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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가 가져온 열쇠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4 07:00:07

“아직 아무도 열지 못한 방의 열쇠지.”

황태자 클라우드의 손끝에서 낡은 은빛 열쇠가 천천히 흔들렸다.

북부의 차가운 햇빛이 변색된 금속 표면을 스쳤다. 손잡이에 새겨진 것은 분명 브리엘의 문장이었다. 두 개의 반원과 그 아래 자리한 작은 별. 어제 에른하르트의 지하 기록실에서 세레나의 피에 반응해 열렸던 보관함에도 같은 문양이 있었다.

세레나는 열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로웬이 사라지기 사흘 전.

황실 연구원에 맡긴 물건.

그리고 세레나 브리엘이 직접 찾아오는 날에만 넘기라는 조건.

이상했다.

너무 이상했다.

“교수님이 직접 맡겼다는 걸 증명할 수 있습니까?”

클라우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첫 질문이 그것인가?”

“중요하니까요.”

“내가 황태자라는 사실보다?”

“전하께서 황태자라는 사실과 그 열쇠의 출처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주변 공기가 미묘하게 굳었다.

황실 수행원들 가운데 몇 명이 세레나를 쳐다봤다. 카른은 익숙하다는 듯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라시엘은 오히려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를 움직였다.

클라우드는 그런 라시엘을 잠깐 보더니 다시 세레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듣던 대로군.”

세레나의 눈썹이 움직였다.

“어제부터 다들 저를 들었다고 말씀하시는데, 대체 누구에게 뭘 들으신 겁니까?”

“여러 사람에게.”

“구체적으로요.”

“세레나.”

라시엘이 낮게 불렀다.

그제야 세레나는 자신이 황태자를 성문 앞에 세워 둔 채 심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클라우드가 작게 웃었다.

“나는 재미있으니 괜찮다.”

“나는 안 괜찮습니다.”

라시엘이 즉시 잘랐다.

두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웃고 있는 클라우드.

표정 없는 라시엘.

그 사이에 선 세레나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연구실의 위험한 마물 두 마리 사이에 끼어 있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한쪽은 정말 마물로 변하기도 했다.

그 생각을 한 순간 라시엘의 시선이 세레나에게 향했다.

“왜.”

“아무것도 아닙니다.”

“방금 이상한 생각 했지.”

“안 했습니다.”

“표정이 그랬는데.”

“전하께서 제 표정을 너무 많이 읽으시는 것 같습니다.”

클라우드가 흥미롭다는 듯 둘을 바라봤다.

세레나는 그 시선을 느끼고 곧장 표정을 정리했다.

지금은 라시엘과 실랑이할 때가 아니었다.

“안으로 모시지.”

라시엘이 차갑게 말했다.

“밖에서 계속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군.”

“그러지.”

클라우드가 열쇠를 다시 작은 은색 상자 안에 넣었다.

세레나의 시선이 그 움직임을 따라갔다.

아직 넘기지 않았다.

역시.

공짜로 줄 생각은 없다는 뜻이다.

응접실에는 필요한 사람만 남았다.

라시엘.

세레나.

클라우드.

엘리엇.

그리고 카른.

황태자의 호위 기사들은 문밖에 대기했고, 에른하르트 기사들도 같은 수만큼 복도에 배치됐다.

협상이라기보다 서로 인질을 데리고 마주 앉은 것 같은 분위기였다.

세레나는 라시엘 옆자리에 앉았다.

이번에는 그가 의자를 당기기도 전에 스스로 그 자리를 골랐다.

앉고 나서야 깨달았다.

‘……왜 자연스럽게 여기 앉았지?’

맞은편의 엘리엇이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세레나는 괜히 기록장을 꺼냈다.

클라우드의 시선이 그것으로 향했다.

“지금부터 기록할 생각인가?”

“네.”

“황태자와의 대화를?”

“연구 관련 내용만요.”

“허락을 구하지 않는군.”

세레나가 펜을 멈췄다.

그건 맞다.

“그럼 지금 구하겠습니다.”

기록장을 내려놓았다.

“제3실험실, 아르젠, 브리엘 가문 및 로웬 교수님과 관련된 내용에 한해서 기록해도 되겠습니까?”

클라우드가 웃었다.

“안 된다고 하면?”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적겠습니다.”

카른이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라시엘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허락해. 어차피 적는다.”

클라우드가 라시엘을 바라봤다.

“많이 익숙해진 모양이군.”

“뭐가.”

“저 연구원에게.”

라시엘의 표정이 아주 조금 차가워졌다.

세레나가 끼어들었다.

“허락하시는 겁니까?”

클라우드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감사합니다.”

세레나는 바로 날짜와 참석자를 적었다.

「황태자 클라우드 아르테시아와 면담.」

그 아래.

「목적 : 제3실험실 열쇠의 출처 및 로웬 브리엘의 마지막 행적 확인.」

라시엘이 옆에서 내려다봤다.

“내 이름은.”

“참석자에 적었습니다.”

“작군.”

세레나가 그를 봤다.

“글씨 크기가 중요합니까?”

“아니다.”

클라우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라시엘.”

라시엘이 싸늘하게 봤다.

“네가 이런 표정을 짓는 것도 처음 보는군.”

“본론이나 말해.”

“아쉽군. 조금 더 보고 싶었는데.”

“클라우드.”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클라우드는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알았다.”

웃음이 사라졌다.

그 순간.

방 안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황태자.

제국의 다음 황제.

부드러운 얼굴 아래 감춰져 있던 권력자의 눈빛이 처음으로 드러났다.

“먼저.”

클라우드가 말했다.

“한 가지는 정정하지.”

세레나의 펜이 움직일 준비를 했다.

“제3실험실을 다시 시작하려는 게 황실 전체라고 생각하지 마.”

라시엘이 비웃었다.

“믿으라고?”

“안 믿어도 된다.”

클라우드는 태연했다.

“나 역시 황실이니까.”

“그럼 누굽니까?”

세레나가 물었다.

“재개하려는 사람.”

클라우드의 시선이 세레나에게 향했다.

“그걸 알아내려고 내가 여기 왔다.”

펜이 멈췄다.

“전하께서도 모르십니까?”

“정확히는.”

클라우드가 손가락을 맞물렸다.

“알고 있는 이름은 있지만 그게 전부인지 모른다.”

“이름을 말씀해 주세요.”

“아직은.”

세레나의 표정이 바로 나빠졌다.

“그럼 대화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세레나 연구원.”

엘리엇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황실 내부 문제입니다.”

세레나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그 황실 내부 문제가 어제 저를 죽일 뻔했습니다.”

엘리엇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전하도요.”

이번에는 라시엘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더 이상 황실 내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클라우드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세레나는 말을 이었다.

