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제3장: 파국을 향해 달리는 시계 바늘
시간은 차갑게 식어가는 마음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 아파트에서 눈물로 지새운 밤 이후 하루, 이틀, 사흘, 어느덧 일주일이 흘렀다. 이 칠 일 동안 엠마는 산산조각 난 희망의 조각들을 어떻게든 끌어모아 보려 애썼다. 정적만이 흐르는 식사 자리나 둘 사이의 기류가 아주 조금이나마 부드러워질 때마다 엠마는 은근슬쩍 같은 질문을 던졌다.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 확실한 확답에 대해, 그리고 함께할 미래에 대해. 하지만 제인의 대답은 늘 일정했다. 단조롭고, 차가웠으며, 절망적이었다. "또 시작이네, 엠마. 우리 이 얘기 수백 번은 더 했잖아." 사흘 전, 제인은 손에 쥔 대본에서 눈길조차 떼지 않은 채 무심하게 잘라 말했다. 어째서일까. 엠마가 느끼기에 제인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극심한 증오와 트라우마, 혹은 거부감을 품고 있는 듯했다. 엠마의 입에서 '결혼'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평소 그녀를 욕망으로 바라보던 그의 눈빛은 순식간에 차가운 혐오로 바뀌곤 했다. 하지만 이젠 상관없었다. 엠마는 그 트라우마의 원인이 무엇인지 더는 알고 싶지도, 궁금해하고 싶지도 않은 지경에 이르렀다. 그저 그에게 이해를 구걸하기엔 영혼이 너무나 지쳐버렸을 뿐이었다. 오늘, 제인의 개인 비서인 엠마는 자신의 자존심과 상처받은 마음을 억누르고 일해야 했다. 그녀는 제인이 주연을 맡은 로맨스 미니드라마의 촬영장 한구석에 서 있었다. 세트장 안의 공기는 텁텁했지만, 오늘 제인의 상대 배우가 누구인지 확인했을 때 엠마의 가슴을 짓눌러온 답답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이올렛 아이리스. 그 금발 머리의 여자는 감독이 메인 신의 촬영 준비를 외친 순간부터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자, 제인, 바이올렛! 키스 신 클로즈업 들어갑니다. 최대한 밀도 높고 농밀하게 가죠! 연출팀 요구대로 감정이 폭발해야 합니다!" 감독이 메가폰을 들고 소리쳤다. 엠마는 스태프 모니터 뒤에 서서 손에 쥔 생수병을 오그라트렸다. 찌그러지는 플라스틱 소리가 소름 끼치게 작게 울려 퍼졌다. 화려한 조명 아래, 제인은 부드러우면서도 소유욕이 가득 담긴 손길로 바이올렛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을 때, 그것은 단순한 배우 간의 비즈니스 키스가 아니었다. 제인의 단단한 턱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의 손가락이 바이올렛의 목덜미를 파고들며 주변의 모든 세계가 무너져 내리기라도 한 듯 깊게 입을 맞추는 모습이 엠마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제인은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다. 타인의 손길 아래서 그는 너무나 숙련되어 있었고, 생기 넘쳤으며, 뜨겁게 타올랐다. 그만. 엠마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엄청난 질투심이 이글거리며 치밀어 올랐다. 제길. 이토록 타오르는 질투를 여전히 느끼고 있는 스스로가 너무나 미웠다. 그녀는 이 나쁜 놈을 지독하게도 사랑하고 있었다. 지난 7년간 같은 침대를 쓰면서도, 자신은 물론 세상의 모든 여자를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장난감쯤으로 여기는 이 남자를. 숨이 턱 막히는 공기를 견디지 못한 엠마는 뒤로 물러서며, 여전히 감독의 지시 소리로 시끄러운 촬영장을 벗어났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제인의 VIP 대기실로 걸음을 옮겼다. 테이블 위에는 소품용이자 촬영 후 제인이 마시기 위해 준비된 레드 와인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엠마는 아무런 생각 없이 와인병을 낚아채 코르크를 따고는 그대로 병째 나팔을 불듯 벌컥벌컥 마셔댔다. 쌉싸름하고 뜨거운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지금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마비감을 선사했다. 그때 대기실 문이 쾅 하고 열렸다. 헐떡이는 숨을 내쉬며 제인이 들어왔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여전히 분장이 짙게 남아 있었다. 와인을 나팔 불듯 마시고 있는 엠마를 발견하자마자, 제인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비꼬는 듯한 표정이 싹 사라지고 험악한 분노가 들어찼다. 제인은 성큼성큼 다가와 엠마의 손에서 와인병을 강제로 뺏어 들었다. 그 바람에 붉은 와인 방울들이 튀어 엠마의 흰 셔츠를 적셨다. "엠마! 