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리나의 시점
차 안은 지독할 정도로 적막했다. 가장 먼저 스친 생각이었다. 덜컹거리는 소리도, 엔진이 쥐어짜내는 신음도, 도로 턱을 넘을 때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직 침묵 속에서 미끄러지듯 달리는 매끄러움만이 존재했다.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도시의 풍경은 마치 내가 아주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관망하는 타인의 삶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정면만 가만히 응시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말을 꺼내지 않아도 그들은 알고 있는 듯했다. 내게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득 찬 말들이나 질문들, 혹은 당장 감당해내야 할 현실 따위가 비집고 들어오지 않는, 오롯이 나만의 일 분이 절실하다는 것을. 옆자리에는 헨리가 앉아 있었다. 가까우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딱 적당한 거리였다. 조수석에 탄 데미안은 곧은 자세로 문가에 한쪽 팔을 걸치고 있었고, 아벨은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진중하고 차분한 손길로, 두 손을 운전대에 올린 채. 세 명의 오빠. 내게 세 명의 오빠가 생겼다. 그들의 차에 타 그들의 집으로 향하고 있다니. 불과 24시간 전만 해도 나는 차가운 빗속 보도블록 위에 쓰러져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신세였는데. 손바닥을 배 위에 살포시 얹었다. 아주 잠시 동안. 이제 이 차 안에는 나 혼자가 아니라 둘이 함께하고 있음을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우리 둘 다, 이제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도시의 건물들이 점점 뜸해졌다. 비좁았던 골목길은 넓은 대로로 이어졌고, 신호등은 점점 드물어졌으며, 건물들은 서로 거리를 두고 도로 뒤편으로 물러나 앉았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내 정신은 정작 아무것도 담아내지 못했다. 마음은 여전히 그 아늑했던 병실 안에 머물러 있었다. "등 뒤 왼쪽 밑에 점이 있지."라며 내 세계의 바닥을 무너뜨리던 아벨의 목소리가 귀전에서 떠나지 않았다. 두 오빠의 목을 끌어안고 얼굴 가득 환하게 웃던 사진 속 그 어린 여자아이. 세상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가리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천진난만하게 웃던 그 아이의 얼굴이 자꾸만 겹쳐졌다. *어머님 아버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널 찾다가 눈을 감으셨어.* 데미안의 그 야속한 목소리도. 아무에게도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창가 쪽으로 더 바짝 돌렸다. "다 왔어." 옆에서 헨리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면 목소리가 갈라져 터질 것 같았다. 차는 거대한 정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섰다. 나도 모르게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았다. 진입로는 정면을 향해 길고 곧게 뻗어 있었다. 양옆으로는 조각품처럼 정교하게 가꿔진 나무들이 들어서 있었고, 그 경계를 따라 이름도 모를 화려한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던 색감들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피어 있었다. 따스한 햇살이 나뭇잎과 꽃잎, 그리고 길 위에 내려앉아 온 세상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저택이 서 있었다. 잡지에서나 보았던 그런 집이었다. 감히 나 같은 사람이 넘볼 수 없는 세상이라 여겨져, 오래 바라보는 것조차 허영처럼 느껴져 서둘러 페이지를 넘겨버리곤 했던 바로 그 저택. 웅장한 하얀 외벽. 넓은 계단 위로 높게 솟은 거대한 기둥들. 건물 전면에 통유리로 내어 햇살을 그대로 흡수해 길게 반사해 내는 창문들. 원형 회차로 한가운데에서는 분수가 시원하게 물줄기를 내뿜고 있었고, 차가 멈추어서기도 전에 그 싱그러운 물소리가 먼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리고 저택의 입구, 계단을 따라 양옆으로 정갈하게 두 줄로 서 있는 정원과 하수인들. 단정한 차림새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나를. 입안이 바짝 말라왔다. "여기가…… 당신들이 사는 집인가요?"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훨씬 작고 무력하게 터져 나왔다. "우리가 사는 집이지." 헨리가 다정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교정해 주었다. "그리고 이제, 너의 집이기도 하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반박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그 현실감 없는 단어들이 내 삶의 궤적에 도무지 얹어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벨이 차를 멈춰 섰다. 