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스무 살 겨울, 성녀를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으로 처형당한 «악녀» 비올레타. 눈을 뜨니 열일곱 성인식 날 아침이었다. 이번 생은 착한 척 안 한다. 싫으면 싫다고, 하고 싶은 건 한다. 그런데 전생에 나를 처형한 북부 대공이 자꾸 따라온다. “왜 계속 따라와요?” “네가 가는 곳이니까.” “저 악녀인데요?” “알아.”
Lihat lebih banyak악녀 수칙: 착한 척하지 않는다.
12월 20일. 죽기에는 날씨가 너무 맑았다.
광장 바닥에 쌓인 눈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구경 나온 사람들은 목도리에 코를 묻고, 장갑 낀 손을 비볐다. 누군가는 발이 시린지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나는 맨손이었다.
손가락을 접었다 펴 보았다. 잘 움직이지 않았다. 추워서인지, 이제 움직일 일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는 몰랐다.
“악녀!”
군중 속에서 외침이 터졌다.
“성녀님께 사죄해라!”
성녀를 독살하려 했다는 죄. 내가 하지 않은 일을 적은 판결문은 이미 낭독이 끝났다. 내 이름만큼은 정확했다.
비올레타 에버린. 스무 살.
다들 내 이름보다 악녀라는 말을 좋아했다.
고개를 들자 광장 한쪽의 재판관석이 보였다. 은회색 머리, 회색 눈. 북부 대공 레녹스 발트하임은 그곳에 앉아 있었다.
내 말을 거짓이라고 판결한 사람.
성녀의 말은 참이라고 판결한 사람.
눈이 마주쳤다. 레녹스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나도 피하지 않았다. 이미 더 잃을 체면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나.”
나는 입술을 벌렸다. 찬 공기가 목 안으로 들어왔다.
살려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찾지도, 나를 외면한 약혼자를 부르지도 않았다.
그런 말은 충분히 해 봤다. 재판이 끝나기 전까지.
“나는 거짓말한 적 없어요.”
크게 말하지 않았는데도 가까운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레녹스의 손이 왼쪽 귀로 올라갔다.
은 귀걸이를 짚은 손가락이 멈췄다.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얼굴을 보았다.
늘 굳어 있던 입술이 벌어졌다. 눈썹이 일그러지고, 턱이 작게 떨렸다. 내 판결문을 읽을 때조차 변하지 않았던 얼굴이었다.
이제 와서 왜.
레녹스가 재판관석을 벗어나 한 걸음 내려왔다.
이름을 부르려는 듯 입술이 움직였다. 무슨 말인지는 듣지 못했다. 바람이 불었고, 내 머리카락이 뺨을 덮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끝까지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다.
그런데 마지막에 본 얼굴은, 어째서 그런 얼굴이었을까.
◐
“아가씨. 아가씨, 일어나셔야 해요.”
누군가 내 어깨를 건드렸다.
나는 이불을 움켜쥐었다.
이불.
손가락 사이로 부드러운 천이 구겨졌다. 광장에는 이불이 없었다. 내 침대도, 아침마다 들리던 저 목소리도.
눈을 뜨자 하얀 천장이 보였다. 침대 기둥에 달린 얇은 커튼이 바람에 흔들렸다. 창가에는 내가 싫어해서 치워 달라고 했던 분홍색 꽃병이 놓여 있었다.
그것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침대 옆의 사람이었다.
작은 키. 빨간 볼. 앞치마 끈을 단단히 묶은 허리.
“한나?”
“네, 아가씨.”
한나는 드레스를 든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입술이 움직이고, 눈을 깜빡이고, 내가 일어나지 않자 곤란한 듯 발끝을 모았다.
나는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한나는 내 방에서 쫓겨났었다.
도둑이라는 말을 들으며 저택 문을 나서던 뒷모습을 기억했다. 내가 부르자 돌아봤지만, 집사의 손에 떠밀려 끝내 고개를 숙였던 것도.
그 뒤에는 만나지 못했다.
그런 한나가 내 침대 앞에 서 있었다.
“어디 갔었어?”
“드레스 가지러요. 어제 다림질해 두었는데 치맛단이 접혀서 다시 펴느라 조금 늦었어요.”
한나는 품에 든 옷을 보여 주었다.
연한 보라색 드레스였다. 소매 끝에 작은 진주가 달려 있었다. 가슴 아래로 내려오는 주름, 지나치게 가는 허리, 숨을 얼마나 참아야 들어갈지 모를 치수.
