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리나의 시점
한참 동안 그 벽에 바짝 몸을 붙이고 서 있었다. 사태의 윤곽이 드러날 때까지. 그들의 대화가 이제 막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이전부터 치밀하게 진행되어 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결단은 이미 내려졌고, 복수의 톱니바퀴는 돌기 시작했다. 데미안은 순식간에 에이든의 사업 계약 세 건을 파기해 버렸다. 그저 전화 한 통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조차 필요 없이 비서에게 이메일 한 통을 보낸 게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아벨은 서류 봉투를 쥐고 있었다. 두툼한 파일이었다. 은행 거래 내역, 사업 이력, 에이든이 여태껏 손을 잡았던 모든 이들의 정보까지. 아벨은 아침 식사를 마쳤다고 말하듯 무심하고 당연하게 그 사실을 입에 담았다. 헨리는 에이든에게 남은 마지막 파트너들을 추적하고 있었다. 조용히. 그리고 철저하게. 헨리가 늘 모든 일을 처리하는 방식 그대로. 그들은 내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심지어 내게 언질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움직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들의 여동생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리고 모리슨가에선 그 누구도 가문의 사람에게 상처 준 자를 그냥 묵과하지 않는 법이었으니까. 가슴에 M 자가 새겨진 가운을 입은 채 어두운 복도에 서서,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내 안의 한 부분은 당장 문을 밀어젖히고 들어가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더 처절하게, 더 빠르게 짓밟아달라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남자들의 지독한 파괴력이 두려웠다. 두 감정 모두 거짓이 아니었기에, 나는 그 혼란스러운 감정의 뭉치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지 못했다. 벽에서 몸을 떼어냈다. 주방에서 물을 챙겨 마셨다. 다시 방으로 올라갔지만, 새벽 4시가 다 될 때까지 잠에 들지 못했다. 오전 9시, 의사가 도착했다. 옷도 다 갈아입지 못한 상태였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자, 의료 가방을 든 50대 여성 한 분이 차분하고 전문적인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리나 아가씨. 아다에제 의사입니다. 데미안 님께서 오늘 아침 아가씨의 건강 상태를 진찰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눈을 깜빡였다. "어느 오빠요?" "데미안 님이십니다." 그럼 그렇지.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그녀는 세심하고 정중하게, 내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며 진찰을 진행했다. 혈압, 철분 수치, 그리고 아이의 상태까지. 그녀가 상황의 전말을 미리 숙지하고 왔음이 느껴질 만큼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폈다. 진찰을 마친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기는 아주 건강합니다. 심장 소리도 힘차고요. 최근 며칠간 몸 고생이 심하셨을 텐데, 두 분 모두 놀라울 정도로 잘 견뎌내셨어요." 참았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놀라울 정도로요……." 내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녀가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훨씬 강한 분이십니다, 아가씨." 그녀가 떠난 후, 한참 동안 침대 모서리에 앉아 있었다. 손을 배 위에 얹었다. 아이는 무사했다. 그 거센 비와 차가운 보도블록, 병원 소동을 모두 겪고도, 아이는 무사히 견뎌내 주었다. "벌써부터 독하네."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네 엄마를 닮아서." 햇살 아래 본 데미안의 서재는 밤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누군가 일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가문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장소처럼 보였다. 짙은 목재 가구,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 그리고 식탁만큼이나 거대한 책상 위에는 노트북과 전화기, 그리고 한가운데 놓인 서류 봉투 하나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들어가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책상 건너편 의자를 손짓으로 가리켰다. 