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백 년에 한 번, 산신에게 신부를 바쳐야 하는 마을. 스물두 살 연화는 제비뽑기로 산신의 신부가 되자 혼례날 밤 도망쳐 버린다. 그런데 도망친 신부를 찾아온 산신이 지나치게 잘생겼다. “저 신부 안 할 건데요?” “그래.” “그럼 보내 주세요!” “도망가거라. 또 찾으러 갈 테니.” 도망치는 연화와 느긋하게 쫓아오는 산신 무현. 하지만 그가 그녀를 기다린 시간은 무려 수백 년이었다. 잊힌 전생, 사라진 신부들, 그리고 산에 감춰진 잔혹한 비밀. 이번 생만큼은 반드시 그녀를 살리려는 산신과 어떻게든 살아 도망치려는 신부의 아찔하고 애틋한 동양풍 로맨스.
View More혼례날 밤, 연화는 도망치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망칠 생각은 사흘 전부터 하고 있었다. 백 년에 한 번 산신에게 바칠 신부를 뽑는 제비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왔던 바로 그날부터였다. 연화는 스물두 살이었다. 아직 혼인도 하지 않았고, 좋아하는 사내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앞으로 살아야 할 날이 아주 많이 남아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적어도 그 빌어먹을 제비를 뽑기 전까지는 그랬다. “연화야, 고개를 조금만 들어 보거라.” 늙은 침모가 그녀의 턱을 손끝으로 들어 올렸다. 연화는 얌전히 고개를 들었지만 시선만큼은 연신 창밖을 향했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산 너머로 붉은 노을이 번지기 시작했으니, 이제 반 시진쯤 지나면 산신에게 바칠 혼례 행렬이 출발할 터였다. “참으로 곱구나. 산신께서도 흡족해하시겠어.” 침모는 연화의 머리에 금빛 장식이 달린 족두리를 얹으며 감탄했다. 연화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붉은 비단 위로 금실로 수놓은 봉황이 날개를 펼치고 있었고, 치맛자락에는 구름과 산봉우리 문양이 겹겹이 새겨져 있었다. 혼례복만큼은 어느 양반가 규수의 것보다도 화려했다. 문제는 그 옷을 입고 가는 곳이었다. 보통 혼례를 치르는 신부라면 남편이 될 사내의 집으로 가겠지만, 연화가 가야 하는 곳은 청운산 꼭대기였다. 그것도 살아 돌아온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산신의 거처였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연화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예쁜 옷을 입혀 주고, 머리에 금비녀를 꽂아 주고, 마을에서 가장 귀한 음식을 차려 주는 이유가 모두 자신을 산신에게 바치기 위해서라니. 차라리 평소처럼 낡은 저고리에 흙 묻은 치마를 입고 약초나 캐러 다니는 편이 백배는 나았다. “침모님.” “왜 그러느냐?” “산신께서는 정말 신부를 잡아먹으신대요?” 침모의 손이 멈췄다. 방금 전까지 혼례복이 곱다며 웃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침모는 잠시 문밖을 살피더니 연화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 불경한 말을 입에 담는 것이 아니다.” “그럼 안 잡아먹으신다는 뜻인가요?” “그것은…….” “아니면 잡아먹으시긴 하는데 물어보면 안 된다는 뜻인가요?” 침모가 난처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연화는 대답을 기다렸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한숨뿐이었다. “신의 뜻을 인간이 어찌 알겠느냐. 그저 네가 얌전히 산에 올라가면 마을에는 복이 내릴 것이다.” 연화는 더 묻지 않았다. 어차피 누구에게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비슷했다. 산신의 뜻이다. 마을을 위해서다. 선택받은 것은 영광이다. 그 말들 가운데 정작 연화가 살아 돌아올 수 있는지에 관한 대답은 하나도 없었다. ‘영광이면 본인들이 가지.’ 연화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말을 꺼냈다가는 혼례도 치르기 전에 마을 어른들에게 혼쭐이 날 게 뻔했다. 침모가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방을 나가자 연화는 곧장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다. 화려한 붉은 비단 아래에는 움직이기 편하도록 고쳐 입은 짧은 속바지가 있었다. 발에는 비단신 대신 오래 신어 발에 익숙한 가죽신을 신고 있었다. 혹시라도 달리다가 옷자락에 걸려 넘어질까 싶어 치마 안쪽에도 미리 작은 칼집을 내 두었다. 품속에는 말린 육포 세 조각, 작은 물주머니, 약초를 갈아 만든 연고, 그리고 날이 잘 선 소도가 들어 있었다. 완벽했다. 아니, 거의 완벽했다. 연화는 머리 위에 얹힌 족두리를 만지작거렸다. “이건 좀 무겁네.” 도망칠 때 버리면 그만이었다. 연화는 거울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신부 노릇을 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니, 혼례복이 더러워지든 족두리가 망가지든 알 바 아니었다. 그때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연화야.” 아버지였다. 연화는 반사적으로 치맛자락을 내려 품속의 소도를 감췄다. “아버지.” 평소라면 약초 냄새를 잔뜩 묻히고 들어왔을 아버지는 오늘따라 말끔한 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만큼은 사흘 사이 십 년은 늙은 사람처럼 수척했다. 연화는 아버지의 손을 바라보았다. 약초를 캐느라 굳은살이 박인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정말 가야 하느냐.” 아버지가 물었다. 연화는 어이가 없어 잠시 눈을 깜빡였다. “제가 가고 싶어서 가는 줄 아세요?” “아비가 못나서…….”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연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은 거칠고 차가웠다. 자신을 홀로 키우느라 고생한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로 아버지는 연화가 굶는 일이 없도록 새벽부터 밤까지 산을 오르내렸다. 