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해준이가 집을 나갔어.”
태윤은 서린의 손을 제 이마에 대었다. 오늘 되찾은 회사 이야기를 전한 뒤에도 정작 이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너라면 조금 더 일찍 들어 줬겠지. 이음이도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말하지 않아. 내가 먼저 귀가 시간부터 묻거든.” 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윤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정리하고 꽃병을 바로 놓았다. 엄마를 대신할 수 없다는 생각에 기대어 아버지로서 할 말을 피할 수는 없었다.“네가 일어나면 나부터 혼내. 그동안 애들한테 어떻게 했는지 다 들려줄게.” 태윤은 서린의 손등에 입술을 대었다.“사랑해, 서린. 네가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릴게.” 그는 서린의 손바닥을 넥타이를 맨 자기 목 가까이 가져갔다. 입학식 날, 마지막으로다음 날, 해준은 강의를 마치고 구내식당으로 걸었다. 전날 하윤이 건넨 초콜릿은 아직 청바지 주머니에 있었다. 포장지 모서리를 만질 때마다 우산 아래에서 그녀가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오늘은 수업이 겹치지 않는 날인데도 사람들 사이에서 남색 카디건을 찾고 있었다. 아버지가 엄마를 향해 늘 시선을 돌리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렇다고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하윤을 떠올리는 일이 좋으면서도, 자신이 누군가 한 사람에게 이렇게 빨리 기울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식당으로 가는 연결 통로에서 남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캠퍼스에는 강의가 끝난 학생들이 가득했다. 해준이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것은 과하게 친한 척하는 말투 때문이었다. 누군가 이미 거절했는데, 몇 사람이 한꺼번에 대답을 요구하는 소리가 났다.“연락처만 주면 된다니까. 우리 연합 동아리 들어오면 취업에도 도움 돼.”“죄송해요. 다음 수업이 있어서요.” 해준은 걸음을 멈췄다. 자동판매기 옆에 세 남학생이 하윤을 둘러싸고 있었다. 웃으며 비켜 달라는 부탁에도 계속 길을 막았다. 하윤은 바인더를 안은 채 다른 쪽으로 나가려 했다.“말만 하자고. 괜히 까다롭게 굴지 말고.” 한 남학생이 손을 뻗었다. 해준은 휴대전화의 카메라를 켰다. 화면에는 손을 피하려는 하윤과 다시 앞을 가로막는 남학생이 들어왔다. 그가 하윤의 손목을 쥐자 그녀가 짧게 아프다고 말했다. 바인더를 잡은 하윤의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했다. 해준은 먼저 그 모습을 찍었다. 아버지였다면 이름을 대는 것만으로 상대를 물릴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다가갔는데,
“여기요. 중요한 필기였나 봐요.”“고마워요, 해준 씨. 시험 준비한 내용이라서요.” 하윤이 노트를 가슴에 안았다. 해준은 괜찮다고 말하고 펜을 다시 들었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읽던 법학 책의 문장이 들어오지 않았다. 옆에서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와 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 들렸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볼 때 겁도 계산도 없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았다. 해준은 노트 표지에 적힌 작은 글씨가 떠올랐다. 수업에서 몇 번 본 얼굴이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나눈 것은 처음이었다. 시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묻는 일조차 괜히 특별한 말을 고르는 것처럼 어려웠다. 해가 진 뒤 도서관이 문을 닫았다. 입구 처마 아래에서 하윤이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보다 비가 굵어졌다.“우산 없어요?”“오후에 그칠 줄 알았어요.” 해준은 자기가 산 값싼 투명 우산을 펼쳤다. 역까지 같은 방향이었다. 하윤을 여기 남겨 두고 혼자 갈 이유도 없었다.“역까지 같이 가요.”“해준 씨 집은 반대쪽 아니에요?”“조금 돌아가면 돼요. 들어와요.” 하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우산 아래로 들어왔다. 걷는 동안 어깨가 닿을 듯 가까웠다. 해준은 그녀가 젖지 않게 우산을 기울이다가 자기 팔에 비가 떨어지는 것도 한참 뒤에 알았다.“생각보다 친절하네요.” 빗방울이 투명한 우산을 두드렸다. 해준은 하윤의 노트가 젖지 않게 우산을 조금 더 기울였다. 자기 어깨가 비에 젖는 것은 내버려 두었다.“제가요?”
