했다.

“비교군이 필요하니까요.”

“비교군?”

“전하께서 설표 상태에서 저를 가장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하셨잖아요.”

카른의 시선이 곧장 라시엘에게 향했다.

라시엘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카른.”

“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나가.”

“예.”

이번에는 정말 빨랐다.

카른은 서류를 챙겨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자 세레나가 라시엘을 봤다.

“왜 내보내셨습니까?”

“시끄럽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그래서 더.”

세레나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저녁까지 라시엘에게 완전 변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오전 피 검사 이후 마력 수치는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세레나는 그 사실이 기쁘면서도 조금 곤란했다.

“변이를 기다리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지만.”

임시 연구실에서 수치를 정리하던 세레나가 중얼거렸다.

“오늘은 안 변하실 수도 있겠네요.”

소파에 앉아 서류를 읽던 라시엘이 시선을 들었다.

“실망했나.”

“조금요.”

“…….”

“아니, 환자가 안정적이라는 점에서는 좋습니다.”

세레나가 뒤늦게 수정했다.

라시엘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물론입니다.”

“표정은 설표를 못 봐서 아쉬운 사람 같은데.”

세레나의 펜이 멈췄다.

“그건.”

잠깐 고민.

“연구자로서의 아쉬움입니다.”

“그래.”

라시엘의 대답이 묘하게 무심했다.

세레나는 그를 한번 쳐다봤다.

“왜 기분이 나쁘십니까?”

“안 나쁘다.”

“나쁜데요.”

“원래 이 얼굴이다.”

전에 들었던 답이었다.

세레나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밤 아홉 시.

재측정.

수치는 오전보다 조금 상승했지만 위험한 수준은 아니었다.

밤 열한 시.

세레나는 결국 기록장을 덮었다.

“오늘은 안 변하실 것 같습니다.”

라시엘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눈이 다시 내리고 있었다.

“그럼 자.”

“전하는요?”

“방으로 돌아가지.”

세레나는 시계를 봤다.

“마지막 측정만 하고요.”

라시엘은 익숙해진 듯 손목을 내밀었다.

세레나가 손끝을 댔다.

맥박.

마력 흐름.

체온.

모두 오전보다 조금 높았다.

“열이 있습니다.”

“괜찮아.”

“38도 가까이 되는데요.”

“변이 전에는 원래 오른다.”

세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가능성이 있겠네요.”

라시엘의 얼굴이 아주 미세하게 나빠졌다.

“기뻐하지 마.”

“기뻐한 게 아니라 관찰한 겁니다.”

“눈이 빛났어.”

세레나는 못 들은 척 기록했다.

「23:07. 체온 상승. 변이 전조 가능성.」

라시엘의 시선이 기록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여기서 자야 하나.”

세레나가 펜을 멈췄다.

“네?”

“네 방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지.”

“복도 끝이니까…… 열다섯 걸음 정도?”

“현재 안정 범위를 넘는군.”

세레나는 잠시 생각했다.

맞다.

오전에는 상태가 좋아져 거리 제한이 완화된 듯했지만, 지금 다시 수치가 오르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럼 전하 방으로 가서 측정기를 설치할까요?”

“내 방은 본관이다.”

“얼마나 멉니까?”

“여기서 삼백 걸음은 되겠지.”

세레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그래서.”

라시엘이 그녀를 바라봤다.

“오늘은 어디서 자지.”

그 질문이 떨어진 순간.

세레나도 문득 상황을 깨달았다.

임시 연구실.

소파 하나.

옆방에는 자신의 침실.

그리고 변이 가능성이 있는 북부 대공.

“……전하는 여기 소파에서 주무시면 됩니다.”

라시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

“소파 싫으십니까?”

“아니다.”

“그럼 제가 옆방에서 자고.”

세레나는 잠깐 계산했다.

문을 열어두면 직선거리 다섯 걸음 안팎.

“문을 열어 두죠.”

“네 방 문을?”

“거리 때문에요.”

라시엘은 그녀를 잠깐 바라봤다.

“아무렇지도 않나.”

“뭐가요?”