의자에 앉았다. 그도 자리에 앉았다. 그가 서류 봉투를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그가 입을 뗐다. 늘 그래왔듯이. 데미안 모리슨이라는 남자는 평생 돌려 말하는 법을 배워본 적이 없을 터였다. "모리슨 코퍼레이션은 이 나라에서 가장 거대한 민간 기업 제국 중 하나다. 부동산, 금융, 기술, 호텔·리조트 사업까지. 넌 모리슨가의 피를 타고난 순간부터 이 가문의 공동 소유주였다. 네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든 모르고 있었든 변함없는 진실이지." 그가 서류 한 장을 넘겼다. "이제 달라지는 건, 네가 정식으로 네 자리를 되찾는 것뿐이다." 가만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공동 대표이사(CEO)." 그가 말했다. "나와 함께." 헛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소리를 겨우 눌러 담았다. 그건…… 너무나 황당하고 현실감이 없었으니까. 나는 지난 6년 동안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았다. 에이든의 허락 없이는 개인 은행 계좌조차 만들 수 없는 집에서, 내가 구두를 닦아주던 남자에게 '무능하고 가치 없는 여자'라며 멸시당하던 6년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대표이사 자리를 내밀고 있었다. "전 경영 경험이 전혀 없어요." 나는 말했다. "너에게는 직관이 있다. 명석함도 있지. 그리고 무엇보다 네 뒤엔 이 가문이 있다." 그가 서류를 덮었다. "경험은 배우면 된다. 하지만 타고난 자질은 가르칠 수 없는 법이지." "데미안 오빠……." "너 혼자 이 거대한 조직을 짊어지라는 게 아니다. 그저 처음부터 네 것이었던 권리를 되찾으라는 뜻이지." 그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윤곽, 차가운 쥐색 눈동자,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대해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는 사람 특유의 압도적인 정적. 지난밤 문틈 너머로 들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놈에게서 모든 걸 빼앗을 거다.* 감정의 동요도, 어떠한 과장도 없이 던져진 선언. 오직 사실만을 입에 담듯. 이 남자들은 위험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내 편이었다. 나 역시 그들의 일원이었고. 이것이 내 삶에 어떤 의미가 될지, 내게 무엇을 요구하고 나를 어떤 사람으로 변화시킬지 아직은 다 알 수 없었다. 지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나는 더 이상 타인에 의해 짓밟히고 휘둘리는 수동적인 삶을 살지 않겠다는 것. "좋아요." 내가 말했다. 데미안의 표정에서 아주 미세한 변화가 일어났다. 눈을 깜빡였다면 놓쳤을 만큼 찰나의 변화였다. 그는 책상 서랍에 손을 넣어 두툼한 서류 한 뭉치를 꺼내 내 쪽으로 슬그머니 밀어주었다. 빼곡한 서류였다. 적어도 20장은 되어 보이는, 법률 용어로 가득 찬 문장들을 완벽히 이해하려면 일주일은 족히 걸릴 듯했다. 하지만 첫 페이지 맨 위에 적힌 문구만큼은 더없이 또렷했다. ‘모리슨 코퍼레이션’ ‘임원 임명 계약서’ ‘대표이사 리나 모리슨’ 내 이름. 마치 처음부터 그자리에 서 새겨져 있었던 것처럼, 저 종이가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려왔다는 듯 정갈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그 문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 이름. 내 진짜 이름. 노먼이 아닌, 에이든의 아내나 아이를 못 낳는 여자 따위의 모욕적인 수식어가 붙지 않은 이름. 모리슨. 그리고 대표이사. 책상 위에 놓인 만년필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멈칫했다. 손끝이 종이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맴돌았다. 의자에 앉아 '좋아요'라고 말하는 것과, 이런 중대한 서류에 내 이름을 직접 새겨 넣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이것을 현실로 만드는 것. 공식적으로, 법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막강한 권력을 쥔 인물이 되는 것. 그 권력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 내야 하는 사람. 펜 끝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었다. 데미안이 나를 조용히 관조하고 있었다. 초조한 기색도, 읽어낼 수 있는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저 늘 그랬듯 특유의 무심한 눈빛으로, 마치 이미 몇 걸음 앞선 미래를 내다보며 현재가 따라오기를 느긋하게 기다리는 사람처럼. "만약…… 제가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어쩌죠?" 