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바자회를 준비하는 유치원 강당에는 학부모들의 말소리와 기부 물품 상자가 가득했다.
나는 물건을 분류하며 오랜만에 손을 움직이는 일 자체를 즐겼다. 그때 진한 장미 향과 함께 임혜진 씨가 다가왔다.“예전엔 하우스키퍼였다면서요. 이런 더러운 물건은 잘 다루시겠네요.” 그녀가 내민 상자에는 진흙 묻은 장난감 차와 녹슨 책꽂이, 누렇게 변한 인형이 들어 있었다. 나는 차의 바퀴를 돌려 보고 웃었다.“버릴지는 씻어 본 다음에 정할게요.” 혜진 씨는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떠났다. 상자 속 물건을 살피다 그녀의 등 뒤를 다시 보았다. 새 가방을 꽉 쥔 손과 여러 번 수선한 듯한 구두가 눈에 띄었다. 점심 무렵 뒷문에서 손을 씻는데 벽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더는 빌릴 수 없다니요? 제 명의인데…&he“그런데 왜 네가 넘어졌다고 했어?” 해준이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건우가 그림을 밟을 때에도 웃지 않았다고 했다. 입술을 꽉 물고, 뒤에 서 있던 엄마를 자꾸 돌아봤다고. 자기가 사실대로 말하면 건우가 더 혼날까 봐 무서웠다는 것이다.“엄마도 건우 엄마한테 화내면 어떡해?” 해준이는 건우가 웃지 않았던 얼굴을 흉내 내려다 말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날 건우의 엄마가 바로 뒤에 있었다고 했다. 나는 해준이의 차가워진 손을 감쌌다. 억울한 일을 당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집안부터 걱정하고 있었다.“말해 줘서 고마워. 그래도 네가 당한 일까지 혼자 숨기지는 않아도 돼.” 해준이는 다시 울었다. 나도 더는 말을 잇지 못해 등을 가만히 두드렸다. 작은 등이 손바닥 아래에서 오르내리는 동안, 아이가 쥔 종이 끝은 계속 떨렸다. 아빠의 얼굴 위를 가로지른 진흙 자국을 닦을 수 있을지 생각했지만, 지금은 묻지 않았다. 세면대에는 아직 비눗물과 물감이 남아 있었다.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 평소보다 빠른 발소리가 복도를 지나 세면실 앞에서 멈췄다. 태윤은 양복 차림 그대로 서 있었다. 느슨해진 넥타이 아래로 아직 바깥의 찬 공기가 묻어 있는 듯했다. 울고 있는 아들과 발치의 젖은 도화지를 본 뒤 한쪽 무릎을 굽혔다. 평소보다 훨씬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나왔다.“해준아. 무슨 일이야?” 아이는 그림을 내밀며 자기가 떨어뜨렸다고 다시 사과했다. 태윤은 망가진 종이를 받았다. 진흙이 묻은 자기 얼굴을 손끝으로 훑는 동안 턱이 굳어졌다.“떨어뜨리기만 해서 이렇게 되진 않았겠지.”