“남자가 네 방 문을 열어 둔 채 바로 옆에서 자는 게.”

세레나는 몇 초 뒤에야 질문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아.”

그제야 조금 당황했다.

“그런 의미로 생각을 안 해서.”

“알아.”

너무 즉답이었다.

세레나가 묘하게 기분이 상했다.

“그렇게까지 바로 대답하실 필요는 없는데요.”

라시엘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왜.”

“그냥요.”

“혹시 다른 의미로 생각하길 바랐나.”

“아닙니다.”

이번에는 세레나가 너무 빨리 답했다.

라시엘의 눈빛이 달라졌다.

세레나는 바로 기록장으로 고개를 숙였다.

“주무십시오.”

“세레나.”

“저도 잡니다.”

“귀가 빨갛군.”

세레나가 귀를 가렸다.

“방이 더워서요.”

“북부 한겨울인데.”

“난로가 세잖아요.”

라시엘은 더 놀리지 않았다.

다만 희미하게 웃었다.

그게 더 얄미웠다.

세레나가 잠에서 깬 건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처음에는 소리 때문인지 알았다.

낮고.

거친 숨.

긁는 소리.

그다음.

쿵.

세레나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전하?”

열어 둔 문 너머.

연구실은 어두웠다.

난로의 불빛만 희미하게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소파는 비어 있었다.

세레나가 침대 옆에 둔 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멈췄다.

창가.

거대한 검은 설표가 웅크리고 있었다.

은빛 무늬가 달빛 아래 희미하게 빛났다.

“……변하셨군요.”

회색 눈동자가 세레나를 향했다.

눈빛은 또렷했다.

적어도 지금은.

세레나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아니라.

준비해 둔 실험을 드디어 진행할 수 있다는 연구자의 흥분.

그러다 라시엘과 눈이 마주쳤다.

귀가 뒤로 젖혀졌다.

세레나는 바로 표정을 고쳤다.

“기뻐한 거 아닙니다.”

설표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조금은 맞습니다.”

으르렁.

“하지만 전하 상태가 우선입니다.”

세레나는 약속대로 바로 가까이 가지 않았다.

“접근해도 됩니까?”

설표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한 번.

꼬리 끝을 바닥에 쳤다.

세레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걸 허락으로 받아들여도 됩니까?”

이번에는 앞발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다가오라는 것처럼.

세레나는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마력 측정기가 반응했다.

수치가 내려갔다.

네 걸음째.

세레나는 설표 바로 앞에 멈췄다.

“만져도 됩니까?”

설표의 눈이 가늘어졌다.

세레나는 기다렸다.

그러자.

검은 머리가 아주 조금 앞으로 움직였다.

그녀의 손끝 아래로.

세레나는 숨을 멈췄다.

허락이다.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검은 털 위에 올렸다.

뜨거웠다.

그리고 곧바로.

설표의 몸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이 조금 빠졌다.

“역시.”

세레나는 낮게 중얼거렸다.

“접촉 반응은 같습니다.”

귀가 움직였다.

세레나는 웃음을 참았다.

“연구 이야기입니다.”

낮은 숨소리.

이번에는 으르렁거리지 않았다.

세레나는 귀 뒤쪽으로 손이 가려다가 멈췄다.

“여기는.”

설표의 귀가 바로 뒤로 눕는다.

“역시 안 되는군요.”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라시엘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를 봤다.

세레나는 연구실 한편에 준비해 둔 판을 가져왔다.

흰 판 두 장.

오른쪽에는 원.

왼쪽에는 가위표.

“기억 검사 시작해도 됩니까?”

설표가 가만히 있었다.

“싫으시면 문 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움직이지 않는다.

“동의로 기록하겠습니다.”

세레나는 판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오른쪽 원은 맞다. 왼쪽 가위는 아니다.”

설표가 두 판을 번갈아 봤다.

“이해하셨으면 원을 짚어 주세요.”

커다란 앞발이 움직였다.

툭.

원.

세레나의 눈이 반짝였다.

“좋습니다.”

설표의 귀가 움직였다.

“아, 착하다고 안 하겠습니다.”

