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망가진 손으로 하루를 버티던 한서경은 어느 날, 가장 믿었던 다정함을 의심하게 된다. 비밀스러운 기록, 흔들리는 관계, 그리고 다시 시작된 심장. 진짜 구원의 비밀은....
Voir plus‘내 손을 부러뜨린 여자에게, 시우 씨는 이번 달에도 500만 원을 보냈다.’
서경은 수령인 칸을 손가락으로 가렸다. 김채린. 손을 떼어도 같은 이름이었다.
동명이인이면 됐다. 흔한 이름이니까. 서명만 다르면.
마지막 획이 길게 빠져 이름 밑에 줄을 긋고 있었다. 학교에서 제 소묘집을 망쳐놓은 뒤에도 채린은 꼭 저렇게 이름을 남겼다. 누가 그랬는지 숨길 필요조차 없다는 듯이.
서경은 종이를 넘기려 했다. 오른손 약지가 펴지지 않았다.
바이올린 활을 놓친 뒤로, 10년째 제때 펴지지 않는 손가락이었다.
“서경아. 커피 식겠다.”
서재 문밖에서 시우가 불렀다.
서경은 펼쳐놓은 서류를 덮지 못했다. 왼손으로 오른손 약지를 감싸고서야 종이 위에 떨어지던 그림자가 멎었다.
“응. 금방 갈게요.”
목소리가 평소처럼 나와서 놀랐다.
시우가 맡긴 후원비 정산철이었다. 늘 날짜순으로 영수증만 정리했다. 누구에게 주는 돈인지는 관리번호 뒤에 가려져 있었다.
이번에는 C-04 뒤에 수령 확인서가 붙어 있었다. 돈을 받은 사람의 이름과 서명이, 처음으로 드러난 종이였다.
김채린.
지급 사유는 생활지원.
서경은 다음 장을 넘겼다. 전월에도 500만 원, 그 전달에도 같은 금액. 모두 매달 15일에 지급되어 있었다.
지난달 15일에는 비가 왔다. 오른손이 아파 물컵을 놓칠 뻔한 날이었다. 시우는 대신 컵을 들어 입에 대주고, 저녁 내내 손을 주물러주었다.
그날 이 여자에게도 돈을 주었구나.
그날 시우는 물을 흘린 그녀에게 괜찮다고 했다. 셔츠는 새로 사면 된다고. 서경은 그 말이 고마워, 손을 주무르는 그에게 아프다는 말도 참았다.
김채린도 그날 돈을 받았다. 새 셔츠 몇 벌쯤은 마음대로 살 수 있는 돈을.
종이 가장자리가 손톱 밑을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아픈 데를 정확히 알았다.
“많이 남았어?”
시우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서경은 휴대전화 카메라를 켰다. 수령 확인서 한 장. 관리번호와 날짜가 적힌 정산표 한 장. 두 번째 사진에 제 손 그림자가 걸렸다.
문손잡이가 내려갔다.
그녀는 화면을 끄고 전화기를 뒤집었다. 확인서를 다른 종이 밑으로 밀어 넣은 손끝이 떨렸다.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들켜서는 안 되는 일을 한 사람처럼.
문이 열리고 시우가 들어왔다. 매듭을 짓지 않은 넥타이가 셔츠 양옆으로 늘어져 있었다.
“밥부터 먹지. 내가 어려운 걸 맡겼나?”
“날짜가 안 맞는 게 있어서요.”
“그런 건 윤 비서한테 넘겨. 네가 머리 아프게 볼 필요 없어.”
그가 그녀 옆으로 와서 손목을 잡았다.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서경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종이 밑에 숨긴 이름이 시야에서 멀어졌다.
“오른손 또 떨리네. 어제 일찍 자랬잖아.”
“잠은 잘 잤어요.”
“그럼 왜 그래.”
시우가 엄지로 그녀의 손가락 마디를 눌렀다. 오래된 흉터 가장자리가 희게 변했다.
서경은 아프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가 손을 살피는 얼굴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마의 가느다란 주름, 불편한 곳을 찾는 시선. 10년 동안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표정이었다.
“배고파서 그런가 봐요.”
“그러니까 먹으라니까.”
시우는 웃으며 그녀를 식탁으로 데려갔다.
