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왕비는 뒤를 돌아보며 “초왕비, 셋째를 좀 말려 보세요!”라고 말했다.원경릉은 당황한 표정으로 눈동자만 요리조리 굴렸다.‘위왕하고 한 번도 얘기해 본 적 없는 나보고 말리라고?’위왕의 옆에 있던 여인은 맑은 눈동자를 드리우며 위왕을 보았다.“제가 돌아가서 왕비를 불러올 테니, 왕야께서는 화내지 마십시오.”위왕은 큰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강렬한 눈빛으로 손왕을 노려보았다.“본왕이 이 여인을 데리고 이곳에 온 이유는 이 사람이 본왕의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입니다. 정비는 아니지만 장차 후궁이 될 사람이니 이 여인을 인정하지 않으려거든, 저와도 연을 끊을 준비 하세요.”위왕의 모비는 첫 번째 현비였으며 위왕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위왕의 친 모비가 죽자 위왕은 손왕의 모비인 정비(靜妃)에게 맡겨졌다. 그때부터 손왕과 위왕은 친형제처럼 돈독한 우애를 나누며 컸다.“너……”손왕이 화가 나서 볼살이 덜덜 떨며“모비께서 성질나 죽는 꼴 보고 싶어?”라고 물었다.“모비께는 본왕이 설명드리지요.” 위왕은 입을 삐죽거리며 “모비께서는 오히려 손자를 안아볼 생각에 좋아하실걸요? 매번 현모비를 부러워하셨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손왕과 위왕 사이에 서있는 원경릉은 어색해 죽을 것 같았다. 원경릉은 그녀를 위왕 옆에 있는 여인을 보았는데 그녀는 조금도 어색해하는 것 같지도 않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조용히 위왕 옆에 서있었다.손왕비는 위왕을 위로하며 “오늘 둘째 형님 생신이니 여기서 시끄럽게 굴지 말고, 여인을 데리고 가세요. 본비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비인 위왕비를 폐비시킨다는 둥 그런 말을 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그 말은 사실입니다.” 위왕이 말했다.원경릉은 뻔뻔한 위왕의 말을 듣고 참을 수 없었다.“셋째 아주버님, 부부관계는 칼로 물 베기라고 했습니다. 지금 당장 사이가 틀어졌더라도 잘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도 많은데 위왕비 체면도 있지,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위왕의 옆에 있던 여인은
원경릉은 접객실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고는 우문호의 귀를 잡아당겼다.“그럼 당시에 어땠는지 그때의 일들을 말해줘.”“둘만의 사정이 있겠지. 이리 와봐. 어이고 녹주 이 멍청한 계집.”우문호는 손을 뻗어 그녀의 볼에 묻은 연지를 닦았다.“이거 내가 혼자 화장한 거야.” 원경릉은 다른 여인들을 보고 오늘따라 배가 잔뜩 나온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우문호는 책상다리를 하고 옆에 놓인 견과류를 집어 호두 알만 꺼내 원경릉에게 주었다.“당시에는 셋째 형님이 셋째 형수를 보고 첫눈에 반했지. 형수 집안이 굉장한 명문가잖아. 그때 형님이 형수와 혼인하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몰라. 원래 셋째 형수의 약혼자가 안군왕부(安郡王府) 사람이었거든? 이미 약혼을 했는데 그걸 어떻게 무를 수 있겠어. 그때 셋째 형님이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무술도 연마했어 나는 그때처럼 셋째 형님이 열심히 살았던 때가 없었던 것 같아. 하지만 안군왕세자도 형수랑 혼인하겠다고 물러서지 않았고, 양가에서도 반대했기에 결론은 잘 안 됐어.”“그럼 그 후에 어떻게 혼인을 하게 된 거야?”우문호는 미소를 지었다.“그때부터 셋째 형님이 5일 동안 단식을 했어. 하지만 부황이 얼마나 단호한 분인지 알지? 그것도 먹히지 않았지. 그때 셋째 형님이 어떻게 했을 것 같아?”“어떻게 했는데?”“형님이 최씨 집안에 가서 셋째 형수를 데리고 사랑의 도피를 했지.”원경릉은 이 시대의 여인이 저런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위왕비가 사랑의 도피를 동의했다고?”“거기까지는 몰라. 아무튼 나중에 귀영위에게 잡혀와서 형님이 곤장 서른 대를 맞았지.”“그럼 안군왕세자는 동의했어?”“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어? 셋째 형님이랑 형수가 보름 동안 숨어 지냈는데, 여자가 남자랑 보름을 밖에서 같이 지내다가 들어왔으니, 다들 몸이 더럽혀졌다며 셋째 형님에게 보내라고 해버린 거지.”“그럼 그게 언제야?”“4~5년쯤?”“그것밖에 안 된 거야? 서로 없으면 죽을 것