앞발이 원에서 치워졌다.

기본 질문.

“지금이 밤입니까?”

원.

“여기가 황궁입니까?”

가위.

“여기가 에른하르트 대공성입니까?”

원.

“전하의 이름은 라시엘 에른하르트입니까?”

원.

세레나는 기록했다.

기본 정보 유지.

장소 인식 유지.

자기 이름 유지.

다음.

“카른 베일러를 아십니까?”

원.

“에드먼 집사를 아십니까?”

원.

“하인츠 부기사단장을 아십니까?”

원.

좋다.

장기 기억도 유지된다.

세레나는 난이도를 조금 올렸다.

“전하는 열아홉 살입니까?”

설표가 세레나를 빤히 봤다.

그리고.

가위.

“서른한 살?”

원.

세레나의 펜이 빠르게 움직였다.

“어제 습격을 기억하십니까?”

원.

“황실이라는 단어도 기억하십니까?”

원.

그 순간 설표의 마력이 아주 미세하게 요동쳤다.

세레나는 바로 질문을 멈췄다.

“괜찮습니다.”

손을 다시 머리 위에 올렸다.

“그건 여기까지 하죠.”

마력이 내려갔다.

세레나는 기록했다.

특정 기억 자극 시 마력 상승.

다음.

개인 기억.

“설원에서 저를 처음 본 것도 기억하십니까?”

원.

“제가 전하 꼬리를 잡은 것도요?”

설표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앞발이 원을 아주 세게 눌렀다.

툭!

세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웃으면 안 된다.

“기억이 굉장히 선명하시군요.”

낮은 으르렁거림.

“좋은 자료입니다.”

으르렁.

세레나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제가 전하께 임시 이름을 붙인 것도 기억하십니까?”

이번에는 설표가 판을 보지도 않았다.

그저 세레나를 노려봤다.

“……이것도 선명.”

앞발이 원을 덮었다.

세레나는 결국 웃음이 조금 새어 나왔다.

검은 꼬리가 바닥을 탁 쳤다.

“죄송합니다.”

웃음을 정리했다.

이제 중요한 질문.

세레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전하는.”

설표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제가 누군지 기억하십니까?”

앞발이 원 위에 올라갔다.

망설임이 없었다.

세레나는 기록했다.

「세레나 브리엘 인식 즉시 성공.」

그런데.

그걸로는 부족하다.

“제가 연구원이라는 것도요?”

원.

“브리엘이라는 성도?”

원.

“제가 전하의 상태를 안정시킨다는 것도?”

원.

세레나가 잠시 펜을 멈췄다.

그리고.

“제가.”

이상하게 목이 조금 말랐다.

“전하한테 중요한 사람입니까?”

앞발이 멈췄다.

세레나도 멈췄다.

질문을 던지고 나서야 이상함을 깨달았다.

이건 객관적 기억 검사가 아니다.

“아.”

세레나가 바로 고치려 했다.

“이 질문은 잘못됐습니다. 중요하다는 기준이 주관적이라서—”

툭.

설표의 앞발이 움직였다.

원.

세레나의 말이 끊겼다.

회색 눈동자는 그녀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

세레나는 몇 초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하.”

원 위에 올라간 앞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건.”

잠시 망설임.

“안정화 때문에 중요하다는 뜻이죠?”

이번에는 판을 누르지 않았다.

설표가 세레나를 보고 있었다.

세레나는 다시 물었다.

“치료 때문에?”

여전히 반응 없음.

“연구 때문에?”

없다.

세레나의 심장이 조금 빨라졌다.

판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다.

지금까지 모든 질문에 정확히 대답했다.

그럼.

왜 답하지 않는 거지.

“전하?”

설표가 몸을 일으켰다.

세레나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거대한 몸이 가까워졌다.

앞발.

어깨.

그리고 얼굴.

세레나의 시야가 검은 털로 가득 찼다.

“왜 그러십니까?”

설표의 코끝이 세레나의 머리카락 가까이 왔다.

낮게 냄새를 맡는다.

스읍.

세레나는 그대로 굳었다.

“전하.”

