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제3장: 파국을 향해 달리는 시계 바늘
시간은 차갑게 식어가는 마음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 아파트에서 눈물로 지새운 밤 이후 하루, 이틀, 사흘, 어느덧 일주일이 흘렀다. 이 칠 일 동안 엠마는 산산조각 난 희망의 조각들을 어떻게든 끌어모아 보려 애썼다. 정적만이 흐르는 식사 자리나 둘 사이의 기류가 아주 조금이나마 부드러워질 때마다 엠마는 은근슬쩍 같은 질문을 던졌다.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 확실한 확답에 대해, 그리고 함께할 미래에 대해. 하지만 제인의 대답은 늘 일정했다. 단조롭고, 차가웠으며, 절망적이었다. "또 시작이네, 엠마. 우리 이 얘기 수백 번은 더 했잖아." 사흘 전, 제인은 손에 쥔 대본에서 눈길조차 떼지 않은 채 무심하게 잘라 말했다. 어째서일까. 엠마가 느끼기에 제인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극심한 증오와 트라우마, 혹은 거부감을 품고 있는 듯했다. 엠마의 입에서 '결혼'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평소 그녀를 욕망으로 바라보던 그의 눈빛은 순식간에 차가운 혐오로 바뀌곤 했다. 하지만 이젠 상관없었다. 엠마는 그 트라우마의 원인이 무엇인지 더는 알고 싶지도, 궁금해하고 싶지도 않은 지경에 이르렀다. 그저 그에게 이해를 구걸하기엔 영혼이 너무나 지쳐버렸을 뿐이었다. 오늘, 제인의 개인 비서인 엠마는 자신의 자존심과 상처받은 마음을 억누르고 일해야 했다. 그녀는 제인이 주연을 맡은 로맨스 미니드라마의 촬영장 한구석에 서 있었다. 세트장 안의 공기는 텁텁했지만, 오늘 제인의 상대 배우가 누구인지 확인했을 때 엠마의 가슴을 짓눌러온 답답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이올렛 아이리스. 그 금발 머리의 여자는 감독이 메인 신의 촬영 준비를 외친 순간부터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자, 제인, 바이올렛! 키스 신 클로즈업 들어갑니다. 최대한 밀도 높고 농밀하게 가죠! 연출팀 요구대로 감정이 폭발해야 합니다!" 감독이 메가폰을 들고 소리쳤다. 엠마는 스태프 모니터 뒤에 서서 손에 쥔 생수병을 오그라트렸다. 찌그러지는 플라스틱 소리가 소름 끼치게 작게 울려 퍼졌다. 화려한 조명 아래, 제인은 부드러우면서도 소유욕이 가득 담긴 손길로 바이올렛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을 때, 그것은 단순한 배우 간의 비즈니스 키스가 아니었다. 제인의 단단한 턱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의 손가락이 바이올렛의 목덜미를 파고들며 주변의 모든 세계가 무너져 내리기라도 한 듯 깊게 입을 맞추는 모습이 엠마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제인은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다. 타인의 손길 아래서 그는 너무나 숙련되어 있었고, 생기 넘쳤으며, 뜨겁게 타올랐다. 그만. 엠마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엄청난 질투심이 이글거리며 치밀어 올랐다. 제길. 이토록 타오르는 질투를 여전히 느끼고 있는 스스로가 너무나 미웠다. 그녀는 이 나쁜 놈을 지독하게도 사랑하고 있었다. 지난 7년간 같은 침대를 쓰면서도, 자신은 물론 세상의 모든 여자를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장난감쯤으로 여기는 이 남자를. 숨이 턱 막히는 공기를 견디지 못한 엠마는 뒤로 물러서며, 여전히 감독의 지시 소리로 시끄러운 촬영장을 벗어났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제인의 VIP 대기실로 걸음을 옮겼다. 테이블 위에는 소품용이자 촬영 후 제인이 마시기 위해 준비된 레드 와인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엠마는 아무런 생각 없이 와인병을 낚아채 코르크를 따고는 그대로 병째 나팔을 불듯 벌컥벌컥 마셔댔다. 쌉싸름하고 뜨거운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지금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마비감을 선사했다. 그때 대기실 문이 쾅 하고 열렸다. 헐떡이는 숨을 내쉬며 제인이 들어왔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여전히 분장이 짙게 남아 있었다. 와인을 나팔 불듯 마시고 있는 엠마를 발견하자마자, 제인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비꼬는 듯한 표정이 싹 사라지고 험악한 분노가 들어찼다. 제인은 성큼성큼 다가와 엠마의 손에서 와인병을 강제로 뺏어 들었다. 그 바람에 붉은 와인 방울들이 튀어 엠마의 흰 셔츠를 적셨다. "엠마! 