우문호는 뛰쳐나가 손왕을 찾았다.손왕은 제왕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길을 보고 자신의 생일잔치라는 것도 망각하고 왕부에 있던 남자들을 모두 한 자리로 모아서 제왕부로 향했다.제왕부에 불이 났다는 말을 듣자마자 원용의는 다급히 제왕부로 향했다.손왕부도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친왕, 부마, 관원, 남성 모든 사람들이 불을 끄는데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싹 들고 갔다. 남은 시녀들은 손왕부가 비자 불안하여 따라가야 하나 아니면 자리를 지켜야 하나 고민했다.손왕비는 사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접객실에 사람을 모아 앉혔다.주명취는 향로 앞에 서서 담담한 표정으로 “여기 있는 게 그들을 도와주는 거겠죠.”라고 말했다.손왕비는 어차피 이혼할 사람이니 저러는 것도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살을 맞대고 살았던 사람인데 어쩜 저렇게 무정할까라고 생각했다.그녀는 사람들은 안채에 앉히고 차와 간식을 대접했다. 위왕이 간 후에도 그가 데리고 온 여인은 손왕부에 남아있었지만 들어와 앉지 않고 밖에 서있었다.주명취는 원경릉 옆에 천천히 앉아 그녀를 묘한 눈빛으로 보았다.“너 지금 무섭지?”“뭐가 무서워?”주명취가 소름 끼치게 웃었다. “불! 불은 싹 다 태워버리잖아. 검은 재만 남기고 싹.” 원경릉은 그녀를 노려보며 미간을 찡그렸다.우문령은 주명취의 말을 듣고 화가 났다.“왜 초왕비를 괴롭혀요? 그 입 다무세요.”“하하하하! 초왕비? 그거 알아? 원래는 내가 초.왕.비였어야 해!”경박스러운 주명취를 보고 문경공주는 크게 화를 냈다.“주명취. 말조심하세요. 비록 당신이 곧 황실을 떠날 테지만 주씨 집안에서도 당신이 이렇게 경거망동하는 것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주명취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공주가 시키는 대로 해야죠. 고귀하신 공주님들. 호호호”손왕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원경릉을 힐끗 보았다.“초왕비. 이리 와서 내 옆에 앉으세요.”원경릉도 주명취가 옆에 앉아 있는 게 불안했다. ‘혹시 알아? 저러다가 눈 돌아서 비녀로 날 찌를지
“사식아 네가 저 여자를 따라가거라. 진짜 불이라도 지르면 어떡해!”손왕비가 주명취가 대청을 나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사식이에게 소리쳤다.사식이는 우문호의 당부대로 손왕부에 남아서 원경릉을 지키려고 했으나 만약 주명취가 손왕부에 불이라도 지른다면 원경릉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위험해진다고 판단했기에 주명취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손왕부에 있던 병사들도 모두 제왕부에 불을 끄러 갔고, 부중의 다른 하인들은 사식이만큼 무공을 할 줄 몰랐다. 만약 주명취가 돌발행동을 한다면 남아있는 부녀자들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원경릉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사식아 나가면서 대문을 닫아줘! 그리고 주명취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하거든 꼭 막아야 해!”“예! 알겠습니다.”사식이는 원경릉의 떨리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주명취를 쫓아가며 대문을 닫았다.손왕비가 벌떡 일어나 원경릉을 보았다. “무슨 일입니까?”“지금 여러 사람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귀가 밝은 원경릉은 밖에서 들리는 예사롭지 않은 발소리에 두려움에 떠는 눈빛으로 손왕비를 보았다.공주와 그 자리에 있던 황족들이 모두 놀란 표정으로 원경릉을 보았다.“뭐라고요?”“여러분 제가 나가서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다들 진정하세요.” 손왕비는 손님들에게 침착하게 말하며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사식이가 대문을 닫으면서 손왕부의 하인들에게 뒷문과 측문까지 닫으라고 분부해놓았기에 손왕부로 들어오는 길은 모두 막혀있었다.손왕비는 조심스레 밖으로 나와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왜 이런 일이 하필 손왕의 생일에 일어났는지 억울하기도 하고 화가 났다. 만약 손왕부 행사에 초대되어 온 손님에게 사고라도 난다면 손왕부에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그녀는 손왕부 책임 집사를 불러 모든 하인들을 대청으로 모으라고 명령했다.생일잔치에 초대된 손님은 황족 또는 황족의 친척, 관원들의 가족이었고 저녁에 오기로 한 일부 손님들은 손왕부로 오고 있는 중일 것이다.현재로서는 어린아이 다섯 명을 포함해서 총 서른
사식이는 주명취를 발견하고 그녀의 뒤에 조용히 서서 그녀를 지켜보았다.주명취는 차갑게 웃으며 “사식, 너는 내가 정말 불을 지를까 무섭니?”라고 물었다.“당신은 불 못 지를걸요?”“그럼 여기까지 나를 따라온 이유가 뭐야?” 주명취는 고개를 돌려 사식이를 보았는데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광기가 서려있었다.“당신을 따라온 게 아니라 여기 경치가 좋아서 온 겁니다.”지금 손왕부의 모든 출입문이 닫혀있기에 손왕부 내에 위험인물은 주명취 뿐이었다.주명취는 정원 한 귀퉁이에 노랗게 시든 나무를 보며 조용히 읊조렸다.“나무가 시들어서 좋아. 다 시들어서 없어졌으면 좋겠어.”주명취는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며 사식이를 보았다.“여기 앉아. 서있으면 얼마나 힘드니?”사식이는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주명취는 차갑게 웃으며 대수롭지 않은 듯 사식이를 보았다.