다시.

목덜미 근처.

숨이 닿았다.

설표였을 때는 수도 없이 가까이 있었는데.

지금은 의미가 달라졌다.

저게 라시엘이라는 걸 아니까.

저 몸 안에 사람의 의식이 있다는 걸 아니까.

세레나는 이상하게 얼굴이 뜨거워졌다.

“……이건 검사 항목에 없습니다.”

설표의 귀가 살짝 움직였다.

그리고.

천천히.

큰 머리가 세레나의 어깨 위로 내려왔다.

무겁다.

하지만 힘은 조절되어 있었다.

마치 기대듯.

세레나의 눈이 커졌다.

“전하?”

대답은 없다.

대신.

검은 꼬리가 그녀의 종아리 뒤쪽을 천천히 감았다.

세레나는 숨을 멈췄다.

이 행동.

처음 본다.

영역 표시?

의존 행동?

안정화 접촉?

아니면.

세레나의 머릿속에 가설이 여러 개 떠올랐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상하게 펜부터 들고 싶지 않았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검은 털 위로.

목 뒤를 천천히 쓸었다.

라시엘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괜찮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기억하고 계시네요.”

회색 눈이 천천히 감겼다.

“자기 이름도.”

한 번.

“성도.”

또 한 번 쓰다듬었다.

“사람들도.”

그리고.

말끝이 조금 느려졌다.

“저도.”

그 순간.

설표의 귀가 움직였다.

세레나는 손을 멈췄다.

머릿속에 어제 본 기억이 떠올랐다.

삼백 년 전.

브리엘의 여자가 카시안 에른하르트에게 했던 말.

‘네 이름.’

‘네가 사랑한 사람들.’

‘네가 누구였는지.’

‘나를 기억해.’

세레나는 저도 모르게 낮게 말했다.

“전하.”

라시엘의 눈이 열렸다.

“혹시.”

아주 조심스럽게.

“언젠가 기억이 흐려지기 시작하면.”

목소리가 작아졌다.

“제가 계속 말씀드릴게요.”

설표는 움직이지 않았다.

“라시엘 에른하르트라고.”

한 번.

“북부 대공이고.”

두 번.

“카른 부관님을 귀찮아하시고.”

설표의 귀가 살짝 눕는다.

세레나가 조금 웃었다.

“까망이라고 부르면 화내시고.”

으르렁.

“그것도 기억하시면 되고요.”

그리고.

잠깐 멈췄다.

“그러니까.”

세레나의 손이 검은 털 사이에 천천히 묻혔다.

“잊지 마세요.”

그 순간.

설표의 눈이 세레나에게 고정됐다.

정확히.

깊게.

마치 사람처럼.

세레나의 웃음이 조금 사라졌다.

왜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리고.

변화는 너무 갑작스럽게 시작됐다.

은빛 무늬가 번쩍였다.

“전하?”

검은 털 아래로 빛이 퍼졌다.

세레나는 손을 빼려 했다.

그런데.

설표의 앞발이 움직였다.

세레나의 허리.

그대로 끌어당겼다.

“잠깐—”

빛이 터졌다.

세레나는 눈을 감았다.

익숙해질 수 없는 감각.

손바닥 아래 있던 부드러운 털이 사라졌다.

대신.

뜨거운 피부.

단단한 어깨.

사람의 팔.

세레나가 눈을 떴다.

라시엘이 바로 앞에 있었다.

숨이 닿을 정도로.

검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이마에 내려와 있었고, 변이 직후라 회색 눈동자에는 아직 짐승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세레나의 한 손은 여전히 그의 목 뒤에 올라가 있었다.

다른 손은 가슴 위.

그리고 라시엘의 팔은.

설표였을 때와 똑같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둘 다 움직이지 않았다.

“…….”

“…….”

세레나가 먼저 시선을 내렸다.

아주 좋지 않았다.

셔츠가 없다.

변이할 때 벗어 둔 것인지, 마력 변화에 날아간 것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라시엘 상체는 맨몸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거기에 손을 대고 있었다.

“전하.”

세레나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네 손.”

