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마물 연구원은 대공을 표본으로 삼았습니다: Chapter 1 - Chapter 10

14 Chapters

프롤로그. 멸종한 마물을 주웠습니다

세레나 브리엘은 자신의 연구실이 폐쇄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책상 위에 놓인 유리병부터 붙잡았다.정확히는 유리병 안에 든 검은 털 한 올이었다.“폐쇄라고요?”“그래.”왕립 마물생태연구소 제3연구동, 고대마물생태학 연구실.온갖 마물의 뼈와 발톱, 털, 비늘이 유리 진열장에 빼곡히 들어찬 방 한가운데서 연구소 부소장 베르트랑은 더없이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다음 달부터 제3연구동의 예산이 전면 삭감된다. 그중에서도 네 연구실은 우선 폐쇄 대상이야.”세레나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손가락 사이에 끼운 유리병을 불빛에 비춰 보았다. 오래전에 북부 동굴에서 발견된 털이었다. 마력 반응도 거의 남지 않았고, 일반 설표의 것인지 아르젠 설표의 것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표본.그래도 세레나는 그 털 한 올을 얻기 위해 두 달 동안 북부 산맥을 뒤졌다.절벽에서 미끄러져 왼쪽 손목을 접질렸고,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어 사흘을 굶었으며, 발견한 털이 곰의 것이 아니냐는 동료 연구원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두 시간 동안 모질 구조의 차이를 설명했다.그렇게 모은 것이었다.그녀의 지난 칠 년이.“이유는요?”세레나가 물었다.베르트랑이 미간을 문질렀다.“성과 부족.”“지난해에 북부 마물 서식분포도 개정안을 제출했습니다.”“알아.”“아르젠계 마물의 발톱 화석에서 기존 분류법과 다른 마력 침착 구조도 발견했고요.”“그것도 안다.”“그럼 성과 부족이라는 말은 맞지 않는데요.”“세레나.”“마물생태연구소인데 마물을 연구한 게 성과가 아니라면 뭘 해야 성과입니까?”베르트랑은 대답하지 못했다.그 침묵이면 충분했다.세레나는 시선을 내렸다.황실은 지난해부터 마도병기 개발에 막대한 예산을 쏟고 있었다. 생태 연구보다 당장 전쟁에 쓸 수 있는 마법이 중요해졌고, 그중에서도 멸종한 마물을 뒤쫓는 세레나의 연구는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아르젠 설표.삼백 년 전 북부에서 멸종한 것으로 기록된 고대 마물.검은 털, 은빛 반점, 인간에 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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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표는 연구원을 물지 않았다

세레나는 자신이 지금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아주 잘 알고 있었다.아무리 부상당했다 해도 상대는 성체 설표의 두 배에 달하는 미확인 마물이었다. 게다가 조금 전까지 사람 손목을 통째로 물어 부러뜨릴 수 있는 이빨을 드러내며 경고하고 있었다.그런 마물의 꼬리를 잡았다.왜.연구자로서 확인해야 할 특징이 있었으니까.그게 전부였다.적어도 세레나는 그렇게 생각했다.“…….”검은 설표의 몸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피를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던 녀석이 이상할 만큼 정지해 있었다. 세레나는 꼬리를 잡은 채 눈을 깜빡였다.“왜 그러지?”대답은 당연히 없었다.대신 설표의 귀가 아주 천천히 뒤로 젖혀졌다.세레나는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불쾌 행동.”허리춤에 달아 둔 작은 기록판을 꺼내려 하자 뒤에서 요한의 기막힌 목소리가 날아왔다.“연구원님.”“네.”“지금 기록하실 때입니까?”“중요한 행동 반응이에요.”“제가 보기엔 저놈이 연구원님을 잡아먹을지 말지 고민하는 것 같습니다만.”세레나는 설표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회색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확실히 조금 전보다 의식이 선명해졌다.그리고 상당히 화가 난 것 같았다.“……그럴 수도 있겠네요.”“그러니까 손부터 놓으십시오!”“잠시만요.”세레나는 꼬리를 조금 들어 보았다.설표의 눈동자가 그녀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꼬리 끝에 은빛 고리무늬가 있었다. 오래된 문헌에서 묘사한 그대로였다. 단순히 색소가 다른 것이 아니라 털 한 올 한 올 끝부분에 은색 광택이 남아 있었다.마력 반응일 가능성이 높았다.세레나의 눈이 다시 반짝였다.“이건 정말 아르젠 설표예요.”요한이 얼굴을 쓸어내렸다.“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중요하죠.”“연구원님의 손목보다요?”세레나는 잠깐 생각했다.“……둘 다 중요합니다.”요한은 아예 대답을 포기했다.그 순간.탁.검은 꼬리가 세레나의 손안에서 빠져나갔다.“어?”설표가 꼬리를 몸 가까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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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대공을 찾는 사람들