생각보다 작고 약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즉시 답하지 않았다. 그 특유의 깊은 눈빛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나라는 사람을 단숨에 해체했다가 다시 조립해 내듯. 이내 그가 입을 열었다. "천천히 하렴." 잠시 정적이 흘렀다. "넌 이미 24년을 기다려왔으니까." 시선을 다시 서류 쪽으로 내렸다. 내 이름 석 자로. 나는 아직, 펜을 집어 들지 않았다.리나의 시점시장 분석 보고서를 정독하고 있던 중, 헨리 오빠가 방문에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신발 신어라, 리나."나는 고개를 들었다. "나 일하는 중인데.""알아." 오빠는 문틀에 팔짱을 끼고 기대어 섰다. 이미 혼자 결정을 내려놓고 내가 순순히 자신을 따라오기만을 느긋하게 기다리는 특유의 표정을 지은 채였다. "그래도 신발 신어.""헨리 오빠…….""보고서는 다녀와서 읽어도 안 도망가." 오빠가 벽시계를 향해 고개를 짓짓해 보였다. "오늘 아침 6시 반부터 그러고 앉아 있었잖아. 벌써 오후 2시야."시계를 돌아보았다.정말 오후 2시였다."4시에 중요한 통화가 있어서 안 돼." 내가 말했다."제이드한테 일정 미루라고 했어."나는 멍하니 오빠를 쳐다보았다. "제이드한테 전화를 했다고?""응, 전화했지.""나한테 묻지도 않고 내 일정을 마음대로 취소한 거야?""어." 오빠가 단숨에 답했다. 조금의 미안 기색도 없이. 자기가 옳다고 판단한 일에는 그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지극히 헨리 오빠다운 태도였다."헨리 오빠.""신발 신자, 리나."잠시 오빠를 지켜보았다.오빠의 눈빛은 내가 따라나설 때까지 하루 종일이라도 저 자리에 서 있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헨리 오빠에게 그건 협박이 아니라 단순한 사실이었으며, 고집을 부려봤자 오빠를 이기는 데 드는 에너지가 신발을 집어 드는 것보다 훨씬 크리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결국 나는 신발을 신었다.모리슨 저택의 부지는 내가 첫날 밤 차 안에서 어렴풋이 보았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그동안 내가 본 것이라곤 내 방 창문 너머로 보이던 진입로와 분수대, 정갈하게 가꿔진 정원이 전부였다. 차를 타러 오갈 때 잠시 거쳐 가는 용도로만 그 공간을 이용했을 뿐, 한 자리에 진득하게 머물며 돌아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저택의 부지는 그 너머까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정성껏 가꾼 흔적이 역력한, 정돈된 채소밭을 지나자 안개가 자욱하게 낀 유리 온실이 나타났다. 그 안에는 무성하고 푸
리나의 시점요즘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나 역시 같은 방식으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휴대전화 화면을 통해서.눈을 뜬 지 겨우 4분 남짓. 아직 침대에 누워 전날의 일들이 다 정돈되지 않은 그 모호한 의식 속을 헤매고 있을 때, 알림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처럼 알림음들이 끊임없이 겹쳐 들렸고, 이전 알림을 채 확인하기도 전에 또 다른 알림이 꼬리를 물었다. 나는 무음으로 전환한 뒤, 무언가 커다란 일이 터졌음을 직감한 사람 특유의 침묵 속에서, 어떤 일인지 확인하기 직전의 그 마지막 짧은 유예를 즐기며 화면을 가만히 노려보았다.4분 만에 쌓인 알림만 무려 47개.몸을 일으켜 앉았다.내가 어둠 속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한 채, 휴대전화 속 에이든의 메시지를 노려보고 있던 자정 무렵에 올라온 첫 헤드라인. 그건 내가 평소 존경하던 한 경제지의 기사였다. 평소 개인적인 스캔들 따위는 다루지 않고,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는 것을 자부심으로 삼던 바로 그 매체였다.**[모리슨 코퍼레이션의 신임 CEO: 에이든 노먼이 버린 여자]**아침이 되자, 다른 모든 언론사가 그 기사를 사방으로 퍼 나르기 시작했다.가운 차림으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스크롤을 내리며 기사들을 읽었다. 뭐라고 바로 정의할 수 없는 기묘하고 불안정한 감정이 속에서 휘몰아쳤다.기사 내용은 전부 사실이었다.바로 그 점이 나를 더 섬뜩하게 만들었다. 자극적으로 부풀려지지도, 날조되지도 않았으며, 진실을 밝히기보다 조회수를 노리고 꾸며낸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저 철저한 사실의 나열이었다. 누군가 작정하고 취재를 한 것이 틀림없었다. 날짜를 대조하고, 기록을 찾고, 우리를 알던 사람들을 취재해 엮어낸 전말. 그들이 완성해 낸 그림은 너무나 정교하고 지독할 만큼 사실이어서, 차라리 과장된 소문이었으면 반박이라도 해볼 텐데 그러지도 못해 오히려 마음이 더 어지러웠다.휴대전화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창밖을 내다보았다.커