너 언제부터 술을 이렇게 마셨어?!" 제인이 낮게 포효하듯 소리쳤다. 엠마는 텅 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고,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빈속에 급하게 들어간 알코올 기운 때문에 눈빛이 몽롱하게 풀려 있었지만, 그 시선만큼은 제인의 눈동자를 똑바로 꿰뚫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 끝에 씁쓸하고, 자조적이며, 상처로 얼룩진 미소가 걸렸다. "내가 깨달은 순간부터..." 엠마가 나지막하게 헛웃음을 치며 제인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두 사람 사이에 짙은 알코올 향이 풍겼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부터, 제인. 당신이 날 절대로 사랑하지 않을 거고, 나와 결혼해 줄 리도 없다는 걸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제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와인병 목을 쥐고 있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갔다. "엠마! 목소리 낮춰!" 제인은 닫힌 문 쪽을 눈짓으로 살피며 억눌린 목소리로 벼락을 쳤다. 혹시라도 스태프나 기자가 들었을까 봐 겁이 난 것이었다. 그는 엠마의 어깨를 억세게 쥐고 강제로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엠마, 우리 이 관계 시작할 때 처음부터 약속했잖아. 진지한 관계도, 사랑도, 결혼도 없다고! 이런 관계... 지난 7년 동안 서로 아무 문제 없이 편하고 좋았잖아! 왜 이제 와서 판을 깨려는 건데?!" 이토록 이기적인 말을 들은 순간, 엠마는 가슴속 무언가가 완전히 죽어버렸음을 느꼈다. 제인이 안아줄 때마다 느끼곤 했던 따스함은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엠마는 어깨를 틀어 제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래... 당신 말이 맞아." 엠마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미소가 점점 더 넓어졌지만, 그 눈동자에는 제인을 순간 소름 돋게 만들 만큼 깊은 허무함이 담겨 있었다. "당신 말이 온통 다 맞아, 제인 도련님. 이 관계는 당신한테는 참 편했겠지." 엠마는 제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핸드백을 챙겨 들었다. 와인을 너무 급하게 마신 탓에 머리가 어지럽게 도질 듯 돌기 시작했다. 단 1초도 제인과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부르는 제인의 프러스트레이션 섞인 목소리를 뒤로한 채, 엠마는 대기실을 걸어 나갔다. 엠마는 고급 촬영 스튜디오와 바로 연결되어 있는 호텔 구역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머리가 너무나 무거웠고,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며 잔상이 남았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그녀는, 제인의 촬영 후 인터뷰 시간 동안 쉬기 위해 아까 프런트에 부탁해 두었던 호텔 키 카드를 찾아냈다. "6006호..." 엠마는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디지털 키 홀더에 적힌 숫자를 읽었다. 그녀는 휘청거리는 몸을 이끌고 엘리베이터를 타 6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길고 정적만이 흐르는 호텔 복도가 그녀를 맞이했다. 엠마는 벽을 짚으며 걸었고, 어깨가 간헐적으로 지나치는 객실 문에 부딪혔다. 엠마의 발걸음이 한 객실 앞에 멈춰 섰다. 엉망으로 취해 시야가 흐릿하고 어지러운 그녀의 눈에는 문에 달린 숫자가 6006으로 보였다. 하지만 위의 나사가 약간 풀려 뒤집힌 데다 술기운으로 착시가 일어난 탓에, 문에 붙은 금속 숫자는 사실 6009였다. 9 자가 살짝 기울어져 뒤집혀 있었을 뿐, 그 방은 복도 끝에 위치한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이었다. 엠마는 손잡이에 키 카드를 갖다 댔다. 하지만 카드의 초록색 불빛이 들어오기도 전에, 떨리는 그녀의 손가락이 실수로 손잡이를 미는 꼴이 되었다. 문이 너무나 허무하게 열렸다. 안에서 제대로 잠겨 있지 않았던 것이다. 엠마는 미간을 찌푸렸다. 알코올로 마비된 그녀의 뇌는 그 이상한 상황을 논리적으로 판단할 수 없었다. "아... 왜 문이 안 잠겨 있지? 아까 내가 잠그는 걸 깜빡했나?" 그녀는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굉장히 넓고 화려한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방 안은 구석에서 비치는 어슴푸레한 조명 하나에만 의존한 채 은은하게 어두웠다. 