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정하은은 창가에서 시선을 거두고 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이 열렸다.
검은 마차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젊었다. 스물 후반쯤 되었을까. 검은 머리는 단정하게 넘겨져 있었고, 눈매는 길었다. 잘생겼다. 그것도 사람의 시선을 끄는 방식으로 잘생겼다.
하지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역시 웃음이었다.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하인들의 시선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집에 가벼운 방문이라도 온 사람처럼 여유로웠다.
정하은은 그 웃음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정치판에서 가장 위험한 인간들은 대개 잘 웃었다. 웃음은 방패가 된다.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고, 속내를 가리고, 때로는 칼끝을 숨긴다.
남자가 정하은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아까 창밖에서 마주쳤던 것과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제대로 인사드릴 수 있겠군요.”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가씨.”
정하은은 그를 바라봤다.
“처음?”
남자의 눈썹이 아주 살짝 올라갔다.
“아닙니까?”
“나는 기억이 온전하지 않아서.”
정하은은 담담하게 말했다.
“처음인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남자는 잠시 그녀를 보더니 곧 웃었다.
“저는 처음입니다.”
“그래?”
“소문은 들었습니다. 계단에서 크게 다치셨다고.”
“소문이 빠르네.”
“제가 하는 일이 원래 그렇습니다.”
“무슨 일을 하는데?”
“듣고, 옮기고, 가끔은 묻는 일도 합니다.”
정하은은 남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웃고 있었다.
눈까지 웃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게 진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정하은은 그런 눈을 많이 봤다.
협상 테이블에서. 비밀 녹취가 오가는 자리에서. 누군가의 약점을 손에 쥔 사람들이 짓던 눈.
“이름은?”
남자의 미소가 조금 짙어졌다.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그는 한 손을 가슴에 얹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카시안 블랙우드입니다.”
카시안 블랙우드.
정하은은 그 이름을 기억했다.
남자가 고개를 들며 덧붙였다.
“아가씨의 남편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지요.”
그 말은 가볍게 던져졌다.
농담처럼.
정하은은 웃지 않았다.
“될지도 모른다?”
카시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서류만 오갔을 뿐입니다. 당사자끼리 인사를 나누는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당사자끼리 인사가 필요했어?”
“보통은 필요하지요.”
“보통은?”
정하은이 낮게 되물었다.
카시안의 미소가 조금 짙어졌다.
“로세트에서는 가끔 보통이 생략되기도 하니까요.”
정하은은 카시안을 똑바로 바라봤다.
방금 말은 농담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 안에는 가시에 가까운 것이 있었다.
로세트에서는 보통이 생략된다.
이벨리아의 의사 따위는 처음부터 절차에 없었다는 뜻이다.
카시안은 그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일부러 그녀 앞에서 말했다.
정하은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잘 아네.”
카시안의 눈빛이 아주 짧게 변했다.
놀람.
아니, 흥미에 가까웠다.
“생각보다 담담하시네요.”
“그럼 울 줄 알았어?”
“소문으로는 그랬습니다.”
“또 소문?”
카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웃었다.
“말하면 곤란해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짐작은 돼.”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카시안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쓸데없이 고자질쟁이가 되는 건 취향이 아니라서.”
“더러운 일은 하면서 고자질은 싫다?”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누군가가 작게 “아가씨” 하고 부르려 했지만,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카시안은 잠시 정하은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소리 내어 웃었다.
“하.”
짧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 웃음에 가까웠다.
“재밌는 말씀을 하시네요.”
“틀렸어?”
“아닙니다.”
카시안은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고자질은 싸고, 더러운 일은 비쌉니다. 저는 되도록 비싼 일만 맡습니다.”
정하은은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조금 흥미를 느꼈다.
이 남자는 자신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고 있었다.
그걸 부정하거나 불쾌해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값을 매긴다.
자신의 쓸모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정하은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때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카시안.”
나른한 목소리였다.
레온이었다.
그는 홀 안으로 들어오며 상황을 훑었다. 정하은, 카시안, 주변 사람들, 그리고 어딘가 불편한 공기까지.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벌써 인사했나?”
카시안은 몸을 돌려 레온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레온 도련님.”
“우리 이벨리아가 놀라진 않았어?”
레온의 말투에는 여전히 조롱이 묻어 있었다.
카시안은 웃으며 정하은을 보았다.