“제가 가진 정보를 원하신다면 전하께서도 정보를 주셔야 합니다.”

“협상인가?”

“정보 교환입니다.”

“상대가 황태자인데도?”

“정보에는 신분이 없으니까요.”

라시엘이 아주 낮게 말했다.

“맞는 말이군.”

클라우드가 그를 흘겨봤다.

“너는 조용히 있을 생각이 없나?”

“내 성이다.”

“그렇지.”

클라우드는 세레나를 잠시 바라봤다.

그러다 천천히 말했다.

“좋아.”

엘리엇이 놀라 그를 봤다.

“전하.”

“여기까지 왔는데 숨기기만 할 수도 없지.”

클라우드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한 번 두드렸다.

“현재 황실 내부에서 제3실험실의 자료를 가장 적극적으로 찾고 있는 조직은 ‘백탑’이다.”

세레나가 바로 적었다.

“마법사들의 백탑 말입니까?”

“공식 백탑과는 다르다.”

“그럼.”

“황실 지하에 존재하는 비공식 연구 조직.”

라시엘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처음 듣는군.”

“당연하지.”

클라우드가 말했다.

“황제 직속으로도 기록되지 않는 조직이니까.”

카른이 물었다.

“그런 조직을 황태자 전하께서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클라우드는 잠시 침묵했다.

“어머니가 죽었으니까.”

방 안이 조용해졌다.

세레나의 펜도 멈췄다.

황태자의 어머니.

선황후.

공식적으로는 오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진 사람.

“백탑 때문입니까?”

세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클라우드의 얼굴에서 웃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확신은 없다.”

“그런데 의심하시는 이유가.”

“어머니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조사하던 게 제3실험실이었다.”

세레나의 손끝이 굳었다.

또.

제3실험실.

삼백 년 전에 사라졌어야 할 장소가.

너무 많은 죽음과 실종 뒤에 있었다.

“로웬 교수님과도 연결됩니까?”

클라우드가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

세레나의 심장이 빨라졌다.

“어떻게요?”

“두 사람이 협력했다.”

이번에는 엘리엇도 놀라 클라우드를 봤다.

“전하.”

“너도 몰랐겠지.”

“……예.”

클라우드가 세레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로웬 브리엘은 황후에게 정보를 넘겼다.”

“무슨 정보를요?”

“제3실험실이 폐쇄되지 않았다는 증거.”

세레나의 입술이 굳었다.

예상은 했다.

그러나 직접 들으니 무게가 달랐다.

“삼백 년 동안 계속 운영됐다는 뜻입니까?”

“아니.”

클라우드가 고개를 저었다.

“몇 번이나 이름을 바꾸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목적은.”

“같다.”

이번에는 라시엘이 답을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인간과 마물핵의 결합.”

클라우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정확히는.”

그의 시선이 라시엘에게 향했다.

“통제 가능한 마물화.”

세레나의 표정이 굳었다.

“통제.”

“에른하르트처럼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으면서.”

클라우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전투할 때는 마물의 힘을 사용하는 병사.”

세레나는 펜을 꽉 쥐었다.

삼백 년 전과 같다.

사람을 병기로 만든다.

이번에는 실패를 줄여서.

더 완벽하게.

“그래서 라시엘 전하가 필요하군요.”

“그래.”

“월식증을 앓으면서도 서른한 살까지 자아를 유지한 사례.”

“그래.”

세레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저는.”

클라우드가 대답했다.

“마물화를 되돌릴 수 있는 안전장치.”

방 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라시엘의 손이 의자 팔걸이를 꽉 잡았다.

“그 표현.”

낮은 목소리.

“다시 하지 마.”

클라우드가 그를 봤다.

“어떤 표현?”

“안전장치.”

라시엘의 회색 눈이 서늘했다.

“세레나는 사람이야.”

세레나가 고개를 돌렸다.

클라우드도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맞는 말이군.”

의외로 순순히 인정했다.

“미안하네, 세레나 연구원.”

세레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상했다.

황태자가 자신을 수단으로 표현한 것보다.

라시엘이 즉시 그 말을 정정한 게 더 크게 남았다.

“……괜찮습니다.”

“안 괜찮아도 된다.”

라시엘이 옆에서 말했다.

세레나가 그를 봤다.

“전하.”

“왜.”

“제가 대답하고 있었습니다.”

“알아.”

“그런데 왜.”

“안 괜찮아 보이니까.”

세레나는 입을 다물었다.

클라우드가 두 사람을 보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놀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선이 조금 복잡했다.

“그래서.”

세레나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교수님은 백탑의 실험을 알아냈고, 황후 폐하께 전달했다.”

“그래.”

“그 후 황후 폐하는 사망했고 교수님은 실종됐습니다.”

“정확하다.”

“전하께서는 그 두 사건이 연결되어 있다고 보고 계시고요.”

“그래.”

세레나는 기록장에 길게 선을 그었다.

그리고.

“열쇠.”

시선을 들었다.

“이제 설명해 주세요.”

클라우드는 기다렸다는 듯 은색 상자를 탁자 위에 올렸다.

뚜껑을 열었다.

낡은 열쇠.

가까이에서 보니 손잡이의 브리엘 문장 외에도 가느다란 글씨가 있었다.

세레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잠깐.”

라시엘이 손목을 잡았다.

“접촉하지 마.”

“안 만집니다.”

“가까이도.”

“글씨가 작아요.”

라시엘이 열쇠를 자신 쪽으로 당겼다.

“내가 읽지.”

세레나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봤다.

“전하께서 고대 브리엘 문자를 읽으십니까?”

라시엘의 손이 멈췄다.

“……못 읽는다.”

“그러니까 제가.”

“확대경.”

카른이 옆에서 조용히 확대경을 건넸다.

세레나는 카른을 봤다.

카른이 말했다.

“이럴 줄 알고 가져왔습니다.”

“잘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라시엘만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었다.

세레나는 확대경을 이용해 글씨를 확인했다.

그리고 읽었다.

「두 번째 문은 피로 열지 말 것.」

세레나의 표정이 굳었다.

“두 번째 문?”

엘리엇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다른 글씨도 있습니까?”

“네.”

세레나는 열쇠를 돌려 보려다 라시엘의 시선을 느끼고 손을 멈췄다.

카른이 장갑을 끼고 대신 돌렸다.

반대편.

더 작은 문장.

「첫 번째는 혈통을 확인한다.」

세레나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어제.

에른하르트 지하 기록실.

자신의 손목에 반응해 열린 보관함.

피 검사.

은빛 액체.

첫 번째.

설마.

“그리고.”

세레나가 마지막 줄을 읽었다.

「두 번째는 선택을 확인한다.」

정적.

클라우드도 처음 보는 내용인지 표정이 달라졌다.