가슴속에서 일렁이는 울분과 최고급 와인의 기운이 합쳐져 온몸으로 뜨거운 열기가 퍼져나갔다. 엠마는 핸드백을 바닥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참을성 없고 무모한 손길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와인 자국이 얼룩진 흰 셔츠를 바닥에 던져버리고, 이어 바지마저 벗어 던졌다. 이제 엠마의 매끄럽고 균형 잡힌 몸매 위에는 검은색 브래지어와 레이스 팬티만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방 한가운데 놓인 슈퍼 킹사이즈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매트리스는 너무나 폭신하고 포근해서, 오랫동안 받아보지 못한 따스한 품 같았다. 엠마는 엎드린 채 차가운 실크 베개를 품에 세게 안았다. "제인..." 엠마는 자조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적막한 방안에 퍼지는 그 웃음소리는 지독히도 슬펐다. 베갯잇 위로 다시금 눈물이 배어 나왔다. "이제 23일 남았네... 그래, 딱 23일. 그때까지도 당신이 날 사랑할 수 없다면... 좋아. 나도 이 바보 같은 미련 다 버릴게. 미련 없이 떠나줄게..." 엠마는 중얼거렸다. 술기운이 그녀의 이성을 앗아가며, 슬픈 환각의 세계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바로 그 순간, 방 한구석에 위치한 욕실 쪽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천천히 멈췄다. 뿌연 유리문이 스르륵 열렸다. 따뜻한 수증기가 흘러나오며, 샌들우드와 시더우드 향이 섞인 고급스러운 남성용 샤워젤 잔향을 풍겼다. 제인이 쓰던 향수와는 전혀 다른, 훨씬 더 짙고 성숙한 향이었다. 한 중년 남성이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허리에 순백색 사틴 가운을 느슨하게 묶고 있었는데, 살짝 드러난 넓은 가슴에는 단단한 근육의 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턱선은 날카로웠고, 턱 주변에는 잘 정돈된 옅은 수염이 남아 있었다. 관자놀이 쪽에 희끗희끗한 새치가 섞인 검은 머리카락은 젖어 있어, 비즈니스 세계의 최정상을 지배하는 차갑고 성숙한 남성 특유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풍겼다. 그 남자는 루카스 모라 블랙우드였다. 루카스는 작은 타월로 머리를 말리며 걸어 나오다, 침대 끝자락에서 멈춰 섰다. 차갑고 날카로운 그의 얼음 같은 눈동자가 자신의 개인 침대 위에 놓인,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을 포착하자 미세하게 좁혀졌다. 낯선 여자. 여자는 모로 누운 채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매끄럽고 흰 등 피부가 완벽하게 드러나 있어, 가슴과 얇은 허리를 감싸고 있는 검은색 브래지어와 강렬한 대조를 이뤘다. 어스름한 조명 아래 펼쳐진 여자의 관능적인 실루엣은, 정상적인 남자라면 누구라도 자극받을 만큼 치명적으로 에로틱했다. 루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침대 곁에 석상처럼 서서, 잠결에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엠마의 모습을 깊게 담아낼 뿐이었다. 천천히, 루카스의 단단한 목덜미에 위치한 목젖이 무겁게 꿀꺽 움직였다. 차가운 권력자 남자의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단 한 번의 시선만으로 격렬하게 뒤흔들리기 시작했다.포옹은 곧바로 풀리지 않았다. 얼어붙은 복도의 적막 속에서, 루카스 모라 블랙우드의 고른 숨결이 엠마의 정수리 위로 부드럽게 흩어졌다. 내일 구청에서의 혼인 신고 계획에 대해 방금 자신이 던진 날카로운 질문에 끝내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않은 채, 그 중년 남자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다른 행동을 취했다.별다른 예고도 없이 루카스의 단단한 손이 엠마의 무릎 아래로 파고들더니, 단호하고 힘찬 동작으로 그녀의 몸을 대리석 바닥에서 번쩍 들어 올렸다.엠마가 작은 숨을 내쉬며 깜짝 놀랐다. 반사적으로 두 손을 뻗어 루카스의 셔츠 깃을 움켜쥐며 균형을 잡았고, 그녀의 둥근 눈동자는 가까이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놀란 듯 바라보았다. 루카스의 입가에는 미소조차 없었다. 그저 단호하게 다물린 턱 선과 수많은 비밀을 품은 음흉한 검은 눈동자만이 빛나고 있었다. 넓고 늠름한 보폭으로, 루카스는 엠마를 품에 안은 채 가문 수장의 넓고 화려한 개인 침실이 있는 안쪽 복도를 향해 성성장걸음으로 걸어 나갔다.두꺼운 카펫이 깔린 바닥 위로 발걸음 소리가 규칙적인 울림을 남겼다. 