말발굽 소리는 생각보다 빠르게 가까워졌다.눈을 헤치며 달려오는 소리였다. 일정하고 무거웠다. 한두 명이 아니라는 건 진작 알았지만, 세레나는 창가에 서서 어둠 너머로 흔들리는 횃불을 확인한 뒤에야 수가 얼마나 많은지 실감했다. 흰 설원 위로 붉은 불빛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적어도 스무 기. 아니, 그보다 더 많을지도 몰랐다.“이 시간에 누굴 찾는 거지.”세레나는 창틀에 손을 짚은 채 낮게 중얼거렸다.뒤에서는 검은 설표가 벽난로 옆에 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정확히는 눈을 감은 척하고 있었다. 귀 끝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는 걸 보면 밖의 소리를 전부 듣고 있는 게 분명했다.세레나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너도 신경 쓰여?”설표의 귀가 멈췄다.“……역시 사람 말 알아듣는 것 같은데.”이번에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세레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밖의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산기슭을 훑고 있었다. 눈밭을 수색하는 방식이 익숙했다. 사냥꾼도, 떠돌이 용병도 아니었다. 북부의 정규 기사단일 가능성이 높았다.그리고 그들의 망토에는 멀리서도 구분되는 은빛 문장이 달려 있었다.검은 방패 위의 은색 설표.세레나는 그 문양을 알아봤다.에른하르트 대공가.“대공가 기사단이네.”벽난로 옆에 누운 라시엘의 눈이 아주 조금 떠졌다.세레나는 그걸 보지 못했다.그녀는 창가에서 물러나 연구노트를 펼쳤다. 현장 조사 허가증을 받을 때 담당 관리가 보여 준 대공가 문장이 떠올랐다. 저 문장은 북부 국경 수비대와 대공 직속 기사단만 사용했다.그 정도 인원이 한밤중에 설원을 뒤진다면 단순한 순찰은 아니었다.“아까 그 비상종 때문인가.”라시엘은 속으로 짧게 욕했다.역시나였다.자신이 사라진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원래 계획대로라면 월식증이 발현하기 전 깊은 산속 별장으로 들어가 밤을 보낸 뒤 새벽 전에 성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인간으로 돌아왔을 때 아무도 모르게 움직이는 게 그간의 방식이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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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전하가 왜 제 침대에 계십니까

