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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Author: Priscilla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05 08:54:10

리나의 시점

한참 동안 그 벽에 바짝 몸을 붙이고 서 있었다.

사태의 윤곽이 드러날 때까지. 그들의 대화가 이제 막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이전부터 치밀하게 진행되어 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결단은 이미 내려졌고, 복수의 톱니바퀴는 돌기 시작했다.

데미안은 순식간에 에이든의 사업 계약 세 건을 파기해 버렸다. 그저 전화 한 통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조차 필요 없이 비서에게 이메일 한 통을 보낸 게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아벨은 서류 봉투를 쥐고 있었다. 두툼한 파일이었다. 은행 거래 내역, 사업 이력, 에이든이 여태껏 손을 잡았던 모든 이들의 정보까지. 아벨은 아침 식사를 마쳤다고 말하듯 무심하고 당연하게 그 사실을 입에 담았다.

헨리는 에이든에게 남은 마지막 파트너들을 추적하고 있었다.

조용히. 그리고 철저하게. 헨리가 늘 모든 일을 처리하는 방식 그대로.

그들은 내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심지어 내게 언질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움직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들의 여동생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리고 모리슨가에선 그 누구도 가문의 사람에게 상처 준 자를 그냥 묵과하지 않는 법이었으니까.

가슴에 M 자가 새겨진 가운을 입은 채 어두운 복도에 서서,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내 안의 한 부분은 당장 문을 밀어젖히고 들어가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더 처절하게, 더 빠르게 짓밟아달라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남자들의 지독한 파괴력이 두려웠다.

두 감정 모두 거짓이 아니었기에, 나는 그 혼란스러운 감정의 뭉치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지 못했다.

벽에서 몸을 떼어냈다. 주방에서 물을 챙겨 마셨다.

다시 방으로 올라갔지만, 새벽 4시가 다 될 때까지 잠에 들지 못했다.

오전 9시, 의사가 도착했다.

옷도 다 갈아입지 못한 상태였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자, 의료 가방을 든 50대 여성 한 분이 차분하고 전문적인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리나 아가씨. 아다에제 의사입니다. 데미안 님께서 오늘 아침 아가씨의 건강 상태를 진찰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눈을 깜빡였다. "어느 오빠요?"

"데미안 님이십니다."

그럼 그렇지.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그녀는 세심하고 정중하게, 내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며 진찰을 진행했다.

혈압, 철분 수치, 그리고 아이의 상태까지. 그녀가 상황의 전말을 미리 숙지하고 왔음이 느껴질 만큼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폈다.

진찰을 마친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기는 아주 건강합니다. 심장 소리도 힘차고요. 최근 며칠간 몸 고생이 심하셨을 텐데, 두 분 모두 놀라울 정도로 잘 견뎌내셨어요."

참았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놀라울 정도로요……." 내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녀가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훨씬 강한 분이십니다, 아가씨."

그녀가 떠난 후, 한참 동안 침대 모서리에 앉아 있었다.

손을 배 위에 얹었다. 아이는 무사했다. 그 거센 비와 차가운 보도블록, 병원 소동을 모두 겪고도, 아이는 무사히 견뎌내 주었다.

"벌써부터 독하네."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네 엄마를 닮아서."

햇살 아래 본 데미안의 서재는 밤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누군가 일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가문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장소처럼 보였다. 짙은 목재 가구,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 그리고 식탁만큼이나 거대한 책상 위에는 노트북과 전화기, 그리고 한가운데 놓인 서류 봉투 하나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들어가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책상 건너편 의자를 손짓으로 가리켰다.

의자에 앉았다.

그도 자리에 앉았다.

그가 서류 봉투를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그가 입을 뗐다. 늘 그래왔듯이.

데미안 모리슨이라는 남자는 평생 돌려 말하는 법을 배워본 적이 없을 터였다.

"모리슨 코퍼레이션은 이 나라에서 가장 거대한 민간 기업 제국 중 하나다. 부동산, 금융, 기술, 호텔·리조트 사업까지. 넌 모리슨가의 피를 타고난 순간부터 이 가문의 공동 소유주였다. 네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든 모르고 있었든 변함없는 진실이지." 그가 서류 한 장을 넘겼다. "이제 달라지는 건, 네가 정식으로 네 자리를 되찾는 것뿐이다."

