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왕비?” 고지가 원경릉이 들어온 것을 아는 듯 옷매무새를 다듬었다.원경릉은 고지가 태자비가 아닌 초왕비라고 하자, 고지가 소식을 들을 수 없는 아주 폐쇄적인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원경릉이 자리에 앉자 만아가 다바오를 데리고 와서 고지 가까운 곳에 두고 그녀를 경계하게 했다. 문이 닫히고 다바오의 소리가 들리자 고지는 몹시 불안한 듯했다.“초왕비, 지금 뭐 하려고 그러는 겁니까?”“긴장 말고. 앉게.”고지는 두 손으로 엉덩이 뒤를 더듬거리더니 의자를 끌어 앉았다. 그녀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허리를 곧게 폈고, 뭔지 모르게 당당한 입꼬리를 보였다.“네 뱃속에 있는 아이의 부친이 누구냐?” 원경릉이 물었다.고지는 예상했다는 듯 담담하게 “정후.”라고 말했다.“고지, 네 속셈을 내가 모를 줄 알고? 빨리 진실을 말 해!” 고지는 손을 저으며 “진실을 말해도 초왕비께서 믿지 않으니 전 더이상 할 말이 없네요.”라고 말했다.“내 부친의 아이라면, 내가 하나만 더 묻겠네. 정말로 내 부친과 관계를 맺었다는 거야?”고지는 고개를 숙이더니 입꼬리 한쪽이 씩 올라갔다.“그걸 왜 나한테 묻죠? 부친께 직접 물어보시지요. 장담하건대 부친께서도 절대 부인 못할 겁니다.”“당연히 물어볼 거야. 한 가지만 묻자, 진짜 그 아이가 위왕의 아이가 아니라는 거지?” 원경릉이 분노한 얼굴로 고지를 보았다.“이제 와서 부끄러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판사판입니다. 만약 지금 뱃속의 아이가 위왕의 씨라면 난 백방으로 이 아이를 지키려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위왕의 아이가 아닙니다.”“진실을 말 해!”“초왕비, 사람들이 당신의 마음씨가 곱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내게 낙태약 하나만 주면 안 되겠소? 그렇지 않으면 초왕비가 낳은 세 아이와 내 아이를 같이 키워야 할 수도 있잖습니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요?”“쓸데없는 말 말고, 빨리 사실을 고해. 사실을 말한다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 남강으로 안전하게 보내줄 테니. 그리고 배가 그만큼이나 불렀는데,
고지의 말을 듣고 난 후 원경릉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방금 한 얘기는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거야. 내가 알고 싶은 건 네 뱃속의 아이가 어떻게 내 부친의 아이냐는 말이다.”“초왕비, 역지사지 알죠? 내 입장이 되어 잘 생각해 보세요. 나한테 있어서도 가장 좋은 방법은 진짜 위왕의 아이를 갖는 것이었겠죠? 하지만 위왕은 내게 손도 대지 않지, 안왕은 다그치지, 나도 별 방법이 없었습니다. 마침 정후가 안왕에게 벼슬을 할 수 있게 뒤를 봐달라고 부탁을 하러 왔고, 안왕은 계속해서 거절하다가 결국 나와 며칠 밤을 보내주면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했어요. 정후도 동의했고요. 바로 그때 이 애가 생긴 겁니다.”원경릉은 고지의 말을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만약 고지의 말이 사실이라면 원경릉은 정후의 머리를 열어 그 안에 똥이 들었는지 된장이 들었는지 확인이라도 해보고 싶었다.“근데 웃긴 건 이제부터입니다.”“……”“안왕이 그렇게 말해놓고 정후를 도와주지 않았거든요. 하하, 이런 말하기 뭐 하지만, 초왕비의 부친은 정말 멍청합니다.”고지는 말을 하면서 배를 잡고 웃었다. 눈이 없어서 그런지 그녀의 웃음은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원경릉은 그 모습을 보고 토를 할 뻔했다.“고지, 내가 너한테 물어볼 게 더 있으니, 여기서 하루 이틀 더 있거라. 내가 알아야 할 것들을 다 알게 되면 하인에게 널 명월암으로 데려다주라고 할게.”원경릉은 말을 마치고 바로 나왔다.밖으로 나온 그녀는 서일을 불러 정후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잠시 후, 원경릉은 서일을 시켜 정후를 고지가 있는 별채에 데리고 가게 했다. 원경릉은 별채 옆 방에서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엿들었다.서일은 정후에게 “대감, 여기서 잠시 기다리십시오. 태자비께서 곧 오실 겁니다.”라고 말했다.정후는 고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가 서일에게 알겠다고 하고 고개를 돌리자 두 눈이 없는 거지꼴을 한 여인이 앞에 보였다. “대감, 안녕하셨지요?”정후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지를