나는 그 옷을 알았다.
성인식 무도회에 입었던 드레스였다.
상체를 일으켰다. 이불이 허리 아래로 흘렀다. 잠옷 소매 밖으로 나온 손목이 기억보다 가늘었다.
손바닥을 폈다.
오른손에 고삐를 잡으며 생긴 굳은살이 남아 있었다. 오래 말을 타지 않아 옅어졌지만 아직 지워지지 않은 흔적이었다.
나는 두 손을 맞대 보았다. 얼어붙었던 손끝은 따뜻했다.
“오늘이 며칠이야?”
“4월 1일이요.”
한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몸이 안 좋으세요?”
“내가 몇 살이지?”
이번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한나가 드레스를 침대 끝에 내려놓고 가까이 왔다.
“열일곱이세요. 아가씨, 정말 어디 아프신 거 아니에요? 의원을 부를까요?”
열일곱.
나는 잠옷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천 아래에서 심장이 뛰었다. 급하게 뛰어서 숨을 천천히 내쉬어야 했다.
광장의 추위가 손끝에 남아 있었다. 레녹스가 일어날 때 난 의자 소리도 귀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열일곱이라니.
“아가씨?”
“잠깐만.”
한나가 입을 다물었다.
창밖에서 정원사가 가지를 자르는 소리가 났다. 복도에서는 누군가 쟁반을 들고 지나갔다. 찻잔이 부딪치는 소리 다음으로 익숙한 바닥 삐걱임이 따라왔다.
살아 있을 때 듣던 소리였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맨발로 밟은 융단이 부드러웠다. 한나가 급히 실내화를 가져왔지만, 그 전에 화장대 거울 앞에 섰다.
검은 머리가 어깨를 넘어 흘렀다. 보랏빛 도는 눈. 끝이 올라간 눈매.
뺨이 아직 마르지 않았다. 재판 내내 제대로 먹지 못해 헐거워졌던 잠옷도 몸에 맞았다.
나는 거울에 손을 대었다.
거울 속 손도 따라 올라왔다.
“달력 보여 줘.”
한나가 책상 위의 달력을 가져왔다. 나는 종이를 넘기지 않고 앞장을 보았다.
4월 1일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그 아래에는 내 글씨가 있었다.
『성인식 무도회. 전하께 먼저 인사드릴 것.』
한동안 그 글씨를 보았다.
밑줄까지 그어 놓았네.
아주 열심이었군, 비올레타 에버린.
“어제 아가씨께서 세 번이나 확인하셨잖아요.”
한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필립 전하께 드릴 인사도 연습하셨고요.”
“그랬지.”
그랬다. 기억났다.
왕자가 나를 조금이라도 좋게 볼까 싶어서 거울 앞에서 웃는 연습을 했다. 이빨이 많이 보이면 경박하고, 입꼬리만 올리면 비웃는 것 같다고 했다.
웃는 것도 까다로운 일이었다.
나는 달력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정확히 돌아왔다. 죽기 전의 방이 아니라,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던 날의 방으로.
◐
한나는 아침 식사 쟁반을 가져왔다.
수프 한 그릇과 얇게 자른 빵이었다. 잼은 없었다. 드레스를 입어야 하는 날에는 단것을 먹지 않는다고, 내가 직접 부탁했던 식사였다.
나는 빵을 들었다가 한나를 보았다.
“너는 먹었어?”
“저는 나중에 먹으면 돼요.”
“먹었냐고 물었어.”
“아직 안 먹었어요.”
한나가 앞치마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빵을 반으로 갈랐다. 접시 한쪽에 놓고, 침대 옆 낮은 의자를 당겼다.
“앉아.”
“아가씨 식사인데요.”
“내가 먹으라고 했어.”
한나는 문을 돌아보았다. 복도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한 뒤에야 의자 끝에 걸터앉았다. 빵도 바로 집지 않았다.
나는 수프를 한 숟갈 먹었다.
따뜻했다.
입천장이 조금 데었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한나는 그 짧은 사이에도 벌떡 일어나 물잔을 채웠다.
“가만히 앉아 있어. 물은 내가 따를 수 있어.”
“오늘 이상하세요.”
한나가 말하고는 입을 가렸다.
나는 빵을 씹다가 한나를 보았다.
“어떻게?”
“화를 내시는 게 아니라…… 아니, 원래 화를 내신다는 뜻은 아니고요.”
“알아. 계속 말해.”
