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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Author: Priscilla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05 08:52:23

리나의 시점

차 안은 지독할 정도로 적막했다.

가장 먼저 스친 생각이었다.

덜컹거리는 소리도, 엔진이 쥐어짜내는 신음도, 도로 턱을 넘을 때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직 침묵 속에서 미끄러지듯 달리는 매끄러움만이 존재했다.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도시의 풍경은 마치 내가 아주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관망하는 타인의 삶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정면만 가만히 응시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말을 꺼내지 않아도 그들은 알고 있는 듯했다. 내게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득 찬 말들이나 질문들, 혹은 당장 감당해내야 할 현실 따위가 비집고 들어오지 않는, 오롯이 나만의 일 분이 절실하다는 것을.

옆자리에는 헨리가 앉아 있었다. 가까우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딱 적당한 거리였다.

조수석에 탄 데미안은 곧은 자세로 문가에 한쪽 팔을 걸치고 있었고, 아벨은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진중하고 차분한 손길로, 두 손을 운전대에 올린 채.

세 명의 오빠.

내게 세 명의 오빠가 생겼다. 그들의 차에 타 그들의 집으로 향하고 있다니. 불과 24시간 전만 해도 나는 차가운 빗속 보도블록 위에 쓰러져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신세였는데.

손바닥을 배 위에 살포시 얹었다.

아주 잠시 동안. 이제 이 차 안에는 나 혼자가 아니라 둘이 함께하고 있음을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우리 둘 다, 이제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도시의 건물들이 점점 뜸해졌다. 비좁았던 골목길은 넓은 대로로 이어졌고, 신호등은 점점 드물어졌으며, 건물들은 서로 거리를 두고 도로 뒤편으로 물러나 앉았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내 정신은 정작 아무것도 담아내지 못했다.

마음은 여전히 그 아늑했던 병실 안에 머물러 있었다.

"등 뒤 왼쪽 밑에 점이 있지."라며 내 세계의 바닥을 무너뜨리던 아벨의 목소리가 귀전에서 떠나지 않았다. 두 오빠의 목을 끌어안고 얼굴 가득 환하게 웃던 사진 속 그 어린 여자아이. 세상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가리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천진난만하게 웃던 그 아이의 얼굴이 자꾸만 겹쳐졌다.

*어머님 아버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널 찾다가 눈을 감으셨어.*

데미안의 그 야속한 목소리도.

아무에게도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창가 쪽으로 더 바짝 돌렸다.

"다 왔어." 옆에서 헨리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면 목소리가 갈라져 터질 것 같았다.

차는 거대한 정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섰다.

나도 모르게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았다.

진입로는 정면을 향해 길고 곧게 뻗어 있었다. 양옆으로는 조각품처럼 정교하게 가꿔진 나무들이 들어서 있었고, 그 경계를 따라 이름도 모를 화려한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던 색감들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피어 있었다. 따스한 햇살이 나뭇잎과 꽃잎, 그리고 길 위에 내려앉아 온 세상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저택이 서 있었다.

잡지에서나 보았던 그런 집이었다. 감히 나 같은 사람이 넘볼 수 없는 세상이라 여겨져, 오래 바라보는 것조차 허영처럼 느껴져 서둘러 페이지를 넘겨버리곤 했던 바로 그 저택.

웅장한 하얀 외벽. 넓은 계단 위로 높게 솟은 거대한 기둥들. 건물 전면에 통유리로 내어 햇살을 그대로 흡수해 길게 반사해 내는 창문들. 원형 회차로 한가운데에서는 분수가 시원하게 물줄기를 내뿜고 있었고, 차가 멈추어서기도 전에 그 싱그러운 물소리가 먼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리고 저택의 입구, 계단을 따라 양옆으로 정갈하게 두 줄로 서 있는 정원과 하수인들.

단정한 차림새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나를.

입안이 바짝 말라왔다.

"여기가…… 당신들이 사는 집인가요?"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훨씬 작고 무력하게 터져 나왔다.

"우리가 사는 집이지." 헨리가 다정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교정해 주었다. "그리고 이제, 너의 집이기도 하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반박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그 현실감 없는 단어들이 내 삶의 궤적에 도무지 얹어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벨이 차를 멈춰 섰다.