“남자들은 이게 문제라니까? 그러니까 아랫도리 간수를 잘했어야지.” 고지는 분노했다.정후는 당장이라도 고지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그녀의 모습이 너무 흉측해서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품속에서 은표 한 장을 꺼내 고지의 손에 쥐어두고는 낮은 목소리로 화를 냈다.“빨리 나가! 그리고 다시는 본후의 딸을 찾아오지 말거라. 이 은표면 네가 도성을 떠나 어디든 가서 살기에 충분할 거야. 그리고 본후와 있었던 일은 죽을 때까지 입 밖으로 꺼낼 생각 하지 마!”“그러죠!”고지는 은표를 자신의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꿈쩍도 않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순간 원경릉이 별채 문을 열어젖혔고, 그 뒤에 사식이가 즉시 문을 닫았다. 정후는 화가 잔뜩 난 원경릉을 보자 놀라서 덜덜 떨었다. “태자비, 아직 산달인데, 바람을 쐬면 어쩝니까……”정후는 애써 태연한 척 원경릉을 걱정했다.하지만 원경릉은 대답도 하지 않고 그를 죽일 기세로 노려보았다.“너…… 괜찮아? 누가 태자비를 화나게 한 것이냐?” 정후가 몸을 잔뜩 움츠리고 말했다.“잡소리 집어치우고,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 지나 알아봐요.” 원경릉은 분노를 삭이고 최대한 이성적으로 말했다. “뭘 해결해?”정후는 끝까지 발뺌했다.“저 여자 뱃속에 당신 새끼.”원경릉은 손가락으로 고지의 배를 가리켰다.“이 여자가 누군데? 난 이 여자를 몰라!” 고지는 정후의 말을 듣고 배꼽을 잡고 웃었다.“뭘 웃어? 빨리 안 꺼져? 어디 거지 같은 게 들어와서는 간도 크지!”정후가 소리를 질렀다.“부친, 아직도 저 여자가 누구인지 모르겠습니까? 제가 직접 소개라도 해드려야 아시겠어요?”“……”“저 여자 이름은 고지, 위왕의 애첩이었죠. 그녀가 위왕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고 태후께서도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태어난 아이가 위왕을 하나도 닮지 않고 부친을 닮았다면, 일이 어떻게 될까요?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고 참 재밌죠?”정후는 원경릉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다
“애가 떨어지지 않으니 어쩔 수 없죠. 낳자마자 목을 졸라 죽이는 수밖에.”고지는 담담하게 원경릉에게 말했다.“그래, 목 졸라 죽이면 아무도 모를 거야.” 정후도 맞장구를 쳤다. 정후의 말을 들은 원경릉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정후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화를 참지 못하고 탁자 위에 담긴 물 잔을 들어 정후의 얼굴에 뿌렸다.“어떻게 남자로서 책임감이 눈곱만큼도 없습니까? 조부께서 부친께 후작 지위를 물려주신 걸 감사하며 열심히 노력도 안 하고, 딸들을 팔아가며 기생충처럼 살다가 이제는 딸들 다 팔고, 남은 건 몸뚱이 하나뿐이라 몸도 파신 겁니까? 벌린 일에 책임을 져야지, 애를 죽여요? 지금 그게 사람 입에서 나올 말입니까?”정후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아이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원경릉이 너무 사납게 몰아세우니 그녀의 화가 풀릴 때까지만 비위를 맞춰주자는 심산이었다. 고지는 정후가 원경릉에게 찍소리도 못하자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원경릉은 고지의 섬뜩한 웃음소리에 소름이 돋았다.“지금 웃음이 나와? 솔직히 말해서 그 아이가 부친의 아이라는 것도 확실하지 않잖아. 설사 부친의 아이가 맞다고 해도 아이가 혼자서 가질 수 있는 거야? 모두 남자 탓이고 너는 잘못한 게 없어? 정화군주가 말하길 너는 명월암에 온 뒤로 계속 그 아이를 없애려고 했다면서! 사람이 어쩜 그렇게 잔인해! 백방으로 애를 가지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용가치가 없어지니까 바로 버려?”“초왕비, 고귀한 척 우쭐대는 것은 여전하시군요. 그래요, 내가 위왕을 꼬셔서 위왕비를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근데 그걸 초왕비가 뭐라고 하면 안 되죠. 초왕이랑 어떻게 혼인하게 됐는지 하늘을 우러러 초왕비는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습니까? 초왕비의 수작에 넘어간 초왕은 결국 초왕비를 사랑하게 됐고, 위왕은 그렇지 못했다는 걸 제외하면 우리 둘이 다를 게 뭐 있죠?”“난 사람을 해치지 않아!