“오히려 제가 조금 놀랐습니다.”
레온의 눈썹이 올라갔다.
“네가?”
“예.”
“왜.”
“아가씨께서 소문보다 훨씬 멀쩡하셔서요.”
레온의 웃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정하은은 그 변화를 보았다. 레온은 방금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문보다 멀쩡하다.
그 말대로라면, 바깥에 알려진 이벨리아의 모습은 지금과 꽤 다른 모양이었다.
정하은은 둘을 번갈아 보았다.
레온은 카시안을 가볍게 대했지만, 완전히 편한 상대를 대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카시안 역시 예의를 갖췄지만, 그 안에 주눅 든 기색은 없었다.
단순한 주인과 하인의 관계는 아닌 모양이었다.
흥미로웠다.
레온이 말했다.
“형님이 기다리신다. 혼담 서류 확인해야 하거든.”
카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이벨리아도 데려갈까?”
레온이 정하은을 보며 웃었다.
“당사자니까.”
그 말이 묘하게 거슬렸다.
“데려갈까?”
레온은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싫어?”
“말이 이상해서.”
“뭐가.”
“사람을 물건처럼 말하네.”
레온의 웃음이 천천히 사라졌다.
정하은은 담담하게 말했다.
“서류 확인은 너희끼리 해. 내 이름이 들어간 서류라면, 사본은 내 방으로 보내고.”
“이벨리아.”
“그리고.”
정하은은 카시안을 보았다.
“카시안.”
카시안의 눈이 살짝 휘었다.
“예, 아가씨.”
“그 서류에 내 서명이 없으면, 아직 거래가 끝난 건 아니겠지?”
카시안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웃었다.
“원칙대로라면 그렇습니다.”
레온의 표정이 굳었다.
정하은은 놓치지 않았다.
원칙대로라면.
좋은 말이다.
원칙과 현실이 다르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정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원칙대로 해.”
카시안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아가씨께서는 원칙을 좋아하십니까?”
“아니.”
정하은은 바로 대답했다.
“상대가 숨고 싶어 하는 원칙을 좋아해.”
카시안은 이번에는 정말 웃음을 터뜨렸다. 작고 낮은 웃음이었다.
“아.”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이 결혼, 생각보다 재미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아직 결혼 안 했어.”
“그래서 더 재미있습니다.”
레온이 끼어들었다.
“농담은 그쯤 하지.”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낮아져 있었다.
카시안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예, 도련님.”
하지만 그 태도에는 이상하게도 순종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하은은 그 장면을 기억했다.
카시안 블랙우드.
웃으며 숙인다.
하지만 꺾이지 않는다.
레온은 정하은을 보았다.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이 혼담은 네가 싫다고 물릴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래?”
“가주님이 정하셨어. 형님도 반대하지 않을 거고.”
정하은은 잠시 레온을 바라봤다.
“그건 나중에 확인할게.”
레온의 표정이 굳었다.
“확인한다고 달라질 건 없어.”
“그건 확인해보면 알겠지.”
그때 복도 쪽에서 오르테스가 다가왔다.
“레온 도련님. 카시안 님. 가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정하은은 오르테스를 향해 말했다.
“사본은?”
오르테스가 고개를 숙였다.
“준비 중입니다. 해가 지기 전까지 보내드리겠습니다.”
“좋아.”
레온이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사본?”
정하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르테스도 입을 다물었다.
레온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정하은이 몸을 돌리려 하자 카시안이 부드럽게 불렀다.
“아가씨.”
정하은이 그를 보았다.
“말해.”
카시안은 품 안에서 손바닥만 한 검은 카드를 꺼냈다. 두꺼운 종이 위에 은색 사냥개 문양이 박혀 있었다.
“혹시 기억이 돌아오시거나.”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아서 더 궁금한 것이 생기시면, 사람을 보내십시오.”
정하은은 그가 내민 카드를 내려다봤다.
이 집이 알려주지 않는 것이 있다면 자신에게 물으라는 뜻이었다.
정하은은 카드를 받아들었다.
“카시안.”
레온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카시안은 태연하게 웃었다.
“아가씨께 예의를 차린 것뿐입니다.”
“예의?”
“곧 한 가족이 될지도 모르는 분 아닙니까.”
정하은은 손에 든 카드를 한 번 내려다봤다.