잠시 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내 아벨이 백미러를 통해 나를 바라보았다.

"준비됐어?"

준비 따위 되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주변의 공기마저 다르게 느껴졌다.

방금 깎아낸 풀 내음, 이름 모를 화초의 짙은 향기, 그리고 분수대에서 퍼지는 서늘한 수증기. 발밑의 자갈은 유난히 희고 고르게 밟혔다. 가까이서 들리는 분수 소리는 웅장하고 차분해서, 마치 이 거대한 저택 자체가 숨을 쉬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두 줄로 정렬해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그 순간, 내 몰골이 얼마나 처참할지 피부로 강렬하게 깨달아졌다.

나는 병원 화장실에서 겨우 물만 묻히고 나온 처지였다. 옷은 사흘 전 모든 게 무너지기 직전, 패닉 상태에서 대충 가방에 쑤셔 넣었던 바로 그 옷이었다. 짐가방마저 길거리에서 의식을 잃은 사이 모조리 도둑맞아 버렸으니, 내 손에는 가방 하나, 외투 한 벌조차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평생을 벌어도 구경조차 못 할 이 거대한 저택의 계단 앞에, 나는 마치 길거리에서 방금 끌려온 듯한 차림으로 서 있었다.

실제로 길거리에서 끌려왔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허리를 바짝 폈다.

데미안이 우리보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는 줄지어 서 있는 직원들 앞에 섰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지만,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 이쪽은 리나 모리슨이다." 그는 담담하고 명확하게,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는 단정한 어조로 선언했다.

"우리 여동생이자, 이 가문의 고귀한 상속녀다." 그가 잠시 말을 멈추어, 그 말이 사람들의 귓가에 단단히 박히기를 기다렸다. "그에 맞게 깍듯이 대하도록. 누구든 아가씨께 무례하게 구는 자는, 내 손에 직접 단죄를 받을 것이다."

직원들의 자세가 순식간에 반인치쯤 더 곧게 펴졌다.

"예, 가주님."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목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줄 맨 앞에 서 있던 나이 지긋한 여성이 앞으로 다가왔다. 은빛 머리칼에 따스한 눈매, 눈가까지 아우르는 온화한 미소를 지닌 분이었다. 그녀가 나를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환영합니다, 리나 아가씨.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기쁩니다."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를 진심으로 반겨주는 사람들 앞에 어떤 자세로 서 있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내 존재가 잘해야 '겨우 용인되는 수준'이었고, 나쁠 때는 '노골적인 짐' 취급을 받던 집에서 6년을 살았다. 누군가의 공간에 들어서며 환대를 받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기억에서 완전히 잊혀버린 후였다. 아니, 처음부터 알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아벨이 내 어깨 옆으로 다가왔다. "가자."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네 방을 구경시켜 줄게."

계단은 고급스러운 대리석이었다.

넓게 곡선을 그리는 빛나는 돌계단 위로, 중앙 홀 천장에 달린 거대한 샹들리에의 빛이 화려하게 부서져 내렸다.

난간은 진한 빛깔의 매끄러운 목재로 만들어져 있어 손바닥에 스치는 촉감이 차갑고 부드러웠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난간을 의지하듯 꼭 쥐고 걸었다. 의지할 곳이 필요했으니까.

아벨은 내 옆에서 걸음을 맞추었다. 대화를 강요하며 침묵을 채우려 하지 않는 그가 고마웠다. 그저 내 걸음걸이에 맞춰 천천히 걸으며, 옆을 지날 때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짧게 설명해 줄 뿐이었다. 2층 복도의 초상화 갤러리, 두 칸 너머에 있는 서재, 아침 햇살이 가장 예쁘게 드는 티룸 같은 곳들을.

그 모든 걸 마음에 담아보려 애썼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한꺼번에 받아들이기엔 이 공간의 크기가, 그 안의 정적과 품격이 너무나 거대했다.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고결함. 모든 기물 하나하나가 정성스레 선택되고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결코 과시하기 위해 꾸며진 집이 아니었다. 세대를 거쳐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 묻어나는, 스스로의 가치를 굳이 입 바르게 증명할 필요가 없는 진짜 가문의 저택이었다.