세레나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아무리 봐도 잘못 본 게 아니었다.분명 조금 전까지 거대한 검은 설표가 쓰러져 있던 자리였다. 은빛 마력선이 털 아래를 번져 가고, 몸이 경련하듯 굳더니 갑자기 눈앞을 덮은 빛이 터졌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진 뒤에는 사람이 있었다.그것도 남자.아주 멀쩡하게 인간의 형태를 한, 지나치게 잘생긴 남자.세레나는 자신이 아직 잠에서 덜 깬 건 아닌지 진지하게 의심했다. 그러나 손바닥 아래로 전해지는 뜨거운 체온과 단단한 가슴의 감촉은 지나치게 선명했다.쿵.쿵.쿵.심장박동도.설표였을 때와 정확히 같았다.세레나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자신의 손은 여전히 남자의 맨가슴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그리고 손목은 남자의 손에 붙잡혀 있었다.“…….”“…….”기묘할 정도로 긴 침묵이 이어졌다.세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일단.”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헛기침을 한 번 했다.“제 손부터 놓아주시겠습니까?”남자의 눈빛이 더욱 서늘해졌다.“내 몸에서 손을 먼저 떼는 게 순서 아닌가.”세레나는 아래를 봤다.자신의 손.남자의 가슴.다시 남자의 얼굴.“아.”그제야 황급히 손을 떼려 했지만 손목은 여전히 붙잡혀 있었다.“놓으셔야 뗄 수 있는데요.”남자의 미간이 아주 조금 좁아졌다.그는 마치 세레나가 일부러 말을 돌리는 것처럼 바라봤지만, 몇 초 뒤 손에서 힘을 풀었다.세레나는 즉시 뒤로 물러났다.그제야 상황이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보였다.남자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세운 채 기대어 앉아 있었다. 어깨부터 허리까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체 곳곳에는 상처가 남아 있었고, 특히 왼쪽 옆구리에는 세레나가 조금 전 설표에게 감아 놓았던 붕대가 그대로 감겨 있었다.크기가 달라졌을 뿐 위치도 같았다.세레나의 눈빛이 달라졌다.당황스러움보다 연구자로서의 집중력이 더 빠르게 돌아왔다.“붕대.”남자가 눈썹을 움직였다.“뭐?”“제가 감은 붕대가 그대로 있어요.”세레나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한 걸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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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자는 게 무서운 건 아닙니다

세레나는 눈앞의 검은 설표를 한동안 바라봤다.그리고 아주 진지하게 생각했다.방금 자신이 한 말이 실수였다는 걸.털이 부풀었다.정확히는 목덜미부터 등줄기를 따라 검은 털이 한껏 곤두섰다. 회색 눈동자는 가늘게 좁아졌고, 입가에서는 낮은 으르렁거림이 새어 나왔다.설표의 몸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북부 대공 특유의 차갑고 살벌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을 것이다.세레나는 그걸 상상하자 조금 덜 웃겼다.조금만.“……농담이었습니다.”설표는 여전히 노려봤다.“정말입니다.”꼬리가 바닥을 탁 쳤다.“그러니까 화 푸세요.”으르르릉.“전하.”세레나는 최대한 정중한 목소리를 냈다.“제가 잘못했습니다.”설표의 귀가 아주 조금 돌아왔다.효과가 있었다.세레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대공 전하께서 혼자 자는 게 무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시엘의 눈빛이 조금 풀렸다.“당연히요. 전하는 북부의 주인이시고, 수많은 기사단을 거느리고 계시고, 설표로 변하면 저보다 몇 배는 크시니까요.”설표의 표정이 묘해졌다.세레나는 말을 이어 갔다.“그러니까 제가 잠깐 착각한 겁니다.”꼬리가 한 번 움직였다.“혼자 자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세레나가 설표가 입에 물고 있는 담요를 내려다봤다.“……제 방에서 주무시고 싶으신 거군요.”이번에는 설표의 털이 아까보다 더 크게 부풀었다.세레나는 눈을 감았다.또 틀렸다.“알겠습니다. 아무 말도 안 하겠습니다.”라시엘은 그제야 으르렁거림을 멈췄다.그러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세레나는 침실 문을 열어 둔 채 설표를 보고 있었고, 설표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둘 다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시간만 흘렀다.결국 세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런데 전하.”설표의 귀가 살짝 움직였다.“왜 여기 오신 겁니까?”대답은 없었다.당연했다.지금은 말을 할 수 없으니까.세레나는 잠시 고민했다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침대를 가리켰다.“침대?”무반응.거실을 가리켰다.“소파가 불편해서?”꼬리 끝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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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성에 연구원을 들였습니다