“너는 사람이 절망의 끝에 다다르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사식이는 당황한 표정으로 주명취를 보았다.주명취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귀 옆으로 흘러나온 머리를 쓸어 넘겼다.“내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니. 1년 전만 해도 난 주씨 집안에서 가장 총명하고 아름다운 아가씨였지. 내가 초왕비가 될 수도 있었는데, 내가 적자인 제왕을 택하는 바람에 일이 꼬였지 뭐야.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제왕이 태자가 될 줄 알았어. 난 그럼 태자비가 되었을 것이고, 그럼 난 이 나라에 국모가 되었을 텐데……”“그럴 그릇이 안 되는데 야심만 커서 뭐 합니까?” 사식이가 차갑게 말했다.“네 말이 맞아. 야심만 컸지.” 주명취가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사식이를 보았다.“근데 이건 사실 야심의 문제가 아니야. 누구나 마음속에 원하는 게 있어. 사식이 너는 야심이 없니? 원하는 게 없어? 원경릉이라고 부처일 것 같아? 걔도 야심이 없을까? 사람이라면 모두 마음속에 야심 하나쯤 다 있단 말이야. 어쩌겠니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을……”“그것 또한 당신의 선택이니 누굴 탓할 수 없죠.”주명취는 사식이의 말을 듣고
사식이는 주명취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그녀가 단도를 드는 순간 사식이가 달려들었다.“멈춰! 죽으려거든 딴 데 가서 죽……어!”주명취 자신을 향하던 단도가 순식간에 방향을 돌려 사식이를 겨누자 사식이 급히 달려가 단도를 빼앗으려 했다. 가녀린 몸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어찌나 세었는지 사식이는 주명취의 반항에 온 몸이 휘청였다. 그 순간 주명취가 손을 빼 단도로 사식이의 복부를 찌른 후 빠르게 도망갔다.사식이는 그녀의 뒤를 쫓기 위해 달렸으나 몇 걸음 가지 못하고 피를 쏟아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너……”주명취는 차갑게 웃으며 쓰러져있는 사식이를 보았다. “사람이 절망에 다다랐을 때는 눈에 뵈는 게 없는 법이야. 나 혼자 죽을 수는 없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든 증오하는 사람이든 다 죽여서 데리고 갈 거야.”주명취는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가 측문을 열었다.“들어오시게.”사내 몇 명이 들어오더니 허리를 굽히고 빠르게 손왕부 안으로 뛰어들어왔다.대청 안에서 기다리던 원경릉은 바깥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갑자기 왜 이렇게 어지럽지?” 문경공주가 관자놀이를 잡고 고개를 숙였다.“나도 머리가 아파.” 진평공주는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원경릉은 고개를 번쩍 들어 발자국 소리를 따라 귀를 쫑긋 세웠다. 발자국 소리가 몇 번 크게 울리더니 손왕부 마당에 멈춰 선 것 같았다.원경릉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제왕부에 불을 낸 것은 함정이었어!’원경릉은 병풍 뒤로 들어가 약상자를 안에서 날카로운 수술칼과 후추 스프레이를 꺼냈다.약상자를 오래 사용하니 이제 약상자도 원경릉의 마음을 잘 아는 것 같았다.그녀가 병풍 밖으로 나오자 밖에서 사람들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그 소리를 듣고 대청에 있던 사람들은 무서워 벌벌 떨었다. 손왕비가 밖으로 나가 상황을 보니 처음 보는 사내들이 칼을 들고 부중의 하인들과 싸우고 있었다. 하인들이라고 해봤자 음식을 하는 하인, 정원을 가꾸는 하인, 목욕을 시키는 하
“네 목적은 나잖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킬 필요 없이 나를 여기서 죽이든지 나를 데리고 나가!”원경릉이 주명취에게 다가가 소리쳤다.그녀는 주명취가 그 자리에서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죽이려고 했으면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었을 텐데 이렇게 소란을 피울 이유가 있었겠는가.주명취의 눈이 반짝이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원경릉을 보았다.“초왕비, 그게 무슨 말이죠? 저 사람들은 잔치집을 털러 들어온 강도 아닙니까? 저 사람들하고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럽니까? 무고한 사람을 연루시키지 말고 저 사람들을 따라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세요.”“뭔 쓸데없는 소리야. 같이 가자고!” 주명취가 다가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초왕비, 저기 향로를 봐, 내가 방금 약을 탔거든? 네가 저 사람들만 잘 따라간다면 내가 여기 남은 손님들에게 해독제를 줄 것이야.”