너 언제부터 술을 이렇게 마셨어?!" 제인이 낮게 포효하듯 소리쳤다. 엠마는 텅 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고,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빈속에 급하게 들어간 알코올 기운 때문에 눈빛이 몽롱하게 풀려 있었지만, 그 시선만큼은 제인의 눈동자를 똑바로 꿰뚫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 끝에 씁쓸하고, 자조적이며, 상처로 얼룩진 미소가 걸렸다. "내가 깨달은 순간부터..." 엠마가 나지막하게 헛웃음을 치며 제인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두 사람 사이에 짙은 알코올 향이 풍겼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부터, 제인. 당신이 날 절대로 사랑하지 않을 거고, 나와 결혼해 줄 리도 없다는 걸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제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와인병 목을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갔다. "엠마! 목소리 낮춰!" 제인은 닫힌 문 쪽을 눈짓으로 살피며 억눌린 목소리로 벼락을 쳤다. 혹시라도 스태프나 기자가 들었을까 봐 겁이 난 것이었다. 그는 엠마의 어깨를 억세게 쥐고 강제로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엠마, 우리 이 관계 시작할 때 처음부터 약속했잖아. 진지한 관계도, 사랑도, 결혼도 없다고! 이런 관계... 지난 7년 동안 서로 아무 문제 없이 편하고 좋았잖아! 왜 이제 와서 판을 깨려는 건데?!" 이토록 이기적인 말을 들은 순간, 엠마는 가슴속 무언가가 완전히 죽어버렸음을 느꼈다. 제인이 안아줄 때마다 느끼곤 했던 따스함은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엠마는 어깨를 틀어 제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래... 당신 말이 맞아." 엠마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미소가 점점 더 넓어졌지만, 그 눈동자에는 제인을 순간 소름 돋게 만들 만큼 깊은 허무함이 담겨 있었다. "당신 말이 온통 다 맞아, 제인 도련님. 이 관계는 당신한테는 참 편했겠지." 엠마는 제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핸드백을 챙겨 들었다. 와인을 너무 급하게 마신 탓에 머리가 어지럽게 도질 듯 돌기 시작했다. 단 1초도 제인과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부르는 제인의 프러스트레이션 섞인 목소리를 뒤로한 채, 엠마는 대기실을 걸어 나갔다. 엠마는 고급 촬영 스튜디오와 바로 연결되어 있는 호텔 구역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머리가 너무나 무거웠고,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며 잔상이 남았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그녀는, 제인의 촬영 후 인터뷰 시간 동안 쉬기 위해 아까 프런트에 부탁해 두었던 호텔 키 카드를 찾아냈다. "6006호..." 엠마는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디지털 키 홀더에 적힌 숫자를 읽었다. 그녀는 휘청거리는 몸을 이끌고 엘리베이터를 타 6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길고 정적만이 흐르는 호텔 복도가 그녀를 맞이했다. 엠마는 벽을 짚으며 걸었고, 어깨가 간헐적으로 지나치는 객실 문에 부딪혔다. 엠마의 발걸음이 한 객실 앞에 멈춰 섰다. 엉망으로 취해 시야가 흐릿하고 어지러운 그녀의 눈에는 문에 달린 숫자가 6006으로 보였다. 하지만 위의 나사가 약간 풀려 뒤집힌 데다 술기운으로 착시가 일어난 탓에, 문에 붙은 금속 숫자는 사실 6009였다. 9 자가 살짝 기울어져 뒤집혀 있었을 뿐, 그 방은 복도 끝에 위치한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이었다. 엠마는 손잡이에 키 카드를 갖다 댔다. 하지만 카드의 초록색 불빛이 들어오기도 전에, 떨리는 그녀의 손가락이 실수로 손잡이를 미는 꼴이 되었다. 문이 너무나 허무하게 열렸다. 안에서 제대로 잠겨 있지 않았던 것이다. 엠마는 미간을 찌푸렸다. 알코올로 마비된 그녀의 뇌는 그 이상한 상황을 논리적으로 판단할 수 없었다. "아... 왜 문이 안 잠겨 있지? 아까 내가 잠그는 걸 깜빡했나?" 그녀는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굉장히 넓고 화려한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방 안은 구석에서 비치는 어슴푸레한 조명 하나에만 의존한 채 은은하게 어두웠다. 가슴속에서 일렁이는 울분과 최고급 와인의 기운이 합쳐져 온몸으로 뜨거운 열기가 퍼져나갔다. 