연화 역시 그런 아버지를 도우며 약초를 배웠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버지가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 제비를 뽑은 날, 아버지는 촌장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신 자신을 보내 달라고 빌었고, 평생 모은 돈을 모두 내놓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마을 어른들은 산신이 원하는 것은 신부이지 늙은 약초꾼이 아니라며 그의 청을 거절했다. 연화는 그날 아버지의 등이 얼마나 작아 보였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 제가 언제 얌전히 남의 말 듣고 산 적 있어요?” “연화야.” “걱정하지 마세요. 저 살 궁리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그 눈에 스치는 감정이 이상했다. 놀람과 두려움, 그리고 아주 희미한 기대. “무슨 뜻이냐?” 연화는 대답 대신 웃었다. “제가 누구 딸인데요.” 아버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품속에서 작은 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이것을 가져가거라.” “뭔데요?” “네 어미가 남긴 것이다.” 연화의 눈이 커졌다. 어머니의 유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입던 옷가지와 오래된 빗 하나가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내민 주머니 안에는 낡은 붉은 끈이 들어 있었다. “이게 뭐예요?” “나도 모른다. 네 어미가 죽기 전에 네게 주라고 했다.” 연화는 끈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오래된 물건인데도 붉은빛이 선명했다. 비단처럼 부드러웠지만 묘하게 차가운 감촉이 있었다. 끈 한쪽 끝에는 알아볼 수 없는 문양이 작은 매듭으로 엮여 있었다. “왜 이제 주셨어요?”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연화의 손을 꼭 쥐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에 박혔다. 연화는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려다가 그만두었다. 아버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자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그럴 거예요.” 연화는 붉은 끈을 품속 깊이 넣었다. “꼭 살아서 돌아올게요.” 그 순간 아버지의 표정이 굳었다. “아니.” “네?” “연화야. 혹시라도 산신께서 너를 받아 주신다면…….” 아버지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연화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저 몸조심하거라.” 연화는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곧 밖에서 혼례 행렬을 준비하라는 소리가 들려왔고, 더 물을 시간도 없었다. 청운마을에는 오래된 전설이 있었다. 백 년에 한 번, 청운산의 산신이 신부를 맞이한다. 산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인간이 아니며, 그 얼굴을 본 여인은 다시는 인간 세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만약 신부를 바치지 않으면 산의 짐승들이 미쳐 날뛰고, 계곡이 마르며, 마을에는 역병이 돈다고 했다. 연화는 어릴 때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 겨울밤이면 어른들은 산신 이야기를 꺼내며 아이들을 겁주곤 했다. 산신의 눈은 금빛으로 빛난다. 산신의 손은 얼음처럼 차갑다. 산신이 이름을 세 번 부르면 반드시 대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산 전체가 뒤집혀 도망친 인간을 찾아낸다고 했다. 연화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코웃음을 쳤다. 산신이 그렇게 무서운 존재라면 왜 굳이 백 년이나 기다렸다가 신부를 데려가겠는가. 마음만 먹으면 마을 여자들을 모조리 잡아갈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막상 자신이 신부로 뽑히고 나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신부를 모셔라!” 마을 어귀에서 커다란 북소리가 울렸다. 연화는 붉은 천으로 장식된 가마에 올랐다. 가마 양옆에는 흰옷을 입은 제관들이 섰고, 그 뒤로는 횃불을 든 사내들이 줄지어 따라왔다. 사람들은 길 양옆에 엎드려 머리를 숙였다. 누군가는 울었다. 누군가는 기도했다. 하지만 누구도 연화에게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그저 살아 있는 사람을 장례 치르듯 보내고 있었다. 연화는 가마의 작은 창을 통해 익숙한 마을을 바라보았다. 어릴 적 소담과 함께 뛰어놀던 우물가, 아버지와 약초를 말리던 마당, 봄이면 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돌담길이 차례로 멀어졌다. 그때 누군가 가마 가까이 달려왔다. “연화 언니!” 소담이었다. 연화는 얼른 창가로 몸을 기울였다. “소담아!” “언니, 이거!” 소담이 작은 보따리를 가마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 안에는 주먹밥 두 개와 말린 대추가 들어 있었다. “산에 올라가면 배고플 거잖아.” “…….” “산신님이 정말 무서우시면…….” 소담은 말을 잇지 못했다. 연화는 애써 웃었다. “걱정 마. 내가 산에서 길 하나는 기가 막히게 찾는 거 알잖아.” “언니.” “혹시 알아? 산신님이 생각보다 괜찮은 분일지도 모르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연화 자신도 믿지 않았다. 소담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연화는 손을 뻗어 친구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울지 마. 얼굴 붓는다.” “언니는 지금 그런 말이 나와?” “그럼 울면서 가야 하니?” 소담이 코를 훌쩍였다. 연화는 보따리를 품속에 넣었다. “잘 먹을게.” 그것이 두 사람이 나눈 마지막 말이었다. 가마가 다시 움직였고, 소담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연화는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산신이 누구든 상관없었다. 신이든 귀신이든, 자신을 잡아먹겠다면 그 전에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산길에 들어선 뒤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처음에는 횃불을 든 사내들이 떠들며 걸었지만 중산에 가까워질수록 말소리가 줄어들었다. 