2026년 9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집의 아침은 늘 비슷했다. 한 사람이 먼저 앉으면 다른 사람이 냅킨을 폈다. 시우 앞에는 커피, 서경 앞에는 따뜻한 차. 서경이 커피를 마지막으로 마신 게 언제인지, 문득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는 수저를 들었다가 내려놓고 시우의 넥타이를 매주었다. 목 바로 아래를 당기면 그도 숨이 막힐까. 생각이 스치자 손을 풀었다. 시우는 휴대전화 화면을 보고 있었다.
“저녁에 유 상무하고 식사 있어. 너도 가자.”
“유세라 상무님이요?”
“경매 물품 서류를 네가 정리했으니까, 물어보는 거 있으면 대답해주면 돼.”
경제지에서 본 사진이 떠올랐다. 유성그룹의 딸과 태산의 젊은 대표변호사.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까이 선 두 사람 아래에 혼담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었다.
“베이지색 입어. 지난번에 맞춘 거.”
“그 옷은 세탁 맡겼는데요.”
“오전에 찾아달라고 하면 되지.”
시우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화면을 넘겼다. 서경은 손에 남은 넥타이 끝을 놓았다. 학생 때부터 그랬다. 그가 정하면, 그녀가 방법을 찾았다.
그가 없었다면 병원비를 어떻게 냈을까. 어머니는 누구에게 맡겼을까. 18살, 손이 다친 병실에서 그런 질문을 하면 답은 언제나 하나였다.
시우 선배.
그는 채린을 병실 앞에 데려와 무릎을 꿇렸다. 채린이 입을 열기도 전에 뺨을 때렸다. 서경은 그 소리에 놀라 눈을 감았고, 다시 떴을 때는 시우가 자신 앞에 앉아 있었다.
이제 내가 알아서 할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가 알아서 한다던 일에, 매달 500만 원을 보내는 것도 들어 있었을까.
“오늘 어머니 면회 예약도 잡아둘게요.”
생각을 밀어내려 꺼낸 말이었다. 시우의 손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지난번에 다녀왔잖아.”
“머리 잘라드리기로 했어요. 수요일에 미용 봉사 오신대요.”
“그건 병원에서 해주겠지.”
서경은 찻잔을 들었다가 놓았다. 미용은 병원에서 해준다. 옷도 기사가 가져다줄 수 있다. 그녀가 꺼낼 이유마다 시우는 더 편한 방법을 찾아줄 것이다.
엄마가 보고 싶어요.
짧은 한마디면 될 말을, 그녀는 아직 꺼내지 못했다.
“자른 모습이라도 보고 싶어서요.”
시우가 그녀를 잠깐 바라보았다.
“그래. 기사 대동해서 다녀와. 혼자 무리하지 말고.”
“고마워요.”
그는 그제야 다시 휴대전화를 보았다.
서경은 입 안에 넣은 빵을 씹었다. 버터 맛이 나지 않았다.
직원이 현관에서 그를 불렀다. 시우가 일어서다 말고 식탁으로 돌아왔다.
“정산철은 거기 둬. 내일 오후에 윤 비서가 찾으러 올 거야.”
“네.”
“사진도 골라놔. 네 옛날 연주 사진. 홍보팀에서 후원 사례집에 쓴다더라.”
“제 사진을요?”
“청운에서부터 지원한 사례가 있어야 설득력이 있잖아. 네 얘기만큼 좋은 게 어디 있어.”
시우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고개를 조금 숙이고 얼굴을 들여다보는 다정한 자세였다.
“부담 갖지 마. 내가 다 확인하고 내보낼 거니까.”
문이 닫히고 나서도 서경은 식탁에 앉아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있던 사람이 없는 집은 유난히 조용했다. 차를 다 마셨다는 사실을 빈 컵을 만지고 나서야 알았다.
서재로 돌아가 정산철을 폈다.
채린의 확인서에는 수령액만 적힌 게 아니었다. 주소와 연락처를 변경했다는 짧은 문장이 덧붙어 있었다. 인천의 작은 가게, 블루 펍. 연락처의 끝 네 자리를 옮겨 적던 서경의 펜이 멎었다.
서경은 휴대전화를 들어 시우의 이름을 눌렀다. 통화 버튼 바로 위에서 손이 멎었다.