잠시 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내 아벨이 백미러를 통해 나를 바라보았다. "준비됐어?" 준비 따위 되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주변의 공기마저 다르게 느껴졌다. 방금 깎아낸 풀 내음, 이름 모를 화초의 짙은 향기, 그리고 분수대에서 퍼지는 서늘한 수증기. 발밑의 자갈은 유난히 희고 고르게 밟혔다. 가까이서 들리는 분수 소리는 웅장하고 차분해서, 마치 이 거대한 저택 자체가 숨을 쉬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두 줄로 정렬해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그 순간, 내 몰골이 얼마나 처참할지 피부로 강렬하게 깨달아졌다. 나는 병원 화장실에서 겨우 물만 묻히고 나온 처지였다. 옷은 사흘 전 모든 게 무너지기 직전, 패닉 상태에서 대충 가방에 쑤셔 넣었던 바로 그 옷이었다. 짐가방마저 길거리에서 의식을 잃은 사이 모조리 도둑맞아 버렸으니, 내 손에는 가방 하나, 외투 한 벌조차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평생을 벌어도 구경조차 못 할 이 거대한 저택의 계단 앞에, 나는 마치 길거리에서 방금 끌려온 듯한 차림으로 서 있었다. 실제로 길거리에서 끌려왔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허리를 바짝 폈다. 데미안이 우리보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는 줄지어 서 있는 직원들 앞에 섰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지만,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 이쪽은 리나 모리슨이다." 그는 담담하고 명확하게,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는 단정한 어조로 선언했다. "우리 여동생이자, 이 가문의 고귀한 상속녀다." 그가 잠시 말을 멈추어, 그 말이 사람들의 귓가에 단단히 박히기를 기다렸다. "그에 맞게 깍듯이 대하도록. 누구든 아가씨께 무례하게 구는 자는, 내 손에 직접 단죄를 받을 것이다." 직원들의 자세가 순식간에 반인치쯤 더 곧게 펴졌다. "예, 가주님."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목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줄 맨 앞에 서 있던 나이 지긋한 여성이 앞으로 다가왔다. 은빛 머리칼에 따스한 눈매, 눈가까지 아우르는 온화한 미소를 지닌 분이었다. 그녀가 나를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환영합니다, 리나 아가씨.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기쁩니다."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를 진심으로 반겨주는 사람들 앞에 어떤 자세로 서 있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내 존재가 잘해야 '겨우 용인되는 수준'이었고, 나쁠 때는 '노골적인 짐' 취급을 받던 집에서 6년을 살았다. 누군가의 공간에 들어서며 환대를 받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기억에서 완전히 잊혀버린 후였다. 아니, 처음부터 알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아벨이 내 어깨 옆으로 다가왔다. "가자."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네 방을 구경시켜 줄게." 계단은 고급스러운 대리석이었다. 넓게 곡선을 그리는 빛나는 돌계단 위로, 중앙 홀 천장에 달린 거대한 샹들리에의 빛이 화려하게 부서져 내렸다. 난간은 진한 빛깔의 매끄러운 목재로 만들어져 있어 손바닥에 스치는 촉감이 차갑고 부드러웠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난간을 의지하듯 꼭 쥐고 걸었다. 의지할 곳이 필요했으니까. 아벨은 내 옆에서 걸음을 맞추었다. 대화를 강요하며 침묵을 채우려 하지 않는 그가 고마웠다. 그저 내 걸음걸이에 맞춰 천천히 걸으며, 옆을 지날 때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짧게 설명해 줄 뿐이었다. 2층 복도의 초상화 갤러리, 두 칸 너머에 있는 서재, 아침 햇살이 가장 예쁘게 드는 티룸 같은 곳들을. 그 모든 걸 마음에 담아보려 애썼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한꺼번에 받아들이기엔 이 공간의 크기가, 그 안의 정적과 품격이 너무나 거대했다.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고결함. 모든 기물 하나하나가 정성스레 선택되고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결코 과시하기 위해 꾸며진 집이 아니었다. 세대를 거쳐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 묻어나는, 스스로의 가치를 굳이 입 바르게 증명할 필요가 없는 진짜 가문의 저택이었다. 아벨이 넓은 복도 끝에 있는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섰다. 그가 문을 열고 옆으로 물러섰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멈춰 서고 말았다. 