아벨이 넓은 복도 끝에 있는 커다란 문 앞에 멈춰 섰다.

그가 문을 열고 옆으로 물러섰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멈춰 서고 말았다.

방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넓었다.

에이든과 내가 신혼 시절 함께 살던 아파트 1층 전체를 합친 것보다 커 보였다. 방 한가운데에는 기다란 기둥이 솟은 침대가 놓여 있었고, 그 위로는 하얀 커튼이 흐드러지게 드리워져 있었다. 단단하게 펼쳐진 홑이불은 마치 뭉게구름을 눌러놓은 듯 포근해 보였다. 창가 쪽에는 의자 두 개와 낮은 테이블이 놓인 티타임용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고, 한쪽 벽면에는 따스한 조명이 감싸고 있는 화장대가 서 있었다. 살짝 열린 반대편 문 너머로 대리석으로 장식된 넓은 욕실이 보였고, 멀리서도 큼직한 욕조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으로 연결된 드레스룸.

문이 열려 있는 그 내부에는 이미 옷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행거마다 색상과 두께별로 완벽하게 정돈된 옷들.

아래 선반에는 갖가지 구두가, 고리에는 고급스러운 가방들이 걸려 있었다. 그 수많은 옷과 신발의 치수가,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거짓말처럼 내 몸에 딱 맞춘 듯 정확했다.

천천히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두꺼운 카펫 덕분에 발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침대 모서리로 다가가 모서리 깃을 살짝 만져보았다. 천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순간 눈시울이 시려왔다. 화장대 위에 놓인 자그마한 향수병을 집어 들었다. 눈물방울 모양으로 조각된 섬세한 유리병이었다. 조심스럽게 제자리에 놓았다.

손이 다시 떨려오기 시작했다.

뒤에서 사람이 들어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저 방 안의 공기가 아까보다 빽빽해졌음을 본능적으로 느꼈을 뿐이다. 뒤를 돌아보았다.

세 사람이 서 있었다. 데미안, 헨리, 아벨. 문가에 나란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 안을 다시 둘러보았다. 옷으로 가득 찬 드레스룸, 넓은 침대, 화장대, 그리고 통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끝없이 푸르고 단정하게 가꿔진 정원의 풍경을.

"이건…… 너무 과해요." 마지막 단어에서 목소리가 갈라져 터졌다. "전 이런 걸 받을 자격이……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요……."

"거기까지." 데미안의 목소리가 내 말을 단칼에 잘라냈다. 날카롭지 않았다. 그저 어떤 반박도 허용하지 않는 단호함이 실려 있을 뿐. "이건 다 네 거다. 처음부터 네 것이었어. 자격을 증명할 필요 따위 없다."

헨리가 방을 걸어질러 와 내 옆에 섰다.

"집에 온 거야, 리나."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그게 전부란다. 넌 이제 집에 돌아온 거야."

그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터져 버렸다.

웅장한 저택 때문이 아니었다. 드레스룸을 채운 화려한 옷들이나 밖의 분수대, 나를 환영해 주던 직원들 때문도 아니었다. 그 가공할 만한 물질적인 부 때문이 아니었다.

오직 그 한 단어.

집.

그저 담담하게, 마치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던져진 그 한마디. 마치 아주 오랫동안 진실이었던 사실을 이제야 입 밖으로 끄집어낸 것뿐이라는 듯한 그 어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정류장 벤치에서 흘렸던 절망적이고 헛헛한 울음이 아니었다. 빗속에서 지쳐 넋을 놓고 흘리던 눈물도 아니었다.

이건 전혀 다른 눈물이었다. 내 안의 가장 깊은 곳, 아주 오랫동안 꽁꽁 닫혀 있던 문이 마침내, 마침내 열리며 터져 나오는 울음이었다.

헨리가 먼저 나를 품에 안아주었다. 뒤이어 아벨이 나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웃지 않던 데미안마저…… 마치 온기 따위는 일찌감치 버리고 살아온 사람처럼 굴던 그 데미안마저, 내 등 뒤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그저 손 하나,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 어떠한 말보다 깊은 마음이 그 손길을 통해 전해졌다.

저녁 식사는 더할 나위 없이 시끌벅적하고 따스했다.