쓸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조심해야 할 사람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이용당하지 않는 사람은 대개 자신도 남을 이용할 줄 안다.
정하은은 카드를 손안에 넣었다.
“필요하면 부를게.”
카시안은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겠습니다.”
“기대는 하지 마.”
“알겠습니다, 이벨리아 아가씨.”
정하은은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레온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카시안.”
“예.”
“너 지금 웃기냐?”
“조금은요.”
“뭐?”
카시안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로세트에 재미있는 일이 생긴 것 같아서요.”
정하은은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로세트의 그림자.
자신을 버리기 위해 준비된 정략결혼 상대.
그런데 아무래도 저 남자 역시 얌전히 쓰이다 버릴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좋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날 해가 지기 전, 집사장 오르테스가 약속한 사본이 이벨리아의 방으로 도착했다.
식사비. 차. 의복. 약값. 치료 기록. 교육비.
정하은은 교육비 사본의 서명을 다시 확인했다.
딜런 마크.
그리고 그 옆에 찍힌 확인 인장.
장미를 휘감은 뱀.
인장 아래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비비안 로세트.
기억에 없는 이름이었다.
적어도 오르테스보다 위에서 이 지급을 확인한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정하은은 사본을 내려놓았다.
“그래.”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 윗선이 나오네.”
정하은은 책상 한쪽에 놓인 검은 카드를 바라봤다.
카시안 블랙우드가 남긴 접촉 신호.
그리고 비비안 로세트의 인장.
둘 중 어느 쪽부터 건드릴까.
정하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웃었다.
정치판에서 배운 원칙은 간단했다.
윗선을 치기 전에는, 먼저 아랫선의 입을 열게 만든다.
그녀는 종을 울렸다.
잠시 후, 리사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정하은은 장부 위에 손을 올린 채 말했다.
“하나 물어볼 게 있어.”
“예.”
“내가 계단에서 떨어졌을 때 누가 처음 발견했지?”
“마리엔입니다.”
“마리엔?”
“예. 마리엔이 아가씨를 발견하고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정하은은 잠시 생각했다.
“그럼 마리엔을 불러.”
“예, 아가씨.”
리사가 돌아서려는 순간, 정하은이 다시 불렀다.
“잠깐.”
리사가 돌아봤다.
“비비안 로세트가 누구지?”
“이 가문의 안주인이십니다.”
절벽 위의 궁수 몇이 움직였다.금발 기사는 웃지 않았다.“혼자 올 줄 알았다.”“뒤에 둘은 눈에 안 들어옵니까?”야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철퇴를 꺼냈다.금발 기사의 눈이 야라의 무기로 향했다가, 다시 카시안에게 돌아왔다.“로세트가 블랙우드 뒤에 숨었군.”“반대입니다.”“뭐?”“당신들이 로세트 뒤에 숨었죠.”짧은 침묵.금발 기사가 손을 들었다. 절벽 위의 활시위가 동시에 당겨졌다.“쏴.”화살이 쏟아졌다.카시안은 검을 뽑았다.챙.첫 번째 화살이 꺾였다. 두 번째는 검등에 맞아 옆으로 튕겼다.카시안은 앞으로 걸었다.화살이 빗발처럼 내려왔지만, 그의 걸음은 한 번도 끊기지 않았다. 검은 필요한 만큼만 움직였다.화살은 그의 몸에 닿기 전에 방향을 잃었다.베라는 이미 옆으로 빠져 있었다. 몸을 낮춰 쏟아지는 화살 사이를 파고들었다.베라의 낫칼이 말 위의 기사 손목을 걸었다. 그대로 잡아당기자 기사가 검을 놓쳤다. 