정후는 자신이 실언은 했다는 걸 깨닫고 입을 막으며 “말이 헛나왔구나.”라고 했다.“양심이 있으면 지금까지 벌인 나쁜 짓들을 털어놓으세요.” 원경릉이 차갑게 말했다.정후는 원경릉을 보며 인상을 팍 썼다.“네가 지금 태자비라고 나한테 이러는 모양인데, 넌 태자비이기 전에 내 딸이고, 난 네 아버지다! 그리고 내가 한 일은 모두 정후부를 위한 것인데 왜 나만 가지고 뭐라고 하는 거야? 애당초 너도 태자에게 시집가려고 판을 짰으면서, 넌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아버지한테 훈수 질이냐?”원경릉은 상처가 저릿할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그녀는 정후를 보면서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멍청하면서도 악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태상황이 하사한 어장(禦杖)이 떠올랐다. 그녀는 소매 주머니에서 어장을 꺼냈다.“솔직하게 털어놓든지 아님…… 아시지요?” 원경릉이 어장으로 탁자를 툭툭 쳤다.“원경릉, 너 미쳤어? 이제 패륜을 저지르겠다는 거야?” 정후가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쳤다.원경릉은 귀가 간지럽다는 듯 어장으로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상부인에 대해 말해봐요. 그 사람하고 부친이랑 무슨 관계죠?”정후는 원경릉의 무서운 눈빛에 입술을 깨물며 어장을 힐끔 쳐다보았다.“상부인은 죽은 순의장군(順義將軍)의 부인이다.”순의장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인데……‘설마…… 아니겠자.’하지만 정후가 아무리 쓰레기 같다고 해도, 죽은 남편이 있는 여인을 건드리지는 않았을 것이다.“상부인의 일은 너만 알고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말해서는 안 돼. 상부인이 패방을 내가 무너뜨렸다…… 이걸 다른 사람이 안다면 난 죽은 목숨이야!”원경릉은 그 말을 듣고 호흡곤란으로 기절할 것만 같았다.정후가 말한 패방은 정결패방이다. 정결패방은 남편이 죽고도 재혼을 하지 않거나 남편을 따라 죽었을 경우에 관청에서 하사하는 패방이다.원경릉은 현시대가 여성에게 불공평한 시대이기에 이를 욕할 수는 없었다.역사에 따르면 패방을 하사 받고 순결을 지키지 않
“그리고는…… 없어.” 정후는 말을 아꼈다.원경릉은 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구심단(救心丹)을 한 알 삼켰다.“아니, 거짓말은 그만하세요. 지금이라도 불미스러운 관계를 맺은 여인들이 더 있으면 빨리 말해요. 약까지 먹은 마당에 화를 낸다고 죽기라도 하겠어요?”정후는 구심단을 먹은 원경릉을 보고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사실대로 말을 해도, 저 약을 먹었으니 얘가 죽지는 않겠구나.’그는 지금까지 유부녀 약 열 명 정도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고 말했고, 그중에 두 여인은 조정의 관리 본처들이었다.그 말을 들은 원경릉은 그 자리에서 눈이 뒤집어졌다.‘여자들도 미쳤나? 저……원팔룡(元八隆)을 왜 좋아하는 거지?’원경릉은 잠시 정후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마흔이 넘었는데도 몸이나 얼굴이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고, 눈도 깊은 것이 유부녀들이 넘어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가 술과 담배에 찌들었지만, 본판은 여전히 남아있었다.“근 몇 년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다. 돈도 없고, 벼슬도 못하고 있는 마당에 어쩌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정후부가 어떻게 먹고살겠느냐는 말이다! 나도 여자들한테 몸을 주는 일을 하고 싶었겠느냐? 나도 싫었어! 근데 어쩌겠냐고! 수치스러워도 먹고는 살아야지!”정후가 열변을 토했다.정후는 딸 앞에서 이런 더러운 과거를 털어놓아야 한다는 것이 수치스럽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두 가지 선택이 있으니 잘 생각하고 고르세요. 첫 번째 죄를 인정하고 벌을 받는다. 두 번째 처자식을 데리고 경성을 떠난다. 부친 때문에 잘 살고 있는 오라버니의 앞길도 막지 말고요.”원경릉이 말했다.“사실 두 가지 모두 필요 없어. 네가 입만 다물고 있어 준다면, 아무도 알지 못한다. 두 선택 모두 명예롭지 못하잖아?”“정말 끝까지 이렇게 구질구질할 겁니까? 부친과 고지 사이에 일어난 일을 안왕이 알고 있잖아요! 안왕이 그런 큰 패를 쥐고 있으면서 가만히 있을 거라고 믿는 겁니까? 부친은 바봅니까?”“안왕도 이제 쓸모없어. 무슨 힘이 있다고……