길다란 식탁은 자칫 딱딱한 분위기를 풍길 법도 했지만, 형제들 덕분에 정반대의 온기로 가득 찼다. 헨리가 주로 입을 열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이야기, 이 저택에서 함께 자라난 어린 시절의 기억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채 떠나보낸 부모님의 모습이 헨리의 생생한 묘사 속에서 가슴 시리도록 또렷하게 살아났다.

어머니는 집에 상주하는 전담 셰프들이 있었음에도 일요일 아침이면 늘 직접 요리를 하셨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만든 음식은 맛부터가 다르다면서.

아버지는 매일 저녁이면 돋보기안경을 어디 뒀는지 모르겠다며 시치미를 떼셨다고 한다. 그러면 어머니가 다가와 안경을 찾아주시곤 했는데, 안경은 늘 아버지가 놔둔 바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고.

어머니는 단 한 번도 그 뻔한 거짓말을 지적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소리 내어 웃고 난 스스로에게 놀랄 만큼, 식당 안에 울려 퍼진 내 웃음소리는 생소하면서도 낯설고, 참 좋았다.

아벨은 헨리의 이야기에 유쾌한 덧붙임을 더해 분위기를 더욱 띄웠다.

그에게는 재주가 있었다. 적재적소에 위트 있는 추임새를 넣거나 엉뚱한 디테일을 보태어 온 집안을 웃음바다로 만드는 재주가. 메인 요리가 치워지기도 전에 나는 두 번이나 더 소리 내어 웃었다.

데미안은 주로 조용히 듣는 편이었다. 그는 특유의 절제된 손길로 식사를 마쳤고, 꼭 필요한 순간에만 입을 열 뿐 쓸데없는 말은 보태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한 번, 아벨이 여덟 살 때의 에피소드를 꺼냈을 때였다. 동네에 있는 키 큰 나무란 나무는 모조리 뒤지고 다녔다는 이야기였다. 진지한 여덟 살짜리의 고집으로, 내가 나무 위에 숨어 있으니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고 확신했었다면서. 그 순간, 데미안의 얼굴 위로 아른거리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나타났다 사라진 그것은 서러움이었을 수도, 혹은 그 서러움보다 더 깊고 오래된 그 무엇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가 접시 쪽으로 시선을 내리자 그 감정은 다른 이들이 채 알아채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나는 똑똑히 보았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애를 써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침대는 내 평생 누워본 그 어떤 자리보다 포근했다. 방 안은 따스하고 아늑했으며 침구에서는 깨끗하고 은은한 꽃향기가 풍겼다. 나를 위협할 만한 요소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머리로는 그걸 잘 알고 있었지만, 내 의식은 멈추기를 거부했다.

에이든의 얼굴. 나가라고 말하던 그의 무심한 눈빛. 화풀이도, 죄책감도 없이 그저 깔끔하게 끝냈다는 표정. 거실 바닥을 긁으며 밀려나던 내 짐가방 소리. 내 턱을 틀어쥐던 바네사의 손길. 비. 버스 정류장. 그리고 정신을 잃기 직전 나를 감싸던 차가운 보도블록의 촉감.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실 문 뒤에 걸려 있던 가운을 걸쳐 입었다. 가슴께에 하얀색 M 자가 정교하게 자수 놓인 두툼하고 무거운 가운이었다. 가운을 여미고 복도로 발을 내디븠다.

걸레받이를 따라 낮게 켜진 간주등만이 복도를 밝히고 있었다. 저택은 조용했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한 손으로 난간을 쓸어내리며 물을 마시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거실을 반쯤 질러갔을 때였다.

왼편 문틈 사이로 가느다란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데미안의 서재였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그가 들어가는 것을 보았기에 진작 나온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안에 있는 모양이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물만 마시고 다시 방으로 올라가자. 그를 방해할 이유는 없으니까.

문 앞을 두 걸음쯤 지나쳤을 때였다.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에이든 노먼."

데미안의 목소리였다. 낮고, 집요하며, 서늘했다. 이미 어떤 결정을 완벽히 내린 후, 그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이름을 나지막이 입 밖으로 짓씹듯 내뱉는 어조.

우뚝 멈춰 섰다.

