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내 매니저 명함이에요. 앞으로 연기 계속할 생각이라면, 혼자 하는 것보다 좋은 사람 만나는 게 중요하거든요."
명함을 받아든 현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명함에는 '스타 컴퍼니, 김동진 실장'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스타 컴퍼니는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들이 소속된, 업계 1위의 기획사였다.
10년의 무명 생활. 먼지처럼 스쳐 지나가던 그의 인생에, 드디어 첫 번째 스포트라이트가 비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빛이 그를 어디로 이끌어 갈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만년 엑스트라 이현준의 시간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다른 세계로의 초대
촬영장의 소음과 흙먼지가 거짓말처럼 멀어졌다. 이현준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움직이는 공간 중 하나일 검은색 밴의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묻은 채,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10년간 낡은 승합차나 지하철, 버스를 전전하던 그에게 이 공간은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공기마저 달랐다. 은은한 방향제 냄새와 부드러운 가죽 냄새, 그리고 옆자리에 앉은 톱스타 강지한에게서 풍겨오는 희미한 향수 냄새가 비현실적으로 뒤섞여 있었다.
"많이 긴장돼요?"
침묵을 깬 것은 강지한이었다. 그는 현준의 어색함을 풀어주려는 듯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생수 한 병을 건넸다.
"네, 조금... 솔직히 많이 긴장됩니다. 이런 차는 처음 타 봐서..."
"하하, 나도 처음엔 그랬어요. 신인 시절에 처음 소속사 차를 탔는데, 시트가 너무 깨끗해서 앉지도 못하고 바닥에 쭈그리고 갔던 기억이 나네요."
강지한의 소탈한 말에 현준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져나갔다. 하늘 위의 별처럼 멀게만 느껴졌던 그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작은 위안이 되었다.
"오늘 연기, 정말 대단했어요. 사실 아까 전투 씬 때부터 계속 눈여겨봤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저 '달리는' 연기를 할 때, 현준 씨는 '살기 위해 달려가다 죽는' 연기를 하더군요. 카메라가 잡지 않는 곳에서도요."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을 뿐입니다."
"아니요, 당연한 게 아니에요. 대부분은 당연한 걸 하지 않거든요. 특히 이 바닥에서는."
강지한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현준 씨 연기를 보면서,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어요.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타성에 젖어 연기하고 있었구나. 저 사람은 저렇게 온몸을 던져서 한순간을 만들어내는데, 나는 너무 많은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구나 하고요."
과찬의 말에 현준은 몸 둘 바를 몰라 손만 꼼지락거렸다.
"특히 '덕보'를 연기할 때는... 소름이 돋았어요. 카메라가 돌기 직전까지 평범하게 서 있던 사람이, '레디' 사인이 들어가자마자 눈빛부터 바뀌더군요. 그건 그냥 '몰입'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어요. 마치 다른 영혼이 그 몸에 들어온 것 같았달까."
강지한의 말은 현준의 능력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현준 자신도 자신의 재능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어떤 역할을 맡으면, 그 역할의 모든 것이 스펀지처럼 흡수되었다.
대본을 읽는 순간, 그 인물의 과거와 현재, 감정의 결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기이한 감각. 사람들은 그것을 천재성이라 부를지도 모르지만, 정작 현준에게 그것은 때로 축복이자 저주였다. 너무 깊이 몰입한 날에는 역할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며칠을 고생하기도 했다.
"10년 동안... 힘들지 않았어요?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게."
강지한의 질문은 현준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 왜 힘들지 않았을까. 수없이 포기하고 싶었다. 연기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 평범하게 살까 고민했던 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결국 그를 붙잡은 것은 연기 그 자체였다. 다른 누군가의 삶을 사는 그 짧은 순간이 주는 희열을, 그는 도저히 놓을 수 없었다.
"힘들었지만... 그래도 연기하는 순간만큼은 행복했습니다."
진심이 담긴 현준의 대답에, 강지한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진짜를 알아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심연을 들여다보는 남자
차는 강남의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고급 한정식집 앞에 멈춰 섰다. 발렛 파킹 직원이 정중하게 문을 열어주었고, 강지한을 알아본 지배인이 허리를 굽히며 그들을 프라이빗 룸으로 안내했다. 현준은 마치 투명 인간처럼 그들의 뒤를 따랐다. 모든 것이 꿈결 같았다.
방에 들어서자 단정한 슈트 차림의 남자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명함에서 봤던 '김동진 실장'이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매와 다부진 입매를 가진, 첫인상만으로도 상대방을 압도하는 사람이었다.
"지한아, 왔냐. 그리고 이쪽이... 이현준 씨?"