물어보면 대답해줄 것이다. 상냥하고, 틀림없는 말로. 그 말을 듣고 안심할 자신을 떠올리자 목 뒤가 서늘해졌다.
전화를 걸지 않고 화면을 껐다.
채린의 번호를 끝까지 적었다. 이번에는 시우가 먼저 대답하게 두지 않을 것이었다.
아침에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 정산표 한쪽에는 손 그림자가 걸려 있었다. 김채린의 이름과 지급액은 읽을 수 있었다.
문이 조금만 먼저 열렸다면, 이 두 장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복도에서 청소기를 미는 소리가 들렸다. 서경은 폰을 엎어놓았다.
“사모님, 서재도 할까요?”
집안일을 맡은 배 여사가 문틈으로 물었다.
“아니에요. 여기는 제가 할게요.”
사모님.
결혼식도 혼인신고도 없었지만, 이 집에서는 모두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처음에 고쳐달라고 했을 때 시우가 웃었다. 어차피 언젠가 그렇게 될 텐데, 뭘 그렇게 따지느냐고.
그 언젠가가 오기 전에 유세라와의 혼담이 신문에 났다.
서경은 사진 두 장을 숨긴 뒤 정산철을 원래 자리에 놓았다. 종이 끝이 어긋나 있지 않은지, 이번에는 그것만 확인했다.
내일 오후면 이 종이는 윤 비서에게 넘어간다. 서경은 적어둔 번호를 지갑 깊숙이 넣었다.
그날 나를 구했다던 남자가, 왜 너에게 돈을 주는지.
오후에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병원비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예전 진료 자료를 누가 정리했는지 물었다. 어머니는 기억나는 부분과 모르는 부분을 나누어 말했다. 시우가 가져다준 봉투가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 일로 받았던 서류도 비슷한 종이봉투에 있었다는 말이 뒤따랐다.“엄마, 그건 다 버렸어?”“집에 있던 건 네가 가져갔을 텐데.”서경은 작은 상자를 보았다.“응. 찾아볼게. 모르면 나중에 같이 보자.”통화를 마치고 재단 전달지를 다시 펼쳤다. 위쪽에 인계 분류가 적혀 있었다.HD-16.태산이 보낸 관리계정 표지에서 보았던 번호였다. 한도진 관련 유족 지원이라는 이름 아래, 지금도 이어지는 지출을 묶고 있던 분류.그녀는 두 자료를 나란히 놓고 정 변호사에게 알렸다.“병원 연락 자료에 아버지 쪽 관리번호가 있어요.”“두 자료가 연결되는지 작성자를 확인하겠습니다.”은행 빚은 아니었다. 아버지 사후 지원을 맡던 사람들이 서경의 부상 때도 등장했다. 서경은 HD-16 아래에 박 실장의 이름을 적었다.해가 기울 무렵 태주에게 날짜와 담당자 부분을 공유했다. 파일을 보낸 뒤에도 서경은 전화를 끊지 못했다.“제가 다 기억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오래전 일입니다.”“그런데 그 사람은 너무 잘 기억하는 것처럼 말해요. 제가 뭐 때문에 울었고, 왜 그만뒀고,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했는지까지.”서경은 창밖을 보았다.“제가 자꾸 거기다 제 기억을 맞췄나 봐요.”태주가 잠깐 침묵했다.&ld
회의가 끝나자 채린이 문 앞에서 따라왔다.정 변호사가 두 사람 곁에 멈췄다. 채린은 서경의 손을 보다가 눈을 돌렸다.“그날…… 그냥 겁만 주면 될 줄 알았어.”서경은 가방끈을 잡은 손을 바꾸었다.“겁만 줬는데 내 손은 왜 이래?”서경이 오른손을 조금 들어 보였다. 채린의 시선이 내려갔다.“그 말로 내가 뭘 해주면 좋겠어?”채린이 대답하지 못했다.“오늘은 그 얘기 더 못 듣겠어.”서경은 먼저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려다가 손잡이를 잡고 멈췄다. 다리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변호사가 옆에서 엘리베이터로 가자고 했다.괜찮다고 대답하려다 고개를 끄덕였다.“네. 오늘은 그럴게요.”밖에 나와 태주에게 녹음 앞뒤를 들었다고 알렸다. 그가 만나겠느냐고 물었다.“오늘은 먼저 좀 쉴게요. 나중에 제가 전화해도 돼요?”“네. 전화 올 때까지 일하고 있겠습니다.”서경은 전화를 마쳤다. 태주의 하루까지 멈추게 한 것은 아니어서, 조금 편해졌다.숙소에 돌아와서는 음악을 틀지 않았다. 창문을 조금 열어놓고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씻는다고 그 목소리가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물을 끄고 수건을 고르는 동작은 할 수 있었다.책상 위에 가져온 진료 봉투를 놓았다. 그날 자신이 직접 보았던 것과, 시우가 나중에 설명한 것이 자꾸 뒤섞이고 있었다.그녀는 두 줄로 나누어 적었다.병원에서 시우를 보았다.시우는 늦게 알았다고 말했다.같은 기억으로 묶어두었던 두 문장 사이에 처음으로 빈 줄이 생겼다.서경은 그 빈 줄