원경릉은 대청 가운데에 위치한 금빛 향로에서 희미하게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공주들은 이미 눈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있었고, 손왕비도 눈이 풀려 휘청거렸다.“데려가!” 주명취의 명령에 사내들이 원경릉을 에워쌌다.“주명취 네가 나를 죽이면 너도 죽는 거야!”원경릉이 소리를 지르자 주명취가 음흉하게 웃었다.“내가 죽는 게 무서울 것 같아? 죽는 게 무서웠으면 이렇게 하지도 않았지…… 널 죽이고 제왕도 죽이고, 우리 사이좋게 황천길에서 만나자고.”“네 죄로 남은 가족들이 죽어나갈 것은 생각도 안 하는구나?”“그들이 죽든 살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주명취가 소름 끼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원경릉은 사내들에 힘에 못 이겨 질질 끌려 밖으로 나갔다.그녀는 떠나면서 뒤돌아 손왕부를 보았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손왕비가 휘청거리더니 바닥으로 쓰러지자 원경릉은 정원에 숨어있던 하인들에게 소리쳤다.“나를 쫓아올 필요 없으니 빨리 사식이를 찾아!”원경릉은 열린 측문으로 끌려가다가 골목에 세워진 마차에 집어던져졌다.잠시후 주명취가 그 마차
멀리 있는 향로에 독을 넣었다는 말에 원경릉은 마음이 놓였다. 만약 주명취가 해독제를 주지 않는다고 해도 소량의 독은 황실의 어의들이 충분히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원경릉은 주명취가 하라는 대로 충실히 그녀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주명취의 광기 어린 편집증에 원경릉이 맞서 봤자 좋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주명취는 인적이 드물고 외진 곳에 원경릉을 데려가 천천히 긴 시간 동안 그녀를 괴롭힐 것이다. 만약 주명취의 목적이 원경릉을 죽이는 것이라면 마차에 태워서 이동할 필요도 없다.마차가 부두에 이르렀을 때 주명취가 마차에서 내려 손을 뻗었다.“내 마지막 호의.”원경릉이 주명취의 손을 잡고 내려오자 두 명의 인부가 원경릉의 양 쪽 겨드랑이에 팔을 넣었다.부두에서는 짐꾼들이 짐을 나르고 있었고, 인력거꾼들은 마대를 싣고 달려왔다.그중 한 명이 시간에 쫓겨 급하게 인력거를 몰다가 원경릉과 부딪칠 뻔했다.“걔가 눈이 멀어서 그럽니다!” 옆에 있던 여자 인부가 황급히 사과를 했다.그 순간 원경릉의 얼굴에 희망이 스쳤다.‘이 목소리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목소리인데?’원경릉은 팔을 단단히 잡고 있는 사내들이 불편해서 몸을 흔들어 사내들의 팔을 뺐다.“아프다고! 내가 알아서 갈 테니 이거 놓아라!”앞장 서던 주명취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그러자 원경릉이 고개를 푹 숙이고 그녀를 따라갔다.강가를 따라 걷다 보니 구석에 정박되어있는 배가 한 편 보였다. 인부는 원경릉을 배에 끌어올렸고 주명취도 뒤따라 배에 올랐다. 그 후에도 몇명의 인부들이 배에 올랐고,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배를 몰았다.배에 탄 원경릉은 은연중에 걱정이 되었다. ‘육지였다면 귀영위가 어떻게 해서든 구하러 왔을 텐데, 배를 타고 간다면… 귀영위가 나를 찾을 수 있을까?’수를 쓰더라도 배가 출발하기 전에 써야 한다.주명취는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선실의 등받이 의자에 앉아 한가롭게 바다를 보았
우문호 일행은 강북부로 향하는 내내 북방의 풍경과 풍속을 경험했다. 그로 인해 속도는 매우 느리긴 했지만 말이다.그날 밤, 우문호는 갑자기 악몽에서 깨어나 온몸에 땀을 흘리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그러자 원경릉이 벌떡 일어나 그를 껴안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오? 악몽을 꾼 것이오?”우문호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아직 날씨가 덥지 않은 데다가 북방에 있어 오히려 날씨까지 쌀쌀했기에, 그는 아직도 악몽이 생각나는 듯, 창백한 표정을 지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꿈에서 셋째 형님이 피투성이인 채 죽어가고 있었소…”원경릉은 그저 꿈이라 생각하고 위로해 주려 했지만, 이내 우문호의 강한 감응 능력을 떠올렸다. 갑자기 나타난 이 꿈이 형제간의 영적 감응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우문호도 점점 불안한 생각에 빠졌다.“강북부가 비록 평온해 보여도 사실 북당에서 가장 복잡한 곳이오. 온갖 사람들이 섞여 있고, 북막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네. 게다가 셋째 형님도 무모한 사람이니, 진짜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지 걱정되오. 원 선생, 어서 빨리 가야겠소.”원경릉이 서둘러 옷을 입으며 말했다.“아니, 내가 먼저 가겠소. 정말 상처를 입었다면, 내가 가야지 도움이 되지 않겠소? 게다가 난 빨리 갈 수 있잖소.”“좋소. 그럼 먼저 가시오. 우리도 곧 출발하겠소.”우문호는 너무 생생한 꿈 탓에, 더 이상 천천히 갈 수 없었다.“사람을 불러야겠소.”원경릉은 재빨리 옷을 입은 후, 우문호에게 포옹하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먼저 가겠소.”“조심하시오.”우문호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 원경릉은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원경릉이 사라지자마자 우문호는 방 문을 두드리며, 출발하자고 소리쳤다.우문호의 소리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이 밤중에 출발이라니, 무슨 큰 일이 생긴 걸까?이때 수보가 겉옷을 걸치고 나오며, 우문호의 팔을 잡고 물었다.“무슨 일입니까?”우문호가 답했다.“나도 모르네. 하지만 셋째 형님에게 무슨 일