나무가 빽빽해지고 안개가 낮게 깔리자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바람도 이상했다. 분명 가을밤인데 공기는 겨울처럼 차가웠고, 나뭇잎은 흔들리지 않는데 어딘가에서 계속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연화는 가마 안에서 귀를 기울였다. 짐승 소리였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늑대인지 여우인지 모를 울음소리가 숲 곳곳에서 들려왔다. 가마꾼 하나가 겁먹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산신께서 벌써 신부를 맞으러 나오신 것 아닙니까?” “입 다물어라.” 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신부를 내려놓고 돌아가야 한다.” 연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려놓고 돌아간다고?’ 그 말은 자신을 산신에게 직접 인계하는 것이 아니라 산속에 혼자 남겨 둔다는 뜻이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감시하는 사람이 없다면 도망치기도 쉬울 테니까. 연화는 치맛자락 안쪽에 숨겨 둔 소도를 손끝으로 확인했다. 가마 문을 막은 끈만 끊으면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왼쪽 손목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아!” 연화는 저도 모르게 작은 비명을 삼켰다. 손목 안쪽에 있던 붉은 반점이 열을 내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있던 꽃잎 모양의 흔적이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오늘은 마치 달군 쇠를 피부에 갖다 댄 것처럼 화끈거렸다. 연화는 소매를 걷었다. 반점 가장자리에 희미한 금빛이 번졌다가 사라졌다. “……뭐야?”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지만 이미 평소의 붉은 흔적으로 돌아와 있었다. 착각이었을까. 연화가 손목을 문지르는 사이 가마가 멈췄다. “도착했습니다.” 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마 문이 열리자 차가운 밤공기가 밀려들었다. 연화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오래된 돌계단이 있었다. 계단은 짙은 안개 속으로 이어져 있었고, 양옆에는 붉은 등롱이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 있었다. 이상한 것은 등롱 안에 불을 붙인 흔적이 없는데도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온다는 점이었다. 계단 아래에는 낡은 비석 하나가 서 있었다. 연화는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읽으려 했지만 이끼가 두껍게 끼어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때 촌장이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연화야.” “예, 촌장 어르신.” “이제부터는 혼자 올라가야 한다.” “산신님이 어디 계신지도 모르는데요?” “길을 따라가면 된다.” “혹시 길이 두 갈래로 나뉘면요?” 촌장이 잠시 말문을 잃었다. 연화는 순진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산신님이 저를 못 찾으시면 어떡하죠?” “산신께서는 네가 어디 있든 찾아내실 것이다.” “아, 그래요?”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더 빨리 도망쳐야겠네.’ 촌장은 그녀의 표정을 오해했는지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워하지 말거라. 네가 산신의 뜻을 따르면 마을은 평안할 것이다.” 연화는 그 말을 듣고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촌장의 손을 보았다. 그는 무언가를 숨기듯 소매 안쪽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연화의 시선이 그곳에 닿자 촌장은 황급히 손을 내렸다. “어서 올라가거라.” 연화는 천천히 계단에 발을 올렸다. 한 계단. 두 계단. 세 계단. 등 뒤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촌장과 제관들은 이미 가마를 돌리고 있었다. “잠깐만요!” 연화가 불렀다. 촌장이 걸음을 멈췄다. “제가 혹시 산신님 마음에 안 들면 돌아가도 돼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연화는 다시 물었다. “아니면 산신님이 저를 싫다고 하시면요?” 촌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절대로 돌아와서는 안 된다.” 그 목소리가 너무 단호해서 연화는 순간 말을 잃었다. “……왜요?” “산신께 바친 신부는 다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올 수 없다.” “그게 무슨…….” “기억하거라.” 촌장은 연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산 아래로 내려와서는 안 된다.” 그 말을 끝으로 촌장은 몸을 돌렸다. 횃불이 하나둘 멀어졌다. 가마꾼들의 발소리가 사라지고, 마지막 등불마저 숲 아래로 내려가자 연화는 정말로 혼자가 되었다. 그녀는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아까 촌장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산신께 바친 신부는 다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올 수 없다. 그것은 산신이 무서워서 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사람의 말 같았다. 하지만 연화는 곧 고개를 저었다. ‘됐어. 생각은 나중에 하자.’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일이었다. 연화는 주변을 살폈다. 사람은 없었다. 짐승의 기척도 잠잠해졌다. 그녀는 곧장 족두리를 벗었다. “아이고, 살겠다.” 무거운 장식을 벗자 머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연화는 금비녀 두 개를 뽑아 품속에 넣고,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치맛자락을 무릎 위까지 걷어 올려 미리 준비한 끈으로 단단히 묶었다. 