“황실에서는 못 읽었습니까?”

세레나가 물었다.

엘리엇이 고개를 저었다.

“브리엘 고대 문자는 일부만 해독됐습니다.”

“그런데 저는 왜 읽죠?”

질문을 던진 뒤.

세레나 스스로 멈췄다.

읽을 수 있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왕립 아카데미에서도 배운 적 없는 문자.

그런데 의미가 바로 들어왔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교수님.”

세레나가 중얼거렸다.

“교수님이 가르쳤어요.”

라시엘이 그녀를 봤다.

“언제.”

“어릴 때.”

희미한 기억.

로웬이 세레나에게 이상한 기호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언어 공부라며.

고대 북부 문자의 변형이라고 했다.

세레나는 그걸 놀이처럼 배웠다.

퍼즐 맞추듯.

“……그것까지.”

목소리가 작아졌다.

“준비해 두신 거였네요.”

로웬은 세레나가 언젠가 이 열쇠를 볼 가능성까지 생각했다.

그렇다면.

더 확실해졌다.

자신을 진실에서 완전히 떼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모른 채 살아갈 수 있다면 좋지만.

끝내 여기까지 왔다면.

읽을 수 있도록.

열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다.

세레나는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고 열쇠를 바라봤다.

“제3실험실은 어디 있습니까?”

클라우드가 말했다.

“모른다.”

세레나가 눈을 들었다.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요?”

“정확한 위치는 로웬이 지웠다.”

“황실 기록에도?”

“전부.”

“그럼 어떻게 찾습니까?”

클라우드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라시엘에게.

“에른하르트가 알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라시엘의 표정이 굳었다.

“우리 기록에는 없다.”

“공식 기록에는.”

“지하 기록실까지 확인했다.”

“전부?”

그 질문.

세레나가 바로 반응했다.

“잠깐.”

라시엘이 그녀를 봤다.

“어제 열린 보관함.”

“그래.”

“그게 끝이 아닐 수도 있어요.”

세레나는 머릿속으로 기록실 구조를 떠올렸다.

보관함이 열릴 때.

은빛 마력이 바닥으로 퍼졌다.

자신에게 이어졌고.

라시엘이 접촉했을 때 더 강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상자.

카시안 에른하르트.

에드리안 브리엘.

두 혈통이 함께 등장했다.

“첫 번째는 혈통을 확인한다.”

세레나가 열쇠의 문장을 다시 말했다.

“어제 보관함이 첫 번째라면.”

라시엘의 눈빛도 달라졌다.

“두 번째가 기록실 안에 있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레나의 심장이 빨라졌다.

“다시 내려가야 합니다.”

라시엘은 바로 말했다.

“식사 후.”

세레나가 멈췄다.

“지금 가면 되잖아요.”

“아침 안 먹었지.”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중요해.”

클라우드가 헛웃음을 흘렸다.

“라시엘.”

“왜.”

“정말 네가 맞나?”

라시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무슨 뜻이지.”

“예전의 너라면 사람 하나 굶든 말든 신경도 안 썼을 텐데.”

세레나의 시선이 라시엘에게 향했다.

라시엘은 클라우드를 노려봤다.

“쓸데없는 소리.”

“그런가.”

클라우드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세레나가 작게 말했다.

“저는 간단히 먹고 바로 가겠습니다.”

라시엘이 그녀를 봤다.

“제대로.”

“빵이랑 우유.”

“고기.”

“아침부터요?”

“먹어.”

“전하.”

“협상 불가.”

세레나는 결국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클라우드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 광경 하나만으로 북부까지 온 보람이 있군.”

라시엘이 카른에게 말했다.

“황태자 식사는 가장 먼 방에 준비해.”

“라시엘.”

“싫으면 수도로 돌아가.”

한 시간 뒤.

다섯 사람은 에른하르트 지하 기록실로 내려갔다.

클라우드를 데려가는 문제로 라시엘과 세레나는 다시 한 번 의견이 갈렸다.

라시엘은 처음부터 반대했다.

세레나는 열쇠를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열쇠 자체를 넘기는 조건으로 클라우드는 동행하되, 황실 호위는 입구에서 멈추기로 했다.

문제는.

클라우드가 순순히 열쇠를 세레나에게 주려 했을 때였다.

“받아.”

그가 손을 내밀었다.

라시엘의 시선이 즉시 손으로 향했다.

세레나는 열쇠만 집으려 했다.

그런데.

라시엘이 먼저 손을 뻗었다.

열쇠를 가져갔다.

클라우드가 눈썹을 올렸다.

“세레나 연구원에게 준 건데.”

“내가 들고 간다.”

세레나가 말했다.

“전하, 열쇠는 제가—”

“필요할 때 줄게.”

“제가 연구자인데요.”

“그래서 더.”

“무슨 논리입니까?”

“네가 들고 있으면 분명 걷다가 문양 보겠다고 만질 거다.”

세레나가 입을 다물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카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전하 의견에 동의합니다.”

“부관님까지.”

“어제 피 한 방울 넣으셨다가 과거 기억까지 보셨습니다.”

반박할 수 없었다.

세레나는 결국 포기했다.

“대신 제가 달라고 하면 바로 주세요.”

“안전 확인 후.”

“바로.”

“확인 후.”

“전하.”

“세레나.”

클라우드가 엘리엇에게 작게 말했다.

“둘이 원래 저런가?”

엘리엇이 아주 낮게 답했다.

“제가 본 이틀 동안은 계속 저렇습니다.”

라시엘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다 들린다.”

둘은 입을 다물었다.

기록실에 도착했다.

어제 열었던 철제 보관함은 그대로였다.

세레나는 곧장 그 앞으로 갔다.

상자.

수첩.

은빛 펜던트.

유리관.

모두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클라우드의 표정이 처음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이건.”

그가 보관함으로 다가가려 했다.

라시엘이 막았다.

“거기까지.”

“확인만.”

“눈으로.”

클라우드가 세레나를 봤다.

“저 수첩을 읽었나?”

“일부는요.”

“내용은.”

세레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라시엘도 침묵했다.

정보 교환.

클라우드가 전부 공개한 게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도 전부 내놓을 필요는 없다.

“카시안 에른하르트에 대한 안정화 기록이 있었습니다.”

딱 필요한 만큼.

클라우드가 눈을 좁혔다.

“그게 전부인가?”

“지금 말씀드릴 수 있는 건요.”

라시엘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세레나는 못 본 척했다.

“두 번째 문을 찾죠.”

기록실을 다시 살폈다.

벽.

서가.

바닥.

보관함.

세레나는 어제 은빛 마력이 퍼졌던 방향을 떠올렸다.

보관함에서 시작한 빛.

자신에게 이어졌다.