“……이분과 밤을 보내신 겁니까?”카른의 질문이 떨어진 뒤, 방 안에는 숨 막힐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세레나는 눈을 크게 뜬 채 카른을 바라봤고, 라시엘은 눈을 감았다.딱 봐도 오해였다.아주 전형적이고, 설명하기 피곤한 종류의.문제는 상황이 오해를 부르기에 너무 완벽했다는 데 있었다.세레나는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치고 있었고, 라시엘은 어제 그녀에게 빌린 셔츠를 입고 있었다. 침실 문은 열려 있었으며 그 앞에는 검은 털이 묻은 담요가 널브러져 있었다.무엇보다.라시엘의 셔츠 단추는 몇 개나 풀려 있었다.붕대를 다시 확인하느라 세레나가 잠깐 풀어 둔 뒤 미처 잠그라고 말하지 않은 탓이었다.카른의 시선이 그 부분에서 멈췄다.세레나도 뒤늦게 봤다.그리고 생각했다.이건 설명을 안 하면 정말 이상하겠다.“아닙니다.”세레나가 먼저 말했다.카른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밤을 보내긴 했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라시엘이 눈을 떴다.“세레나.”“네?”“그렇게 말하면 더 이상해진다.”“……아.”맞다.세레나는 입을 다물었다.카른의 표정은 이미 더 묘해져 있었다.“그런 의미가 아닌 밤을…….”“그만.”라시엘의 낮은 목소리가 방 안을 정리했다.카른이 입을 닫았다.하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수십 개의 질문이 떠 있었다.라시엘은 미간을 짚었다.“변신했다.”카른의 표정이 곧바로 굳었다.조금 전까지의 오해가 단숨에 사라졌다.“……여기서 말씀이십니까?”“그래.”“이분 앞에서?”라시엘이 짧게 대답했다.“들켰다.”카른의 시선이 세레나에게 날아왔다.이번에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경계.세레나는 그 변화를 느꼈다.조금 전까지는 대공과 밤을 보낸 수상한 여자 정도로 봤다면, 이제는 에른하르트 가문의 비밀을 알아버린 외부인으로 보고 있었다.카른의 손이 본능적으로 검 손잡이 쪽으로 내려갔다.라시엘의 목소리가 차갑게 떨어졌다.“손 치워.”카른이 멈췄다.“전하.”“세레나 브리엘은 손대지 마.”단호했다.카른은 잠시 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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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은 설표를 깨우고 싶어 했다

“……황실.”라시엘의 입에서 떨어진 한마디는 짧았지만, 세레나는 그 안에 담긴 의미가 가볍지 않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마차 지붕을 뚫고 내려온 검은 칼날.칼날 끝에서 피어오르는 탁한 마력.그리고 그것을 본 순간 굳어버린 라시엘의 표정.그는 저 마력을 알고 있었다.단순히 비슷하다고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경계해 온 무언가를 다시 마주한 사람처럼.세레나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전하.”라시엘의 시선은 아직 칼날에 고정되어 있었다.“저게 뭔지 아시는 겁니까?”대답 대신 그의 손이 세레나의 손을 더 세게 감쌌다.세레나는 그 반응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손톱.조금 전 검게 길어졌던 손톱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인간의 손과 짐승의 발톱 사이 어딘가에 걸린 것처럼 끝이 뾰족하고 검었다. 손등을 타고 올라오던 은빛 마력선도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그러나 더 진행되지는 않았다.세레나와 접촉한 채라서.그 사실이 분명했다.“전하.”“지금은 질문하지 마.”“저게 전하 상태를 악화시키는 겁니까?”“세레나.”“그것만 대답해 주세요.”라시엘의 눈이 그녀에게 향했다.다급한 상황에서도 세레나는 물러서지 않았다.아니, 오히려 지금이기 때문에 묻고 있었다.원인을 모르면서 그를 붙잡고 있는 것과, 무엇이 위험한지 알고 붙잡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라시엘은 아주 짧게 숨을 내쉬었다.“그렇다.”세레나의 표정이 굳었다.“일부러요?”이번에는 침묵.그게 답이었다.밖에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또 크게 터졌다.“왼쪽! 두 명 더 온다!”“부관님 뒤!”카른의 목소리가 눈보라와 검 소리 사이를 찢고 들어왔다.라시엘의 시선이 마차 문으로 향했다.“여기 있어.”그가 손을 빼려 했다.세레나가 즉시 붙잡았다.“안 됩니다.”“내 사람들이 밖에 있다.”“지금 나가시면 변신할 수도 있어요.”“그래도 가야 한다.”“설표가 된 채로요?”라시엘의 턱이 굳었다.세레나는 그 반응을 보고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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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표는 원래 인간이었습니다