하지만 하얀 대리석 기둥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동쪽 복도의 모퉁이에서, 붉게 충혈된 한 쌍의 눈이 가슴이 찢어질 듯 들썩이며 그 광경을 노려보고 있었다.제인 랭커스터 블랙우드가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굳어 서 있었다. 숨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가쁘게 흩어졌고, 주먹을 쥔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기둥 벽을 악에 받쳐 짓누르고 있었다. 자신의 친아버지인 그 남자가 엠마를 그토록 다정하고 독점욕 어린 눈빛으로 품에 안고 가는 광경은 마치 수천 개의 독 멩이를 박아 넣듯 그의 명치끝을 사정없이 짓이기고 있었다.아니…… 말도 안 돼! 제인의 머릿속에서 히스테릭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끓어오르는 피가 머릿속에 남은 마지막 이성마저 새까맣게 태워버리고 있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질투심이 핏줄을 타고 흘러넘치며 그의 온몸을 잘게 떨리게 만들었다. 억울했다. 맹세코, 지난 7년 동안 자신의 여자였던 이, 바로 조금
제60장다락방 최상층의 공기는 순식간에 희박해져, 마치 모든 산소가 가슴을 짓눌러 오는 정적 속으로 빠져나가 버린 것만 같았다. 엠마의 입술에서 방금 막 튀어나온 단호한 한마디는 공중을 감돌며, 제인 랭커스터 블랙우드의 머릿속에서 그의 두골을 부수는 쇠망치질처럼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제인은 멍하니 서 있었다. 엠마를 잡으려 뻗었던 그의 두 손은 천천히 몸 옆으로 힘없이 늘어졌다. 그의 눈동자는 크게 확장된 채, 완벽한 파멸을 암시하는 멍한 눈빛으로 앞에 선 여자의 형상을 바라보았다.7년.그 여자가 그의 곁에 서서, 이 한계점에 다다르기 전 좁은 아파트에서 기대를 품고 기다림으로 가득 찬 나날들을 함께 보낸 세월이 무려 7년이었다. 그런데 지금, 블랙우드 저택에 발을 들인 지 불과 며칠 만에 엠마는 그 모든 추억을 단숨에 버리고 자신의 친아버지에게 마음을 돌렸다고 고백하고 있었다."그... 그렇게 빨리, 엠마?" 제인의 목소리가 목구멍에 막혀, 푹 쉬고 텅 빈 귓속말처럼 흘러나왔다. "우리가 함께한 7년... 우리가 보낸 수천 일이... 이렇게 쉽게 모든 걸 잊고 아버지한테 마음을 돌릴 만큼 쉬웠던 거야?"엠마는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에 죄책감이 싹트도록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고, 턱선은 경직되었으며, 가슴을 찢는 그 질문에 그 어떤 대답도 남기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그녀는 어스름한 다락방 구석을 빠르게 벗어났고, 굽 낮은 구두 소리가 회전 계단을 따라 요란하게 울려 퍼지게 두었다.사랑하는 여자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며, 제인의 마지막 방어선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청년의 무릎에서 힘이 빠지며, 몸을 받치던 모든 기력이 사라졌다."엠마!" 제인은 온힘을 다해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거세게 떨리며, 오래된 다락방의 콘크리트 벽면에 반사되어 울렸다.고통과 절망으로 가득 찬 그 비명은 그 어떤 응답도 받지 못한 채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다. 엠마는 단 1초도 뒤를 돌아
엠마의 발걸음이 루시 부인의 방 문턱을 벗어난 바로 그 순간, 옆에서 억센 손 하나가 불쑥 나타나 눈깜짝할 사이에 강한 힘으로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엠마가 비명을 지르거나 이 무례한 짓을 저지른 범인이 누구인지 돌아볼 겨를도 없이, 그녀의 몸은 조용한 저택 복도를 따라 강제로 끌려갔다."놔!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제인?!" 엠마는 억누른 소리로 항의하며 온힘을 다해 손목을 빼내려 몸부림쳤다.하지만 엠마를 거머쥔 제인의 악력은 마치 달궈진 철사처럼 그녀의 움직임을 완벽히 봉쇄했다. 그는 엠마의 욕설이나 몸부림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아래층으로 데려가는 대신, 숨겨진 비상 계단으로 끌고 올라갔다. 블랙우드 가문 저택의 최상층으로 바로 연결되는 오래된 회전 계단이었다.그층은 오랫동안 방치된 다락방으로, 고미술품 수납공간과 건물의 기계실이 있는 곳이었다. 어스름한 공기 속에는 바짝 마른 오래된 나무 냄새와 지붕의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 줄기 아래 날리는 고운 먼지, 그리고 아래층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격리된 완벽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청소하는 하인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하인도, 가족도 올라오지 않는 공간이었다.