채린은 종이 한 장을 구겨서 가져왔다.“여기 사인하래.”서경은 테이블 건너의 여자를 보았다. 지난번 카페에서 보았을 때보다 얼굴이 말라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을 안쓰러워할 여유는 없었다.채린이 펼친 종이에는 지원 종료에 따른 사실 확인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2016년 학교에서 발생한 개인 간 다툼에 시우가 사후 지원을 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서경의 눈이 개인 간 다툼이라는 말에 멎었다.종이에는 손도, 자퇴도 없었다. 서경은 테이블 위에 펴지지 않는 약지를 올려놓았다.“이걸 쓰려고 했어?”“그러니까 안 쓰고 왔잖아.”채린은 의자 등받이에 등을 붙였다. 곁에는 그녀가 따로 상담받은 변호사가 앉아 있었다. 정 변호사와 연락해 마련한 자리였다. 서경의 대리인과 채린의 대리인은 서로 다른 쪽에 앉았다.채린이 가방을 쥐었다.“내일이 돈 들어오는 날이야. 이거 정리 안 하면 더는 안 준대.”“그래서 녹음을 주겠다는 거야?”“나도 방법이 없으니까.”채린이 입술을 씹었다.“너한테 다 넘기면, 넌 그걸로 강시우 잡고 나는 혼자 남잖아. 먼저 약속해. 나한테 불리한 건 빼.”서경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채린은 서경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날 문 앞을 막고 웃던 여자가 오늘은 자기에게 유리한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뭘 빼달라는 건데.”서경이 물었다.채린은 시선을 피했다.“내가 한 말. 쓸데없이 흥분해서 한 말도 있고.”“그럼 내가 들은 파일에서 네 말을 자른 거야?&
그날 오후, 윤상혁은 정 변호사 사무실로 왔다. 태주도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윤상혁은 창가를 확인한 뒤 앉았다. 서류 가방을 무릎 위에서 내려놓지 않았다.“가져오신 건 뭡니까?”정 변호사가 물었다.“제가 서명하라고 받은 확인서입니다. 실제 보고 내용하고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그가 한 장을 꺼냈다. 서경은 책임자 이름과 날짜부터 읽었다. 단독 처리라는 말이 여러 번 나왔다.태주는 끝까지 읽고 테이블에 놓았다.“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자료도 있습니까?”“있습니다.”윤상혁은 가방을 열지 않았다.“하성에서 제 경력은 인정해주셔야 합니다. 태산에서 이대로 잘리면 다른 곳에 같은 이야기를 흘릴 겁니다. 업계에서 제가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하성 채용을 약속하는 자리는 아닙니다.”태주가 말했다.윤상혁의 입가가 굳었다.“그러면 왜 왔는지 모르겠군요. 자료만 달라는 얘기 아닙니까.”“무슨 일을 했는지부터 듣겠습니다.”“강 대표 밑에서 하라는 일 한 겁니다.”서경이 고개를 들었다.“제 병원도, 제가 직접 물어본 것도 보고했죠. 그것도 여기 넣어주세요.”“그건 일정 관리였습니다.”“제 질문은 일정 관리고, 비서님 질문은 재검토 요청이에요?”윤상혁의 입술이 멎었다.“그것까지 안 했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서경은 확인서를 돌려주었다.“비서님이 억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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