방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넓었다. 에이든과 내가 신혼 시절 함께 살던 아파트 1층 전체를 합친 것보다 커 보였다. 방 한가운데에는 기다란 기둥이 솟은 침대가 놓여 있었고, 그 위로는 하얀 커튼이 흐드러지게 드리워져 있었다. 단단하게 펼쳐진 홑이불은 마치 뭉게구름을 눌러놓은 듯 포근해 보였다. 창가 쪽에는 의자 두 개와 낮은 테이블이 놓인 티타임용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고, 한쪽 벽면에는 따스한 조명이 감싸고 있는 화장대가 서 있었다. 살짝 열린 반대편 문 너머로 대리석으로 장식된 넓은 욕실이 보였고, 멀리서도 큼직한 욕조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으로 연결된 드레스룸. 문이 열려 있는 그 내부에는 이미 옷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행거마다 색상과 두께별로 완벽하게 정돈된 옷들. 아래 선반에는 갖가지 구두가, 고리에는 고급스러운 가방들이 걸려 있었다. 그 수많은 옷과 신발의 치수가,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거짓말처럼 내 몸에 딱 맞춘 듯 정확했다. 천천히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두꺼운 카펫 덕분에 발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침대 모서리로 다가가 모서리 깃을 살짝 만져보았다. 천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순간 눈시울이 시려왔다. 화장대 위에 놓인 자그마한 향수병을 집어 들었다. 눈물방울 모양으로 조각된 섬세한 유리병이었다. 조심스럽게 제자리에 놓았다. 손이 다시 떨려오기 시작했다. 뒤에서 사람이 들어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저 방 안의 공기가 아까보다 빽빽해졌음을 본능적으로 느꼈을 뿐이다. 뒤를 돌아보았다. 세 사람이 서 있었다. 데미안, 헨리, 아벨. 문가에 나란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 안을 다시 둘러보았다. 옷으로 가득 찬 드레스룸, 넓은 침대, 화장대, 그리고 통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끝없이 푸르고 단정하게 가꿔진 정원의 풍경을. "이건…… 너무 과해요." 마지막 단어에서 목소리가 갈라져 터졌다. "전 이런 걸 받을 자격이……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요……." "거기까지." 데미안의 목소리가 내 말을 단칼에 잘라냈다. 날카롭지 않았다. 그저 어떤 반박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함이 실려 있을 뿐. "이건 다 네 거다. 처음부터 네 것이었어. 자격을 증명할 필요 따위 없다." 헨리가 방을 걸어질러 와 내 옆에 섰다. "집에 온 거야, 리나."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그게 전부란다. 넌 이제 집에 돌아온 거야." 그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터져 버렸다. 웅장한 저택 때문이 아니었다. 드레스룸을 채운 화려한 옷들이나 밖의 분수대, 나를 환영해 주던 직원들 때문도 아니었다. 그 가공할 만한 물질적인 부 때문이 아니었다. 오직 그 한 단어. 집. 그저 담담하게, 마치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던져진 그 한마디. 마치 아주 오랫동안 진실이었던 사실을 이제야 입 밖으로 끄집어낸 것뿐이라는 듯한 그 어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정류장 벤치에서 흘렸던 절망적이고 헛헛한 울음이 아니었다. 빗속에서 지쳐 넋을 놓고 흘리던 눈물도 아니었다. 이건 전혀 다른 눈물이었다. 내 안의 가장 깊은 곳, 아주 오랫동안 꽁꽁 닫혀 있던 문이 마침내, 마침내 열리며 터져 나오는 울음이었다. 헨리가 먼저 나를 품에 안아주었다. 뒤이어 아벨이 나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웃지 않던 데미안마저…… 마치 온기 따위는 일찌감치 버리고 살아온 사람처럼 굴던 그 데미안마저, 내 등 뒤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그저 손 하나,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 어떠한 말보다 깊은 마음이 그 손길을 통해 전해졌다. 저녁 식사는 더할 나위 없이 시끌벅적하고 따스했다. 길다란 식탁은 자칫 딱딱한 분위기를 풍길 법도 했지만, 형제들 덕분에 정반대의 온기로 가득 찼다. 헨리가 주로 입을 열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이야기, 이 저택에서 함께 자라난 어린 시절의 기억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채 떠나보낸 부모님의 모습이 헨리의 생생한 묘사 속에서 가슴 시리도록 또렷하게 살아났다. 어머니는 집에 상주하는 전담 셰프들이 있었음에도 일요일 아침이면 늘 직접 요리를 하셨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만든 음식은 맛부터가 다르다면서. 아버지는 매일 저녁이면 돋보기안경을 어디 뒀는지 모르겠다며 시치미를 떼셨다고 한다. 그러면 어머니가 다가와 안경을 찾아주시곤 했는데, 안경은 늘 아버지가 놔둔 바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고. 