“늘 바쁘셨잖아요. 오늘 같은 날은 더요.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머리 모양이랑, 후작님께서 고르신 장신구랑.”
한나는 말을 고르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오늘은 제가 밥을 먹었는지 먼저 물으셔서요.”
나는 수프 그릇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밀었다.
이 작은 것 하나를 하지 않았구나.
내 하녀가 아침을 굶었는지 묻는 일.
한나가 빵을 집었다. 끝을 조금 떼어 입에 넣었다. 내가 보고 있자 서둘러 삼키려 했다.
“천천히 먹어. 무도회는 저녁이잖아.”
“머리를 올리고 장신구까지 맞추려면 시간이 많이 걸려요.”
“그럼 머리를 덜 올리면 되지.”
한나의 손이 멈췄다.
그 정도 말에도 놀랐다. 내가 얼마나 고분고분하게 살았는지 하녀의 얼굴로 확인할 수 있었다.
참 애썼다.
좋아하지도 않는 머리를 하고, 숨도 못 쉬는 옷을 입고, 듣기 싫은 말에 웃고.
그러고도 마지막에는 악녀였다.
나는 빵 부스러기를 접시 안으로 모았다.
이번에는 순서를 바꿀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 마음에 들 일을 찾기 전에, 내가 싫은 것부터 골라낼 생각.
일단 이 아침 식사부터였다.
“다음부터 잼도 가져와.”
“드레스가 안 맞을 수도 있어요.”
“잼 한 숟갈에 안 맞는 드레스면 옷이 잘못됐네.”
한나가 작게 웃었다. 곧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나는 봤다.
쫓겨나던 날에는 저런 표정이 아니었다.
나는 물잔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문밖으로 혼자 내보내지 않기로 했다.
◐
성인식 드레스는 예상대로 불편했다.
한나가 허리 뒤의 끈을 당기자 나는 곧바로 말했다.
“거기까지.”
“조금만 더 조여야 단추가 맞아요.”
“숨이 안 쉬어져.”
“후작님께서 단정하게 입으라고 하셔서…….”
“아버지가 입으실 건 아니잖아.”
한나가 끈을 잡은 채 멈췄다.
나는 거울로 한나를 보았다. 이 말이 복도 밖으로 나가면 먼저 혼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한나였다.
“내가 느슨하게 하라고 했다고 해. 물으면 그대로 말하고.”
“정말 그래도 될까요?”
“응. 네가 한 말 아니잖아.”
한나가 조심스럽게 끈을 풀었다.
갈비뼈를 누르던 천이 느슨해졌다.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옷을 입고 숨을 쉬는 일이 이렇게 대단할 줄이야.
하지만 등 위쪽의 작은 단추는 여전히 맞지 않았다.
한나가 손톱으로 단춧구멍을 벌렸다. 손끝이 떨렸다. 한 번 놓치자 더 서둘렀고, 진주 단추가 손가락 사이에서 자꾸 빠져나갔다.
“죄송해요. 금방 할게요.”
나는 거울에서 눈을 떼었다.
“한나.”
“네. 금방요.”
“내 말 들어.”
돌아서는 바람에 드레스 뒤가 조금 벌어졌다. 한나는 황급히 천을 붙잡았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광장에서 내 손도 이랬다. 아무도 잡아 주지 않았다는 차이만 있었다.
“오늘은 내가 할게.”
한나가 내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뒤에 있는 단추라 아가씨께서는 못 보시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다시 살아났다고 팔이 더 길어지진 않았군.
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드레스 앞의 단추를 가리켰다.
“이건 내가 하고. 뒤에 있는 건 남겨 둬. 허리가 안 맞으면 다른 옷을 입으면 돼.”
“성인식 드레스인데요.”
“성인식이 옷 치수에 맞춰 열리진 않잖아.”
나는 한나의 손을 놓았다. 대신 단춧구멍이 달린 천을 받아 직접 만져 보았다. 너무 작았다. 단추가 아니라 천을 조금 늘리면 되는 일이었다.
“네가 못한 게 아니야. 구멍이 작아.”
한나는 고개를 숙였다.
“어젯밤에 제가 확인했어야 했어요.”
“지금 봤으니까 됐어.”
나는 앞쪽 단추 하나를 채웠다. 한나가 뒤에서 천을 정리했다.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았다.
거울 속에 둘이 나란히 비쳤다.
한나는 아직 볼이 빨갰다. 나는 여전히 눈매가 사나웠다.