마지막으로 가죽신의 끈을 조였다. 완벽했다. 연화는 돌계단 위쪽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안개 너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산신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자신은 저 계단을 올라갈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산신님.” 연화는 두 손을 모아 허공에 대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신부는 다른 데서 알아보세요.” 그리고 몸을 돌렸다. 죽어라 뛰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연화는 산길을 잘 알았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청운산을 오르내렸으니 웬만한 길은 눈을 감고도 찾을 자신이 있었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작은 폭포가 나오고, 그 아래의 바위틈을 지나면 산 아래로 이어지는 짐승길이 있었다. 문제는 산이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여기가 왜 또 나와?” 연화는 눈앞에 나타난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굵은 줄기에 번개 맞은 흔적이 있는 나무였다. 조금 전에도 분명 지나쳤다. 처음에는 비슷하게 생긴 나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줄기 아래에 자신이 칼로 새긴 작은 표시까지 남아 있었다. 연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길을 잘못 들었나?’ 그럴 리 없었다. 아무리 어두워도 산길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눈이 나쁘지는 않았다. 연화는 나무에 손을 짚고 주변을 살폈다. 안개가 더 짙어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달마저 구름 뒤로 숨어 버렸다.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방향을 알 수 없었다. 그때 숲속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 연화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또 웃음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어린아이의 웃음소리 같았다. 연화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산짐승은 아니야.’ 짐승이 저런 소리를 낼 리 없었다. 혹시 요괴일까. 청운산에는 오래전부터 요괴가 산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사람을 홀려 길을 잃게 만드는 여우 요괴, 밤마다 나그네의 이름을 부르는 귀신, 나무 위에서 인간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산괴까지. 평소라면 허튼소리라며 웃어넘겼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연화는 소도를 꺼내 들었다. “누구세요?” 대답이 없었다. “거기 누구 있으면 나오세요.” 바람이 불었다.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그리고 바로 귓가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도망쳐.’ 연화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홱 몸을 돌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어서.’ 이번에는 분명했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연화는 더 생각하지 않았다. 그대로 달렸다. 나뭇가지가 얼굴을 스치고, 돌부리에 발이 걸려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붉은 혼례복은 진작 진흙투성이가 되었고, 치맛자락 한쪽은 가시덤불에 걸려 길게 찢어졌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뒤에서 무언가 따라오고 있었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멈출 때마다 숲 전체가 숨을 죽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연화는 숨을 헐떡이며 비탈길을 내려갔다. 그때 멀리 작은 불빛이 보였다. “사람이다!” 연화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짜내 불빛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자 그곳이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낡은 사당이었다. 지붕의 기와는 반쯤 무너져 있었고, 문짝은 비뚤어져 있었다. 사당 앞에는 오래된 석등 하나가 서 있었는데, 불빛은 바로 그 안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연화는 잠시 망설였다. 이런 곳에 들어가도 괜찮을까. 하지만 뒤를 돌아보자 안개가 무섭게 밀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결국 사당 안으로 뛰어들었다. “실례합니다!” 문을 닫고 빗장을 걸었다. 그리고 문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연화는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목구멍에서는 쇠 맛이 났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그래도 일단 살아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아이고, 산신님.” 연화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신부 하나 잡겠다고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연화는 주먹밥 하나를 꺼냈다. 소담이 싸 준 것이었다. “일단 먹고 생각하자.” 그녀는 주먹밥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쌀알 사이에 소금과 깨가 들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심심하다고 투덜거렸을 음식인데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처럼 느껴졌다. 연화는 허겁지겁 주먹밥을 먹으며 사당 안을 둘러보았다. 