라시엘이 낮게 말했다.

세레나는 바로 뗐다.

“죄송합니다.”

“허락한 건 나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거칠었다.

변이 직후 때문일 것이다.

세레나는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그럼 허리도.”

라시엘의 시선이 아주 천천히 내려갔다.

자신의 팔.

세레나의 허리.

그가 놓지 않고 있었다.

“…….”

이번에는 라시엘이 팔을 풀었다.

세레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그 순간 라시엘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세레나가 바로 알아차렸다.

“마력 올라갑니까?”

“조금.”

“그럼 다시 가까이—”

세레나가 한 걸음 다가가려는 순간.

라시엘이 손목을 잡았다.

“됐어.”

“하지만.”

“그 정도는 괜찮다.”

세레나는 그를 살폈다.

정말 위험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라시엘은 아직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전하?”

그가 세레나를 바라봤다.

설표일 때보다 훨씬 직접적인 시선.

세레나가 먼저 눈을 피하고 싶을 만큼.

“기억 검사.”

그가 낮게 말했다.

“네가 중요하냐고 물었지.”

세레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건 검사 질문으로 부적절해서 제외하려고 했습니다.”

“대답은 했는데.”

“……네.”

“왜 다시 물었지.”

“무슨 의미인지 애매해서요.”

라시엘의 손이 세레나의 손목에서 조금 내려갔다.

손바닥.

손가락.

천천히.

결국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세레나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전하.”

“안정화 때문에 중요한 거냐고 했지.”

“네.”

“아니야.”

세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연구 때문이냐고도 했고.”

“……네.”

“그것도 아니고.”

세레나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라시엘은 회피하지 않았다.

“설표일 때.”

그의 목소리가 낮았다.

“기억이 흐려지기 시작하면 사람 이름부터 멀어진다.”

세레나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카른도.”

라시엘이 말했다.

“에드먼도.”

잠깐.

“내가 대공이라는 사실도.”

세레나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너는.”

라시엘의 손이 그녀의 손을 더 깊게 감쌌다.

“반대야.”

“…….”

“다른 게 흐려질수록 더 선명해.”

세레나는 숨을 쉬는 것도 잊었다.

라시엘의 눈동자에는 장난기가 없었다.

연구 이야기도 아니었다.

“목소리도.”

한 걸음.

그가 조금 가까워졌다.

“냄새도.”

세레나의 심장이 더 빨라졌다.

“손이 닿는 것도.”

거리.

너무 가까워졌다.

세레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손은 여전히 잡혀 있었다.

라시엘은 당기지 않았다.

놓지도 않았다.

선택은 세레나에게 남겨 둔 채.

그저 바라봤다.

“그러니까.”

그의 목소리가 아주 낮아졌다.

“적어도 지금은.”

세레나의 시선이 그의 입술로 잠깐 떨어졌다가 급히 올라왔다.

“네가 제일 선명하다.”

방 안이 조용했다.

난로에서 장작이 작게 타는 소리만 났다.

세레나는 수십 개의 말을 생각했다.

안정화 인자의 영향일 수 있다.

마력 공명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브리엘과 에른하르트의 특수한 상호작용이 기억 우선순위까지 바꿀 수 있다.

전부 연구자로서는 타당한 가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지금 그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세레나는 한참 뒤에야 말했다.

“……기록해도 됩니까?”

라시엘의 눈이 가늘어졌다.

세레나는 말한 뒤 눈을 감고 싶었다.

왜 하필 그게 나왔지.

“세레나.”

“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이해했나.”

“네.”

“그런데 첫마디가 기록?”

“습관이라서요.”

라시엘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

마침내 웃었다.

아주 낮고 짧은 웃음.

“정말 대단하군.”

세레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그럼 기록 안 하겠습니다.”

“해.”

“네?”

“대신.”

라시엘이 그녀의 손을 놓았다.

“정확히 써.”

세레나는 멍하니 그를 봤다.

“뭐라고요?”

라시엘은 소파에 놓인 셔츠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설표 상태에서도.”

셔츠를 걸치며.

“세레나 브리엘을 가장 선명하게 기억함.”