그런데.

그 뒤.

어디로 갔지?

“불을 낮춰 주세요.”

세레나가 말했다.

카른이 램프 몇 개를 껐다.

기록실이 어두워졌다.

“더요.”

“아예 끌까요?”

“네.”

마지막 램프가 꺼졌다.

어둠.

잠시 뒤.

보관함 안의 유리관에서 희미한 은빛이 올라왔다.

세레나의 눈이 커졌다.

“역시.”

빛이 바닥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어제는 주변이 밝아서 놓쳤다.

가느다란 은빛 선 하나.

보관함에서 시작해.

바닥.

그리고.

벽 쪽으로.

세레나가 따라갔다.

라시엘도 바로 옆에서 움직였다.

세 걸음.

네 걸음.

다섯.

그 순간.

라시엘의 숨이 조금 거칠어졌다.

세레나가 바로 멈췄다.

“전하.”

“괜찮아.”

“안 괜찮습니다.”

그녀가 한 걸음 돌아왔다.

마력 측정기를 꺼냈다.

수치 상승.

역시.

아침에는 안정적이었지만 지하처럼 고대 마력이 강한 공간에서는 거리 민감도가 다시 커졌다.

“세 걸음 안으로 계세요.”

클라우드가 두 사람을 봤다.

“왜?”

세레나와 라시엘이 동시에 멈췄다.

이건.

클라우드에게 공개하지 않은 정보다.

세레나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연구상 필요합니다.”

“무슨 연구.”

“비공개입니다.”

클라우드가 웃었다.

“방금까지 정보 교환을 주장하던 사람이.”

“모든 정보를 교환한다고는 안 했습니다.”

“영리하군.”

“감사합니다.”

라시엘은 세레나의 어깨 바로 뒤로 자리를 옮겼다.

가까웠다.

등 뒤로 체온이 느껴질 정도.

세레나는 괜히 목덜미가 간지러워졌다.

“조금만 뒤로 가셔도 됩니다.”

“세 걸음 안이라며.”

“그렇다고 반 걸음까지 오실 필요는.”

“좁아.”

실제로 서가 사이가 좁았다.

세레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은빛 선을 따라갔다.

끝.

벽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돌벽.

“여기.”

세레나가 손을 뻗었다.

라시엘이 즉시 손목을 잡았다.

“만지지 마.”

세레나가 뒤를 봤다.

“벽인데요.”

“어제도 상자였어.”

“벽을 만진다고 과거를 보진 않을 것 같습니다.”

“확신?”

“……없습니다.”

“그럼 안 돼.”

세레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럼 어떻게 확인합니까?”

라시엘이 장갑을 꼈다.

그리고 먼저 벽을 눌렀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보셨죠?”

세레나가 말했다.

“저한테 반응하는 겁니다.”

라시엘의 표정이 굳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결국.

“내가 손 잡고 있을 거다.”

“왜요?”

“무슨 반응 생기면 바로 당겨.”

세레나는 잠깐 그의 손을 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라시엘이 왼손으로 세레나의 손을 잡았다.

오른손은 언제든 검을 뽑을 수 있게 두었다.

세레나는 빈손을 벽에 올렸다.

차가운 돌.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

손목이 뜨거워졌다.

“옵니다.”

라시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벽 아래 은빛 선이 밝아졌다.

그리고.

쿵.

낮은 진동.

엘리엇이 숨을 삼켰다.

벽 한가운데.

브리엘 문양이 떠올랐다.

두 개의 반원.

별.

그런데.

그 옆.

다른 문양 하나가 더 나타났다.

검은 방패.

중앙의 은빛 선.

에른하르트.

세레나가 라시엘을 봤다.

“둘 다 필요합니다.”

라시엘의 눈빛도 달라졌다.

세레나의 브리엘.

라시엘의 에른하르트.

“손.”

세레나가 말했다.

“어디.”

“문양 위에.”

라시엘은 잠시 망설였다.

“같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결국 손을 올렸다.

두 문양이 동시에 빛났다.

그리고.

찰칵.

벽 안쪽에서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

돌벽이 천천히 갈라졌다.

그 뒤.

작은 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중앙.

열쇠 구멍.

세레나의 심장이 빨라졌다.

“두 번째 문.”

라시엘이 품에서 열쇠를 꺼냈다.

세레나가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그도 막지 않았다.

열쇠가 세레나의 손바닥 위에 놓였다.

그 순간.

뜨거웠다.

“…….”

세레나의 표정이 변했다.

“왜.”

“열쇠가.”

손잡이의 문자가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두 번째는 선택을 확인한다.」

세레나는 문 앞에 섰다.

열쇠를 넣으려 했다.

그런데.

들어가지 않았다.

“뭐지?”

카른이 물었다.

세레나는 방향을 바꿨다.

그래도.

안 된다.

“열쇠가 안 맞습니다.”

클라우드의 표정이 굳었다.

“그럴 리가.”

“직접 보세요.”

세레나가 한 걸음 비켰다.

클라우드가 열쇠를 확인했다.

분명 크기는 맞아 보였다.

그런데 끝부분이 걸린다.

엘리엇이 말했다.

“혹시 다른 장치가.”

세레나는 문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열쇠 구멍 아래 아주 작은 홈을 발견했다.

글씨.

“불.”

카른이 램프를 가까이 했다.

세레나가 읽었다.

「피로 열지 말 것.」

그 아래.

「계승자가 자신의 의지로 귀환자를 선택할 것.」

세레나의 숨이 멎었다.

라시엘도 읽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표정을 봤다.

“뭐라고 적혀 있지.”

세레나가 천천히 번역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귀환자.”

클라우드가 중얼거렸다.

“그게 누구지?”

세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연결되고 있었다.

안정화.

기억.

완전 동화.

인간으로의 귀환.

카시안 에른하르트.

브리엘 안정화 담당자.

그리고 현재.

라시엘.

세레나는 옆을 봤다.

회색 눈.

라시엘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설마.”

엘리엇이 낮게 말했다.

“열쇠가 아니라.”

세레나는 천천히 라시엘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세레나?”

“잠깐만요.”

이번에는 연구 때문이었다.

아마.

세레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두 사람이 손을 잡은 채 문 앞으로 갔다.

그리고 다시 열쇠를 넣었다.

스르륵.

이번에는.

거짓말처럼 들어갔다.

모두가 숨을 멈췄다.

세레나의 심장도 크게 뛰었다.

“……맞네요.”

라시엘의 시선은 문이 아니라.

잡힌 손에 내려가 있었다.

세레나는 열쇠를 돌렸다.

딸깍.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안쪽에서 오래된 마력이 밀려 나왔다.

라시엘의 몸이 순간 굳었다.