"네, 실장님. 이쪽이 제가 말씀드린 이현준 씨입니다. 현준 씨, 여긴 제 매니저이자 스타 컴퍼니의 김동진 실장님이에요."
"처음 뵙겠습니다. 이현준입니다."
현준이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김동진은 가볍게 고개를 까딱하며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었다. 마치 상품의 가치를 감정하는 감정평가사처럼 냉철하고 분석적이었다.
"앉아요. 얘기는 들었습니다. 우리 강 배우가 누구를 이렇게까지 칭찬하는 건 처음이라, 저도 궁금해서 와봤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의심과 경계가 섞여 있었다. 이 바닥에서 반짝하는 재능은 수없이 많았다. 중요한 것은 그 재능이 진짜 '물건'인지, 그리고 얼마나 '오래' 갈 수 있는지였다.
음식이 차려지고 어색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김동진은 현준에게 몇 가지를 물었다. 나이, 고향, 연기를 시작한 계기, 10년간의 엑스트라 생활 같은 것들. 현준은 묻는 말에 최대한 담백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꾸미거나 과장하지 않았다.
"혹시... 연기하는 걸 영상으로 찍어놓은 거라도 있습니까? 프로필이라도."
"죄송합니다. 따로 준비해 둔 것이 없습니다."
"흠..."
김동진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강지한이 추천했다지만, 객관적인 자료 하나 없는 '엑스트라'를 덜컥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표정에서 실망감이 비쳤다. 강지한이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하늘은 낮부터 꾸물거리더니 결국 참았던 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인공 살수차가 만들어내는 가짜 비와 하늘에서 내리는 진짜 비가 섞여 촬영장은 온통 축축한 물기로 가득 찼다.조명기는 빗줄기를 투과하며 몽환적인 빛을 만들어냈고, 스태프들은 우비를 눌러쓴 채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늘 촬영은 이신이 자객들의 습격으로부터 여주인공인 서윤 공주를 구해내고 빗속에서 처절하게 버티는 장면이었다.서윤 공주 역을 맡은 배우 채유진은 이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가냘픈 어깨가 파르르 떨리는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감독의 큐 사인이 떨어지면 그녀는 곧바로 고결한 공주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했다.현준은 검을 고쳐 쥐며 유진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무명옷 역시 빗물을 잔뜩 머금어 천근만근 무거웠다."유진 씨, 많이 춥죠? 이번 컷만 버티면 바로 온열기 넣을 거예요."현준의 나지막한 위로에 유진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빗물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현준의 눈빛은 이미 이신 그 자체였다.유진은 그 서늘하면서도 깊은 눈동자를 마주할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연기인지 실제인지 분간하기 힘든 묘한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준비됐습니다. 액션!"류승호 감독의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자객 역할을 맡은 스턴트 배우들이 사방에서 튀어 나왔다. 현준은 유진의 앞을 가로막으며 검을 휘둘렀다.쇳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날카롭게 고막을 때렸다. 현준의 움직임은 갯벌에서 훈련했던 대로 진흙탕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새로운 약속을 건넸다.“앞으로, 길을 잃을 것 같으면… 이 돌을 쥐어요. 그리고, 허구의 공간이 아니라… 현실의 나를 떠올려요.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이 세상의 유일한 등대를요.”그녀는 그의 심연을 비추는 ‘닻’이자, 그가 돌아올 길을 알려주는 ‘등대’가… 되어주었다.다음 날 아침, 군주와 그림자의 촬영장.촬영이 시작되기 전, 이현준은… 분장을 마친 배우 이원영의 대기실을, 홀로 찾아갔다. 이원영은, 그를 보자… 자신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어제의 공포가, 아직 그의 몸에 남아 있었다.현준은, 그 앞에서… 아무 말 없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선배님. 죄송합니다.”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변명도 담겨있지 않았다.“제가… 선을 넘었습니다. 배우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을 했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그의 진심 어린 사과에, 이원영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굳었던 얼굴을 풀고,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아니야. 사과하지 마.”그가 현준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자네 덕분에… 내 연기 인생 20년, 처음으로… 진짜 공포를 연기했으니까. 카메라에 담긴 내 얼굴을 봤는데… 내가 봐도, 소름이 돋더군. 평생, 내 대표작으로 남을 걸세.”