열일곱 때도, 스무 살 때도 저 눈 때문에 말을 많이 들었다. 조금만 눈을 내리깔면 오만하다 했고, 바로 보면 노려본다 했다.
눈을 어디에 두라는 건지.
“아가씨, 눈에 힘을 조금 빼시면…….”
한나가 익숙한 말을 하다가 멈췄다.
나는 거울 속 한나를 보았다.
“내가 전에 그렇게 말해 달라고 했지?”
“네. 무서워 보이면 알려 달라고 하셨어요.”
그것까지 부탁했구나.
나는 눈썹을 일부러 내리지 않았다. 입가도 억지로 끌어 올리지 않았다.
“이제 안 알려 줘도 돼.”
“네?”
“내 얼굴이야. 계속 보고 살 건 나고.”
한나는 대답 대신 남은 단추를 채웠다.
이번에는 손이 덜 떨렸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문밖에서 아버지가 준비가 얼마나 되었는지 물으셨다는 말이 들렸다.
한나가 내게 허락을 구하듯 돌아봤다.
“드레스 손보는 중이라고 해.”
한나가 문을 조금 열고 그대로 전했다. 문밖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나는 뒤에 남은 단추를 만져 보았다.
아버지는 무도회장에서 자세를 바르게 하라고 하실 터였다. 필립 전하가 무슨 말씀을 하든 웃고, 먼저 손을 내미시면 감사히 받아들이라고도.
나는 그 손을 기다리느라 저녁 내내 문 쪽만 봤었다.
인사를 빼먹을까 봐 접시도 들지 않았다. 전하가 다른 영애와 춤추는 동안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 부채를 폈다.
오늘도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다.
“한나, 장신구 가져와 줄래?”
한나가 상자를 열었다. 아버지가 고른 묵직한 목걸이가 맨 위에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집지 않았다. 작은 진주 귀걸이만 골라 화장대에 올렸다.
“목걸이는 안 하세요?”
“무거워.”
“후작님께서 물으시면요?”
“무거워서 안 했다고 해.”
거짓말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것 하나는 끝까지 지켰다. 죽는 날까지 지켰는데도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지만, 남이 믿지 않는다고 내가 버릴 이유는 없었다.
나는 화장대 위의 달력을 다시 보았다.
전하께 먼저 인사드릴 것.
종이를 찢지는 않았다. 저 문장을 쓰느라 펜을 몇 번이나 고쳐 잡았던 손이 아직 내 손이었다.
대신 달력을 엎어 놓았다.
“필립 전하께서 첫 춤을 청하시면 장갑부터 끼셔야 해요.”
한나가 장갑을 챙기며 말했다.
나는 장갑을 받아 손가락에 끼웠다. 끝이 조금 남았다. 벗어서 화장대에 내려놓았다.
“첫 춤을 안 출 수도 있어.”
“전하께서 안 청하시면요?”
“내가 안 추고 싶으면.”
한나가 나를 보았다.
나는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보라색 드레스는 예뻤다. 진주 귀걸이도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면 됐다.
웃는 연습은 하지 않았다.
대신 오늘 저녁 필립에게 해야 할 말을 골랐다. 전하가 먼저 손을 내밀어도, 사람들이 돌아봐도 끝까지 할 말이었다.
거울 속 내가 턱을 들었다.
“이번엔 착한 척 안 해.”