어머니는 단 한 번도 그 뻔한 거짓말을 지적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소리 내어 웃고 난 스스로에게 놀랄 만큼, 식당 안에 울려 퍼진 내 웃음소리는 생소하면서도 낯설고, 참 좋았다. 아벨은 헨리의 이야기에 유쾌한 덧붙임을 더해 분위기를 더욱 띄웠다. 그에게는 재주가 있었다. 적재적소에 위트 있는 추임새를 넣거나 엉뚱한 디테일을 보태어 온 집안을 웃음바다로 만드는 재주가. 메인 요리가 치워지기도 전에 나는 두 번이나 더 소리 내어 웃었다. 데미안은 주로 조용히 듣는 편이었다. 그는 특유의 절제된 손길로 식사를 마쳤고, 꼭 필요한 순간에만 입을 열 뿐 쓸데없는 말은 보태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한 번, 아벨이 여덟 살 때의 에피소드를 꺼냈을 때였다. 동네에 있는 키 큰 나무란 나무는 모조리 뒤지고 다녔다는 이야기였다. 진지한 여덟 살짜리의 고집으로, 내가 나무 위에 숨어 있으니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고 확신했었다면서. 그 순간, 데미안의 얼굴 위로 아른거리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나타났다 사라진 그것은 서러움이었을 수도, 혹은 그 서러움보다 더 깊고 오래된 그 무엇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가 접시 쪽으로 시선을 내리자 그 감정은 다른 이들이 채 알아채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나는 똑똑히 보았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애를 써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침대는 내 평생 누워본 그 어떤 자리보다 포근했다. 방 안은 따스하고 아늑했으며 침구에서는 깨끗하고 은은한 꽃향기가 풍겼다. 나를 위협할 만한 요소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머리로는 그걸 잘 알고 있었지만, 내 의식은 멈추기를 거부했다. 에이든의 얼굴. 나가라고 말하던 그의 무심한 눈빛. 화풀이도, 죄책감도 없이 그저 깔끔하게 끝냈다는 표정. 거실 바닥을 긁으며 밀려나던 내 짐가방 소리. 내 턱을 틀어쥐던 바네사의 손길. 비. 버스 정류장. 그리고 정신을 잃기 직전 나를 감싸던 차가운 보도블록의 촉감.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실 문 뒤에 걸려 있던 가운을 걸쳐 입었다. 가슴께에 하얀색 M 자가 정교하게 자수 놓인 두툼하고 무거운 가운이었다. 가운을 여미고 복도로 발을 내디븠다. 걸레받이를 따라 낮게 켜진 간주등만이 복도를 밝히고 있었다. 저택은 조용했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한 손으로 난간을 쓸어내리며 물을 마시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거실을 반쯤 질러갔을 때였다. 왼편 문틈 사이로 가느다란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데미안의 서재였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그가 들어가는 것을 보았기에 진작 나온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안에 있는 모양이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물만 마시고 다시 방으로 올라가자. 그를 방해할 이유는 없으니까. 문 앞을 두 걸음쯤 지나쳤을 때였다.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에이든 노먼." 데미안의 목소리였다. 낮고, 집요하며, 서늘했다. 이미 어떤 결정을 완벽히 내린 후, 그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이름을 나지막이 입 밖으로 짓씹듯 내뱉는 어조. 우뚝 멈춰 섰다. 손으로 벽을 짚었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내부가 보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소리를 듣기엔 충분한 틈이었다. "은행 거래 내역, 사업적 관계, 모든 계약서, 파트너, 그리고 채무 관계까지. 우리가 움직이기 전에 그자에 대한 모든 정보를 완벽하게 파악해 놔." 아벨의 목소리였다. 낮고 예리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보여주던 유쾌함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시기를 잘 맞춰야 해." 헨리가 말을 받았다. "리나는 이미 너무 많은 일을 겪었어. 일이 복잡해지기라도 하면……." "복잡해질 일 없다." 데미안이었다. 여전히 낮고 차분한 목소리. 조금의 조급함도 없었다. 그리고 단 한 조각의 분노조차 섞여 있지 않았다. 그 기묘한 무감각함이, 차라리 미친 듯이 불같이 화를 내는 것보다 훨씬 더 지독하고 섬뜩하게 다가왔다. "그놈에게서 모든 걸 빼앗을 거다. 사업도, 명예도, 돈도." 잠시 정적이 흘렀다. "완전히 짓밟아버릴 테니까." 벽에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 사정없이 뛰어댔다. 어둡고 고요한 복도 한가운데, 만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은 내 세 오빠가, 나를 빗속으로 쫓아낸 그 남자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매장할지 차근차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도망쳐야 했다. 