오래된 제단이 있었다. 제단 위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인 향로와 깨진 그릇 몇 개가 놓여 있었다. 뒤편에는 나무로 만든 신상이 있었는데 얼굴 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연화는 신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했다. 보통 산신상이라면 호랑이를 거느린 노인의 모습이거나, 긴 수염을 기른 위엄 있는 사내의 모습으로 조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 신상은 달랐다.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젊은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신상의 한쪽 손에는 작은 꽃이 들려 있었다. 연화는 저도 모르게 신상 가까이 다가갔다. “산신님이신가?” 먼지를 털어 내자 신상 아래쪽에 글자가 드러났다. 하지만 대부분 닳아 없어져 읽을 수 없었다. 그 가운데 유독 선명하게 남은 글자 두 개가 있었다. 연화. 연화는 숨을 멈췄다. “……뭐?” 그녀는 눈을 비볐다. 분명 자신의 이름이었다. 연꽃 연(蓮), 꽃 화(花). 어머니가 지어 주셨다는 이름. 그런데 어째서 이 오래된 사당의 신상 아래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걸까. 연화는 손끝으로 글자를 문질렀다. 그 순간이었다. 머릿속에 낯선 장면이 스쳤다.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뜰. 검은 옷을 입은 남자. 그리고 자신과 똑같은 목소리로 웃는 여자. ‘다음에도 저를 찾아오실 건가요?’ 연화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손목의 붉은 반점이 다시 뜨거워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소매를 걷었다. 이번에는 착각이 아니었다. 꽃잎 모양의 반점 주변에 금빛 선이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손목에 작은 꽃을 그려 넣는 것 같았다. 그때 사당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사박. 사박. 느린 걸음이었다. 연화는 그대로 굳었다. 발소리는 사당 앞에서 멈췄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있느냐.” 연화는 숨을 삼켰다. 대답하지 않았다. 문밖의 남자는 잠시 기다렸다. “많이도 도망쳤구나.” 그 목소리에는 분노가 없었다. 오히려 묘하게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연화는 조심스럽게 소도를 움켜쥐었다. 산신일까. 아니면 산속에 사는 다른 요괴일까. 어느 쪽이든 지금 문을 열어 줄 생각은 없었다. “누구세요?” 연화가 물었다. 문밖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났다. “네가 오늘 만나기로 한 사람.” 연화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산신님?” “그래.” 남자가 대답했다. “네 서방이다.” 연화는 입을 벌렸다. 잠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저…… 아직 혼례 안 치렀는데요.” “알고 있다.” “그러니까 서방님은 아니시죠.” 문밖이 조용해졌다. 연화는 그 침묵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저는 산신님의 신부가 되겠다고 한 적도 없어요.” “그렇더군.” “네?” “도망가는 것을 보니 알겠더구나.” 연화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상했다. 산신이라면 자신이 도망친 것을 알고 분노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남자는 마치 재미있는 장난을 구경한 사람처럼 느긋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문을 열어라.” “싫어요.” “왜?” “잡아먹으실 거잖아요.” 이번에는 꽤 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남자가 물었다. “누가 그러더냐?” “마을 사람들이요.” “그렇군.” “…….” “내가 인간을 잡아먹는다고?” “예.” “특히 신부를?” “예.” 남자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화는 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혹시 화가 나서 돌아간 걸까.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문밖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구나.” 연화는 어이가 없었다. 재미있다고? 자신은 목숨이 걸린 문제인데? “저는 하나도 안 재미있거든요!” “그런 것 같구나.” “그러니까 그냥 돌아가세요!” “내 집에서?” 연화는 멈칫했다. “……여기가 산신님 집이에요?” “내 산이지.” “이 사당도요?” “그렇다.” “그럼 제가 나갈게요.” 연화는 벌떡 일어났다. 문밖에서 남자가 다시 웃었다. “어디로?” “산 아래로요.” “그 길은 위험하다.” “산신님보다요?” 이번에는 대답이 없었다. 연화는 빗장을 잡았다. 어차피 이대로 사당에 숨어 있어 봐야 소용없었다. 산신이 마음만 먹으면 문짝 하나쯤은 쉽게 부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문을 열고 틈을 노리는 편이 나았다. 연화는 천천히 빗장을 들어 올렸다. 끼이익. 낡은 문이 열렸다. 차가운 밤공기가 밀려들었다. 그리고 달빛 아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연화는 순간 숨을 잊었다. 남자는 검은 도포를 입고 있었다. 옷자락에는 금실로 수놓은 산과 구름 문양이 희미하게 빛났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흑발은 밤바람에 느리게 흔들렸다. 얼굴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곧게 뻗은 콧날과 선명한 턱선, 가늘고 긴 눈매에는 인간에게서 보기 어려운 서늘함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눈동자였다. 금빛.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 연화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남자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래도록.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는 사람처럼. 