엠마는 핸드백을 바닥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참을성 없고 무모한 손길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와인 자국이 얼룩진 흰 셔츠를 바닥에 던져버리고, 이어 바지마저 벗어 던졌다. 이제 엠마의 매끄럽고 균형 잡힌 몸매 위에는 검은색 브래지어와 레이스 팬티만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방 한가운데 놓인 슈퍼 킹사이즈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매트리스는 너무나 폭신하고 포근해서, 오랫동안 받아보지 못한 따스한 품 같았다. 엠마는 엎드린 채 차가운 실크 베개를 품에 세게 안았다. "제인..." 엠마는 자조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적막한 방안에 퍼지는 그 웃음소리는 지독히도 슬펐다. 베갯잇 위로 다시금 눈물이 배어 나왔다. "이제 23일 남았네... 그래, 딱 23일. 그때까지도 당신이 날 사랑할 수 없다면... 좋아. 나도 이 바보 같은 미련 다 버릴게. 미련 없이 떠나줄게..." 엠마는 중얼거렸다. 술기운이 그녀의 이성을 앗아가며, 슬픈 환각의 세계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바로 그 순간, 방 한구석에 위치한 욕실 쪽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천천히 멈췄다. 뿌연 유리문이 스르륵 열렸다. 따뜻한 수증기가 흘러나오며, 샌들우드와 시더우드 향이 섞인 고급스러운 남성용 샤워젤 잔향을 풍겼다. 제인이 쓰던 향수와는 전혀 다른, 훨씬 더 짙고 성숙한 향이었다. 한 중년 남성이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허리에 순백색 사틴 가운을 느슨하게 묶고 있었는데, 살짝 드러난 넓은 가슴에는 단단한 근육의 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턱선은 날카로웠고, 턱 주변에는 잘 정돈된 옅은 수염이 남아 있었다. 관자놀이 쪽에 희끗희끗한 새치가 섞인 검은 머리카락은 젖어 있어, 비즈니스 세계의 최정상을 지배하는 차갑고 성숙한 남성 특유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풍겼다. 그 남자는 루카스 모라 블랙우드였다. 루카스는 작은 타월로 머리를 말리며 걸어 나오다, 침대 끝자락에서 멈춰 섰다. 차갑고 날카로운 그의 얼음 같은 눈동자가 자신의 개인 침대 위에 놓인,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을 포착하자 미세하게 좁혀졌다. 낯선 여자. 여자는 모로 누운 채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매끄럽고 흰 등 피부가 완벽하게 드러나 있어, 가슴과 얇은 허리를 감싸고 있는 검은색 브래지어와 강렬한 대조를 이뤘다. 어스름한 조명 아래 펼쳐진 여자의 관능적인 실루엣은, 정상적인 남자라면 누구라도 자극받을 만큼 치명적으로 에로틱했다. 루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침대 곁에 석상처럼 서서, 잠결에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엠마의 모습을 깊게 담아낼 뿐이었다. 천천히, 루카스의 단단한 목덜미에 위치한 목젖이 무겁게 꿀꺽 움직였다. 차가운 권력자 남자의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단 한 번의 시선만으로 격렬하게 뒤흔들리기 시작했다.14화제인은 여전히 침대 옆에 서 있는 엠마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그는 안도의 한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은 제인은 손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평소에는 좀처럼 하지 않는 다정한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엠마를 진정시키는 데 얼마나 효과적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자기야, 나 이제 촬영 준비하러 갈게. 괜찮지?”제인이 일부러 목소리를 최대한 부드럽게 낮추며 말했다. 조금 전 바이올렛의 소동으로 남아 있던 긴장감을 없애려는 듯했다.엠마는 남자친구의 짙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잠시 의심의 빛이 스쳤지만, 전날 밤 이미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그녀는 결국 그를 믿기로 했다. 크림색 가운을 여미며 엠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오늘도 바이올렛이랑 키스신 있어?”제인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안심시키듯 고개를 저었다.“아니, 자기야. 