리나의 시점잠시 후 그가 겨우 입을 뗐다.당연한 결과였다.에이든 노먼은 단 한 번도 말문이 막혀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언제나 언어를 무기로 삼던 자였다. 가슴을 후벼 파고 들어와 며칠이고 맴도는 날카롭고 거친 말들, 뱉은 지 6개월이 지난 뒤에도 새벽 3시에 퍼뜩 잠에서 깨어나 환청처럼 들려오게 만드는 그런 말들 말이다. 그가 쏟아낸 말들은 지난 6년 동안 빼낼 수도 없는 가시가 되어 내 몸 구석구석에 박혀 있었다. 그의 목소리 톤 하나만으로 다음에 어떤 폭언이 쏟아질지 파악하고 본능적으로 몸을 사리는 법을 배워온 6년이었다.테이블 상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천천히. 그리고 아주 다분히 의도적으로. 데미안 오빠가 회의실에 앉을 때처럼, 마치 그 의자가 오직 자신만을 위해 제작되었고, 자신의 등장 시점이 가장 완벽한 타임라인이며, 그 외의 모든 것은 그저 자신이 시작하기만을 기다리는 존재라는 듯이.테이블 위에 양손을 얌전히 겹쳐 놓았다.에이든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4분 40초 남았어."그가 눈을 껌벅였다. "뭐라고?""당신에게 남은 시간이 4분 40초라고." 내가 말했다. "지금처럼 허비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효율적으로 쓰는 게 좋을 텐데."그는 늘 그렇듯 분통부터 터뜨리기 시작했다."지금 내 회사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나 해?" 그가 테이블 가까이 바짝 다가서며 의자 등받이를 부서질 듯 틀어쥐었다. "계약들이 순식간에 공중분해되고 있어. 고객사들은 전화를 안 받고, 수년간 같이 일해온 비즈니스 파트너들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갑자기 연락을 끊어버렸다고!"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논리를 쌓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고성을 질러대기 위해서였다. 마치 목소리가 커질수록 자신의 주장이 더 진실에 가까워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내가 답을 들으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럼 질문을 해." 내가 그의 말을 끊었다.그가 입을 턱 다물었다."답을 들으러 왔다며." 내가 말했다. "그렇다는 건 질문이 있다는 뜻이겠지. 물
리나의 시점제이드는 여전히 지시를 기다리며 내 곁에 서 있었다.주변 로비는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행사를 정리하는 직원들, 카메라 장비를 챙기는 취재진, 특유의 따뜻하고 다정한 눈빛으로 언론 홍보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헨리 오빠, 그리고 어떤 공간에 있든 특유의 정교하고 완벽한 일 처리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클레어까지. 그 모든 풍경은 불과 30초 전과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 모든 장면이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그 사람, 어디 있지?" 내가 물었다."메인 로비 입구입니다." 제이드가 답했다. "보안팀이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아주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단어를 신중하게 고를 때 나오는 그 특유의 침묵. 제이드가 이처럼 말을 아낀다는 건 다음에 이어질 내용에 상당한 주의가 필요함을 의미했다. "목소리가 아주 큽니다.""얼마나?""상당히요." 그녀가 말했다. "자신의 계약을 파기한 책임자를 만나겠다고 요구하는 중입니다. 대략 20분 전부터 같은 말을 반복하며 갈수록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보안팀이 입구에서 막아서고는 있지만, 제 발로 돌아갈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혼자 왔어?""네, 대표님. 변호사나 동행인은 없습니다.""위협적인 언행도 있었나?""직접적인 위협은 없었습니다." 제이드가 말했다. "분통을 터뜨리며 항의하는 수준입니다. 아직 법적으로 문제 삼을 만한 선을 넘지는 않았습니다." 그녀가 다시 말을 멈추었다. "대표님이 여기 계시다는 건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담당자를 나오라고 소리치고 있을 뿐, 그 책임자가 누구인지는 아직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그 사실을 가만히 반추해 보았다.그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계약서 맨 위에 내 가문의 이름이 박힌 모리슨 코퍼레이션 본사 로비에 서서, 이 일을 저지른 책임자를 당장 내놓으라고 고함을 지르고 있으면서도, 그 책임자가 자신이 임신한 채 빗속으로 쫓아냈던 바로 그 여자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로비 건너편에 서 있는 데미안 오빠를 바라보