세레나가 펜을 든 채 굳었다.

라시엘이 마지막 단추를 잠그다 그녀를 봤다.

“왜.”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레나는 기록장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정말로 적었다.

「02:41. 변이 상태에서 자기 인식, 장기 기억, 대인 기억 대부분 유지.」

다음 줄.

펜끝이 조금 망설였다.

「세레나 브리엘에 대한 기억이 다른 항목보다 선명하다고 피검자가 직접 진술함.」

그 아래.

아주 작게.

「원인 불명.」

잠시 뒤.

한 줄을 더 붙였다.

「추가 관찰 필요.」

라시엘이 뒤에서 낮게 말했다.

“들었다.”

세레나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뭘요?”

“펜 소리만 들어도 네가 쓸 말이 보이는군.”

“그건 불가능합니다.”

“추가 관찰 필요라고 적었지.”

세레나는 조용히 기록장을 덮었다.

“……주무십시오.”

라시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음 날 아침.

카른은 서쪽 별관에 들어오자마자 이상함을 느꼈다.

세레나는 평소보다 말이 없었고.

라시엘은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정확히는.

다른 사람에게는 여전히 무표정했는데 세레나가 움직일 때마다 시선이 따라갔다.

카른은 둘을 번갈아 봤다.

“어젯밤.”

세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네?”

“검사하셨습니까?”

“했습니다.”

“결과는요?”

“기억 유지 상태는 예상보다 좋았습니다.”

카른이 안도했다.

“다행이군요.”

“특히 특정 인물에 대한 기억이—”

“세레나.”

라시엘이 끊었다.

세레나가 그를 봤다.

“왜요?”

“그건 내가 설명하지.”

카른의 눈이 묘하게 변했다.

“특정 인물이 누구입니까?”

라시엘이 싸늘하게 말했다.

“알 필요 없다.”

카른은 세레나를 봤다.

세레나는 기록장을 품에 안았다.

눈을 피했다.

카른의 표정이 점점 재미있어졌다.

“아.”

“카른.”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그 ‘아’를 취소해.”

“이미 했는데 어떻게 취소합니까?”

라시엘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바로 그때.

별관 밖에서 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바뀌었다.

기사 하나가 문을 두드렸다.

“전하!”

카른이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기사는 숨을 고르지도 못한 채 말했다.

“황태자궁에서 선발대가 도착했습니다.”

라시엘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사흘 뒤라 하지 않았나.”

“그게…….”

기사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일정을 앞당기셨답니다.”

세레나의 손끝이 굳었다.

카른이 물었다.

“얼마나.”

“본대가.”

기사가 침을 삼켰다.

“내일 정오에 도착합니다.”

하루.

예정보다 이틀이나 빠르다.

라시엘의 얼굴에서 조금 전의 여유가 완전히 사라졌다.

“선발대 책임자는.”

기사가 봉인된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카른이 받아 펼쳤다.

그리고 표정이 굳었다.

“……전하.”

“누구지.”

카른은 명함을 라시엘에게 넘겼다.

세레나도 옆에서 이름을 봤다.

황실 마력연구원 수석 연구관.

그리고.

그 아래.

익숙한 성.

「엘리엇 브리엘」

세레나의 숨이 멎었다.

“브리엘……?”

라시엘의 시선이 즉시 세레나에게 향했다.

카른도 굳어 있었다.

세레나는 명함을 빼앗듯 받아 들었다.

이름을 다시 읽었다.

엘리엇 브리엘.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자신의 가계도에도.

로웬 교수에게서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

그런데.

같은 성.

그리고 황실 마력연구원.

세레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전하.”

“그래.”

라시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로웬 브리엘이 죽었다.

브리엘의 혈통은 숨겨졌다.

황실은 그 후손을 찾고 있다.

그런데 바로 지금.

황실에서.

또 다른 브리엘이 왔다.

그 순간.

별관 밖.

아주 정중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레나 브리엘 연구원께 전해 주십시오.”

세레나의 몸이 굳었다.

“같은 브리엘로서.”

잠시.

“꼭 만나 뵙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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