(1화 끝)
악녀 수칙: 서약할 때는 손을 숨기지 않는다.덮어 둔 수첩 위로 햇빛이 들었다.나는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표지를 만졌다. 어젯밤 끼워 둔 쪽지 끝이 그대로 나와 있었다. 마지막 장도 아직 비어 있었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아가씨, 일어나셨어요?”“응.”한나가 문을 열었다. 양팔에 연보라색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어제보다 눈이 조금 부었지만, 빗을 쥔 손은 멀쩡했다.“오늘은 잘 빗을 수 있겠어?”“네. 안 울 거예요.”“그건 해 보고 말해.”한나는 웃으면서 드레스를 의자에 펼쳤다.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창을 열었다. 저택 앞에 마차가 서 있었다. 하인들이 마지막 상자를 실었고, 데릭은 현관 계단에서 장갑을 끼고 있었다. 턱이 말끔했다.잘 깎았네. 결혼식에 늦게 온 데다 수염까지 남아 있었으면 두고두고 말했을 것이다.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앉았다.한나가 머리를 빗어 올렸다. 핀을 꽂을 때마다 어디가 당기지 않는지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하면서 접시에 놓인 브로치를 집었다.“이건 네가 달아 줘.”한나가 두 손으로 받았다.“식이 끝나면 바로 떼어 드릴게요.”“급하게 떼지는 말고. 옷에 구멍 난다.”드레스 가슴께에 브로치가 달렸다. 한나는 핀을 확인하고 손바닥으로 옷감을 가볍게 눌렀다.어머니의 면사포는 마지막이었다.상자에서 꺼냈을 때는 길어 보이더니 머리에 얹자 등 뒤로 고르게 떨어졌다. 한나가 끝을 펴 주는 동안 나는 왼손의 은반지를 만졌다.“장갑은요?”“서약할 때 벗을 거야.”“지금은 끼실 거죠?”“응. 고삐 잡으러 가는 건 아니니까.”한나가 장갑을 내밀었다.오른손을 넣기 전에 손바닥을 한번 폈다. 굳은살 위로 아침빛이 닿았다. 새삼 문지르지는 않았다. 없어져야 할 것도 아니었다.화장대 위 수첩은 작은 가방에 넣었다.한나가 문을 열고, 나는 치맛자락을 들어 계단을 내려갔다.아버지가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내 옷을 보고는 콧수염 아래 입술을 다물었다. 한나가 뒤에서 면사포를 정리하는 동안에도 아
악녀 수칙: 우는 사람에게는 빗을 맡기지 않는다.한나는 빗을 받아 들고 한 걸음 물러났다.“아직 아가씨 머리를 다 못 빗었는데요.”“네 눈부터 닦아.”“안 울었어요.”나는 한나를 봤다.한나도 나를 보다가 얼른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조금만요.”“조금 울어도 울긴 운 거야.”빗을 들고 돌아올 때부터 코끝이 빨갰다. 면사포 상자를 닫다가 눈을 훔치는 것도 봤다. 내가 거울만 보고 있는 줄 알았나 보다.한나는 내 뒤로 와서 풀린 머리카락을 모았다.“정말 조금만 더 하면 돼요. 이쪽이 아직 엉켜서요.”“그럼 그것만 풀고 앉아.”나는 빗을 돌려줬다.한나는 머리 끝부터 조심스럽게 빗었다. 익숙한 손이었다. 잡아당기지도 않았고, 엉킨 곳을 억지로 내리지도 않았다.문제는 빗질이 자꾸 멈춘다는 데 있었다.거울 속 한나가 입술을 꾹 누르고 있었다.“아프세요?”“아니.”“그러면 조금 더…….”말끝이 작아졌다.한나의 손이 내 머리 뒤에서 멈췄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손을 뒤로 내밀었다.“빗.”한나는 이번에는 순순히 건넸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나를 의자에 앉혔다. 한나가 벌떡 일어나려 해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내가 앉으라고 했지, 벌 받으라고 했니?”“아가씨가 제 머리를 빗어 주시면 이상하잖아요.”“머리카락은 네 게 더 얌전해.”한나의 머리핀을 뺐다. 단단히 말아 올린 머리가 목 아래로 풀렸다. 한나는 두 손으로 무릎을 덮고 거울을 쳐다봤다.“왜 우는데?”“내일 결혼하시니까요.”“그건 알아.”“좋아서요.”나는 빗을 머리 끝에 댔다.“그런데 왜 사람 장례 치르는 얼굴이야.”한나가 웃다가 코를 훌쩍였다. 웃기는 데 성공했다고 보기엔 소리가 축축했다.손수건을 건네자 한나는 두 손으로 받았다.“아가씨가 북부로 가셔도 저를 데려가 주신다고 하셨는데, 자꾸 여기서 마지막으로 머리를 빗어 드리는 것 같아서요.”“내일도 빗어 줘야지.”“네.”“모레도.”한나가 손수건 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북부에서도. 거기