그러다가 아주 느리게 입꼬리를 올렸다. “찾았다.” 연화는 눈을 깜빡였다.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도망친 신부를 찾았다는 뜻일 텐데, 어째서인지 그보다 훨씬 오래된 무언가를 찾아낸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남자의 시선이 연화의 얼굴에서 머리카락으로, 다시 찢어진 혼례복과 흙투성이가 된 신발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에서 멈췄다. 금빛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다쳤느냐?” 연화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네?” “발목.” 남자가 그녀의 발을 가리켰다. 그제야 연화는 오른쪽 발목이 욱신거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탈길을 내려오다 삐끗했던 모양이었다. “안 다쳤는데요.” “절뚝이고 있다.” “원래 이렇게 걸어요.” 남자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런가.” “네.” “그럼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걸을 셈이냐?” 연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산신, 생각보다 말이 많았다. 그리고 이상하게 얄미웠다. 그때 남자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연화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그가 내민 것은 무시무시한 무기가 아니었다. 붉은 족두리였다. 연화가 산길에 버리고 온 바로 그 물건. “네 것이더군.” “…….” “머리 장식은 왜 버렸느냐?” “무거워서요.” “그렇군.” 남자는 족두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다음에는 가벼운 것으로 준비하마.” 연화는 잠시 말을 잃었다. 다음? 무슨 다음? “저기요.” “말해라.” “다음은 없는데요?”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화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저는 산신님의 신부가 될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다른 사람을 알아보시는 게…….” “싫다.” 단호한 대답이었다. 연화는 눈을 크게 떴다. “왜요?” 남자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직하게 대답했다. “이미 오래 기다렸으니까.” 연화의 가슴이 이상하게 철렁 내려앉았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사당 뒤편의 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표정이 변했다. 아주 잠깐이었다. 방금 전까지 느긋하게 웃고 있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금빛 눈동자가 숲속을 향했다. “……벌써.” 낮은 중얼거림이었다. 연화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대신 남자가 자신 쪽으로 한 걸음 다가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오지 마세요!” 남자가 멈췄다. “연화야.”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연화는 숨을 삼켰다. 이름을 알려 준 적이 없었다. 물론 산신이라면 신부의 이름쯤 알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가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어쩐지 지나치게 익숙했다. 연화는 그 감각이 무서웠다. 산신이 자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는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었다. 마치 잊어버린 무언가가 가슴 깊은 곳에서 깨어나려는 것 같았다.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리 오너라.”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그쪽은 위험하다.” “산신님 옆도 위험하거든요!” “나는 너를 해치지 않는다.”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연화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이상하게도 슬퍼 보였다. 하지만 연화는 그 이유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사당 옆으로 난 좁은 길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무 사이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조금만 달리면 남자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화는 소도를 움켜쥐었다. 남자의 시선이 잠시 그녀의 손으로 내려갔다. 그 짧은 순간. 연화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뛰었다. “안녕히 계세요!” 남자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연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발목이 아팠지만 이를 악물고 달렸다. 나뭇가지가 얼굴을 스쳤고, 찢어진 혼례복이 뒤로 길게 휘날렸다. 열 걸음. 스무 걸음. 서른 걸음. 남자가 따라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연화는 속으로 환호했다. ‘됐다!’ 정말 도망친 것이다. 산신을 눈앞에 두고도! 연화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발밑의 땅이 사라졌다. “어?” 몸이 허공으로 기울었다.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절벽이었다. 연화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잡히는 것은 허공뿐이었다. “아아악!”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죽는다. 정말 죽는다. 연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예상했던 충격은 오지 않았다. 대신 허리 아래로 단단한 팔이 감겼다. 누군가 그녀를 공중에서 받아 든 것이다. 