넓고 정적만이 가득한 공간의 끝에 다다르자, 제인은 엠마의 백부르트한 등 뒤가 차가운 붉은 벽돌 벽에 닿을 때까지 그녀를 천천히 밀어붙였다."너 정말 미쳤구나, 제인!" 엠마는 가쁜 숨을 내쉬며 쏘아붙였다. 어두운 감정에 사로잡힌 듯한 전방의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도대체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어?!"제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분노와 절망, 그리고 분수를 넘어선 집착이 엉켜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엠마가 뺨을 때리거나 가슴을 밀쳐내기 위해 손을 올리기도 전에, 제인은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몸을 숙였다.그의 빈 손이 엠마의 목덜미를 움켜쥐어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고정하더니, 이내 강요와 절박함이 가득 찬 키스로 엠마의 입술을 막아버렸다.엠마는
제58장뒷뜰의 공기가 순식간에 숨이 턱 막힐 만큼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낮의 눈부신 햇살조차 수영장 근처의 탁 트인 공간을 짓누르는 긴장감을 뚫지 못하는 듯했다.제인은 정원 돌길을 강하게 내딛으며 위협적인 발소리와 함께 빠르게 다가왔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에마에게서 겨우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바이올렛에게 고정되어 있었다."무슨 소릴 하는 거야, 바이올렛? 말을 왜 그따위로 해?" 정적을 깨뜨린 제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억눌린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에마 앞에서 거만한 미소를 지어 보이던 바이올렛은 제인의 눈에서 일렁이는 분노의 불길을 보자 순식간에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여자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며 눈을 몇 번이고 깜빡였다."제인... 난... 난 그저 이 여자한테 사실을 말해준 것뿐이야." 바이올렛은 목소리가 떨려 오는 와중에도 변명하려 애쓰며 불안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그렇게 쉽게 끝날 리 없다는 걸 말했을 뿐이고—""누가 너더러 여기 오래, 어?!" 제인이 바이올렛의 말을 끊어버리며 고함을 질렀다. 그의 거친 목소리가 저택 뒷뜰의 정적을 깨부수며 울려 퍼졌다.에마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옛 애인과 그 남자의 과거 여자가 벌이는 이 한심한 다툼에 끼어들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자신을 그저 '장난감'에 불과하다고 치부하던 조금 전 바이올렛의 말을 떠올리자, 에마의 가슴은 분노와 불쾌감으로 뒤엉켜 턱 막혀왔다. 바이올렛이 집 안까지 끌고 들어온 이 싸구려 드라마를 단 1초도 더 듣고 싶지 않았다.에마는 두 사람에게 한마디 말도 섞지 않은 채,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몸을 돌렸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제인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뒷뜰을 벗어나 저택의 쪽문으로 향했다.제인은 눈꼬리로 에마가 떠나는 모습을 흘낏 보았지만, 이내 시선은 앞에 서 있는 여자에게로 돌아갔다."잘 들어, 바이올렛." 제인이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차갑게 읊조렸다. "어제 밤 클럽에
제57장완전히 닫히지 않은 안방 창문 틈새로 서늘한 공기가 새어 들어왔고, 그 공기에는 늦은 밤 도시의 눅눅한 습기가 짙게 배어 있었다. 루카스의 마지막 말이 공중에 맴돌며 에마의 가슴 깊은 곳을 찌르는 날카로운 정적을 남겼다. 남자는 대답 한마디 기다리지 않은 채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방 뒤편에 있는 개인 서재를 향해 걸어가며, 에마를 깊은 혼란 속에 남겨두었다.에마는 양손을 불끈 쥐었다. 속에서 솟구치는 분노와 억울함을 누르느라 숨소리가 가쁘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 결혼이 그저 어머니 뜻에 따르는 것뿐이라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고?' 