못 들은 척 발길을 돌려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7월의 모리슨 저택, 재회의 날 특유의 공기가 온 저택을 감쌌다. 웅장한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진입로에는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으며, 분수대는 시원하게 물줄기를 내뿜었다. 현관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헨리 오빠가 요리하는 맛있는 냄새가 홀까지 풍겨왔다. 지난 5년 동안 수많은 뜻깊은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저택의 공기 자체가 완벽하고 온화하게 바뀐 듯했다.나는 거실 문가에 서서 그 모든 풍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이단은 이제 여덟 살이었다.태어날 때부터 남달랐던 의연함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또렷해졌다. 아이는 데미안 오빠의 단호함, 즉 사물을 서두르지 않고 온전히 직시하는 태도와 스스로 확신하지 않은 의견에는 절대로 휩쓸리지 않는 주관을 빼닮아 있었다. 동시에 마커스의 다정함, 즉 상대를 바라볼 때 따뜻하게 다독여주는 눈빛과 웃기로 마음먹기도 전에 튀어나오는 유쾌한 웃음소리도 그대로 품고 있었다.물론, 아이의 고집은 여전했다.그것만큼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이단은 지금 아벨 오빠와 무언가 심각한 협상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자신의 주장을 피력할 때 나오는 아벨 오빠 특유의 화려한 손짓과, 설득당하지 않았을 때 나오는 이단 특유의 팔짱 낀 자세가 눈에 들어왔다. 주제가 무엇이든, 이단은 데미안 오빠에게서 배운 대로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정적을 유지하며 단단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내고 있었다.아벨 오빠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이단은 묵묵히 버티고 있었다.이 싸움이 누구의 승리로 끝날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클라라는 네 살이었다.네 살이 된 지 석 달째였고, 아이는 그 석 달이라는 시간을 지극히 생산적으로 보내는 중이었다.사건은 지난 4월, 정원 사업에서 시작되었다.클라라가 명쾌한 논리로 몇 번이나 설명해 주었지만, 아이의 논리를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나를 오히려 의아해하는 눈빛 때문에 이 사업의 정확한 기원은 여전히 불분명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텃밭과 헨리 오빠의 씨앗 몇 봉지, 그리고
1월의 어느 수요일, 새벽 3시 17분. 클라라가 세상에 태어났다.수요일이나 새벽 3시 17분이라는 시간이 특별해서도, 1월이라는 계절에 거창한 의미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단지 크리스마스를 지나며 만삭의 몸으로 거대한 변화를 마주할 준비를 하듯 조심스럽고도 단단한 걸음으로 저택을 거닐던, 춥고 어두운 그달에 클라라가 찾아왔을 뿐이었다.아이가 그때 태어난 건, 순전히 스스로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이었다.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지극히 클라라다운 방식이었다.진통은 한밤중인 12시에 시작되었다.나는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었다. 지난 2주 동안 도통 숙면을 취하지 못하던 터였다. 임신 막바지의 지독한 신체적 불편함, 배 속의 공간이 좁아지며 아기와 나 사이에 묘한 밀당이 이어지던 중이었다. 첫 진통이 찾아왔을 때, 나는 잠시 미동도 없이 누워 생각했다. *'방금 그건 평소와 다른데.'*다음 세 번의 진통 간격을 쟀다.그러고 나서 마커스를 깨웠다."때가 됐어요."내가 문장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가 눈을 떴다.마커스는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는, 몇 주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왔던 사람 특유의 완벽한 몰입과 집중으로 나를 바라보았다."간격이 어떻게 돼?" 그가 물었다."8분이요.""알았어." 그가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았어. 아다에제 의사에게 연락할게.""벌써 문자 보냈어요." 내가 말했다.마커스가 나를 건너다보았다."당신을 깨우기 전에 진통 간격을 세 번 쟀거든요." 내가 덧붙였다. "확실히 하고 싶어서."그는 다정함과 황당함, 그리고 깊은 사랑이 한데 얽힌 표정으로 나를 딱 1초 동안 바라보았다."당연히 그랬겠지." 그가 고개를 내저으며 미소를 지었다.마커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는 데미안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밤중에 오빠에게 꼭 연락을 취해야 할 의무는 없었지만, 오빠는 3주 전 나지막이 '시작되면 반드시 알려달라'고 부닥했었고 마커스는 그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복도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