원경릉은 진심으로 희상궁이 자신의 어머니였으면 했다. 사실 그녀는 친정집에 별 감정이 없기에 이런 생각은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다.정후부에는 조모를 제외하고 어른다운 어른은 하나도 없다. 원경릉이 아이를 셋을 낳았는데도 불구하고 모친 황씨는 출산한 딸을 찾아와 걱정은커녕 주씨와 싸운 얘기만 늘어놓고는 갔다. 그렇다고 시어머니에게 정을 붙일 수도 없다. 현비는 차갑고 매정하다. 아마 현비는 원경릉이 죽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희상궁은 다르다. 매일 밤 원경릉의 안부를 물었고, 아픈 원경릉을 보며 가슴 아파해주었다. 힘든 시기에 누군가가 내 옆에 같이 있어주고 슬퍼해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희상궁은 원경릉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기분 나쁜 일은 다 잊어버리고, 태자비의 인생을 살아요. 잠을 자는 동안은 아무 걱정 마세요. 몸 상하면 안 됩니다.”“예, 알겠습니다.”원경릉은 뒤숭숭한 마음을 뒤로하고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 그녀는 한 시간가량 잠에 들었다가 깼다. 눈을 뜨니 다섯째가 옆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매우 집중한 표정으로 책을 한 장씩 넘겼고, 원경릉은 그의 모습이 낯선 듯 숨죽이고 그를 쳐다보았다.원경릉이 가만 보니 그가 읽고 있는 책은 병서(兵書)였다. 그는 완전한 무술인이기에, 병서를 제외하고 저렇게 집중하고 읽을 만한 책은 없다. 우문호가 책을 뚫어져라 보다가 책장을 쓱 넘기며 “그렇게 빤히 나를 보고 있는 이유가 뭐야?”라고 물었다.원경릉은 웃으며 그의 옆에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옆에 눈이라도 붙어있는 거 아니야? 나 일어난 거 어떻게 알았어?”“숨 쉬는 소리가 달라. 깨어났을 때랑 잘 때.” 그는 책을 내려놓고 “배고파? 상처는 어때?”라고 물었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배고프지 않고, 아프지도 않아. 내가 잠깐 할 얘기가 있는데, 책은 나중에 보고 얘기 좀 할까?”원경릉은 그의 옆에 바싹 달라붙어 그의 손에 깍지를 꼈다.“고지와 장
“상부인뿐 아니라 조정의 관리들의 본처들을 포함한 십여 명정도의 여인들과도 정을 통했다고 해……”원경릉의 말을 듣고 우문호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경릉아 장인께서 미치지 않고서는 그럴 수가 있느냐? 발정이 나지 않고서야 사람이 어떻게 그래?”원경릉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우문호는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보며 “음…… 장인을 멀리 보내는 건 어때? 이 일 때문에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다른 곳으로 보내버리는 거야.”라고 말했다.“나도 그렇게 생각해.” 원경릉이 말했다.우문호는 생각하면 할수록 정후가 이해되지 않았다.“근데 장인께서는 고지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하셔?”“인정하기 싫겠지. 근데 고지가 애를 낳으면 바로 목을 졸라 죽일 거라고 하더라.”원경릉은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부끄러워 한숨을 내쉬었다.“출세가 뭐라고 사람을 그 지경까지 만드는 걸까? 사람으로서 하면 안 되는 말을 하시네.”“악질이야. 강한 사람에게 약하고 약한 사람에겐 강한 그런 악질.”우문호는 아무래도 자신의 장인이기에 원경릉이 악질이라고 하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장인께서는 간도 크시다. 그렇게 많은 여인들과 정을 통하고도 안 들킬 줄 알았다는 게 신기하네.”“에휴, 그러게 말이야. 난 이 일 때문에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아. 정 안되면 그를 경성 밖으로 보내버리고 죽은 듯 조용히 살라고 할까 봐 아니면 저기 어디 시골로 보내버리든가…… 아니면 그냥 콱 죽여버리 든가.”우문호는 정후와 원경릉을 보며 기가 찼다. 정후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을 죽일 궁리만 하고 있고, 원경릉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하고 있다. 원씨 부녀는 참…… 무섭네.“고지가 장인과 그런 짓을 한 건 넷째 형님이 고지의 뒤를 봐주었기 때문이야. 이 말은 즉 넷째 형님이 장인이 저지른 일을 다 알고 있다는 거고. 상부인과 다른 여인들의 일은 넷째 형님이 알고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모두
우문호 일행은 강북부로 향하는 내내 북방의 풍경과 풍속을 경험했다. 그로 인해 속도는 매우 느리긴 했지만 말이다.그날 밤, 우문호는 갑자기 악몽에서 깨어나 온몸에 땀을 흘리며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그러자 원경릉이 벌떡 일어나 그를 껴안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오? 악몽을 꾼 것이오?”우문호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아직 날씨가 덥지 않은 데다가 북방에 있어 오히려 날씨까지 쌀쌀했기에, 그는 아직도 악몽이 생각나는 듯, 창백한 표정을 지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꿈에서 셋째 형님이 피투성이인 채 죽어가고 있었소…”원경릉은 그저 꿈이라 생각하고 위로해 주려 했지만, 이내 우문호의 강한 감응 능력을 떠올렸다. 갑자기 나타난 이 꿈이 형제간의 영적 감응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우문호도 점점 불안한 생각에 빠졌다.“강북부가 비록 평온해 보여도 사실 북당에서 가장 복잡한 곳이오. 온갖 사람들이 섞여 있고, 북막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네. 