에마의 마음속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여성으로서의 자존심이 순간 갈갈이 찢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도 싫었고, 무시당하는 인형 아내의 신세에 갇히는 것은 더더욱 원치 않았다. 루카스가 자신을 생명 없는 물건처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아주 큰 오산이었다. 에마는 이 상황을 반드시 뒤집어놓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루카스 모라 블랙우드가 자신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고, 그저 이 집의 형식적인 장식품 이상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겠노라고.다음 날 아침, 떠오르는 햇살이 블랙우드 저택의 넓은 뜰을 따스한 금빛으로 물들였다. 에마는 마음속으로 그린 계획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녀는 평소보다 일부러 일찍 일어나 날씬한 몸매를 완벽하게 감싸는 부드러운 크림색 비즈니스 블레이저를 입었다. 무시하기 힘든 전문적이면서도 우아한 아우라가 흘러넘쳤다.루카스가 셔츠 깃을 반쯤 풀어 헤친 채 위층에서 내려왔을 때, 에마는 이미 메인 식탁 근처에 서 있었다. 식탁 위에는 루카스의 평소 취향에 맞춰 야자당을 딱 적당히 넣은 블랙커피 한 잔과, 신선한 아보카도를 바른 토스트 한 접시가 차려져 있었다.루카스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식탁을 바라보며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는 의자 옆에 서서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이는 친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에마를 흘낏 바라보았다."오늘 일정도 빼곡하고, 어제
제56장호화로운 저녁 식사는 갈수록 지독해지는 정적 속에서 마침내 끝이 났다. 후식이 제공된 후, 루카스는 몇 가지 회사 서류를 검토하기 위해 서재로 돌아가겠다고 양해를 구했고, 루시 부인은 여전히 남아 있는 피로감에 지쳐 즉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그로 인해 식당에는 엠마와 제인 두 사람만 남겨졌고, 그 넓은 공간은 순간 지독하리만치 적막하게 느껴졌다.엠마는 즉시 의자에서 일어나 식탁 위에 접혀 있던 냅킨을 빠르게 정돈한 뒤, 맞은편의 젊은 남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방을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한 걸음도 더 떼기 전에, 절박함으로 가득 찬 중저음의 목소리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엠마, 잠시만."엠마는 걸음을 멈추고 깊은 숨을 내쉬며 안에서 차오르는 피로감을 눌렀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완벽한 무관심이 서린 밋밋한 표정으로 제인을 바라보았다.제인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여자가 바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몇 걸음의 거리를 유지하며 엠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배우의 눈빛은 아득해 보였고, 진심 어린 애원을 내뿜고 있었지만 그것은 엠마에게 더 큰 혐오감만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언제까지 나한테 이렇게 차갑게 굴 거야, 엠마?" 제인이 옆구리에서 손가락을 꽉 쥔 채 쉰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과거에 지독하게 잘못했다는 거 알아. 당신이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너무 늦게 깨달았어. 하지만 난 정말 모든 걸 바로잡고 싶어. 나한테 기회를 한 번만 더 줘… 우리 여길 떠나서 같이 새 출발 하자."엠마는 나지막하게 비웃음을 흘렸다. 지칠 대로 지친 표정으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는 그녀의 입꼬리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새 출발이라고 했어?" 엠마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고, 그녀의 목솟소리는 온기라고는 전혀 없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시간을 뒤돌릴 수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네, 제인. 7년 동안 난 당신 곁에 서서 확실한 관계를 구걸하고 내 진심을 바쳤어. 그런데 당신이 나한테 준 건 뭐였지? 그저 그림자와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