오늘은 액션 장면이랑 일반적인 대사 장면뿐이야. 로맨스 장면은 전혀 없어.”그의 대답을 들은 엠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가슴을 짓누르던 안도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녀는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다가가 두 팔로 제인의 목을 꽉 끌어안은 뒤, 자신의 소유욕을 모두 쏟아내듯 그의 입술을 열정적으로 차지했다. 제인도 기꺼이 그 키스를 받아주며 잠시 입을 맞춰 주었고, 이내 엠마가 먼저 몸을 떼어냈다.“알겠어. 촬영에 필요한 것들 내가 전부 준비해 줄게.”엠마가 눈빛에 다시 생기를 되찾으며 말했다.제인은 엠마의 순종적인 태도가 완전히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고마워, 자기야.”그 후 30분 동안 엠마는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제인의 개인 비서이자 누구보다 그의 모든 필요를 잘 이해하는 여자로서, 그녀는 촬영에 입을 캐주얼한 의상을 준비하고 특수 생수와 비타민, 작은 수건까지 그의 장비 가방 안에 챙겼다. 모든 일을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은 채 처리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그녀는 마침
13화태양은 어느새 하늘 높이 떠올라 있었다. 눈부신 햇살이 호텔 방 커튼의 좁은 틈새로 스며들어 바닥 위로 길게 쏟아지고 있었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디지털 시계는 오전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정리되지 않은 킹사이즈 침대 위에서 제인은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는 엎드린 자세로 누워 있었고, 호텔 담요는 허리 아래만 간신히 가리고 있어 옷 하나 걸치지 않은 넓고 탄탄한 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독한 술의 영향과 새벽까지 이어진 격렬한 열정의 여파가 톱스타 배우의 의식을 완전히 빼앗아 주변의 모든 것을 잊게 만들었다.제인과 달리 엠마는 아침 9시부터 이미 잠에서 깨어 있었다. 몸이 살짝 뻐근했지만, 가슴을 가득 채운 따뜻함과 벅찬 만족감 때문에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미 샤워를 하고 몸을 깨끗이 씻은 뒤, 헐렁한 크림색 새틴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살짝 젖은 머리카락은 대충 틀어 올려 하나의 번 스타일로 묶었고, 가느다란 목선의 우아한 곡선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똑! 똑! 똑!성급하고 거친 노크 소리가 방 안의 고요함을 산산이 깨뜨렸다.화장대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고 있던 엠마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소음에도 전혀 깨어날 기색이 없는 제인을 힐끗 바라본 뒤 조용히 문으로 걸어갔다.문이 열리는 순간, 바이올렛 아이리스가 이미 문밖에 서 있었다.아름다운 여배우는 큼지막한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고, 허리에 리본이 장식된 세련된 한국식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한 손에는 명품 핸드백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선글라스에 가려져 있었지만 얼굴에 드러난 불쾌감은 숨길 수 없었다.하지만 바이올렛이 미리 준비해 온 날카로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갑자기 굳어 버렸다.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엠마의 목덜미에 꽂혔다.새하얀 피부 위에는 짙은 붉은 보랏빛 자국이 십여 개도 넘게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전날 밤 제인의 독점적인 욕망이 남긴 흔적임이 틀림없었다.바이올렛은 무언가 무거운 것에 가슴을 얻어맞은 듯 숨이