게다가 셋째 형님도 무모한 사람이니, 진짜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지 걱정되오. 원 선생, 어서 빨리 가야겠소.”원경릉이 서둘러 옷을 입으며 말했다.“아니, 내가 먼저 가겠소. 정말 상처를 입었다면, 내가 가야지 도움이 되지 않겠소? 게다가 난 빨리 갈 수 있잖소.”“좋소. 그럼 먼저 가시오. 우리도 곧 출발하겠소.”우문호는 너무 생생한 꿈 탓에, 더 이상 천천히 갈 수 없었다.“사람을 불러야겠소.”원경릉은 재빨리 옷을 입은 후, 우문호에게 포옹하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먼저 가겠소.”“조심하시오.”우문호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 원경릉은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원경릉이 사라지자마자 우문호는 방 문을 두드리며, 출발하자고 소리쳤다.우문호의 소리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이 밤중에 출발이라니, 무슨 큰 일이 생긴 걸까?이때 수보가 겉옷을 걸치고 나오며, 우문호의 팔을 잡고 물었다.“무슨 일입니까?”우문호가 답했다.“나도 모르네. 하지만 셋째 형님에게 무슨 일
스무 명이 넘는 자 중 단 한 명만 생포하고 나머지는 전부 섬멸되었다.안왕은 재빨리 위왕의 혈을 눌러 지혈한 후, 중상을 입은 위왕을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먼저 의원을 찾으러 간 사람이 있었기에, 의원은 이미 저택에 도착해 있었다. 이때 안왕이 피투성이가 된 채, 의원의 옷깃을 움켜잡았다.“살리시게, 살려야 하네. 꼭 살아야 하네.”의원이 바로 약상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진정하십시오.”의원이 위왕의 옷을 가위로 자르자마자, 상처가 바로 드러났다. 다행히도 먼저 지혈한 덕분에 저택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하지만 심각한 부상 상태와, 깊은 복부의 자상 때문에 장기를 다친 것으로 판단한 의원은 간단한 처리를 마친 후, 안왕에게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소인의 의술이 부족한 탓에, 치료를 감당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경성에서 다치셨다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강북부는 의료가 낙후된 지역이다. 비록 혜민서를 설립한 이후 의사를 집중적으로 양성하긴 했지만, 경성에 비하면 여전히 많이 부족했다.안왕이 숨을 헐떡이며 눈에 핏줄을 세우고 소리쳤다.“중상을 입었는데 어찌 도성으로 돌아가란 말인가? 긴 여정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은가?”의원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그것도 참 문제입니다. 황실 친왕이 자금단을 가지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혹시 저택에 있습니까?”“없네!”안왕은 위왕의 호흡이 점점 미약해지는 모습을 보며 절망감에 휩싸여 털썩 주저앉았다.“내가 갖고 있던 자금단은 이미 먹은 지 오래된 것이네.”“경성… 경성으로…”의식을 잃은 위왕은 그저 경성이라는 말만 중얼거렸다.안왕은 눈물을 닦으며 무릎을 꿇었다.“형님,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의원이 약을 썼으니, 황후가 오실 때까지 며칠만 버티십시오.”심각한 상황이니, 경성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돌아가려면 최소 일주일 이상은 걸리지만, 황후는 아마 사흘 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성으로……”위왕은 의식을 잃기 전까지 계속해서 경성을 찾았다. 그곳은 그가 너무
위왕은 마음속에 또 하나의 걱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다섯째가 곧 강북부에 오는 것이었다. 비록 이 일은 소문내지 않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순행했으니, 소문이 새어나가게 마련이다.설령 그가 강북부에 온다고 밝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의 최종 목적지가 강북부라는 것은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북막인들이 다섯째에게 해를 가하려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었다.아무래도 단 한 순간도 북막인의 야심은 멈춘 적 없었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는 방심하지 않고, 허점을 찾아내겠다는 결심을 다지며 이들을 감시했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 어디까지나 본인의 추측일 뿐이기에, 그는 이 일을 아직 넷째에게 말하지 않았다.