스무 명이 넘는 자 중 단 한 명만 생포하고 나머지는 전부 섬멸되었다.안왕은 재빨리 위왕의 혈을 눌러 지혈한 후, 중상을 입은 위왕을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먼저 의원을 찾으러 간 사람이 있었기에, 의원은 이미 저택에 도착해 있었다. 이때 안왕이 피투성이가 된 채, 의원의 옷깃을 움켜잡았다.“살리시게, 살려야 하네. 꼭 살아야 하네.”의원이 바로 약상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진정하십시오.”의원이 위왕의 옷을 가위로 자르자마자, 상처가 바로 드러났다. 다행히도 먼저 지혈한 덕분에 저택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하지만 심각한 부상 상태와, 깊은 복부의 자상 때문에 장기를 다친 것으로 판단한 의원은 간단한 처리를 마친 후, 안왕에게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소인의 의술이 부족한 탓에, 치료를 감당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경성에서 다치셨다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강북부는 의료가 낙후된 지역이다. 비록 혜민서를 설립한 이후 의사를 집중적으로 양성하긴 했지만, 경성에 비하면 여전히 많이 부족했다.안왕이 숨을 헐떡이며 눈에 핏줄을 세우고 소리쳤다.“중상을 입었는데 어찌 도성으로 돌아가란 말인가? 긴 여정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은가?”의원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그것도 참 문제입니다. 황실 친왕이 자금단을 가지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혹시 저택에 있습니까?”“없네!”안왕은 위왕의 호흡이 점점 미약해지는 모습을 보며 절망감에 휩싸여 털썩 주저앉았다.“내가 갖고 있던 자금단은 이미 먹은 지 오래된 것이네.”“경성… 경성으로…”의식을 잃은 위왕은 그저 경성이라는 말만 중얼거렸다.안왕은 눈물을 닦으며 무릎을 꿇었다.“형님,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의원이 약을 썼으니, 황후가 오실 때까지 며칠만 버티십시오.”심각한 상황이니, 경성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돌아가려면 최소 일주일 이상은 걸리지만, 황후는 아마 사흘 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성으로……”위왕은 의식을 잃기 전까지 계속해서 경성을 찾았다. 그곳은 그가 너무
위왕은 마음속에 또 하나의 걱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다섯째가 곧 강북부에 오는 것이었다. 비록 이 일은 소문내지 않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순행했으니, 소문이 새어나가게 마련이다.설령 그가 강북부에 온다고 밝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의 최종 목적지가 강북부라는 것은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북막인들이 다섯째에게 해를 가하려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었다.아무래도 단 한 순간도 북막인의 야심은 멈춘 적 없었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는 방심하지 않고, 허점을 찾아내겠다는 결심을 다지며 이들을 감시했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 어디까지나 본인의 추측일 뿐이기에, 그는 이 일을 아직 넷째에게 말하지 않았다.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그들이 진짜 금나라 상인이라는 것이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두 나라의 사이만 영향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무장이지만, 외교적인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주 작은 불씨라도, 마음먹은 자가 부추기면 걷잡을 수 없는 큰불이 될 수 있는 법이기에,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감시 끝에 마침내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 처음엔 열댓 명 정도였던 이들 무리는 이틀 사이 스무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새로 온 자들은 앞선 사람들과는 다르게, 군인이라기보다는 강호 인사의 분위기를 풍겼으며, 무공 또한 약하지 않아 보였다.