가만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공동 대표이사(CEO)." 그가 말했다. "나와 함께."

헛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소리를 겨우 눌러 담았다. 그건…… 너무나 황당하고 현실감이 없었으니까.

나는 지난 6년 동안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았다. 에이든의 허락 없이는 개인 은행 계좌조차 만들 수 없는 집에서, 내가 구두를 닦아주던 남자에게 '무능하고 가치 없는 여자'라며 멸시당하던 6년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대표이사 자리를 내밀고 있었다.

"전 경영 경험이 전혀 없어요." 나는 말했다.

"너에게는 직관이 있다. 명석함도 있지. 그리고 무엇보다 네 뒤엔 이 가문이 있다." 그가 서류를 덮었다.

"경험은 배우면 된다. 하지만 타고난 자질은 가르칠 수 없는 법이지."

"데미안 오빠……."

"너 혼자 이 거대한 조직을 짊어지라는 게 아니다. 그저 처음부터 네 것이었던 권리를 되찾으라는 뜻이지."

그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윤곽, 차가운 쥐색 눈동자,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대해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사람 특유의 압도적인 정적.

지난밤 문틈 너머로 들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놈에게서 모든 걸 빼앗을 거다.*

감정의 동요도, 어떠한 과장도 없이 던져진 선언. 오직 사실만을 입에 담듯.

이 남자들은 위험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내 편이었다.

나 역시 그들의 일원이었고. 이것이 내 삶에 어떤 의미가 될지, 내게 무엇을 요구하고 나를 어떤 사람으로 변화시킬지 아직은 다 알 수 없었다.

지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나는 더 이상 타인에 의해 짓밟히고 휘둘리는 수동적인 삶을 살지 않겠다는 것.

"좋아요." 내가 말했다.

데미안의 표정에서 아주 미세한 변화가 일어났다. 눈을 깜빡였다면 놓쳤을 만큼 찰나의 변화였다.

그는 책상 서랍에 손을 넣어 두툼한 서류 한 뭉치를 꺼내 내 쪽으로 슬그머니 밀어주었다.

빼곡한 서류였다. 적어도 20장은 되어 보이는, 법률 용어로 가득 찬 문장들을 완벽히 이해하려면 일주일은 족히 걸릴 듯했다. 하지만 첫 페이지 맨 위에 적힌 문구만큼은 더없이 또렷했다.

‘모리슨 코퍼레이션’

‘임원 임명 계약서’

‘대표이사 리나 모리슨’

내 이름.

마치 처음부터 그자리에 서 새겨져 있었던 것처럼, 저 종이가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려왔다는 듯 정갈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그 문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 이름. 내 진짜 이름. 노먼이 아닌, 에이든의 아내나 아이를 못 낳는 여자 따위의 모욕적인 수식어가 붙지 않은 이름. 모리슨. 그리고 대표이사.

책상 위에 놓인 만년필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멈칫했다.

손끝이 종이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맴돌았다.

의자에 앉아 '좋아요'라고 말하는 것과, 이런 중대한 서류에 내 이름을 직접 새겨 넣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이것을 현실로 만드는 것. 공식적으로, 법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막강한 권력을 쥔 인물이 되는 것.

그 권력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 내야 하는 사람.

펜 끝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었다. 데미안이 나를 조용히 관조하고 있었다. 초조한 기색도, 읽어낼 수 있는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저 늘 그랬듯 특유의 무심한 눈빛으로, 마치 이미 몇 걸음 앞선 미래를 내다보며 현재가 따라오기를 느긋하게 기다리는 사람처럼.

"만약…… 제가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어쩌죠?"

생각보다 작고 약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즉시 답하지 않았다. 그 특유의 깊은 눈빛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나라는 사람을 단숨에 해체했다가 다시 조립해 내듯.

이내 그가 입을 열었다.

"천천히 하렴."

잠시 정적이 흘렀다.

"넌 이미 24년을 기다려왔으니까."

시선을 다시 서류 쪽으로 내렸다.

내 이름 석 자로.

나는 아직, 펜을 집어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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