연화는 숨을 헐떡이며 눈을 떴다. 바로 눈앞에 금빛 눈동자가 있었다. “…….”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남자는 연화를 품에 안은 채 절벽 위에 서 있었다. 검은 도포 자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연화는 자신이 어떻게 절벽 위로 돌아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허리를 받친 팔이 생각보다 단단하다는 사실과, 남자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깝다는 사실만 선명하게 느껴졌다. “……산신님.” “그래.” “저…….” “또 도망갈 것이냐?” 연화는 입술을 달싹였다. 남자의 얼굴에는 다시 희미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화가 난 기색은 없었다. 하지만 금빛 눈동자 깊은 곳에는 방금 전까지 없던 무언가가 어려 있었다. 두려움. 연화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자신이 떨어지는 순간 남자가 얼마나 놀랐는지도, 그가 자신을 받아 든 팔에 얼마나 조심스럽게 힘을 주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한 가지 사실만 생각했다. 이 산신에게 잡혔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연화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놓아주시면 안 돼요?” 남자의 눈썹이 올라갔다. “왜?” “다시 도망가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남자가 웃었다. 이번에는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연화는 황당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그래.” “제가 도망간다잖아요!” “들었다.” “그런데 왜 웃으세요?” 남자는 한참 동안 연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살아 있으니까.” 연화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이 저릿했다. 남자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연화의 발목을 살피더니 그녀를 조금 더 편안하게 안아 들었다. “가자.” “어디를요?” “집으로.” “누구 집이요?” “내 집.” 연화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싫어요!” “알고 있다.” “저 안 갈 거예요!” “그것도 알고 있다.” “그럼 내려놓으세요!”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느긋하게 웃었다. “내려놓으면 또 절벽으로 뛰어갈 것 같아서.” “이번에는 안 그럴 거거든요!” “그 말도 믿기 어렵구나.” 연화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산신은 그런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마치 오래전 잃어버린 무언가를 다시 손에 넣은 사람처럼. 그러다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연화가 고개를 들었다. “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어깨 위로 자신의 겉옷을 덮어 주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막혔다. 이상하게도 겉옷에서는 은은한 솔잎 향이 났다. 연화는 그 향기를 맡는 순간 잠시 눈을 깜빡였다. 처음 맡는 향기일 텐데. 어쩐지 아주 오래전에도 맡아 본 것 같았다. 그녀가 의아해하는 사이 남자는 몸을 돌렸다. 산 위쪽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연화는 그의 품에서 발버둥 쳤다. “산신님! 잠깐만요!” “왜 그러느냐.” “저 정말 신부 안 할 거예요!” “그래.” “혼례도 안 치를 거고요!” “그러거라.” “그리고 기회만 생기면 또 도망갈 거예요!” 남자는 걸음을 멈췄다. 연화는 긴장했다. 드디어 화를 내려나 싶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저 고개를 숙여 그녀와 눈을 맞췄다. 달빛 아래 금빛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래.” 그리고 말했다. “그럼 또 잡으러 가마.” 연화는 입을 벌렸다. “……네?” “네가 어디까지 도망가든.” 남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내가 찾아내마.” 그 말이 어쩐지 약속처럼 들렸다. 연화는 더 이상 대꾸하지 못했다. 그녀는 몰랐다. 자신을 안고 산길을 오르는 남자가 수백 년 동안 같은 꿈을 꾸었다는 것을. 붉은 혼례복을 입은 여자가 도망치는 꿈. 아무리 달려도 붙잡지 못하는 꿈. 그리고 마침내 여자의 손끝이 자신의 손에서 미끄러져 사라지는 꿈. 그 꿈의 끝에서 남자는 언제나 혼자 남았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의 품에는 따뜻한 체온이 있었다. 살아 있는 숨결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투덜거리는 여자가 있었다. “산신님, 제 말 듣고 계세요?” “듣고 있다.” “저 내려놓으시라니까요!” “발목이 나으면.” “그럼 나으면 도망가도 돼요?” 남자는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래.” 연화는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다만.” “다만?” 그가 웃었다. “도망갈 때는 밥부터 먹고 가거라.” 연화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산신은 그런 그녀를 품에 안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연화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그의 얼굴에 떠올랐던 웃음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 연화가 떨어질 뻔했던 절벽 너머. 검은 안개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안에서 아주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금빛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직은 아니다.” 그가 낮게 말했다. “이번에는 네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검은 안개가 일순 멈췄다. 