위왕은 경계심을 품고, 밤새 직접 사람들을 이끌어 조사에 나섰다.앞서 만났던 금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질문에 순순히 응했지만, 새로 온 강호인들은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위왕의 질문에도 그저 시큰둥한 태도만 보이며 북당인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위왕은 건방진 그들의 태도에, 몇 마디 호통을 쳤고, 그 모습에 강호인들은 참지 못하고 바로 위왕에게 손을 쓰려고 했다.위왕은 조사하기 위해 온 터라, 데리고 온 부하도 단 몇 명 뿐이었기에, 상대가 일반적인 조사에도 이렇게 쉽게 공격하려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앞서 온 금나라인들이 말리려 했지만, 그들이 손을 쓰자, 사태가 수습되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남강에 며칠 머무는 동안, 아홉째와 함께 남강의 풍경을 둘러보고, 북강에도 다녀왔다.지금 북강 백성들은 조정에 대한 소속감이 아주 강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남강을 다스린 정책이 정말 훌륭했기에, 백성들 모두 좋은 날을 보낼 수 있었기에, 자연스레 황제에 대한 존경심도 깊어진 것이었다.황제와 황후가 지나가는 곳마다 백성들은 길가에 모여서 열렬히 환영했다.그들은 이번 순행 내내 오계부에서 신분을 밝힌 것 외에는 항상 미복으로 다녔다. 하지만 남강에서 우문호는 황제의 신분을 드러냈다.우문호는 백성들의 신뢰와 경외심에서 큰 성취감을 느꼈고, 매우 기뻤다. 그는 줄곧 원경릉의 손을 잡고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과거 북강은 방어를 위해 무술 함정이 많았지만, 이제는 모두 제거되었다. 그리고 많은 백성이 산 아래 평원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마을을 이루었다. 정화를 구하러 왔을 때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기쁜 마음과 함께 우문호는 감사함도 느꼈다. 이것은 결코 그 혼자만의 공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남강을 떠나야 하는 날이 다가오자, 원경릉은 만아와 여덟째를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곧 변성으로 가야 했기에, 아쉬움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잠시였다. 남강을 벗어나자마자, 그녀는 아이들과 만날 생각에 들뜨기 시작했다."원 선생, 그들에게 말했소?"길에서 우문호가 물었다."아니, 몰래 가는 것이오."원경릉은 웃으며 말했다."교활하구먼. 그래도 만두가 이미 알려줬을 수도 있을 텐데."지금은 경단과 찰떡, 그리고 계란이 셋만 그곳에 있었다."셋이 다섯 개 성을 다스린다니, 분명히 힘들 것이오."원경릉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렇소.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졌네. 이제는 태평해 보이니."우문호도 아이들이 안쓰러웠다."이번에 가서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충분히 쉬게 해줘야 하오."사실 성하나를 다스리는 것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점 없이, 매우 힘든 일이었다.한편, 강북부에서는 최근 강북부 무구산 주변에 신비한 상단
그러자 홍엽이 그를 바라보며 멈칫했다."자네가 중매를 서겠다고?""안 되오?""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자기 혼사도 해결 못 하는데 중매는 무슨. 난 못 믿네!"냉정언이 어깨를 으쓱였다."못 믿으면 말고. 이래 봬도 내가 명문가 아가씨나 협녀를 많이 알고 있소."홍엽은 손으로 그의 목을 움켜잡으며 소리쳤다."알고 있는 아가씨가 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경성으로 돌아가자마자, 당장 소개해 주시게!"냉정언은 웃으며 그의 손목을 옆으로 밀어냈다."중매 값이 워낙 비싸서. 십만 냥 아니면 쉽게 안 나서오.""돈이 대수요?"홍엽이 교활하게 웃으며 말했다."우린 지금 한집에 살고 있소. 그러니 자네가 돈을 어디에 숨겼는지, 다 알고 있네. 그동안 꽤 많이 챙겼으니, 돌아가서 돈은 두둑이 주겠네."그 말에 냉정언이 깜짝 놀랐다."내 돈을 노리고 있었소? 진짜 도둑을 집에 들였군! 늙어서 쓸 돈이네, 그 돈을 혼사에 쓸 생각은 하지 마시오!""명여가 우리를 챙길 테니, 그렇게 쩨쩨하게 굴지 마시오."홍엽이 새침하게 말했다."나도 돈이 많소. 다만 남의 돈을 쓰는 게 훨씬 재밌을 뿐이네."냉정언이 숨을 들이쉬었다."안 되겠네. 경성에 돌아가자마자 자네를 쫓아내야겠소."홍엽이 말했다."쫓아낼 수 있으면 쫓아내 보시게. 게다가 자네가 나를 청할 때, 뭐라고 했는가? 얼마든지 살아도 된다고 했잖소. 이제 와서 후회하는 것이오?""이야, 홍엽, 어찌 이리 뻔뻔스러워진 것이오?""뻔뻔하지 않으면, 어찌 당신 집에서 이렇게 공으로 먹고살 수 있겠나?"홍엽은 크게 웃으며 그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수보, 신을 모시는 건 쉬워도 보내는 건 어렵다고 하잖소. 이미 집안에 들어갔으니, 쫓아내기는 힘드네. 후회해도 소용없소. 수보의 등골 빼먹다 죽을 것이오. 관에 수의까지 얻어 쓸 생각이라, 죽으면 자네가 장례식까지 마련해줘야 하네."수보는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애써 이를 악물며 말했다."진짜 뻔뻔하오!"홍엽은 박장대소했다.멀리 복도 끝에
