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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Author: 정하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8 17:11:25

정하은은 책상 위에 놓인 사본을 다시 내려다봤다.

교육비. 지급 완료. 딜런 마크. 확인 인장. 그리고 비비안 로세트.

이 가문의 안주인.

정하은은 리사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의 어머니였다면 굳이 그렇게 설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흥미로웠다.

만약 누군가 이벨리아의 교육비를 빼돌렸다 해도, 왜 안주인의 인장이 찍혀 있을까.

비비안이 직접 관여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누군가 그녀의 인장을 이용했을 수도 있다. 혹은 이 집에서는 이벨리아와 관련된 모든 지출이 안주인의 손을 거쳐야 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의미는 있었다.

이벨리아가 상단 장부 한 장 넘겨본 적 없는 무능한 딸이 된 이유.

그것은 정말 이벨리아가 무능해서였을까.

배울 기회조차 빼앗겼다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수업에 교육비가 계속 지급됐다면?

정하은은 낮게 웃었다.

“친절하네.”

장부는 언제나 친절했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곧 노크 소리가 났다.

똑똑.

“들어와.”

문이 열렸다. 리사가 먼저 들어왔고, 그 뒤로 마리엔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하은은 의자에 앉은 채 두 사람을 바라봤다.

“문 닫아.”

리사가 급히 문을 닫았다.

“마리엔.”

“예, 아가씨.”

“이리 와서 앉아.”

“제가 어찌…….”

“앉으라고 했어.”

마리엔은 잠시 망설이다가 의자 끝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하녀가 주인 앞에 앉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정하은이 원한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사람은 서 있으면 도망칠 생각을 한다. 그러니 앉혀서 말을 시켜야 한다.

정하은은 리사를 보았다.

“너는 거기 서 있어.”

“예.”

리사는 문 옆에 선 채 손을 모았다. 정하은은 마리엔에게 시선을 돌렸다.

“계단 사고 말이야.”

마리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예?”

“그날 일을 말해봐.”

마리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가씨께서 서쪽 계단 아래에 쓰러져 계셨고, 제가 발견해서 사람을 불렀습니다.”

“왜 거기에 갔지?”

“아가씨를 찾으러 갔습니다.”

“왜 나를 찾으러 갔는데?”

“방을 나가신 뒤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셔서요.”

정하은은 마리엔을 바라봤다.

“내가 왜 방을 나갔지?”

마리엔의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마리엔.”

마리엔이 눈을 질끈 감았다.

“……쪽지가 왔었습니다.”

“쪽지?”

“예.”

“누구한테서?”

마리엔은 침묵했다.

정하은은 기다렸다.

이름이 중요했다. 어떤 이름이 나오느냐에 따라 방향이 바뀐다. 헬가. 오르테스. 클라라. 레온. 비비안. 혹은 아직 나오지 않은 누군가.

마리엔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에밀리 아가씨의 시녀라고 했습니다.”

예상 밖의 이름이었다.

정하은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에밀리?”

마리엔은 고개를 숙였다.

“예.”

“누구지?”

“셋째 부인의 따님이십니다.”

“그 아이가 에밀리가 보낸 쪽지라고 했어?”

“예.”

“그 시녀 이름은?”

“모릅니다.”

정하은은 그녀를 바라봤다.

“모른다고?”

“예. 처음 보는 아이였습니다.”

“처음 보는 시녀가 에밀리의 이름으로 쪽지를 가져왔고, 너는 그걸 확인도 없이 나에게 전했다?”

마리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는…… 에밀리 아가씨 쪽에서 가끔 작은 쪽지를 보내오곤 해서…….”

“무슨 쪽지.”

“안부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가끔 꽃이나 리본을 보낼 때도 있었고요.”

정하은은 잠시 침묵했다.

이벨리아가 이 집에서 완전히 단절되어 지낸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에밀리의 이름을 이용하기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정말 에밀리가 보낸 쪽지일 수도 있다.

정하은은 물었다.