12장그날 밤, 호텔 방 구석구석은 술 냄새와 뒤섞인 땀, 그리고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으로 가득했다. 제인은 엠마에게 숨을 돌릴 틈조차 조금도 주지 않았다. 남자는 탄탄하고 다부진 몸의 힘으로 엠마를 아래에 가둔 채 몸을 낮췄다. 평소에도 이기적일 정도로 강하게 그녀를 원하던 제인의 손길은, 잠시 그를 사로잡았던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인지 오늘 밤따라 더욱 격렬하고 소유욕이 강하게 느껴졌다.제인은 몸을 숙여 엠마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뒤, 옷 한 겹 걸치지 않은 여자의 몸선을 따라 천천히 아래로 움직였다. 뜨겁고 집요한 입맞춤이 엠마의 희고 깨끗한 피부 위에 연이어 내려앉았다. 마치 오늘 밤만큼은 바깥세상의 흔적을 하나라도 남김없이 지워버리려는 듯, 붉은 자국이 새롭게 남았다.제인의 입술이 민감한 곳에 닿을 때마다 엠마의 몸은 크게 긴장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침대 시트를 힘껏 움켜쥐었고, 고개는 저절로 뒤로 젖혀졌다."제인…… 아, 제인……."가쁘게 몰아쉬는 숨 사이에서 남자의 이름은 한순간도 사라지지 않았다. 엠마는 제인의 이름을 주문처럼 되뇌었다. 자신이 그토록 깊이 사랑했던 남자가 마침내 자신의 품으로 돌아와 자신의 감정을 인정했다는 확신을 되새기는 듯했다. 그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들은 제인의 자존심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지배적인 남자로서의 남성성과 자부심이 완전히 충족되고 있었다.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제인은 잠시 몸을 일으켰다. 빠르고 성급한 움직임으로 흐트러진 검은 셔츠와 턱시도 바지를 벗어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이제 그는 엠마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운동으로 단련된 몸의 근육이 거칠고 거센 호흡에 맞춰 꿈틀거렸다.제인은 다시 엠마의 몸 위로 올라와 무릎으로 여자의 가느다란 다리를 벌렸다. 희미한 조명 아래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제인의 눈에는 힘과 굶주림이 가득했고, 엠마의 눈에는 맹목적인 사랑과 완전한 항복의 빛이 어려 있었다.스륵.제인은 깊고
11장엠마가 제인의 손가락에 마지막 붕대를 감아주는 것을 끝낸 뒤, 호텔 방 안의 밤공기는 갑자기 짙은 침묵에 잠겼다. 엠마는 남은 솜과 소독약을 구급상자 안에 다시 정리하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갑자기 한 쌍의 탄탄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스륵.강한 힘이 실린 동작과 함께 제인은 엠마의 몸을 끌어당겨 자신의 품 안에 가뒀다. 남자는 엠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지난 7년 동안 늘 그의 중독과도 같았던 달콤한 향기였다. 그 포옹은 너무나도 강했다. 마치 몇 시간 전부터 가슴속을 태우고 있던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전부 쏟아내는 듯했다.엠마는 얼어붙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며 가슴 속을 세차게 두드렸다. 일주일 전부터 단단히 세워왔던 방어벽이 이 남자의 체온만으로 순식간에 산산조각 났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술 냄새와 뒤섞인 제인의 남성적인 향기는 엠마가 방금까지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던 모든 이성을 마비시키는 듯했다."엠마……."제인이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쉰 듯했고, 낮게 울리는 진동이 엠마의 귓가 바로 옆에서 느껴졌다."사랑해."그 세 마디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평범했고, 평소 그가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던 영화 대본처럼 시적이지도, 과장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엠마에게 그 평범한 세 마디는 지난 7년 동안 메말라 있던 그녀의 마음에 내리치는 천둥소리와도 같았다. 매일 밤 기다려왔던 말, 제인이 다른 여자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며 느꼈던 고통 속에서도 늘 꿈꿔왔던 그 말이 마침내 남자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엠마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동안 쌓여온 모든 고통과 숨 막힘, 가슴속에 벌어진 깊은 상처가 갑작스럽고도 기만적인 따스함에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그녀의 몸이 살짝 떨렸다. 엠마는 천천히 제인의 어깨를 살짝 밀어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그 배우의 짙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엠마는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눈빛으로 제인