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그들이 진짜 금나라 상인이라는 것이 밝혀지기라도 한다면, 두 나라의 사이만 영향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무장이지만, 외교적인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주 작은 불씨라도, 마음먹은 자가 부추기면 걷잡을 수 없는 큰불이 될 수 있는 법이기에,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감시 끝에 마침내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 처음엔 열댓 명 정도였던 이들 무리는 이틀 사이 스무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새로 온 자들은 앞선 사람들과는 다르게, 군인이라기보다는 강호 인사의 분위기를 풍겼으며, 무공 또한 약하지 않아 보였다.위왕은 경계심을 품고, 밤새 직접 사람들을 이끌어 조사에 나섰다.앞서 만났던 금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질문에 순순히 응했지만, 새로 온 강호인들은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위왕의 질문에도 그저 시큰둥한 태도만 보이며 북당인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위왕은 건방진 그들의 태도에, 몇 마디 호통을 쳤고, 그 모습에 강호인들은 참지 못하고 바로 위왕에게 손을 쓰려고 했다.위왕은 조사하기 위해 온 터라, 데리고 온 부하도 단 몇 명 뿐이었기에, 상대가 일반적인 조사에도 이렇게 쉽게 공격하려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앞서 온 금나라인들이 말리려 했지만, 그들이 손을 쓰자, 사태가 수습되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남강에 며칠 머무는 동안, 아홉째와 함께 남강의 풍경을 둘러보고, 북강에도 다녀왔다.지금 북강 백성들은 조정에 대한 소속감이 아주 강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남강을 다스린 정책이 정말 훌륭했기에, 백성들 모두 좋은 날을 보낼 수 있었기에, 자연스레 황제에 대한 존경심도 깊어진 것이었다.황제와 황후가 지나가는 곳마다 백성들은 길가에 모여서 열렬히 환영했다.그들은 이번 순행 내내 오계부에서 신분을 밝힌 것 외에는 항상 미복으로 다녔다. 하지만 남강에서 우문호는 황제의 신분을 드러냈다.우문호는 백성들의 신뢰와 경외심에서 큰 성취감을 느꼈고, 매우 기뻤다. 그는 줄곧 원경릉의 손을 잡고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과거 북강은 방어를 위해 무술 함정이 많았지만, 이제는 모두 제거되었다. 그리고 많은 백성이 산 아래 평원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마을을 이루었다. 정화를 구하러 왔을 때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기쁜 마음과 함께 우문호는 감사함도 느꼈다. 이것은 결코 그 혼자만의 공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남강을 떠나야 하는 날이 다가오자, 원경릉은 만아와 여덟째를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곧 변성으로 가야 했기에, 아쉬움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잠시였다. 남강을 벗어나자마자, 그녀는 아이들과 만날 생각에 들뜨기 시작했다."원 선생, 그들에게 말했소?"길에서 우문호가 물었다."아니, 몰래 가는 것이오."원경릉은 웃으며 말했다."교활하구먼. 그래도 만두가 이미 알려줬을 수도 있을 텐데."지금은 경단과 찰떡, 그리고 계란이 셋만 그곳에 있었다."셋이 다섯 개 성을 다스린다니, 분명히 힘들 것이오."원경릉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렇소.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졌네. 이제는 태평해 보이니."우문호도 아이들이 안쓰러웠다."이번에 가서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충분히 쉬게 해줘야 하오."사실 성하나를 다스리는 것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점 없이, 매우 힘든 일이었다.한편, 강북부에서는 최근 강북부 무구산 주변에 신비한 상단
그러자 홍엽이 그를 바라보며 멈칫했다."자네가 중매를 서겠다고?""안 되오?""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자기 혼사도 해결 못 하는데 중매는 무슨. 난 못 믿네!"냉정언이 어깨를 으쓱였다."못 믿으면 말고. 이래 봬도 내가 명문가 아가씨나 협녀를 많이 알고 있소."홍엽은 손으로 그의 목을 움켜잡으며 소리쳤다."알고 있는 아가씨가 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경성으로 돌아가자마자, 당장 소개해 주시게!"냉정언은 웃으며 그의 손목을 옆으로 밀어냈다."중매 값이 워낙 비싸서. 십만 냥 아니면 쉽게 안 나서오.""돈이 대수요?"홍엽이 교활하게 웃으며 말했다."우린 지금 한집에 살고 있소. 그러니 자네가 돈을 어디에 숨겼는지, 다 알고 있네. 그동안 꽤 많이 챙겼으니, 돌아가서 돈은 두둑이 주겠네."그 말에 냉정언이 깜짝 놀랐다."내 돈을 노리고 있었소? 진짜 도둑을 집에 들였군! 늙어서 쓸 돈이네, 그 돈을 혼사에 쓸 생각은 하지 마시오!""명여가 우리를 챙길 테니, 그렇게 쩨쩨하게 굴지 마시오."홍엽이 새침하게 말했다."나도 돈이 많소. 다만 남의 돈을 쓰는 게 훨씬 재밌을 뿐이네."냉정언이 숨을 들이쉬었다."안 되겠네. 경성에 돌아가자마자 자네를 쫓아내야겠소."홍엽이 말했다."쫓아낼 수 있으면 쫓아내 보시게. 게다가 자네가 나를 청할 때, 뭐라고 했는가? 얼마든지 살아도 된다고 했잖소. 이제 와서 후회하는 것이오?""이야, 홍엽, 어찌 이리 뻔뻔스러워진 것이오?""뻔뻔하지 않으면, 어찌 당신 집에서 이렇게 공으로 먹고살 수 있겠나?"홍엽은 크게 웃으며 그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수보, 신을 모시는 건 쉬워도 보내는 건 어렵다고 하잖소. 이미 집안에 들어갔으니, 쫓아내기는 힘드네. 후회해도 소용없소. 수보의 등골 빼먹다 죽을 것이오. 관에 수의까지 얻어 쓸 생각이라, 죽으면 자네가 장례식까지 마련해줘야 하네."수보는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애써 이를 악물며 말했다."진짜 뻔뻔하오!"홍엽은 박장대소했다.멀리 복도 끝에