다음 날 해준은 부동산 중개소에 확인서를 가져갔다. 사장은 두 번 읽고서야 고개를 들었다.“이거면 집주인하고 다시 이야기해 볼 수 있겠어.”“특별히 봐달라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처럼 심사해 주세요.”“알았어.” 그 방을 바로 계약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름 하나만 보고 닫히던 문이 다시 열렸다. 오후에는 며칠 전 면접을 본 편의점에서도 전화가 왔다. 점장은 해준이 그 서류를 보여 주지도 않았는데 본사에 직접 문의했다고 했다. 면접에서 만난 사람을 성 때문에만 거절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고.“아직 일할 생각 있어요?”“네. 있습니다.” 첫 근무에서는 계산대 조작을 몇 번이나 틀렸다. 자기보다 어린 선배에게 사과하고, 엎질러진 커피를 닦고, 쓰레기봉투를 들고 뒷문으로 나갔다. 아무도 ‘대표님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잘못하면 지적을 받고, 도움이 되면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휴게실에서 먹은 삼각김밥이 집에서 먹던 값비싼 음식보다 맛있었다. 아버지에게서 문자가 왔다.‘일은 구했니?’ 해준은 잠시 화면을 보다가 ‘네. 지금 쉬는 시간이에요’라고 답했다. 잠시 뒤 돌아온 문자는 짧았다.‘늦게 끝나면 돌아가는 길 조심해.’ 차도 경호원도 오지 않았다. 그 사실에 해준은 조금 웃었다.‘강해준’이라는 이름이 앞으로도 자신보다 먼저 방 안에 들어갈 것이다. 그래도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실패할지는 자기 몫으로 남겨 둘 수 있었다. 밤늦게 원룸으로 돌아와 우편함
해준이 집무실에 들어서자 태윤은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아들의 젖은 운동화 아래로 물방울이 떨어졌다.“아르바이트도 방도, 내 이름을 알아보면 거절해. 아버지가 막은 거야?”“아니다.” 태윤의 말만으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읽었는지, 박현석이 태블릿을 내밀었다. 해준이 집을 나간 다음 날의 내부 지시가 떠 있었다. 본인이 요청하지 않는 한 취업과 주거, 교우 관계에 개입하지 말 것. 외부의 비공식 문의에 답하거나 편의를 부탁받아도 거절할 것.“그럼 왜 다들 나를 피하지?”“내 이름 때문에. 내가 시키지 않아도 사람들이 내 눈치를 보지. 네겐 좋지 않은 유산이겠구나.” 해준은 태윤이 변명할 줄 알았다. 현강이 커진 덕분에 많은 사람을 먹여 살렸다고 말하거나, 이 정도 불편은 감수하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동안 서류를 바라보다가 그저 자기 책임이라고 말했다. 해준의 화는 갈 곳을 잃었다. 태윤은 책상 위에 확인서 한 장을 놓았다. 강씨 집안이 해준의 임대차와 고용에 개입하거나 압박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집주인이 걱정한다면 보여 줘. 이걸 쓰든 말든 네가 정해.”“결국 아버지 힘을 빌리는 거잖아.”“내 이름이 만든 두려움은 내가 치워야지. 방을 골라 주거나 일을 얻어 주겠다는 뜻은 아니야.” 해준은 종이를 집지 않았다. 받아 드는 순간 아버지에게 진 기분이 들었다. 태윤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내가 그 방에서 다치면?”“병원에 가.”“밥도 못 먹게 되면?”&ld