“전하?”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세레나가 즉시 측정기를 꺼냈다.

수치가 급격히 올라갔다.

“안 됩니다.”

라시엘의 눈동자 가장자리에 은빛이 번졌다.

부분 마물화.

“뒤로 가세요.”

“문부터—”

“전하.”

세레나가 그의 얼굴을 잡았다.

클라우드와 엘리엇이 보는 앞이었다.

생각할 틈도 없었다.

“저 보세요.”

라시엘의 숨이 거칠어졌다.

“라시엘.”

처음으로.

황태자 앞에서까지.

호칭 없이 이름을 불렀다.

라시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 기억하시죠?”

그 순간.

마력이 멈칫했다.

세레나는 놓치지 않았다.

“세레나 브리엘.”

자신을 가리켰다.

“연구원.”

조금.

수치가 내려간다.

“전하 꼬리 잡았던 사람.”

라시엘의 눈빛이 순간 싸늘해졌다.

세레나가 안도했다.

“좋습니다. 화내시는 거 보니까 기억하시네요.”

카른이 뒤에서 숨을 삼켰다.

웃으면 죽는다고 판단한 듯했다.

라시엘의 눈에서 은빛이 천천히 사라졌다.

세레나는 그제야 손을 내렸다.

그런데 라시엘이 먼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조금만.”

낮은 목소리.

세레나는 멈췄다.

“아직 불안정합니까?”

“……그래.”

측정기를 봤다.

아직 평소보다 높다.

“알겠습니다.”

세레나는 손을 빼지 않았다.

그 모습을.

클라우드가 보고 있었다.

아주 조용히.

아까까지의 웃음은 완전히 사라진 얼굴로.

그리고.

엘리엇은.

더 이상 놀란 표정조차 아니었다.

마치.

예상했던 장면을 확인한 사람처럼.

세레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엘리엇 연구관.”

엘리엇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왜 그렇게 보고 계십니까?”

“무슨 뜻입니까?”

“처음 보는 반응 같지 않아서요.”

침묵.

라시엘의 시선도 곧바로 엘리엇에게 향했다.

“말해.”

엘리엇은 입을 다물었다.

클라우드가 그를 바라봤다.

“엘리엇.”

“…….”

“나도 듣고 싶군.”

엘리엇은 한참 뒤.

아주 낮게 말했다.

“브리엘의 안정화 인자가.”

세레나의 표정이 굳었다.

“에른하르트에게 작용하는 방식은 기록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건 저희도 압니다.”

“아닙니다.”

엘리엇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보신 건 단순한 안정화가 아닙니다.”

세레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럼.”

엘리엇의 시선이 두 사람이 잡은 손으로 향했다.

“귀환 반응입니다.”

라시엘의 손이 굳었다.

“설명해.”

엘리엇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세레나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어제부터 알고 있었습니까?”

“가능성만.”

“그 가능성을 왜 말하지 않았죠?”

“확인되지 않았으니까.”

“그건 제가 판단할 문제입니다.”

세레나의 눈빛이 완전히 바뀌었다.

“제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엘리엇의 입이 다물렸다.

라시엘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세레나의 손을 놓지 않았다.

“전부 말씀하세요.”

세레나가 말했다.

“지금.”

엘리엇은 문을 바라봤다.

조금 열린 틈.

그 안은 어두웠다.

“저 방 안에.”

그가 낮게 말했다.

“아마 제가 설명하는 것보다 정확한 답이 있을 겁니다.”

세레나가 차갑게 웃었다.

“또 회피하시네요.”

“이번에는 아닙니다.”

엘리엇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

“저 방은.”

잠시.

“로웬 형이 황실에서 훔친 마지막 기록을 숨긴 장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레나의 심장이 뛰었다.

“교수님이 여기까지 왔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엘리엇은 열린 문을 가리켰다.

“저 문 자체가 증거입니다.”

“왜요?”

“그 문은 브리엘 혼자 열 수 없습니다.”

세레나가 멈췄다.

“에른하르트도 혼자 못 열고요.”

“…….”

“두 사람이 서로를 선택해야만 열립니다.”

세레나의 손끝이 서늘해졌다.

“그럼 교수님도.”

“에른하르트 혈통의 누군가와 함께 이 문을 열었다는 뜻입니다.”

라시엘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누구.

십여 년 전.

로웬 브리엘과 함께.

이곳에 들어온 에른하르트.

세레나와 라시엘의 시선이 마주쳤다.

라시엘이 먼저 말했다.

“아버지.”

세레나의 눈이 커졌다.

라시엘의 아버지.

전대 북부 대공.

이미 죽은 사람.

“전대 대공께서 교수님을 아셨습니까?”

“모른다고 생각했다.”

“확인해야 합니다.”

라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가 문을 완전히 밀었다.

끼이익—

어둠 속.

작은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책상 하나.

의자 두 개.

벽을 가득 채운 기록.

그리고.

정면.

커다란 수정판.

세레나가 한 걸음 들어갔다.

라시엘도 따라왔다.

그 순간.

수정판이 켜졌다.

은빛 빛.

치직.

오래된 마력 영상이 흔들렸다.

그리고.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세레나가 숨을 멈췄다.

조금 더 젊은 얼굴.

익숙한 회색 머리.

늘 피곤해 보이던 눈.

로웬 브리엘.

“……교수님.”

영상 속 로웬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수정판 너머의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리고 입을 열었다.

『세레나.』

세레나의 몸이 굳었다.

자신의 이름.

『네가 이걸 보고 있다면.』

로웬이 아주 작게 웃었다.

세레나가 수없이 봐온.

무뚝뚝한 사람이 가끔만 보여주던 웃음이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세레나는 숨도 쉬지 못했다.

『그리고 네 옆에는.』

로웬의 시선이 아주 조금 옆으로 향하는 듯했다.

『에른하르트가 있겠지.』

라시엘의 표정이 굳었다.

『먼저 미안하다는 말부터 해야겠구나.』

세레나의 손이 천천히 주먹 쥐어졌다.

『나는 네게 너무 많은 걸 숨겼다.』

“……알고 계셨네요.”

당연히 영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네 어머니에 대해서도.』

세레나의 눈이 흔들렸다.

『브리엘에 대해서도.』

한 번.

『아르젠에 대해서도.』

그리고.

『네가 태어난 이유에 대해서도.』

세레나의 숨이 멎었다.

라시엘이 즉시 그녀를 봤다.

엘리엇도.

클라우드도.

모두 굳었다.

“태어난…… 이유?”

세레나가 중얼거렸다.

영상 속 로웬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한 가지는 오해하지 마라.』

잠깐.

『너는 실험체가 아니다.』

세레나의 심장이 세게 뛰었다.

마치.

자신이 가장 먼저 떠올릴 의심까지 알고 있었던 것처럼.