세레나는 검게 타버린 눈 위에 떨어진 은색 금속 조각을 오래 바라봤다.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작은 조각.평범한 사람에게는 그저 부서진 장식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세레나는 표면에 새겨진 문자를 알고 있었다.고대 제국 연구시설에서 사용하던 분류 기호.그리고 그 아래.희미하게 남은 숫자.Ⅲ.제3실험실.라시엘이 말했다.삼백 년 전.아르젠 설표를 만든 곳이라고.세레나는 자신이 잘못 들었기를 바랐다.그러나 라시엘의 얼굴은 농담을 하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만들었다고요?”세레나가 아주 천천히 되물었다.라시엘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검게 타버린 공격자의 흔적.부러진 검.멀리 쓰러진 기사들.그리고 자신을 지탱하듯 아직 가까이 서 있는 세레나.그 모든 걸 한 번씩 확인한 뒤 낮게 말했다.“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니다.”“전하.”“성으로 간다.”“하지만 방금—”“세레나.”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단단했다.“지금은.”그의 시선이 눈밭을 훑었다.“누가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세레나는 입을 다물었다.그 말은 맞았다.습격자들은 전부 죽었지만, 그것이 전부라는 보장은 없다.게다가 방금 공격자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브리엘의 후손.’그 단어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었다.세레나는 저도 모르게 손끝을 말아쥐었다.그 모습을 본 라시엘이 시선을 내렸다.“괜찮나.”세레나는 고개를 들었다.“네?”“다친 데.”그제야 자신이 폭발 직전에 라시엘에게 끌려 들어왔던 게 떠올랐다.몸을 살폈다.손목에 작은 긁힘.치맛자락에 검은 재.그 정도였다.“괜찮습니다.”라시엘은 직접 확인하듯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천천히 훑었다.그러다가 세레나의 오른쪽 뺨에서 시선이 멈췄다.“움직이지 마.”“왜요?”라시엘의 손이 올라왔다.세레나는 반사적으로 굳었다.그의 엄지가 뺨 가까이 다가왔다.닿기 직전.라시엘이 멈췄다.조금 전 세레나가 했던 말이 떠오른 듯했다.허락 없이 만지지 않기.라시엘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멈춰 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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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엘의 피를 알아본 문