손으로 벽을 짚었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내부가 보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소리를 듣기엔 충분한 틈이었다.

"은행 거래 내역, 사업적 관계, 모든 계약서, 파트너, 그리고 채무 관계까지. 우리가 움직이기 전에 그자에 대한 모든 정보를 완벽하게 파악해 놔." 아벨의 목소리였다. 낮고 예리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보여주던 유쾌함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시기를 잘 맞춰야 해." 헨리가 말을 받았다. "리나는 이미 너무 많은 일을 겪었어. 일이 복잡해지기라도 하면……."

"복잡해질 일 없다." 데미안이었다. 여전히 낮고 차분한 목소리. 조금의 조급함도 없었다. 그리고 단 한 조각의 분노조차 섞여 있지 않았다. 그 기묘한 무감각함이, 차라리 미친 듯이 불같이 화를 내는 것보다 훨씬 더 지독하고 섬뜩하게 다가왔다. "그놈에게서 모든 걸 빼앗을 거다. 사업도, 명예도, 돈도."

잠시 정적이 흘렀다.

"완전히 짓밟아버릴 테니까."

벽에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 사정없이 뛰어댔다.

어둡고 고요한 복도 한가운데, 만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은 내 세 오빠가, 나를 빗속으로 쫓아낸 그 남자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매장할지 차근차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도망쳐야 했다.

못 들은 척 발길을 돌려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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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나의 시점요즘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나 역시 같은 방식으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휴대전화 화면을 통해서.눈을 뜬 지 겨우 4분 남짓. 아직 침대에 누워 전날의 일들이 다 정돈되지 않은 그 모호한 의식 속을 헤매고 있을 때, 알림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처럼 알림음들이 끊임없이 겹쳐 들렸고, 이전 알림을 채 확인하기도 전에 또 다른 알림이 꼬리를 물었다. 나는 무음으로 전환한 뒤, 무언가 커다란 일이 터졌음을 직감한 사람 특유의 침묵 속에서, 어떤 일인지 확인하기 직전의 그 마지막 짧은 유예를 즐기며 화면을 가만히 노려보았다.4분 만에 쌓인 알림만 무려 47개.몸을 일으켜 앉았다.내가 어둠 속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한 채, 휴대전화 속 에이든의 메시지를 노려보고 있던 자정 무렵에 올라온 첫 헤드라인. 그건 내가 평소 존경하던 한 경제지의 기사였다. 평소 개인적인 스캔들 따위는 다루지 않고,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는 것을 자부심으로 삼던 바로 그 매체였다.**[모리슨 코퍼레이션의 신임 CEO: 에이든 노먼이 버린 여자]**아침이 되자, 다른 모든 언론사가 그 기사를 사방으로 퍼 나르기 시작했다.가운 차림으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스크롤을 내리며 기사들을 읽었다. 뭐라고 바로 정의할 수 없는 기묘하고 불안정한 감정이 속에서 휘몰아쳤다.기사 내용은 전부 사실이었다.바로 그 점이 나를 더 섬뜩하게 만들었다. 자극적으로 부풀려지지도, 날조되지도 않았으며, 진실을 밝히기보다 조회수를 노리고 꾸며낸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저 철저한 사실의 나열이었다. 누군가 작정하고 취재를 한 것이 틀림없었다. 날짜를 대조하고, 기록을 찾고, 우리를 알던 사람들을 취재해 엮어낸 전말. 그들이 완성해 낸 그림은 너무나 정교하고 지독할 만큼 사실이어서, 차라리 과장된 소문이었으면 반박이라도 해볼 텐데 그러지도 못해 오히려 마음이 더 어지러웠다.휴대전화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창밖을 내다보았다.커