악녀 수칙: 남이 정한 색을 입지 않는다.“데려갈 거예요.”내 대답에 베른이 먹구름의 고삐를 고쳐 잡았다.“그럼 꽃 장식에 익숙해지게 해 둬야겠습니다.”먹구름은 제 결혼식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턱을 높이 들었다. 나는 검은 목을 두드렸다.“꽃은 먹는 게 아니야.”먹구름이 내 손바닥을 뒤졌다.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레녹스 쪽으로 코를 돌렸다.“그쪽도 없대.”레녹스가 빈 주머니를 뒤집어 보였다. 먹구름은 기어이 주머니 끝까지 냄새를 맡았다. 사람 말을 믿지 않는 건 좋은데, 너무 철저했다.베른이 고삐를 당겨 검은 코를 떼어 놓았다.“옷을 물지 않는 연습도 해야겠네요.”“그건 꼭 해 주세요. 제 치마는 길어질 테니까.”레녹스가 나를 봤다.“정했나.”“아직요. 색부터 고르려고요.”“같이 가지.”“드레스 고르는 데도요?”“그래.”베른은 먹구름을 보고, 레녹스를 보고, 다시 고삐를 잡았다.“둘 다 아가씨가 가는 데 가고 싶은 모양입니다.”먹구름이 콧김을 뿜었다. 레녹스는 부정하지 않았다.나는 극장 계단을 내려가며 내밀어진 손을 잡았다.◐3월 30일, 드레스 가게의 창에는 하얀 옷이 걸려 있었다.치마를 풍성하게 벌리고 소매에는 고운 자수를 놓았다. 허리에 묶인 띠도 하얬다. 흠잡을 곳 없이 예쁜 옷이었다.내가 입고 싶은 옷은 아니었다.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주인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한나는 내 망토를 받아 들었고, 레녹스는 문을 닫고 곧장 따라 들어왔다.주인의 시선이 레녹스에게서 멈췄다.“대공 전하께서도 함께 고르시나요?”“구경만 해요.”내가 먼저 대답했다.레녹스는 내 옆에 섰다.“필요하면 돕겠다.”“단추 잠그는 건 한나가 해 줘요.”“그럼 기다리지.”주인은 창가의 넓은 의자를 권했다. 레녹스가 앉으려다 내 쪽을 봤다.나는 가게 안쪽의 거울을 가리켰다.“저는 저기 있을 거예요.”레녹스는 의자를 조금 옮겼다. 거울이 잘 보이는 자리였다.한나가 내 망토를 접다가 웃었다.“전하, 제가 옷을 가리면
악녀 수칙: 마음에 드는 날은 내 것으로 삼는다.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레녹스가 내 장갑을 주워 들었다.나는 왼손을 내밀었다. 반지를 낀 채 장갑을 끼우려니 손가락 끝이 자꾸 안쪽에 걸렸다.“빼고 낄까.”“싫어요. 방금 꼈는데.”레녹스는 장갑 입구를 넓혀 줬다. 나는 손가락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은반지가 천 아래로 가려졌다.괜히 손등을 한 번 쓸었다.“내려가면 벗으면 되지.”“알아요.”“계속 만지길래.”나는 손을 내렸다가 다시 레녹스의 손을 잡았다.“이건 만져도 되잖아요.”“그래.”계단 아래에서 데릭이 우리를 올려다봤다.“차 식는다!”한나가 바로 데릭의 옆구리를 눌렀다. 오웬은 찻잔을 들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요리사는 접시 가운데에 과자를 더 쌓았다.나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갔다.레녹스도 손을 잡은 채 따라 내려왔다. 빈 의자는 바로 옆에 있었는데, 오웬이 굳이 두 의자를 조금 더 붙였다.“너무 가까운데요.”내 말에 오웬이 의자를 도로 밀려 했다.나는 먼저 앉았다.“옮기라는 말은 안 했어요.”오웬이 손을 거뒀다. 데릭은 차를 마시다 웃었고, 한나는 결국 손수건을 꺼냈다.레녹스가 내 앞에 과자 접시를 놓았다.나는 장갑을 벗고 은반지를 드러냈다. 모두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 손에 붙었다.“차 식는다며.”데릭에게 말하자 그제야 다들 찻잔을 들었다.◐3월 28일, 수도로 들어가는 길은 북부보다 훨씬 질었다.바퀴가 물기 섞인 흙을 밟을 때마다 마차가 조금씩 기울었다. 나는 창밖의 길을 보다가 무릎 위에 올린 편지를 다시 펼쳤다. 어제 묵은 곳까지 달려온 수도의 전령이 건넨 편지였다.왕의 허락은 짧았다.『레녹스 발트하임 대공과 비올레타 에버린 영애의 혼인을 허락한다. 왕궁 정원을 예식 장소로 내주겠다.』끝에 찍힌 왕의 인장이 종이를 접어도 조금 튀어나왔다.그 밑에는 아버지의 편지가 있었다.왕궁 정원을 쓸 수 있다는 말보다 그쪽이 더 뜻밖이었다.『4월 1일은 어떠냐. 준비는 해 두겠다. 네가 싫다면 다른 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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