“예, 그립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놀고 싶기도 합니다.”그는 말하다가, 갑자기 신이 난듯 몸을 들썩이며 말을 이어갔다.“여긴 정말 재미있습니다. 아홉째와 나가면 큰 산도 있고, 꽃도, 나무도 많습니다. 물고기도 많고, 사람도 많고, 뭐든지 엄청 많았습니다.”우문호는 웃으며, 못내 안쓰러움을 느꼈다. 예전에 그를 궁 안에 가두고, 거의 밖으로 데리고 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 그를 데리고 나가는 것도 신경 쓰였다.“이곳이 마음에 들면, 좀 더 오래 있어도 된다.”우문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예, 정말 좋습니다. 다만, 형님과 형수님이 그리웠습니다. 이렇게 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여덟째는 흥이 오른 상태로 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어서 들어가시지요! 아홉째가 형님이 내일 오신다고 맛있는 음식을 많이 준비했습니다.” 그는 뒤돌아 원경릉에게 외쳤다.“형수님, 빨리 따라오십시오. 맛있는 거 많습니다.”미색은 웃으며 꾸짖었다.“이 무심한 녀석, 다섯째 형수님만 챙기고, 여섯 형수가 배고픈지는 묻지도 않는 것이냐?” 여덟째는 그제야 미색을 본 듯,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여섯째 형수님도 오셨습니까? 여섯째 형님도 오신 것입니까? 와, 너무 좋습니다!”“질투하다니?”원경릉은 미색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미소를 지었다.“여덟째는 너보다 나를 더 좋아하는 것이다.”“아유, 참!”미색은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여덟째는 바로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항상 그림과 책자를 선물하는 여섯째 형수님도 좋아했기 때문이다.그는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그... 그럼 같이 드시지요. 음식 많습니다.”“장난이다. 난 질투 안 해.”미색은 기쁘게 말했다.여덟째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고, 다들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원경릉이 만아에게 말했다.“정말 이곳에서 즐겁게 지내고 있구나. 예전보다 훨씬 활발해졌고, 말도 많이 하네. 이 모든 게 아홉째 덕분이다.”만아는 웃으며 말했다.“예, 둘이 시간이 날 때마다 밖으로 나가, 더
원경릉은 발끝을 들어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우문호는 그런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원 선생, 행복하오?”“행복하오.”“하하하. 지금이 아닌, 나와 함께했던 모든 날이 행복했냐고 물어보는 것이오.”“모든 순간이 당연히 행복하고, 기쁘오!”원경릉은 스스로를 자조하듯 웃었다.“나 같은 집순이가 이렇게 결혼생활이 행복할 줄 누가 알았겠소?”한때 그녀는 자신이 평생 결혼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고, 사랑 없는 삶도 부족함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그녀는 사랑을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었지만, 사랑은 사실 정말로 중요했다.산꼭대기에 앉아, 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었지만,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의 풍경을 눈에, 그리고 마음에 깊이 새기고 싶었다.그리고 함께 늙어간 후, 다시 천천히 되새기고 싶었다.영산에서 내려온 후, 그들은 다시 여정을 이어나갔다. 이번 목적지는 바로 남강이었다.명절이 지난 뒤, 아홉째는 여덟째를 데리고 먼저 남강으로 돌아갔다. 다들 그가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남강 땅은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발을 디딘 건, 정화를 구하러 갔을 때였다.남강으로 가는 내내 홍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냉정언이 물었다.“남강에 가면, 못난이를 만날 것이오?”“만나야지.”홍엽이 답했다.“물론 만나야지!”못난이는 오랜 시간 그와 함께했던 사람이니, 만나야 했다. 못난이가 종종 편지를 보내오긴 했지만, 자기 상황은 거의 말하지 않았다.반면 아홉째는 편지에서 북강의 소식을 자주 전해주었다.지금의 남강은 어느 정도 통일되어 있었고, 북강과 남강도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익 문제로 양측의 왕래가 더욱 빈번해졌다.아홉째는 편지에서 못난이가 북강의 민심을 얻었고, 성격도 예전보다 훨씬 밝아져,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하다고 전했다.홍엽의 마음엔 기대와 기쁨이 섞여 있었다. 그도 지금 잘 지내고 있으니, 못난이도 잘 지내길 바랐다.우문호는 남강에서 돌아온 후, 변방으로 갈