딸깍.기록실 가장 안쪽.수백 년 동안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것처럼 먼지가 내려앉아 있던 철제 보관함의 문이 아주 천천히 벌어졌다.세레나는 숨을 멈췄다.누가 손을 댄 것도 아니었다.라시엘은 그녀의 바로 옆에 있었고, 그의 손은 검 손잡이 위에 올라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보관함에서 적어도 다섯 걸음은 떨어져 있었다.그런데.끼이익—묵직한 철문이 조금 더 열렸다.틈 사이로 은빛 빛이 흘러나왔다.마력.그런데 이상했다.라시엘에게서 느껴지는 거칠고 차가운 마력과는 전혀 달랐다. 공격자의 검에서 흘러나오던 검고 탁한 마력과도 달랐다.따뜻했다.마력에 온도가 있을 리 없는데.세레나는 이상하게 그렇게 느꼈다.그리고 그 순간.“……!”왼쪽 손목이 뜨거워졌다.세레나가 반사적으로 손목을 감쌌다.“세레나?”라시엘이 즉시 그녀를 돌아봤다.“왜.”“손목이…….”세레나는 소매를 걷어 올렸다.아무것도 없었다.상처도.붉어진 흔적도.그런데 피부 아래에서 뜨거운 맥박 같은 것이 뛰고 있었다.쿵.쿵.심장과는 다른 박동.세레나가 미간을 좁혔다.“이상합니다.”라시엘이 그녀의 손목으로 손을 뻗다가 멈췄다.아까 정한 약속이 떠오른 듯했다.세레나는 그걸 보고 먼저 손목을 내밀었다.“만져보셔도 됩니다.”라시엘의 눈이 잠깐 그녀에게 향했다.그리고 손가락이 손목 안쪽을 감쌌다.뜨거운 피부.그 순간.은빛 빛이 더 강해졌다.“…….”라시엘의 표정이 굳었다.세레나도 같은 걸 봤다.보관함 안에서 새어 나오던 빛이.마치 반응하듯 한 번 크게 뛰었다.“지금.”세레나가 낮게 말했다.“전하가 저를 만지니까 반응했습니다.”“아니.”라시엘의 시선은 보관함에 고정되어 있었다.“내 마력에 반응한 게 아니다.”“그럼요?”“너다.”세레나가 라시엘을 봤다.“제가요?”“내가 이 방에 들어온 건 처음이 아니야.”라시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저 보관함도 수십 번 봤다.”세레나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한 번도 열린 적 없습니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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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방울의 피가 증명한 것

세레나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정확히는.제대로 잔 것 같지도 않았다.눈을 감으면 지하 기록실에서 본 문장들이 떠올랐다.「브리엘의 혈통은 아직 남아 있다.」「안정화 인자의 마지막 계승자를 황실보다 먼저 숨겨야 한다.」그리고.라시엘에게 손을 대는 순간마다 거짓말처럼 가라앉던 마력.설원에서.마차 안에서.습격을 받았을 때.심지어 완전 변이 직전에도.자신이 가까이 가자 그의 변화가 멈췄다.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그다음에는 마력 상성.그리고 이제는.삼백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의도적인 무언가가 자신의 피 안에 남아 있을 가능성까지 생겼다.세레나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봤다.“……마지막 계승자라.”입 밖으로 내놓자 더 이상했다.자신은 평범한 연구원이었다.정확히는 멸종한 마물 하나에 인생을 걸어서 연구실까지 폐쇄될 위기에 놓인 조금 이상한 연구원.그 정도였다.브리엘 가문이라고 해 봐야 몰락한 귀족가.어릴 때부터 특별한 힘이 있다고 들은 적도 없었다.마력이 없지는 않았지만 뛰어난 마법사도 아니었다.왕립 아카데미에서 받은 평가도 늘 비슷했다.‘마력량은 평균.’‘정밀 제어 능력 우수.’‘실전 마법에는 부적합.’그래서 연구자가 됐다.마법을 직접 쓰기보다 분석하는 쪽이 훨씬 잘 맞았으니까.그런데.그 평범한 마력이 라시엘에게는 다르다고 했다.세레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탁자 위에는 어젯밤 급하게 정리해 둔 기록장이 펼쳐져 있었다.그녀는 펜을 집었다.그리고 한참 동안 빈 종이를 바라보다 첫 줄을 적었다.「비공개 치료 관찰 기록.」잠시 생각.그 아래.「피관찰자 : 라시엘 에른하르트 대공.」세레나의 펜이 멈췄다.‘피관찰자’라는 표현도 조금 이상했다.‘연구 협력자.’그게 낫겠다.줄을 긋고 다시 적었다.「연구 협력자 : 라시엘 에른하르트.」조금 마음에 들었다.그 아래.「연구자 : 세레나 브리엘.」그리고 마지막으로.「기록은 당사자 동의 없이 외부 공개하지 않음.」세레나는 그 문장을 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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