그 몸이 아래로 기울기도 전에 베라의 발이 안장 옆을 찼다.기사는 말 아래로 떨어졌다.“살려두래.”베라가 중얼거렸다.“귀찮게.”두 번째 기사가 창을 겨눴다.베라는 몸을 낮췄다. 창끝이 머리 위를 스쳤다.낫칼의 붉은 끈이 짧게 흔들렸다. 창대가 걸렸다.베라가 손목을 틀자 창끝이 옆 기사를 향했다. 말 두 필이 놀라 몸을 틀었고, 뒤따르던 기사들까지 한꺼번에 엉켰다.야라는 정면으로 걸었다.방패병 셋이 길을 막았다.가장 앞의 방패병이 달려들었다.야라의 철퇴가 옆에서 들어갔다.쾅.방패는 부서지지 않았다. 대신 방패를 든 팔이 그대로 내려앉았다. 기사가 비명을 삼켰다.야라는 열린 틈으로 들어갔다.옆의 방패병이 급히 몸을 틀었다. 반대쪽 철퇴가 가슴갑옷을 찍었다.쾅.기사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마지막 방패병이 검을 뽑았다.야라는 검을 무시한 채 철퇴로 그의 무릎을 찍었다.갑옷 안쪽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기사가 옆으로 무너졌다.베라가 멀리서 말했다.“걸어서 돌아가야 된다고 했
며칠 전.카이든의 집무실에는 탄 냄새가 남아 있었다.책상 위에 놓인 천 조각과 부서진 나무패, 검게 그을린 보증서에 밴 냄새였다.카시안은 앉지 않았다. 창가에 기대선 채 책상 위의 물건들을 내려다봤다.카이든이 말했다.“최근 열흘 동안 세 번이다.”“들었습니다.”“어디서.”“항구에 입이 많더군요.”카이든의 표정이 굳었다.“로세트 내부 보고보다 빨랐다는 뜻인가.”카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더 기분 나빴는지, 카이든이 책상 위의 보증서를 밀었다.“남부 염료 운송대가 습격당했다. 마차 네 대가 불탔고, 호위 둘이 죽었다.”카시안은 보증서 한쪽 끝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불에 그을렸지만, 도장은 남아 있었다.로세트의 장미.“두 번째는.”“북문으로 들어오던 철물 운송대. 마차 바퀴가 부러졌고, 협곡 아래로 떨어졌다.”“사망자는.”“다섯.”“세 번째.”카이든의 손이 옆에 놓인 나무패로 향했다.“어제 새벽. 동부 직물 공방 대금 호송.”카시안이 나무패를 집었다. 얇고 납작한 패였다. 한쪽에는 로세트 상단의 지급대 표식이 있었고, 반대편에는 깊은 칼자국이 남아 있었다.“돈은.”“그대로였다.”카시안의 눈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카이든이 말했다.“세 건 모두 화물도 일부 남았다. 금화도 손대지 않았다. 대신 거래 장부와 보증서 사본만 사라졌다.”“그럼 도둑은 아니군요.”“누가 봐도.”카시안은 목패를 내려놓았다.“사고도 아니고.”“그래.”집무실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카이든은 그 침묵을 오래 두지 않았다.“세 거래처에서 모두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로세트 운송로를 믿고 물건을 맡겼으니, 손실도 로세트가 책임지라고.”“틀린 말은 아닙니다.”카이든의 눈빛이 차가워졌다.“내 앞에서 남의 편을 들 생각인가.”“의뢰를 받기 전에 값부터 올리는 겁니다.”카이든의 입술이 얇아졌다.카시안은 책상 위의 서류를 한 장 넘겼다.세 거래처의 배상 청구. 발신일은 달랐다. 문장은 비슷했다.운송 안전 보장 실패.기한 내
이번에는 대답이 빨랐다.“네.”여자들의 목소리가 겹쳤다.정하은은 방금 붙인 머리카락을 다시 떼어냈다.딸각.딸각.이번에는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뒤로 물러났던 사람들이 정하은의 손끝을 따라 가까이 왔다.정하은은 짧은 검은 머리카락을 양옆에 붙였다.원래 머리는 뒤로 말아 올리고, 짧은 가닥을 얼굴 옆으로 내렸다.미라가 빗으로 몇 번 정리했다.몇 분 전과 또 다른 모습이 됐다.정하은이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이건요?”주방 여자는 대답하지 못했다.자기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아 목덜미 위로 올려봤다.하녀 하나도 같은 행동을 했다.