그 일을 떠올리자, 꿈에서 본 일이라 그런지 마치 얼마 전에 있었던 일처럼 느껴졌다.그때 그들은 죽을 만큼 힘든 소년들이었는데, 지금은 한없이 한가한 노인이 되었다.세월은 덧없이 흘러갔고, 그동안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잃었다.무상황은 자신의 황후였던 소봉을 떠올렸다.그들은 줄곧 전형적인 황제와 황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나라를 다스렸고, 그녀는 후궁을 다스렸다. 비록 그가 그녀를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많은 애정을 주지도 않았다.그렇게 평범하게 평생을 함께했지만, 그녀가 떠나는 날, 그는 마음속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간 듯한 슬픔을 느꼈다.평생 함께했던 사람이 자신보다 먼저 떠날 거라 생각하지 못했기에 더욱 아팠다.세 사람은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있다, 다시 길을 나섰다.유아독존과 관련된 일이 생각보다 커졌지만, 모든 소란은 결국 가라앉게 될 것이다. 모든 소문도 점점 사그라들기 마련이니, 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세 사람이 여행하는 영상이 점점 유명해지면서, 유아독존은 더 심하게 비난을 받았다.현실에서 함부로 욕설을 내뱉으면 얻어맞을 수도 있지만, 인터넷에서는 당당한 명분이 있었기에 악성 댓글을 다는 자들은 마음껏 욕을 퍼부었다.그리고 어느 날, 추 어르신이 오래도록 인터넷의 댓글을 훑어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는 이내 해가 지는 장면을 찍어 짧은 영상을 올렸다. 그리고 영상에 한마디만 덧붙였다.“분쟁 없이, 오직 평화만 있기를.”그는 모든 다툼이 끝나길 바랐고, 누군가를 벼랑 끝으로 몰지 않기를 바랐다. 단지 말로만 승부를 겨루는 사람은 그들의 적이 아니기 때문이다.음... 무엇보다 적이 될 자격도 없었다!영상이 올라간 지 이틀 뒤, 유아독존은 마침내 사과 영상을 올렸다. 그는 질투와 시기로 무술을 모독한 것을 사죄했고,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직접 그들의 계정을 태그해 진심으로 사과했다.진심 어린 사과는 항상 용서를 가져오는 법이다. 그리고 악성 댓글을 달던 사람들도 마침내 욕설을 멈췄다.
삼대 거두는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일어났고, 숙취에서 깨어나니, 이미 날이 밝아져 있었다. 그들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아, 눈앞의 모든 것이 몽롱해 오늘이 무슨 날인지조차 모를 정도였다.태양이 서서히 떠오르며 하늘에 떠 있는 주황빛 구름은 점점 짙은 금빛으로 변했고, 금빛 가장자리에는 붉은색이 덧씌워져, 눈부시게 아름다웠다.소요공이 눈을 비비며 말했다."꿈을 꿨네."추 어르신과 무상황은 동시에 그를 바라보며 이구동성으로 물었다."무슨 꿈을 꿨는가?""꿈에서 숭이가 사내에게 속았는데, 우리가 직접 나서서 복수를 해줬다네."추 어르신과 무상황은 놀라서 동시에 숨을 들이켜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귀신이 곡할 노릇이네."말이 끝나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깜짝 놀라 외쳤다."자네도 꾼 것인가?""그렇네!""그렇네!""설마 우리 셋이 똑같은 꿈을 꾼 것이오?"소요공도 깜짝 놀랐다.그 일은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었고, 어떻게 된 일인지 가물가물할 정도로,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할 정도였는데, 꿈에서는 그 장면 장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그리고, 이 꿈은 당시 엄청난 부담을 받고 있던 그들에게 정말 훌륭한 감정 해소가 되었다. 그들은 모든 고통과 억울함, 스트레스를 주먹질로 시원하게 풀어냈다.한편, 무상황은 자신이 황후를 소홀히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때 무슨 상황이었는지 기억하는가?"추 어르신이 흥분한 듯 말했다."물론 기억은 나네. 당시엔 소봉이가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적성루 사람들을 많이 그리워했네. 게다가 나도 자네들과 어울리느라 바빠서 황후를 소홀히 했네. 그래서 적성루 상궁과 숭이를 궁으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게 했지."사실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꿈속에서 다시 겪은 덕분에 자세히 생각났다.그때 어서방의 회의가 끝나고, 소복이 무심히 물었다."폐하, 황후 마마를 오랫동안 못 뵙지 않으셨습니까?"그는 소복의 말이 소봉을 보러 가자는 암시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