“그날 쪽지를 받은 내가 뭐라고 했지?”

마리엔의 얼굴에 처음으로 망설임이 아닌, 기억을 더듬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가씨께서는…… 놀라셨습니다.”

“놀라?”

“예. 그리고 조금 망설이시다가 나가셨습니다.”

“혼자?”

“예.”

“어디로 간다고 했지?”

“서쪽 온실이라고…….”

서쪽 온실.

그리고 이벨리아가 발견된 곳은 서쪽 계단이었다.

“쪽지는.”

마리엔은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께서 가지고 나가셨습니다.”

쪽지의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면.

“그 쪽지를 가져온 시녀의 얼굴, 기억해?”

마리엔은 잠시 생각했다.

“어렴풋이는…….”

“그럼 기억해내.”

“예?”

“머리색, 키, 목소리, 옷차림, 손에 흉터가 있었는지, 귀걸이를 했는지, 걸음이 빨랐는지 느렸는지.”

정하은은 하나씩 말했다.

“사소한 것도 좋아. 전부.”

마리엔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아마 그런 식으로 기억해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을 것이다.

정하은은 덧붙였다.

“사람은 큰일보다 작은 걸 기억해. 얼굴은 잊어도 냄새는 기억하고, 이름은 잊어도 목소리는 기억하지.”

마리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손이…… 거칠었습니다.”

“손?”

“예. 어린 시녀치고 손등이 거칠고, 손톱 밑에 검은 때가 있었습니다.”

정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엔은 기억을 더듬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에밀리 아가씨의 시녀들은 보통 연한 회색 앞치마를 입는데, 그 아이는 앞치마 색이 조금 어두웠습니다.”

“또.”

마리엔은 눈을 감았다.

“향이 났습니다.”

“무슨 향?”

“독한 약초 냄새요. 세탁실에서 가끔 나는 냄새와 비슷했습니다.”

세탁실.

세탁실에는 천을 삶고 얼룩을 빼는 약품이 있을 것이다. 독한 냄새가 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그 냄새가 쪽지를 가져온 시녀에게서 났다?

그렇다면 그 아이는 에밀리의 시녀가 아닐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정하은은 낮게 말했다.

“좋아. 이제 둘 다 나가봐.”

마리엔과 리사는 깊이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혔다.

그 순간 창밖에서 작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하은의 시선이 창문으로 향했다. 방은 2층이었다.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조금 걷었다.

저택 벽 아래쪽으로 사라지는 그림자가 보였다.

정하은은 그쪽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 시간에 누군가 자신의 방 아래를 지나갔다.

그녀는 조용히 커튼을 다시 내렸다. 그리고 테이블로 돌아와 검은 카드를 집어 들었다.

필요하면 사람을 보내십시오.

그의 말이 떠올랐다.

정하은은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짧게 적었다.

[서쪽 온실. 세탁실. 에밀리의 시녀라고 한 아이.]

잠시 생각하다가 한 줄을 더했다.

[그리고 오늘 밤, 내 창밖을 지나간 사람.]

그녀는 종이를 접었다.

카시안의 검은 카드 아래에 새겨진 작은 문양을 살폈다. 사냥개의 목줄 부분에 아주 작은 글자가 있었다.

서쪽 문. 세 번째 등불.

접촉 장소일 것이다.

정하은은 낮게 웃었다.

“정말 친절하네.”

그녀는 종을 울렸다.

복도에 대기 중이던 다른 하녀가 들어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녀는 잔뜩 긴장한 채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정하은은 접은 종이를 내밀었다.

“이걸 서쪽 문 세 번째 등불 아래에 두고 와.”

하녀의 얼굴이 굳었다.

“예?”

“그냥 두고 오면 돼.”

“예, 아가씨.”

하녀는 종이를 받아들고 나갔다.

정하은은 닫힌 문을 바라봤다.

카시안 블랙우드가 정말 정보값을 할 줄 아는 남자인지, 곧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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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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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ung ock
읽어본것중에 제일 괜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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