리나의 시점그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정확히 3분 동안 시체처럼 가만히 누워 있었다.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걸어가 거울 속 내 모습을 바라보며 크게 읊조렸다. "절대 안 돼."오늘 하루 전체를 두고 한 말이었다.기자회견. 사방에서 터져 나올 카메라 플래시. 쏟아질 질문 세례.불과 6주 전만 해도 버스 정류장 벤치에서 잠을 청하던 내가,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거대 기업의 대표이사(CEO)로서 수많은 기자들 앞에 서서 취임 선언을 한다니.절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그럼에도 양치를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벨은 이미 식탁에 앉아 프린트된 목록 하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앉아." 그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해 주면 어디가 부러지나 보네.""앉기나 해. 소피아가 오기 전까지 40분 남았어. 머리를 만지기 전에 이 답변들부터 달달 외워둬야 할 테니까."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가 식탁 너머로 목록을 스르륵 밀어주었다. 종이를 내려다보았다.열두 개의 질문. 기자들이 물어볼 확률이 가장 높은 문항들이었다. 각 질문 옆에는 아벨의 글씨체로 답변의 가이드라인이 딱 한 줄씩 적혀 있었다. 대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방향성이었다. *비전 강조할 것. 회사 이야기로 돌릴 것.**에이든에 대해 언급하지 말 것.*마지막 문장에는 밑줄이 두 줄이나 그어져 있었다."에이든에 대해 언급하지 말 것." 소리 내어 읽었다."어떤 상황에서든 절대로.""만약 그쪽에서 직설적으로 물어보면?""직설적으로 물어볼 거다." 아벨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넌 미소를 지으며 사생활은 말 그대로 개인적인 일일 뿐이며, 오늘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모리슨 코퍼레이션의 미래를 논하기 위함이라고 답하면 돼." 그가 내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할 수 있겠어?"솔직하게 스스로에게 물었다."응." 내가 답했다."좋아." 그가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못 하겠다면 지금 당장 말해야 다른 답변을 준비할 테니까.""할 수 있다고
리나의 시점금요일 아침, 아벨이 서류 봉투 하나를 들고 내 교육 장소로 들어섰다. 자신이 무언가를 단단히 즐기기 직전에나 지어 보이던 바로 그 특유의 표정을 띤 채였다.그가 내 앞 테이블 위로 서류 봉투를 던지듯 내려놓았다."에이든 노먼." 그가 말했다. "현재 상황이다."서류 봉투를 한번, 그리고 그를 한번 바라보았다.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군요.""전문가적 관점에서만 말이지." 그가 의자에 앉으며 팔짱을 꼈다. "열어봐."사진 속에 담긴 모습은 차마 눈 두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첫째 주에만 계약 다섯 건이 날아갔다. 그다음 며칠 동안은 세 건이 추가로 재계약 불가를 통보받았다. 기존 계약을 파기당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재계약이 불발된 것이었는데, 그게 어떤 면에서는 훨씬 더 잔혹했다. 에이든이 반발하거나 손쓸 명분조차 주지 않았으니까. 더 이상 열리지 않는 문을 향해 주먹질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가 하틀리 그룹에 걸어댄 전화는 9일째 먹통이었다. 중개인을 거쳐 어떻게든 연결을 시도해 보았으나, 중개인 중 두 명은 에이든과의 접촉 사실을 곧바로 모리슨 코퍼레이션 측에 직접 밀고해 왔다. 그 업계의 충성심이 현재 누구를 향해 있는지 명확히 보여주는 대목이었다.그는 미친 듯이 뒤를 파헤치는 중이었다. 아벨의 정보통에 따르면,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일이 무너져 내리는 그 경계마다 왜 자꾸 '모리슨'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오는지 조사할 흥신소를 고용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비즈니스상의 라이벌이나 수작을 부리는 경쟁업체의 소행쯤으로 여길 뿐이었다. 그 일이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비 오는 날 거리로 쫓아낸 여자가, 자신의 전화기를 먹통으로 만든 원인이라는 사실을 그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서류 한 장을 넘겼다."몇 년 동안 연락도 끊고 살던 사람들한테까지 전화를 돌리고 있더군." 아벨이 말했다. "옛 인맥들, 전 직장 동료들, 상황을 파악해 줄 만한 선이 닿는 자라면 누구에게든 붙잡고 늘어지는 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