bab10엠마는 호텔 객실 문을 단단히 닫았다. 그녀를 괴롭히던 허기가 오늘 밤 겪은 온갖 미친 일들로 인한 극심한 피로로 바뀌면서,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그녀는 침대에 등을 기대고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엠마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엿보지 않아도 문밖에 누가 서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문을 열었다.제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짙은 술 냄새가 그의 몸에 배어 있었다. 흐트러진 모습이었지만, 눈부시게 잘생긴 외모만큼은 조금도 빛을 잃지 않았다. 사실 조금 전 엘리베이터에서 엠마를 놓쳤을 때, 제인의 가슴 한구석에는 순간적인 당황과 그리움이 몰려왔다. 젠장, 그의 마음 한편에서는 엠마의 가녀린 몸을 품에 끌어안고 꽉 붙잡은 채,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어 결혼식 피로연 이후 자신을 짓눌러 온 답답함을 달래고 싶은 충동이 간절했다.하지만 제인 블랙우드의 자존심은 하늘을 찌를 만큼 높았다. 그는 늘 사람들이 쫓아오는 최고의 배우였지, 누군가를 쫓아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엠마를 끌어안는 대신, 제인은 오만한 태도로 방 한쪽에 놓인 1인용 소파로 걸어갔다. 그는 일부러 셔츠의 단추 두 개를 풀고 유혹적인 자세로 몸을 기대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리고 불과 몇 분 전 복도에서 바이올렛 아이리스가 남긴 작품, 목에 선명하게 남은 붉고 보랏빛의 자국을 일부러 드러냈다.제인은 곁눈질로 엠마를 바라보며 자신이 손바닥 보듯 잘 알고 있는 반응을 기다렸다. 평소라면 엠마는 그의 몸에 다른 여자가 남긴 흔적을 조금이라도 발견하는 순간 질투심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의 무릎 위로 올라가 셔츠를 찢어 열고, 마치 자신만이 제인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침대에서 그를 완전히 만족시켰다. 제인은 엠마가 자신에게 보였던 절대적인 순종과 강렬한 소유욕이 그리웠다.그러나 초조하게 몇 초, 또 몇 초가 흘러도 방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루카스는 프레지덴셜 스위트의 킹사이즈 침대 위에 엠마를 조금도 다정하지 않은 동작으로 내려놓았다. 그는 품에 안고 있던 부담을 최대한 빨리 내려놓고 싶었고, 안타깝게도 자신의 평정심을 흐트러뜨리기 시작한 이 낯선 여자의 온기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다.하지만 엠마는 자신의 먹잇감이 그렇게 쉽게 도망가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등이 푹신한 매트리스에 닿는 순간, 엠마는 작게 신음했다. 남아 있는 술기운과 상처받은 자존심을 달래고 싶은 절박함을 이용해, 그녀는 참을 수 없는 어지럼증에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반사적으로 팔을 움직였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재빨리 루카스의 검은 셔츠 깃을 움켜쥐었고, 일부러 몸을 옆으로 굴리며 그를 아래로 잡아당겼다.“추워… 어지러워…” 엠마가 쉰 듯하면서도 극도로 유혹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몸을 루카스의 가슴에 밀착시켰고, 균형을 잃은 루카스는 침대 위에 무릎을 꿇은 채 넘어졌다.순식간에 루카스의 몸이 엠마의 위로 떨어졌다. 두 사람의 얼굴은 불과 몇 센티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루카스는 자신의 몸에 맞닿은 엠마의 가슴이 오르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그녀의 가느다란 다리는 온기를 찾는 것처럼 은근히 그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루카스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턱이 즉시 단단하게 굳었다.젠장.희미한 침실 조명 아래에서 엠마의 달콤한 체향과 아직 남아 있는 술 냄새가 뒤섞여 방 안을 채웠다. 그것은 10년이 넘도록 억눌러온 그의 본능적인 반응을 자극했다. 성숙한 남자의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고, 심장 박동은 빨라졌으며 아랫배에서 뜨거운 열기가 갑작스럽게 치솟았다.루카스는 어두운 눈을 가늘게 떴다. 분노와 억눌린 욕망이 뒤섞인 눈빛은 그의 분위기를 더욱 위험하게 만들었다. 그는 거칠게 움직여 엠마의 양쪽 손목을 움켜쥔 뒤 매트리스에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눈을 떠, 이 빌어먹을 여자야.” 루카스가 이를 악물고 낮게 내뱉었다. 속에서 요동치는 감정을 억누르느라 그의 목소리는 한층 낮고 거칠어져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