샛별유치원으로 해준이를 데리러 간 날, 아이의 걸음이 평소와 달랐다. 연한 하늘색 원복 앞에는 검은 진흙과 물감이 묻었고, 품에 안은 도화지는 가장자리가 찢긴 채 한가운데 신발 자국이 찍혀 있었다. 가까이 가서 무릎을 굽혔다.“다친 데는 없어? 옷은 어떻게 된 거야?”“내가 넘어졌어. 물감 물을 들고 있다가…… 그림도 떨어뜨렸는데, 사람들이 밟았어.” 해준이는 종이를 등 뒤로 숨기며 억지로 웃었다. 작은 손에 묻은 빨강과 파랑 물감은 이미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 넘어졌다는 말과 달리 눈은 다른 사람을 걱정하는 듯했다. 그림 가운데 선명한 신발 밑창 자국이 왜 남았는지 묻고 싶었다. 그래도 아이가 입을 다물기로 한 이유를 모르는 채 몰아세울 수는 없었다. 나는 묻고 싶은 말을 삼키고,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며 함께 빨자고 했다.“해준 어머님.” 뒤에서 하이힐 소리가 가까워졌다. 학부모 모임을 이끄는 이수정 씨였다. 아이가 혼자 뛰다 넘어져 물감 통을 엎었다고 자기 아들에게 들었다며, 해준이의 행동까지 빈정거렸다. 곁에 서 있는 이건우는 구김 없는 원복을 입고 바닥만 보고 있었다. 건우의 검은 구두 옆면에 붉고 푸른 물감이 조금 묻어 있었다. 원복에는 주름 하나 없었는데 신발에만 그 자국이 있었다. 해준이는 그 신발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건우 역시 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양손을 몸 옆에 붙이고 숨소리도 내지 않는 아이의 얼굴을, 수정 씨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해준이의 어깨를 감싸고 그녀에게 답했다.“해준이가 일부러 남 탓을 할 아이는 아니에요. 옷은 빨면 됩니다.” 수
바자회를 준비하는 유치원 강당에는 학부모들의 말소리와 기부 물품 상자가 가득했다. 나는 물건을 분류하며 오랜만에 손을 움직이는 일 자체를 즐겼다. 그때 진한 장미 향과 함께 임혜진 씨가 다가왔다.“예전엔 하우스키퍼였다면서요. 이런 더러운 물건은 잘 다루시겠네요.” 그녀가 내민 상자에는 진흙 묻은 장난감 차와 녹슨 책꽂이, 누렇게 변한 인형이 들어 있었다. 나는 차의 바퀴를 돌려 보고 웃었다.“버릴지는 씻어 본 다음에 정할게요.” 혜진 씨는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떠났다. 상자 속 물건을 살피다 그녀의 등 뒤를 다시 보았다. 새 가방을 꽉 쥔 손과 여러 번 수선한 듯한 구두가 눈에 띄었다. 점심 무렵 뒷문에서 손을 씻는데 벽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더는 빌릴 수 없다니요? 제 명의인데…….” 나는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오후에 다시 나타난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카드 결제기가 한 번 오류를 내자 얼굴이 굳었다. 다음 날 사람이 없는 정원에서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제가 잘못 들었을 수도 있어요. 빚 때문에 곤란하신가요?” 한동안 입을 닫고 있던 혜진 씨는 남편이 회사 일에 필요하다며 빈 위임장에 서명하게 했다고 털어놓았다. 자신도 모르는 대출이 있었고, 자금 사정이 나빠질 때마다 남편은 그녀의 생활비 탓을 했다. 비싼 옷과 가방도 남편이 밖에서 형편이 좋아 보이도록 들라고 한 것이었다.“제가 잘못한 줄 알았어요.”“서류를 찍어 둔 사진이나 사본이 있나요?” 조금 있다는 말에 아는 변호사 사무실 명함을 꺼냈다. 혜진 씨는 내가 태윤의 힘으로 남편을 망하게 할 생각이냐고
퇴원하고 현관문을 열자 거실 입구에 색종이 고리가 걸려 있었다. 고리의 크기도 높이도 제각각이었다. 그 아래에서 해준이가 뛰어나왔다.“엄마, 어서 와!” 태윤은 이음이를 안은 채 문턱 앞에서 발밑을 살피고, 아기 머리를 가슴 쪽으로 바짝 당긴 뒤 들어왔다. 해준이가 아빠를 올려다보았다.“아빠, 잘 안아?”“그럼.”“근데 어깨 딱딱해.” 태윤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나는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오후에는 이음이가 울기 시작하자 해준이도 내 품에 안기겠다고 했다. 혼자서 둘을 안을 수는 없었다.“내가 이음이 볼게.” 태윤이 딸을 안고 거실을 천천히 돌았다. 나는 오랜만에 해준이를 두 팔 가득 끌어안았다. 아이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엄마, 이음이한테 갈 거야?”