“저도 저렇게 할 수 있습니까?”“머리 길이에 따라 조금 다르겠지만요.”“이 색 말고 제 머리색으로도요?”“있어요.”“끝이 더 말린 건요?”“네. 그것도 있어요.”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머리숱이 적은 곳에만 붙일 수도 있어요?”“혼자서도 할 수 있습니까?”“매일 바꿔도 됩니까?”“긴 것과 짧은 걸 같이 써도 돼요?”“저 붉은색 좀 보여주세요.”조금 전까지 식탁 위의 머리카락을 꺼리던 사람들이었다.이제는 상자 주변으로 모여들었다.미라가 머리카락을 하나씩 꺼내 보여줬다.“이쪽이 더 밝습니다.”“그건 뒤에 붙이는 길이예요.”“끝이 말린 건 눌리지 않게 잡아주세요.”주방 여자는 밝은 갈색 머리카락을 자기 얼굴 옆에 대봤다.옆에 있던 사람이 고개를 저었다.“그건 너무 밝아.”“그래?”“붉은색이 더 나아.”“붉은색은 너무 튀잖아.”“그게 좋은 거 아니야?”두 사람은 벌써 자기 물건처럼 고르고 있었다.그렌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식탁 한쪽으로 몰리자 접시를 먼저 치웠다.“음식 위로 넘기지는 마세요.”그는 빈 공간을 만들어 상자를 옮겨놓았다.여자들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따라갔다.엘린은 식탁 끝에 기대 서서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며칠 동안 자신이 본 건 작은 금속 조각과 머리카락 묶음뿐이었다.정하은이 몇 번 붙였다 떼는 것도 봤다.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며칠 만에 식당 안이 제법 북적였다.그동안 모두 각자 맡은 일로 저택을 비우는 날이 많았다. 작은짐 사업은 마일로가 맡았고, 로웬을 비롯한 실무진이 그 일을 도왔다. 카시안과 베라, 야라는 로세트 상단 일로 바빴다. 실렌과 노아도 단풀 마을의 사전 조사를 마치고 막 돌아온 참이었다.동쪽 창고에서 지내던 엘린은 그사이 식당을 오가며 블랙우드 사람들과 제법 얼굴을 익혔고, 비를 막는 마차 덮개도 완성했다.그렇게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는데, 정하은의 자리만 비어 있었다.베라가 카시안을 봤다.“새 마님은 오늘도 안 오십니까?”“곧 와.”카시안은 정하은의 빈 의자를 당겨놓았다.“오늘은 같이 먹겠다고 했어.”노아가 빵을 뜯다가 고개를 들었다.“새 마님 얼굴 본 지 꽤 된 것 같습니다.”“너도 며칠 없었잖아.”베라가 말했다.“떠나기 전부터 못 뵀습니다.”노아는 빵을 한입 베어 물었다.“요즘은 식당에 아예 안 오십니까?”음식을 내려놓던 주방 하녀가 말했다.“그동안은 일하시는 곳으로 가져다드렸어요.”노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맞은편의 엘린을 봤다.“엘린은 알고 있습니까?”“뭘.”“새 마님이 그동안 뭘 하셨는지요.”엘린은 수프를 한 숟가락 떠먹었다.“알아.”노아가 몸을 조금 기울였다.“뭡니까?”“곧 보면 알 텐데.”“조금만 먼저 알려주시면 안 됩니까?”“안 돼.”노아는 아쉬운 얼굴로 빵을 다시 뜯었다.그때 식당 문이 열렸다.먼저 들어온 건 미라였다. 길쭉한 상자 하나를 품에 안고 있었다.그 뒤로 정하은이 모습을 드러냈다.갈색 머리카락이 등을 가득 덮은 채 걸음을 따라 흔들렸다. 짙은 갈색 사이에는 조금 밝은 가닥이 섞여 있었고, 끝부분은 부드럽게 말려 있었다.식탁 위의 말소리가 하나둘 끊겼다.평소 입던 드레스에, 분명 같은 얼굴이었다.그런데 전혀 다른 사람이 들어온 것처럼 보였다.노아는 입에 넣으려던 빵을 멈췄고, 베라도 잔을 내려놓았다.정하은은 쏟아지는 시선을 받으며 식당을 가로질렀다. 카시안 옆에 멈춰 선