『누구를 위해 만들어진 아이도 아니고.』

로웬이 말했다.

『브리엘의 의무를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니다.』

세레나의 눈가가 아주 조금 뜨거워졌다.

『네 어머니가 가장 두려워했던 건.』

영상이 흔들렸다.

치직.

『언젠가 누군가 네게 말하는 거였다.』

소리가 끊겼다가 돌아왔다.

『네가 에른하르트를 구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라시엘의 손이 굳었다.

세레나는 그를 보지 못했다.

영상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건 거짓말이다.』

로웬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세레나.』

『네 힘은 네 것이다.』

『누구를 구할지.』

『구하지 않을지.』

『누구에게 손을 내밀지.』

『전부 네가 결정해.』

세레나의 손끝이 떨렸다.

두 번째 문.

혈통이 아니라.

선택.

그제야 의미가 완전히 이해됐다.

브리엘의 계승자에게 강제로 에른하르트를 안정시키게 하지 않기 위해.

피만으로 열리지 않는 문.

계승자가 스스로 귀환자를 선택해야 열리는 문.

“그래서…….”

세레나가 아주 작게 말했다.

“선택.”

로웬의 영상이 계속됐다.

『그리고 네가 정말 에른하르트에게 손을 내밀기로 했다면.』

라시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수정판의 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안정화는 치료가 아니다.』

이미 본 문장.

그러나 다음.

『귀환은 치료가 될 수 있다.』

세레나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로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귀환에는 조건이 있다.』

세레나는 저도 모르게 라시엘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완전 동화 단계에 들어간 에른하르트를 인간으로 되돌리려면.』

바로.

찢겨 나갔던 문장의 뒤.

세레나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가 끝까지 붙잡을 기억 하나가 필요하다.』

라시엘의 시선이 세레나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치직.

영상이 크게 흔들렸다.

“안 돼.”

세레나가 수정판 앞으로 다가갔다.

“잠깐만.”

『……자신이 가장……』

소리가 끊겼다.

“교수님.”

치직.

『……선택한……』

“제발.”

세레나가 수정판에 손을 대려 했다.

라시엘이 바로 잡았다.

“세레나.”

“뒤가.”

『하지만 절대로—』

영상이 깨졌다.

어둠.

“…….”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세레나는 수정판을 바라봤다.

“다시.”

반응 없음.

“다시 틀어야 합니다.”

옆의 마력 장치를 확인했다.

“저장핵이 불안정해요. 보조 마력을 연결하면—”

“세레나.”

“잠깐만요.”

그녀의 손이 빨라졌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기록이 완전히 깨진 건 아닙니다. 마력 흐름만 복구하면—”

그 순간.

수정판 아래.

작은 서랍이 저절로 열렸다.

딸깍.

세레나의 움직임이 멈췄다.

안에는 종이 한 장이 있었다.

그리고.

검은 수정 조각.

라시엘의 표정이 바뀌었다.

“손대지 마.”

세레나도 느꼈다.

검은 수정.

어디서 본 마력인지.

어제 습격자들의 검.

라시엘의 변이를 강제로 유도했던 검은 마력과 같았다.

“이건.”

세레나는 차폐 장갑을 끼었다.

이번에는 라시엘도 막지 않았다.

그녀가 수정 조각을 측정기 가까이 가져갔다.

수치.

파동.

구조.

세레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천천히 사라졌다.

“왜.”

라시엘이 물었다.

세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한 번 더 측정했다.

틀리지 않았다.

“이 마법.”

“뭐지.”

세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제3실험실의 변이 유도식이 아닙니다.”

클라우드가 미간을 좁혔다.

“그럼?”

세레나는 옆에 있던 브리엘 수첩을 펼쳤다.

안정화 회로.

두 개의 원.

인간 마력 회로와 마물핵.

그 사이를 잇는 은빛 선.

그리고 검은 수정의 회로를 나란히 놓았다.

반대였다.

정확히.

모든 방향이.

“브리엘의 안정화식입니다.”

엘리엇의 얼굴이 굳었다.

“뭐라고요?”

“이걸.”

세레나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거꾸로 뒤집었어요.”

안정화는 인간과 마물핵의 충돌을 완화한다.

그렇다면 역전하면.

충돌을 강제로 키운다.

마물화를 촉진한다.

기억을 흔든다.

동화를 유도한다.

어제.

라시엘에게 일어난 것처럼.

“습격자들은.”

세레나가 아주 천천히 말했다.

“에른하르트의 월식증만 알고 있던 게 아닙니다.”

라시엘의 눈빛이 얼어붙었다.

“브리엘의 연구도 가지고 있다.”

“네.”

그 순간.

세레나의 시선이 종이로 향했다.

검은 수정 아래 놓여 있던 한 장.

로웬의 필체.

이번에는 아주 짧았다.

「세레나에게.」

세레나의 손이 멈췄다.

그 아래.

「안정화식을 뒤집는 방법을 알아낸 사람이 있다.」

한 줄.

「그자는 제3실험실의 후계자가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레나의 숨이 멎었다.

「브리엘이다.」

방 안의 모든 시선이.

천천히.

한 사람에게 향했다.

엘리엇 브리엘.

엘리엇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닙니다.”

라시엘의 손이 검 손잡이 위로 올라갔다.

카른도 움직였다.

클라우드의 표정마저 굳었다.

엘리엇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저는 아닙니다.”

세레나는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물었다.

“그럼.”

손에 든 로웬의 기록이 떨렸다.

“누굽니까.”

엘리엇의 입술이 굳었다.

한참 뒤.

그가 겨우 말했다.

“제가 그 이름을 말하면.”

시선이 세레나에게 향했다.

“당신은 오늘까지 알고 있던 가족사를.”

잠깐.

“전부 다시 의심하게 될 겁니다.”

세레나는 피하지 않았다.

“말하세요.”

엘리엇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에블린 브리엘.”

세레나의 숨이 멎었다.

“……누구요?”

알면서도.

다시 물었다.

엘리엇의 목소리가 무겁게 떨어졌다.

“당신의 어머니입니다.”

정적.

세레나의 손에서.

펜이 떨어졌다.

툭.

그 작은 소리가.