  • 모리슨 가문의 잃어버린 상속녀   제12장

    리나의 시점잠시 후 그가 겨우 입을 뗐다.당연한 결과였다.에이든 노먼은 단 한 번도 말문이 막혀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언제나 언어를 무기로 삼던 자였다. 가슴을 후벼 파고 들어와 며칠이고 맴도는 날카롭고 거친 말들, 뱉은 지 6개월이 지난 뒤에도 새벽 3시에 퍼뜩 잠에서 깨어나 환청처럼 들려오게 만드는 그런 말들 말이다. 그가 쏟아낸 말들은 지난 6년 동안 빼낼 수도 없는 가시가 되어 내 몸 구석구석에 박혀 있었다. 그의 목소리 톤 하나만으로 다음에 어떤 폭언이 쏟아질지 파악하고 본능적으로 몸을 사리는 법을 배워온 6년이었다.테이블 상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천천히. 그리고 아주 다분히 의도적으로. 데미안 오빠가 회의실에 앉을 때처럼, 마치 그 의자가 오직 자신만을 위해 제작되었고, 자신의 등장 시점이 가장 완벽한 타임라인이며, 그 외의 모든 것은 그저 자신이 시작하기만을 기다리는 존재라는 듯이.테이블 위에 양손을 얌전히 겹쳐 놓았다.에이든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4분 40초 남았어."그가 눈을 껌벅였다. "뭐라고?""당신에게 남은 시간이 4분 40초라고." 내가 말했다. "지금처럼 허비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효율적으로 쓰는 게 좋을 텐데."그는 늘 그렇듯 분통부터 터뜨리기 시작했다."지금 내 회사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나 해?" 그가 테이블 가까이 바짝 다가서며 의자 등받이를 부서질 듯 틀어쥐었다. "계약들이 순식간에 공중분해되고 있어. 고객사들은 전화를 안 받고, 수년간 같이 일해온 비즈니스 파트너들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갑자기 연락을 끊어버렸다고!"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논리를 쌓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고성을 질러대기 위해서였다. 마치 목소리가 커질수록 자신의 주장이 더 진실에 가까워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내가 답을 들으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럼 질문을 해." 내가 그의 말을 끊었다.그가 입을 턱 다물었다."답을 들으러 왔다며." 내가 말했다. "그렇다는 건 질문이 있다는 뜻이겠지. 물

  • 모리슨 가문의 잃어버린 상속녀   제11장

    리나의 시점제이드는 여전히 지시를 기다리며 내 곁에 서 있었다.주변 로비는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행사를 정리하는 직원들, 카메라 장비를 챙기는 취재진, 특유의 따뜻하고 다정한 눈빛으로 언론 홍보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헨리 오빠, 그리고 어떤 공간에 있든 특유의 정교하고 완벽한 일 처리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클레어까지. 그 모든 풍경은 불과 30초 전과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 모든 장면이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그 사람, 어디 있지?" 내가 물었다."메인 로비 입구입니다." 제이드가 답했다. "보안팀이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아주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단어를 신중하게 고를 때 나오는 그 특유의 침묵. 제이드가 이처럼 말을 아낀다는 건 다음에 이어질 내용에 상당한 주의가 필요함을 의미했다. "목소리가 아주 큽니다.""얼마나?""상당히요." 그녀가 말했다. "자신의 계약을 파기한 책임자를 만나겠다고 요구하는 중입니다. 대략 20분 전부터 같은 말을 반복하며 갈수록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보안팀이 입구에서 막아서고는 있지만, 제 발로 돌아갈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혼자 왔어?""네, 대표님. 변호사나 동행인은 없습니다.""위협적인 언행도 있었나?""직접적인 위협은 없었습니다." 제이드가 말했다. "분통을 터뜨리며 항의하는 수준입니다. 아직 법적으로 문제 삼을 만한 선을 넘지는 않았습니다." 그녀가 다시 말을 멈추었다. "대표님이 여기 계시다는 건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담당자를 나오라고 소리치고 있을 뿐, 그 책임자가 누구인지는 아직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그 사실을 가만히 반추해 보았다.그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계약서 맨 위에 내 가문의 이름이 박힌 모리슨 코퍼레이션 본사 로비에 서서, 이 일을 저지른 책임자를 당장 내놓으라고 고함을 지르고 있으면서도, 그 책임자가 자신이 임신한 채 빗속으로 쫓아냈던 바로 그 여자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로비 건너편에 서 있는 데미안 오빠를 바라보