그리고 이내 숲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무현은 품에 안긴 연화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곳에 있었는지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저 언제쯤 도망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듯했다. 그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애틋했다. 무현은 그녀의 어깨를 감싼 겉옷을 조금 더 여며 주었다. ‘이번에는.’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반드시 살려 낼 것이다.’ 그것이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약속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는 아직 연화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날 밤. 청운산의 산신은 도망친 신부를 찾아냈다. 그리고 산신의 신부 연화는— 다음 탈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연화는 살면서 잘생긴 사내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마을에 약재를 사러 내려오던 젊은 의원도 제법 준수한 얼굴이었고, 봄마다 장터에 나타나는 비단 상인 역시 처녀들이 뒤를 돌아볼 만큼 훤칠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을 안고 산길을 오르는 남자와 비교하자면, 그들은 그저 평범한 사내에 불과했다.문제는 이 지나치게 아름다운 남자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산신님.”“말하거라.”“저 무겁지 않으세요?”“아니.”“그럼 팔은 안 아프세요?”“아프지 않다.”“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안고 가실 수는 없잖아요.”“그렇겠지.”연화는 그제야 조금 희망을 품었다. 아무리 산신이라도 사람을 품에 안고 산길을 오르는 일이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당한 곳에서 자신을 내려놓을 테고, 그때 다시 도망칠 기회를 엿보면 되었다.그러나 이어진 대답은 그녀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다.“도착하면 내려놓으마.”“……어디에 도착하는데요?”“내 처소.”“그게 어디인데요?”“산 위에 있다.”연화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진심으로 물었다.“산신님, 혹시 제 말귀를 일부러 못 알아들으시는 거예요?”무현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그는 대답 대신 그녀를 받쳐 든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연화는 반사적으로 그의 목덜미를 붙잡았다가 곧바로 손을 떼었다. 얇은 옷깃 너머로 전해진 체온이 생각보다 따뜻했기 때문이다.산신의 몸은 얼음처럼 차갑다고 들었다.그런데 이 남자는 달랐다.그녀의 등을 받친 손바닥에서는 온기가 느껴졌고,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에서는 은은한 솔잎 향이 났다. 가까이서 보니 금빛 눈동자에는 아주 가느다란 검은 테가 둘러져 있었다. 인간의 눈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기묘할 만큼 아름다운 눈이었다.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그 눈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정신 차려, 연화야.’얼굴이 잘생겼다고 목숨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아무리 아름다운 사내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생각이라면 소용없었다.“그런데 산신님.”“이번에는
혼례날 밤, 연화는 도망치기로 했다.정확히 말하자면 도망칠 생각은 사흘 전부터 하고 있었다. 백 년에 한 번 산신에게 바칠 신부를 뽑는 제비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왔던 바로 그날부터였다.연화는 스물두 살이었다.아직 혼인도 하지 않았고, 좋아하는 사내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앞으로 살아야 할 날이 아주 많이 남아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적어도 그 빌어먹을 제비를 뽑기 전까지는 그랬다.“연화야, 고개를 조금만 들어 보거라.”늙은 침모가 그녀의 턱을 손끝으로 들어 올렸다. 연화는 얌전히 고개를 들었지만 시선만큼은 연신 창밖을 향했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산 너머로 붉은 노을이 번지기 시작했으니, 이제 반 시진쯤 지나면 산신에게 바칠 혼례 행렬이 출발할 터였다.“참으로 곱구나. 산신께서도 흡족해하시겠어.”침모는 연화의 머리에 금빛 장식이 달린 족두리를 얹으며 감탄했다. 연화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붉은 비단 위로 금실로 수놓은 봉황이 날개를 펼치고 있었고, 치맛자락에는 구름과 산봉우리 문양이 겹겹이 새겨져 있었다. 혼례복만큼은 어느 양반가 규수의 것보다도 화려했다.문제는 그 옷을 입고 가는 곳이었다.보통 혼례를 치르는 신부라면 남편이 될 사내의 집으로 가겠지만, 연화가 가야 하는 곳은 청운산 꼭대기였다. 그것도 살아 돌아온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산신의 거처였다.‘이걸 좋아해야 하나?’연화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예쁜 옷을 입혀 주고, 머리에 금비녀를 꽂아 주고, 마을에서 가장 귀한 음식을 차려 주는 이유가 모두 자신을 산신에게 바치기 위해서라니. 차라리 평소처럼 낡은 저고리에 흙 묻은 치마를 입고 약초나 캐러 다니는 편이 백배는 나았다.“침모님.”“왜 그러느냐?”“산신께서는 정말 신부를 잡아먹으신대요?”침모의 손이 멈췄다.방금 전까지 혼례복이 곱다며 웃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침모는 잠시 문밖을 살피더니 연화의 어깨를 두드렸다.“그런 불경한 말을 입에 담는 것이 아니다.”“그럼 안 잡아먹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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