이상할 만큼 크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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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물 연구원은 대공을 표본으로 삼았습니다   황태자가 가져온 열쇠

    “아직 아무도 열지 못한 방의 열쇠지.”황태자 클라우드의 손끝에서 낡은 은빛 열쇠가 천천히 흔들렸다.북부의 차가운 햇빛이 변색된 금속 표면을 스쳤다. 손잡이에 새겨진 것은 분명 브리엘의 문장이었다. 두 개의 반원과 그 아래 자리한 작은 별. 어제 에른하르트의 지하 기록실에서 세레나의 피에 반응해 열렸던 보관함에도 같은 문양이 있었다.세레나는 열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로웬이 사라지기 사흘 전.황실 연구원에 맡긴 물건.그리고 세레나 브리엘이 직접 찾아오는 날에만 넘기라는 조건.이상했다.너무 이상했다.“교수님이 직접 맡겼다는 걸 증명할 수 있습니까?”클라우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첫 질문이 그것인가?”“중요하니까요.”“내가 황태자라는 사실보다?”“전하께서 황태자라는 사실과 그 열쇠의 출처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주변 공기가 미묘하게 굳었다.황실 수행원들 가운데 몇 명이 세레나를 쳐다봤다. 카른은 익숙하다는 듯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라시엘은 오히려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를 움직였다.클라우드는 그런 라시엘을 잠깐 보더니 다시 세레나에게 시선을 돌렸다.“듣던 대로군.”세레나의 눈썹이 움직였다.“어제부터 다들 저를 들었다고 말씀하시는데, 대체 누구에게 뭘 들으신 겁니까?”“여러 사람에게.”“구체적으로요.”“세레나.”라시엘이 낮게 불렀다.그제야 세레나는 자신이 황태자를 성문 앞에 세워 둔 채 심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죄송합니다.”클라우드가 작게 웃었다.“나는 재미있으니 괜찮다.”“나는 안 괜찮습니다.”라시엘이 즉시 잘랐다.두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웃고 있는 클라우드.표정 없는 라시엘.그 사이에 선 세레나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연구실의 위험한 마물 두 마리 사이에 끼어 있는 기분이 들었다.물론 한쪽은 정말 마물로 변하기도 했다.그 생각을 한 순간 라시엘의 시선이 세레나에게 향했다.“왜.”“아무것도 아닙니다.”“방금 이상한 생각 했지.”“안 했습니다.”“표정이 그랬는데.”

  • 마물 연구원은 대공을 표본으로 삼았습니다   교수님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교수님.” 이번에는. 그 이름이 전혀 다르게 들렸다. 세레나는 사진을 내려다본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로웬 브리엘. 자신이 열여섯에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 처음 만난 교수. 말수가 적고, 학생을 칭찬하는 법도 거의 없고, 논문을 가져가면 빨간 잉크로 여백을 가득 채우던 사람. 처음 아르젠 설표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였다. ‘기록이 이상하면 기록부터 의심해.’ ‘생물은 거짓말을 못 하니까.’ ‘아르젠이 정말 멸종했는지는 네가 직접 확인해.’ 그 말들이. 이제는 전부 달라졌다. 그 사람은 아르젠을 몰라서 세레나에게 연구를 맡긴 게 아니었다. 알고 있었다. 적어도. 아르젠이 평범한 마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3실험실이 있다는 것도. 브리엘이라는 혈통이 그 실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 에블린이 브리엘의 숨겨진 계열이었다는 것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세레나가 사진을 뒤집었다. 「아이가 나를 삼촌이라고 부를 날이 오지 않기를.」 글씨가 흐릿해졌다. 세레나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글씨가 다시 선명해졌다. 울 것 같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눈물보다 먼저 드는 건 화였다. “왜.”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라시엘은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아무 말도 안 하셨어요.” 대답해 줄 사람이 없었다. “제가 몇 번이나 물어봤는데.” 아르젠 기록의 공백. 삼백 년 전 문헌의 불일치. 왜 아르젠의 마력 구조가 인간과 닮았는지. 왜 관련 자료만 이상하게 누락되어 있는지. 세레나는 학생 때부터 물었다. 로웬은 늘 비슷하게 답했다. ‘네가 찾아.’ ‘가설부터 세워.’ ‘남이 주는 답을 믿지 마.’ 그때는 그것이 교육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보니. 교육이면서 동시에. 회피였다. 세레나의 손끝이 조금 떨렸다. “교수님은 제가 어디까지 알아낼지 보고 있었던 거네요.” 카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단정하

  • 마물 연구원은 대공을 표본으로 삼았습니다   황실에서 온 브리엘

    “같은 브리엘로서.”문 너머의 남자가 아주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꼭 만나 뵙고 싶다고.”세레나는 손에 들린 명함을 내려다봤다.「엘리엇 브리엘」몇 번을 봐도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브리엘.자신과 같은 성.그런데 황실 마력연구원의 수석 연구관.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머릿속에 수십 개의 가설이 떠올랐다.먼 친척.분가.호적에서 지워진 방계.혹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세레나는 마지막 가능성에서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어제 습격자는 자신을 정확히 ‘브리엘의 후손’이라고 불렀다.황실은 브리엘 혈통이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런데 바로 다음 날.황실에서 또 다른 브리엘을 보냈다.우연이라고 보기에는.지나치게 정교했다.“들여보낼까요?”카른이 낮게 물었다.라시엘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의 시선은 문이 아니라 세레나에게 향해 있었다.“싫으면 안 만나도 된다.”세레나가 고개를 들었다.“제가요?”“그래.”“하지만 저를 만나러 왔다잖아요.”“그래서 더.”라시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황실이 네 반응을 확인하려는 걸 수도 있어.”세레나는 잠시 생각했다.틀리지 않았다.엘리엇 브리엘이라는 존재 자체가 미끼일 수도 있었다.동요하는지.아는 것이 있는지.로웬 브리엘에게서 무엇을 들었는지.자신이 어디까지 파고들었는지.“그렇다면 더 만나야 합니다.”라시엘의 미간이 좁아졌다.“세레나.”“저 사람이 저를 확인하려는 거라면 저도 저 사람을 확인할 수 있잖아요.”“위험하다.”“여기는 전하의 성입니다.”“그래도.”“그리고.”세레나는 문을 바라봤다.“계속 피하면 황실은 제가 뭔가 알고 있다고 확신할 겁니다.”카른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은 맞습니다.”라시엘이 카른을 차갑게 봤다.“누구 편이지.”“전하 편입니다.”카른은 아주 태연했다.“그래서 현실적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라시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그러다 결국 말했다.“들여보내.”카른이 문으로 향했다.그런데