“지금은 여기 있을 거야.” 태윤은 딸을 달래다 말고 소파 앞에 섰다. 자기도 앉고 싶다는 말에 해준이가 잠깐 망설이다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래도 내 옷소매는 놓지 않았다. 네 사람이 앉으니 익숙하던 소파가 좁아졌다. 기저귀를 갈 때는 해준이가 아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테이프 반대야.”“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엄마가 가르쳐 줬어.” 태윤은 말없이 테이프를 다시 붙였다. 밤에는 해준이가 전에 아빠와 만든 발판에 올라 스스로 손을 씻었다. 태윤은 이음이를 안고 뒤에 서 있었다.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치자 해준이가 거품 묻은 손을 흔들었고, 물방울이 아빠의 소매에 튀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처음 듣는 울음소리가 분만실을 채웠다. 작고 붉은 아이가 내 가슴에 놓였다. 아직 마르지 않은 따뜻한 냄새가 났다. 갓 태어난 이음이의 손가락과 손톱은 건드리기 겁날 만큼 여렸다. 울음은 가늘면서도 생각보다 힘찼다.“이음아.” 이름을 부르자 울음이 잠깐 멎은 것 같았다. 태윤은 곁에 서서 딸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안아 주라고 하자 조산사에게 팔의 모양을 배운 뒤 스스로 손을 내밀었다.“이렇게 하면 됩니까?”“네. 머리를 받쳐 주세요.” 작은 몸이 그의 품에 들어갔다. 태윤은 숨을 참은 채 서 있다가 어깨에 힘을 빼라는 말을 듣고 팔꿈치를 조금 내렸다. 해준이를 처음 안았을 때에도 이렇게 놀랐던 사람이었다. 오늘은 아이의 머리가 편히 놓일 때까지 제 손으로 자세를 고쳤다.“이음아. 처음 만나네. ……내가 아빠야.” 아기는 계속 울었다. 지금 자기소개를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니, 앞으로 오래 볼 사이인데 인사는 해야 한다고 우겼다. 나는 웃다가 눈물이 났다. 출산 때 움켜쥐어 잔뜩 구겨진 그의 소매가 딸의 뺨에 닿았다. 조산사가 익숙해 보인다고 칭찬하자 태윤의 얼굴에 잠깐 자신감이 떠올랐다.“둘째니까요.”“첫째 때는 침대 앞에서 두 시간이나 굳어 있었으면서.” 아기를 검사받으러 보내고 그는 다시 내 곁에 왔다. 어디 아픈 데 없느냐고 묻기에 피곤하다고만 했다. 눈이 감기려는 순간 손끝을 움직였더니 바로 잡아 주었다.“고마워, 서린.” 낮은 목소리가 한 번 더 나
예정일을 일주일 앞둔 밤, 잠이 오지 않아 거실로 내려왔다. 시계 초침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태윤은 내가 빈자리를 남겼다는 걸 알아챘는지 곧 따라 내려와 담요를 가져왔다.“깨웠어?”“옆이 비었는데 모를 리가.” 나는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두 번째라 조금 덜 무서울 줄 알았다는 말이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 태윤도 그렇다고 했다. 해준이를 낳을 때는 내가 두려움을 하나 말하면 그가 준비할 일 열 가지를 늘어놓곤 했다. 오늘은 등을 감싼 손만 따뜻했다.“이음이가 아빠를 닮으면 큰일이겠어.”“해준이랑 둘이 널 두고 다투겠군.” 진지한 얼굴이 우스워 웃으려는 순간 배 안쪽이 조여 왔다. 그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태윤은 곧바로 병원에 전화하려 했지만, 나는 소매를 잡아당겼다.“잠깐만. 얼마나 갔는지 봐 줘.” 수십 초 만에 통증이 가라앉았다. 가진통일 수도 있다고 하자 그가 휴대전화에 시각을 적었다. 나는 회사 일보다 꼼꼼하다고 놀렸다.“회사는 날 대신할 사람이 있어.” 태윤은 다음 통증을 기다리며 한 번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아프지 않으니 먼저 잠이 밀려왔다. 다시 아프면 깨울 테니 옆에 있어 달라고 하자, 그제야 휴대전화를 넣었다. 내밀기 전에 바지에 한 번 닦은 손은 여전히 조금 젖어 있었다. 침대에 누울 때까지 그는 등을 받쳐 주었다. 거실 창밖으로 차 한 대가 지나가고, 냉장고가 내던 낮은 소리가 멎었다. 그는 그 소리까지 듣고 있는 사람처럼 등을 꼿꼿이 세웠다. 나는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그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갔다.&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