“예, 그립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놀고 싶기도 합니다.”그는 말하다가, 갑자기 신이 난듯 몸을 들썩이며 말을 이어갔다.“여긴 정말 재미있습니다. 아홉째와 나가면 큰 산도 있고, 꽃도, 나무도 많습니다. 물고기도 많고, 사람도 많고, 뭐든지 엄청 많았습니다.”우문호는 웃으며, 못내 안쓰러움을 느꼈다. 예전에 그를 궁 안에 가두고, 거의 밖으로 데리고 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 그를 데리고 나가는 것도 신경 쓰였다.“이곳이 마음에 들면, 좀 더 오래 있어도 된다.”우문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예, 정말 좋습니다. 다만, 형님과 형수님이 그리웠습니다. 이렇게 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여덟째는 흥이 오른 상태로 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어서 들어가시지요! 아홉째가 형님이 내일 오신다고 맛있는 음식을 많이 준비했습니다.” 그는 뒤돌아 원경릉에게 외쳤다.“형수님, 빨리 따라오십시오. 맛있는 거 많습니다.”미색은 웃으며 꾸짖었다.“이 무심한 녀석, 다섯째 형수님만 챙기고, 여섯 형수가 배고픈지는 묻지도 않는 것이냐?” 여덟째는 그제야 미색을 본 듯,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여섯째 형수님도 오셨습니까? 여섯째 형님도 오신 것입니까? 와, 너무 좋습니다!”“질투하다니?”원경릉은 미색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미소를 지었다.“여덟째는 너보다 나를 더 좋아하는 것이다.”“아유, 참!”미색은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여덟째는 바로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항상 그림과 책자를 선물하는 여섯째 형수님도 좋아했기 때문이다.그는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그... 그럼 같이 드시지요. 음식 많습니다.”“장난이다. 난 질투 안 해.”미색은 기쁘게 말했다.여덟째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고, 다들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원경릉이 만아에게 말했다.“정말 이곳에서 즐겁게 지내고 있구나. 예전보다 훨씬 활발해졌고, 말도 많이 하네. 이 모든 게 아홉째 덕분이다.”만아는 웃으며 말했다.“예, 둘이 시간이 날 때마다 밖으로 나가, 더
원경릉은 발끝을 들어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우문호는 그런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원 선생, 행복하오?”“행복하오.”“하하하. 지금이 아닌, 나와 함께했던 모든 날이 행복했냐고 물어보는 것이오.”“모든 순간이 당연히 행복하고, 기쁘오!”원경릉은 스스로를 자조하듯 웃었다.“나 같은 집순이가 이렇게 결혼생활이 행복할 줄 누가 알았겠소?”한때 그녀는 자신이 평생 결혼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고, 사랑 없는 삶도 부족함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그녀는 사랑을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었지만, 사랑은 사실 정말로 중요했다.산꼭대기에 앉아, 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었지만,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의 풍경을 눈에, 그리고 마음에 깊이 새기고 싶었다.그리고 함께 늙어간 후, 다시 천천히 되새기고 싶었다.영산에서 내려온 후, 그들은 다시 여정을 이어나갔다. 이번 목적지는 바로 남강이었다.명절이 지난 뒤, 아홉째는 여덟째를 데리고 먼저 남강으로 돌아갔다. 다들 그가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남강 땅은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발을 디딘 건, 정화를 구하러 갔을 때였다.남강으로 가는 내내 홍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냉정언이 물었다.“남강에 가면, 못난이를 만날 것이오?”“만나야지.”홍엽이 답했다.“물론 만나야지!”못난이는 오랜 시간 그와 함께했던 사람이니, 만나야 했다. 못난이가 종종 편지를 보내오긴 했지만, 자기 상황은 거의 말하지 않았다.반면 아홉째는 편지에서 북강의 소식을 자주 전해주었다.지금의 남강은 어느 정도 통일되어 있었고, 북강과 남강도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익 문제로 양측의 왕래가 더욱 빈번해졌다.아홉째는 편지에서 못난이가 북강의 민심을 얻었고, 성격도 예전보다 훨씬 밝아져,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하다고 전했다.홍엽의 마음엔 기대와 기쁨이 섞여 있었다. 그도 지금 잘 지내고 있으니, 못난이도 잘 지내길 바랐다.우문호는 남강에서 돌아온 후, 변방으로 갈