  • 마물 연구원은 대공을 표본으로 삼았습니다   설표가 끝까지 기억하는 사람

    “황태자가 직접 옵니다.”카른의 말이 떨어진 뒤에도 집무실 안은 한동안 조용했다.세레나는 손에 들린 황태자궁의 서신을 다시 내려다봤다. 지나치게 정중하고, 지나치게 완벽한 문장이었다. 북부의 이상 마력 반응을 조사하겠다는 명분도 있었고, 왕립 마물생태연구소 소속인 자신에게 협조를 요청한다는 절차도 틀린 데가 없었다.문제는 타이밍이었다.세레나가 라시엘과 함께 대공성에 들어온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자신이 브리엘의 안정화 인자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도 오늘 아침이었다.그런데 사흘 뒤.황태자가 직접 온다.너무 정확했다.“혹시 원래 황태자 전하께서 북부를 자주 방문하십니까?”세레나가 물었다.카른이 코웃음을 쳤다.“지난 오 년 동안 한 번도 없습니다.”“그럼 굉장히 오랜만이네요.”“오랜만이라기보다 처음에 가깝습니다.”세레나는 서신을 탁자에 내려놓았다.“명분은 충분합니다. 북부에서 정체불명의 습격이 있었고, 마물성 마력 반응까지 발견됐으니까요.”라시엘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그자의 편을 들 생각인가?”“아뇨.”세레나는 바로 부정했다.“반대로 생각하는 겁니다.”“뭘.”“이렇게 명분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으면 오히려 의심해야죠.”라시엘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세레나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황실이 정말 어제 습격과 무관하다면, 마력 이상이 보고된 직후 황태자가 직접 움직일 이유가 얼마나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반대로 관련이 있다면…….”“실패 여부를 직접 확인하러 오는 거겠지.”카른이 말을 받았다.세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저도요.”짧은 침묵.라시엘의 표정이 다시 차갑게 굳었다.그게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사흘 동안 성 밖으로 나가지 마.”“전하.”“연구소에도 당분간 돌아가지 않는다.”“그건 곤란합니다.”“왜.”“제 연구 자료가 연구소에 남아 있습니다.”“사람을 보내.”“제가 직접 분류해야 하는 자료도 있고요.”“안 된다.”“폐쇄 절차가 시작되면 다른 연

  • 마물 연구원은 대공을 표본으로 삼았습니다   한 방울의 피가 증명한 것

    세레나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정확히는.제대로 잔 것 같지도 않았다.눈을 감으면 지하 기록실에서 본 문장들이 떠올랐다.「브리엘의 혈통은 아직 남아 있다.」「안정화 인자의 마지막 계승자를 황실보다 먼저 숨겨야 한다.」그리고.라시엘에게 손을 대는 순간마다 거짓말처럼 가라앉던 마력.설원에서.마차 안에서.습격을 받았을 때.심지어 완전 변이 직전에도.자신이 가까이 가자 그의 변화가 멈췄다.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그다음에는 마력 상성.그리고 이제는.삼백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의도적인 무언가가 자신의 피 안에 남아 있을 가능성까지 생겼다.세레나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봤다.“……마지막 계승자라.”입 밖으로 내놓자 더 이상했다.자신은 평범한 연구원이었다.정확히는 멸종한 마물 하나에 인생을 걸어서 연구실까지 폐쇄될 위기에 놓인 조금 이상한 연구원.그 정도였다.브리엘 가문이라고 해 봐야 몰락한 귀족가.어릴 때부터 특별한 힘이 있다고 들은 적도 없었다.마력이 없지는 않았지만 뛰어난 마법사도 아니었다.왕립 아카데미에서 받은 평가도 늘 비슷했다.‘마력량은 평균.’‘정밀 제어 능력 우수.’‘실전 마법에는 부적합.’그래서 연구자가 됐다.마법을 직접 쓰기보다 분석하는 쪽이 훨씬 잘 맞았으니까.그런데.그 평범한 마력이 라시엘에게는 다르다고 했다.세레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탁자 위에는 어젯밤 급하게 정리해 둔 기록장이 펼쳐져 있었다.그녀는 펜을 집었다.그리고 한참 동안 빈 종이를 바라보다 첫 줄을 적었다.「비공개 치료 관찰 기록.」잠시 생각.그 아래.「피관찰자 : 라시엘 에른하르트 대공.」세레나의 펜이 멈췄다.‘피관찰자’라는 표현도 조금 이상했다.‘연구 협력자.’그게 낫겠다.줄을 긋고 다시 적었다.「연구 협력자 : 라시엘 에른하르트.」조금 마음에 들었다.그 아래.「연구자 : 세레나 브리엘.」그리고 마지막으로.「기록은 당사자 동의 없이 외부 공개하지 않음.」세레나는 그 문장을 두

  • 마물 연구원은 대공을 표본으로 삼았습니다   브리엘의 피를 알아본 문

    딸깍.기록실 가장 안쪽.수백 년 동안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것처럼 먼지가 내려앉아 있던 철제 보관함의 문이 아주 천천히 벌어졌다.세레나는 숨을 멈췄다.누가 손을 댄 것도 아니었다.라시엘은 그녀의 바로 옆에 있었고, 그의 손은 검 손잡이 위에 올라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보관함에서 적어도 다섯 걸음은 떨어져 있었다.그런데.끼이익—묵직한 철문이 조금 더 열렸다.틈 사이로 은빛 빛이 흘러나왔다.마력.그런데 이상했다.라시엘에게서 느껴지는 거칠고 차가운 마력과는 전혀 달랐다. 공격자의 검에서 흘러나오던 검고 탁한 마력과도 달랐다.따뜻했다.마력에 온도가 있을 리 없는데.세레나는 이상하게 그렇게 느꼈다.그리고 그 순간.“……!”왼쪽 손목이 뜨거워졌다.세레나가 반사적으로 손목을 감쌌다.“세레나?”라시엘이 즉시 그녀를 돌아봤다.“왜.”“손목이…….”세레나는 소매를 걷어 올렸다.아무것도 없었다.상처도.붉어진 흔적도.그런데 피부 아래에서 뜨거운 맥박 같은 것이 뛰고 있었다.쿵.쿵.심장과는 다른 박동.세레나가 미간을 좁혔다.“이상합니다.”라시엘이 그녀의 손목으로 손을 뻗다가 멈췄다.아까 정한 약속이 떠오른 듯했다.세레나는 그걸 보고 먼저 손목을 내밀었다.“만져보셔도 됩니다.”라시엘의 눈이 잠깐 그녀에게 향했다.그리고 손가락이 손목 안쪽을 감쌌다.뜨거운 피부.그 순간.은빛 빛이 더 강해졌다.“…….”라시엘의 표정이 굳었다.세레나도 같은 걸 봤다.보관함 안에서 새어 나오던 빛이.마치 반응하듯 한 번 크게 뛰었다.“지금.”세레나가 낮게 말했다.“전하가 저를 만지니까 반응했습니다.”“아니.”라시엘의 시선은 보관함에 고정되어 있었다.“내 마력에 반응한 게 아니다.”“그럼요?”“너다.”세레나가 라시엘을 봤다.“제가요?”“내가 이 방에 들어온 건 처음이 아니야.”라시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저 보관함도 수십 번 봤다.”세레나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한 번도 열린 적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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