나는 서재에서 데미안 오빠를 찾아냈다.오빠는 모니터 화면들을 띄워둔 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양손을 책상 표면에 평평하게 얹은 자세였다. 중앙 모니터에는 바로 그 기사가 떠 있었다. 내가 노크하고 들어왔을 때 이미 그 기사를 읽고 있었으며, 굳이 탭을 닫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오빠는 이 상황을 내게 숨기거나 조작하려 들지 않고 있었다.내가 들어서자 오빠가 고개를 들었다.나는 오빠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알고 있는 거 다 말해줘요." 내가 말했다."기사는 읽었겠지." 오빠가 말했다."읽었어요. 내가 알고 싶은 건 이 정보의 출처에 대해 오빠가 파악한 내용이에요."오빠가 모니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애시워스 건에 관한 내부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던 자야." 오빠가 입을 열었다. "나와 애시워스의 과거사, 그러니까 공개된 기록에는 없는 개인적인 원한이라는 프레임을 짜 넣었다는 건 회사 내부 문서에 접근할 수 있었다는 뜻이지." 오빠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다시 말해, 내부자의 소행이라는 거다.""아벨 오빠가 추적 중이에요." 내가 말했다."알고 있다." 데미안 오빠가 응수했다."어떻게 할 생각이에요?"오빠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내가 늘 하던 대로 해야지." 오빠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완벽한 정보를 손에 쥐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는다.""오빠가 그러고 있는 동안에도 기사는 계속 퍼져나가고 있어요.""그렇겠지.""그리고 사실도 아닌 헛소문에 오빠 이름이 들먹거려지고 있고요.""그래." 오빠가 다시 한번 대답했다. 완벽하게 평정심을 유지한 목소리였다.나는 오빠를 가만히 건너다보았다.데미안 모리슨.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가문의 모두를 지켜온 사람. 회사를 이끌고, 약속을 지키고, 끄나풀을 솎아내고, 위협을 제거하며,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복도 끝에 서 있던 사람. 그런 사람이 자신을 향한 왜곡된 비난 기사가 언론에 도배되고 있는 순간에도 책상 앞에 손을
**리나의 시점**진료 예약은 오전 9시였다. 아다에제 의사의 진료실은 모리슨 저택에 입성한 뒤 첫 검진을 받았던 곳이자, 내 상황을 완벽히 숙지한 의사가 나를 취조받는 기분이 들지 않게 배려하며 신중하고 능숙하게 질문을 던졌던,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의미 있는 말들이 오갔던 바로 그 공간이었다.마커스가 나와 함께해 주었다.그는 매 검진마다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동행했다.내가 부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임신 초기, 나는 의학적 검진 정도는 혼자서도 충분히 받을 수 있고 그의 일정을 변경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말했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마커스는 내 말을 가만히 들은 뒤 이렇게 답했었다. *'당신에게 내가 필요 없다는 건 알아. 내가 같이 가고 싶어서 그래. 그 둘은 엄연히 다른 거야.'* 나는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 그 둘은 다른 거지.'* 그리고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아다에제 의사가 초음파 검사를 진행했다.진료실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모니터 화면이 밝게 빛났다."성별을 알고 싶으신가요?" 의사가 물었다.마커스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았다."네." 내가 대답했다."딸이네요." 아다에제 의사가 미소를 지었다.나는 화면을 바라보았다.그리고 마커스를 건너다보았다.그의 얼굴.나는 이사회의장에서, 강변 산책로에서, 밤 11시의 주방에서, 결혼식 단상 앞에서, 그리고 새벽 2시의 아이 방에서 마커스 그레이의 얼굴을 보아왔다. 서로를 선택하며 함께한 3년의 세월 동안 그가 보여준 온갖 무수한 표정들을 하나하나 기억해 두었기에, 나는 그 사람의 모든 얼굴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이런 표정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완전히 무장 해제된 남자의 얼굴이었다.압도당한 것이 아니라, 경계가 완전히 풀려버린 모습. 늘 유지하던 특유의 단단한 틀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그 아래 숨겨진 본연의 모습이 아무런 방어막 없이 오롯이 드러난 표정이었다.그는 모니터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의 턱 끝이 미세하게
**리나의 시점**결혼식 당일 아침 7시 반, 헨리 오빠가 내 방으로 찾아왔다.나는 이미 깨어 있었다. 