“버려.”“뭔지는 봐야죠.”베라가 노아를 봤다.“문제는 너 하나로 충분해.”노아는 억울한 얼굴로 정하은을 보았다.“새 마님, 물건은 죄가 없습니다.”정하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노아의 얼굴이 밝아졌다.“사람이 문제죠.”노아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베라가 짧게 웃었다.노아는 못 들은 척 첫 번째 물건을 내밀었다.손바닥만 한 나무 조각이었다. 둥근 나무판 가운데에 얇은 쇳조각이 들어가 있었다.“이건 생선 경매장에서 씁니다.”그가 엄지로 가운데를 눌렀다.딸각.생각보다 크고 또렷한 소리가 났다.식당에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노아가 만족스럽게 웃었다.“이렇습니다.”그가 다시 눌렀다.딸각.몇 사람이 미간을 찌푸렸다.노아의 엄지가 세 번째로 움직이려는 순간 베라가 말했다.“손가락 접어.”노아가 멈췄다.“아직 설명이 남았습니다.”“입으로 해.”노아는 딸각쇠를 정하은에게 건넸다.“경매를 시작할 때도 쓰고, 살 사람이 참여한다고 알릴 때도 씁니다. 생선 공판장이 워낙 시끄러워서 목소리보다 이게 낫답니다.”정하은이 가운데를 눌렀다.딸각.손끝에 얇은 쇠가 꺾였다 돌아오는 감각이 느껴졌다.“이거 하나면 사람들이 돌아봐요?”“예. 저도 돌아봤습니다.”“그래서 사버렸어요?”“예.”“잘 만든 물건이네요.”노아의 얼굴이 밝아졌다.“그렇죠?”“소리 한 번에 손님 하나를 잡았잖아요.”노아가 잠깐 생각했다.“저는 손님이 아니라 조사하러 간 겁니다.”“돈을 냈으면 손님이에요.”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맞아.”노아는 딸각쇠를 바라보았다. 조금 배신당한 얼굴이었다.정하은은 한 번 더 눌렀다.딸각.그렌이 식당 문밖에서 들어오다가 멈췄다.“부르셨습니까?”정하은은 손안의 물건을 내려다봤다.“아뇨.”그렌은 노아를 봤다.“또 뭘 사 왔나 보군.”“또라니요. 오늘 처음 보여드리는 겁니다.”“네가 없는 동안 조용했다.”노아는 대답하지 못했다.정하은은 딸각쇠를 보류 쪽으로 밀었다.“남
블랙우드의 사람들은 생각보다 빨리 흩어졌다.정하은이 일주일을 줬지만, 정말 일주일을 다 쓰려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첫 번째 물건은 엘린이 온 날 저녁이 되기도 전에 들어왔다.마구간에서 일하는 소년이 작은 자루를 들고 식당으로 찾아왔다. 자루 안에서는 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정하은은 자루와 소년을 번갈아 보았다.“뭘 잡아 왔어요?”“잡은 건 아닙니다.”“그럼 주웠어요?”“샀습니다.”소년은 제법 당당하게 자루를 열었다.안에는 손바닥만 한 잿빛 덩어리가 들어 있었다. 표면이 거칠고 군데군데 흰 결정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정하은이 하나를 집었다.“돌이네요.”“예.”정하은은 돌을 한 번 뒤집어봤다.“좋아요. 시작부터 예상 밖이네.”소년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렸다.“말들이 좋아합니다.”“돌을요?”“계속 핥습니다.”정하은은 돌을 다시 보았다.“먹어봤어요?”소년이 손가락 끝을 조금 들어 보였다.“이만큼만요.”“왜요?”“말들이 너무 좋아해서.”정하은은 잠깐 소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이해해요. 남이 맛있게 먹으면 궁금하죠.”소년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짭니다.”“소금이네요.”“예.”“말들이 좋아하고요?”“묶어두면 이것만 봅니다.”정하은은 돌을 자루에 내려놓았다.“좋네요.”소년의 얼굴이 밝아졌다.“팔 수 있습니까?”“말한테요?”소년이 눈을 깜빡였다.“말은 돈이 없는데요.”정하은이 웃었다.“그러니까 주인한테 팔아야죠.”소년은 그제야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말을 키우는 사람이면 삽니다.”“말이 좋아하는 걸 보여주면 더 잘 사겠네요.”“보여드릴 수 있습니다.”“그럼 이거 하나로 며칠이나 먹는지 알아와요.”정하은은 자루 안의 돌을 한 번 더 보았다.“말이 몇 번이나 쳐다보는지도.”소년이 잠깐 멈췄다.“쳐다보는 것도 셉니까?”“좋아한다면서요.”“예.”“그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알아야죠.”소년은 진지한 얼굴로 자루를 안았다.“세겠습니다.”그가 돌아가자 카시안이 물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