  • 모리슨 가문의 잃어버린 상속녀   제10장

    리나의 시점그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정확히 3분 동안 시체처럼 가만히 누워 있었다.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걸어가 거울 속 내 모습을 바라보며 크게 읊조렸다. "절대 안 돼."오늘 하루 전체를 두고 한 말이었다.기자회견. 사방에서 터져 나올 카메라 플래시. 쏟아질 질문 세례.불과 6주 전만 해도 버스 정류장 벤치에서 잠을 청하던 내가,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거대 기업의 대표이사(CEO)로서 수많은 기자들 앞에 서서 취임 선언을 한다니.절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그럼에도 양치를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벨은 이미 식탁에 앉아 프린트된 목록 하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앉아." 그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해 주면 어디가 부러지나 보네.""앉기나 해. 소피아가 오기 전까지 40분 남았어. 머리를 만지기 전에 이 답변들부터 달달 외워둬야 할 테니까."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가 식탁 너머로 목록을 스르륵 밀어주었다. 종이를 내려다보았다.열두 개의 질문. 기자들이 물어볼 확률이 가장 높은 문항들이었다. 각 질문 옆에는 아벨의 글씨체로 답변의 가이드라인이 딱 한 줄씩 적혀 있었다. 대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방향성이었다. *비전 강조할 것. 회사 이야기로 돌릴 것.**에이든에 대해 언급하지 말 것.*마지막 문장에는 밑줄이 두 줄이나 그어져 있었다."에이든에 대해 언급하지 말 것." 소리 내어 읽었다."어떤 상황에서든 절대로.""만약 그쪽에서 직설적으로 물어보면?""직설적으로 물어볼 거다." 아벨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넌 미소를 지으며 사생활은 말 그대로 개인적인 일일 뿐이며, 오늘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모리슨 코퍼레이션의 미래를 논하기 위함이라고 답하면 돼." 그가 내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할 수 있겠어?"솔직하게 스스로에게 물었다."응." 내가 답했다."좋아." 그가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다. "못 하겠다면 지금 당장 말해야 다른 답변을 준비할 테니까.""할 수 있다고

  • 모리슨 가문의 잃어버린 상속녀   제9장

    리나의 시점금요일 아침, 아벨이 서류 봉투 하나를 들고 내 교육 장소로 들어섰다. 자신이 무언가를 단단히 즐기기 직전에나 지어 보이던 바로 그 특유의 표정을 띤 채였다.그가 내 앞 테이블 위로 서류 봉투를 던지듯 내려놓았다."에이든 노먼." 그가 말했다. "현재 상황이다."서류 봉투를 한번, 그리고 그를 한번 바라보았다.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군요.""전문가적 관점에서만 말이지." 그가 의자에 앉으며 팔짱을 꼈다. "열어봐."사진 속에 담긴 모습은 차마 눈 두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첫째 주에만 계약 다섯 건이 날아갔다. 그다음 며칠 동안은 세 건이 추가로 재계약 불가를 통보받았다. 기존 계약을 파기당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재계약이 불발된 것이었는데, 그게 어떤 면에서는 훨씬 더 잔혹했다. 에이든이 반발하거나 손쓸 명분조차 주지 않았으니까. 더 이상 열리지 않는 문을 향해 주먹질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가 하틀리 그룹에 걸어댄 전화는 9일째 먹통이었다. 중개인을 거쳐 어떻게든 연결을 시도해 보았으나, 중개인 중 두 명은 에이든과의 접촉 사실을 곧바로 모리슨 코퍼레이션 측에 직접 밀고해 왔다. 그 업계의 충성심이 현재 누구를 향해 있는지 명확히 보여주는 대목이었다.그는 미친 듯이 뒤를 파헤치는 중이었다. 아벨의 정보통에 따르면,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일이 무너져 내리는 그 경계마다 왜 자꾸 '모리슨'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오는지 조사할 흥신소를 고용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비즈니스상의 라이벌이나 수작을 부리는 경쟁업체의 소행쯤으로 여길 뿐이었다. 그 일이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비 오는 날 거리로 쫓아낸 여자가, 자신의 전화기를 먹통으로 만든 원인이라는 사실을 그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서류 한 장을 넘겼다."몇 년 동안 연락도 끊고 살던 사람들한테까지 전화를 돌리고 있더군." 아벨이 말했다. "옛 인맥들, 전 직장 동료들, 상황을 파악해 줄 만한 선이 닿는 자라면 누구에게든 붙잡고 늘어지는 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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