내 배 속 아이는 수면 시간표에 대해 아주 확고한 주관을 가지고 있었고, 새벽 5시부터 그 주관을 강력하게 주장해대고 있었으니까. 오빠가 문을 두드리고 찻잔 두 개를 든 채 들어왔을 때, 나는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오빠의 얼굴에는 감당하기 힘든 감정을 어디에 쏟아내야 할지 몰라 헤매는 기색이 역력했다."앉아요." 내가 말했다.오빠는 창가 옆 의자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두 손으로 찻잔을 꽉 쥔 채.가만히 찻잔만을 내려다보았다."헨리 오빠." 내가 불렀다."나 괜찮아." 오빠가 말했다."괜찮은 거 알고 있어요." 내가 말했다. "내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니에요."오빠가 고개를 들었다."결혼식 날 아침에 마땅히 지어야 할 표정을 완벽하게 짓고 있다고 말하려 했어요." 내가 미소를 지었다. "자기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을 막 해내기 직전인 사람의 표정 말이에요."오빠는 잠시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렇게 티가 나니?""완전히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거요?" 내가 응수했다. "네. 엄청나게 티 나요."오빠가 허탈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든 마인드 컨트롤을 해보려고 애쓰는 중이었는데.""컨트롤하려고 하지 마요." 내가 말했다. "오빠 결혼식이잖아요. 오늘만큼은 마음껏 넋을 놓아도 돼요."오빠는 다시 찻잔으로 시선을 옮겼다."루스는 정말 특별한 여자야." 오빠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저 가슴속에 맴도는 진실을 밖으로 털어놓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 특유의 읊조림이었다. "요즘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 만약 루스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내 삶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 다들 돌보느라 정작 나 자신은…."오빠가 말을 멈추었다. "정작 나 자신은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지 못한 채, 예전처럼 계속 살아가고 있었겠지."나는 오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하지만 오빠는 루스를 찾았잖아요.""그래.
**리나의 시점**아벨 오빠와 카라의 첫 번째 결혼기념일은 3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내가 이 사실을 알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벨 오빠가 1월부터 특유의 집요하고 완벽주의적인 태도로 기념일을 준비해 왔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중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쏟아붓는 그 열정. 사실 아벨 오빠의 계획은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주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티가 났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아벨 오빠에게서는 그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단번에 읽어낼 수 있는 특유의 분위기가 풍겨 나왔으니까.오빠는 근사한 레스토랑을 예약해 두었다.아주 훌륭한 곳이었다. 몇 달 전부터 미리 예약해야만 갈 수 있는 곳이었는데, 오빠가 그걸 무려 1월에 해냈다는 사실은 지난해 기념일이 채 다 지나가기도 전에 다음 해 기념일을 준비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지독하게 철두철미한 건지, 아니면 지독하게 아벨 오빠다운 건지. 나는 그 둘이 결코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하지만 그 예약은 취소되었다.아벨 오빠가 취소한 게 아니었다.카라가 취소했다.결혼기념일을 고작 사흘 앞둔 수요일, 카라는 예약을 취소하고 아벨 오빠 몰래 다른 일정을 준비했다. 예약이 취소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대체안이 무엇인지 듣기까지, 그 24시간 동안 아벨 오빠가 풍겨낸 에너지는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야말로 가관이었다.오빠는 지극히 프로페셔널하게 상황을 대했다.물론 그 프로페셔널함이란 막대한 에너지가 요구될 때 아벨 오빠가 보이는 특유의 방식이었다. 다시 말해, '상황 통제야말로 현재 가장 적절한 대응'이라고 결론 내린 사람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상황을 통제하려 애쓰는 게 겉으로 투명하게 다 보였다는 뜻이다.카라는 오빠가 마음껏 상황을 통제하도록 내버려 두었다.그리고 목요일 저녁, 자신이 직접 준비한 특별한 대체안을 오빠에게 털어놓았다. 둘만의 아주 특별한 이벤트였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알지 못하지만,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지 불과 3분 만에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