사슬에 묶여있던 배우 이원영은, 스태프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더 이상 현준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는 방금, 자신의 눈앞에서… 인간이 괴물로 변했다가, 다시 힘겹게 인간으로 돌아오는… 끔찍하고도 성스러운 변태(變態)의 과정을, 전부 목격해버린 것이다.“오늘 촬영, 전부 접어!”류승호 감독이, 마침내…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외침은, 이 지옥 같았던 심문실의 모든 것을 끝내는 무거운 종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왕의 위로이현준의 개인 트레일러 안.그는, 담요를 뒤집어쓴 채, 소파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의 눈은,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의 한 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신’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그의 내면은, 모든 것이 파괴된 폐허와도 같았다.‘돌아오고 싶지 않았어.’그의 마음속에서, 이신의 목소리가… 유혹처럼 속삭였다. 감정에 휘둘리는 나약한 인간의 세상보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통제하는 그림자의 세상이… 훨씬 더 완전했다.그는 자신의 의지로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외부의 힘에 의해… 자신의 완벽한 왕국에서 강제로 추방당한 것이다.그때, 트레일러의 문이 조용히 열리고… 안성현이 들어섰다. 그는 손에,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생강차 두 잔을 들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현준의 맞은편에 앉아, 그에게 찻잔 하나를 건넸다.“내가… 자네만 한 나이였을 때,”안
그것은, 그의 신념의 가장 깊은 곳을 파고드는 잔혹한 논리였다. 이원영은 이 얼음 같은 논리 앞에서… 자신의 모든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아… 아…….”그는, 연기가 아니라… 진짜 절망 속에서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는 이현준이 만들어낸 이 완벽한 ‘얼음의 지옥’ 속에서… 완전히 길을 잃어버렸다.“말… 하겠소…! 말하겠소, 제발…! 제발 내 딸만은…!”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백하려던 바로 그 순간.현준은, 대본에도 없는…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그는 오열하는 이원영을… 경멸과 연민이 뒤섞인 눈으로 내려다보며, 아주 차갑게… 말했다.“늦었소.”“……네?”“나는… 이미, 당신이 말하려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그는 웃었다. 자신의 지성이 한 인간의 영혼을 완벽하게 파괴했다는 사실에 대한… 오만하고도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돌아오지 않는 그림자“……컷! 컷…! 컷!!!!!!”류승호 감독이, 거의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는 자신의 모니터에 담긴, 악마보다 더 지독한 이성의 광기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현장의 모든 스태프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이원영은, 촬영이 끝났음에도… 바
두 사람은, 카메라 밖에서도… 진짜 왕과 그림자처럼,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의지했다.“현준아.”쉬는 시간, 안성현이 현준을 자신의 곁으로 불렀다.“왕은… 늘 외로운 법이지. 가장 높은 곳에 있기에, 그 누구에게도 속내를 다 보일 수 없으니까. 배우라는 직업도… 어쩌면 그것과 닮아있는지도 모르겠다.”그는, 왕으로서의 고독과, 톱배우로서의 고독을… 넌지시 겹쳐 보이고 있었다.현준은, 그의 말의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는, 후배가 아닌… 왕의 유일한 동지로서, 대답했다.“전하께서 외로우시지 않도록…”그가 안성현을 향해…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이 신이…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언제나 전하를… 지켜볼 것이옵니다.”두 사람의 유대는, 단순한 연기 파트너를 넘어… 시대를 초월한 영혼의 동지처럼,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위대한 이야기는, 이제 막… 가장 뜨거운 불꽃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림자의 체온군주와 그림자의 촬영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자, 이현준이라는 사람은 현장에서 서서히 사라져가기 시작했다.그는 더 이상 동료 배우들과 시시콜콜한 농담을 나누지 않았다. 식사 시간이 되면, 시끄러운 식당 대신… 홀로 그늘진 나무 아래 앉아, 최소한의 음식으로 허기를 채웠다. 그의 손에는 언제나 낡은 서책이나, 그 시대의 지도가 들려
최정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 순간. 현준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여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의 손에는, 엄청난 힘이 실려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손길에는, 단 한 번의 저항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절대적인 의지가 담겨 있었다.최정환은, 연기가 아니라… 진짜 위협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현준은, 그의 귓가에… 악마처럼 속삭였다.“대감의 아드님이… 변방에서 고생이 많으시더군요.”“……!”“왕께 상소를 올려, 하루빨리 한양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아비 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아니면…”그의 입가에, ‘남규만’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갑고 지적인 미소가 걸렸다.“이대로… 오랑캐의 땅에서, 쓸쓸히 뼈를 묻게 두는 것이… 대감의 ‘충심’이신지요?”그것은, 가장 부드러운 말투로 건네는, 가장 잔혹한 협박이었다.최정환은, 자신의 다음 대사를… 잊어버렸다. 그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 이제 막 떠오른 신인 배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지금,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민, 진짜 ‘그림자’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의 등줄기에서, 진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커… 컷! 컷! 오케이!”류승호 감독이, 거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는 모니터 앞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저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