“해준이가 집을 나갔어.” 태윤은 서린의 손을 제 이마에 대었다. 오늘 되찾은 회사 이야기를 전한 뒤에도 정작 이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너라면 조금 더 일찍 들어 줬겠지. 이음이도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말하지 않아. 내가 먼저 귀가 시간부터 묻거든.” 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윤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정리하고 꽃병을 바로 놓았다. 엄마를 대신할 수 없다는 생각에 기대어 아버지로서 할 말을 피할 수는 없었다.“네가 일어나면 나부터 혼내. 그동안 애들한테 어떻게 했는지 다 들려줄게.” 태윤은 서린의 손등에 입술을 대었다.“사랑해, 서린. 네가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릴게.” 그는 서린의 손바닥을 넥타이를 맨 자기 목 가까이 가져갔다. 입학식 날, 마지막으로 서린이 매듭을 고쳐 주었던 곳이었다. 당장 깨어나 달라고 여러 번 말해 왔지만, 오늘은 그 말 대신 아이들과 다시 대화하겠다는 약속을 남겼다. 잠시 후 병실을 나서자 박현석이 기다리고 있었다.“해준 씨가 대학 수업을 빠지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경호를 늘릴까요?”“아니. 본인이 도와 달라고 하기 전까지 건드리지 마.”“집과 일자리 모두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그래도.” 태윤은 병실 문을 돌아봤다. 서린이 아직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아들의 선택을 먼저 들어 보라고 했을 것이다. 자신의 불안을 줄이겠다고 아들의 길을 미리 치우는 일은 그만하고 싶었다. 박현석이 뜻밖이라는 듯 태윤을 봤다. 태윤 역시 아들을 혼자 두는 일이 자신에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았다.
현강홀딩스 본사 최상층. 태윤은 창밖으로 내려가는 해를 등지고 계약서에 서명했다. 윤성홀딩스가 무너질 때 다른 자본에 넘어간 식품 사업회사, 윤성푸드의 전체 지분을 인수하는 마지막 합의서였다. 서린이 깨어난 뒤 그 회사와 다시 관계를 맺고 싶어 할지는 알 수 없었다. 태윤은 적어도 그녀가 직접 고를 수 있을 때까지 그 이름을 지켜 두고 싶었다.“네가 돌아올 때까지만 지켜 둘게, 서린.” 그 말은 아무도 없는 집무실에 남았다. 회사를 인수한다고 해서 서린이 눈을 뜨는 것은 아니다. 돌아온 뒤 회사와 거리를 둘지, 다른 일을 시작할지도 그녀의 몫이었다. 노크와 함께 비서실장 박현석이 들어왔다. 태윤은 서명한 서류를 건넸다.“절차 진행해.” 현석이 서류를 받는 동안 태윤은 서명을 다시 보았다. 옛 회사를 사들이는 절차조차 결국 계약서 몇 장과 서명으로 끝났다. 열두 해를 기다린 일 중 오직 이 한 가지는 자신이 움직여 결과를 바꿀 수 있었다.“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음 양의 학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다른 학교 학생이 편지를 전했다고 합니다.”“이음이는 괜찮고?”“스스로 거절했다고 들었습니다.” 태윤은 더 묻지 않았다. 딸이 불편했는지 직접 물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회사에서 대신 확인하는 일이 익숙해져 있었다. 책상 한쪽의 카사블랑카 화분에서 진한 향이 올라왔다. 서린이 거실에 한 송이 꽂아 두고 좋아하던 꽃이었다. 태윤은 꽃잎 가장자리를 잠깐 만진 뒤 재킷을 집어 들었다. 딸은 자라면서 서린을 닮아 갔다. 태윤은 그 사실이 기쁘면서도, 어느 순간 이음이 아닌 오래전의 서린을 찾는 자신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