그 일을 떠올리자, 꿈에서 본 일이라 그런지 마치 얼마 전에 있었던 일처럼 느껴졌다.그때 그들은 죽을 만큼 힘든 소년들이었는데, 지금은 한없이 한가한 노인이 되었다.세월은 덧없이 흘러갔고, 그동안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잃었다.무상황은 자신의 황후였던 소봉을 떠올렸다.그들은 줄곧 전형적인 황제와 황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나라를 다스렸고, 그녀는 후궁을 다스렸다. 비록 그가 그녀를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많은 애정을 주지도 않았다.그렇게 평범하게 평생을 함께했지만, 그녀가 떠나는 날, 그는 마음속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간 듯한 슬픔을 느꼈다.평생 함께했던 사람이 자신보다 먼저 떠날 거라 생각하지 못했기에 더욱 아팠다.세 사람은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있다, 다시 길을 나섰다.유아독존과 관련된 일이 생각보다 커졌지만, 모든 소란은 결국 가라앉게 될 것이다. 모든 소문도 점점 사그라들기 마련이니, 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세 사람이 여행하는 영상이 점점 유명해지면서, 유아독존은 더 심하게 비난을 받았다.현실에서 함부로 욕설을 내뱉으면 얻어맞을 수도 있지만, 인터넷에서는 당당한 명분이 있었기에 악성 댓글을 다는 자들은 마음껏 욕을 퍼부었다.그리고 어느 날, 추 어르신이 오래도록 인터넷의 댓글을 훑어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는 이내 해가 지는 장면을 찍어 짧은 영상을 올렸다. 그리고 영상에 한마디만 덧붙였다.“분쟁 없이, 오직 평화만 있기를.”그는 모든 다툼이 끝나길 바랐고, 누군가를 벼랑 끝으로 몰지 않기를 바랐다. 단지 말로만 승부를 겨루는 사람은 그들의 적이 아니기 때문이다.음... 무엇보다 적이 될 자격도 없었다!영상이 올라간 지 이틀 뒤, 유아독존은 마침내 사과 영상을 올렸다. 그는 질투와 시기로 무술을 모독한 것을 사죄했고,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직접 그들의 계정을 태그해 진심으로 사과했다.진심 어린 사과는 항상 용서를 가져오는 법이다. 그리고 악성 댓글을 달던 사람들도 마침내 욕설을 멈췄다.
삼대 거두는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일어났고, 숙취에서 깨어나니, 이미 날이 밝아져 있었다. 그들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아, 눈앞의 모든 것이 몽롱해 오늘이 무슨 날인지조차 모를 정도였다.태양이 서서히 떠오르며 하늘에 떠 있는 주황빛 구름은 점점 짙은 금빛으로 변했고, 금빛 가장자리에는 붉은색이 덧씌워져, 눈부시게 아름다웠다.소요공이 눈을 비비며 말했다."꿈을 꿨네."추 어르신과 무상황은 동시에 그를 바라보며 이구동성으로 물었다."무슨 꿈을 꿨는가?""꿈에서 숭이가 사내에게 속았는데, 우리가 직접 나서서 복수를 해줬다네."추 어르신과 무상황은 놀라서 동시에 숨을 들이켜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귀신이 곡할 노릇이네."말이 끝나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깜짝 놀라 외쳤다."자네도 꾼 것인가?""그렇네!""그렇네!""설마 우리 셋이 똑같은 꿈을 꾼 것이오?"소요공도 깜짝 놀랐다.그 일은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었고, 어떻게 된 일인지 가물가물할 정도로,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할 정도였는데, 꿈에서는 그 장면 장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그리고, 이 꿈은 당시 엄청난 부담을 받고 있던 그들에게 정말 훌륭한 감정 해소가 되었다. 그들은 모든 고통과 억울함, 스트레스를 주먹질로 시원하게 풀어냈다.한편, 무상황은 자신이 황후를 소홀히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때 무슨 상황이었는지 기억하는가?"추 어르신이 흥분한 듯 말했다."물론 기억은 나네. 당시엔 소봉이가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적성루 사람들을 많이 그리워했네. 게다가 나도 자네들과 어울리느라 바빠서 황후를 소홀히 했네. 그래서 적성루 상궁과 숭이를 궁으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게 했지."사실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꿈속에서 다시 겪은 덕분에 자세히 생각났다.그때 어서방의 회의가 끝나고, 소복이 무심히 물었다."폐하, 황후 마마를 오랫동안 못 뵙지 않으셨습니까?"그는 소복의 말이 소봉을 보러 가자는 암시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